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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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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신동아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기사입력
                        
                                
                                        
                                        2008-04-25 16:00
                                
                        

                        
                                |최종수정2008-04-25 18:38
                        
                        
                

                
        

        




        
        
        

        [신동아]





▼ 제1부  마케도니아와 몽골, 그리고 대한민국


요녕성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우하량의 여신 두상 복제품. 눈에 녹색 옥돌을 박아 넣었다.(좌) 우하량에서 나온 여신 두상과 전신상을 결합시킨 모습. 복제품이다.(우)


외신을 뒤적이다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서 일고 있는 ‘원조(元祖) 마케도니아’ 논쟁이다. 논쟁은 독자노선을 걸어온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유고연방)의 붕괴를 계기로 일어났다.


1980년 유고연방은 개국(開國) 지도자인 티토 사망을 계기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면서 결속력이 약해지는 위기를 맞았다. 1989년 유럽에서는 공산국가들이 연이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는데, 이 열풍이 유고연방에도 상륙했다.


1991년 6월, 유고연방을 구성해온 6개 공화국 중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9월에는 마케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9월11일) 새 헌법을 만들어 독립 정부를 출범시켰다(그해 11월7일). 1992년 3월에는 헤르체고비나도 독립을 선언했다.


4개월 뒤인 1992년 3월, 유고연방은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던 유고연방군(軍)을 철수시킴으로써 마케도니아의 연방 탈퇴를 인정했다. 그러나 독립은 ‘선언’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주변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가 인정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남쪽으로 그리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유럽 양대 기구인 EU(유럽공동체)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추진했다. 그러자 두 기구의 핵심 회원국인 그리스가 강력히 반대했다.




마케도니아란 이름으론 유엔 가입 못해


[지도 1] 완전한 내륙국가인 마케도니아와 그 남쪽에 있는 그리스. 1은 그리스의 서부마케도니아 주, 2는 중부마케도니아 주, 3은 동부마케도니아 및 트라키아 주다. 오른쪽 아래는 그리스의 반대로 새로 만든 마케도니아 국기.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공화국(Republic of Macedonia)’이라는 이름으로 두 기구 가입을 추진했는데,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는 그리스를 구성한 고대 국가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를 구성하는 13개 주 가운데 무려 3개 주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다. 따라서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나라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의 북쪽 국경선에는 서쪽에서부터 ‘서부마케도니아’와 ‘중부마케도니아’ 그리고 ‘동부마케도니아 및 트라키아’ 주(州)가 있다. 북쪽 국경선에 접한 4개 주 가운데 무려 3개 주가 마케도니아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지도 1 참조).


그리스가 거세게 반대하자, 마케도니아는 ‘구(舊)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 약칭 FYROM)’이라는 국명으로 유엔 가입부터 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유엔 안보리의 5대 상임이사국은 마케도니아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므로 마케도니아가 FYROM이란 이름으로 가입하는 것을 승인했다(1993년 4월11일 가입).






마케도니아가 유엔에 가입하자 덴마크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잇달아 마케도니아를 승인하며 국교를 맺었고 미국도 뒤따를 조짐을 보였다(미국은 1995년 마케도니아를 인정해 국교를 맺었다). 국명은 적당한 때 다시 바꾸면 그만이다. 마케도니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가 높아지자 그리스는 본격적인 압박에 나섰다.


마케도니아는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로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중부마케도니아 주에 있는 살로니카 항구를 통해 농산물과 철광을 수출하고 원유를 수입해왔다. 1994년 2월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살로니카 항구 사용금지 조치를 취했다.


마케도니아는 냉동 창고가 부족한 탓에 수출을 위해 준비해둔 양고기와 포도주가 썩어 대량 폐기하고 원유를 도입하지 못해 경제가 파탄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국제사회는 일제히 그리스를 비난했다. EU는 그리스의 항구 봉쇄조치를 불법으로 보고, 그리스를 EU 재판소에 제소했다(1994년 5월).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의 출범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역사성’ 때문이다. 그리스의 모태는 도시국가 아테네인데, 아테네는 병영 도시국가 스파르타에 패망했다. 스파르타는 야만성이 강한 테베에 병합됐고, 테베는 훨씬 더 야만성이 강한 마케도니아에 의해 무너졌다.


테베를 정복한 마케도니아는 지금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를 지나 이란이 있는 페르시아,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는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집트 지역까지 진출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을 완성한 이가 알렉산더 대왕(서기전 356~ 323)이다.


