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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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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9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사라센에게 성지를 잃고 유럽 전역으로 흩어진 템플기사단은 고리의 금융 대출업, 택배사업, 기사단을 파견해 주는 경호사업, 메이슨의 본업인 각종 건축업 등으로 급기야 왕실재정까지 고리로 대출해 주는 유럽최고의 막강한 힘을 갖추었다.  
이 막강한 조직을 거의 분쇄해 버리는 중추적인 역을 맡은 군주가 바로 로마 교황청을 무력화시키고 아비뇽에 교황청을 만들어 놓고 똘마니 교황을 임명해 교권을 좌지우지한  프랑스 필립 4세 "르 벨(Le bel)"이라는 걸출한 인물이다. 이때 이태리는 소 도시국가로 갈가리 분열되어 자중지란을 겪고 있던 중이었다.

잠시 당시 상황을 보면,
이미 교권(교황)과 속권(황제)의 대립으로 교황이 폐위되는 권위 손상은 신성로마 제국시절인 11세기 중엽에 발생한 적이 있었다.  교황의 굴복 명령을 거부한 신성 로마 제국(독일)황제 헨리 4세는 그레고리 7세에게 파문되어 이태리 북부 카놋사 성에서 눈오는 날 알몸으로 3일 동안 빈 끝에 파문에서 풀려난 적이 있다. 그 뒤 교황이 헨리 4세를 다시 파문하자 헨리 4세는 군사를 거느리고 이태리로 쳐들어가 교황 그레고리를 추방해 시칠리로 도망가 죽게 하고 클레멘스 3세를 세워 교황으로 삼은 적이 있던 터였다.
그 뒤 독일과 이태리에서는 교황 편과 황제 편으로 나뉘어 암투를 벌였는데 교황 우위로 무게중심을 돌린 사람은 1198년에 즉위한 교황 인노센트 3세(Innocent 3)였다. 당시 영국은  '노르만디'公 윌리엄 1 세가 교황의 승인을 얻어 영국을 정복한 이래 사실상 교황 관할국가였는데, 12세기 중엽 왕손이 끊어지자 헨리 2세가 들어서서 결혼정책을 통해 프랑스 왕보다 더 넓은 영토를 프랑스에 갖게 되자 교황 권을 배제하는 정책으로 불화 하던 때였다.
그러다 그가 죽고 아들 리챠드가 즉위하자 프랑스 필립 2세는 엄청나게 불어난 프랑스 내 영국영토를 뺏으려 대립하게 되는데, 교황 인노센트 3세(Innocent 3)의 중재과정에서 리챠드 동생 죤이 왕이 되자 필립 2세는 마침내 프랑스 내 영국영토를 대부분 뺏는다. 이 일로 영국왕 죤은 교황과 충돌하고 교황은 프랑스 왕 필립을 명해 영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해 결과적으로 영국 영토 전체를 헌납 받는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잃은 것으로 아주 수치스런 국권실추이기 때문에 1215년에 제후, 무사, 사제들이 들고일어나  왕에게 강요해 백성들의 기본권을 법제화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14세기 초까지도 유럽의 왕실은 이미 커질대로 커진 템플기사단의 막강한 영향력과 폐해를 직감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1307년 봄, 프랑스 필립 4세 르 벨(Le bel)이 자신이 임명한 교황 끌르망(클레멘트:Clement) 5세를  매개로 템플 기사단 박멸의 칼을 뽑아든다.
결국 이 난리로 템플 기사단장 그랜드 마스터 자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가 59명의 기사단과 세느강변에서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말뚝에 묶여 공개 화형에 처해진다. 이 일로 후일 프리메이슨이 주도하여 프랑스 왕정을 뒤엎고 공화국을 세우는 대 복수극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다.  
필립 4세는 누구인가? 필립은 인기 없는 왕이었다. 그는 선왕 루이 9세의 유산에 따라 부끄럽지 않게 처신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루이(Saint Louis) 르 벨(Le bel)은 결코 자신의 유명한 선왕과의 간격을 메꿀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루이 9세는 필립이 야만적인 일로 유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예 그 같은 일에는 결코 개입한 일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야만적인 르 벨이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성인이 아닐 수 없다.
