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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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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2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13부이하 아래에 계속..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아무튼 헨리는 이제 아프리카에 궁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전설적인 기독교 왕 프레스터 잔(Prester John)을 찾아보길 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포루투갈 함대는 세우타(Ceuta) 항을 공격하기 위해 2년 간 준비했으며, 그 항구를 손에 넣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항해 중에는 일식이 나타나는가 하면 성모 마리아가 칼 찬 죠아오(Joao) 왕을 소개하는 환상이 한 승려에게 나타나는 등 일련의 신비한 조짐들이 나타난 것으로 전해진다. 어린 헨리가 무역상들의 엄청난 부(富)를 처음 본 것도 바로 세우타(Ceuta) 항이었다. 동방으로부터 온 갖가지 진귀한 향신료, 금은, 보석, 카페트가 상당한 이익을 내며 거래되었다.
항해가인 헨리왕자에게 세우타(Ceuta) 항에서의 이러한 초기 경험은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다. 26세의 헨리왕자는  '크라이스트 교단'의 전임 마스터 '돔 로포 디아스 데 소우사(Dom Lopo Dias de Sousa)'가 동년 5월 25일 죽자 교단의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헨리왕자의 임용은 결코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 자리를 맡도록 교황에게 간청한 덕분이었는데 교황은 교서를 내려 헨리를 교단의 수장(首長)으로 승인했다. 그보다 2년 전, 또 다른 유사한 요청으로 헨리의 형이 부왕 디니스(Dinis) 왕이 1세기 전 포루투갈의 지배아래 둔 산티아고(Santiago) 교단 책임자로 임명된 바 있다.
'크라이스트 교단'의 책임자로서 헨리 왕자는 인력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신대륙 탐험에 드는 함대와 재원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그가 이러한 탐험으로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 재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수장으로 임명된 지 5년 안에 헨리와 그의 교단은 카나리아(Canaries) 군도(群島)와 마데이라(Madeira) 제도를 식민지화 할 수 있었으며, 그 뒤 20년 안에 아조레스(Azores) 제도(諸島)를 식민지화 할 수 있었다.
이들 식민지 덕으로 포루투갈 시장은 아프리카 産 상품으로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으며, 동시에 한계에 이른 '크라이스트 교단'의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새로 발견한 이러한 부의 축적은 교단의 힘을 더욱 강하게 배가시켰다.1456년 교황 칼릭스투스 3세(Calixtus 3)는 '크라이스트 교단'에게 보자도(Bojado) 곶에서 기니아 그리고 미지의 인도 남부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관할권을 넘겼다. 이는 교단 책임자(바티칸 입장에서는 수도원장 급)가 이 지역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460년 헨리가 죽자 그 아들 페르나오(Fernao)가 교단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세습은 그 자리를 탐낸 마누엘 1세(Manuel 1) 왕까지 계속된다. 페르나오(Fernao)가 죽자 그 아들 돔 디아고(Dom Diago)가 뒤를 이었는데 왕실을 전복하려 했다가 왕 죠아오 2세(Joao 2)에게 살해되고 만다. 교단은 왕실 후계자 없이 방치되었다.
1495년에 그랜드 마스터 직으로 부터 왕위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돔 마누엘(Dom Manuel)이 이러한 호기를 나꾸어 챘다. 마누엘은 크라이스트 교단, 산티아고 교단, 아비스 교단 모두의 통제권을 추구했으며  왕이 된 뒤에는 죠아오 2세(Joao 2)의 서자 돔 조르쥬(Dom Jorge)로 하여금 크라이스트 교단의 책임자가 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랜드 마스터 직과 왕으로 활동했다. 21년을 참은 뒤에 그는 나머지 두 단체의 수장마저 넘겨받았다. 그러나 1492년 그라나다로부터 마지막 회교도의 추방과 더불어 군사 조직은 실패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루투갈에서 크라이스트 교단은 계속 강력해졌으며 마누엘 1세(Manuel 1)는 크라이스트 교단의 기사단이 결혼해도 좋다는 교서를 발표한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지원을 받아 교단을 강력히 지원했다.  
마누엘이 재위에 오르던 때 포루투갈 전역에 불과 80개에 불과했던 지부 수는  1521년 통치 말기에 아프리카, 인도에까지 뻗어나가 454개로 불어났다. 마누엘의 계승자 죠아오 3세(Joao 3)는 전임자가 이룬 치적을 좋아해 990개로 확장시켰는데, 이러한 팽창은 아마 그의 치적이라기보다 결혼을 허가한 교황 알렉산더 6세의 교서발표에 힘입은 바 큰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새로운 환속화 정책은 직업으로 삼으려는 신입자를 대거 유입시키는 풍조를 낳았다. 그러나 이 풍조는 1530년 후라 안토니오에 의해 시토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을 도입하고 토마르 市에서의 수도원 생활로 복귀하게 하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조치는 성직에 몸담고 있는 자와 기사단에 몸담고 있는 단원들 사이에 불화를 몰고 왔다. 세속생활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사단 단원들이 크라이스트 교단 생활에 아무런 희망도 느끼지 못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누엘 1세 이후 단체의 종권은 포루투갈 군주 손에 있었다. 이러한 기간 동안 크라이스트 기사단은 본질적으로 템플 기사단이 감화를 주는 영적 조언자 내지 교사역할을 했던 것처럼 종교적, 군사적 집단으로 행세했다. 이러한 상태는 1789년 조직을 세속화시킨 여왕 마리아(Maria) 치세까지 계속된다.
