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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 인정않는 사학계가 중국의 역사침략 불렀다”(단군&고구려 파일 첨부)






“단군조선 인정않는 사학계가

중국의 역사침략 불렀다”  


제2차 고-당 전쟁 _ 중국측 논리 비판  


이종태 기자
jtlee@digitalmal.com



지난 6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중국의 '고구려역사 침공'이 본격화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당국은 「고구려 역사 지식 문답」이라는 소책자까지 배포해가며 '한국 민족'의 역사적 강역을 한반도 남부에 제한하려는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측이 이런 과정을 통해 공식화하려는 역사 인식은 ▲고구려는 중국의 예속 정권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중앙 정권의 지방할거 정권에 대한 통일전쟁', 그리고 ▲'기자조선·위만조선은 북한 혹은 한국과 아무런 역사적 관계가 없다' 등이다. 고조선을 한국사에서 분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기자는 은나라 출신이고, 위만은 한나라 출신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2004년 2월호에 게재한 역사학자 이덕일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 뿐 아니라 고조선까지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시도이며, 이엔 단군조선을 무시해온 한국 사학계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기사를 다시 한번 소개한다.(디지털말 편집자 주)

“단군조선 인정않는 사학계가 중국의 역사침략 불렀다”

대담 | 이종태 기자 _ jtlee@digitalmal.com
정리 | 이정은 기자 _ jelee@digitalmal.com
사진 | 김진석 객원기자 _ yeongook@korea.com

중국의 역사연구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으로 인해 ‘이러다 정말 고구려사를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도대체 무슨 논리로 우리 역사를 넘보고 있는지 우선 제대로 알고 비판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을 위해 『말』지는 한국역사의 대중화 작업을 선도적으로 진행시켜 온 역사학자 이덕일씨를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한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짜 대상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일 가능성이 높다.”

기자의 첫 번째 질문인 “역사학자로서 동북공정에 대한 중국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이덕일씨의 답변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만약 중국이 한국의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 기준이 되는 영토(편집자 주: 중국은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대동강 북부로 지정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은 그 기준을 한강 이북으로 못박고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현재 북한의 영토 전체가 예전엔 중국의 것이었던 셈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한 체제가 앞으로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을 것으로 파악한 것 같다. ‘동북공정’이란 작업을 통해 통일 이후, 미국을 상대로 북한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계산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더 나아가 이씨는 중국이 이처럼 터무니 없는 ‘공작’을 추진하게 된 데는, 역시 터무니 없을 정도인 한국 역사학계의 ‘자기 비하’ 탓도 크다고 주장했다. 국내 사학계의 단군조선에 대한 경시가 중국에 빌미를 줬다는 것이다.

단군 조선 없으면 고구려도 없다

보통 고조선이라면 시대순으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말한다. 그런데 이 중 한국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것은 기자조선부터다. 여기서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말기의 중국인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조선을 잇는 위만조선의 건국자인 위만(衛滿) 역시 연나라 출신이다. 이렇게 되면 고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나라가 되고 이를 잇는 고구려 역시 ‘도맷값’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인식엔 문제가 많다. 우선 단군조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내놓고 ‘단군조선은 없다’고 하면 저항이 거셀 게 뻔하니까 그렇게는 못하고, ‘한국의 청동기가 시작된 것은 BC 10세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야 국가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사학계의 통설이다.) 한국 사학계가 인정하는 BC 10세기의 고조선이란 기자 조선, 아니면 위만 조선을 칭하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기자와 위만은 중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니 고조선도 중국사에 포함시키겠다’고 해도 현재의 한국 사학계로??할 말이 없다.”

- 그렇다면 단군조선을 인정할만한 근거나 문헌이 있는가.

“‘단군조선’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다. 공간은 단군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나 하는 것인데, 만주에까지 뻗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이 그 증거다. 고인돌은 중국 요녕성에서부터 정약전 선생의 유배지였던 흑산도까지 널리 분포돼 있다. 같은 장례 풍습을 가진 집단이 중국 만주에서부터 한반도 남단까지 살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만주까지 진출했다는 소리다. 만주 이상의 지역에서는 더 이상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단군조선이 만주 일대까지 분포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이후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면서 단군조선이 평안도 일대로 축소되고 말았다. 더욱 큰 문제는 건국 시기다. 일연도 BC 23세기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만주 지역에서도 BC 2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이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주류 사학자들은 이것 역시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단군조선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고조선을 3조선이라고 한다. 단군-기자-위만조선을 총칭하는 개념인데 굳이 단군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보통 한국 사학계에서 고조선이라고 일컫는 것은 단군조선을 제외한 위만-기자 조선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기자조선은 실제 존재 여부를 두고도 상당한 논란이 있다. 단군조선을 인정한다는 것은 2천 년간 만주지역에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이후 중국에서 온 위만이 잠시 고조선을 찬탈했다 해도 ‘우리 민족의 첫 국가는 고조선’이라는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고구려가 한나라의 지방정권?

이쯤에서 기자는 이덕일씨와 함께 고구려에 대한 중국측의 논리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중국측은 “고구려가 중국 동북지역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므로 “수 양제의 고구려 침략은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 중 하나는 이른바 ‘고구려’족이 예맥, 고이 등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민족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고구려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볼 수 있는가.

“웃기는 소리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영토 안에 수립된 나라다. 당연히 고조선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중국의 영토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고조선이 강력한 구심역할을 할 때는 고구려나 발해와 같은 나라들이 나올 수 없었지만, 고조선이 무너진 뒤 그 영역 내에서 여러 세력들이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동북지역을 관할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현도군과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를 초기부터 ‘나쁜 놈’으로 묘사한 내용이 많다. 중국이란 나라가 원래 변방에서 등장한 세력에 대해 일단 인정하고 보는 식인데 고구려에 대해서만은 유독 부정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다. 고구려가 건국 과정에서 중국의 행정기관들과 충돌하고 대립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변방의 다른 민족과는 성격이 달랐던 것이다. 물론 고구려족을 구성했다는 예맥 등 북방 민족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이 이런 주장을 들고나올 수 있었던 것에는 관련 분야의 연구를 방치해 온 한국 사학계의 잘못이 있다.”

중국측은 또 고구려가 한사군(한나라가 동북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세운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등 4군을 통칭) 지역 내에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중국이라는 것이다.

“고조선의 지배층은 국가가 무너진 뒤에도 옛 고조선의 강역 중 상당 부분을 계속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토양 위에서 부여나 고구려, 옥저 들이 형성된 것이다.”

- 중국측이 한사군을 들먹이는 이유는 고조선의 강역이 중국에 완전히 편입됐으며, 고구려는 이렇게 중국 영토가 된 지역에서 건국되었으므로 당연히 중국사에 귀속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선생님 말씀은 고조선이 무너진 뒤에도 기존 지배층이 지배를 유지했다는 뜻인데, 근거는 있는가.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전쟁 결과를 보면 된다. 사서에는 한나라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들은 모두 사형을 당하거나 사형 판결을 받은 채 거금을 내고 목숨을 건졌다. 중국의 경우 이민족과의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면 제후로 봉해지는 것이 실례다. 그런데 사마천마저 ‘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 중 한 사람도 제후에 봉해진 자는 없었다’고 특별히 기록할 정도였다.”

