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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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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1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템플 기사단의 프리메이슨 단원 임명장이 1769년 8월 28일 보스톤 롯찌(Lodge)에서 문서상으로 처음 발행되었다. 그 때에 사용된 의식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또는 그에 대한 선례가 어디에서 왔는지가 메이슨 조직과 관련해 어떠한 명확한 해결 실마리 하나 발견되지 않은 많은 미스터리 중의 하나이다. 비록 아일랜드에서는 아마도 그보다 수 년 전에 서훈사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톤 롯찌 의식 이후 10년이 지날 때까지, 영국에서 지원 후보자에게 프리메이슨 종단의 서훈(敍勳)이 수여된 적이 없음은 확실하다.    
템플 기사단의 프리메이슨 조직은 겉으로 내세운 독특한 기독교적 성격 때문에 즉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대중에게 그 조직의 목적은 예수의 가르침을 불멸의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 조직은 군사조직의 형태와 어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나, 의식(儀式)의 신성한 성격은 그저 전술적인 명령체계에 불과한 군사적 성격과는 완전히 달랐다. 19세기 초에 아메리카 합중국 몇 개 주안에 비밀결사 지부의 大진지(Grand encampment)가 생겨났다. 그리고 1816년에 미합중국의 템플 기사단 일반 大진지(General grand encampment)가 설치됐다.


뉴욕의 프리메이슨 그랜드 롯찌&M.W  Carl Fitje,Grand Master of Masons in the State of New York


그 후 지상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그들 조직이 자리잡을 때까지 그들 조직원의 수는 수없이 복제, 증식되었다. 다양한 메이슨 조직 각자는 단계에 따라 롯찌(Lodge:집회성전), 챕터(Chapter), 카운설(Council), 코맨더리(Commandery) 등이 있으며 집회는 각자 다르게 칭해 챕터의 모임은 콘보케이션(Convocations), 카운설의 모임은 어셈블리(Assemblies), 코맨더리의 모임은 콘클레이브(Conclave:교황청 추기경회의도 콘클라베인데 비밀집회를 말한다)라 부른다.
또한 법전과 조직의 정체(政體)를 법으로 제정해 통치하는 대본영(그랜드 바디) 또는 총 대본영(제너럴 그랜드 바디)의 주관 하에 소속되어 있다. 이들 조직의 대 줄기 지파  간의 알력은 없으며 감탄할 정도로 깨끗이 정제된 시스템 속에서 상호 의존적인 법률체계 아래 조화를 이루며 모든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두 개의 독립된 계급조직을 갖는다. 요크파 의식(儀式) 계급과 스코틀랜드파 의식(儀式) 계급으로 알려진 이들 조직에서는 정규적인 명령으로 계급이 수여된다. 두 파 공히 제일 하부조직인 첫 3단계 계급 1. Entered Apprentice(입문 徒弟:초심자) 2.Fellow Craft(직인) 3.Master Mason(마스터 메이슨)을 공통으로 하고 있다. 그 위의 계급은 요크파와 스코틀랜드파 둘 중 선택할 수 있다.
요크파는 이집트 신앙이 근본으로 되어 있으며 스코틀랜드파는 외형상 기독교를 내세운다.  
스코틀랜드 파는 33등급으로 최 고위직이 "대 감찰 장관 원수(군주)(Sovereign Grand Inspector General)"이고 그 다음이 "왕실비밀 최상왕자(Sublime Prince Royal Secret)" 세 번째 등급이 "대 감찰 재판관 사령관(Grand Inspector Inquisitor Commander)"이다.
한편 요크파의 최고직은 "템플 기사 계급(Order of knight Templar)" 두 번째는 "말타(몰타) 기사 계급(Order of Knight of Malta)" 세 번째는 "적십자 계급(Order of Red Cross)" 네 번째는 "로얄 아치 메이슨(Royal Arch Mason)" 다섯 번째는 "최고 마스터(사실상 마스터)(Most Excellent master)" 여섯 번째는 "노련한 마스터(Past Master)" 일곱 번째는 "감화 마스터 (Mark Master)"이다. 이 밑에 상기(上記) 공통의 3 계급이 각기 포진해 있는 것이다.
챕터의 주요간부로는 고위 성직자, 왕, 학자, 여호수아, 제루바벨, 학개를 대표하는 무리의 우두머리, 군대 장관 등이다. 챕터 다음의 카운설(Council)에는 두 계급이 있어 로얄 마스터(Royal Master)와 실렉트 마스터(Select Master)가 있으며 이들을 지휘하는 자는 3배로 저명한 마스터로, 대리자이자 주요업무 지휘자는 이스라엘 왕 솔로몬과 티레의 왕 히람, 히람 아비프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코맨더리(Commandery)에는 "템플 기사 계급(Order of knight Templar)"  "말타(몰타) 기사 계급(Order of Knight of Malta)"  "적십자 계급(Order of Red Cross)" 이 있고 이 곳의 간부로는 에머넌트 코맨더(Eminent Commander:뛰어난 사령관), 제너랄리시모(Generalissimo:소장군), 캡틴 제너럴(Captain General:지휘장군), 엑설런트 프레럿트(Excellent Prelate:최고위 성직자) 등이다.  