아테네를 그리스의 모태로 본다면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은 것이 된다. 그러나 지금의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일부로 보고, 그리스가 알렉산더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는 이러한 믿음을 반영해 영토 북부에 있는 세 개 주에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누가 알렉산더의 후예인가


하지만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와 자국을 별개 국가로 본다. 그들은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포함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했다고 보며 자국 헌법 제3조에 ‘마케도니아의 영토는 절대로 쪼개져 있을 수 없고 절대로 범할 수 없다( The territory of the Republic of Macedonia is indivisible and inviolable)’라는 조항을 넣었다.


이 조항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란 이름을 사용하는 그리스 북부의 3개 주를 회복해 통일하겠다’는 것이 된다. 그리스는 이 조항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케도니아는 과거 알렉산더 대왕이 채택한 문양을 토대로 붉은 바탕 위에 16개의 금빛 줄기를 쏘는 금빛 태양을 그린 국기를 제작했는데, 이에 대해 그리스는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영웅이므로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 대왕과 관계된 문양을 사용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리스의 반발이 워낙 거셌기에, 유엔은 마케도니아의 가입을 승인했음에도 이 국기를 유엔 청사 앞에 게양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는 금빛 줄기를 8개로 줄인 새로운 국기를 제작해(1995년 10월5일), 유엔 청사에 게양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는 영토를 거론한 헌법 조항은 끝내 개정하지 않았다.


한편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항구 봉쇄를 해제할 수밖에 없게 된 그리스는 국제사회를 향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국경선을 보장해달라”고 주문했다.


유럽 국가들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자, 1995년 9월14일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와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제재 해제에 합의했다. 이로써 일단락되는 듯하던 그리스-마케도니아 갈등은 2007년 마케도니아가 마케도니아란 이름으로 NATO와 EU 가입을 다시 추진하면서 재연됐다.


이러한 때 마케도니아가 새로 만드는 국제공항을 ‘알렉산더(현지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공항’으로 명명한다고 하자, 그리스는 “동부마케도니아 및 트라키아 주의 카발라에 ‘알렉산더 대왕(Mega Alexandros) 국제공항’이 있다”며, 알렉산더란 이름을 쓰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리스의 반발이 거세자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와의 양자 관계에서는 마케도니아라는 국명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제의했으나, 그리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는 이런 상태로 불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국제사회는 이 갈등을 두 나라가 마케도니아 후예 다툼을 하고 있다며 ‘원조 마케도니아’ 논쟁으로 명명했다.


마케도니아는 경상북도보다 약간 넓은 면적(2만5700㎢)에 210만의 인구를 가진 약소국이다. 반면 그리스는 한국의 1.5배, 한반도의 0.6배인 13만㎢의 면적에 1070만 인구를 갖고 있다. 그런데도 마케도니아는 ‘원조 마케도니아’임을 자부함으로써 대국인 그리스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지도자 분열로 둘로 나뉜 몽골족


[지도 2]  몽골이 중국의 내몽고자치구와 통일하면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영토가 넓은 나라가 된다. 그러나 두 몽골은 합칠 의사가 거의 없다고 한다.


‘원조 마케도니아’ 갈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비슷한 현상이 우리와 관계된 지역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이름을 자국의 지방 이름으로 사용하는 예는 중국과 몽골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중국은 4개 직할시(북경 천진 상해 중경)와 2개 특별행정구(홍콩, 마카오), 22개 성(대만성 제외)과 5개 자치구로 구성돼 있다.


5개 자치구 가운데 하나가 몽골인이 많이 사는 내몽고자치구다. 내몽고자치구는 위구르인이 많이 사는 신강(新疆)자치구(160만㎢), 티베트인이 많이 사는 서장(西藏)자치구(123만㎢) 다음으로 면적이 넓다(118만㎢). 내몽고자치구의 면적은 한국(9.9만㎢)의 12배이다. 내몽고자치구 북쪽에 몽골인들이 세운 몽골공화국(156만㎢)이 있다[지도 2].


중국인은 독립 몽골을 ‘외몽고’로 부른다. 몽골이 ‘중국 몽골(내몽고)’과 ‘독립 몽골(외몽고)’로 나뉜 것은, 만주족이 중국(明나라)을 정복해 청(淸)나라를 세울 때(1644년)부터다. 만주족은 명나라를 정복하기 전 몽골족을 복속시키고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눠 통치했는데, 이를 계기로 몽골족은 둘로 쪼개졌다.