중국 사서를 그대로 믿지 말라

중국측은 한반도 서북쪽에 있었다는 한사군을 들어 한나라의 통치가 한강 이북까지 뻗쳤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한사군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도 기록한 바가 없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일부 지역에만 설치돼 있었거나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후대에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장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우스운 것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한사군의 이름을 모두 외웠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학계에 식민사관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설사 한사군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게 우리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달달 외워야 했는지 의문이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신채호 선생은 있었다고 쳐도 만주 지역이라고 말했는데 후대 주류 사학자들이 이를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 문제다.”

- 중국측에 따르면 고구려는 중국의 ‘중앙정부’에 줄곧 조공을 바치러 온 지방정부였다는데.

“중국의 독특한 역사서술 방식이다. 외교관계로 온 타국의 사신도 모두 조공하러 온 것이라고 기록하는 식이다. 그렇게 따지면 『삼국사기』에 진대덕이란 당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것이 기록돼 있는데 그도 고구려에 조공하러 온 셈이다. 몇몇 학자들은 여기에 대고 ‘당시 조공을 하긴 했지만 당시 동아시아 관계 때문’이라고 변명하는데, ‘조공’에 관련된 부분은 중국의 독특한 역사서술 방식일 뿐이다. 중국인들이 주장한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중국은 또한 고구려가 망했을 때 인구 중 상당수가 중국에 동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인들도 이 같은 동화정책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지배층들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 그런데도 옛 고구려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니까 그곳의 고구려인들을 집단으로 중국의 남부로 이주시켰다. 그렇게 저항의욕을 막았는데도 만주에 남아있던 고구려인들은 발해를 세우지 않았는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들이 대부분 중국화됐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중국측은 수-고구려 침략을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즉, 수나라와 당나라인들이 고구려를 자신들과 하나의 민족으로 봤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사서 등의 기록은 어떠한가.

“억지가 심하면 대꾸할 게 없다. 수나라는 당시 양자강 이남에 있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다음 통일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를 다른 민족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가능한 서술이다. 그런데 수나라 건국 직후 고구려의 영양왕이 수나라를 공격하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가 자신들과 하나의 민족이라고는) 고구려를 침략한 수나라 문제도, 양제도, 당나라 태종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말리는 신하들에게 당 태종은 ‘수나라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러 가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 태종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만든 주역인데, 그의 입에서 고-수전쟁(고구려-수나라 전쟁)에서 죽어간 수나라 자제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소리가 나온 것은 분명 고구려를 다른 민족으로 봤다는 것이다. 같은 민족의 지방정권이면 통일하러 간다고 하지, 원수 갚으러 간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자기 역사를 멸시하는 나라는 없다”

- 중국은 “고려가 계승한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삼한”이라며 한국사에서 고구려사의 분리를 꾀하고 있다. 삼한은 한강 이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으며 고구려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최치원은 『삼국유사』에서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다’라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는 AD 1~3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설립되어 있었음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한국 사학계는 ‘최치원이 틀렸다’며 마한의 영역을 고구려와 분리해 전라도 일대로 한정했다. AD 1~3세기의 삼국의 존재도 지우고, 요즘으로 치면 면단위 소국들의 집합체라는 삼한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AD 3, 4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대국가가 설립됐다고 주장한다.”
- 선생님은 삼국시대가 AD 1~3세기에 이미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 성립시기는 AD 3세기 이후가 아니라 AD 1세기 이후란 말인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대로 보면 된다. 풍납토성을 보라. 이 유적은 이미 1세기 때 국가(백제)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학계는 그동안 백제가 3세기 후반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역사와 유물이 앞뒤가 안 맞게 된 것이다. 문제는 한국 사학계 주장의 근거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전부라는 것이다. 더욱이 관련 기록의 길이도 2~3장 정도로 아주 짧다. 결국 한국 사학계는 『삼국사기』의 방대한 기록을 모두 버리고 『후한서』 등 중국 사서를 취한 것인데,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역사 해석 방법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자기네 나라 사람이 쓴 자기네 역사서를 무시하고 다른 나라의,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 뭐가 있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에 의존해 만든 역사서로 자국의 역사를 해석한단 말인가.”

- 이덕일씨는 이렇게 역사가 후대 사학자들의 칼과 자에 의해 재단되다 보니 종종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한다며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원(原)삼국시대’ 전시장이 있다. 1~3세기까지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것이다. 왜 ‘원삼국시대’냐고? 한국 사학계는 이 시대가 삼국시대가 아니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온 삼국시대의 유물이 계속 출토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원삼국’이란 엉뚱한 호칭을 갖다 붙일 수밖엡. 이토록 철저하게 자국 역사를 부정하고 비하하는 사관을 갖고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 한국밖에 없다. 이뿐인가. 중국 정사에도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럴 리가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중국의 정사가 어떤 것인가. 춘추필법이라는 형식에 따라 자기네 것은 유리하게 쓰고 남에게 이로운 것은 안 쓰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기준에서 한 글자만 어긋나도 사형을 면하기 힘들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중국의 정사다. 그런 정사에 백제가 요서지역을 점령했다는 문구가 나왔는데도 믿지 않는 것이 한국 사학계의 역사 해석 방법이다.”

중국측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스스로 삼한을 계승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고려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한이 고구려라면, 중국측의 주장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되겠다.

“한국 사학계가 마한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 있었어도 이래저래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매우 당연한 사실이다. 흔히 고조선에서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전라도 일대에서 마한의 왕이 됐다고 설명하는데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도망가는 모습을 사서는 ‘주입해(走入海)’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다로 들어갔다는 뜻인데 이는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 수도가 (한국 사학계가 주장하듯) 평양이 아니라 만주였다는 증거다. 만약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면 준왕은 굳이 해로를 선택해 도망칠 필요가 없게 된다. 해로를 택했다는 것은 산세가 험해서 빨리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요동반도가 그렇다.
요동반도에서 평양으로 이동하기에 해로가 적합했던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마한이 고구려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즉, 왕건이 스스로 삼한을 계승했다고 했을 때 마한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왕건이 삼한을 계승하겠다고 하고 국호를 고려라고 했겠는가.”

우리 대륙사의 큰 줄기를 지킨 고구려

- 한국 역사 속에서 고구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 민족사는 크게 대륙사와 해양사의 체계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반도사에만 갇혀서 해석을 해왔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어 대륙사의 큰 줄기를 지켜낸 고대국가다.”

