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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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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0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템플기사단 상징 로고

템플 기사단은 중세 유럽의 금융 대출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오늘날 프리메이슨 조직이 전 세계의 금융, 언론, 통신사를 장악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  템플 기사단의 재산은 현대 은행업무의 기초가 되어 재산을 불린 것으로 종내는 유럽의 왕실들도 대출 받아 사용할 정도로 성장했다. 여행이 어렵고 위험하던 그 시절, 가령 암호화된 예금전표를 사용해 타 지점에서 저리의 지방통화로 재 인출해 쓸 수 있는 안전한 시스템은 일반인으로부터 아주 좋은 호응을 얻었다. 여기에서 축적된 황금은 유럽 전역의 보다 크고 유명한 도시의 템플라(Templar) 영지에 꾸준히 재분배되었다.
따라서 필립이 압수한 재산은 템플 기사단 재산의 일부(프랑스)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들과 중세 군주들이 현금을 취급하는 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가령 영국을 예로 들면, 모든 세금은 지방 영주의 세입과 함께 최종적으로 왕을 위해 거두어졌다. 그러므로 지방 수령과 법 집행관에게 납부하던 돈의 몫이 교대로 왕실 쪽으로 납부되었다.



유명 프리메이슨:자동차 왕 헨리포드&벤자민 후랭클린&2차대전 영웅 죠지마샬장군&우주 비행사 앨드린 야구선수

돈 많은 부자 영주들이 자신이 특별보호 하는 대가로 거두어들이는 세입에 대해 중세 왕은 많은 돈이 축적되어 있을 경우에 한해 그 돈을  매우 신속히 사용했다. 그럴 경우 필경 그 돈은 수많은 견고한 박스에 채워져 왕실이 있는 성 같이 지키기 좋은 곳에 운반, 보관되어 있다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중세의 왕들은 강력했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반드시 잘 교육되어 있지는 않았다. 빠리에 둥지 튼 템플라(Templar)의 풍요로움을 눈 여겨 본 프랑스의 필립 4세 같은 왕도 그들 영지에 있는 건물내부 어딘가에 엄청난 양의 보물 이 있을 거라 추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황당한 추정에 불과했다. 다음과 같은 현대의 다국적 회사의 예는 그가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계 주식시장에서 수십 억 달러를 주무르는 다국적 회사의 경우, 최고로 값비싸게 치장한 초 호화판 회의실 벽 줄줄이에 비록 당대의 대 화가들의 값진 명화로 치장했다해도 그것은 엄청난 보물창고라기보다는 실상은 종이 몇 조각으로 치장해 놓은 회의실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템플라(Templar)들이 축적한 보물은 분명히 믿지 못할 만큼 엄청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어지러운 패권시대에 그러한 엄청난 보물창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경제적, 정치적인 자살행위에 불과했을 것이다. 따라서 템플라(Templar)의 많은 재산은 그같이 한 곳에 고정된 것이 결코 아니라, 당시 꾸준히 유럽 전역을 유동적으로 돌고 있었으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인 금융서비스를 더욱 정교하게 제공하고, 비즈니스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 그 엄청난 재산을 모두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템플라(Templar)들은 거의 모든 서유럽 곳곳에 방대한 영지를 소유했으며 그곳으로부터 거두어 들여 모은 세입은 더 큰 파이낸스(공적재정)가 되어 효율성이 높은 투기(벤쳐) 산업에 투자되었다. 자금을 주무르는 책임자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희생하는 기사단원인지라 그 효율성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비록 일부 템플기사단의 주력 멤버들을 살려내는 구명대로 계산되어 주장된 감도 없지 않은 템플라(Templar)의 그 "엄청난 보물"은 막상 필립 4세는 물론 그를 제외한 그 누구도 발견한 바 없다. 그 보물을 담보로 그랜드 마스터 "자끄 드 몰라이"는 자신의 형제단원들과 휘하 가족들을 돌 볼 수 있었을 것이며, 그는 확실히 동산과 보물, 각종 값비싼 물건의 형태로 프랑스 왕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몰래 재산을 빼돌려 안전하게 지켜야 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템플라(Templar)의 엄청난 재산 가령, 방대한 농장 같은 부동산 류는 "하스퍼털러 기사단(The Hospitallers)"이라든가 그밖에 포루투갈의 "그리스도 기사단(Knights of Christ)" 및 아비뇽 교황청의 관할에 속했던 당시 서구유럽의 모든 카톨릭 군주들에게 송두리째 빼앗겼다.



유명 프리메이슨:George M. Pullman(1831-1897) cabinet maker,  sleeper car제작,  In 1867, 슬리퍼차 제작하는 Pullman 궁전차 회사 설립, Chicago의 일부인 Pullman 산업도시 개발& 코메디황제Richard B. "Red" Skelton(1913-1997)&Paul Whiteman(1890-1967) 밴드리더 재즈왕 & Denton True "Cy" Young(1867-1955) 미국 메이져리그 야구 피쳐선수로 22년간 511 게임 승리.  유명한 "Cy" Young 상은 그를 기리는 것.