한때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새로 발견한 식민지에 금전적 파이낸싱을 하고 후원을 했던 이 단체는 궁극적으로 외견상 카톨릭 교회에 대해 공적을 쌓는 단체로 변했다. 오늘날 이 단체는 최고 지도자 '호울리 씨(Holy See)'에 의해 승인된 5 명의 주교단이 이끄는 '크라이스트 최고 교단(The Supreme Order of Christ)'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단체의 멤버쉽은 각국에서 혁혁한 봉사공로를 지닌 기독교 수뇌들을 예약회원으로 삼고 있다. 마지막 공로상은 주교단이 1987년 말타(Malta) 기사단의 77번 째 그랜드 마스터를 지낸 고(故) 후라 안젤로 드 모자나(Fra Angelo de Mojana)에게 주었을 때였다. 1993년  6월 31일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기사단 멤버 벨기에 국왕 보딘(Baudin)이 죽은 이후 더 이상 살아있는 기사단원은 없다.
포루투갈 헨리왕자의 '크라이스트 교단'이 역사 위에 던지는 보편적인 가치는 적어도 서양적인 가치체계에서 볼 때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엮기 위한 신대륙 탐험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이러한 연장선 위에서 콜럼부스,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등 수많은 탐험가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적어도 외형적으로 동양과 서양이 하나로 엮이면서 자원과 부를 얻는 수단으로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를 개막하게 된 것이다.    
요크 파라는 이름은 영국의 고성(古城) 중동부 도시 요크(York)에서 기원한다. 영국의 강릉위치에 있는 성곽도시 요크시는 프리메이슨의 요크파 거점도시로 뉴욕은 바로 프리메이슨 요크파의 새로운 지부라는 의미로 지어졌다. 현대 프리메이슨 조직의 기원은 유럽 본토 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카발리스트들이 그들의 카발리스트 교단을 펼치기 위해 요크와 에딘버러에 교단을 세운 것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태양이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터전으로 해서 전 세계를 먹으려 했다.
665년경 로마제국에 의해 스코티시에게 강요된 기독교 신앙이 겔트족 특유의 신앙으로 겉돌자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는 1300년대 초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템플 기사단이 프랑스에서 박해를 받자 스코틀랜드에서는 이들을 환영하게 되었다. 피난 온 스코틀랜드 파는 그들이 지지한 스튜어트 왕조가 막을 내리고 하노버 왕조가 들어서자 그대로 눌러 앉아 잉글랜드 고유의 요크파를 새로 결성, 1717년 6월 24일 사상 최초의 프리메이슨의 탄생을 공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총론적인 고찰 내면을 살펴보면 에드윈 에썰스탠(Edwin Ethelstan)의 지도아래  A.D.926년에 이미 영국에는 카발리스트들에 의해 그랜드 롯찌(Grand Lodge)가 창설되었는데 오늘날 이 지파는 '요크파'로 불린다. 나중에 캔터배리(Canterbury) 대주교 던스탠(Dunstan)이 입문하게 되었는데, 초대 그랜드 마스터 에드윈 에썰스탠(Edwin Ethelstan)이 죽자 그가 2대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 1041년, 그가 죽은 뒤 에드워드 컨훼서(Edward the Confessor)가 그 뒤를 이었다.
요크파는 영국 왕실의 최고 지도자들을 성공적으로 영입해 입회시킨 이래로 일반적으로 영국의 왕이나 왕실가족 일원이 요크 교단의 지도자를 맡아왔다. 1307년 프랑스 템플기사단의 몰락 뒤에 많은 단원들이 가까스로 스코틀랜드로 탈출해 도망했다. 많은 도망자들이 싸워주는 용병(傭兵)을 조건으로 로버트 부르스(Robert the Bruce) 휘하에 들어가 스코틀랜드 북서쪽 헤로딘(Herodin) 산에 완전한 은신처를 제공받았다. 로버트 부르스는 영국법이 미치지 않는 독자적인 스코틀랜드 왕국 독립운동을 1306년 시작했다.
로버트 부르스와 도망온 프랑스 템플 기사단은 스코틀랜드 킬위닝(Kilwinning)에 프리메이슨 롯지(Lodge)를 창설했다. 로버트 부르스는 1314년, 마침내 배녹번(Bannockburn) 전투에서 영국을 패배시키고 새로운 스코티시 왕국의 왕이 되었으며, 킬위닝 프리메이슨 롯찌의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 이후 이 단체는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교단으로 알려졌으며, 그가 죽은 이후 스코틀랜드 교단 본부는 스코틀랜드 주도(州都)인 에딘버러로 옮겨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프리메이슨 요크파는 영국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왕족이 기사단장을 맡는게 좋다고 여겨 하노버 왕조를 끌어들여 1782년에 조지 2세의 동생인 클레어런스 공이 기사단장에 취임했고,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1789년에는 영국의 황태자가 그의 두 동생과 함께 가입했다. 그 이듬해에는 영국의 기사단장이 전 세계 프리메이슨의 그랜드마스터가 되어 미국의 건국 아버지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세계의 지부장들로부터 충성을 다짐하는 알현을 받았다. 요크파의 그랜드 마스터는 영국 왕실가문 중 하나인 요크가의 수장인 요크 공작이 하도록 관례화 되어 있어서 현재 앤드류 왕자가 요크파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다.
요크파는 미국으로 건너와서 "새로운 요크"라는 "뉴욕"을 건설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엠파이어 스테이트(제국의 주)  빌딩"을 건축해 프리메이슨 제국을 상징화했다.    프랑스를 비롯해 프리메이슨을 탄압한 유럽의 왕실들이 왕실을 잃고 공화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오늘날처럼 왕실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영국이 프리메이슨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왕의 왕관이나 왕좌에 프리메이슨의 상징으로 히틀러의 철십자로 유명한 '말타 종단의 십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영웅 왈래스(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이후 싸워 온 에딘버러(스코틀랜드)와 런던(잉글랜드)이 싸우자 요크파는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를 모두 부인하고 런던에 중앙 대본영 "그랜드 롯찌(Grand Lodge)"를 설치하고 독자적인 프리메이슨 계보를 만들게 된다. 요크파 교단과 스코틀랜드 교단을 합해 영국 통합 프리메이슨 교단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제임스 앤더슨(James Anderson)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680년 유태인을 부모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뒤에 기독교인으로 변신했으며 1710년에 사제단에 소속되었다. 앤더슨은 1717년 런던의 통합 그랜드 롯찌(Grand Lodge)의 초대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  