중국인들은 ‘현재 중국 영토 내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고 주장한다, 이는 곧 현재 중국 영토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들은 모두 ‘중화민족’이란 말도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예컨대 중국 동북지역에 살았던 거란, 여진, 몽고, 말갈 등 북방민족들은 언어, 문화, 관습 등에서 한족(漢族)보다 우리 민족에 더 가까웠던 것 아닌가. 이들이 세운 요, 금, 원 등을 중국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닐까. 혹시 한국 사학계는 이런 연구는 하지 않는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과거 거란, 여진, 말갈 등이 고구려 등을 부모의 나라로 모신 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럴 텐데 사실 그쪽에 대해서는 연구가 안 돼 있다. 중국사를 공부한다면 대부분 명사와 청사에 집중 할 뿐이다. 북방민족들은 우리 민족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단일 혈통을 주장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성계가 거느렸던 부대가 강했던 이유는 몽고, 여진족들로 꾸려진 기병 위주의 혼성부대였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 민족의 개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서양의 경우 봉건제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에 국가와 민족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동양에서의 민족 개념은 같은 영역에서 비슷한 언어, 비슷한 문화,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활동한 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동양인들은 서양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국가와 민족을 형성했고 이 테두리 안에서 살아왔다고 본다.”이 같은 이덕일씨의 민족개념은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그램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중국측의 역사관은 ‘중국 영토 내의 모든 역사와 민족은 중국사이며 중화민족’이란 철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 문화, 생활양식 등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견해는 기실 ‘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좌파 사관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중화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살짝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

-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 사학계와 한국 정부의 대응을 어떻게 보는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학문은 정치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현지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발언을 못하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 학자들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질책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이 문제가 불거지니까 어떤 사학자들은 재야 사학자들이 과격한 주장으로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중국이 이렇게 나오는 거라며 비난하고 있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데 그런 일에 국가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프로젝트를 수행하겠는가.

국가 차원에서의 대응도 미흡한 부분이 있다. 중국이 실컷 정부 차원에서 지원 다 해 놓고, 한국엔 ‘정부는 빠지고 민간에 맡기자’고 하니 한국 외교부가 덩달아 ‘정부가 해결할 부분이 아니라’고 했다.일본 역사왜곡의 경우 출판사 하나가 만든 교과서를 두고도 말이 많았는데,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별다른 말을 못한다.”

송의 충신 악비가 반통일분자?

- 최근 서양사학자 중에 국사를 해체하고 민족의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 중국이나 일본 등의 역사 왜곡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국가라는 거대 조직이 인간이나 개인을 억압하는 체제로서 이용되는 것은 반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독재정권이 부활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사가 국가 단위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 국사를 해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민족주의만 해도 해외 강대국들에겐 억압의 논리였지만, 우리에겐 저항의 논리였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까지 모두 도외시하고, 국사 해체를 일반 국가로 모두 확대해 버리면 국사 해체가 아니라 역사 해체로 갈 수밖에 없다.”

이덕일씨는 인터뷰 말미에 송나라의 악비 장군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금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끝까지 싸우다 배신자의 모략에 걸려 최후를 맞이한 악비는 중국에서는 이민족에 맞서 싸운 충절의 상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사당을 지어 모셨다.

악비 상 옆에 세워진 배신자 진회의 상에는 사람들이 하도 침을 많이 뱉어 ‘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안내문을 내걸 정도였단다. 하지만 금나라를 중국사로 편입하면서 악비의 위상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금은 송에 대해 통일전쟁을 추진한 것이고, 악비는 ‘반통일분자’가 된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일반 중국인 사이에서도 반발이 거세다면서, 이덕일씨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마무리지었다.

“현실 권력으로 과거의 역사를 지배하려고 하는 시도는 부분적으로 성공할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월간말 2004년 212호
이종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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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 의견





  중대고발
[2004-08-15]
맞아죽을 각오하고 이 사진 3장 올림
맞아죽을 각오하고 이 사진 3장 올림
중대고발●맞아죽을 각오하고 이 사진들 공개합니다!
자신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서 중대 친일행사(맨아래 폭로)를 벌린 한경직씨가 해방후 친일파들이 교권을 장악하는데 단단히 일조를 했습니다.

●A-bomb V 1a.zip(2.6 MB)●←클릭, 충격폭로!!

한경직 목사에 대한 8대 한(八大恨)

1980여름 .18학살의 피가 마르기도전 한국이 낳은 세계적 성자 한경직 원로목사님과 전두환장군님이 국난을 맞아 사이 좋게... 기도중. 전두환장군님께 여호수아같은 지도자가 되달라고 축복기도 했다는기라!!


어려운 사람을 찾아 기도하시는 김장환 목사님(좌측이 사모님)과 전두환 각하와 이순자 영부인님.전두환씨의 오른손이 장환목사님 무릎팍에 있네여!!

1961년 6월 정일권, 김활란, 최두선, 한경직 등 민간 사절단이 미국에 건너가 5.16 군사혁명을 설명하고 있다. 한달밖에 안됐는데 쿠데타를 기다린 듯 선전하고 다니셨네!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한경직 목사에 대한 8대 한(八大恨)
1. 일제하 우상숭배에 굴복
2. 해방후 회개거부 친일세력에 야합
3. 6.25때 양들을 두고 두 번이나 도망쳐
4. 5.16 직후 미국에 가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역설
5. 1980년 학살후 전두환에 대한 축복기도
6. 사회정의에 대한 외면
7. 신학적 회색분자
8. 2-7 사실에 대한 회개표명 없음

★진리를 위해 순교할 수 있는 결심이 확고히 서 있지 않는 사람은 함부러 목사로 나서서는 절대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 이래 순교한 수백만 성도(聖徒)들을 우롱(愚弄)하는 처사이다.

★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공적 불경건 죄에 대한 회개가 확실할 때까지 감추고 거짓말 하는 것은 성경적 태도가 아니다.

이 한경직 목사는 1939년에 당시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이 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차 총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耶蘇敎長老會聯盟)이란 기구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 결성식 순서에서 한경직 목사는 성경봉독을 했는데 문제의 로마서 13장 1-7절을 낭독한 바 있습니다.

이 구절이 바로 유명한 '위에 있는 권세에 승복하라'는 구절입니다.

이때 결의문 채택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을 세계에 선양함은 황국 부동의 국시(國是)이다. 아등(我等)은 이에 더욱 더 단결을 공고히 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능력을 발휘해서 국책 수행에 협력하고 또 복음선전 사업을 통해서 장기 건설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기함.

그래서 교인들의 한(恨)많은 종살이의 생활이 드디어 막을 열게 된 것입니다.


한경직씨는 성경을 읽어놓고도 잘못 해석하신 것 같은데... 세상법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법이 먼저입니까? 세상권세 가진 자가 "절하라!"고 했다고 천조대신에 절하면 됩니까?

★친일파 척결 실패로 축재 세습 성폭행이 일상화되어 그 명단공개★←클릭!!


중대고발



비명을 지르는 여자는 때려 쓰러뜨린 후
3.1절 기념●한국교회 친일목사 명단 발표●
사진■첨부

★진짜 물러나야할 고연넘들 명단 공개★←클릭!!
●총정리●←클릭!! 사회정화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여러분! 오늘이 광복 55주입니다. 해방은 되었으나 해방되지 못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친일파들이 가장 강력하고 철저하게 해먹은 데가 기독교계입니다.

정계는 대통령이 명색이 독립투사였고, 국회의장 신익희도 임정요인이었습니다. 심지어 공군사관학교에서도 초대총장 김정열이 친일파라고 근래에 사관생도들이 반대하여 동상을 세우는 게 저지되었고 사관학교의 일부 교수들이 부추기기까지 하였답니다.