템플라(Templar)들의 보물은 아주 다양한 형태여서 태양아래 빛을 발하는 금, 은 등의 보물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항해가였으며, 최상의 유능한 자본가였고,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건축업자인 동시에, 당대에 가장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룬 학자들이었다.  1307년에 자끄 드 몰라이가 지키려 염원했던 보물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프랑스 템플라(Templar)의 5분의4가 어떻게 해서라도 밀항해 빠져나가려 했거나 또는 그렇지 않으면 필립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피한 이유중의 바로 하나이다.
마침내, 템플라(Templar)들의 많은 전문적 기술이 씨를 뿌리기 시작했으며, 신대륙을 발견할 지도들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항해에 대한 전문지식과 탐험가에게 필요한 일반 수학적인 기술이 빛을 발해 신대륙 탐험에 절대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양(洋)의 동서를 하나로 묶어주면서 그동안 분리된 동서양 신명세계의 길을 하나로 틔우도록 다리를 놓은 장본인은 바로 다름아닌 이들이었다.
뿐 만 아니라 그들은 유럽과 성지에서 그들의 모험을 시작한 바로 그 옛날부터, 예루살렘에서 주목할 만한 발견을 했다. 서양에는 템플라(Templar)들이 성배(聖杯)라든가, 계약의 궤(모세의 십계명 판을 넣은 궤)라든가, 그리스도 성체라든가, 세례요한의 머리라든가, 보다 덜 실체적인 보물을 발견했다는 풍부한 전설들이 수없이 많으며 이에 대한 최근의 책 만 해도 부지기수다. 보물섬에 대한 전설적인 무용담을 비롯해 서양인의 모든 관습과 문화, 사고유형의 특징을 결정지어 준 것은 바로 프랑스 필립왕 르벨에 의한 템플기사단 박해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작가인 크리스토퍼 나이트(Christopher Knight), 로버트 로마스(Robert Lomas)에 의하면, 템플라(Templar)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굴한 부장품들이 스코틀랜드 주도 에딘버러(Edinburgh)에 있는 로슬린 채플(Rosslyn Chapel)의 마룻돌 아래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이 저장땅굴이 기독교의 실제성격과 성서적인 중요성을 설명해 주리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탐욕의 꿈을 넘어선 소중한 그러한 보물 은닉장소가 곧 있을 특종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고고학자를 동원해서 로슬린 채플의 마룻바닥을 들어내도록 허락을 받고 과거를 확인하면 사실은 즉시 밝혀진다.  

그러나 많은 기록과 다양한 보물이 한때 로슬린 채플 아래 놓여져 있었었다는 믿음에 대해 반론하나 없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것이 아직도 그 안에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럽전역에는 각종 부장품 에이전시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러한 자료, 보물들을 감추고 있는 은닉장소가 아직도 로슬린 채플의 옛 집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프랑스 남부에 템플기사단의 근거지로 알려진 한 작은 마을이 있다. 카타콤베의 마을로 수많은 미로형 동굴 주거지가 산재한 "랑느-르-샤또(Rennes-Le-Chateau)"라는 이름의 이 마을은 템플라(Templar)의 보물과 관련해 거의 10 여권 이상의 연구서에 이미 언급된 유명한 마을이다. 이러한 책 중 이에 대해 가장 상세히 언급한 책이 한국에서도 이미 80년대 초에 소개 된 적이 있었던 「성혈(聖血)과 성배(聖杯)(The Holy Blood and Holy Grail) Baigent, Leigh and Lincoln 著」라는 책과 2000년에 선보인 「신의 무덤(The tomb of God) Richard Andrews& Paul Schellenberger 著」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피를 받은 바 있는 성배(聖杯)를 가지고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랑느- 르 샤또로 온 이야기라든가(이 무렵 유태인이 대거 유입되어 유태인 집단촌이 된다), 이 곳에 도착할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예수의 아이들과 함께 임신 중이었다는 이야기, 사막의 여우 롬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 총독 빌라도가 만년에 이곳 "골(Gaul)" 지역으로 오게 된 일화, 이 곳을 점령한 북방의 메로빙가 사람들의 일화 가령, 다고베르(Dagobert) 2세가 비져가쓰 族(Visigoths:4C경 로마를 침략한 서고트족으로 이곳을 지배함)의 공주 랑느-르 샤또의 공주 지젤(Gizelle)과 결혼한 이야기, 메로빙 유력자들이 죽으면서 온갖 금은보화를 함께 매장한 이야기 등 풍부한 일화를 전한다.