필립 르 벨(Le bel)은  자신의 부왕에 의해 십자군 전쟁의 유산인 엄청난 빚을 떠 안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영국과의 전쟁은 프랑스의 금고를 영영 회복불능의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따라서 르 벨(Le bel)은 부(富)를 축적하는데 필사적으로 매달렸으며, 그 먹이 감으로 이탈리아 금융가들(Lombards)과 프랑스에 살고있는 유대인을 선정해 박해했다. 그는 프랑스를 내세워 그들을 죽이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그러고도 이들 잔학한 행위가 모자라기도  하듯이 그는 프랑스 주화들을 거두어들여 녹여 비축하고 그 대신 싸구려 금속으로 주화를 만들어 대치했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필립 4세가 조국 프랑스를 돕는다는 구실과 전쟁수행을 명분으로 부를 축적하려 한데서 벌어진 일들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대표적 마피아 영화인 대부시리즈 중 대부 3편은 바티칸 교황청과 마피아의 커넥션을 그린 작품이다. 성스럽기 짝이 없어 보이는 선천의 모든 종교이면에는 음모와 살육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멀리 서양과 옛날로 건너갈 것도 없이 아주 가까이 국내로 눈을 돌려 근자의 우리 주위로 눈을 돌리면, 서 의현 조계종 총무원장을 출교시킨 전국의 승려단들이 파벌로 나뉘어 쇠파이프, 칼, 몽둥이를 동원해 종권 장악을 위해 싸운 것이라든가, 민족종교를 사칭하는 사교집단 대순진리회가 밥그릇 싸움을 위해 두 파로 갈리어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벌이는 것은 다 똑같은 이치이다.
심성이 제대로 닦이지 않은 중생들에게 선천의 종교 판은 속세보다 더 크고 한 차원 높게 업그레이드 된 고등속세일 뿐이다. 바티칸에는 콘클라베(Conclave)라는 교황선출을 위한 카디날(Cardinal:추기경) 비밀회의가 있다. 어느 정도로 추악하고 피비린내가 나는지, 여기에 비하면 오히려 마피아의 세계는 아주 신사에 속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본서의 주제가 아닌 고로 생략하되, 여기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를 위해 간단히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에 대한 책은 국내에 번역소개가 안 된 책이지만 미국에서 500만 부 이상 팔린 「신의 이름으로(In God's Name) David Yallop 著」라는 책이므로 관심 있는 독자는 개인적으로 미국에 신청해 구해보기 바란다.
이 책은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뒤, 전 세계의 첩보세계와 마피아세계가 커넥션이 되어 벌이는 각종 폭탄 테러 암살사건과 결국은 바오로 1세가 피비린내 나는 바티칸의 권력쟁탈전 속에서 바티칸의 반대파에게 암살된 사실을 종합적으로 추적해 보여주는 책이다. 폭탄테러로 구겨진 차안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있는 사진이라든가 마피아 보스들과 로마 시장이 바티칸 고위 성직자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장면 등 수많은 화보는 대부 3편을 보는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내용들이다. 필자가 보기에 대부 3편은 마피아와 바티칸의 이러한 뿌리깊은 커넥션을 살짝 흉내낸 것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면 프랑스 군주 필립 4세 르 벨 당시 로마 교황청의 복마전 같은 내홍(內訌)의 실상은 어땠는지 잠시 알아보고 넘어가기로 하자.(「피속의 탄생(Born in Blood)-The Lost Secrets Of Freemasonry By John J. Robinson」116쪽) 필자가 제시하는 이러한 내용은 독자들에게 세계사를 보는 종합적이고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며 1 권 이후 계속되는 시리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292년, 교황 니콜라스 4세(Nicholas 4)가 죽자, 추기경들은 로마의 주요 훼밀리인 콜로나(Colonna)파와 오르시니(Orsini) 파 등 두 파로 나뉘었다. 그들 중 어느 파도 교황 선거전에서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과거 추기경들이 늘 써 온 방식을 사용했다. 그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으로 양 파벌 중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은 중도적인 사제를 후보로 선택했다. 그래서 고른 인물이 피에트로 모론(Pietro Morron)이란 인물인데, 이 사람은 바티칸 교회 내부에서 한번도 고위 공직을 지내 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시골뜨기 사제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금식을 실천하고 고행의 길을 걷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그를 셀레스틴(Celestines)이라 불렀다.
그들에게 웃음은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비록 성서가 눈물 흘리는 예수를 언급하고는 있을지 몰라도 예수가 웃었다고 언급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에게 교황의 슈트를 입혔다. 그는 교황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그가 제기한 이의는 무시되었으며, 수도에 정진하던 나폴리 산 속의 암굴 속에서 끌려가 교황 셀레스틴 5세(Celestines 5)가 되었다. 나폴리의 프랑스 왕 챠알스 2세와 앙주(Anjou)家의 챠알스의 아들은 이미 노망이 들어 어려움이 많은 새 교황을 쉽게 지배했다. 그는 혼몽해졌으며 흐리멍텅해졌지만, 3명의 나폴리 출신의 추기경과 7명의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을 포함 13명의 추기경 이름을 충분히 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추기경들은 자신들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중도적인 교황이 될 것으로 알고 옹립했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제 3 파벌로 점점 커지는 프랑스, 나폴리의 프랑스 군주국들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다. 그들은 이의 해결책으로 우선 셀레스틴 5세(Celestines 5)의 퇴위를 의견으로 제시할 예정이었다. 추기경 중에서 가장 야망이 컸던 베네데또 가에타니(Benedetto Gaetani)는 단순한 의견 제시라는 범위를 넘어 그에게 퇴위 압력과 박해를 가했다. 그에게는 벽걸이 뒤에 있는 교황의 방벽에 비밀구멍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밤새도록 그 구멍을 통해서, 셀레스틴 5세(Celestines 5)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신의 사자의 목소리라는 것과 베드로의 옥좌에서 떠나라는 전능하신 분의 명을 대신 전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침내, 교황은 연로한 나이와 부실한 건강이 교회를 적절하게 통치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임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의 사임은 즉석에서 받아들여졌다.