불교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1952 등 2차에 걸친 불교유시까지 겹쳐 해방후 불과 200명 남은 비구승들이 7천명이나 되는 대처승들을 장장 17년간의 정화운동 끝에 1969년 마침내 왜색승인 대처승들을 절에서 쫓아내고 대처종단인 태고종단(현재는 여기도 40%는 비구승)을 만들어 나가게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기독교계는 위에 비교하여 일제에 아부하고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친일목사들이 지금까지도 살아 숨쉬며 교계의 최고 원로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신사참배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대부분 순교하고(50명) 나온 20여명의 목사, 전도사들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하고 그들의 예배당까지 탈취해 버렸습니다.

알아서 긴 감리교, 성결교는 모조리 썩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카토릭은 그나마 최근 추기경이 사과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들의 똘마니들인 다수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교회사 왜곡에 광분하고 있고, 신학교에서는 교수들이 밥그릇싸움이나 하며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 잡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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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28-30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철저히 파헤친 한국교회사 그 실상과 허상 II
바로 알고 바로 믿자

* 아래 책의 저자는 학살자들을 축복한 한경직 목사를 반란방조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한 이선교 목사님. 맨뒤에 소개가 나옴.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여성들은 일찍 결혼하여 아이를 안고 오면 얘기를 잡아 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갔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는 때려 쓰러뜨린 후 끌고 갔다. 그는 10-20만 정도가 정신대로 끌려갔고 이중 5천명 정도가 조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에 있으면서 이름을 바꾸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1942년 12월 김활란은 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썼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하라고 외쳤다.

1941년 12월 모윤숙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직후 조선임전 보국단이라는 친일 어용단체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우리들 여성의 머리 속에 대화혼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이라고 권장하였다. 이런 여성에게 전두환 정부는 3.1문화상을 수상했고, 1990년 그녀가 죽은 후 노태우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으니 국민정신이 제대로 되겠는가?

김동환, 노천명, 김동인, 주요한, 김상용, 서정주, 장덕조, 김소운 등은 일본을 대대적으로 찬양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15명이 참석하여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다음은 목사들의 주장을 요약하였다.

1. 백락준(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
황금만능주의 밑에서 운전되는 것이 미국입니다. 선전만 잘하면 전국적으로도 지위를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침략의 마수를 뻗어왔던 것입니다. 이 형세를 그대로 방임해 두면 동아공영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기보다 명백한 것입니다.
영원히 광만 뻗도록
그동안 날과 달을 거듭할 수록 더욱 감개 깊이 생각되는 것은 이 싸움이 가진 도의적인 성격과 위대한 이상이다.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적이 없었다.
(1943년 12월 5일자 매일신보에 기고)

그는 해방 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총장까지 하였다.

2. 전필순 목사(조선장로교회 부총무)
미국은 동양이나 우리 일본에 대해서 온갖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괴롭힘으로써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우월감을 갖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는 후에 장로교 통합측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3. 정춘수 목사(조선감리교 총감독)
-생략-

7. 양주삼 목사(조선성서회 행정총무 감리교 목사)
-생략-

8. 윤치영(중앙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
-생략-

9. 윤일선 목사(세브란스의전 교수)
-생략-

11. 최태용 목사(복음교회 감독)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단정하였다. 친일파인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들에게 "유다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도하였다.

분단이 외세에 의한 것이라고 미국과 소련을 규탄할 수 있는가! 친일파들은 독립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감히 기독교는 얼굴조차 들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진실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이대로는 절대 안된다.

웨슬레는 "우리는 사람의 잘못된 행실을 징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얼마동안은 그를 참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우리 가운데 계속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범죄하거든 권고하고 듣지 않거든 증인을 세워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다(마태 18:17).

친일파 그들은 반드시 처벌받아 강단과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해방과 함께 기독교는 범 회개운동이 있어야 했는데 우리는 회개운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유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는 친일파들 때문이며 그들은 반성은 커녕 변명으로 일관하여 분열과 분단을 추래하였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 독재자의 앞잡이가 되어 기독교와 한국정신을 부패하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너무 쉽게 용서해주고 잊어버리고 있다.

현재 기독교 목사들의 사고방식은 거의가 어용 사상이 지배적으로 어용목사가 훌륭한 목사요 국가를 사랑하는 목사로 인식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로 우리는 혼돈가운데 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비겁한 마음과 자기를 위한 어용기회주의 사상을 전염시켜 사회 어느 한 곳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여 마귀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였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암적존재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토록 반성하지 않는 자들을 용서해 주고 덮어 주고 변호하고 찬양하는 것이 기독교 사랑인 것처럼 기독교 사상을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 회복과 정의가 실현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어용사상이 사라지지 않는한 이땅에 도덕성 회복은 요원하다.

한경직 목사는 1992년 6월 18일 여의도 63빌딩에서 뎀 풀턴상 수상 축하식 인사말에서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라고 47년만에 회개를 하였으나 그는 회개할 일이 너무 많은 목사이다.

기독교의 분열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평양 감옥에 있던 많은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집에도 가지 않고 평양시내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있으면서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5가지를 1945년 9월 20일에 발표하였다. 출옥한 이기선 목사는 5가지 원칙을 지지하는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30여교회를 합쳐 1949년 5월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분은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고흥봉 목사, 채정민 목사, 한상동 목사(1901-1976), 주남선 목사, 오윤선 장로, 김인희 전도사, 김화준 전도사, 서정환 전도사, 조수옥 전도사(2001년 현재 생존), 이현숙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 손명복 전도사, 이주원 전도사, 방계성 장로, 박신근 집사, 장두희 집사, 양대록 집사, 이광록 집사, 김형락 선생.

1945년 11월 14일 평북노회 주최로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평북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있었다. 강사는 이기선 목사와 박형룡 박사였고 참석한 교역자는 200여명이었다. 여기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5원칙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2.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간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나 장로가 휴직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 할 것.

이상의 5가지 원칙에 신사참배 결의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등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홍택기 목사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괴변을 토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여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산정현교회 정일선 목사, 남산현교회 송정훈 목사, 김철훈 목사 등은 "어떻게 목사가 자기만 살기 위해서 교회를 버리고 남으로 탈출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탈출을 반대하다 북한에서 순교당하고 말았다.

조만식 장로는 "이 가엾은 백성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월남할 수는 없다. 나는 살아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살고 죽어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월남 권유를 거절하였다.

