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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락국기의 해모수, 대한국과 사마천/ 좌 계
가락국기의 해모수, 대한국과 사마천 / 좌 계
| 단군의땅 백서
2008.10.14 00:52
소서노(gracian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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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駕洛國記>의<해모수>,<大漢國>과 사마천-(나)


1. 가락국기(駕洛國記)에 해모수(解慕潄)가 전(前) 가락국왕(駕洛國王)이었음을 나타내는 부분의 해석(解釋)

선가(仙家)종국(宗國)인 북부여(北扶餘)를 세우신 해모수(解慕潄)가 전(前)-가락국왕(駕洛國王)이었고, 해모수(解慕潄)가 재림(再臨)하시기를 바라는 축제(祝祭)가 오늘날 광동성 조경시(肇慶市)와 주강(珠江) 앞바다에서 열렸음을 의미하는 부분을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新羅季末,有忠至匝干者.攻取金官高城.而爲城主將軍.爰有英規阿干.假威於將軍.奪廟享而淫祀.當端午而致告祀.堂梁無故折墜.因覆壓而死焉.

신라(新羅) 말기(末期)에 충지잡간(忠至匝干)이란 사람이 금관고성(金官高城)을 공격하여 취(取)하고서 성주(城主) 장군(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英規)아간(阿干)이란 자가 장군(將軍)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뺏어 음사(淫祀)를 지냈더니 단오(端午)를 당하여 고사(告祀)하는 중에 대들보가 이유 없이 뿌려져 거기에 치어 죽었다.

(*)주의(注意)말씀-1 (*)
  여기에 금관고성(金官高城)이란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법관(法官)들이 업무를 보는 높은 성(城)’을 뜻합니다. 후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시켜 보면, 이 금관고성(金官高城)은 전(前) 가락국왕(駕洛國王)이셨던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와 후(後)-가락국왕(駕洛國王)이었던 김수로왕(金首露王)을 함께 배향(配享)함으로써 ‘국제 법관’의 위상을 높히는 곳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있었던 위치는 광동성 조경시(肇慶市) 주변인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나라가 바뀌어도 - 옛말로 전국(傳國)이 되어도 “감(敢)히 공격할수 없는” 성지(聖地)인데, 이를 충지잡간(忠至匝干)이란 자가 함부로 군사적 폭력을 끌어들여서 빼았었고, 이러자 이런 빽(back)을 믿고 영규(英規) 아간(阿干) 이라는 자가 배향(配享)하는 신당(神堂)에 다른 신위(神位) - 예를 들면 자기 조상(祖上)을 모셔놓고 제사(祭祀)드리는 일을 하다가 대들보가 떨어져서 즉사(卽死)시켰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주의(注意)말씀-1 마침(*)

於是將軍自謂.“宿因多幸.辱爲聖王所御國城之奠.宜我畵其眞影.香燈供之.以酬玄恩”.遂以鮫絹三尺.摸出眞影.安於壁上.旦夕膏炷.瞻仰虔至.才三日.影之二目,流下血淚.而貯於地上,幾一斗矣.
이에 충지잡간(忠至匝干) 장군이 혼자말로 “다행이 숙인(宿因)으로 -전생(前生)의 인연(因緣)을 뜻함 -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와서 외람되게 제준(祭遵)을 드리고 되었으니, 나는 마땅히 진영(眞影)을 그려모시고 향기(香氣)로운 등(燈)을 바쳐 깊은 신은(神恩)을 갚아야한다.”고 하면서, 드디어 3 척(尺)이나 되는 교룡(蛟龍)의 무늬가 있는 비단에 진영(眞影)을 그려서 벽상(壁上)에 봉안(奉安)하고,조석(朝夕)으로 기름불을 켜서 받들었는데, 겨우 3일 만에 진영(眞影)의 눈(眼)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거의 한 말(=두(斗))이나 지상에 괴이었다.


將軍大懼.捧持其眞.就廟而焚之.卽召王之眞孫圭林而謂曰.昨有不祥事.一何重疊.是必廟之威靈,震怒余之圖畵,而供養不孫.英規旣死.余甚愧畏.影已燒矣.必受陰誅.卿是王之眞孫.信合依舊以祭之.

충지잡간(忠至匝干)장군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진영(眞影)을 모시고 사당(祠堂)으로 가서 불사르고 곧 왕(王)의 진손(眞孫)인 규림(圭林)을 불러, “어제도 불상사(不祥事)가 불상사(不祥事)가 있었고, 이런 일이 중첩(重疊)하니 이는 반드시 사당(祠堂)의 위령(威靈)께서-‘위엄(威嚴)을 지닌 영혼(靈魂)’을 뜻함-내가 영정(影幀)을 그려서 불손(不遜)하게 공양(供養)함에 대해서 진노(震怒)하신 것이다. 영규(英規)가 (대들보에 깔려) 죽기에 내가 매우 두려워 하는데, (이제 또다시) 진영(眞影)을 태웠으니 반드시 음주(陰誅)를 -신(神)의 징벌(懲罰)을 뜻함-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王)의 진손(眞孫)이니 꼭 종전(從前)의 (법도(法度)) 그대로 제사(祭祀)를 지내라.“”고 하였다.  

圭林繼世奠酹.年及八十八歲而卒.其子間元卿,續而克禋.
규림(圭林)이 대(代)를 이어서 제준(祭遵)을 받들었더니 나이 88세(歲)에 죽고 - 장수(長壽)하였다는 말임 -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상속하여 제사를 지냈다.

端午日謁廟之祭.英規之子俊必又發狂.來詣廟.俾徹間元之奠.以己奠陳享.三獻未終.得暴疾,歸家而斃.

단오(端午)의 날에 (금관고성(金官高城)에 모셔진 금관왕(金官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묘(廟)에 참배(參拜)하는 제사(祭祀) 의식에서 영규(英規)의 아들이 준필(俊必)이 갑자기 발광(發狂)을 일으켜 간원경(間元卿)이 - 이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진손(眞孫)이신 분이다. - 진설(陳設)한 제수(祭需)를 치우고, 자신의 제수(祭需)로써 진설(陳設)하고 배향(配享)하였는데, 세번째 술을 올리는 삼헌(三獻)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괴질(怪疾)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 죽었다.

然古人有言.淫祀無福.反受其殃.前有英規,後有佼必,父子之謂乎.
그러므로 옛사람들의 말씀이 있으니, “잡(雜)된 신(神)을 모시는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고, 오히려 반대로 재앙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는 전(前)에 영규(英規)의 일이나 후(後)에 준필(俊必) 부자(父子)의 일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又有賊徒.謂廟中多有金玉.將來盜焉.初之來也,有躬擐甲冑,張弓挾矢,猛士一人,從廟中出.四面雨射.中殺七八人.
또 도적(盜賊)들이 묘(廟)중에 금(金)과 옥(玉)이 많다는 말을 듣고 이를 훔치려고 하였다.  처음에 그들이 올 때에, 묘(廟) 한가운데 갑(甲)옷과 투구를 쓴 맹사(猛士) 한사람이 활(弓)을 당겨서 여러 대의 화살을 끼우고 사면(四面)을 향하여 비(雨)오듯이 발사하였는데, 한 번 사격(射擊)에 7~8명을 죽였다.