또 다시 추기경들은 콜로나(Colonna)파 후보와 오르시니(Orsini) 파 후보 사이에서 교황을 선택하는 문제로 되돌아갔다. 베네데또 가에타니(Benedetto Gaetani)가 어느 쪽의 후보로도 자신을 내세우기 어렵게 되자, 그에게는 기회가 별로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나폴리의 챠알스와 프랑스의 이익에 비위를 맞추어 환심을 샀는데, 그것은 셀레스틴 5세(Celestines 5)가 최근 새로운 추기경들을 임명한 결과로 인해 지금은 결정적인 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에타니(Benedetto Gaetani)를 밀고있는 프랑스 그룹은 오르시니(Orsini) 파와의 연합을 도모했다. 그들은 교대로 콜로나(Colonna)파의 어떠한 후보도 차단하기로 결정했으며 결과적으로 베네데또 가에타니(Benedetto Gaetani)는 교황 보니파스 8세-보니파티우스 8세(Boniface 8)가 되었다.            
교황 보니파스 8세(Boniface 8) 치하의 두통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신성하게 뽑힌 교황이 신성한 계획을 사임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셀레스틴이 아직도 진정한 교황이며 보니파스는 단지 협잡꾼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순례자들은 전임 교황을 방문하기 시작했으며, 그에게 엎드려 절하고 그의 축복을 받았다. 이것은 보니파스 8세(Boniface 8)가 관용을 베풀 한계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를 잡아다 한 작은 감옥에 투옥시켰는데, 그 곳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노인이 사지도 거의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방이었다. 1296년 봄에 셀레스틴은 감옥 속에서 죽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니파스 8세(Boniface 8)는 모든 교황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황권의 챔피언이었거나 아니면 가장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교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왕국에 대해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인류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갖고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적들을 취급할 시간도 가졌다. 콜로나(Colonna)파에서는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셀레스틴이 살아있는 동안 그가 선출된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가 베드로의 옥좌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니파스 8세(Boniface 8)의 반격은  콜로나(Colonna) 훼밀리를 영원히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2명의 콜로나 출신 추기경으로부터  '교회의 군자(Prince of the Church:추기경의 품계칭호)'로서의 특권을 빼앗았다. 보니파스 8세(Boniface 8)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콜로나(Colonna)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그들의 부동산에 대해 교회에 몰수될 것을 제안했다. 더 나아가 그는 콜로나(Colonna) 출신의 추기경 몰락에 즈음해, 전 세계가 교황청이 적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공개경고를 내렸다.
한편 콜로나(Colonna)는 보니파스(Boniface)가 정당하게 선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교황이 아니라는 제소로 응수했다. 이에 덧붙여, 그들은 그가 유죄임을 추정하는 범죄 목록과 부정행위 목록을 열거했다. 그러한 제소에 대한 보니파스(Boniface)의 대응책은 콜로나(Colonna)의 모든 소유물들을 교황청이 모두 박탈한다는 선언이었으며, 콜로나(Colonna) 훼밀리의 어떠한 멤버도 4대에 걸쳐 성직에 진출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콜로나(Colonna) 훼밀리에 대한 자신의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특징지우고, 교황 편에 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 십자군에게 부여한 것과 같은 은사와 특권을 준다고 약속했다.    
오르시니(Orsini) 파는 마침내 오랜 숙적을 제거할 기회를 포착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황의 보상을 바라는 수 천 명의 다른 사람 속에 가담했다. 콜로나(Colonna) 파의 모든 성, 마을, 요새화 된 집은 단지 그들의 가장 강력한 요새인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하나만 남을 때까지 교황의 전사들 앞으로 떨어졌다. 거의 난공불락에 가까운 이 요새로 두 명의  콜로나(Colonna) 추기경이 숨어들었는데 얼마 후, 보니파스(Boniface)는 점거자들의 개인적 안전과 그들의 소유권을 할애해 주는 등 모든 것을 용서해 준다는 약속으로 포위 공격을 중지했다. 교활한 그가 세 가지 약속 모두를 깨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같이 하여 콜로나(Colonna) 파 훼밀리는 권력의 한 축에서 철저히 망가졌다.