이곳은 고래로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어 헤롯 안티파스, 폰티우스(본디오) 빌라도가 이곳에 유형 당한 것처럼 로마황제들이 유형지로 애용한 곳으로 험난한 역사 과정을 통해 유태인의 거주지인 "다이애스퍼러(Diaspora)"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마을에는 템플기사단의 보유지가 많이 있었으며 이 마을의 "블랑쉬포르(Blanchefort's)" 가문은 지척에 머물고 있는 가장 성공적인 그랜드 마스터 중의 한 사람에게 물자를 조달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템플라(Templar) 자신들을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는 보물을 탐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일찍이 로마를 약탈한 비져가쓰 族(Visigoths:4C경 로마를 침략한 서고트족으로 지금은 루마니아에 있다)이 지배했던 곳으로 엄청난 약탈 보물을 비축해 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마도 템플라(Templar)들은 이 보물을 발견했을 것이며, 그 뒤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더 이상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물과 관련된 주제의 연기는 그 뒤로도 모락모락 피어나 그것이 비져가쓰 族(서고트족)의 것이 되었든 아니면, 템플라(Templar)의 것이 되었든 심지어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최고사령부 마저 이 지역 곳곳을 광범위하게 조사했을 정도였다.      
"랑느-르-샤또(Rennes-Le-Chateau)"의 산이 감추고 있는 보물에 대해 오늘날 객관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마을이 수없이 조사된 바 있듯이 템플라의 보물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는 140 에이커 크기의 "오크 아일랜드(Oak island)"라는 조그마한 섬 하나가 대서양 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섬은 노바 스코시아(Nova Scotia) 동부해안 마혼느 베이(Mahone Bay)에 위치한 섬으로 1795년 다니엘 멕기니스(Daniel McGinnis)라는 10대 철부지에 의해 일약 템플라(Templar)들의 보물섬으로 떠오른 곳이다.
해적들의 보물섬 스토리를 익히 아는 소년은 섬을 배회하다가 둥글게 함몰된 곳을 발견하고 그 앞의 나무에 인위적으로 표시된 흔적을 보고 해적들이 보물을 숨기고 표시한 암호라 생각한다. 친구들을 데려온 소년은 30피트를 파고 허탕친 뒤 8년 뒤 어른이 되어 발굴단을 데리고 와서 또 90피트를 파고 허탕치고 만다.(1803)
그 뒤로 많은 시도들이 잇따르면서 누가 무엇을 묻었다는 최고의 그럴싸한 이론으로부터 윌리엄 키드(William kidd)와 같은 우스운 해적 보물섬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론이 안개처럼 피어났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심지어 셰익스피어가 문맹이었던 이래 프란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의 원고를 써서 원본 그대로를 그 곳에 묻었다는 소문까지 만들어냈다.
참고로 주간동아에 실린 다음의 기사를 참고해 보기로 하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지위론의 정체를 약간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셰익스피어 희곡, 실제 작가는 따로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진위 논쟁 불붙어 … “옥스퍼드 백작이 이름 빌려 발표한 것”

셰익스피어는 누구인가. 불멸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실은 시골뜨기 배우에 불과하며 정작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쓴 사람은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 학자들을 중심으로 셰익스피어 진위 논쟁은 끈질기게 제기돼 왔다.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동시대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말로위가 ‘진짜 셰익스피어’ 후보자로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경향과 너무도 다르다는 데 있다. 베이컨의 경험론과 ‘햄릿’ 사이에는 대체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셰익스피어파 “편파적 주장” 반박

지난 1월29일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재단에서 열린 ‘누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썼나?’라는 세미나에서는 또 한 명의 유력한 셰익스피어 후보자가 나타났다. 제17대 옥스퍼드 백작인 에드워드 드 비어(1550~1604)가 그 주인공이다. ‘뉴욕타임스’가 전하는 세미나의 내용은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다.


① 옥스퍼드 백작의 초상화. 그가 25세 때 그려진 것이다.
② 세익스피어의 초상화. 이 작품은 세익스피어가 죽은 후인 1623년에 그려졌다. 세익스피어 생전에 그려진 오리지널 작품을 모사했거나 화가의 상상력이 덧대진 그림으로 보인다.
③ 한때 세익스피어의 초상화 원본으로 알려졌던 그림. 그러나 모델의 옷 모양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초상의 진짜 모델은 옥스퍼드 백작이라는 것이 옥스퍼드 파의 주장이다.