이들 계급을 크게 3개의 주요 계급으로 뭉텅뭉텅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상징적(Symbolic) 프리메이슨 계층 2)로얄 콘트랙트(Royal Contract) 프리메이슨 계층 3)유니버설(Universal) 프리메이슨 계층 또는 산헤드린 카운설(Sanhedrin Council)

피라밋 계급의 아래는 대부분의 추종자가 있는 상징적 프리메이슨 조직이다.
그들은 카발리스트 운동의 보병들이다. 로얄 콘트랙트 조직원은 조직의 중간운영자로 간주되며 유니버설 조직원 또는 산헤드린 회의 간부들은 피라밋의 정점, 첨단이다. 그들은 세계전역의 조직원을 관장한다. 이들 세 부류의 주요 계급층은 전반적인 카발리스트 목적에 있어 다른 기능들을 수행한다. 마치 군대 조직과 같이 한 개인이나 보병이 위에서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상징적 프리메이슨 조직 계급은 신입회원이 처음 밟는 최하위 계급으로 기독교인, 회교도 등 비 유태인이 주로 받는 계급이다. 신입자 또는 새 개종자는 상징적 조직 계급으로 편성되는데 새로운 멤버는 입문 트레이닝과 조직에 대한 첫 번째 피의 맹서를 위해 블루 롯찌(Lodge)로 입소한다.
신입자는 자신이 선택한 성서 위에 롯찌(Lodge)에서 들은 모든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한다. 그는 또한 롯찌의 어떠한 비밀이나 프리메이슨 조직의 비밀을 누설할 경우, 메이슨 동지 단원들이 그의 목을 찢을 권리가 있음을 코란, 성서 위에 맹세한다. 블루 롯찌는 1단계에서 시작해 3단계에서 끝난다.
신입자는 승진을 위해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단원에게 봉사한다. 롯찌 단원은 높은 계급의 단원이 직접 내린 어떠한 명령도 거부할 수 없다. 메이슨 단원이 승진한 뒤에는 입문식 의례와 롯찌의 비밀에 대해 더 많이 배운다. 최종적으로 그는 마스터 메이슨이 되기 위해 카발라를 마스터해야 한다.
3번째 계급으로 승진할 기회가 되면 그에게 마스터 메이슨이란 타이틀이 붙여진다. 그는 이제 블루 롯찌를 졸업하고 요크파와 스코틀랜드파 중 추종해야 할 지파를 선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의 지파는 통합된 프리메이슨 조직의 지파이다.
한때 요크파와 스코틀랜드 파 안에서 메이슨 단원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단원에게 봉사하고 승진하기 위해 노력한다. 고위 메이슨 단원은 하위 메이슨 단원에게 롯찌에 대해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롯찌에 대한 어떠한 비밀도 누설시키지 않는 한,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다. 메이슨 단원은 본질적으로 롯찌에 대한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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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슨 단원이 꼭대기로 승진하게 되면 32 단계 계급에서 하나의 옵션(선택권)을 갖는다. 32번째(위에서 두 번째) 계급에 도달한 사람은 수많은 회교사원 롯찌 중 하나의 일원이 또한 될 수 있다. 카발리스트 운동이 이슬람을 기독교에 이은 적으로 삼은 이래, 사상성을 수없이 검증 받은 고위간부로 하여금 회교사원을 거느리게 하는 이러한 시스템은 회교를 비웃는 정책을 타겟으로 삼음과 동시에 메이슨 단원으로 하여금 적을 이해하도록 훈련시키는 제도이다.
32단계 계급의 메이슨 단원은 이제 그랜드 마스터의 타이틀을 가진 33번째 최고위 명예직으로 또한 승진할 수 있다. 33위 그랜드 마스터는 모든 롯찌(Lodge)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기독교나 회교도와 같이 비 유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 고위직이다.
피라밋 조직의 중간계층인 로얄 콘트랙트 계층은 33위 최고위직을 추종하는 계급을 포함하며 3명의 우두머리로 지명된 제루바벨(Zerubbabel), 죠슈아(Joshua:여호수아), 해가이(Haggai:학개)등 'Z.J.H'에 의해 승인된다. 이 계층의 멤버쉽은 일반적으로 프리메이슨 교단을 추종하고 종사하는 왕실소속 카발리스트 유태인에게 예약되어 있다. 이 계층의 멤버들은 하나의 롯찌 혹은 교구 또는 국가를 넘나드는 많은 롯찌(Lodge)에 대해 책임이 있다. 각 롯찌의 다양한 그랜드 마스터는 이 계층에 명령을 내린다.
유니버설 계층은 최 고위층으로 엘리트 산헤드린 카운설(Sanhedrin Council:산헤드린은 고대 이스라엘 의회 겸 법원 역할을 한 평의회)로도 불린다. 유니버설 롯찌의 오리지날 멤버는 이스라엘 12부족을 각각 대표하는 것으로 주장되는 12명의 카발리스트 유태인이었으나 지금은 수 백 명이 넘는다. 이 카운설(평의회)은 개인적인 롯찌 멤버쉽과 모든 재산을 포함해, 모든 프리메이슨 운동과 단체, 조직, 세계 전역의 다양한 롯찌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롯찌의 기능은 1717년 런던의 그랜드 롯찌에 의해 채택된 AD 37년 비밀사회의 카발리스트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이다.