보니파스 8세(Boniface 8)는 반대파 제거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까지 치루며 우여곡절 끝에 교권확보에 성공하자, 유럽의 모든 국가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의 에드워드 1세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이 저항은 수 차례 타협으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야망에 가장 큰 걸림돌은 프랑스의 필립 4세(Philip 4)였다. 1296년에 필립(Philip)은 영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프랑스에 있는 교회 재산과 수입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교황은 로마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교회 재산과 수입에 대해서도 결코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세속권력의 오용으로 이 세금을 탄핵하고 세금부과의 철회를 요구했다. 필립(Philip)은 자신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프랑스로부터 금은 수출을 금지하는 새로운 법으로 응수했는데, 이 법은 당시 로마로 송금되던 상당한 양의 프랑스 교회 수입금을 효과적으로 차단시켰다. 이러한 봉쇄는 교황의 권위를 손상시켰으며, 이듬해인 1297년에 필립 4세(Philip 4)에게 유리한 타협안이 도착했다.
하지만, 2년이 못되어 보니파스 8세(Boniface 8)는 세속왕자와 협력하지 않고도 자신의 운과 힘을 향상시킬 길을 찾았다. 세기말의 전환기는 오랫동안 종교적 축하의 시간대로 역할해 왔지만, 보니파스 8세(Boniface 8)는 1299년을 대희년(大禧年:유태인이 가나안에 들어간 뒤부터 50년 마다의 해로 대사(大赦)의 해)으로 삼았다. 그는 그 해 15일간 로마로 오는 모든 순례자들에 대해 사면을 약속했다. 그 결과 몇 몇 역사가들은 홍수를 무릅쓰고 로마로 쇄도한 순례자들의 수가 무려 20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로마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순례자들이 쇄도(殺到)하면서 번성된 많은 사업을 일찍이 한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로마에 쏟아 붓다시피 하는 그 엄청난 돈을 일찍이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교회에 헌성하는 선물들이 성지참배의 일부로 예상되었는데, 그러한 선물들은 제단 위에 정성을 표하기 위해 많은 헌성물을 두둑이 챙겨 목숨을 걸고 참배 길에 올랐던 성지참배자들에 의해 답지(遝至)되었다. 제단 위에 답지된 엄청난 금은 보화는 제단 뒤에 숨어있는 바울교 사제들에 의해 나무 갈쿠리들로 아주 신속히 거두어지는 방식으로 축적되었다. 보니파스 8세(Boniface 8)는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구(舊) 로마제국의 훈장들을 주렁주렁 매단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케자르와 같은 옷차림을 하고 사자(使者)로 하여금 "보라! 나는 케자르니라!"하고 외치게 하면서 영적, 세속적 양쪽 세계의 권위의 상징으로 자신의 앞에 두 개의 칼을 높이 치켜들게 하고 걸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부(富)에 취하고 대담해진 나머지 프랑스 필립 4세와의 전쟁으로 복귀했다.          
필립(Philip 4)은 보니파스(Boniface 8)를 너무 많이 얕보고 화나게 했다. 다른 것 중에서도, 그는 스스로 교회 토지를 몰수하고 보니파스(Boniface 8)의 개인적 숙적인 콜로나(Colona) 훼밀리에게 성전을 제공했다. 보니파스(Boniface 8)는 교회와 프랑스간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그 해 말 로마에서 소집되는 종교회의에 프랑스의 성직자를 소환했다. 그는 필립(Philip 4)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막상 필립은 기다렸다는 듯이 '왕정 대회의'를 소집하는 것으로 찬 물을 끼얹었다. 3계급인 프랑스 평민이 소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3계급 중 첫 번째 두 계급인 성직자, 귀족의 동원은 언제나 충족되었으나 왕이 교황과 공공연한 대결을 벌이는 경우, 이제 평민은 별도로 불러모아 규합해야만 했다.
귀족과 평민은 곧바로 왕에게 집결해 필립(Philip 4)의 옥좌가 교황으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직접 받았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그들은 추기경을 방문해 교황을 견책하고 징계해 줄 것을 부탁했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필립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했지만 로마에 대한 충성의 빚도 지고 있으므로 11월 종교회의에 대한 교황의 소환에 응답해야 한다고 항변했다. 왕은 프랑스의 어떠한 성직자도 자신의 왕을 비난하기 위해 소집하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러한 최근의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고 몇 몇 추기경의 충고에 대하여 보니파스(Boniface 8)는 자신의 역사적인 교서(Bull) "Unam Sanctam"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모든 세속지배자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주장하고 더 나아가 "모든 인류는 로마 교황에게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조건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교서는 고금을 통해 일찍이 그 어느 교황이 발표한 교서보다도 가장 강력한 내용이다.