1946년 김일성 비서인 강량욱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였다. 또한 김익두 목사가 회장이 되자 북한의 교역자가 거의 이 연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감리교 부흥파의 목표는 일제의 잔재와 부역 교역자들의 완전퇴진을 주장했고, 재건파측은 죄가 많고 적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죄를 통회하는 신앙부흥을 통하여 교회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1947년 1월 11일 연합회의에서 감독을 의장으로 고치고 강태희 목사가 의장이 되었다. 총회는 친일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반역자들이 감리사로 출세하게 되었다. 1947년 2월 3일 홍현설, 변홍규 등 40여 명 목사와 문창모, 박현숙 등 평신도 56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내용은 "교권을 잡은 재건파가 교회 장정을 유린하고 불법적 방법으로 연합을 가로막고 친일파를 두호하고 있다. 특히 친일교역자 19명은 감리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서모독죄: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배척하였고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을 거부하려 하였고 김진철 학생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를 읽었다고 출교시켰다.
2) 신사참배찬양죄: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가정에 가미나다를 설치케하고 상동교회를 신사로 만들고 교역자들을 미소기바라에 참여케하였다.
3) 재산매매비리죄: 감리교 37개의 교회건물과 31개의 목사관을 매각처분하였고 공주 영명학교 농지 18,360평과 은퇴교역자를 위한 땅도 매각처분한 돈 40만원 중 절반은 일본군을 위하여 비행기 헌납금으로 하였고 나머지는 총리원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은퇴교역자 농지매각은 1945년 9월에 하였다. 사용처를 밝혀라.
4) 배신교역자: 친미적인 교역자 40여명을 해직 강등 자격취소를 하였고 그리고 일본 정부당국과 야합하여 그들을 투옥, 고문하게 하였다.

1954년 3월 16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다시 분열되었다가 1958년 8월 다시 재통합이 되었다.

성결교회는 1945년 11월 9일-10일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하였다. 교단명칭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라고 변경하였다.

이때 총회장에 박현명 목사가 추대되었고, 신학교도 개교가 되어 이건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박현명 목사는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분이요, 이건 목사는 징병제를 찬양한 분이었으나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거나 친일파를 규탄하는 일이 없어 교단이 분열되지 않았다.

1945년 9월 18일 출옥성도가 많은 경남노릿?서둘러서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신사참배교역자들에게

1) 목사 전도사 등은 일제히 자숙한 후 일반 교회를 시작할 것.
2)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실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1946년 7월 9일 제47회 정기노회에서 임원진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가 회장이 되었다.

이에 친일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할 것이며 지금 해방이 되었다 해서 죄로 운운함은 비 양심적이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출옥성도를 비양심적이라고 매도하면서 교묘히 자숙안을 삭제하고 피하였다. 그로 인해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웃지 못할 논쟁이 시작되었다. 신사참배자들의 뻔뻔스런 태도에 한심할 지경이었다.

1946년 4월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담임하고 있던 한상동 목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친일목사들과의 갈등으로 견디지 못하고 월남하여 주남선, 박윤선 박사와 만나 고려신학교를 세울 것을 협의하였다.

1946년 6월부터 8월까지 진해에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힘이 되어 1946년 9월 2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47년 제48회 경남노회에서는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고, 학생추천 취소 결의를 하였다. 그 이유는 극단 보수주의 선교사를 영입했다는 것이다.

이에 1946년 12월 3일 한상동 목사는 "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라고 선언하고 신사참배 교역자들과 결별하였다. 경남노회 67개 교회도 제48회 노회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경남노회는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1947년 3월 10일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노회장 김길창 목사와 임원 전원이 사임하고 신사참배에 대해 통회하고 출옥 성도들의 마음을 상치 않게 하여 수습하였다. 한상동 목사도 제49회 경남노회에서 탈퇴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는 메첸파 선교사와 신앙노선 갈등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신사참배 교역자들은 1948년 7월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한상동 목사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 49회 임시노회에서 44대 21로 고려신학교 설립 인정을 취소하였다. 이렇게 되어 경남노회는 출옥 성도 지지파와 적극반대파 중간파로 갈리어졌다. 1948년 5월 총회에서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다.

김재준 목사는 축자 영감설을 부인하였다. 이에 보수진영에서는 성경 오류설에 대한 해명과 취소와 사과를 요구하였다. 이일로 총회는 수라장이 되어 기마경찰대가 동원되어 총회는 해산되었다. 6.25 두 달 전 일이다.

1947년 4월 대구에서 제33회 총회시 51명의 연서로 김재준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새벽예배 시간에 학생끼리도 서로 싸움하여 수라장이 되었고 특히 정규오, 이노수, 손치호, 이성권, 이치복, 손두환 학생들이 김재준 교수의 강의를 해명하라고 요구하고 나왔다. 진정서 내용은

1)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다"라는 학교 이념을 이해할 수 없다.
2) 근대주의와 고등비평 성서해석법 도입
3) 김재준 교수의 문서설과 성서 권위부정, 정통교회 공박, 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 찾을 수 없다. 칼빈 예ㅇ隙?숙명론이다.

4) 송창근 교수의 공관복음 금과 돌 설명
5) 정대위 교수의 속죄론이 이해할 수 없다. 등의 내용이다.

1950년 4월 21일 제36회 총회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 조선신학교측은 장로회 신학교측의 대의원을 총대로 인정하지 않자 서로가 인정하지 않아 조선신학교측이 강단에 올라가 총회장을 끌어내리고 기물을 파괴하는 대 소동이 벌어져 기마경찰이 출동되어 총회는 해산되었고 특별위원의 수습방안에 따라 정회하고 회의는 9월로 연기되었으나 6.25의 난리로 9월에도 속회되지 못하였다.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제36회 총회가 속회되어 총회 직영 새 신학교를 대구서 개교하기로 하였다. 이때 총회 서기는 유호준 목사였다.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37회 총회때 김재준 목사는 교수의 면직, 목사직 박탈, 조선신학교 졸업생 교역자 불채용으로 처벌하자 1953년 4월 25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제38회 총회시 한국 기독교장로회로 되었다.

1951년 5월 24일 남북이 치열한 전쟁중에 있을 때 기독교 대표들은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하지 않고 장로교 36회 총회가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회되어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신앙을 지켜온 고려파를 정죄하고 출옥성도가 제외된 가운데 경남노회가 조직되었다.

1952년 4월 29일 제37회 총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고신측이 되었다.



★충격진상★(사진첨부)
철저폭로

길닦아 놓으니 문둥이가 먼저...
사기꾼 목사들-한국교회 지도부

글쓴이 : 김보강 (guest) , 글쓴시각 : 1998년 11월20일 08:46:18

한국이 망해 자빠진 이유를 이제서야 바로 알았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그 스스로 버려져 밟히울 뿐 아니라 다른 음식도 썩게 만든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한경직씨는 전두환을 "여호수아같은 지도자가 되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대며?

1961년 6월 정일권, 김활란, 최두선, 한경직 등 민간 사절단이 미국에 건너가 5.16군사혁명을 설명하고 있다.



철저히 파헤친 한국교회사-실상과 허상 III
바로 알고 바로 믿자



1948년 조선신학교에서 정통을 자랑하던 51명의 학생과 그외 10여명으로 복음동지회를 구성하여 김재준 교수를 몰아내고 1952년 7월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조직하고 12월에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운동의 고문이 바로 박형룡박사이다. 이들은 단순한 신앙운동이 아니라 43회 총회 때는 총회 임원이 이들의 일색이었다. 이들은 박형룡 박사의 3,000만환 사건이 터지자 박형룡 교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 하였다.