비록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연합하여 유니언 잭(영국국기)을 만들긴 했지만, 스코틀랜드 혈통인 스튜어트 왕조와 잉글랜드 혈통인 하노버 왕조의 암투는 여전했고 대단히 치열했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주도 에딘버러에서는 해마다 엘리자베드 여왕을 낳은 모후의 생일 기념식을 엘리자베드 여왕의 그것과 경쟁적으로 성대히 치루는데 2000년에는 100주년 생일 기념식이 (여왕 생일보다)가장 성대하게 치루어져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앤더슨이 만든 통합 그랜드 롯찌는 아직도 런던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확대되고 있다. 런던의 그랜드 롯찌는 전 세계 카발리스트 운동과 활동의 가장 중요한 장소중의 하나가 되었다. 많은 부자상인들, 은행가, 귀족, 영국의 귀족정치의 일원들이 이 단체에 가입되어 있다. 심지어 영국을 통치하는 로얄 훼밀리들 마저도 이 단체에 가입되어있다. 대영제국의 힘이 전 세계에 걸쳐 팽창해짐에 따라 카발리스트들의 메이슨 조직의 영향력도 커갔다. 영국의 정치적 귀족이라든가 돈 많은 명망가들은 전 지구상에 프리메이슨 조직을 확산시키기 위해 제국 내에서 성취한 그들의 위업을 이용했다. 그들은 영국이 점령하고 통치한 인도, 중국, 중동, 아프리카, 미국 등 모든 땅에 메이슨 롯찌(Lodge)를 건설했다. 대영제국은 런던의 그랜드 롯찌가 영국이 통치하는 땅에 순종적인 추종자를 확보하고 있는 사실에 의해 가치가 높아졌으며 힘도 강화되었다.
현대 프리메이슨 세계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로스챠일드(Rothschild)라는 사람부터 알아야 한다. 그는 누구이고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그가 세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가공할 만 해서 일개 국왕이나 한나라의 통치자 차원의 정도가 아니다. 모건을 비롯하여 미국의 유명한 석유 부호 록펠러나 강철 왕 카네기 철도의 해리먼, 골드만 삭스, 레먼 브라더스 등이 그의 수하에서 큰 재벌이었다. 그의 영향권 속에서 각종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의 의도아래 이스라엘이 건국하고 이스라엘과 미국을 움직여 왔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석유커넥션:Click here!)
로스챠일드 가문은 프리메이슨 비밀교단이 루시페리안(Luciferian)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벌인 많은 카발리스트 운동에 자금을 대고 재정적 지원을 한 강력한 부호 집안이다. 이 가문은 카발리스트 비밀교단에 입문한 동부유럽 금세공인 유태인 암스쳴 모세 바우어(Amschel Moses Bauer)에 의해 설립되었다.
모세는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해 가서 1750년에 가게를 오픈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쥬덴스트라세(Judenstrasse) 지구에 금세공 가게를 열었다. 쥬덴스트라세(Judenstrasse)는 독일어로 '유태인 거리'를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가게를 '수를 세는 집'이라 불렀으며, 문 위에 '빨간 방패'를 걸어두기로 결심했다. 빨간 방패는 피의 희생을 취급하는 카발리스트의 비의적(秘儀的) 의미를 지녔다. 곧 그의 집은 '빨간 방패집 가게' 또는 독일어로 이 뜻을 뜻하는 'Rot Schild'로 알려졌다.
모세는 아들인 암스쳴 메이어 바우어(Amschel Meyer Bauer)를 카발리스트 교단에 입회시키기 시작했다. 1754년 모세가 죽은 후, 모세의 아들 메이어가 가게를 물려받았다. 메이어는 금세공 가게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카발라 예술을 계속 공부했다. 그는 세계지배를 위한 카발리스트의 원대한 목표를 이루는 최선의 길이 사람들이 쓰는 화폐의 통제와 경제의 통제를 통해 가능하다고 결심했다.
이것이 바로 템플기사단이 최초의 현대적 금융기법을 이용한 자본주의의 산파역을 한 것처럼 프랑스 혁명을 통해 봉건 군주제를 거꾸러뜨리고 본격적으로 깃발을 올리게 된 자본주의의 실체였다. 자본주의는 문명사적 하드웨어 측면으로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이루었지만 이념적, 시스템 적으로는 독일, 프랑스를 고리로 영국의 프리메이슨 지도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메이어는 곧 오펜하이머 은행과 함께 자금대출 사업을 하는 파트너쉽을 얻었다. 자금대출과 고리대금업의 노하우를 배우자, 메이어는 그의 가게를 은행업무를 보는 곳으로 출발해 사용했으며 그의 금세공 가게와 자금대출 가게는 마침내 신생 은행형태로 발전되었다. 메이어는 '빨간 방패'를 자신의 이름으로 쓰기로 결심해 바우어란 이름을 떼어버렸다. 로스챠일드 뱅크는 이렇게 태어났다.
1773년, 메이어는 프랑크푸르트 쥬덴스트라세(Judenstrasse) 지구에서 12 명의 또 다른 부호와 영향력 있는 인사를 초대했다. 그는 세계지배를 위한 보다 광범한 계획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다른 부호 및 영향력 있는 카발리스트들과 함께 공동출자 하기를 원했다. 메이어와 그의 동료들은 후일 세계지배를 성취하기 위한 '원안(原案)'으로 알려진 25 가지 계획의 아웃라인(요강)을 밝혔다. 세계지배를 위한 이 세부계획은 유력자를 움직이기 위한 기법들- 뇌물의 형태는 물론이고 파산과 자산몰수를 이끌어내는 변칙적 고리대금 기법을 사용하는 방법을 포함하고 있다.
로스챠일드 계획은 또한 폭력혁명, 피의 전쟁, 대량살상에 있어 무력과 테러리즘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부가해, 사회에 대한 통제는 윤리적인 행위와 성적 침투에 의한 사회의 도덕적 부패를 통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로스챠일드 계획의 결정적인 요소는 매체 선전을 통해 기만, 거짓말을 확산시키기 위해 보통 신문과 언론매체의 통제였다. 이들 13 명의 카발리스트들은 세계지배를 위한 25가지 '원안(原案)'을 실행하기로 합의했다. 비밀회의의 주재자는 로스챠일드로 다음은 25가지 '원안(原案)'의 요약이다.