(*)주의(注意)말씀-2 (*)
위 문장에서 장궁협시(張弓挾矢)란 ‘활을 당겨서 화살을 끼우는 것’을 뜻하나, 복수(複數)의 화살을 끼우는 것을 뜻합니다. 협시(挾矢)는 ‘옆구리에 끼듯 여러 화살대를 끼우는 것’을 뜻하고, 삽시(揷矢)는 한대만 끼우는 것을 뜻합니다.  중살칠팔인(中殺七八人)이란 말이 있는 것을 보아서 최소한 8대 이상 끼운 것으로 보입니다.  
금관고성(金官高城) - 우주(宇宙)와 세계헌법을 유지하는 ‘국제법관’의 위엄(威嚴)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注意)말씀-2 마침.(*)

賊徒奔走.數日再來.有大蟒長三十餘尺.眼光如電.自廟房出.咬殺八九人.粗得完免者.皆僵仆而散.
도적(盜賊)들이 달아났다가 수일(數日) 후(後)에 다시 왔는데, 30여 척-약 10미터 정도를 뜻함 - 거대(巨大)한 ‘이무기’가 묘실(墓室) 안 쪽의 방(房)으로 부터 나타나서 8,9인을 물어서 죽였다.  겨우 죽음을 면(免)한 것도, 넘어지고 엎어지는 (북새통을 껶으면서)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故知陵園表裏,必有神物護之.
그러므로 능원(陵園)의 안과 밖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서 보호(保護)함을 알수 있다.

自建安四年己卯始造.逮今上御圖三十一載,大康二年丙辰.凡八百七十八年.所封美土.不騫不崩.所植佳木.不枯不朽.況所排列万蘊玉之片片.亦不頹坼.
건안(建安)4년 기묘(己卯)에 이 사당이 처음 건조(建造)된 때로부터 금상(今上) - 고려(高麗) 문종(文宗)을 뜻함 - 께서 치세(治世)한지 31년인 태강(太康)2년 병진(丙辰)까지 878년이 되었으나 봉(封)한 미토(美土)가 허물어지지 않고, 가목(佳木)이-좋은 나무를 뜻함- 마르거나 썩지 않았거든 하물며 배열(配列)된 여러 돌 쪼각이 부서질 리(理)가 있으랴?!

由是觀之.辛贊否曰.自古迄今.豈有不亡之國,不破之墳.唯此駕洛國之昔曾亡.則贊否之言有微矣.首露廟之不毁.則贊否之言.未足信也.

이런 연유(緣由)된 (과정(過程)을) 살피건데, 신찬비(辛贊否)가 말한 “예로부터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으며, 파괴(破壞)되지 않는 분묘(墳墓)가 어디 있으랴?!”는 것은  ----비록 이 가락국(駕洛國)이 예전에 “거듭 망(亡)하였으니(=증망(曾亡)”, 신찬비(辛贊否)의 말이 (“맞었다. 틀렸다.”라고 판단하기) 미묘(微妙)하다고 할지라도, 수로(首露)의 묘(廟)가 훼손(毁損)되지 않았음을 보면, 신찬비(辛贊否)의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 주의(注意) 말씀 - 3 (*)
바로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구절입니다.

위 문장(文章) 단락(段落)에서 신찬비(辛贊否)란 사람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① 망(亡)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② 파괴(破壞)되지 않는 분묘(墳墓)는 없다. ”는 두가지 명제(命題)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결과는 ① 此駕洛國之昔曾亡 - “이 가락국(駕洛國)은 옛날에 증망(曾亡)하였다.”는 것입니다.  증(曾)의 뜻은 ‘거듭’이란 말입니다. 손자(孫子) 다음의 손자(孫子)를 일컬어서 증손(曾孫)이라고 하는데, 이는 ‘거듭된 손자(孫子)’라는 뜻이고, 할아버지인 조부(祖父)의 아버지는 ‘거듭된’ 할아버지인 증조(曾祖)인 것을 보아서 명확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락국(駕洛國)을 세운 김수로왕(金首露王)은 북부여(北扶餘)를 세운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의 ‘핏줄’이 흐르는 사람이고, 또 ‘세계헌법’을 관장하는 똑 같은 금관왕(金官王)임을 일연(一然)스님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내용 자체가 진손(眞孫)이 아닌 사람이 배향(配享)하는 것에 대한 음주(陰誅)가 내려지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만치,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핏줄’이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의 ‘핏줄’이고 전(前) 가락국(駕洛國)인 북부여(北扶餘)가 멸망한후에, 다시 후(後) 가락국(駕洛國)을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세웠다고 망(亡)했으니 분명 가락국(駕洛國)은 증망(曾亡) 즉 2번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연(一然)스님이 생존해 계실 때까지 ② 首露廟之不毁 -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묘(廟)는 분명히 훼손(毁損)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신찬비(辛贊否)의 2가지 명제(命題)에 대해서 일연(一然)스님께서 평(評)하는 말에서 다시 한번 확인이 됩니다.
한문(漢文)에서 “유(唯)+(A), 즉(則) +(B)”로 되면 “비록 (A)는 (B)일지라도” 라는 문법(文法)입니다.
따라서 <唯此駕洛國之昔曾亡.則贊否之言有微矣.>라는 말은 “비록 이 가락국(駕洛國)이 옛날에 두번 망(亡)해서, 신찬비(辛贊否)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결정하기에) 미묘(微妙)하다고 할지라도...”란 뜻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학계(史學界)에서는 이 <唯此駕洛國之昔曾亡.則贊否之言有微矣.>의 철저(徹底)하게 오역(誤譯)합니다.

대부분의 오역(誤譯)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 판본을 보았는데, 오역(誤譯)의 효시(嚆矢)는 이병도 박사님입니다.)

“비록 이 가락국이 옛날에 망(亡)한데서는 옳지만”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解釋)이 가능한 한문(漢文)의 작문(作文)을 하려면, <唯此駕洛國之昔亡.則贊否之言有否矣.>로 되어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증망(曾亡)을 망(亡)으로 고쳐야하며, ‘틀렸는지 맞었는지’가 애매(曖昧)한 것을 확실하게 ‘틀렸다’는 비(否)로 확정해야만 문장(文章)으로써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唯)+(A), 즉(則) +(B)”란 문법(文法)이 들어가는 문장(文章), 즉 “비록 ~ 일지라도” 혹은 “비록 ~ 한다고 해도”는 문장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문법적(文法的)으로는 ‘부분(部分)부정(否定)’의 경우에나 쓸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두 가지 명제 ①,②를 분명히 신찬비(辛贊否)가 말했는데, ①도 “틀리고” ②도 “틀리다.”고 할 때에는  “유(唯)+(A), 즉(則) +(B)”라는 문장 구조를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찬비(辛贊否)가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라는 말을 받아서 “유(唯)+(A), 즉(則) +(B)”로 할 경우, 이를 부분(部分)부정(否定)을 하는 경우는 오직 한 경우 밖에 논리적(論理的)으로 있을수 밖에 없읍니다. 나라가 한번 망(亡)했다고 그 후손(後孫)이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했던 나라가 다시 살아났고, 만약 이 나라가 영원(永遠)히 망하지 않았다면 신찬비(辛贊否)의 말은 틀린 것이지요.  그러나 후(後)-북부여(北扶餘) 즉 가락국(駕洛國)은 망(亡)했으니깐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라는 신찬비(辛贊否)은 말은 반(半)은 맞고, 반(半)은 틀린 셈이 되는 것입니다.

즉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적힌 내용의 핵심은 가락국(駕洛國)이란 나라가 요컨데 후(後)-북부여(北扶餘)이며, 북부여(北扶餘)는 전(前)-가락국(駕洛國)이란 것입니다.

(*) 주의(注意) 말씀 - 3 마침. (*)

此中更有戱樂思慕之事.每以七月二十九日.土人吏卒.陟乘岾.設帷幕. 酒食歡呼.而東西送目.