1959년 9월 24일 대한 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회되었다.
다음날 이환수 목사가 경기노회 총대 선출 내용을 가지고 계속 되풀이 발언을 하자 박희몽, 김자경 장로 등이 "독사의 자식들아 에큐메니칼은 용공단체요 신신학이다"라는 폭언과 함께 회의를 방해하였다. 경기노회는 총대를 다시 선출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노진현 목사는 정회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전중앙교회 교인들이 회의장에 나타나 교회의자를 뒤엎으면서 회원 목사들(통합측)을 고무신짝으로 두들겨 패나 목사들은 얻어 맞으면서도 이리저리 피하며 150여 명의 회원이 남아 회의장을 떠나려 하지 않자 대전중앙교회 목사요 부총회장인 양화석 목사가 나타나 "더이상 장소를 제공할 수 없으니 회원들은 나가달라"고 하며 강제 추방시켰다. 4.19와 5.16 얼마전 일로서 한심한 일이었다.

대전중앙교회에서 겨난 149명 총대들은 1959년 9월 28일 오후 1시 대전 미락식당에 모여 전필순 목사를 회장, 김광현 목사를 서기로 선정하고 총회 속개 준비를 구성하고 29일 오전 10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통합측이 되었다.

합동측은 1962년 11월 19일 박병훈 목사가 주도하는 호헌파로 분열되었고 다시 김치선 목사가 주도하는 성경장로회로 분열하였고 다시 1963년 9월 17일, 고신측과 합동하였다가, 분열하였다.

다시 대한 예수교장로교 합동측은 개혁파, 개혁2파, 개혁3파, 개혁보수, 개혁정통, 근본1, 근본2, 독노회1, 독노회2, 로고스공의회, 보수, 보수개혁, 보수재건, 보수측, 법통, 보수합동, 사당동측, 보수합동, 홍은동측, 성합, 성합측, 순장, 연합측, 장신, 재건, 정립, 정통, 종합, 중립, 중앙, 합동개혁, 합동보수1, 합동보수, 합동장신, 합동정통, 합동중앙, 합동총신, 합동총연, 합동총회, 합동환원, 혁신, 협동, 호헌1, 호헌2, 호헌3, 합동총회측 등 헤아릴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하였다(고린도 전서 3:3-4). 여기 성서대로 한다면 그들은 목사는 그만두고 사람도 아니다.

감리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예수교대한감리회, 예수교대한감리회 등이며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등이다.

1945년 9월 윤하영과 한경직등은 신의주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이재복 목사는 14연대 반란사건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이재복 목사는 남로당 군사부 조직책이었으며 박정희는 육군안의 조직책이었다.

쌍룡그룹 전회장 김성곤씨는 경북인민위원회 재정부장으로 대구폭동에 가담하였고 공화당 당의장 서리 백남억씨는 부산철도노조 파업지도자로서 대구폭동에 가담하여 대한민국에서는 출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을 찬양했던 친일파 목사들은 일본이 망하여 해방되었으면 자숙하고 근신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는 커녕 교권을 유지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1950년 6월 27일 종로1가 기독교서회 2층에서 교역자들 약 40여 명이 모였다.

장로교: 한경직, 김종대, 김린서, 강원용
감리교: 김유순, 박만춘
성결교: 김유연

이때 1946년 교회를 버리고 월남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이북에서 양들을 버리고 월남했으니 이제는 참회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는 양을 지키고 또한 수도를 지킬 순교적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의 말에 교역자들은 서울사수를 결의하였고 그 후 제일 먼저 도망친 분은 한경직 목사였다. 입으로야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기독교민주동맹 위원장 김창준 목사는 교단별로 환영대회 대표를 선정하였다.

고문: 신흥우 목사
총무: 박성산 목사
장로교: 유호준, 김종대, 최문식
감리교: 박만춘, 심명섭, 최택
성결교: 1명
구세군: 황종률

이상의 대표들은 처음에는 인민군 환영대회를 거부하였으나 서울시 종교를 담당하고 있는 경동교회 신자인 김욱이 강력히 권고하여 환영대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7월 10일 종로2가 YMCA강당에서 환영대회를 가졌다.

사회: 유호준 목사
환영사: 김종대 목사

사회를 보기로 결정한 유호준 목사가 신병으로 불참하?대신 다른 사람이 사회를 보았으며 설교 김종대 환영문 낭독은 임영빈 목사가 하였다 내용은 "김일성 장군!..."

심명섭은 일본 식민지 때는 일본의 앞잡이었다가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공산당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1950년 10월 25일 장로교 한경직 목사, 선교사 아담스 목사, 권세열, 윤하영, 친일파 전필순 목사 등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 서문밖교회에서 3,0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위의 교역자와 함께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한경직 목사가 사회를 보았고 황은균 목사가 설교를 하였다.

1950년 11월 말경 평양시내 교회는 연합으로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에 참석한 약 5,000여 명의 성도들은 첫 시간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세쨋날이 지나고 네쨋날이 돌아왔을 때 강사와 교역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성도들은 영문을 모르고 아무리 기다려도 강사와 교역자들은 영영 나타나지를 않았다. 알고보니 미 고위 장성으로부터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듣고 강사 이대영 목사와 다른 목사들이 부흥회를 마치지도 않고, 또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자기들만 살기 위해서 양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때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을 돕기 위하여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를 도왔다. 1960년 2월 18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교계 지도자 초청모임에서 목사들은 이승만 장로를 대대적으로 지지하였다.

이승만은 1925년 독직사건으로 탄핵이 되었고 미국에서도 독립자금 운영에 대해서 규탄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이 자기의 잘못을 폭로할까봐 천대한 것이 민족의 골수까지 사무친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하고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설곳이 없게 하였다.

이승만은 장로요, 최인규는 장로교 집사이며 이기붕은 감리교 권사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해서 기독교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이러기에 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면서 종교는 가장 무서운 사회악으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박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될 암적 존재들이다.

기독교는 해방이 되어 신앙과 정의에 사는 분이 심히도 적어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한 무리들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민족의 반역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기독교였다.

1959년 44회 장로회 총회 분열후 통합측은 민족반역자 전필순을 용납하고 그를 총회장에 추대하였고 성결교회는 이명직을 서울신대 학장으로 추대하였다.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의 일꾼될 위대한 종들을 교육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가 없다면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마태 7:21) 일반 친목단체이다. 그들은 개인구원에 집착하여 오직 자기 환상에 도취되어 있다.

식민지시대와 이승만 장로의 독재시대 때 얼마나 많은 교역자들이 로마서 13장 1절을 악용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순종하라."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왜곡했던가?

박정희가 불법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장면 정부를 몰아냈는 데도 기독교 일부에서는 그의 잘못을 지적하기는 커녕 환영하는 추세였다.

1961년 반란을 일으킨지 35일만인 6월 21일, 반란정부를 강력히 반대하는 미국정부에게 반란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기독교대표 한경직 목사와 최두선, 김활란, 정일권 등이 미국에 도착 애원을 할 정도였다.

1969년 9월 4일 평안교회 김윤찬 목사,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대학생선교회 김준곤 목사, 김장환 목사등의 보수교파라고 하는 242명의 목사들은 대한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김윤찬 목사를 선출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선개헌 지지와 양심자유선언을 위한 기독교 성직자 일동'으로 발표하고 또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체제를 바란다.'고 하며 더욱더 강력한 독재를 요구하였다.