1. 고임(Goyim:비유태인의 희브리어)은 본질적으로 사악하다. 따라서 폭력과 테러는 그들을 지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과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2.자유, 민주주의, 자유주의는 고임(Goyim:비유태인)이 카발리스트를 지지하도록 납득시키는데 사용된다. 자유,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통해 카발리스트들은 궁극적인 힘을 합법적으로 얻을 것이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을 보장한다.
3.비유태인 통치자들이 카발리스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금과 다른 값진 원자재를 장악한다.
4. 카발리스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결과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한다.
5.힘은 정의를 만든다. 지배는 단지 힘을 통해서만 성취되며, 힘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6.카발리스트 자원의 권력과 힘은 맞서 싸워야 할 세력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숨겨져야 한다.
7.군중심리학을 통해 고임(Goyim:비유태인) 집단을 통제한다. 고임집단은 시종 어떠한 제안에만 의존한다는 측면에서 마치 장님 같고 지각없으며 비이성적인 집단처럼 행동한다. 그들로 하여금 정부가 그들의 이름 안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바보로 만들라. 실제 대중은 강력하고 절대적인 독재체제에서만 지배될 수 있다. 그들에게 이 독재체제가 없으면 무정부상태가 온다는 것을 납득시켜라.
8.고임(Goyim:비유태인) 사회의 윤리와 도덕을 타락시키기 위해 술과 불법적 마약, 부정한 성행위, 도덕적 타락, 그리고 모든 다른 사악한 수단을 총동원해 강력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고임(Goyim:비유태인) 정치가들을 장악하기 위해 모든 형태의 뇌물, 기만, 배신이 사용되어야 한다. 카발리스트는 심지어 고임사회의 도덕적 부패를 확산시키기 위해 자신의 부인들까지 동원해 사용해야 한다.
9.엘리트를 통치하는 카발리스트가 권력을 잡으면 언제고 주저하거나 장애받지 않고 국가주권이라는 이름과 인위적인 외부 협박으로부터 고임집단을 보호한다는 이름아래 개인적인 소유물을 압류할 권리를 갖는다.
10. 카발리스트들은 고임집단에 '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만적인 슬로건을 확산시키는 첫 주체다. 고임 대중들은 아직도 이들 동일한 환상적 이념쪼가리를 반복하고 있다. 사실상, 자유, 평등, 박애는 카발리스트의 지배 엘리트와 함께 남게 될 것이다. 고임집단은 카발리스트의 관할 하에 손꼽히는 부호, 권문세가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11.고임 집단들의 전쟁은 오직 카발리스트의 재정확립을 위한 빚잔치로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양측에 어떠한 종류의 갈등이라도 야기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이 강구되어야 하며, 양측 그 어느 쪽도 다른 한 편으로부터 하등의 영토적 소득도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전투원들이 한번 싸움을 그치기로 결심하면, 향후의 갈등을 사전에 씨뿌려 방지하기 위해  평화회의가 구성될 것이며, 어떠한 영토적 소득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고임 양측 모두로 하여금 카발리스트 자금대출자에게 끌어들여 빚잔치를 벌이게 한다.
12.카발리스트들은 카발리스트 지배 엘리트의 순종적인 종이 될 공무원 후보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의 부를 사용해야 한다. 이들 꼭두각시 정치가들은 수시로 변하는 모든 카발리스트의 명령을 수행할 것이다. 이에 더해 아주 중요한 것은, 카발리스트들이 꼭두각시 정치인들에게 공식적인 고문을 지명할 것이다. 이들 정치 고문관들은 어린 시절부터 카발리스트 교단의 믿음 속에서 양육되어질 것이며 그 나라의 모든 공무를 다스릴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들 고문관들은 공무를 집행하는 정부내의 정부같이 될 것이다.
13.대중매체를 통한 카발리스트 선전확산의 중요성. 카발리스트의 부는 대중매체와 정보의 모든 가능한 출구(Outlet)들을 구입하고 통제하는데 쓰여야 한다. 대중매체를 통해 카발리스트들은 고임(Goyim:비유태인)집단으로 하여금 카발리스트들이 어느 한 순간 목표한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있도록 세뇌될 수 있을 것이다. 신문(매체)의 힘이 절대적인 통제력을 지닌 금의 파괴력과 같아질 것이다.
14. 카발리스트들은 고임(Goyim:비유태인)집단에 대한 압제자들로 꼭두각시 고임 대리인들을 이용할 것이다. 고임 압제자들은 모든 부정과 극악한 범죄를 수행할 것이며, 고임집단에게 테러의 통치를 가할 것이다. 고임 집단이 완전히 정복된 뒤에, 카발리스트들은 이들 압제자들을 전복시키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비난하기 위해 새로운 '구조자들(Saviors)'의 파도를 보내게 될 것이다. 고임집단들은 카발리스트 권력구조의 새로운 얼굴이 될 이들 '새로운 구조자들'을 바보같이 지지하게 될 것이다.
15.아직은 카발리스트들의 통제하에 들어오지 않은 자원 또는 자산을 마음대로 통제 관장하기 위해서 산업적인 침체와 재정적 공포를 창출해 내는 중요성. 강제실직과 식량부족은 평범하게 일하는 근로자 고임(Goyim:비유태인)들이 먹고 살기 위해 그들의 자산들을 매우 싸게 팔아치워야만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산들을 훨씬 쉽게 인수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16.  고임(Goyim) 집단 사이에 무신론적 물질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카발리스트 롯찌(Lodge)를 프리메이슨 조직과 같이 사용하라. 카발리스트들은 그들의 꼭두각시 초심자들이 카발리스트 권력 엘리트와 실질적인 카발리스트 루시페리안 교단의 진짜 비밀정보를 누설하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 프리메이슨 조직의 비밀과 다른 은밀한 카발리스트 조직들을 이용할 것이다. 앞으로 2개의 종교가 있게 될텐데, 하나는 무지한 고임 집단을 위한 종교이며 다른 하나는 프리메이슨과 다른 카발리스트 롯찌(Lodge) 신입자를 위한 종교이다. 고임(Goyim)집단은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해 모든 다른 종교들을 거부하는 종교로서 무신론적인 물질주의를 받아들이도록 세뇌될 것이다. 고임(Goyim)은 신의 개념을 거부하는 것을 수긍하게 될 것이며, 휴매니즘이 대신 대치될 것이다. 게다가, 오직 부, 힘, 그리고 육적인 죄악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 중요하게 될 것이다. 다른 종교는 카발리스트 롯찌(Lodge) 신입자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 신입자들은 루시퍼를 자신의 주와 스승으로 여길 것이며 카발리스트 교단을 추종할 것이다.
17. 대중성을 얻고 따르게 하기 위해 카발리스트 고임(Goyim:비유태인) 꼭두각시로 하여금 대중적인 슬로건과 높은 소리가 나는 말씨를 사용하게 하라. 꼭두각시들이 한번 권력에 포진하면, 각종 약속과 서약은 깨지게 된다. 이들 깨진 약속들은 고임(Goyim) 집단들로 하여금 옛날의 약속들을 수행하는 것이 비애국적이며 국가이익에 반하는 것이라 기만함으로써 정당화될 것이다.
18. 카발리스트들의 통제하에 있지 않은 나라는 가두투쟁과 가가호호의 개별탐색으로 촉진되는 피의 혁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카발리스트 마스터들의 명령을 수행할 것이지만, 아직은 대중의 이름으로 싸우는 충직한 투쟁가로만 보일 것이다. 그들은 '혁명의 적들'에 대해 싸우는 테러체제를 수립할 것이다.
19. 전쟁이 끝난 뒤, 카발리스트들은 더 많은 빚잔치를 벌이려는 나라들에게 새로운 차관을 제공하고 또한 카발리스트 조직들의 행동거점을 마련하도록 협상하기 위해 사절, 외교관 같은 대리인을 보낼 것이다.
20. 카발리스트들의 법으로 통치하는 하나의 세계정부는 그들의 중요한 목표이다. 이 목적을 이루는 핵심 키는 경제적 독점을 통해서일 것이다. 카발리스트들은 그들의 부유한 금융회사를 이용하여 주요 산업시설, 은행 센터, 자연자원, 최종적으로는 정부까지 사들일 수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장악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카발리스트들은 그들의 단일 세계정부 독재권(Dictatorship)을 수립할 것이다.
21.경제전쟁. 고임(Goyim:비유태인)들의 부동산과 각종 산업을 거저 먹어치울 계획. 고율의 세금과 불공평한 경쟁의 조합이 그 나라 고임(Goyim)들의 경제적 파국을 야기할 것이다. 국제적으로, 고임(Goyim)들은 스스로에게 값을 호되게 매긴 나머지 시장에서 밀려나는 것을 용인하게 될 것이다. 원자재의 통제와 근로자들 사이의 동요는 고임(Goyim) 산업가들이 카발리스트들의 변덕하에서 행동하는 것을 저지할 것이다. 산업 근로자들은 고임(Goyim) 산업가들에 대한 하나의 도구로써 이용될 것이다. 조심스럽게 통제되는 인플레이션은 근로자 임금 증가분이 근로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음을  확신시킬 것이다.
22. 무기. 고임(Goyim)들로 하여금, 자신들 사이에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고,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기 위해 보다 새롭고, 이미 파괴된 무기를 대치할 보다 강력한 무기를 구입하도록 납득시키라. 이같이 끝없이 순환하는 무기의 소비와 대치는 카발리스트들의 전쟁자금을 풍부하게 해 줄 뿐 아니라, 고임(Goyim:비유태인)을 약화시켜 그들은 카발리스트들에 대항할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23.새로운 세계질서. 한번 단일 세계정부 독제체재가 수립되면, 모든 적들은 깨끗이 일소될 것이며 오직 다양한 카발리스트들의 롯찌(Lodge) 신입자들만이 번영하게 될 것이다.
24.젊은이의 중요성. 카발리스트 룰을 유지하는 핵심 키는 거짓된 이론과 그들을 새로운 세계질서의 새 전위로 손쉽게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들로 젊은이들을 세뇌시키는 것이다.
25.민족적이고 국제적인 법률들이 고임(Goyim:비유태인)과 더 멀리 카발리스트 목적을 배경으로 사용될 해설들 속에 짜 넣어질 것이다.