이 사이에 - 이는 전(前)가락국(駕洛國)이 망(亡)하고나서, 후(後) ‘북부여’인 가락국(駕洛國)을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세우기 까지의 ‘사이’를 뜻합니다. - (전(前) 가락국왕(駕洛國王)인 해모수(解慕潄)를) 사모(思慕)하는 놀이가 있었다.  매년 7월 29일에 (오늘날 광동성 조경시(肇慶市) 및 주강(珠江) 주변의) 토착인(土着人)들과 관리(官吏)들은
오르고 오르는 고개에서 -이는 높은 고개를 문학적(文學的)으로 표현한 것임 - 휘장(揮帳)과 천막(天幕)을 -이를 유막(帷幕)이라함 - 치고, 술과 음식을 서로 대접하면서 환호(歡呼)하면서 동서(東西)로 (“어디서 오나?”하고) 눈길을 보내는 관람(觀覽)을 하였다.

壯健人夫.分類以左右之. 自望山島.駮蹄駸駸,而競湊於陸.鷁首泛泛,而相推於水.北指古浦而爭趨.盖此昔留天神鬼等,望后之來.急促告君之遺迹也.

장건(壯健)한 젊은이들은 좌우(左右) 2편으로 나누어서, 망산도(望山島)로 부터, (한 편은) 말(馬)을 몰아서 육지에 오르는 경주(競湊)를 하고, (또 한편은) (바람에 강(强)한 익조(鷁鳥)모양을 한 선수(船首)가 높고 도(櫂: Oar)를 낮게 걸은 배를 - 이런 배를 익수(鷁首)라고 함 -물에 띄워놓고 (도(櫂: 서양식 노(櫓)인 오아(Oar, Paddle을 뜻함)로써 물(水)을 밀어서 밀어서 북(北)쪽의 고포(古浦)를 향하여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경기(競起)를 하였다.
대개 이는 옛날에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이 (해모수(解慕潄) 전(前) 가락국왕(駕洛國王)의) 황후(皇后)이신 (유화(柳花)가 오는 것을 급(急)히 재촉해서 임금이신 (해모수(解慕潄)에게) 알리는 유적(遺跡)이었다.

(*) 주의(注意) 말씀 - 4 (*)

일단 이 내용에서 “황후(皇后)가 오는 모습을 살핀다.”는 <望后之來>에서 그 주인공은 허황옥(許黃玉) 황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화(柳花)황후(皇后)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와 유화(柳花) 황후(皇后)께서는 후(後) 북부여(北扶餘)의 김수로왕(金首露王)과 똑같이 오늘날 광동성(廣東省) 조경시(肇慶市)에서 황후(皇后)를 만나서 결혼하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북부여(北扶餘)의 힘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만나는 ‘해안가’ 즉 남이국미(南而國尾)에서 그 힘을 잃자, 광동성 조경시(肇慶市)와 주강(珠江) 근처의 토착민과 관리들은 “그 예전에 해모수 성제와 유화 황후가 만나던 때의 광경(光景)을 하나의 ‘놀이’로 개발해서 ”이분들이 재림(再臨)하셨으면...“하는 성(聖)스런 축제(祝祭)의 게임(Game)으로 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망산도(望山島)는 오늘날 대서산도(大嶼山島)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또 고포(古浦)는 확실한 위치를 알 수는 없지만 조경시(肇慶市) 근처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1) 대서산도(大嶼山島)와 조경시(肇慶市)를 볼수 있는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guangdong.JPG
2) 대서산도(大嶼山島) 주변의 상세지리
http://parkchina.com.ne.kr/map/hongkong2.JPG

그런데, 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개발한 축제(祝祭)는 매우 흥미롭고 지금 재현(再現)시킨다고 해도 “참으로 흥겹겠다.”하는 느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먼저 “박제침침 이 경주어륙(駮蹄駸駸,而競湊於陸)”하는 팀(team)은 개마(鎧馬)한 말(馬)의 마갑(馬甲)에 ‘공기’를 넣고, 이를 탄 개마(鎧馬)무사(武士)들이 노(櫓)를 저어서 가는 것을 뜻합니다.
(참고: 이 “ ‘개마(鎧馬)무사’들이 어찌 물에서 갈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곳에 < 토착화(土著化)된 개마무사(鎧馬武士)의 비밀 -칠지도(七支刀)관련-(1) >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익수(鷁首) 혹은 익주(鷁舟)라고 하는 ‘배’가 어찌 생겼는가?”는 것은 한마디로 ‘바이킹의 배’의 배를 뜻합니다.

(*) 바이킹(Viking)의 배를 볼 수 있는 곳
http://blog.daum.net/pagopago/13627500?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pagopago%2F13627500

이 바이킹(Viking)의 배는 선수(船首)가 매우 높은데 이는 바람과 파도(波濤)를 이겨내기 위한 것이지요. ‘바이킹의 배’의 좌우(左右) 현(舷)의 ‘높이’는 매우 낮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서양식 노(櫓)를 -이를 영어로는 오아(Oar), 패들(paddle)이라고 하지만, 이를 한자(漢字)로는 도(櫂)라고 합니다. - 걸고 맞바람을 선수(船首)가 막아주는 그 틈새에서 힘차게 저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노(櫓)’는 물(水)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것입니다. 즉 작용(作用)과 반작용(反作用)으로 되어 있어서, 힘(=력(力))은 약하지만 방향이 교란(攪亂)되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앉아서 주로 젓기 때문에 최대한의 힘을 쓸려면 ‘배가 나가는 방향’ 반대쪽을 보고 앉아
서 허리를 젖히는 힘으로 젖는 것이 강합니다. 앞을 보면서 저을 경우는 도(櫂)를 수직으로
세워 잡고서 물을 미는 방식으로 몹니다.  
아무튼 ‘서양식 노(櫓)’는 ‘노(櫓) 걸이’가 걸이는 위치가 낮을수록 힘이 쎕니다.

그런데 이런 바이킹(Viking)식 배를 동양(東洋)에서는 익주(鷁舟) 익수(鷁首)라고 하는데, 위
문단에는 이 익수(鷁首)를 탄 팀은 역풍(逆風)에 역류(逆流)하는 강을 따라서 올라가면서 오
직 물(水)로만 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마갑(馬甲)를 부구(浮具)로 만들어서 개마(鎧馬)무사가 노(櫓)로써 젖는 것은 물(水)
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물로 전환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어느 팀(team)이 빠를 것인가?”는 그야말로 막상막하(莫上莫下)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긴장감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경주(競湊) 대회를 함에 있어서, ‘출발 신호’는 유화(柳花) 황후(皇后)가 탄 배
항해용(航海用) 선박이 나타났을 때, 이를 보고 자신의 팀(team)에 알리는 것을 바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서산도(大嶼山島) 산정(山頂)에서 “유화(柳花) 황후(皇后)께서 어디에서
오시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서산도(大嶼山島)는 무척 크고, 또 경주(競走)를 시작하는 개마(鎧馬)무사들과 익주(鷁舟)
들이 모두 대서산도(大嶼山島) 해안가이기 때문에, 유화(柳花)-황후가 올 때의 비표(秘標)
‘돛의 색갈’과 문양(文樣)일 것으로 추정해서 - 이를 빨리 유막(帷幕)이 쳐진 곳에 알리고,
이 보고를 받은 측은 그대로 연락병(聯絡兵)을 통해 개마(鎧馬) 팀(team)과 익주(鷁舟) 팀
(team)에 알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경주(競走)대회가 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 주의(注意) 말씀 - 4. 마침 (*)

國亡之後,代代稱號不一.新羅第三十一,政明王卽位.開耀元年辛已.號爲金官京.
가락국(駕洛國)이 망(亡)한 후에 (이곳의) 칭호(稱號)가 대대(代代)로 일치하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이- 이는 신문왕(神文王)의 휘(諱)임 -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에 (금관(金官: 국제법관)의 ‘서울’이란 뜻으로) 금관경(金官京)이라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2.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에 의해 포위(包圍)되었던 중국대륙