유니버설 롯찌 또는 산헤드린은 전 세계에 걸쳐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삶의 사회적 양상을 지배하는 세계적인 정책들에 대한 주요 지령을 내린다. 이들 지령들은 각 단원의 특정 업무라인과 권력별 포지션에 따라 로얄 콘트랙트 멤버를 통해 심볼릭 계층으로 확산되어 나아간다. 프리메이슨 조직의 각 단원은 그 지령을 실행하는데, 비록 그 지령이 혹자에게 작고 사소해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니버설 산헤드린이 추구하는 카발리스트 계획의 보다 더 원대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그들을 실행한다.
  현대 프리메이슨 조직을 이해하는데 있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조직의 기원을 제외시킬 수 없다. 이는 현대 프리메이슨 조직의 기원이 사실상 스코틀랜드파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의 기원에 대해 간단히 점검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프랑스 템플 기사단이 1307년 이후 대거 영국의 가장 북쪽에 이주했다는 것이 끊임없는 화제로 자리잡았으며 이는 당시로서도 최고의 화제였다.
그들이 스코틀랜드에 대거 이주했다는 방대한 증거들이 실재 존재하고 있다. 템플라리즘은 스코틀랜드 특유의 자생적인 것으로 곧 조직의 출발점이었다. 이 위에 프랑스 템플라들의 대거 이주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전한다.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초대 그랜드 마스터인 "위그 드 뻬이양(Hughes de Payens:이름이 보다시피 프랑스명이다)"은 로슬린(Roslin)의 "배론 헨리 성(聖) 클레어(Baron Henri St. Clair)"의 조카인 "캐서린 성(聖) 클레어(Catherine St. Clair)"와 결혼했다. 프랑스 또는  성지(聖地)를 벗어난 템플라들의 첫 번째 조직이 신클레어(Sinclair) 땅에 세워졌다.
오늘날 스코틀랜드 주도(主都) 에딘버러(Edinburgh)의 동남쪽 신전(神殿)마을인 그곳은 다소 적막한 곳으로 가파른 언덕 밑에 현재 마을의 주요도로만 알아볼 수 있을 뿐, 한때 마을 사람들이 이용했음직한 개울가 숲 속 분지에 폐허화된 옛 교회 빌딩이 둥지를 틀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템플라들은 스코틀랜드에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지방 왕실 지배자들과도 시종 가깝게 지냈고 이러한 관계는 1307년 운명의 그 날까지 동일했다. 한때 스코틀랜드의 왕관을 영국인들이 쥐고 있었으나 곧 "로버트 부르스(Robert the Bruce)"가 위태 위태하게 왕관을 유지하는 때가 왔다. 그는 비록 지금은 스코티시들의 자부심과 독립의 동의어로 통하고 있지만 본래 혈통이 스코티시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1066년에 정복자 윌리엄(William) 公과 함께 영국에 도착한 노르만(Norman)家 출신이었다. 그러나 부르스 가문은 후일 죤(John) 왕 시대에 왕실과 사이가 틀어졌으며, 그 뒤에 스코티시의 후원으로 더 잘 풀린 가문이 되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왕권에 연연하는 약간 비겁한 역으로 나오는 로버트 부르스(Robert the Bruce)는 템플라리즘을 간과했다기보다 오히려 후원 옹호했을 것으로 보이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비록 그의 성인시절의 전체 기간이 영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의미하는 스코티시 운동에 맡겨졌음에도 불과하고, 그는 강한 십자군 기질과 템플라 기질을 가졌다. 그의 기질이 그러했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자신의 심장을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군에 가져다 묻어 줄 것을 명했다.
이 과업은 "윌리엄 성(聖) 클레어 경(Sir. William de St. Clair)"과 "제임스 다글라스 경(Sir. James Douglas)"에 의해 착수되었는데, 비록 불행히도 스페인보다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결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멜로즈 대수도원(Melrose Abbey)」에 안장되었다.
  1307년 프랑스 국왕 "필립 르 벨"의 급습으로 도피한 템플기사단의 일단이 수 십년 간 "로버트 부르스" 측에 서서 영국과 싸운 사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필립의 대 토벌작전 겨우 7년 뒤에 있었던 1314년 6월 24일의 배녹번(Bannockburn) 전투다. 비록 템플기사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공식적인 사료는 없지만, 스코트족(스코티시)이 영국인을 길 안내한 것과 템플라의 백색 기사단이 전쟁의 국면을 돌리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을 이유로 많은 학자들이 이를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종적이 묘연한 템플라 함대가 1307년 10월 13일 보다 하루, 이틀 앞서 프랑스를 떠나 로버트 부르스 개인이 해상권을 관할하던 스코틀랜드에 상륙하기 전, 영국의 남부해안을 항해해 아일랜드를 순항했다는 설이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베이전트(Baigent)와 레이(Leigh) 두 저자는 13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사용된 공동묘지를 아길셔(Argyllshire)라는 곳에서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이 땅의 본래 소유자와 관리상황을 증언하는 많은 거석 기념비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있어서 지금은 "템플 우드 종합관(Temple Wood Complex)으로 알려지고 있다.