몽골의 분리는 부족장들이 두 패로 갈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갈라설 때 충돌이 있었기에 지금도 양쪽 몽골인들은 합칠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두 개의 몽골이 통일되면 그 면적은 한반도의 12.5배, 한국의 27.6배인 274만㎢에 달한다. 아르헨티나에 이어 세계에서 아홉 째로 영토가 넓은 나라가 되는데, 몽골인들은 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케도니아인들이 알렉산더 시절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진출해 대제국을 만들었듯이, 몽골인들도 칭기즈 칸 시절 중국을 넘어 유럽과 서남아까지 진출해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지금 두 나라의 위상은 보잘것없다.


그래도 마케도니아인들은 국가의 자존을 지키려 하나, 독립 몽골은 그러한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칭기즈 칸의 후예는 알렉산더의 후손보다 못났기 때문인가. 그런데 우리는 몽골의 어리석음을 바라보고만 있을 처지가 아닌 것 같다. 한민족도 몽골인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과 ‘독립 조선’


함경북도와 마주한 중국 길림성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다. 이를 몽골 사례에 비교하면 그곳은 내몽고, 북한과 한국은 외몽고가 된다. 조선족자치주는 ‘중국 조선’이고 북한과 한국은 ‘독립 조선’인 것이다. ‘독립 조선’인 북한과 한국은 ‘중국 조선’과 하나가 되려 하는가? ‘독립 몽고’는 하나이지만, ‘독립 조선’은 남북으로 쪼개져 있으니 우리는 몽골보다도 못한 처지가 아닌가?


물론 지금 “간도(間島)를 포함한 만주 땅은 고구려의 무대였고 만주족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우리 겨레이니, 그들이 살았던 만주는 우리 땅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언이 된다. 영토 문제로 중국과 마찰을 빚기보다는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만큼 섣불리 영토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뿌리를 찾는 정신적인 싸움마저 포기한다면 이는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 중국은 ‘중원(中原)’이라고 하는 황하 중하류에서 일어난 문명이 줄기줄기 이어져 지금의 중국 문명을 이뤘다는 ‘줄기론’을 주장했다. 그러다 지금은 단일 줄기론을 부인하며 ‘저수지론’을 내놓았다.


저수지는 청탁(淸濁)을 구분하지 않고 물을 받아들인다. 저수지론은 중국을 이루는 광활한 영토 여러 곳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난 문명이 중국 중심부로 흘러들어와 섞이면서 지금의 중국 문명을 만들었다는 논리이다. 저수지론을 반영한 대표적인 주장이 동북공정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북공정은 “고조선과 고구려는 지금 중국 땅에서 일어났으니, 이들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지방 왕조 가운데 하나다”라는 주장이다. 중국은 몽골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펼친다. 몽골인이 중국을 정복해서 세운 원(元)나라는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중국 왕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에 한번 닿기만 하면 모두 중국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중국인의 역사의식이 중국을 대국(大國)으로 만들었다. 반면 한국은 ‘털어내기’를 반복해왔다. 이민족과 닿은 역사가 있으면 ‘순수성이 더럽혀졌다’며 배제를 반복하는 외줄기론을 채택함으로써, 한민족은 반도 한구석으로 오그라드는 처지가 되었다.


줄기론이 끼친 해악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단군과 고조선을 설화로 만든 것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 여러 역사책에 서기전 2333년쯤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대 국가 고조선이 세워졌다고 기술돼 있는데, 강단 사학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들이 고집을 꺾지 않는 주된 이유는 한반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서기전 2333년쯤 국가를 세운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 역사를 반도 안에서만 찾으면 안 된다. 반도 안에서만 뿌리를 찾으려는 강단 사학계의 좁은 인식을 ‘반도사관(史觀)’이라고 하는데, 반도사관은 외줄기론과 맥을 같이한다.