가.  해모수(解慕潄)의 오룡거(五龍車)

- 각설(却說)하고.
이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기록은 정상적으로 해석하고, 그 의미(意味)를 추적하면, 사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중국대륙(中國大陸)이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접어들면서 ‘통일전쟁’을 치르면서 아주 잔혹(殘酷)한 사태가 가득해지는 시절 - 즉 “고조선(古朝鮮)이 물러나자 진(秦)의 혹정(酷政)이 시작되었다.”는 조퇴진혹(朝退秦酷)의 시대(時代)풍조가 강하였을 때, 중국대륙에 있었던 해운업(海運業)을 하는 사람들은 토착(土著)기술을 익히면서 뿔불히 중국대륙에서 흩어졌었는데, 이를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가 나타나셔서 ‘중국대륙 전체’를 포위망을 형성하였음을 나타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전(前) 가락국(駕洛國)인 북부여(北扶餘) 남쪽의 강역(疆域)은 후(後) 북부여(北扶餘)인 가락국(駕洛國)과 마찬자기로 그 강역(疆域)이 ①東以黃山江. ②西南以滄海. ③西北以地理山.④東北以伽耶山. ⑤南而爲國尾 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입니다.

①東以黃山江. 의 해석에서 황산강(黃山江)의 비정(比定)은 점차 해본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②西南以滄海. 의 창해(蒼海)는 오늘날 인도양(印度洋)이 맞다는 것입니다.
또한 ③西北以地理山.은 용교비행술(龍蹻飛行術)로써 곡나육강(谷那六江)에서 물류(物流)를 교류할 수 있는 오늘날 운남성(雲南省)도 분명히 해모수(解慕潄) 전(前) 가락국왕(駕洛國王)께서 확보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
북부여기(北扶餘紀)를 보면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가 타시는 비행선(飛行船)인 오룡거(五龍車)에 탑승 인원이 종자(從子) 500여명이라고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前略))---오룡거(五龍車)를 타시고 종자(從者) 500여인과 더불어 아침이면 정사(政事)를 살피시고, 저녘이면 하늘로 올랐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乘五龍車與從者五百人 朝則廳事暮登天至是郞位)

그런데 이 기록(紀錄)은 오룡거(五龍車)가 비행선(飛行船)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임을 이해하고 보면, “매우 타당한 구조이다.”라는 생각을 품게 합니다.

비행선(airship)은 ‘헬륨 개스(gas)’가 채워진 열기구(熱器具) 통이 ‘위’에 있고 그 밑에 선실(船室)이 불어있는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1(*) -비행선의 모습
http://en.wikipedia.org/wiki/Image:USS_Akron_in_flight,_nov_1931.jpg

따라서 이 비행선(飛行船)을 매우 작게 만들어서 사람이 뜰 정도의 헬륨 개스(gas)를 집어 넣은 부구(浮具)를 띄우고 그 밑에 사람의 양(兩) 손에 ‘날개’ 역할을 하는 노(櫓)를 달고서 하늘을 날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 인터텟(Internet)에서는 이런 실험에 성공한 동영상(動映像)이 소개되어 있기도 합니다.
(*)2(*)- 작은 비행선에서 손(手)을 노(櫓)로써 나는 동영상(動映像)
http://kr.youtube.com/watch?v=RecckjgLyqo

또 이러한 ‘원리’를 확대해서 큰 비행선 밑에 또다른 비행체가 열기구(熱器具)를 업은채 그야말로 ‘큰 날개형 노(櫓)’를 단 비행선의 모형이 있기도 합니다.

(*)3(*)-  두 비행체가 업혀서 ‘날개 노(櫓)’로 나는 비행선(飛行船)의 모습
http://www.mocpages.com/moc.php/33341
따라서 우리는 거대한 열기구 밑에 ‘날개 역할을 하는 노(櫓)’를 달고, 이를 500명이 ‘날개 노(櫓)’를 저어서 가는 것을 고려해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1(*)의 비행선 밑에 ‘날개 노(櫓)’를 단 판옥선(板屋船)의 모습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 판옥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http://titicat.egloos.com/1738947

나중에 [선박]을 설명하는 기회에 말씀드리겠지만, 판옥선과 거북선에 사용된 ‘높은 노(櫓)’는 실질상 새(鳥) 날개와 똑같이 움직이는 매우 신기한 노(櫓)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종자(從子) 500명이 있어야 오히려 비행선(飛行船)은 현실적으로 날수 있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동력(動力)이 있어야하니깐요.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 시절에 엔진(engine)의 힘으로 프로펠라를 돌려서 오룡거(五龍車)가 날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날개 노(櫓)’의 인간동력으로 날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방향을 꺽거나 혹은 상승(上乘)하거나 하강(下江)하려면, 또 다른 ‘헬륭 개스(gas)’를 채운 보조 열기구(熱器具)를 앞부분에 좌우 두개씩, 뒷 부분에 좌우 두개씩 배치하고, 복동식(複動式) 피스톤(piston) 풀무 - 이는 ‘바람을 일으키는 송풍(送風)장치’의 피스톤을 밀 때나 당길때나 계속 바람이 흘러가는 장치를 뜻한다. - 로써 가운데 있는 ‘헬륨 개스’를 그때 그때 네 방향으로 분출(噴出)시키기도 하고, 또 흡입(吸入)시키기도 하면 방향전환이나 혹은 상승(上乘) 하강(下降)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헬륨 개스(Gas)가 들어있는’ 풍선(風扇)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 모양으로 되어 있고, 필요에 따라서 그 속에 불(火)을 피워서 올리기도 하고, 불(火)을 끄기도 하여 쉽게 내려가게 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는 일단 가운데 ‘날개 노(櫓)’를 젓는 문자 그대로 비행선(飛行船)과 결합된 ‘헬륭 개스(gas)’가 달린 거대한 풍선(風扇)이 하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앞과 뒤의 좌우(左右)에 각기 하나씩 또 ‘헬륨 가스’가 들어있는 풍선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이런 “‘헬륨 개스(gas)’가 달린 풍선(風扇)”의 모양 자체를 용(龍)모습으로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고대인의 정서(情緖)에 흡족하였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오룡(五龍)있는 거대한 ‘수레’이니깐 오룡거(五龍車)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그 당시 가능한 기술로써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복동식(複動式) 피스톤 풀무’는 신기하게도 노자(老子) 5장(章)에서 우주(宇宙)의 오묘한 도(道)를 설명하는 비유로써 설명될 정도로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공개된 기술”이었던 것입니다.
노자(老子)가 생존했던 시기는 춘추(春秋)에서 전국(戰國)시대로 이행하는 도중인 기원전 5세기입니다.

노자 5장(章) 가운데,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이란 문장이 나옵니다.