  프랑스에서 탈출한 템플라들이 스코틀랜드로 대거 이주했다는 생각은 다소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1307년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이 곳에는 강력한 템플라들이 존재했는데 이는 비교적 근자까지 살아남은 아길셔(Argyllshire) 생존자에 대한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고도 남음이 있다. 메이슨 역사학자인 고(故) "앨버트 맥키(Albert Mackey)"는 교황의 심문이 1309년 헐리루드(Hollyrood)에서 열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곳에 단지 두 명의 템플라 만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 스코티시 템플라들은 떠나가서 로버트 부르스에게 붙어 봉사했다고 주장한다. 의심할 바 없이 부르스는 1307년 이후, 포위 당한 곳으로 여분의 템플라 전사들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첫 번 째, 영국 왕 에드워드가 템플라들을 소탕하게끔 교황에게 협박받은 것처럼, 만일 그가 템플라를 박해해 소탕하지 못하면 파문 시키겠노라는 교황의 협박에 대해 그는 그리 겁먹지 않았다.
로버트 부르스는 독립된 실체로써 바로 스코틀랜드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만일 그가 영국인의 수중에 떨어지는 신세가 되었더라면 그의 삶은 실로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에게 그토록 끔찍한 기간동안 템플라에 대한 신뢰야말로 탁월한 센스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로마의 수중에서 멀어져 갔으며, 로버트 부르스는 정통종교(교황청)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로버트 왕은 아마도 끝에 가서 프랑스의 필립 왕을 아주 우려해야 하는 종류의 잠재적인 협박에 직면하고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한 왕국에 너무 많은 템플라들이 우글거리는 것이 평화시기에 모종의 저주임을 증명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무장병사가 요구되던 때 축복 못지 않은 표본이 되었다.
만일 템플라들이 실제로 우리가 믿어 온대로 그 지방에서 강력했다면, 심지어 템플라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진 로버트일지라도 그들이 장차 자신의 왕국에 잠재적인 두통거리로 등장할 거라고 내다보았을 것이다. 다소 마음내키지 않지만 비록 단 한 명의 템플 기사단도 일찍이 국경너머 북쪽에서 박해받았다는 증거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왕 로버트는 명목상이나마 템플라들에 대해 유럽인들의 행동대열에 합류했다.      
최소한 템플라리즘의 주요한 한 맥이 스코틀랜드에서 크게 성행했는데 모든 "신클레어(Sinclair)" 가문 중 가장 오래된 템플라 가(家)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이는 집에 의해 신봉되고 옹호되었다. 원래 "성(聖) 클레어(St. Clair)"는 프랑스 출신인데, "신클레어(Sinclair)" 가문은 비록 그들이 윌리엄 1세와 함께 영국에 처음으로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템플라 박해 바로 뒤, 새로운세계로의 아주 유명한 여행을 시도한 사람은 아주 강력한 권문세가인 헨리 신클레어(Henry Sinclair) 가문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명한 로슬린 채플(Rosslyn Chapel) 건축 책임자역시 바로 헨리의 손자 윌리엄 신클레어(William Sinclair)였다.
로슬린 채플은 에딘버러 남쪽 템플라 땅에 서 있다. 그 곳은 전 세계에 있는 프리메이슨들에게 아주 중요한 성지인데, 그들은 본능적으로 고딕양식과 정교한 부조, 그들 자신만의 독특한 믿음의 전례로 성지임을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듯이 보인다.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 로슬린 채플은 교회라 하기 어렵다. 그곳은 전 세계 프리메이슨들이 보고하는 각종 정보들이 넘쳐나는 곳으로 프리메이슨을 산란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가장 신빙성 있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유럽 템플라들의 몰락 이후 약 1 세기가 지나자 헨리 신클레어(Henry Sinclair)는  말하자면 예루살렘 성지에 있는 솔로몬 성전의 발굴인 템플라들의 초기 업적을 다소 반영하는 건축물을 짓고자 했다. 나이트(Knight)와 로마스(lomas) 같은 저자는 로슬린 채플이 결코 완성된 적이 없음을 증명한 바 있다. 그 채플은 실제 언제나 미완성으로 마감된 듯이 보였는데, 아마 12세기 초에 템플라들에 의해 발굴된 솔로몬 성전의 일부를 상징하는 중세기적 건축물을 의미했다.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15세기 중반까지 로슬린 채플이 만들어졌으며, 템플라리즘이 스코틀랜드에서 사멸한 것과 거리가 먼 것은 확실하다.
스코티시 프리메이슨과 템플기사단과의 커넥션은 우리가 이해하기 다소 어렵다는 점에서 이론이 분분한 문제다. 틀림없이, 런던의 그랜드 롯찌(Grand Lodge)에 있는 영국의 프리메이슨 간부들과 대표들은 아직도 둘간의 커넥션을 부인한다. 그들은 프리메이슨은 단지 18세기에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많은 증거들이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로슬린 채플 건축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종류나 혹은 또 다른 종류의 메이슨 류 롯찌(Lodge)들의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메이슨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서류로 영국의 그랜드 롯찌 보다 훨씬 앞 선 연대로 보이는 1717년 경의 문서가 다수 있다. 이들 중 하나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킬위닝(Kilwinning) 롯찌에 대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데 16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할리웰(Halliwell) 원고는 1390년까지 올라간다. 영국에 있는 그랜드 롯찌(Grand Lodge)가 왜 표면상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지는 참으로 수수께끼다. 프리메이슨의 시작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15,16 세기 유럽의 정치적 현실들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당시 템플라들은 국제적인 범법자들이었으며 심지어 스코틀랜드 마저 외형상 카톨릭의 포고령 대열에 서야만 했었다.