한국어와 중국어는 왜 다른가


중국은 다르다. 중국은 단군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이기에 오랫동안 신화로 여겨져온 3황5제도 실존한 것으로 보고, 고고학적 발굴로 이를 증명하려 한다.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3황5제 시절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노력을 중국은 ‘탐원(探源)공정’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하(夏)-상(商)-주(周) 왕조의 흔적을 찾는 노력도 거듭하고 있다. 하-상-주 왕조를 복원해 중국의 기원을 밝히는 노력을 중국은 ‘단대(斷代)공정’으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만주 지방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학계도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의 왕조를 찾는 ‘한국판 단대공정’과 고조선 이전의 뿌리를 찾는 ‘한국판 탐원공정’을 펼쳐야 한다. 중국의 탐원공정과 단대공정에 맞서는 뿌리 찾기를 하지 못하면 한국은 동북공정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중국인과 한국인은 오랫동안 인접해 살아왔지만 두 국민은 전혀 다른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외모와 유전자는 흡사해도 언어는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국민이 다른 뿌리에서 나왔음을 뜻한다. 언어 체계에서 한국과 유사한 것은 일본어와 만주어 몽골어 투르크어다(알타이어계).


그렇다면 한국과 투르크 몽골 만주(여진) 일본은 한 뿌리에서 나와 갈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알타이어를 쓰는 종족은 합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됐는가. 그리고 이들이 처음 모여 살며 알타이어 계통이라고 하는 동일 문화를 만든 공간은 어디였을까.


오랜 역사 속에서 종족과 민족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동했다. 이동 과정에서 한민족의 영역은 오그라들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축소와 팽창을 거듭하는 것이 영토인데, 뿌리를 찾는 사관을 영토에 얽어맬 수는 없다.


기자는 2003년 중국이 준비하는 동북공정을 처음 알린 후 우리의 뿌리를 찾는 탐구를 거듭해왔다. 2006년 10월호 ‘신동아’에서는 고조선은 내몽고자치구에 있었다고 밝힌 바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일단의 학자들과 답사단을 형성해 고조선 찾기에 나섰다.


고조선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변천했는가. 환웅은 누구이고 그와 혼인해 단군을 낳은 웅녀(熊女)는 누구인가. 고조선은 왜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 제2부   “환웅족과 곰족이 만난 곳은 ‘우하량(牛河梁)’이다”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내려면, 중국을 한국 들여다보듯이 보아야 한다. 중국의 역사와 지리를 꿰뚫지 않으면 동북공정에 맞서는 논리도, 뿌리를 찾는 노력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그러나 광대한 면적만큼이나 폭넓고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중국 관련 취재를 할 때마다 기자는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복잡한 지방 체계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대표적인 혼란은 ‘시(市)’에서 온다. 중국의 성(省)과 자치구 아래 조직은 시(市)인데, 이 시 밑에 다시 ‘시(市)’와 ‘현(縣)’과 ‘구(區)’가 있다. 성 다음의 시를 ‘지급(地級)시’, 그 아래에 있는 시를 ‘현급(縣級)시’라고 하는데 보통은 구분하지 않고 그냥 시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급시의 중심부는 지급시 이름을 따서 부르기에, 지급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현급시가 있는 것으로 알아 혼란을 겪는 것이다.


고구려의 대표적 유적인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이 있는 집안(集安)시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집안시는 길림성 통화(通化)시 안에 있는 현급시다. 따라서 정확히 한다면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로 적어야 한다. 그런데 통화시라고 하는 현급시는 없는데도 중국인들은 통화시 중심부를 ‘통화시’로 통칭한다.


통화시 안에 있는 ‘현급 통화시’는 가상의 통칭(通稱)일 뿐이고, 실제로는 구(區)가 있다. 통화시로 통칭되는 지역에는 ‘동창(東昌)구’와 ‘이도강(二道江)구’가 있는데, 두 개 구를 통칭해 통화시라고 한다.


중국의 도시 중에는 선뜻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은 한자 그대로 ‘북쪽에 있는 수도’이니, 중국의 수도명이라는 게 금방 이해된다. 그러나 소수민족 거주지인 자치구나 자치주·자치현의 도시는 한자만으로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좋은 예가 내몽고자치구의 수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시다. 호화호특은 ‘푸른 도시’를 뜻하는 몽골어 ‘허허호트’를 중국식 한자어 발음에 따라 적은 것이다. 지명의 한자 풀이가 불가능한 도시는 대개 최근에 중국에 편입된 지역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인의 역사 무대가 아니었던 곳이다.