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통풍기가 달린 풀무와 같다. 그것은 텅 비어있지만 찌그러들지 않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내뿜는다.”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복동식(複動式) 피스톤(piston)이 작동하는 모습을 하나의 비유(譬喩)로써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는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께서 전(前) 가락국왕(駕洛國王)으로 계실 적에 이미 곡나육강(谷那六江)에서 물류(物流)를 6강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공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북부여(北扶餘)를 일으킨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께서 인도양(印度洋)에서 ‘베링 해협’까지 해안가를 관장하는 전(前) 가락국(駕洛國)을 북부여와 함께 세웠다.”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북부여기(北扶餘紀)의 진실성(眞實性)을 보강(補强)하는 역활도 하는 것입니다.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께서 오룡거(五龍車)의 핵샘 개념이 ‘헬륨 개스’가 담긴 풍선(風扇)에서 자연스런 부양력(浮揚力)을 얻었다면, 아무래도 이 ‘헬륨 개스’를 ‘새지 않게’ 에워싸는 ‘고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고무’는 ‘미얀마(=버마)’, 태국(泰國) 등의 밀림지대에서 산출(産出)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부여기(北扶餘紀)의 오룡거(五龍車)가 현실성을 지니려면,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께서 ‘고무’의 자생지(自生地)인 가락국(駕洛國) 영역도 함께 건국(建國)하셨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나.  한반도(韓半島)의 놀라운 선박(船舶)기술

문제는 가락국(駕洛國)의 강역(疆域)을 나타내는 귀절 가운데, ④동북이가야산(東北以伽耶山)의 귀절이 말하는 의미입니다.

일단 ③西北以地理山에서 지리산(地理山)이 오늘날 점창산(點蒼山)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역(地域) 전체 -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운남성(雲南省), 고대의 곡나(谷那)로써 이는 곡나육강(谷那六江)을 아우르는 지역 전체의 핵(核)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올바른 독서(讀書)하는 태도라고 보여 집니다.

아래 중국전도(中國全圖)에서 점창산(點蒼山) 주변에 있는 ‘곡나육강(谷那六江)’이 뻗어나가는 그 ‘지역(地域)크기’와 가야산(伽耶山)이 있는 낙동강(洛東江) 중부에서 똑같이 ‘곡나육강(谷那六江)의 크기’만큼을 확대시키면 한반도 전체가 들어옴을 알수가 있습니다.

(*) ①점창산(點蒼山)과 곡나육강(谷那六江)의 운남성(雲南省)과 ② 가야산(伽耶山)과 한반도(韓半島)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중국전도(中國全圖)를 볼 수 있는 곳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 각설(却說)

즉 ④동북이가야산(東北以伽耶山)이 실질적으로 말하는 것은 한반도(韓半島) 전체지역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③西北以地理山이 핵(核)으로는 점창산(點蒼山)인 지리산(地理山)을 거론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곡나육강(谷那六江) 전체를 아울르는 오늘날 운남성(雲南省) 지역 전체를 뜻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지요.

그런데, 곡나육강(谷那六江)의 요충지(要衝地)가 지정학적(地政學的) 의미는 이지역이 용교비행술(龍蹻飛行術) - 다시 말하면 비행선(飛行船)을 최대한 활용할 때 만이 지형(地形)의 특성을 십분 활용할수 있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는 것이지요?
도대체 ④동북이가야산(東北以伽耶山)으로 표기된 한반도(韓半島)에는 “무엇을 활용할 때에 가장 이 한반도(韓半島)가 지닌 지정학적(地政學的) 가치가 빛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항해용(航海用)-선박(船舶)입니다.

좌계는 그동안 우리의 선박(船舶)기술에 흥미가 있어서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는데, 엔진(engine)의 힘으로 가는 흑선(黑線)이 등장하기 전(前)에 오대양(五大洋) 육대주(六大洲)를 누빌 수 있는 유일(唯一)한 배는 바로 한반도에 사는 사서(史書)에 나오는 동제인(東鯷人)이라는 것입니다.
이 동제인(東鯷人)이란 뜻은 “동(東)쪽에 사는 ‘메기’ 사람”이란 참으로 괴상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는 배달화백(倍達和白)때 수상연단(水上演壇)으로 쓰는 태(兌)라는 것을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면 실제로 ‘메기’ 처럼 생겼읍니다.

즉 태(兌)의 앞부분에 팔(八)자 처럼 생긴 부분이 있는데, 이는 한반도(韓半島)에만 사는 사람들이 만드는 배인 난함선(欄檻船)이 전세계 선박사(船舶史)에서 유일하게 ‘높은 노(櫓)’늘 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높은 노’는 전면도(前面圖)로 보면 (丿---  ---乀)처럼 생긴 노(櫓)를 뜻합니다.  

이 ‘높은 노’의 노병(櫓柄)을 누르면 상대적으로 ‘노(櫓)의 주걱’이 위로 (↖ ↗)로 올라가게 되어 배는 가라앉게 되고, 또 노병(櫓柄)을 올리게 되면 ‘노(櫓)의 주걱’이 아래로 마치 물(水)을 새가 ‘날개로’ 차듯해서 (↙ ↘) 배가 전체가 부상(浮上)하게 되는 배입니다.
‘높은 노(櫓)’를 쓰는 난함선(欄檻船)은 기본적으로  배의 고물(船尾) 부분과 고물(船尾)부분을 서로 승강(乘降)이 엇갈리게 운영이 됩니다.

따라서 이물(船首)이 올라갈 때에는 고물(船尾)이 내려가서 배(船) 전체는 수면(水面) ‘위’로 솟구치듯 하며, 반대로 이물(船首)이 내려갈 때에는 고물(船尾)이 올라갈 때에는 올라가서 배(船) 전체는 잠수(潛水)하듯 가라앉게 되는 선박(船舶)입니다.

따라서 이 배는 요컨데 접영(蝶泳: Butterfly)하듯이 움직이는데, 역류(逆流)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갈수 있음은 물론 이물(船首) 부분의 밑에다 브이(V)자 모양의 철갑(鐵甲)을 입히면, 쇄빙(碎氷)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유일(唯一)한 배입니다.

이 배는 충격력(衝擊力)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배 앞에 범퍼(bumper) 역할을 하는 신방(信防) - 이는 ‘믿을 수 있는 방호벽(防護壁)’이란 뜻이다. - 을 달게 됩니다.

바로 태(兌)의 팔(八)자로 된 부분이 바로 이 범퍼(bumper)역할을 하는 신방(信防)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신방(信防)에 팔(八)차 모양으로 된 아주 이상한 배(船)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난함선(欄檻船)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명칭이 ‘동(東)녘의 메기 사람들’ 즉 동제인(東鯷人)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가락국(駕洛國)의 강역(疆域)을 나타내는 다섯 귀절 - ①東以黃山江. ②西南以滄海. ③西北以地理山.④東北以伽耶山. ⑤南而爲國尾 - 가운데, 전략적 요충지가 되기 위해서 ‘과학(科學)기술(技術)’이 접목되어야 비로서 그 지정학적(地政學的) 의미가 최대한 활용되는 지역이 두 곳이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는 바로 ③西北以地理山 의 지역인 곡나육강(谷那六江) 지역으로써 이는 용교비행술(龍蹻飛行術)인 비행선(飛行船)이 필요한 곳입니다.  

또 하나는 바로 ④東北以伽耶山.의 지역인 동제인(東鯷人)의 땅으로써 이는 난함선(欄檻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지역이 ‘과학기술’로써는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선박사(船舶史) 가운데서 ‘높은 노(櫓)’를 쓰는 배인 난함선(欄檻船) 유형의 배를 유일하게 사용한 것이 한반도(韓半島)에 사는 동제인(東鯷人)입니다.

문제는 이 ‘높은 노(櫓)’가 동양(東洋)의 노(櫓)의 특징인 ‘노(櫓)의 주걱’이 물(水)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무한대(∞)식으로 계속 돌면서 일종의 스쿠루(Screw)작용을 하듯이 하는 노(櫓)의 개념에다가 - 또 하나의 기술적인 혁명 즉 ‘새(鳥)의 날개 젓기’ 식으로 ‘노(櫓)의 움직임’을 변형시킨 것이 바로 ‘높은 노(櫓)’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높은 노(櫓)’를 약간 변형(變形)시키고, 여기에 ‘노(櫓)의 주걱’에 ‘날개’를 달기만 하면, 바로 “오룡거(五龍車)-비행선‘에서 사용할수 있는 ’날개-노(櫓)‘가 되는 것입니다.