보니파스(Boniface 8)는 만일 프랑스 성직자들이 로마의 종교회의에 불참한다면 자신의 분노와 징벌을 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맞서 필립(Philip 4)은 그들 중 누구라도 그회의에 참석하면 프랑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경고했다. 프랑스 성직자의 소수가 그러한 위험을 무릅썼지만, 참석자 부족으로 회의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필립왕은 장차 몇 번에 걸쳐 다양한 역사가들이 법률가, 대신, 필립 왕의 대리인으로 묘사하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 귈롬므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를 방문했다. 필립에게는 좌보우필로 재산관리 책임을 맡은 청지기 재무대신 마리니와 아나그니 성에 특수군을 투입해 교황 보니파스 8세를 죽도록 두들겨 팬 법무대신 노가레가 있었다. 1303년 4월, 노가레(Nogaret)는 프랑스 의회에 보니파스가 베드로의 옥좌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포고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교황 셀레스틴 5세(Celestin 5)와 혼사를 맺었으며, 전임 교황이 살아있는 동안 보니파스가 전임교황의 신부를 빼돌려 간통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3개월 뒤에 노가레는 다시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교황에 대한 29가지 죄목을 적은 리스트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교황의 둥근 방에 살고 있던 악마적 동물들과 극비적 성관계를 가진 아주 독특한 죄목을 포함해 이단자, 남색(호모=獸姦), 신성모독, 교회로부터 재물을 착복해 자신의 가족을 살찌운 죄, 고해성사의 비밀을 누설한 죄, 살인죄 등등으로 보니파스를 제소했다. 이 서류는 왕을 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 회람되었다. 그런 사이에 필립은 별 소득은 없었지만 모든 기독교세계의 지배자들에게 보니파스의 탄핵을 호소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그는 충분한 지지를 얻어냈다.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은 20명이 넘는 주교, 소수의 성직자, 템플 기사단과 하스퍼털러 기사단의(Knights of Hospitallers) 프랑스 대표단과 마찬가지로 탄핵을 위한 그러한 외침을 뒷받침했다. 보니파스(Boniface 8)가 보여줄 최후의 카드는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1303년 4월에 이미 필립에 대해 개인적으로 파문의 가장 극렬한 형태인 '어내써머(Anathema:저주성 破門)'를 선포한 바 있었다. 교황으로선 골치 아프게도, 그의 파문선포는 프랑스 국민들의 동정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를 몰고 왔다.
이제 그는 1303년 9월 8일, 프랑스 왕국 전체를 성직 정지 처분 아래에 둘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성직 정지는 파문이라기보다는 교회의 견책에 해당했다. 이 견책 아래에서 교황은  세례식, 성찬식, 사면, 심지어 매장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안의 모든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반란과 심지어 전국적인 규모의 혁명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견책은 필립에게 최후의 위협이 될 터였다.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이 정직 처분을 정지시키기 위한 결정이 준비되었다. 그 과제는 필립이 신임하는 대리인, 귈롬므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에게 주어졌다. 그는 스찌아라 콜로나(Sciarra Colonna)에 의해 정열적으로 가담하여 자신의 가문의 최고의 숙적을 수중에 얻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보니파스는 자신의 소유인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이태리 아나그니(Anagni)에 있는 궁전에서 성직 정지의 포고령을 발포할 계획이었다. 발표가 있기 전 날 밤, 드 노가레와 콜로나는 아나그니(Anagni)를 습격할 특수부대를 차출해 투입했으며, 그들이 다가가자 많은 거주자들이 줄행랑을 쳤다. 그들은 그 궁전이 거의 내버려진 상태였음을 발견했으며, 86세의 교황의 신병을 죄수로 확보했다. 3일간, 그들은 숱한 모욕을 주었으며 심지어 물리적인 학대까지 가했다. 콜로나(Colonna)는 보니파스를 현장에서 죽이려 했으나  드 노가레(de Nogaret)가 만류했다.
마침내, 4일째 되던 날, 아나그니(Anagni) 사람들이 교황을 구조하고 침입자들을 몰아낼 요량으로 돌아왔다. 교황은 몸과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은 채 골병들어 죽기 일보 전, 로마로 돌아왔으며, 몇 주일 뒤에 죽었다. 교황이 자신의 방 돌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했다는 설과 누군가가 손을 잡고 인도해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는 다른 설도 있다.
필립 르 벨이 최고 권위를 지닌 교황을 거칠게 다루었다는 것에 대해, 다른 지배자들은 비난한다거나 반격을 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토를 달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교황의 귀챦은 통제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그들 자신들의 투쟁에 제일 먼저 앞서 나가는 챔피언의 면모를 보았을 것이다. 어떠한 소동이나 논쟁도 없이, 보니파스(보니파티우스) 8세의 후계자는 10일 안에 선출되었으며 새 교황의 이름은 베네딕트(Benedict) 11세로 정해졌다.
그는 프랑스의 필립 4세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로 교무행정을 폈다. 그는 많은 양보를 했다. 필립은 그러한 양보를 받아들였으나 더 많은 양보를 요구했고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아직도 죽은 교황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던 필립은 베네딕트 11세에게 죽은 교황이 감정적으로 처리한 제소를 좋게 마무리시킬 회의를 소집하도록 요구했다.