중국 요녕(遼寧)성의 서쪽 끝엔 지급시인 조양(朝陽)시가 있는데, 이 조양시의 서쪽 끝에 현급시인 능원(凌源)시와 건평(建平)현이 있다. 건평현의 북쪽에는 내몽고자치구의 적봉(赤峰, 지급시)시가 있는데, 건평현과 적봉시 사이에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산맥이 있다. 중국에서는 산맥을 ‘산’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지도 3] 대릉하를 중심으로 한 발해만과 노노아호산 사이, 그리고 대릉하, 영금하-노합하-서랍목륜하-서요하로 둘러싸인 적봉 지역이 요서 문명의 핵심 지역이다. 요서 문명을 만든 이들은 배를 이용해 요동반도로 건너갔고, 요동반도에서 다시 한반도와 산동반도로 진출하면서 중국인들이 말하는 거대한 동이(東夷)문화권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독 바람이 적고 따뜻한 곳, 우하량


‘노노아호’ 역시 몽골어나 만주어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노아호산을 경계로 요녕성 조양시와 내몽고자치구 적봉시의 수계(水系)는 완전히 갈린다. 노노아호산 남쪽에 형성된 수계는 동북쪽으로 흐르다 기역자로 꺾여 남쪽의 발해로 빠지는 ‘대릉하(大凌河)’를 이루고, 노노아호산 북쪽의 수계는 적봉을 지나는 ‘영금하(英金河)’를 구성한다.


노노아호산 북쪽은 거대한 평원인데, 이 평원을 흐르는 영금하는 더 남쪽에서 흘러온 ‘노합하(老哈河)’와 합류한다. 영금하를 품은 노합하는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의 내몽고 고원에서 흘러온 더욱 큰 강인 서랍목륜하(西拉沐淪河)를 만나 ‘서요하(西遼河)’가 된다. 서요하는 시곗바늘 방향으로 굽이쳐 내몽고자치구와 요녕성 접경 지점에서 동요하(東遼河)를 만나 ‘요하’가 된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요하의 동쪽을 ‘요동(遼東)’, 요하의 서쪽을 ‘요서(遼西)’ 지방으로 불러왔다. 고려 때의 명장 최영이 정벌하고자 한 곳이 바로 요동이다(요동정벌). 이러한 역사로 적잖은 한국인은 한민족 활동무대의 동쪽 끝이 요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한 역사지도도 대개 요하를 경계로 고구려가 중국의 수·당과 대치한 것으로 그려진다.


노노아호산의 서쪽에는 발해로 흘러드는 ‘난하(?河)’라는 수계가 만들어지는데, 난하를 건너면 멀지 않은 곳에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 있다. 난하는 여름철에만 물이 흐르는 건천(乾川)이다. 비가 오면 강폭이 넓어지나 우기가 끝나면 누구나 건널 수 있는 하천이 된다. 난하는 선사시대 한민족과 중국인들이 국경으로 삼았던 곳이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고조선 흔적을 탐구하려면 요동에 얽매인 시선을 난하의 동쪽을 뜻하는 요서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 요서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된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 등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청동기는 중원지역으로 불리는 황하 중하류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와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요서 지역 중심부에 있는 노노아호산 남쪽 자락에 ‘우하량(牛河梁)’이라는 곳이 있다. 우하량은 조양시 능원시에서 101번 도로를 타고 건평현 쪽으로 달리다, 능원시 경계가 끝나가는 부드러운 산지에 자리잡고 있다[지도 3 참조].


요서 지방은 노노아호산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산지가 없는 평원이기에 도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차 안에 있을 때는 복사열 때문에 따뜻하나, 차에서 내리면 점퍼 두 벌을 껴입어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다. 그러나 야트막한 산지가 이어지는 우하량만은 아늑했다.


바람이 세면 나무도 잘 자라지 못한다. 하지만 우하량은 바람이 거의 없어 요서 지역에선 보기 힘든 소나무 숲이 형성돼 있었다. 안온한 땅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에 고조선의 비밀이 숨어 있다.






모계사회를 상징하는 女神殿


그 비밀을 찾는 탐험은 101번 도로 변에서 2006년 7월1일 능원시 인민위원회가 세운 안내석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우하량 홍산 문화유지(牛河梁紅山文化遺地)’라고 쓰여진 자주색을 띤 안내석은 폭이 5~6m 됨직했는데, 여기에는 중국어와 영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능원시에서 건평으로 이어지는 101번 도로 ‘우하량홍산 문화유지비’가 있는 곳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가면 ‘여신묘’(사진)라고 쓴 안내석이 나온다. 이 안내석 위 쪽에 여신상과 곰뼈가 나온 여신전이 있다.