그러나 템플라 전통에 깊숙이 경도된 신클레어(Sinclair) 같은 가문에게 이런 상황은 간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로슬린 채플 아래에 어떠한 비밀이 기획되어 그 안에 매장되어있을 거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고딕 건축양식의 신성한 성격과 로슬린 채플의 전략적 배치구도를 조사한 앨런(Allan)이 제기한 것이다.(「The Bronze Age Computer Disc」見)
그에 의하면 이 교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경도상 배열이 정확히 39도(Megalithic(거석문화 시대) Degree)이며, 둘 사이의 원지름이 정확히 지구원주의 10분의1로 2160 해리, 거석문화 시대 용어로 하면 2196 메가리식 마일(Megalithic Mile)로 메가리식 기하학은 보통 360 도 일 때 보다 오히려 366도일 때 더 잘 적용된다.
현대 시스템인 해리(海里)와 고대 메가리식 마일 시스템은 지구 원주의 10분의 1일 때 제일 잘 조화된다. 앨런은 또 다른 곳에서 템플라들이 고대 수학의 상속자로서 항해를 하도록 끔찍이 도와준 조력자들과 상당한 친교가 있었음을 보여준 바 있다. 로슬린 채플의 위치를 정한 것이 마구잡이로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으며, 특별히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의 카피 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
윌리엄 신클레어(William Sinclair)가 로슬린 채플 아래 숨겼을지 모르는 그 무엇과 함께 앞서 설명한 모든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정황을 말해준다. 즉, 신클레어(Sinclair)家는 자신과 우편운송 템플라 선원들에게 항해를 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비밀문서를 무엇보다 특히 경험 없는 풋내기들에게 맹목적으로 전달되기를 원하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이유로 윌리엄(William)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채플을 건축할 때 함께 묻어 보관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템플라식 믿음과 신앙방식으로  윌리엄 신클레어(William Sinclair)는 비밀사회를 창조했으며 그의 스톤메이슨은 소개되었다. 궁극적으로 헌장(憲章)의 형태로 출발한 것이 그들의 무역에 대해 지속적인 후원과 독점적인 특권을 가진 메이슨 조직을 보증했으며, 실용적이라기보다는 세계적인 투기 단체가 되었다.
한편 1307년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포루투갈로 탈출한 템플라들은 "크라이스트 교단(Order of Christ)"을 새로 만들었다. 스페인, 포루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프랑스 박해 이전오래 전에 이미 템플기사단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파고 든 이후였다. 사실상 교황의 권위를 가졌던 시토 수도회(Cistercian) 대 수도원장(Abbot)인  베르나르 끌레르보(Bernard of Clairvaux)가 템플 기사단을 지지한다고 천명한 트로이 종교회의(1127) 법규를 통보 받은 이듬해, 포루투갈에서 템플기사단의 존재는 더욱 강력해졌다.
국왕 헨리크(Henrique)의 누이 산챠(Sancha)와 그 남편  페르나오 멘데스(Fernao Mendes)가 그 멤버가 되어 란그로비아(Langrovia) 성을 기증했다. 포루투갈 템플라가 급기야 왕족의 절대적인 후원까지 받는 강력한 조직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1159년엔 당시 폐허와 다름없는 체라스(Ceras) 성을 양도받았다. 포루투갈 템플라 마스터 '구알딤 빠이스(Gualdim pais)'가 그 이듬해 그 지역인 토마르(Tomar) 인근에 템플라 건축의 표준형인 8각형 성채를 지어 지금까지 '콘벤토 데 크리스토(Convento de cristo)'란 관광명소로 전해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비함과 더불어 영적인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토마르(Tomar)  인근에는 템플라 도시 토마르를 건설한  템플라 마스터 '구알딤 빠이스(Gualdim pais)'가 묻힌 '싼타 마리아 도 올리벨(Santa Maria do Olivel)'이란 템플라 채플이 있다. 이 채플 앞면 거대한 창에는 템플라를 상징하는 표시와 장미꽃 장식이 수놓아져 있는데 포루투갈 사람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심지어 미국의 모든 채플들이 바로 이 모(母) 채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포루투갈에서 템플라 교단의 종교도시에 속하는 토마르의 건설은 조직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은 컬럼부스의 세계탐험과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및 세계 곳곳의 식민지 제국주의의 불꽃을 점화하기 위한 워밍업에 불과했다. 9년 뒤 타구스(Tagus) 남부에서 점령한 모든 땅의 3분의 1을 보유하도록 허락 받았으며, 토마르 성, 카르디가(Cardiga) 성, 포즈 도 제제레(Foz do Zezere) 성을 소유하는 것을 확답 받았다.이러한 전성기는 아폰소 1,2세(Afonso 1,2)때와 산쵸 3세(Sancho 3) 의 치하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평가를 좋게 안 여긴 아폰소 3세(Afonso 3)때부터 시작해 프랑스 왕 필립 르 벨의 박해(1307) 당시 왕이었던 디니스 1세(Dinis 1:1279-1325)를 전기점으로 몰락의 찬바람을 맞는다. 디니스(Dinis) 는 그들에게 주었던 대부분의 토지와 성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소유권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인데,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여 포루투갈인에게는 '농부왕'으로 알려졌으며, 문학을 장려하여 저술도 많이 했고 리스본에 대학도 만든 장본인이다.