옥스퍼드 백작 설을 지지하는 ‘옥스퍼드파(派)’는 옥스퍼드 백작의 생애와 셰익스피어 작품의 여러 군데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셰익스피어파’는 셰익스피어 작품 중 적잖은 수가 옥스퍼드 백작이 사망한 후인 1604년에 쓰였다는 점을 들며 이 주장이 허구라고 말한다. 옥스퍼드파인 찰턴 오그번은 ‘의문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저서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쓰인 날짜들이 대부분 정확하지 않다며 옥스퍼드 백작 설을 지지했다. 또 다른 옥스퍼드파인 앨프레드 허비지의 주장에 따르면, 확실하게 1604년 이후 쓰인 작품은 ‘템페스트’와 ‘헨리 8세’ 단 두 편에 불과하다는 것. 옥스퍼드 백작은 당시 영국 재상이던 윌리엄 세실의 친척으로 명문가 출신이다. 그는 별다른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셰익스피어와는 달리 고전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할 때는 베로나 등 셰익스피어 작품의 무대가 된 도시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매년 1000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5억원)의 연봉을 받을 만큼 신임받는 신하였다.

1660년대에 쓰인 셰익스피어에 대한 초기 기록을 보면 셰익스피어는 매년 1000파운드 정도의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 금액은 옥스퍼드 백작이 왕실로부터 받은 금액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당시 셰익스피어는 극장에 투자하는 투자자였고, 옥스퍼드 백작이 그의 이름을 빌려 희곡을 발표했다는 것이 옥스퍼드파의 주장이다.

사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진위 논쟁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785년 제임스 윌못이라는 목사는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쓰인 원고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데 의문을 품었다. 1920년대에 토머스 소니는 이 문제를 찬찬히 훑어보다 셰익스피어 작품과 딱 들어맞는 사람이 옥스퍼드 백작임을 간파했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가톨릭을 선호하는 귀족적 성향, 여성에 대한 기묘한 애증,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 그리고 음악과 스포츠를 좋아하는 점 등 셰익스피어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성향은 모두 옥스퍼드 백작의 취향과 동일하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등장인물을 자주 정신분석에 동원했던 지그문트 프로이드 역시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이 그 작품과 공통점이 거의 없는 반면, 옥스퍼드 백작은 모든 점에서 일치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기존 셰익스피어파의 입장도 만만치 않다. ‘셰익스피어, 그는 누구인가?’를 쓴 리처드 워런은 스미스소니언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옥스퍼드파의 주장은 모두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 옥스퍼드 백작이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썼다면, 초판본에 옥스퍼드 백작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일 패스터 박사 역시 “신분이 미천하고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희곡의 저자일 수 없다는 것은 지나치게 편파적인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약간의 신봉자를 얻고 있는 생각과 주장이 하나 있다. 템플라(Templar)들이 그들의 엄청난 재산인 금, 은, 보석을 대서양 건너로 가져가 200피트 깊이 구덩이에 묻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이론은 템플라(Templar)들의 건축기술만이 누군가 그 입구를 찾으려 하면 매번 그 구덩이를 물로 휩쓸어 가도록 하는 정교한 관개시설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단의 해적 떼들이 그러한 뛰어난 부비트랩을 만들었다기 보다 템플라(Templar)들이 그것을 지휘감독해 만든 것이 보다 논리적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템플기사단이 신봉하는 순수 경제학과 자본주의를 생각해 보면 유동성 자본을 굴려야 할 그들이 보물을 고정자산으로 묻었다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템플라(Templar)들은 유럽 전역에 있는 자신들의 영지로 되돌아갔다. 이곳에는 더 이상 수행해야 할 성전(聖戰)은 없었다. 그들은 두 번째 주특기인 재(財)테크에 나섰다. 돈을 굴려서 더 큰돈을 만들어 전 유럽을 먹는 것. 그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안전한 방법으로 대출해 주는 자본주의적인 금융대출은 잘 알려진 성지(聖地) 손실의 희생양과 결부되어 널리 유럽대중의 인기를 잃는 촉매제가 되었다. 1291년부터 1307년 체포에 이르기까지 템플기사단은 영주, 군주 가릴 것 없이 계속해서 자금을 대출해주고 이익을 취했다. 엄청난 자금을 대출받은 군주 중의 한 사람이 앞서 밝힌 대로 바로 프랑스 군주 필립 르 벨(Philip Le Bel)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지고 있는 채무를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시키기 위해 템플기사단을 폐쇄조치 했다.
  폐쇄조치 당시 템플라(Templar)들이 굴리던 모든 자금은 한 푼의 이자도 못 받고 허공으로 날라 갔으며 결코 회수되지 않았다. 그랜드 마스터 쟈끄 드 몰라이는 사전에 체포소식을 알고 있었다. 1307년 9월 14일 체포명령이 이루어졌으며, 10월 13일 조직은 폐쇄조치 되었다. 따라서 잘해야 4 주정도 밖에는 조치를 취할 시간이 없었다. 템플라(Templar)들의 긴급체포라는 위급한 상황을 당면한 그들로서는 모종의 비상경계령을 내려 모든 대출자금을 회수하려 했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그들의 보호막인 돈을 날리는 것 보다 처분 가능한 모든 유동성 자산, 주조화폐, 금, 보석류, 처분하기 용이한 상품 등을 총동원해 비축했으며, 박해의 칼날이 떨어지기 전 그 지역을 탈출했을까? 그리하여 그들은 왕실 관계자의 관심 속에 유동자금만을 남긴 채 멀리 떨어진 모종의 섬 깊숙이 재산을 파묻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을까? 다음의 예를 보면 그렇지 않다.