남당유고(南堂遺稿)에서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출자(出自)가 청예(靑刈)이시며, 한반도의 대가야(大伽耶) 출신이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대가야’의 본진(本陣)과 동제인(東鯷人)이 모두 한반도(韓半島)에 있고, 또 이곳이 선박기술상 ‘높은 노(櫓)’를 유일하게 쓴 지역이고, 이 ‘높은 노(櫓)’가 비행선(飛行船)에서 노(櫓)를 저을수 있는 유일한 유형(遺形)임을 고려하면, 매우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  북부여(北扶餘)와 전(前) 가락국(駕洛國)에 의해서 ‘포위된 중국대륙’

아무튼 -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께서 북부여(北扶餘)와 전(前) 가락국(駕洛國)을 동시에 건국(建國) 하시면서 중국대륙(中國大陸)을 완전히 “에워쌌던 것” 사실입니다. 장건(張騫)

이런 사실은 ‘아시아(Asia) 고대사(古代史)’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에 “하나”인 <민예허왕국>의 지역 - 오늘날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 지역이 공지(空地)로 텅텅 비게 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놀랍게도 흉노(匈奴)를 패퇴시키고, 장건(張騫)을 통해서 저 씰크-로드(silk-load)를 장악하고, 이른바 천마(天馬)인 한혈마(汗血馬)를 대량으로 유입해 들어온 한무제(漢武帝) 때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것입니다.

(*) 참고 :이 민예허왕국의 공지화(空地化) 사건에 대해서는 Mimesis 님께서 두 편의 글을 이 싸이트(site)에 쓰셨습니다.
1. 민.예 허왕국에 대해서
2.  민.예 허왕국에 대해서 …(다시 한번)

(*) Mimesis 님이 올린 민예허왕국의 공지화(空地化)된 지역의 지도를 볼 수 있는 곳.
http://blog.daum.net/innomy/13002096 (*)

도대체 사이(四夷)에 둘러싸인 중국대륙을 정력적(精力的)으로 모두 ‘활로(活路)’를 열고, 정복활동을 왕성이 벌인 한무제(漢武帝)가 천험(天險)으로 알려진 무이산맥(武夷山脈)으로 둘러쌓이고, 또 물류(物流)의 공급지인 장강(長江)의 ‘바로 인근 지역’을 왜 텅텅비게 하였을까 하는 것은 역사학자 토인비가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고 기이하게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미스테리(Mystery)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한무제(漢武帝)의 사이(四夷) 개척(開拓)에 관한 사항을 사마천의 사기(史記)열전(列傳)을 읽어보면, 아주 이상한 느낌이 옵니다.
마치 손오공(孫悟空)이 ‘부처님 손바닥’ 속에서 놀듯이 한무제(漢武帝)의 사이(四夷)-평정(平定) 자체가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의 손바닥’ 안에서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사마천의 서남이(西南夷) 열전(列傳)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참고: 아래의 인용문와 앞으로 인용할 사기(史記) 열전(列傳)은  <司馬遷 史記 7. 사기(史記) 열전(列傳) 하(下), 정범진(丁範鎭) 외. 옮김 까치 사(社), 1977.8.5.)>을 바탕으로 하였읍니다.  


(*) 전게서(前揭書) p917 옮김 (*)

원수(元狩) 원년(元年)에 - 이는 한무제가 즉위 후 네번째 쓰는 연호로써 기원전 122년임 -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이 대하(大夏)- 박트리아를 뜻함 -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말하기를

(*) 참고 : 대하(大夏)의 위치를 볼 수 있는 곳 :
: http://blog.naver.com/free_less?Redirect=Log&logNo=110030003011 (*)

-(계속) “내가 대하(大夏)에 있을 때 촉(蜀)의 베와 공(邛)-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서부(西部) 지역을 뜻함 -의 나무 지팡이를 보고, ”어디에서 가져왔는가?“하고 물으니  ” ‘동남쪽 신독국(身毒國) -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을 뜻함. 역자(譯者)는 이를 ’연독국‘이라 표기했으나 좌계가 ’신독국‘이라고 고칩니다. 신독(身毒)은 ’흰두‘의 음차(音借)입니다. -에서 가져왔습니다. 그곳은 대략 수천리나 되는데, 촉(蜀)의 상인(商人)에게서 사 가지고 왔습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혹은 들으니 ”공(邛)의 서쪽으로 대략 2,000리 쯤에 신독국(身毒國)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장건(張騫)은 ”대하(大夏)는 한(漢)나라의 서남쪽에 있는데 중국을 흠모하고 있지만, 흉노가 그 길을 막고 있는 것을 근심하고 있으며, 만약 촉(蜀)으로 가는 길을 개통할 수 있다면 신독국(身毒國)으로 가는 길이 편리하고 가까워 이익이 되며 해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곧 왕연우(王然于), 백시창(柏始昌) 여월인(呂越人)등으로 하여금 좁은 길을 문어서 서이(西夷)의 서(西)쪽으로 부터 출발하여 신독국을 찾아보게 하였다.
전(滇)에 이르니 전왕(滇王) 상강(嘗羌)이 서쪽으로 길을 찾아나선 10여명의 무리를 억류하였다. 1년 남직 지나도록 그들은 모두 곤명(昆明)에 갇히어 신독국까지 통행하는 자가 없었다.
  전왕(滇王)이 한나라의 사자에게 “한(漢)나라와 우리나라 중 어느 쪽이 더 큰가?”라고 물었다. (한(漢)나라의 사자들이 야랑(夜郞)에 도착하자) 야랑후 역시 이와 같이 물었다. 그들은 서로 길이 통하지 않는 까닭에 각기 스스로 하나의 주(州)의 군주라고 여기고 한(漢)나라의 넓고 큼을 알지 못하였다. 사자가 돌아와 전(滇)은 큰 나라로써 족히 가까이할 만하다고 주어 이야기하니 황제가 그 말에 관심을 가졌다.

(*) 전게서(前揭書) p917 옮김. 마침 (*)

바로 이 이야기가 야랑자대(夜郞自大)란 고사성어(故事成語)의 어원(語源)이 되는 사건인 것이지요. 문제는 이 전국(滇國)이나 혹은 야랑국(夜郞國)이 있었던 지역이 바로 곡나육강(谷那六江)이 있었던 지역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즉 전(前)-가락국(駕洛國)이 있었던 지역인 것이지요.
문제는 이 “전국(滇國)이나 야랑국(夜郞國)이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라고 사기(史記)에는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곡나육강(谷那六江)에 있던 소국(小國)들은 물류(物流)-운송(運送)을 신인(神人)들 - 다시 말하면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통해서 교역(交易)을 했으니깐 이들과 접속만 해서 ‘자국(自國) 안’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교역(交易) ‘만’ 하면되는 것이니깐 말입니다.

문제는 왜 이들이 “한(漢)나라와 우리나라를 비교해서 어디가 더 크냐?”라고 항상적으로 묻는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
이들 곡나육강(谷那六江)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비록 소국(小國)이지만 “한(漢) 나라.”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지요.