로스챠일드 원안(原案)은 완전한 세계지배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13명의 참석자에 의해 채택되었다. 유태인 카발리스트 재정가인 핵심인물, 모세 멘델손(Moses Mendelson)에게 반정부 전복에 사용될 고임(Goyim:비유태인) 신입자를 프리메이슨 롯찌에 입회시키는 과업이 주어졌다. 멘델손에게 로스챠일드 13인 재정위원회의 재정적 뒷받침과 함께 독일의 한 州인 바바리아(Bavaria)와 프랑스, 스위스에 혁명적인 운동을 시작하도록 위임되었다.
암스쳴 메이어 바우어 로스챠일드(Amschel Meyer Bauer Rothschild)는 다섯 아들을 가졌는데, 메이어는 다섯 아들을 카발리스트 교단과 고리대금업 기법을 배우도록 교육시켰다. 메이어가 늙어가자, 그는 더 많은 권위와 힘을 자식들에게 실어주었다. 각자의 아들은 정력을 집중시키고, 로스챠일드 25개 원안(原案)을 통한 세계 법을 성취하기 위해 유럽의 특정지역을 할당받았다.
1812년에 메이어가 죽자, 거대한 금융제국은 다섯 형제의 손에 넘어갔다. 메이어는 아들 형제 중 한 명인 21세의 나단(Nathan)을 1798년, 영국 런던에 로스챠일드 은행 지점을 열도록 보낸 바 있었다. 나단은 영국의 은행들과 로스챠일드 지점망을 합병해 최종적으로 영국 은행들을 인수할 예정이었다. 나단의 네 형제들은 다른 유럽 중앙은행들 특히, 그 중에서도 프랑스, 홀랜드, 독일 주에서 가장 큰 프러시아의 중앙은행들을 장악할 예정이었으며, 동시에 프랑크푸르트, 바바리아에서 활동중심의 거점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로스챠일드 가문은 프랑스인 드 레셉과 이집트 귀족 커디브가 합세해 1869년 완공한 수에즈 운하에 개입해 막대한 이익(40%)을 챙긴 뒤, 영국정부를 움직여 이집트를 강제로 먹어치우게 하면서 수에즈 운하를 독식해(99년간 점유권) 부를 축적했다. 로스챠일드가 '세계시온주의자 연합'을 결성시켜 영국 전시내각과 힘을 합쳐 성사시킨 1916년 런던 조약 당시, 영국은 전쟁이 끝나면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을 주기로 했는데, 시온주의자들은 막상 신생국가를 꾸려나갈 정치자금이 없었다. 따라서 이를 막후에서 진두지휘한 런던의 로스챠일드는 탈무디스트들로부터 중동에서 대영제국의 기득권을 영원히 보장받는 대신 이들의 국가건설에 필요한 무제한의 재정지원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로스챠일드는 60만 명의 동유럽 탈무디스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유입시키는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으며, 영국의 앨런비 장군의 팔레스타인 주둔군을 철수시켰다. 한편 미 트루먼 대통령의 협조를 얻어 1948년 5. 18로부터 60만명의 무장병력을 팔레스타인에 진주시켜 원주민의 무장을 해제하고 135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추방하고 야곱의 후예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리유카바 최가 지적하는 것처럼 중동문제는 로스챠일드가 중동에 있는 자기 재산을 영원히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며, 중동의 기름을 자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손쉽고 안전하게 갖고 나올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에 불과했다.  
로스챠일드는 영국을 움직여 불쑥 미국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터키지배하의 팔레스타인을 해방시켜 주겠노라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속여 협조를 이끌어내 막상 터키를 몰아내자 그 땅을 팔레스타인 원주민에게는 주지 않고 유태인에게 주겠노라 선언했다. 영화 아라비안 로렌스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희생된 한 남자의 야망과 좌절을 그린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독립국 수립의 문제는 이같이 복잡한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역사적 문제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런던조약을 기점으로 미국이 영국의 공작으로 인해 동맹국으로 참전하자 이로 인해 패망한 나치스 독일에는 반유대사상이 깊이 심어졌고 후일의 나치스정책에 깊이 반영되었다. 1917년 4월 16일 미국이 참전하기로 하고 7월에 독일패망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로스챠일드는 세계 시온주의자 연합을 재정비하기 위해 사람을 물색하던 중 '카임 바이즈만(Chaim Weizmann)'을 만나 후일 이스라엘 국가원수로 키운다.
영국은 라이오넬 로스챠일드의 막후조종 및 재정지원 아래 1917년 11월 6일, 당시 외상이었던 아서 밸푸어경(Arthur Balfour)의 유태인에게 팔레스타인을 주겠다고 선언한 유명한 밸푸어 선언을 공포하여 유태인의 지원을 얻고, 유태인인 미국의 에드워드 만델 하우스의 활약으로 윌슨 대통령을 움직이는 한편, 군함 서섹스호의 침몰조작극으로 미국을 참전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스라엘 비밀 정보국 모사드 역시 빅터 로스챠일드 경이 이스라엘 건국이전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작전을 위해 만든 것으로 독일의 SS와 협조해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실행한 바 있는데, 이스라엘 건국 후에는 이스라엘 비밀정보국으로 자리잡았으니 로스챠일드 가문은 세계 최강의 모사드를 손아귀에 넣고 전 세계 정보를 좌지우지해 왔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대 총리들이 대부분 모사드 출신임을 안다면 로스챠일드 가문의 위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벤구리온, 베긴, 라빈, 샤미어 등이 모두 모사드 출신인데 심지어 샤미어는 케네디 암살 당시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모사드의 책임자였다.
이외에도 영국은 전 세계 유태인 인구 1500만 중 최소 5백만이 미국에 살고 있고 뉴욕의 4분의 1이 유태인인 점을 이용해 독일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땅을 유태인에게 주겠다고 선전함으로써 미국의 유태인 뿐 아니라 독일 내 유태인에게까지 큰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당시 독일만이 비밀리에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에 실어 나르고 있었으므로 유태인은 독일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독일의 히틀러는 '독일 시온주의 연합'과 연계해 2차 대전 초기까지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조직적으로 돕고 있었다.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군사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돕기 위해 독일첩보원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캐낸 비밀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한편, 영국은 팔레스타인 유태국가 건국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을 통해  유태인의 친독 성향을 친영미 성향으로 바꾸려 시도하나 현재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만들려하는 회교 원주민의 강력한 반발로 계획에 차질을 빚는다.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영국 스스로도 유태인 이주를 못시키는 상황에서 독일은 갖가지 정보를 동원해 영국의 눈을 피해 시온조직을 도와 유태인을 밀입국시킨다.