본질적으로 템플라(Templar)들은 자신들의 생명인 무기를 팔아 주판을 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제 주판은 생명이다. 한 대형은행이 있어 갑자기 몇 개의 지점을 폐쇄조치 한다면 그 은행의 CEO는 과연 폐쇄조치 된 지점의 몇 개 구좌를 꿀꺽하거나 그 구좌를 서까래 밑의 신발 박스나 매트리스에 숨길 수 있을까? 이러한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실제로 돈은 폐쇄되지 않은 다른 지점으로 넘어가 최근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훨씬 더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그들이 임의처분 하도록 남긴 재산에 대해 템플라(Templar)들도 똑같이 활용했다. 자신들이 연구하는 템플기사단 제도의 기풍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자 가정에 불과한 템플라(Templar)들의 보물에 대해 최고의 전문가들까지 나서 구구절절 하게 이론을 늘어놓는 것은 실로 서양인이 안고있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템플라(Templar)의 보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하며 1307년 10월 이전 수 주 내에 혐의사지 않는 적은 분량으로 나누어져 반출되어졌으리라는 추측이 선다. 템플라(Templar)들이 거의 완벽하게 생존한 것에 대해 아주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는 듯이 보이는 곳이 특별히 한군데 있다. 그 곳은 바로 스코틀랜드 로슬린 채플이다.  로슬린 채플은 템플라(Templar)들의 비밀을 간직한 최고의 후보지이다. 비록 그 채플(예배당)의 구조라든가 전설적인 조각, 지리학적인 위치 등이 템플라(Templar)들의 보물창고로 공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독하는데는 수 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템플라(Templar)들의 유산은 그들의 경제적 이노베이션(기술혁신), 엔지니어링, 항해술, 탐험,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가장 깊이 간직한 신념이며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들 모두의 진짜배기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알랜(Allan)이 저술한 「성배(聖杯)와 장미(The Grail and the Rose)」역시 이에 대해 기막히게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음으로 양으로 서양인의 관습과 문화,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템플기사단을 둘러싼 이야기는 현대 프리메이슨의 성격과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약간 장황한 것 같지만 박해과정과 탈출과정의 상황을 부연, 설명해 보기로 한다. 압제를 피해 프랑스를 탈출한 템플라(Templar)들 중 가장 손쉽게 탈출했으면서도 종적이 묘연한 그룹이 있다. 바로 다름 아닌 프랑스 국왕 "필립 르 벨(Philip Le Bel)"이 급습한 1307년 10월 13일의 금요일 바로 직전 프랑스의 대서양 항구인 "라 로셸(La Rochell)"에 정박중인 템플기사단 함대이다.

이 함대는  당시 법정소송에서 증언한 "쟝 드 샬롱(Jean de Chalon)"의 법정증언에 의하면 빠리의 영주 "제라르 드 빌리에(Gerard de Villiers)"가 50마리의 말과 18척의 갤리선(Galley:노예선)으로 탈출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18 척의 갤리선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함대는 이 증언 외에는 급습 당일 바로 전에 어디로 갔는지 몇 척으로 이루어졌는지 밝혀진 바 없다. 이 탈출과 관련해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템플기사단 사령부의 탈출계획이 "필립 르 벨(Philip Le Bel)"의 급습계획보다 한 수 위였으리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종적이 묘연한 템플라(Templar) 함대의 향방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템플라(Templar) 연구가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즉, 템플라(Templar)의 그랜드 마스터 쟈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가 체포당일 국왕 필립의 제수(弟嫂)를 위한 혼인 휘장 운반 역을 맡았던 것을 이유로 임박한 체포계획을 전혀 몰랐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러한 단서는 그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연구가들에게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국왕 필립 르 벨은 쟈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빠리로 불렀다. 필립의 바램에 상응해 무엇이든 해야했던 그는 친한 단원들에게 전문을 보내 자신이 눈치챈 급습계획을 공표했다. 심지어 쟈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가 체포 될 줄을 알고 스스로 체포에 순응했을 가능성도 있다. 연구가들은 단원들 상호간에 서로 상부상조하도록 명하는 내규을 갖고있는 템플라(Templar) 교단의 특성을 들어 이 같은 주장을 한다.