심지어 그는 1294년 영국의 에드워드 1세와 상업협정을 맺어 산업증진에 도움을 준 왕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치적은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산티아고(Santiago) 교단" 같은 군사적 조직을 굴복시켜 자신의 통제 아래 둔 일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군주 필립 르 벨과 그 심복 교황 끌르망(클레멘트) 5세의 박해 기간 중 그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모든 카톨릭 국가의 수장들로 하여금 템플라 조직을 면밀히 조사하라는 1308년 교황 교서의 발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디니스(Dinis) 왕과 그의 무역 파트너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템플라에 대한 이런 트집을 믿지 않은 점에서 같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결국 끌르망(클레멘트) 교황의 변덕에 고개 숙여 영국 템플라들을 체포했으며 영국의 그랜드 마스터를 런던 탑에 가두어 죽였다. 템즈 강변의 런던 탑에는 지금도 템플라 뿐 아니라 온갖 왕족들을 고문한 갖가지 형틀이 보존되어 관광객을 맞이한다. 반면 디니스(Dinis) 왕은 포루투갈의 템플라들을 체포하지 않고 교황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조직을 조사하는데 2 년을 건성으로 소비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진심으로 조사에 임했는지는 다만 추측만 할뿐이다.
1310년에 교황이 포루투갈, 카스티야(Castile), 레온(Leon), 아라곤(Aragon)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들을 심문하는데 고문이 시원챦다고 불평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 뒤로 포루투갈과 이웃 카스티야 사이에 정책공조를 하도록 하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 정책 결과 오히려 이베리아 반도 내의 모든 범죄에 대해 템플 기사단이 무죄임이 밝혀졌는데 그들의 활동은 교황청이 손수 깔아준 멍석과 긴 오지랖 속에서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바대로 1312년 3월 22일 교황이 발(發)한 첫 번째 교서 "Vox in excelso"에는 사실상의 조직해체에 대한 명령과 해체의 정당성이 담겨 있으며 1312년 5월 2일 발(發)한 두 번 째 교서 'Ad Providam'에는 템플 기사단의 전 재산을 '성 요한 자선학교 교단(The hospital of St. john(The Hospitallers)'으로 넘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이 두 번째 교서 'Ad Providam'은 포루투갈 왕실재원에 손상을 주는 역할을 했다.
디니스(Dinis)  왕이 템플기사단의 보호자로부터 정치적 이익의 대변자로 변한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디니스는 템플라들이 점유한 토지가 실제 그들 조직 소유가 아니며 그들은 단지 그 재산의 항구적인 사용권만 허가받은 것이며 요새와 각종 성, 채플들의 소유권이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포루투갈 왕실에 있다고 교황과 입씨름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자신의 종교적, 군사적 교단을 스스로 만들어 '크라이스트 교단'이라 명명한 것이다.
프랑스 국왕 필립 르 벨에 의해 그랜드 마스터 쟈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가 체포되고 템플기사단이 박해받을 때, 유럽 전역의 방대한 재산들이 각 국의 군주에 의해 몰수되거나 『하스퍼털러 기사단(Knights of Hospitallers)』외에도 말타(Malta) 기사단에게 적지 않은 재산이 넘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 기사단인 튜토닉(Teutonic) 기사단의 경우, 팔레스타인에서 독일인에 대한 구호활동과 자선활동을 펼치다가 프러시아, 폴란드를 개종시키려는 십자군 전쟁에도 참여했는데, 필립 르 벨의 박해 당시 유럽으로 돌아갈 때까지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었다. 그 뒤, 이름만 걸고있던 이 단체가 공식적으로 없어진 건 1809년 나폴레옹 황제에 의해서였다.
첨언할 만한 점은 말타 기사단과 튜토닉 기사단은 프리메이슨과 같은 유사성이 없었으며 프리메이슨으로서의 비밀이나 조직 입문, 의식 등 일체의 프리메이슨적 요소가 없었으므로 논외로 한다. 또 유럽에서는 오직 포루투갈 만이 예외적으로 '크라이스트 교단'이라는 이름 아래 템플기사단의 조직을 온존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활동 과정을 계속 살펴보기로 하자.  
1319년, 3월 14일 개종 수 년 뒤 교황 요한 17세는 새로운 기사 교단을 재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교황은 이 교단의 후원자가 되었고  아주 재미있게도 두 세기 이전에 템플라들에게 승인된 적이 있는 시토 교단의 종규(宗規)를 주었다. 교황의 재가 바로 뒤, 그 교단은 스페인, 이태리, 독일, 심지어 본래의 안방인 프랑스로 확장해 들어갔다.