하지만 2차대전이 궤도에 오르면서 대세가 친독 경향으로 변해가자 한계를 느낀 독일은 1937년 6월 독일 외무성을 통해 유태국가 건설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팔레스타인이 세계 유태인의 거점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유태인 이주사업에서 공식적으로 손을 뗀다.
한편, 1916년 10월 '세계 시온주의자 연합'은 영국의 전시내각과 런던조약을 체결한 후, 전 세계 유태인 조직에 명령을 내려  미국을 영국의 동맹국으로 끌어들여 승리하면 팔레스타인 땅에 향후 유태인 국가건설을 보장받은 내용을 전하고 친독 노선을 친영 노선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미국이 대 독일전에 참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온주의자들이 미국이라는 감이 뚝 떨어지기를 앉아서 기다렸을 리 없다. 그러면 당시 대통령이던 윌슨이 시온주의자들의 적극적인 로비 및 치밀한 정보전에 무릎꿇고 1917년 4월 2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하기까지 커넥션의 고리는 어떠했을까?
첫째, 미국참전의 수순으로 우선 미국 탈무디스트들을 설득하기 위해 영국은 런던 조약 체결 2개월도 안된 12월 4일, 급작스레 시온주의자인 로이드 조지를 수상에 앉히고, 바로 다음날 영국에서 명망가로 존경받는 거물정치인 죠슈아 웨지우드 의원을 미국에 파견해 미국의 탈무디스트들을 움직이는 공작을 벌인다.
미국측 영접인사는 로스챠일드를 대신해 미국의 면화를 영국으로 수출한 적이 있어 프리메이슨과 밀접한 커넥션을 가진 윌슨의 절친한 친구이자 가장 신임하는 정치고문 에드워드 만델 하우스(Edward Mandel House)였다. 그는 미국의 유태인 지도자 51명을 뉴욕 사보이 호텔에 초치하여 웨지우드로 하여금 런던조약의 핵심을 설명하고 영국은 승전 후 팔레스타인 유태국가 건설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설득을 하게 했다.
둘째, 대통령 취임직후 대학교수 시절 바람피운 윌슨의 정부가 1912년 윌슨을 도와 민주당에 거금의 정치헌금을 희사한 '세계 유태인 경제연합회 회장' 겸 변호사 새뮤얼 운터마이어( Samuel Untermeyer)를 통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4만 불을 요구하며 불륜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자, 거금이 없던 윌슨은 운터마이어가 대납하는 조건으로 공석이 된 대법원 판사에 같은 시온주의자 루이스 브랜디스를 밀어 넣게 된다. 루이스 브랜디스는 윌슨 치하시절 유태인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부각되었고, 영국과 커넥션을 가진 그의 아이디어로(이미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이지만) 윌슨은 참전명분을 찾게된다.  
셋째, 역사에서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 명분은 민간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의 U-보트에 의해 격침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국의 참전일 보다 무려 2년 전의 사건이다. 당시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온주의자 로이드 조지 내각을 출범시키고 국방성에 유태인들을 대거 영입해 미국을 지배하는 유태인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했으므로 브랜디스와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는 윌슨에게 참전 명분을 주기 위해 미 군함 서섹스호가 영국해협에서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어 전 승무원이 사망했다고 허위발표 했다. 종전후 미국의 퍼싱(Pershing)장군은 공격받은 적도 침몰한 적도 없이 건재한 서섹스호 사건은 거짓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면 왜 한때 유일하게 유태인을 도왔던 히틀러가 아우슈비츠를 연상할 정도의 유태인 학살자로 낙인찍히는 정치적 행보를 하게 되었고 적어도 세계사에 유태인에 대한 가장 혹독한 가해자로 이미지업 되었을까? 이에 대한 내용은 본서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므로 핵심만 요약해 알아보고 계속 진행하기로 한다.
가장 중요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문제를 보면 이 문제에 관한 한 히틀러는 부하들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범책임자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인사문제를 잘못하면 부하들이 저지른 죄도 모조리 뒤집어쓰게 된다는 것이 바로 히틀러가 주는 교훈이다. 히틀러가 하인리히 히믈러 SS 사령관이 중용한 알프레드 로젠버그를 만나면서 유태인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학살을 지시한 적은 없고 오히려 부하들로 하여금 유태인 학살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나치사상 전문가로 유태인이기도 했던 알프레드 로젠버그는 지독한 선민사상을 담고있는 「시온의 칙훈서」를 히틀러에게 바쳐 반 유태정서를 유도하고,  게르만족의 우수성과 유태인의 열등성을 주장하는 우열인종 이론을 체계화시켜 후일 괴벨스와 함께 유태인 사냥을 합리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한다. 오스트리아 작가 루돌프 콤머(Rudof Kommer)에 의하면 이는 빅터 로스챠일드(Victor Rothschild)의 명에 의해서인데 로스챠일드는 유태인으로 하여금 핍박을 받게 해 유태인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고육책을 쓴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히틀러의 홍보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젊은시절 독일의 언론, 금융세계를 장악한 유태인의 높은 벽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으로 히틀러에 중용되면서 유태인 청소를 자임한다. 그의 반 유태인 정책으로 유태인의 독일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외교관 살해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빌미로 괴벨스가 선동해 15여개의 유태인 시나고그(예배당)가 불타고 38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자 히믈러 마저 히틀러에게 파면조치를 요구했을 정도였다. 물론 괴벨스는 유능한 홍보장관이라는 이유로 계속 중임되었다.  
괴벨스가 유태인 사냥을 하게 된 동기는 베를린 시 재건축 문제에서부터 발발한다. 베를린시 도시계획 책임자이자 괴벨스의 친구인 알베르트 스페르는 41년 초 괴벨스에게 베를린 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빈민촌인 2만 4천 유태인을 몰아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괴벨스는 유태인을 화차에 실어 베를린에서 먼 곳으로 쫓아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러한 수 차례의 강제이주 과정에서 집단 총살과 집단 매장이 이루어졌다. 히믈러가 이 사실을 보고하자 히틀러는 더 이상의 살상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실에서 유태인 살상이 괴벨스가 독단적으로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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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자본과의 관계
(석유커넥션:Click here!)