교단 최고의 지도자 그랜드 마스터로 조직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면 자신의 생명도 버려야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러나 비록 쟈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가 체포가 임박한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철저히 조직이 붕괴되고 자신이 고통받다 죽으리라 생각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투옥기간이 길지 않으며, 고발 당사자인 국왕 지근에 있으면 자신의 동료들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만일 1307년 템플라(Templar) 교단의 그랜드 마스터 쟈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가 자신의 조직이 급습 받을 줄 알았다면 그리고 자기 동료들을 피신시킬 첫 번째 가능한 탈출 경로를 알고 있었다면 그 곳은 "라 로셸(La Rochelle)"이 될 것이다.
1307년 10월 13일 이후 수 주 안에 프랑스에서 잡힌 템플라(Templar) 교단의 인사는 단지 620 명에 불과하다. "마이클 베이전트(Michael Baigent)", "리차드 레이(Richard leigh)" 같은 저자는 1307년 당시 프랑스에 한 두 종류 부류로 볼 수 있는 약 3000 명 정도의 템플라 교단 인사가 있었다고 추산한다. 믿지 못하겠지만 5분의 4는 도망가고 겨우 5분의 1만 사로잡힌 것이다.
많은 연구가들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1307년 대 습격의 날 바로 몇 일 이내에 2000여 명의 중무장한 템플라들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 자신들의 수행원, 하인, 말, 수레, 가솔들을 거느리고 일제히 "라 로셸(La Rochelle)"로 떠났을 경우와 만일 그러한 대탈출이 벌어졌다면 모든 도로 위에 촘촘히 세워 둔 기마병 보초들이 "라 로셸(La Rochelle)"항구로 가는 그들 소식을 즉시 알고 국왕 필립 4세에게 보고했을 것이며 그와 같은 경우 그는 분명히 미리 손을 써서 대탈출을 봉쇄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단지 계속되는 미스터리 자체만을 위해서라면, 수십 척의 화물선들이 "라 로셸" 항에서 깃발을 휘날리며 역사 위에 당당하게 종적을 남기며  중무장한 대 범선 갤리온(Galleon:스페인 3층 갑판 대범선)들의 호위를 받으며 출항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아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단순히 그런 식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 엄청난 함대가 포루투갈이나 남부 스페인 등 남쪽으로 항해해 갔다면 누군가 그 사실을 보고했을 것이다. 만일 "베이전트(Baigent)", "레이(leigh)"가 암시하고 있듯이 함대 대부분이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에 상륙하기 전에 잉글랜드 남부 해안과 아일랜드 서쪽 해안을 항해했다면, 당시 그곳 항로들을 정기적으로 순찰하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가 몰랐을 리 없다. 단지 만일 전 함대가 프랑스 필립 왕의 감시선들을 따돌리면서, 1307년 10월 12일 목요일 일몰 무렵 정서(正西)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면 사실상 그와 같이 역사기록에서 말끔히 종적을 감출 수 있긴 하다. 이 시나리오는 상정해 볼만한 것이다.
   한편 템플라들의 엄청난 재산이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은광에서 채굴되어 배로 유럽에 반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뒤 대서양을 오고가는 항해에 템플라들이 그린 항해도가 분명히 쓰여졌다. 템플라들이 콜럼부스에 앞서 정기적으로 대서양을 건넌 것은 거의 확실하다. 심지어 템플라들이 미국 동부해안 지대에 매우 익숙했다고 추정하면 그러한 엄청난 함대가 그 곳 원주민의 전통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기록 하나 없이 지금의 미합중국 또는 아메리카 동부해안 어느 곳에 대거 상륙했을 것 같지는 않다.
멕시코에 근거지를 둔 방대한 아즈테크(Aztecs) 문명은 1307년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동부에서 온 백색 신(White God:백인)이 그곳에 문명을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템플라들의 대탈출로부터 불과 일세기 반 뒤에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다.  매우 발전된 템플라들의 기술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무시무시한 전쟁기술과 그러한 방대한 규모의 함대를 함께 상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엄청나게 전체 아즈테크 문명에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템플라들이 어떤 뚝 떨어진 외진 곳 또는 캐나다의 아주 북쪽에 상륙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것 역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유럽인이 종적 하나 남기지 않고 들어왔다 사라졌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15세기 신대륙발견에 이은 유럽인의 쇄도에 앞서 그 지역 풍광에 눈에 띄는 흔적하나 남기지 못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필그림 화더스(Pilgrim Fathers)가  발견한 바 있듯이 아메리카 동부 해안 케이프 코드(Cape cod)에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유럽출신의 선 정착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곳과 아마도 더 있을 다른 곳은 지극히 제한적인 케이스라는 지적이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분명히 다른 모습이나 형태로 생존했을 것이다. 대서양의 유럽 쪽으로 되돌아가 템플라 함대 전부가 스코틀랜드로 머리를 돌렸다는 생각 역시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이 역시 프랑스 국왕 필립 르 벨과  해협을 지키고 있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왕의 감시망을 벗어났을지 몰라도 그 정도 규모의 움직임이라면 어떤 류의 연대 기록자나 역사가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상륙소식을 전했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류의 기록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템플기사단은 1314년에 있었던 배녹번(Bannockburn)의 경우와 같이 영국인과의 전쟁에 있어 로버트 부르스(Robert the Bruce)를 후원했다. 그러나 그 예측 못할 사건은 단 한 사람의 템플 기사도 관련될 필요가 없었다. 템플라 교단은 스코틀랜드 자체만으로도 몹시 강했다. 그곳은 바로 교단의 시초부터 영국내의 자생적인 고향이었다.