좌계는 지금까지 삼국유사(三國遺事)을 인용해서 가락국(駕洛國)이 후(後)-북부여(北扶餘)이미, 북부여(北扶餘)가 전(前) 가락국(駕洛國)임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 시절에 “중국대륙 ‘위’를 마치 덮개처럼 덮고 있는 나라가 ‘북부여’ 혹은 ‘부여’라고 하고, 또 ‘중국대륙’을 ‘밑’을 마치 ‘받침대’처럼 온통 해안가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 이름을 ‘가락국(駕洛國)’이라고 서로 구분해 준다고 한다면, 이를 모두 합쳐서 칭할 때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한(漢)입니다.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님이 사서(史書)에 나오는 대한국(大漢國)이 바로 원래는 한(漢)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방(劉邦)이 한중(漢中)에서 일어난 것을 기념(紀念)하여 국명(國名)을 <한(漢)>이라고 하자, 이 두개의 국명(國名)이 충돌하게 되자, 한(漢)나라를 둘러싼 - 말하자면 북부여(北扶餘)-가락국(駕洛國)을 대한(大漢)으로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보여집니다.

아무튼, 곡나육강(谷那六江)의 한 계곡(溪谷)의 기슭을 맡고 있는 전국(滇國)이나, 혹은 야랑국(夜郞國)에서 어느 날, 신기하게도 도보(徒步)로 걸어와서 “자신의 나라가 한(漢)나라다.”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자, 이들은 일단 머리 속에서 혼란(混亂)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한(漢)인데?... 이사람도 한(漢)이라고?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곡나육강(谷那六江)의 계곡에서 왔지?  어느 육강(六江)의 하류(河流)에서 꾸준히 걸어온 것은 확실한데???”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우리나라랑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 한(漢) 나라가 어디가 크냐?” 하고 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흔히 야랑자대(夜郞自大)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는 좁은 지역에 ‘우물 안에 갇힌 나라’의 어리석은 질문으로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좌계는 감히 대답합니다.  
“한(漢)나라가 전국(滇國)이나 야랑국(夜郞國)보다 작다.”고 말입니다.
왜냐?
대한국(大漢國)은 한(漢) 나라의 북쪽 지역을 북부여(北扶餘)로써 덮고 있었고, 한 나라 지역의 남쪽 지역을 - 가락국(駕洛國)으로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깐 말입니다.  

아무튼, 한무제(漢武帝)는 이런 장건(張騫)의 이야기와 또 오늘날 운남성(雲南省)을 통해서  신독국(身毒國)으로 가는 길을 내려고 보낸 사신(使臣)들이 억류(抑留)상태에서 풀려나와서 들은 보고를 바탕으로 오늘날 광동성(廣東省) 즉 전(前)-가락국(駕洛國)의 수도(首都) 중에 하나인 오늘날의 조경시(肇慶市)를 ‘쪽’으로 교역로(交易路)를 내기 위한 원정군(遠征軍)을 드디어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가 곡나육강(谷那六江)에 사신(使臣)을 파견한 순간에 대한국(大漢國)에는 이런 한무제(漢武帝)의 동향이 정확히 파악되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한무제(漢武帝)가  또 점차(漸次) ‘전(前) 가락국(駕洛國)의 수도(首都)’인 금관고성(金官高城) 쪽으로 원정(遠征)을 하려고 다양한 외교 전략과 정치공작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이미 대한국(大漢國) 사람들은 다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금관고성(金官高城)이 있었던 오늘날 광동성(廣東省) 조경시(肇慶市) 근처에 오늘날 광주시(廣州市) 남쪽지역이 고대의 명칭이 반우(番禺)입니다. (참고: 전게서(前揭書) 역자(譯者)인 정범진(丁範鎭) 선생은 번(番)은 ‘반’으로 읽고 있습니다.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은 일반 음가(音價)와 다르게 읽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따릅니다.)

이 반우(番禺)가 바로 남월(南越)이라는 나라의 수도(首都)가 있던 곳입니다.
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일어선 후에도, 한(漢)나라는 북쪽으로는 흉노(匈奴) 때문에 존폐(存廢)의 ‘위기’를 늘 겪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대륙 남쪽 지역은 사실상 치외(治外) 지역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국대륙 남부 지역에는 - 장강(長江)을 “건너서” 사는 사람을 칭하기를  월인(越人)이라고 통칭하였는데,  종족(種族)별로 다시 낙월(駱越), 민월(閩越), 구월(甌越), 백월(百越)로 나눕니다.

낙월(駱越) 족은 오늘날 월남(越南)과 해안가를 타고 광서성(廣西省), 광동성(廣東省)에 분포되어 있는 족속을 말합니다.  
백월(百越)족은 오늘날 광서성(廣西省)의 고산(高山) 지역에 주로 있었던 족속인 것이지요.
그리고 민월(閩越)은 바로 무이산맥(武夷山脈)으로 둘러쳐져 있는 지역 - 즉 오늘날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 남쪽 지역을 뜻합니다.

구월(甌越)족은 중국의 영남(嶺南) - 이는 실질적(實質的)으로는 광동성으로 흘러나가는 주강(珠江)의 원류인 서강(西江),북강(北江),동강(東江)의 원류(源流)와 장강(長江)으로 흘러들어가는 강(江)의 원류(源流)의 분수령(分水嶺)인 <묘령(苗岭)-산맥(山脈)>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오늘날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을 합쳐서 부르는 말인 것입니다. - 아래에 있었던 족속으로써 나중에 신라(新羅)를 구성하는 주된 종족인데, 중국 기록에는 이를 다시 서구(西甌)와 동구(東歐)로 분류합니다.  서구(西甌)는 말하자면 주로 서강(西江) 주변에 있었는 구월(甌越) 족을 뜻하고, 동구(東甌)는 한강(韓江) 주변에 있었던 족속을 뜻합니다.

아무튼 이런 월인(越人)들이 여러 소국(小國)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한(漢)나라가 일어설 때에는 남월(南越)이란 이름으로 통합이 되고, 그 속에 여러 소국(小國)들이 있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사기(史記)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남월(南越)의 수도가 반우(番禺) 즉 오늘날 광동성(廣東省) 광주시(廣州市) 남쪽에 지금도 똑같은 지명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위치는 서강(西江), 동강(東江), 북강(北江)이 모여서 마치 경(冂)자 처럼 모인 주강(珠江)이 되어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광주시(廣州市) 바로 남쪽이자 이 경(冂)의 바로 안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전(前)-가락국(駕洛國)의 금관고성(金官高城)인 ‘조경시(肇慶市)’는 이 주강(珠江)으로 서(西)쪽에서 들어오는 서강(西江) 하류에 있는 것입니다.

(*) 전(前) 가락국(駕洛國)의 금관고성(金官高城)인 ‘조경시(肇慶市)’와 남월(南越)의 수도(首都)인 반우(番禺)를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광동성(廣東省)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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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전(前)-가락국(駕洛國)의 금관고성(金官高城)인 조경시(肇慶市)와 남월국(南越國)의 수도는 약 90키로 밖에 안 떨어진 지근(至近) 거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무제(漢武帝)의 사신(使臣)들이 전(前)-가락국(駕洛國)의 곡나육강(谷那六江)의 소국(小國)- 전국(滇國)과 야랑국(夜郞國)에 인도(印度)로 가는 길을 탐사하기 위해서 사신(使臣)을 보낸 후에 - 따라서 대한국(大漢國)은 충분히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 이 남월국(南越國) 수도(首都)인 반우(番禺)를 점령하러오는 과정을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통해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중요해집니다.

일단 질문(質問)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대한국(大漢國)에서 - 이는 전(前) 가락국(駕洛國)과 북부여(北扶餘)를 통합한 나라 이름을 뜻합니다. - 이 한무제(漢武帝)의 원정(遠征)에 대해서 어찌 대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품기 전(前)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을 때 무척 조심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집안 대대로 역사(歷史)를 기록하는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사가(史家)로써 투철(透徹)한 의식이 있었지만, 이 사마천(司馬遷)은 궁형(宮刑)을 당한 사람이란 점입니다.