이 안내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신석기 문명인 홍산 문화를 고대국가 단계로 표현하고 우하량을 정치와 제사의 공간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고대국가는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으나 중국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대국가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홍산 문화를 구성한 신석기인들은 우하량에 모여 무엇을 논의했을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평상시에는 신을 모시고 유사시에는 방어 공간으로 사용하는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었다. 그리스 문화는 청동기 시절에 꽃핀 것이라 아크로폴리스에 자유자재로 대리석을 다듬어 거대한 신전을 세웠다. 그러나 홍산 문화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인지라 흙과 돌로 그들의 건축물을 지어야 했다.


궁금증은 소나무 숲으로 덮인 도로 위쪽의 산으로 오르면서 더욱 커져갔다. 잠시 후 답사단은 중국어로 ‘여신묘(女神廟)’라고 쓰인 또 다른 안내석을 만났다. ‘여신묘’라는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우하량 여신묘’로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명명인 것 같다. 이곳은 ‘우하량 여신전(女神殿)’으로 불러야 한다. 여신묘의 ‘묘‘자는 종묘(宗廟)의 ‘묘‘자와 같은데, 여기서의 묘는 ‘사당‘이나 ‘신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운데 中자 모양


이 유적을 발굴한 중국학자들도 같은 판단을 내린 듯하다. ‘그렇기에 중국어(한자)로 쓰인 안내문에도 여신전을 뜻하는 goddess temple로 적어놓았다. 죽은 사람은 무덤에 파묻지만 숭배하는 신은 드러내야 한다.


‘이 여신전(여신묘)‘은 흙에 파묻혀 있는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발굴 당시 여신상은 남북으로 25m, 동서로 2~9m인 ‘가운데 중(中)’자 모양의, 반(半)지하 깊이로 땅을 판 ‘움’ 속에 있었다. 반 지하 깊이의 가운데에는 주실(主室)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한 개씩의 측실(側室), 북쪽에 한 개의 방이 있고 남쪽에 3개의 방과 별도의 방이 하나 더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발굴하기 전의 형태로 다시 흙을 덮어놓았기에, 보이는 것은 평범한 황토흙 언덕이었다. 능원시 인민정부는 이 여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파이프 기둥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씌워놓았다. 이 때문에 강한 햇빛에 지붕 그림자가 드리워져 여신전의 전체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이 여신전은, 눈동자 자리에 ‘둥근 녹색 옥(玉)돌’을 박은 여자 두상(頭像)과 이 두상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무릎 꿇은 여자 나신상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중국학자들은 흙으로 빚은 두상과 나신상을 합쳐 ‘여신상’으로 명명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여신전 바로 뒤인 산 정상부에는 잔돌을 사각형으로 촘촘히 박은 제단 터가 있다. 이 제단 터에서 반경 20~30m쯤 떨어진 주위에는 한 줄기로 이어지는 돌무더기 띠가 있다. 원래는 돌담을 형성하고 있던 것인데 오랜 세월 풍파에 무너져 돌무더기 띠가 되었다.






우하량 여신전에서 발굴된 곰뼈는 우하량 공작참 자료실에 보관돼 있었는데 최근 사라져버렸다(위). 여신전에서 발굴된, 눈동자 자리에 녹색 옥돌을 박은 여신의 두상(頭像)도 어디론가 옮겨지고 공작참 자료실에는 모조품이 전시돼 있다(아래 왼쪽 사진). 아래 오른쪽은 中자 모양의 여신전 발굴 당시 사진이다. 이 사진 아래쪽이 북쪽이고 위쪽이 남쪽이다.


지금으로부터 5000여 년 전인 서기전 3000년쯤, 사람들은 바람이 적어 유난히 아늑하게 느껴지는 이곳에 여신상을 모신 여신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뒤쪽에 잔돌을 박아 제단을 만들고, 주위에 돌담을 둘렀다. 홍산 문화인들은 이곳에 모여 공동의 제사를 지내고 종족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를 펼쳤으니, 이곳은 홍산 문화인들의 아크로폴리스다.


여신전 터를 둘러본 답사단은 101번 도로 변 바로 아래 ‘우하량 유지 제2지점’이라는 안내석이 서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제2지점에서 두드러지게 눈길을 끈 것은 판판한 돌(板石)을 모아서 만든 ‘석관(石棺)’ 모양의 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텅 빈 채로 열려 있었는데, 그 안은 키가 150㎝쯤 되는 사람이 누울 만 했다.