대한기독교연합회는 1972년 "유신개헌과 유신헌법을 지지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75년 지원상과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목사, 홍현설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기독교연합회를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로 다시 발족하고 "서울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전북 김제군 백구면 소재의 난산교회 강희남 목사가 1976년 신.구교 월요기도회에서 기도한 내용과 강희남 목사가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부정부패의 근원인 유신정권의 뿌리를 뽑는 길이다."라고 하자 이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과 반공법 위반이라고 하며 구속하였다. 강희남 목사는 "박정희 정부는 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하여 합법정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다."라고 하며 신청을 거부하였다. 그는 일생을 농촌에서 목회하였다. 1977년 11월 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7년의 선고를 받은 강희남 목사는 박정희의 죽음으로 복역중 석방되었다.

여기 국보위 종교담당은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목사이며 입법에는 조향록 목사가 관여하였다.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국보위 종교담당 정진경 목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입법부 조향록 목사, 김지길 목사 등 20명의 기독교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호화찬란하게 열렸다.

사회 문만필 목사로 쳄滂?예배에 조향록 목사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 김지길 목사의 '한국 기독교를 위한 기도'가 이어졌고 국보위 종교담당 정진경 목사는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기도'에서 "구석구석 악을 제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김인득 장로의 '군 장병을 위한 기도'에 이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있었다. 배후 주선은 보안사령부 군목 문만필 성결교 목사였다.

이 조찬기도회는 문화방송, 중앙방송에서 여러 번 반복 방영하였고, 일간.중앙신문은 머리기사로 다루어 전두환소장을 국민들에게 부각시켰다.

더욱 기막힌 것은 전두환 집단의 죄를 지적하기는 커녕 찬양을 하고도 그들은 지금껏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인지 선한 일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교인들을 가르치겠는가?(에레미아 5:30-31) 그들이 가르친다고 교인들이 감화를 받겠는가? 그들은 자기과시를 위해 허공에 외치고 있지 않은가?

김수환 추기경은 70년대 부활절 강론에서 "박정희는 비 민주적이다"하면서 유신을 반대하고 도덕적 잘못과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하여 박정희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다.

세계 복음주의자들은 1974년 7월 16일 세계복음화 국제대회를 스위스 로잔에서 가졌다. 이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우리는 전도와 사회적, 정치적 참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의 두부분인 것을 인정한다."라고 고백하면서 "지금까지 사회문제에 대하여 등한시 했던 것과 때로는 전도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서로 배타적인 것인양 생각했던 일에 뉘우침을 표명하고"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로잔언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권념에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제자로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따라서 사회 경제 또는 정치적 불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는 대분부를 왜곡하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의 위임으로 절대 권력이 있을 수 없다. 권력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만일 권력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백성을 탄압하는 일이나 권력자가 자신을 위하여 악하게 휘두르는 경우 기독인은 불복으로 항거해야 한다. 워싱턴의 독립전쟁 크롬웰의 혁명등은 법과 정의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권력자에게 저항한 좋은 예이다.

맺음말
기독교 목사들이 징병제를 찬양할 때 조선의 젊은이 26만 명이 개끌려 가듯 징병에 끌려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징용으로 50여만 명이, 정신대로 20여만 명이 끌려갔다.

친일파 목사들은 죽음의 길로 가는 동족을 찬양하였으니 살인 협조자들이 아닌가! 그들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이 패전하여 해방되었을 때 회개와 반성은 고사하고 그들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처벌받기는 커녕 오히려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과연 이래서야 되겠는가?

1944년 8월 24일 드골 장군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로써 나치스를 위해 협력한 자들을 처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1만 1천여 명을 즉결처형하였고, 정기 재판소가 설치된 뒤에도 767명이 사형되었으며, 3만 9천여 명이 투옥되었고 4만여 명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독일군에게 부역한 자들도 여생을 시민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숨져가도록 하였다. 1차대전의 영웅 패당 원수는 나치스와 협력하여 비시 괴뢰정권을 이끌었다고 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섬 유배지에서 복역중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묻지 못하게 하였다.

독일에서는 현재까지도 나치스 범법자들을 추적하고 있어 형사처벌에 시효가 없다. 나치스에 협력한 목사들도 가차없이 처단하여 교회와 공직에서 축출했으며 현상학의 거두 하이데거도 나치스에 협력하였다고 하여 일생을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였다.

1948년 8월 17일 해방후 3년을 끌어오던 반민법 초안이 국회 의사 일정에 상정되어 9월 7일 제36차 본 회의에서 141명중 찬성 103표, 반대 6표로 절대적 다수로 통과되었다. 이승만 장로는 친일파 숙청에 가장 앞장을 서야 할 분이 반민법은 비민주적이라고 반대하고 나왔다.

반민특위는 7,000여명의 친일 반역자를 파악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목사들은 장로교 정인과, 김길창, 신흥우, 윤치호, 김활란, 감리교 정춘수, 김인선, 양주삼, 등이 검거되어 친일 반역자 검거에 한창이었다.

반민특위활동을 강력히 저지하는 단체는 이승만 장로를 중심해서 친일반역자들과 일경 출신의 경찰 간부들이었다. 반민특위는 영장 408건 발부, 305명 체포, 221건을 기소, 사형 1명, 무기 1명, 유기징역 10명의 판결을 내렸으나 1950년 봄 전원 석방되고 말았다.

장면 정부의 제2공화국은 60%가 친일 반역자였고 박정희 정부의 제3공화국은 본인이 일본 육사출신으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이므로 더 설명이 필요없는 정부였다.

우리의 골수까지 사무친 친일 반역자들을 철저히 숙청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어용이 살 수 없는 세瓚?만들어 국가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잡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방된지 42년이 지난 오늘까지 친일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어용 천국을 만들었다.

친일 반역 교역자들이 주기철 목사 가족을 산정현교회 목사관에서 몰아 내고도 서울에서 버젓이 목회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장로교단, 양주삼 목사가 아직까지 존경을 받고 있는 감리교단 등 기독교는 어용의 온상으로 민족정기를 좀먹는 단체로 오늘의 현실문제를 낳았다.

징병제를 찬양하고 신사참배를 권고하고 황국신민된 것을 감사하고 성경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이명직 목사가 서울신학대학 학장이 되어 학생을 가르쳤으니 그의 제자들의 사상이 어떠하겠는가! 그러기에 성결교회 역사와 문학연구회에서 출판한 성결교회 인물전을 보면 이들을 대대적으로 칭찬하기를 '사부요 교부'라고 하기까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으며 성결교가의 작사자가 이명직 목사인데도 누구 한 사람 말하는 목사들이 없다. 이러한 이명직 목사를 칭찬하면 출세하고 나쁘다고 하면 고립되는 교단 풍토가 되었다.

어용 목사들은 독재자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과 같은 인간들로서 독재자의 죄를 지적하여 바른 길을 가도록 할 용기가 없다면 목회나 할 일이지 범죄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범죄의 협조자가 되어 이땅을 범죄의 소굴이 되게 하고 있다.

어용을 몰아내지 않고는 교회의 화평이나 법의 회복, 질서 회복, 도덕성 회복을 절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는 법과 질서와 도덕성이 마비된지 오래다.