['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12. 오일 커넥션

돈·인맥으로 얽힌 부시 정부와 석유사
이라크 美기지엔 '엑손모빌' 등 이름
석유사, 선거때마다 거액 후원금 내


미국 중남부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45번 고속도로를 타고 동남쪽으로 약 1시간 동안 달리면 멕시코만에 다다른다. 멕시코만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갤브스톤이란 긴 섬이 보이고, 그 안쪽에 자리잡은 갤브스톤만 주변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 석유 메이저들의 공장이 진을 치고 있다.

핼리버튼 갤브스톤 서비스센터도 그 공장들 중 하나다. 쇳물이 흘러내린 높다란 굴뚝들이 이 회사의 84년 역사를 말해준다. 세계 어느 곳이든 석유 냄새가 나는 곳에는 핼리버튼이 있다. 텍사스주에만 영업소가 1백곳이 넘는다. 핼리버튼은 굴착기술과 시추장비 등 유전개발 관련 종합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달 초 미 육군 공병단은 이라크전이 끝난 지난 5월 이후 핼리버튼이 이라크에서 따낸 수주 규모는 13억9천만달러라고 발표했다. 대부분 손상된 유전을 복구하는 공사다. 지난 8월 초 타미르 가드반 이라크 석유장관 직무대행은 이라크 석유산업을 재건하는 데 16억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핼리버튼이 이라크 유전 복구사업을 사실상 '독식'하고 있는 것이다.

핼리버튼과 백악관의 유착관계는 이미 뉴스가 아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짝을 이뤄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 딕 체니 부통령은 핼리버튼의 최고경영자(CEO)였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그가 받은 보수는 총 4천5백만달러(약 5백20억원)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5월 초 헨리 왁스먼(민주당) 미 하원의원은 "핼리버튼이 미 정부의 금수(禁輸)조치에도 불구하고 80년대부터 이란.이라크.리비아 등과 거래해왔다"며 자료를 공개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부시 대통령 자신이 석유업계 출신이다. 미 석유산업의 메카인 텍사스주 주지사가 되기 전인 80년대 중반 부시는 '스펙트럼 7'이라는 작은 석유회사를 직접 경영했다. "석유 비즈니스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부시는 나중에 이 회사를 2백만달러에 하켄에너지에 넘겼고, 자신은 하켄의 이사로 근무했다. 89년 하켄의 주가가 마구 뛰어오르자 부시는 그 해 6월 보유주식의 3분의 2를 처분해 85만달러를 챙겼다. 얼마 후 회계부정과 함께 대규모 적자가 공개되면서 하켄의 주가는 폭락했다.

부시 행정부와 석유업계의 긴밀한 커넥션을 보여주는 사례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라크전쟁 당시 미군은 임시기지를 이라크에 건설하면서 엑손모빌 등 특정 석유회사 이름을 붙였다. 카자흐스탄 유전 개발권을 따내는 과정에서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는 셰브론텍사코는 이 회사 고문으로 일해온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이름을 유조선에 붙여주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자 미국에서는 "'오일 커넥션'의 집권"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2000년 대선 당시 미 석유회사들은 부시.체니 진영에 2천6백70만달러의 후원금을 기부했다. 지난해 중간선거 때도 1천8백만달러를 제공했다. 초대형 회계부정 스캔들로 2000년 말 도산한 엔론사도 고액 기부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미 최대의 에너지 유통회사였던 엔론의 케네스 레이 전 회장은 부시가 주지사였을 때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다. 부시는 2000년에만 그를 두 번 만난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 엔론은 3백50억달러의 빚을 지고 도산했다.