그것은 잉글랜드에서 훨씬 강했다. 개인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템플기사단을 공격할 어떠한 의도도 보이지 않던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우유부단한 성향은 그들 대다수로 하여금 스코틀랜드 국경너머로 들어가게 했다. 사실상 경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바람이 없이, 만일 모든 행방불명된 프랑스, 영국, 스코티시 템플 기사단이 1314년 배녹번(Bannockburn)에서 함께 모여 영국인 앞에서 그 군대를 정렬 포진시켰다면 영국인들이 단 한 발의 활이라도 쏠 정도로 벌판에 남아 있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물론 이러한 모든 추정은 프랑스 템플라들이 자신들의 500여 프랑스 영지로부터 국왕 필립이 무엇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감쪽같이 상륙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가능한 말이다.  
이러한 모든 정황을 고려하면 행방불명된 미궁속의 템플라 함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307년 무렵의 템플기사단의 성격은 대단히 혁신적이며 다이나믹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밀고 들어가 장사하는 기회를 노려 시종 힘을 키우려 한 그룹이었다. 가령 교단에 대한 개인적인 맹서에 집착하는 경우 등에서 보듯이 템플 교단이 변질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으로 조직이 붕괴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는 없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러한 엄청난 함대를 항구에 정박시키고 있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확실한 것은 이들 선박들은 정박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며 오히려 템플라 교단의 재정적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계속 부지런히 항해 중이었으리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이다. 만약 라 로셸(La Rochelle) 항에 정박 중이었다 해도 그렇게 엄청난 함대가 아니라 적당한 규모의 함대였을 것이다.  
템플기사단은 성지를 잃은 뒤 1307년까지 운영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회교도나 산적으로부터 고객을 보호하고 화물 수송열차를 온갖 산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호송하는 등 온갖 상품과 인력을 호송하는 택배 사업과 경호사업을 벌이고 구라파 전역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현대적 마인드의 금융 대출업을 벌였다.
이런 면에서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자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가 당시 정치적인 흐름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사실과 평화로운 군주와 전쟁의 군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필립으로부터 템플 기사단을 "하스퍼털러 기사단(The Hospitallers)"과 연합하라는 압력에 대해 강인하게 저항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로 호출 당했을 때 강하게 의구심을 품었으며 막상 급습을 당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프랑스로의 호출령에 반대했다면 그는 필립 르 벨과 교황 끌를망(클레멘트)의 분노를 초래했을지 모른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동이 임박한 폭풍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며, 그러한 결정적인 시기에 프랑스 방문의 실패는 아마도 템플라들이 충분히 조직되기 전에 필립으로 하여금 액션을 취하도록 자극했을 것으로 보이는 미래에 대한 그의 예견을 급히 타전하게 했을 것이다.
모든 개연성이 주의깊게 놓인 속에서 그가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 계획은 행동에 들어갔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수많은 방법으로 템플 기사단은 자신들의 영지를 벗어나 최종적으로 10월의 대학살에 앞서 위험을 벗어났다. 어떤 경우에서도 그 탈출은 야단법석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혐의점도 포착되질 않았다. 이같이 해서 파리 외곽에 있는 대부분의 영지는 최소한의 기간요원으로 감축되었으며 이들은 1307년 10월 13일 새벽 대 공습 이후 바빠진 필립을 지키기 위해 고의로 뒤에 남았다.
라 로셸(La Rochell) 항에 있던 단원들과 상품들은 일부는 포루투갈로 일부는 스페인,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혐의를 사지 않게 수 주일에 걸쳐 은밀히 진행되었다. 서서히 그리고 대 단위적인 대탈출로 말미암아 영지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았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13일 대학살이 시작되었을 때 전국각지의 템플기사단은 항거 한 번 하지 못했다.  만일 필립 르 벨이 일격에 자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와 그가 이끌던 템플 기사단 전체를 사로잡았다면, 많은 역사가들이 아직도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왜 프랑스 템플라들의 5분의 1만이 일찍이 사로잡혔는가?