2지점에서 멀지 않은 우하량 제5지점의 돌무덤군(群)에서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심양(瀋陽)에 있는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제2지점에는 잔돌을 원형으로 둘러 박고 그 안에 네모꼴로 잔돌을 박아 올려 기단을 만든 무덤 자리도 있었다.


이러한 무덤 터는 우하량 도처에서 발견된다. 16개 발굴지 가운데 여신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돌무덤 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지점의 돌무덤 주변에는 주황색 토기 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신석기인들이 이곳에서 토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토기에 음식을 담아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식은 참석자들에게 돌리고 토기는 깨뜨려 뿌리는 의식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른 문화지역으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잊는 것은 언어라고 한다. 2~3세대 이민자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것은 알아도,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한국계가 아닌 다른 계와 결혼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한국어는 “엄마”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맛에 대한 기억은 강하게 남아 음식문화는 쉽게 되살릴 수 있다. 어린 시절 맛있게 먹던 한국 음식에 대한 기억이 달라진 문화 속에서도 한국 음식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음식보다 더 오래 유지되는 것이 장례(葬禮)의식이다. 어느 종족이든 장례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에 아주 오랫동안 유지된다.




고구려로 이어지는 돌무지무덤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은 널방을 만든 무덤을 ‘적석총(積石塚)’, 우리말로는 ‘돌무지무덤’이라고 한다. 선사(先史) 시대에 만들어진 이러한 무덤군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광개토태왕릉과 장군총을 비롯해 집안시 일대에서볼  수 있는 고구려의 왕과 귀족의 무덤은 전부 돌무지무덤이다.


고구려 적석총의 원형이 우하량에서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돌무지무덤이 아닐까. 돌을 네모꼴로 박아 넣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무덤을 만든 2지점의 돌무지무덤은, 피라미드 형태로 큰 돌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널방을 만든 장군총의 원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구려는 돌을 자유자재로 자르던 철기 시대의 나라이고, 홍산 문화는 신석기 시대였으니 무덤 규모만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2지점을 둘러본 답사단은 차에 올라 건평현 쪽으로 난 꾸불꾸불한 길을 5분여 달리다 샛길로 빠져, 안쪽 건물에 ‘요녕성 고고문물 연구소 우하량 공작참(工作站)’이라는 간판이 붙은 자료실을 찾아갔다. 답사단은 관리자를 설득해 굳게 닫혀 있는 이 자료실의 문을 열게 한 후 눈알 자리에 녹색 옥돌을 박은 문제의 여신 두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탈 바가지를 연상시키는 두상이 주는 인상은 강렬했다. 표정으로 봐서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여신 두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상과 결합시킨 여자 나신상도 볼 수 있었는데 이것도 복제품이었다. 여자 나신상은 단전 자리에 두 손을 맞잡은 반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이 기사 첫장 사진 참고). 이 두상이 여신상이라는 것은, 유방이 있는 나신상과 결합할 수 있었기에 내려진 판단이라고 한다.


우하량의 여신전에서는 여신상뿐만 아니라 옥돌을 갈아서 만든 공예품도 발굴되었다. 이러한 옥 공예품을 중국학자들은 ‘옥기(玉器)’로 표현하는데, 옥기는 우하량뿐만 아니라 홍산 문화가 펼쳐진 전 요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자료실에는 ‘돼지용(龍) 모양의 옥기’라는 뜻으로 ‘옥저룡(玉猪龍)’으로 명명된 것도 있었다. 용은 실존하지 않는 동물이다. 용도 없는데 과연 돼지용이 있었을까?


돼지용은 이 유물을 발굴한 중국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중국학자들은 요서 지역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이곳에서 중국 최초의 용이 발견되었다는 이상한 가설을 내세웠다. 이곳에서 대량 출토된 옥기에 새겨진 짐승 문양을 보고 “용을 새긴 것”이라고 했는데, 새긴 것이 용 같지 않으면 “돼지용을 새겼다”는 식으로 빠져나갔다.






왜 중국은 곰뼈를 감추었는가


우하량 2지점에는 돌을 원형으로 둘러 박고 그 안에 네모꼴로 돌을 쌓아 기단을 만든 무덤자리(위)와 판석을 벽돌처럼 쌓아서 석관(石棺)처럼 만든 돌무덤이 있다(아래 왼쪽). 요녕성 박물관에서는 우하량 5지점에서 발견된, 인골이 들어 있는 돌무덤이 전시돼 있다(아래 오른쪽).