베네딕트는 화가 치밀어 올라 1304년 7월, 아나그니(Anagni)에서 보니파스를 공격한 사건에 가담한 모든 자에 대해 격렬히 성토하고 가담자 모두를 파문한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필립은 또 다른 전쟁을 위해서 마음을 거머쥐었지만, "아나그니(Anagni) 범죄"의 유죄선고 교서를 발표한지 수 주일이 지나자 교황 베네딕트 11세는 죽고 말았다. 세간에서는 그가 필립의 명으로 독살되어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제 필립의 관심은 템플기사단 박멸의 주역을 맡을 인물을 찾는 거였다. 그리하여 찾은 인물이 보르도 市의 대주교 베르나르 드 고뜨(Bernard de Goth)란 인물이다. 둘간의 관계는  어떠한 협력관계도 이전에 가진 적이 없는 사이였으며 둘 사이는 오히려 극도로 싫어하는 사이였다. 그가 발탁된 것은 교회와 국가의 차이점을 풀기 위함이 아니었다. 드 고뜨는 필립에 대항한 보니파스의 입장에 시종일관 서 있었다. 단순히 필립은 마음대로 갖고 놀 교황을 원한 거였고 베르나르 드 고뜨(Bernard de Goth)는 이 세상에서 교황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원했다.
그들은 서로 협상했다. 야망을 불태우는 대주교는 명예, 부, 권력 등 어떠한 값을 치르고라도 교황이 되기를 바랬다. 필립은 거의 일년 가까운 협상과 논쟁, 정치적 타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추기경들이 베네딕트 11세의 계승자에 대해 동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명을 지연시켰다. 당시에 똘똘 뭉친 3개의 파벌이 있었다. 고대 로마의 오르시니(Orsini) 가문과 콜로나(Colonna) 가문에 프랑스 추기경들이 첨가되었다.(콜로나 훼밀리는 이때 부활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착상태를 깨기 위해 추기경이 아닌 사람 중에서 교황 후보를 찾으려는 결정안이 당도했는데, 프랑스 파벌은 다음과 같은 독특한 발상으로 콘클라베(Conclave:교황선출 비밀회의) 임원들을 설득시켰다.- 40일 내로 프랑스 추기경들은 자신들의 적들(다른 파벌들)이 지명한 후보들 3 명 중 한 명을 선출 할 것이다.
보르도의 대주교는 필립의 반대편에 서서 보니파스(Boniface)를 지원한 전력 때문에 3 명의 지명자 중 한 사람이 될 것으로 충분히 기대되었다. 그는 그 당시 보르도가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필립에게 충성해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었다. 지명자 리스트를 보자, 필립은 베르나르 드 고뜨(Bernard de Goth)가 자신의 사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 대한 어떠한 적개심도 그저 그런 듯이 지나쳐 보고 있으며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 예전의 어떠한 입장도 부인하고 있음을 느꼈다.  프랑스 추기경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으로 필립은 다음 번 최고의 교황이 될 세 명의 추기경 중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지명할 수 있었다. 이제 오직 드 고뜨(de Goth)와 협상하는 일만 남았다.
필립(Philip)은 콜로나(Colona)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과 맹세를 지켰으며 두 명의 콜로나 파 출신 추기경을 요구했다. 보니파스(Boniface)와 싸웠던 사람과 파문 및 견책 받은 모든 사람들은 완전히 사면될 예정이었다. 보니파스(Boniface)의 교황 교서는 말끔히 지워질 예정이었으며, 죽은 교황은 공식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을 예정이었다. 필립은 5년 간 프랑스 성직자들로부터 총수입의 10% 정도를 과세할 권리를 갖게 될 예정이었다.(드 고뜨가 템플기사단을 박해하는데 필립과 협조한 것을 서로간에 비밀로 지키기로 했다는 또 하나의 계약이 있다고 전해진다.) 대주교는 동의했으며 협상을 지키기 위해 성체에 가장 엄숙한 맹세를 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진실한 감정의 상태를 보여주는 표시로써,  필립은 단순한 맹세 하나만으로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협정의 보증으로 두 명의 형제와 두 명의 조카를 볼모로 넘겨받기를 요구했다. 1305년 11월 14일 필립은 약속을 지켰으며 베르나르 드 고뜨(Bernard de Goth)는 만장일치로 베드로의 옥좌에 선출되었다. 교황 끌르망(클레멘트) 5세의 치세가 시작된 것이다. 그의 치세 동안, 끌르망(클레멘트) 5세는 24명의 추기경을- 그 중 23명이 프랑스인- 임명해 로마 밖의 치세인 교황의 바빌론의 유수 시대를 출범시켰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그의 친척이었다.
필립은 끌르망(클레멘트) 5세가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겁쟁이였기 때문에 추기경들을 임명하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구사했다. 교황이 자신의 수행원을 데리고 고향에서 이태리로 나아가고자 해도, 그를 감시하고 통제할 용도로 허가되는 필립의 특정 징표 없이는 결코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는 남 프랑스 전역을 유랑했으며 표면상, 로마로 향했으나 결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었다. 대신 1309년, 그는 아비뇽(Avignon)에 거처를 정했다.