토마르(Tomar) 市를 포함해 모든 템플라 재산은 '크라이스트 교단'에 귀속되었으며, 초대 그랜드 마스터 '길 마르틴스(Gil Martins)'의 영도 아래 '산타 마리아 도 카스텔로(Santa Maria do Castelo)' 교회를 첫 번째 총 본산으로 정했다. 마르틴스는 이미 '아비스(Avis) 교단'의 마스터를 지낸 적이 있으며 그런 연유로 해서 늘 디니스 왕이 만든 새 교단의 머리가 됨직 했다.
'크라이스 교단'의 십자가는 템플 기사단의 십자가를 약간 변경해서 마치 탐험선 위의 장식품처럼 십자 몸체를 두 길이가 같은 붉은 색으로 하되 각자의 끝은 8각형을 이루도록 했고 은으로 예쁘게 감싸 장식했다. 처음으로 대양을 항해한 대부분의 사람은 바로 이 '크라이스트 교단' 멤머들이었으며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의 항해술을 배웠다. 크라이스트 기사단은 템플라(Templar)들에게서 뱃사람에게 필요한 전문기술을 교대로 얻었는데, 템플라(Templar)들은 유럽으로부터 성지로 순례자들과 전사들, 상품 등을 운송하는 등 이미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바 있었다.
그러한 탐험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유명한 항해가 헨리(Henry) 왕자인데 헨리 세인트 클레어 로슬린(Henry St. Clair of Roslin) 왕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헨리 왕자는 1394년에 죠아오 1세(Joao 1)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역사가들이 독실한 종교인으로 인정한 헨리왕자는 나이 20에 부왕을 설득해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있는 회교도의 거점도시 세우타(Ceuta) 항을 공격할 십자군 선단에 승선했다. 이 십자군의 목적은 구원을 바라는 모든 회교도에게 예수의 복음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헨리는 아프리카에 궁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전설적인 기독교 왕 프레스터 잔(Prester John)을 찾아보길 희망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프레스터 잔(Prester John)은 중세에 아비시니아(이디오피아) 또는 동방나라에 그리스도교 국가를 건설했다는 전설상의 왕으로 당시 예루살렘 성지를 차지하고 있는 회교도와 투르크 족을 쳐서 페르시아를 회복해 줄 것으로 믿고 있던 이상적 구세주(Savior)였다.
당시 살라딘이란 인물이 이집트 「파티마」朝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근거지 삼아 1187년에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므로 프랑스 필립 2세는 독일 황제 프레데릭 1세와 영국왕 리챠드와 함께 3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헛물만 들이키고 만 적이 있다.
당시 유럽인은 성지를 차지한 사라센인과 7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 실패의 와중에서 동방의 기독교국 제왕으로 그려지고 있는 전설적인 구세주 프레스터 잔(Prester John)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회교도를 제압해 줄 것을 바라는  염원이 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러시아를 점령하고 폴란드 독일기사단 연합군과 헝가리군을 연파하고(1240)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를 무너뜨려 일한국(汗國)을 세우고(1258) 흑해 북안에 킵차크  한국(汗國), 금장한국을 세우자 그들이 혹시 프레스터 잔(Prester John)이 아닐까 하는 의문과 함께 그들에 대한 기대가 몹시 커졌다. 당시 교황은 몽골에게 프레스터 잔(Prester John)에의 기대와 기독교 포교라는 두 가지 카드로 구애를 전개해 13세기 초 탄생한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 수사를 뽑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 한국(汗國)을 비롯 이들 몽골 족이 회교로 개종하자 성지회복과 기독교 복음화의 꿈을 조용히 접고 프레스터 잔(Prester John)이 동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오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바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라센이 고도로 발달한 자신들의 수학, 과학, 천문, 지리, 화학을 비롯해 동양의 문물을 주로 서양에 전해주는 가교역할을 했다면 그러한 추세를 더욱 광범위하고 강하게 반대로 몰아치게 한 것은 바로 몽골이었다는 사실이다.
서구인은 프레스터 잔(Prester John)을 복선에 깔고 동양을 기독교화하기 위해 동서양 교류의 실마리라 할 프리메이슨 교단의 선교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물줄기를 타고 사베리오 신부가 일본을 먹겠다고 건너오고 마테오 릿치 신부가 명나라 광동 땅에 건너오게 된다. 마치 솔로몬과 시바 여왕 당시나 안토니우스, 케쟈르, 클레오파트라 당시, 한니발 로마 원정 당시 아프리카의 문물이 지극히 제한적으로 지중해를 넘나든 적이 있다가 헨리왕자 시대 이후로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문물이 유럽에 유입되듯이, 오래 전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극히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동서 교류가 이루어져 오다가 바로 사라센의 바톤을 이어받은 몽골의 후예들로부터 본격적인 교류의 실마리를 트게 된 것이다.  
헤브라이즘이 로마에게 먹히자 알렉산더가 몰고 온 마던한 헬레니즘의 역동성은 역으로 속에서부터 로마를 먹어치워 마침내 로마를 빈 껍데기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이 흥청거릴 때 로마는 쪼그라들어 조그마한 촌구석에 불과했다. 나일에서 인더스까지 동서문명을 하나로 관통해 엮은 튀기(Hybrid)문화로 세계화, 개인화의 특성을 갖춘 헬레니즘 문화는 당시 유럽인으로서는 매우 호기심 있는 뉴 트렌드로 다가섰는데, 이는 장차 동서양 문명을 연결할 터닝 포인트이자 서막이 되었다.