엔론의 국제사업부장을 지낸 아툴 다브다는 지난해 3월 '내셔널 인콰이어러'와의 인터뷰에서 "엔론은 9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에서 송유관 공사를 하기 위해 탈레반 정권과 은밀한 커넥션을 구축했다"고 털어놨다. 로비자금으로 탈레반 측에 수백만달러가 건네졌다는 것이다.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 일당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 정보당국이 이미 파악하고 있을 때였다.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97년 아프간의 고위 관리들이 엔론사 초청으로 나흘간 텍사스주 슈가랜드를 방문한 사실이 미 국무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

미 의회는 특정 기업의 이해가 정책에 반영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2월 미 의회 회계감사국은 백악관을 상대로 에너지정책 입안 과정에 엔론 등 석유기업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유례없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국가에너지 전략보고서' 작성팀이 어느 석유회사의 누구를 만났는지를 회계감사국이 조사하려 했으나 거부당하자 소송을 낸 것이다.

이 소송은 결국 법원이 권력분립을 해칠 수 있다며 기각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던 체니 부통령이 엑손모빌 등 석유회사 경영진을 여러 차례 만난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 보고서는 "에너지 안보를 미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면서 "걸프지역에서 미국의 석유 접근권을 확대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반전론자들은 이를 근거로 이라크전은 석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대규모 자본과 기술이 동원되는 유전개발 및 정유사업을 위해 미국 회사들은 최근 몇년간 거대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웠다. 98년 12월 미국 1, 2위인 엑손과 모빌이 합병해 유럽의 브리티시석유(BP)와 로열더치셸을 제치고 세계 정상으로 올라섰다. 2년 뒤엔 2, 3위의 셰브론과 텍사코가 합병대열에 동참했고, 지난해엔 코노코와 필립스가 손을 잡았다. 모두 '석유왕'존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오일에서 갈라져 나온 회사들이다.

1911년 독점법(셔먼법) 위반으로 30여개로 쪼개졌던 스탠더드오일의 후예들이 21세기의 '신제국'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으로 다시 뭉치고 있는 셈이다.

휴스턴(텍사스주)=특별취재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배명복 기획위원, 김민석 군사전문위원, 심상복 뉴욕특파원, 김종혁.이효준 워싱턴 특파원, 김진.최원기 국제부 차장, 신인섭 사진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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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2 17:30 입력 / 2003.10.23 07: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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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한 역사는 악연으로 돌고 도는것인지... 道不遠人 [7]

안원전
2006/01/07 15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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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하남 박물원에 소개된 “동이” 송준희 [463]

안원전
2005/12/24 17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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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서) 민족사 되찾기 운동본부 결성 선언문 송준희 [7]

안원전
2005/12/24 14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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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문) 정부는 상고사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하라 (송준희) [415]

안원전
2005/09/25 1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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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倭), 한국인들의 이름 [5]

안원전
2005/08/03 17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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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준희 중국내 동이계 민족 및 인구 현황 [10]

안원전
2005/06/02 1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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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밝히는 고증사료 모음

안원전
2005/03/19 1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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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의 잔소리 한마디

안원전
2005/01/18 15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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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년간 '조중동' 행태는 망국적, 60년 누린 '반공' 기득권 포기 만무" 소설가 조정래의 시국진단 [1]

안원전
2004/11/22 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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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 인정않는 사학계가 중국의 역사침략 불렀다”(단군&고구려 파일 첨부) [6083]

안원전
2004/08/19 19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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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 한민족사가 반도내 한민족사로 왜곡된 배경 道不遠人 [2]

안원전
2004/08/19 15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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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천년역사를 찾아서(환타지 코리아 동영상 포함) [22]

안원전
2003/10/07 9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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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상고대륙사를 바로본다! 우리 역사를 반도사관의 국통이 아닌 상고대륙사의 국통으로 다시한번 바라본다!-안원전 [8]

안원전
2002/04/12 50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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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상고 대륙사의 대국적인 틀-안원전의 21세기 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연재의 변- [1]

안원전
2002/03/18 1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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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고고학,문화인류학의 동이족 상고대륙사&프리메이슨 서양사&증산도 후천개벽진리) 사이트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원전
2002/03/25 1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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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세계 유력지 및 국내 일간지, 방송, 잡지 종합 모아보기&검색 사이트 [363]

안원전
2002/03/09 17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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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SD [10]

안원전
2002/03/09 10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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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상고사 사이트 [4]

안원전
2002/01/30 17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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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5]

안원전
2002/07/12 18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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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2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6]

안원전
2002/07/12 3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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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3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3/07/23 8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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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4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2]

안원전
2002/07/12 12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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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5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1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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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6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2]

안원전
2002/07/12 9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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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7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8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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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8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8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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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9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8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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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0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1]

안원전
2002/07/12 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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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1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4]

안원전
2002/07/12 8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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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2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13부이하 아래에 계속.. [2]

안원전
2002/07/12 26564
391
 2004년도에 있었던일! -이병도 제자들이 모의를 한다.

안원전
2017/09/02 110
390
 안동 _ 임청각 '그 역사를 기억해야한다!'

안원전
2017/09/02 97
389
  “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

안원전
2017/08/13 175
388
 MB정부서 특수채 380조 발행..4대강 등 자금조달

안원전
2017/07/02 265
387
 국조 단군왕검의 탄신일을 잊고 사는 대한민국 (1부)

안원전
2017/06/26 318
386
 노론·친일파 세상과 박노자, 한겨레

안원전
2017/06/25 264
385
 『한겨레21』길윤형 편집장에게 묻는다

안원전
2017/06/25 257
384
 단군 말살에 앞장 선 「한겨레 21」

안원전
2017/06/25 243
383
 시진핑, 건국절 언급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활동 강조

안원전
2016/09/07 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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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계 "건국절 주장, 친일파 위한 '역사 세탁'이 본질"

안원전
2016/08/23 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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