그 당시 그 곳은 프랑스의 영토가 아니었으며, 나폴리의 제인(Jane)이 소유한 프로방스의 땅이었다. 그녀는 자금이 필요했으므로 아비뇽을 교황에게 8만 훌로린(Florins) 금화에 팔았다. 교황은 아비뇽에 교황청과 성채를 지었으며 75년 간 교황청으로 정착되었다. 그 동안에 오직 한 명의 교황만이 로마를 방문했다. 콜로나 훼밀리는 이전 보다 더 강력한 집단으로 등장했다. 그들의 땅은 복구되었으며 로마법정은 오르시니(Orsini) 파와 보니파스 8세를 지지했던 자들에게 콜로나 훼밀리에게 10만 훌로린 금화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필립 4세는 템플기사단의 구조와 보호가 없었다면 빠리로 떼지어 습격한 자신의 시민폭도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을 거란 말이 있다. 아무튼 그는 템플기사단이 소유한 엄청난 빠리의 영지를 보고 템플기사단의 부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직접 빼앗을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 여기서는 템플기사단의 필립 4세의 박해와 도주에 대해 앨런 버틀러(alan Butler)와 스테판 다포우(Stephen Dafoe)의 「전사와 은행가(The Warrior and Bankers)」의 관련기사를 발췌, 번역 소개한다.    
필립 4세는 프랑스에서 유대인을 내쫓고 교회영지 과세에 반대하는 로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ce,Bonifatius)를 납치, 살해했으며, 교황 베네딕트 11세에게는 독약을 먹였으며 일개 프랑스 대주교였던 끌르망(Clement:클레멘트) 5세를 교황으로 만든 철권 통치가였다. 템플기사단을 체포하는 것은 프랑스가 침몰하지 않을 자금을 얻기 위한 단기간의 또 다른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1307년 봄, 프랑스 필립 4세 르 벨(Le bel)은 자신의 심복인 교황 끌르망(Clement) 5세를 시켜 싸이프러스에 머물고 있던 템플 기사단장 그랜드 마스터인 자끄 드 몰라이를 중대사를 협의하고 싶다는 명분으로 빠리로 살살 꾀어 불러들인다. 이에 자끄 드 몰라이는 성지회복을 위한 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60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말 12마리에 가득 실은 15만 훌로린(Florin:3S,6S 두 종류) 피렌체 금화 및 은화를 가지고 빠리로 들어왔다.
그러나 필립은 몇 달 동안 회의를 거듭하며 시일을 끌면서 겉으로 드러난 조직망을 파악한 이후, 동년 10월 13일 금요일 모든 템플기사단 연루자를 일제히 체포구금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서양에서 13일의 금요일에 대한 안 좋은 속담조차 바로 이같이 프리메이슨과 관련되어 생긴 것이다. 끌르망(Clement)  5세 역시 이에 보조를 맞추어 1312년에 템플 기사단을 반 기독교 세력으로 간주해 탄핵하는 포고령을 발한다.
그들 프리메이슨 집회장소인 롯찌 멤버를 모두 파악하고 공판에 회부하는데는 수 년이 걸렸으며, 그랜드 마스터 자끄 드 몰라이를 비롯한 많은 부하심복들은  그들의 막강한 부(富)를 몰수해 차지하려는 필립에 의해 사라센과의 내통이라든가 갖가지 구실로 유죄판결을 받고 필립의 명을 받은 도미니카 탁발 수도사들에 의해 세느강변의 말뚝에 묶인 채 화형되었다. 자끄 드 몰라이가 필립의 박해 의도를 알고 비밀리에 보쥬 백작에게 전권을 넘겨주었다는 말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특히 59명의 템플 기사단은 한날에 말뚝에 박혀 대중의 침세례를 받고 짓밟히는 수모를 당한 채 재로 변한 동료의 시신을 먹는 등 끔찍한 형벌 끝에 죽었고 자끄 드 몰라이도 수 년 동안 가혹한 형벌로 시달림을 당하다가 마침내 1313년 3월 18일 서서히 타오르는 불 속에서 화형당했다.
특히 이러한 과정 속에서 1307년-1314년 사이에 많은 템플기사단이 세느강변 씨떼섬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했다. 이로써 모든 유대인과 롬바르드 휘하 세력은 프랑스 군대에 저항한번 하지 못했다. 당시 템플기사단은 그 자체로 강력했으며 오직 교황을 빼고는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필립 르벨은 끌르망(클레멘트) 5세와 같은 꼭두각시 교황을 만들 궁리를 했던 것이다.