이어서 한편으로는 사라센이 몰려오고, 몽골이 들이닥쳐 정치적인 길을 트고 그 이면에서는 조직적인 식민지 탐험과 제국주의 시대 개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리메이슨은 이러한 동서양이 만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르네상스란 무엇인가. 알렉산더 대왕이 만든 동서융합의 헬레니즘 문화와 동 로마인 비잔틴 제국의 동서 혼융 문화를 섭취한 이태리 북부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라든가 밀란의 비스콘티 가문 같은 갑부들이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하며 서로 지지고 볶고 하니까 넌덜머리가 나 좀 인간적으로 살아보자 해서 휴매니즘이란 걸 들고 문예부흥을 꾀해 과거 동서융합적인 헬레니즘이라던가 비잔틴 적인 고전적인 요소를 밑바탕으로 해 이를 종합적이면서도 새로운 차원으로 리바이벌 시킨 것이다.
농업이 발달한 로마 아래의 남부 이태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이들 북부의 갑부들이 주도해 이러한 르네쌍스를 주도한 것은 당연한 귀결점이다. 지금도 피렌체를 가보면 우피치(Uffizi) 미술관이나 팔라티나 회화관인 피티(Pitti) 궁전을 볼 수 있는데, 이 곳은 르네쌍스 시대 최고의 보고로 대영박물관이나 루불박물관, 아르미타쥬 박물관도 이곳에서는 잠시 명함을 내려놓아야 하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우리가 살아생전 본 명화의 70-80%는 이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명품관 중의 명품관이다.
미술관 앞을 유유히 흐르고 있는 아르노(Arno) 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Vecchio) 다리는 현재 보석상으로 도배를 해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는 중이지만 한때는, 단테가 자신의 평생 잊지 못하는 연인, 어린 베아트리체를 만났다는 다리로 미술관 앞에 자리잡은 그의 집과 함께 관광객의 시선을 잡는 곳이다.  알고 보면 단테는 자끄 드 몰라이의 박해를 항의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남부보다 GDP가 월등히 높은 북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 독립주장이나 북부동맹인 「레가 노르드」가 만토바를 수도로 『파다니아 공화국』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자부심과 과거의 영화 그리고 가난한 남부에 비해 지금도 계속되는 그들의 상대적 부(富)가 그 원천이라면 원천이 아닐까?  
어찌되었건 마침내, 희브리를 먹어치운 로마가 그들의 헬레니즘에 의해 내장이 먹어치워졌듯이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사라센을 먹어버리자 역으로 회교도들은 그들의 왕국을 회교문화로 먹어치웠다. 신성로마 제국을 연 오토 1세의 후예도 끝내 로마 교황청을 이기진 못한 것처럼, 역사는 언제나 소프트웨어가 강한 놈이 최후의 승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유럽인은 미지의 동양세력에 대해 일종의 신비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 때 이미 인도를 정복한 바 있고(B.C. 324)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게르만족 '노르만인'이 콜럼부스 500년 이전인 9세기 중엽에 이미 아이슬란드를 식민지로 삼은 바 있으며, 10세기 말엽에는 그린랜드를 먹어치운 바 있고, 1001년에는 아메리카의 '래브라도'와 '뉴우펀들란드', '뉴우잉글랜드'를 이미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무려 500년이나 후대인물인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고 마찬가지로 그보다 훨씬 뒤의 인물인 이태리 피렌체 출신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 했다는 건 한마디로 역사의 블랙홀을 보여주는 웃기는 촌극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미국을 인도로 알고 발견했다는 희극 역시 과거 인더스 강까지 경략한 바 있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와(B.C. 324) 비교하면 무려 1800년의 차이가 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대해 이 형석(李 炯錫)은 「서양 흥망사」189쪽에서 독일의 지리학자 '월트제뮤라(Waldseemuller)'가 1507년에 출판한「세계지서설(世界誌序說: Cosmographic introduction)」에서 처음 사용했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메이슨들이 전하는 고급정보는 미국을 처음 발견한 그들의 정체가 바로 다름 아닌 해양술이 고도로 발전한 프리메이슨 탐험대라 밝히고 있음은 물론이다. 물론 이런 우스꽝스런 촌극은 매스콤이 발달되지 않아 정보를 공유할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정과 폐쇄적인 유럽 왕실과 중세 봉건사회의 특징 탓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샹그릴라로 대변되는 샴발라 왕국과 고대 희랍의 이상향 엘리시움(Elysium)-샹젤리제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리고 그리스, 이집트 뿐 아니라 비잔틴 제국을 연 콘스탄티누스 로마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 로마 역시 동양의 미트라 교가 중심 신앙이었다는 점, 유대교를 만들어낸 뿌리가 페르시아의 죠로아스터 교(불 숭배 교)와 고대 바빌론의 마르두크(Marduk) 였다는 점 외에도 사라센 인이 사마르칸드에 종이공장을 차려놓고 서구인에게 전한 제지술이라든가 중국을 통해 배운 화약과 나침반은 유럽인을 크게 매료시켜 프레스터 잔(Prester John) 출현의 기대를 더욱 부풀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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