한때 중국의 상징인 용은 뱀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요즘은 악어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요서 지역에는 악어가 살지 않는다. 따라서 악어를 용의 원형으로 본다면, 악어를 본 적도 없는 홍산 문화인들이 용을 새겼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돼지를 새겼다는 주장이다.


동부 시베리아와 몽골 지역에 분포하며 알타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을 가리켜 ‘퉁구스족’이라고 하는데, 퉁구스족은 일찍이 돼지를 기른 종족으로 꼽힌다. 돼지는 전세계에서 여러 종족이 길렀지만, 인류학과 고고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동시베리아에 있는 종족이 가장 먼저 돼지를 기른 것으로 알려져, 이 지역에 사는 종족을 퉁구스족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우하량 일대의 신석기인들도 돼지를 길렀다. 지금 사람들은 돼지를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신석기인들에게 돼지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중국학자들은 악어가 없는 지역에서 홍산 문화인들이 용을 새긴 옥기를 제작했다고 주장하다 반론이 일자 돼지용을 새긴 것이라며 ‘옥저용’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선사 시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에 선사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이를 찾아낸 사람이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용이면 용이고, 돼지면 돼지여야지 돼지용은 있을 수 없다. 중국학자들이 마구 붙인 용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용이 아니라 태아를 새긴 것”


자료실에는 전시돼 있지 않지만 우하량 유지 제16지점의 무덤에서는 또 다른 인골과 함께 사람 모습을 새긴 것이 분명한 옥기가 나왔다. 중국학자들은 무당을 새긴 것으로 보고 이 옥기를 ‘옥무인(玉誣人)’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새를 새긴 것이 분명한 옥기도 나왔는데 중국학자들은 봉황을 새긴 것으로 판단하고 ‘옥봉(玉鳳)’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옥기에 새겨진 문양은 봉황보다는 삼족오(三足烏)에 가깝다.


옥무인과 옥봉도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데, 중국학자들은 홍산 문화는 용과 함께 봉황을 등장시킨 최초의 문명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옥무인과 옥봉은 누가 봐도 사람과 새를 새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용은 아니다 보니 최근 다른 주장이 등장했다. 요즘 학자들은 홍산 지역에서 발굴된 굽은 옥기는 어머니 뱃 속에 있는 태아(胎兒)를 본뜬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홍산 문화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모계(母系)사회였다. 유아의 생존율이 낮아 인구 증가를 위해 다산(多産)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우하량의 여신전도 다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홍산 문화인들은 신체해부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사람의 태아나 짐승의 태아를 새긴 옥돌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홍산 지역에서 출토되는 굽은 옥이 사람과 짐승의 태아를 새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과 요대 등에는 곡옥(曲玉)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곡옥은 백제와 가야, 일본의 왕릉에서 출토된 관에도 많이 달려 있다. 이 곡옥은 홍산 문화인들이 만든 태아형의 굽은 옥에서 발전한 것이 아닐까. 홍산 문화인의 후예가 한반도와 일본으로 흘러갔다면 그들이 다산을 숭상하기 위해 만든 곡옥 제작의 전통이 신라와 가야 백제 일본의 관에 달리는 곡옥 장식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공작점 자료실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옥저용이 아니라 ‘웅(熊)’이라는 제목만 붙여놓은 빈 전시대였다. 우하량의 여신전에서는 여신 두상과 나신상, 옥저용뿐만 아니라 곰의 턱뼈가 발견되었다. 곰 턱뼈는 최근까지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고 하는데, 답사단이 찾아갔을 때는 빈 전시대만 남아 있었다.


우하량 여신전에서는 ‘곰의 발’ 모양을 한 토기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 곰발 토기도 전시돼 있지 않았다. 우하량 여신전은 신성한 곳이니, 신석기인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심정으로 그곳에 죽은 곰뼈를 던져 넣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곰을 키우던 우리였을까? 곰뼈와 여신상 그리고 흙으로 만든 곰발의 출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홍산 문화의 신석기인들은 돌에 가는 방법으로 자유자재로 옥기를 제작했다. 우하량 1지점인 여신전(여신묘)에서 출토돼 공작참 자료실에 전시된 옥저룡(玉猪龍, 오른쪽 위). 우하량 16지점의 돌무덤에서 나온 새 모양의 옥기(오른쪽 아래). 중국 학자들은 봉황을 새긴 것이라고 하나 삼족오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한반도에서도 옥공예가 발달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등에는 태아 모양의 굽은 옥(曲玉)이 주렁주렁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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