끌르망(클레멘트) 5세는 베르뜨랑 드고(Bertrand de got) 출신으로 로마 교황청 교황이 아니라 필립 4세 르 벨이 자신을 파문한 보니파스(보니파티우스) 로마 교황을 분사(憤死)시키고 설치한 프랑스 남부 아비뇽 교황청의 첫 번째 교황이다. 그는 그 이전의 교황과는 다르게 나약했고 템플라의 몰락을 가져오는데 앞장섰으며 필립 4세 르 벨이 지닌 템플라(Templar) 일망타진 계획을 포함해 그가 하고자 했던 모든 일에 고개 숙여 아첨했다.
크리스토퍼 나이트(Christopher Knight)와 로버트 로마스(Robert Lomas) 두 작가가 쓴 「히람 키와 그들의 철저한 추적(Hiram Key and their follow-up)」, 「두 번째 메시아(The Second Messiah)」를 보면 필립 4세가 끌르망(Clement) 5세에게 교황의 자리를 보장하는 대신 6가지 과제를 요구한 것으로 나온다. 6가지 요구 중 5가지는 그가 교황이 되기 전에 이루어졌고 마지막 것은 교황이 된 뒤에 이루어졌다. 일개 군주 혼자서 교황임명의 계획을 세웠는지는 다소 불합리하지만 전임 교황 한 명을 포함해 또 한 명의 교황을 살해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결론적으로 바로 이 6 번째 요구가 바로 템플기사단의 파괴였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새벽, 템플라(Templar)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13일의 금요일이 갑작스런 불운이라는 미신으로 지금까지 통용되는 실제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충분한 답이 된다. 필연코 템플라(Templar)들에게 이 사건은 급습을 받은 불운의 케이스였을 것이다. 그들은 명백히 알지도 못한 채 프랑스 전역에서 체포되어 족쇄에 채워져 강제로 감방에 보내졌다. 뒤이어 수년간의 심문과 공판, 자백들이 연이었다. 템플라에 대한 조사 보고서로 스테판(Stephen)이 쓴 첫 번 째 책 「성스럽지 못한 숭배(Unholy Worship)」는 템플라(Templar)들의 우상숭배?와 악마숭배?가 오늘날까지 우세하고 종종 현대 프리메이슨 친목회에 대한 고발들로 수놓아 꾸며지고 있음을 밝힌다.    
  고문자의 채찍과 심문의 틈 사이에서 템플라(Templar)들의 많은 고백이 광범위하게 채집되었으며, 재판과 고통은 교황 끌르망(클레멘트)이 1312년 3월, 5월 그 조직을 해체하도록 하는 두 번의 교황 교서를 발(發)하는 충분한 증거를 제공했다. 3월 22일 발(發)한 첫 번째 교서 "Vox in excelso"에는 사실상의 조직해체에 대한 명령과 해체의 정당성이 담겨 있으며 1312년 5월 2일 발(發)한 두 번 째 교서 "Ad Providam"에는 템플 기사단의 전 재산을 "성 요한 자선학교 교단(The hospital of St. john(The Hospitallers))"으로 넘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움베르토 에코의「푸코의 진자」를 번역한 이윤기는 이를 "병원기사단"으로 번역했음) 그러나 하스퍼털러 기사단의 자선사업을 위한 기증형식으로 헌납된 엄청난 재산은 결국 하스퍼털러 기사단의 재산으로 귀착되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 왕실은 이를 배경으로 착실한 경제회복을 가시화하기 시작했으며 필립 4세는 명백하게 입증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왕실이 취한 템플라(Templar)의 재산이 단지 템플 기사단의 재판비용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직을 완전히 해체 붕괴한 것이 템플라(Templar)들의 끝이 되지는 않았다.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 "자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는 감옥에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역시 다른 템플라(Templar)들과 함께 우상숭배와 성 십자가에 침을 뱉았다고 고백한 바 있지만 곧 이어 그 고백을 철회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다시 이교도로 타락한 것으로 간주되어 그의 동료 템플라(Templar)인 "죠프레이 드 샤르니(Geoffrey de Charney)"와 함께 1314년 3월 18일 세느강변의 작은 섬, 시떼섬으로 끌려가 말뚝에 박혀 화형되었다.
쟈끄 드 몰라이의 최후는 당당하고 도전적이었다. 그는 사형 집행자들에게 고문받는 동안 자신의 애정어린 단체에 대해 단지 사실이 아닌 것을 고백한 죄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자끄 드 몰라이(Jaque de Molay)"는 단지 셔츠 하나만 걸치고 불에 타 죽었다. 그가 불에 타 죽으면서 사형 집행자들을 향해 허공에 뱉은 다음의 저주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자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된 불가사의한 정언명법이 되었다.
  "필립과 끌르망(클레멘트) 모두 일 년 이내에 신 앞에 불려가 만날 것을 요청하노라." 이 저주 그대로 세속권력으로 성권(聖權)인 교권을 좌지우지한 희대의 영웅 필립(Philip)은 한 달 만인 그 해 4월 20일 죽었으며, 그의 충복 아비뇽 교황청의 주인 끌르망(클레멘트) 역시 그 해 11월 29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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