  다음의 사례는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파리의 영지 또는 파리에 아주 가까운 영지 출신의 템플 기사단 2명이 1307년 10월 13일 운명의 바로 그날 직후 당시 프랑스 영토 극동 변두리 불과 수마일 외곽에 위치한 쇼몽(Chaumont)에서 사로 잡혔다. 이러한 영역한계는 바로 탈출한 템플기사단의 탈출경로를 시사하는 것으로 5분의 4가 탈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자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의 계획은 비록 자신을 포함해 파리 영지 대부분의 간부를 희생시키고 심문당하게 했지만 영리하고 치밀했다. 그는 원대하고도 대국적으로 조직을 살리기 위해 애초부터 탈출하지 못한 모든 불운한 간부들과 함께 자신이 희생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라 로셸(La Rochelle)"항에 정박중인 배들이 1307년 10월 13일 새벽, 초토화된 것은 확실하다.  자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 역시 필립 측에 대한 공포를 진정시킬 때까지 최소한 충분한 정도의 템플 기사단원은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라 로셸(La Rochelle)"항에 정박한 템플라 함대에 프랑스 템플 기사단의 대부분이 타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지극히 로맨틱하고 매력적으로 보일진 몰라도 이는 완전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가 계획초기부터 미리 알고있는 사건인 1307년 10월 13일 대학살의 날이 다가오자 미처 탈출하지 못한 남은 배들은 닻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필립왕을 에워싼 고위층들과 줄을 대고 있는 고정 스파이가 있어서 템플 기사단 박멸 계획을 사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 "라 로셸(La Rochelle)"항의 정황을 보고할 필립의 어떠한 사자(使者)도 이틀 안에 파리에 도착할 수 없었다.
탈출경로를 통해 그들이 지속적으로 말을 타고 가게 허용하는가 하면 말떼를 거느리고 가는 것을 허용하고 심지어 그들 잔존 선박들이 프랑스 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갈 충분한 시간을 남긴 채 이틀 안에 파리에 도착할 수 없었다.
"라 로셸(La Rochelle)"항에서 그들은 세심한 지침에 따라 소그룹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다른 곳에 상륙했다. 지중해는 이들 템플라들에 대해 쌍수를 들어 환영할 항구들로 넘쳐났다. 대부분의 템플라 상인들과 전함들은 모(母) 조직의 파괴 뒤에 살아남은 템플라 단원들에 의해 흡수되었다.
단체 이름을 바꾸고 깃발모양 만 살짝 바꾼 채 그들은 비록 파리의 감옥 안에서 시들어가고 있기는 했어도 자신의 원격조정에 의해 이기적인 필립 르 벨을 속여 완전히 물먹게 만들어 최소한도나마 만족할 수 있었던 자끄 드 몰라이의 전반적인 정책을 계속해 수행해야 했다.
이 기간 중 지하로 스며든 적지 않은 템플기사단 인원이 자신들을 탄압한 국가와 교회 그리고 그에 동조한 학자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며 더러는 스코틀랜드, 포루투갈로 더러는 독일로 탈출해 스며들었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비밀조직으로 화하여 영국에서 1348년 가터교단, 프랑스에서 1352년 성단(星團), 1430년 부르고뉴 공작이 만든 금양모단(金羊毛團), 1534년 로욜라의 제수이트 교단이 만들어졌다. 현대 프리메이슨의 기초는 스코틀랜드파가 닦은 것이며 포루투갈로 건너간 템플 기사단은 아메리카 대륙을 왕래하며 오늘의 미국을 건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는데 컬럼버스보다 훨씬 앞선 1308년 초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본래 고대 이집트인들은 금성을 메리카(Merika)라 했으며, 금성이 바다너머 서쪽으로 지는 곳 즉, 수평선 너머의 땅도 메리카라 불렀다.(이리유카바 최 「그림자정부」)
따라서 신대륙을 발견한 프랑스 출신 포루투갈 프리메이슨들은 프랑스어로 라 메리카(La Merika)라 한 것이다. 라(La)는 정관사 The이다. 후일 영국인 청교도들에 의해 라(La)의 L이 없어지고 아메리카로 되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의 역사이다. 이탈리아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아메리카라고 이름을 땄다는 밑도 끝도 없는 기존의 역사보다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가. 하다못해 프리메이슨과의 연관은 그만두고라도 이미 컬럼부스의 발견 보다 무려 500년 전에 노르만인들은 아메리카의 래브라도(Labrador), 뉴펀들랜드(Newfounfland), 뉴잉글랜드(New England)를 발견했다.
  아무튼 미국의 프리메이슨 권위자 애디슨(Addison)이 메이슨 조직의 기원연대를 성지순례자를 보호하고 안내하기 위한 목적으로 9 명의 기사들이 신성한 전우애로 참전한 예루살렘 전투에서 명예 제대한  A.D. 1113년으로 잡은데 대해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견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처음 기록된 프리메이슨 역사와 자끄 드 몰라이의 템플기사단의 사이에는 서로를 연계시켜 생각할 어떠한 기록과 문서가 없다는 점에서 상호간에 6백 여년의 공백이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유명한 메이슨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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