기독교 목사들은 독재자를 축복해 주고 부자를 우대하고 정직한 생활과 용기 있는 생활 예수님 고난에 동참하는 생걀?대해서는 외면하였다. 의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처벌로 인식되었고 시민 대중과 근로자의 고통을 믿음이 적은 결과로 돌려버리고 관심조차 없었다. 특히 조용기 목사와 일부 부흥강사라는 자들은 한국 기독교정신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출세를 위한 것이라면 사탄의 앞잡이도 주저하지 않는다(열왕기 상 22: 6, 20-23)
어용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도 도덕성 회복도 절대 불가능하다.





발행처: 풀빛목회, 1993년 4월 발행
저자: 이선교/1942년 11월 평양 동산동 출생, 성결교신학교 졸, 서울 신학대학원 졸, 현재 수유리 백운교회 담임목사

환난의 현장에서 몸소 환난을 당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께 호소하여 하나님의 도움으로 환난을 해결하려는 믿음의 노력은 하지 않고 자기만 살기 위하여 양을 버리고 도망쳐온 한경직 목사외 다수의 목사들이 또 도망쳐 고난에 동참하는 종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사회는 어느 한 구석 썩지 않은 곳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목사들의 사명이 무엇인가 "악인에게 경고하여 악한길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에스겔 33:8).

1993년 3월 이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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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고발



그렇죠
[2004-08-13]
친일파 식민사학자와 노무현의 사대굴종외교가 불러왔다.
남의나라 역사 침공해서도 안되지만 자기나라 역사마저 부정하고 잘라내는 어리석은 소위 한국의 역사학자들이여.

친일반민족 역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파 역사학이 해방후 강단을 점하?우리 국민들에게 사상적 뿌리를 없게 만들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당연히 강력대처해야지만 지금까지 고대 우리역사를 부정하고 중국과 일제의 식민사관을 강요해 온게 누군가?
바로 역사학자라는 놈들이다.
이놈들 먼저 심판해야 한다.

또한 노무현의 미국종속과 한미동맹을 내세운 이라크 파병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식 부재에서 오는 사대주의의 결과물이다.

북에 대한 적대를 조장하고 민족공조는 가벼히 하고 오로지 미국따라지 한미동맹만을 외치고 일본가서 드러낸 노무현의 천박한 역사의식 부재, 사대주의, 비굴함이 바로 중국의 동북공장을 불러온 현실적 이유다.

동북공정은 앞으로 벌어질 북한과 만주에서의 미국과 중국간의 분쟁에서 중국이 확실한 안전과 주권을 보장받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노무현의 미국의 완전 종속 노선을 대비함이고 미국이 추진하는 무력적 북한 붕괴정책을 대비함이다.

따라서

1. 우리는 이 문제에 중국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

2. 또 현재 중국의 사대적이고 반역적인 이론적 토대를 불러온 교수라는 감투쓰고 나라 팔어먹는 식민사학자들을 몰아내야 한다. 아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

3. 마지막으로 노무현은 빨리 이라크에서 철군하고 미국일방적 종속노선에서 벗어나고 일본의 각종 역사적 범죄와 군국주의 기도만행을 저지해야 하며 자주적 외교를 펴고 세계인류와 공평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노선으로 발리 변경해야한다.

그럴때 중국의 동북공정은 막을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식민사학을 극복 하지않고,
노무현의 미국과 일본에 대한 병※신같은 사대적이고 굴종적인 외교 자세로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를 막기 힘들다.

주체성 없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누구도 친구로 하려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으며 무시하고 휘두를려고 하는 것이 고금의 역사적 진실이다.



섬뜩
[2004-08-07]
스티븐님의 글, 섬뜩하네요
젊은 친구들도 그 모양이란 말이죠. 사실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은 안티-민족과 안티-국가이죠. 사실 이런 입장이 그 중일 지식인들 보단 훨씬 성숙한 태도이긴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한국의 현재 젊은이들은 중국과 일본 덕분에 저절로 안티-민족과 안티-국가의 '혜택'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steven
[2004-08-07]
Peace against Hegemonism
As a Korean in the US, I met many Chinese (including people from Hong Kong) and Japanese people, most of whom are intellectuals. What I found was that they were very nationalistic and even chauvinistic.

The Japanese were more or less unrevealing their thinking until the final moment, but the Chinese were so arrogant that they tended to say that everything good and original came from China (blah blah blah...) whenever they had chances.

I saw that even a young Hong Kong female anthropologist, who has a Ph D degree and studies Moder Korea in the US, once talked of a China-centered East Asian culture while discussing the Korean Wave (Hanryu) as if sinocentric culture(?) contributed to hanryu. At that time, I wondered why it was necessary to link hanryu and sinocentrism in such a weird way.

I felt that such sinocentrism could hurt East Asian cooperation if there would be no correction in mutual respect. We are living in the 21th century. History is not a soccer ball for winning a game. Why touching a neighbor's national history? But we should try to construct a cooperative relationship with the neigbhoring country's people who love peace, while being aware of some arrogance and agressiveness among their elites.



야해
[2004-08-05]
내용은 안봤지만 제목만으로도 맞는 말이요. 반민족세력의 역사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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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상고 대륙사의 대국적인 틀-안원전의 21세기 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연재의 변- [1]

안원전
2002/03/18 1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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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고고학,문화인류학의 동이족 상고대륙사&프리메이슨 서양사&증산도 후천개벽진리) 사이트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원전
2002/03/25 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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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세계 유력지 및 국내 일간지, 방송, 잡지 종합 모아보기&검색 사이트 [363]

안원전
2002/03/09 17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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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SD [10]

안원전
2002/03/09 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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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상고사 사이트 [4]

안원전
2002/01/30 17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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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5]

안원전
2002/07/12 18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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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2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6]

안원전
2002/07/12 3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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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3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3/07/23 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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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4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2]

안원전
2002/07/12 12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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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5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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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6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2]

안원전
2002/07/12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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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7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8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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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8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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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9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8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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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0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1]

안원전
2002/07/12 9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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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1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4]

안원전
2002/07/12 8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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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 서양사 12 (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13부이하 아래에 계속.. [2]

안원전
2002/07/12 26470
389
  “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

안원전
2017/08/13 27
388
 MB정부서 특수채 380조 발행..4대강 등 자금조달

안원전
2017/07/02 101
387
 국조 단군왕검의 탄신일을 잊고 사는 대한민국 (1부)

안원전
2017/06/26 131
386
 노론·친일파 세상과 박노자, 한겨레

안원전
2017/06/25 126
385
 『한겨레21』길윤형 편집장에게 묻는다

안원전
2017/06/25 107
384
 단군 말살에 앞장 선 「한겨레 21」

안원전
2017/06/25 122
383
 시진핑, 건국절 언급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활동 강조

안원전
2016/09/07 870
382
 역사학계 "건국절 주장, 친일파 위한 '역사 세탁'이 본질"

안원전
2016/08/23 733
381
 [칼럼] 북한 붕괴 임박설, 이명박근혜 정권 망쳤다.

안원전
2016/08/15 831
380
 나라 망신의 주범 박근혜와 한심한 언론들

안원전
2016/07/03 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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