사마천(司馬遷)은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 원래(原來) 이름은 이연년(李蓮年)인데, 악사(樂士)출신었는데, 자신의 ‘누이동생’이 한무제(漢武帝)의 부인이 되자 황명(皇命)에 의해 이름을 고친 것임 - 흉노(匈奴)와 싸우다 무사히 후퇴(後退)하게 하기 위해서 퇴로(退路)가 막힌 곳에서 보병(步兵) 5,000명으로써 흉노 기병(騎兵) 8만(萬)을 상대로 10,000명이나 사살(射殺)하다가, 구원병도 안오는 상황에서 흉노에게 투항한 이릉(李陵)을 변호(辯護)하다가 궁형(宮刑)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사마천(司馬遷)은 “총괄작전을 운영한 이광리(李廣利)는 아무런 문책을 안하고, 이 이광리(李廣利)가 무사히 탈출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투항한 사람의 가족(家族)을 멸족(滅族)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논리(論理)였습니다.

그런데, 사마천(司馬遷)의 논리(論理)는 정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망죄(誣罔罪)에 - 이는 ‘허위사실 유포죄’를 뜻함 - 해당해서 궁형(宮刑)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권 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제49’가 있는데, 여기에는 이광(李廣)이라는 전설적인 한(漢)나라 장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릉(李陵)은 바로 이광(李廣)의 손자(孫子)입니다.  따라서 이릉(李陵)의 이야기가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 보면 당시 흉노(匈奴)의 왕(王)은 ‘8만 기병(騎兵)으로 보병(步兵) 5,000을 포위공격하면서도 오히려 기병(騎兵) 10,000명을 잃어버렸고, 이릉(李陵)은 할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는데, 이릉(李陵)부대에서 한(漢)나라로 돌아온 것은 겨우 400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릉(李陵) 장군(將軍)이 “구원군은 안옴이 확실하다. 전멸(全滅)을 면하기 힘들다. 그러니 탈출하라, 나와 함께 탈출하는 사람을 위해서 싸울사람만 남으라!”라는 명령을 내렸음이 분명한 것이지요.
즉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싸우다가 항복(降伏)한 것인데,  놀랍게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흉노의 왕이 이릉(李陵)에 대해서 어찌 대하였는가가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 이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인용 (*)
이름을 사로잡은 후, 선우는 평소 그 집안의 명성을 들었던 터이고, 전투에 임해서도 용감하였으므로 자기의 딸을 이릉에게 시집 보내어 그를 존중해주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이릉의 모친과 처자를 몰살하였다. 이후로 이씨 집안의 명성은 쇠락하였고, 이씨 집안의 문객이 있었던 농서(隴西)의 사대부는 모두 이 일을 수치로 여겼다.
(*) 이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인용. 마침.(*)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을 읽어보면,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와 한무제(漢武帝)를 비교해 볼때, 같은 제왕(帝王)이라도 선우(單于)가 훨씬 멋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농서(隴西)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이 일을 모두 수치로 여겼다.”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한무제(漢武帝)가 흉노(匈奴)-선우(單于)에 비해서 쪽 팔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인 것이지요.
즉 무망죄(誣罔罪)라는 것은 ‘허위사실 유포죄’인데, ‘적대국(敵對國) 찬양(讚揚)및 고무(鼓舞) 죄(罪)’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씀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한(漢)나라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세력 - 즉 대한국(大漢國)의 체제를 움직이는 소도(蘇塗)의 ‘훌륭하고 멋있는’ 점에 대해서 전혀 언급할 수 없는‘한무제(漢武帝)의 함정(陷穽)’에 사마천(司馬遷)은 걸려든 것입니다.

왜냐?
만약 언급하면, 그 즉시로 “자 사기(史記)에 들어난대로 ‘적대국(敵對國)을 찬양 고무하는 것이 역역하지 않는가?!”하는 증거가 잡히고, 이는 멸족(滅族)되는 중대한 범죄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마천은 한무제(漢武帝)가 사이(四夷)를 개척하는 과정을 열전(列傳)에 담되, 전혀 소도(蘇塗)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멸족(滅族)의 화(禍)을 면(免)하는 ‘집필(執筆) 전략(戰略)’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가(史家)로써의 양심상(良心上)...“나는 이 부분을 멸족(滅族)을 면하려고 이런 식으로 쓸수 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마치 애원(哀願)하는 듯한 글도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서는 언젠가는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 아무튼, 중국(中國) 사서(史書)에는 ‘중국대륙 안(內)’에 있었던 소도(蘇塗)에 대해서 철저히 언급을 안 한 - 어쩌면 거의 유일(唯一)한 사서(史書)인 것입니다.

이런 특성을 이해하면서 사마천의 남월(南越)열전(烈傳)을 읽어보기로 합시다.

(*) 전게서(前揭書) 남월(南越)열전(列傳) P896 옮김 (*)

“천자는 미약하고 제후는 정벌의 전쟁에 힘을 쓰는데도, 신하가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니 이를 꾸짖노라. 지금 여가(呂嘉)와 건덕 등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라고 일걷고 있다. 죄수(罪囚)들과 강회(江淮) 이남의 10 만(萬) 수군(水軍)은 가서 정벌하라.”

(*) 참고 말씀 -1 (*)

위 한무제(漢武帝)의 조칙(詔勅) 가운데 등장하는 여가(呂嘉)는 남월(南越)의 승상입니다.  남월(南越)열전에 의하면 백성들에게 지지(支持)를 받고 있었는데, 남월왕(南越王) 수차 이 여가(呂嘉)를 암살하려고 했음이 남월(南越)열전에 나옵니다.  그런데 남월(南越)의 왕(王)인 영제(嬰齊)가 장안(長安)에 숙위(宿衛)하면서 한단(邯鄲) 규씨(樛氏)에 장가들어 아들 흥(興)을 낳고, 죽게 됩니다.  따라서, 이 규씨(樛氏)는 자연 태후(太后)가 되었는데, 이 규씨(樛氏)는 영제(嬰齊)와 결혼하기 전에 패릉(覇陵) - 섬서성 서안(西安)을 뜻함 - 사람 안국소계(安國少季)와 밀통(密通)하는 사이였읍니다.  남월왕(南越王)이 어린 흥(興)이 되자, 한(漢)나라는 이 안국소계(安國少季)를 한(漢)나라의 사신(使臣)으로 보내게 되고, 다시 태후(太后)인 규씨(樛氏)는 또다시 관계를 맺게 됩니다.  남월(南越) 백성들이 태후(太后)의 이런 행동을 싫어하게 되자, 태후(太后)는 반란이 두려워서 자신의 아들과 대신(大臣)들에게 한(漢)나라에게 내속(內屬)하기를 권하게 되었고,  이에 여가(呂嘉)가 남월(南越)의 ‘독립성’을 위해서

왕과 왕태후, 그리고 한(漢)나라의 안국소계(安國少季)를 비롯한 사신단(使臣團)을 죽이고, 명왕(明王)이 -선대(先代) 영제(嬰齊)의 시호(諡號) - 월인(越人) 사이에 낳은 맏아들 술양후(術陽侯) 건덕(建德)을 왕으로 추대하고, 남월(南越)의 독립성을 위해서 한(漢)나라와 대적하게 됩니다.
한무제(漢武帝)는 남월(南越)에 대해서 ‘지저분한 모략(謀略)’을 쓰고, 어떤 면에서 승상 여가(呂嘉)가 반란하기를 기다린 혐의(嫌疑)가 있는 것입니다.
(*) 참고 말씀 -1 마침. (*)

원정(元鼎) 5년 - 기원전 112년 - 가을,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계양(桂陽)으로 진격하여 회수(滙水)로 - 북강(北江)의 지류(支流)인 지금의 연강(連江)을 뜻함 - 내려가고, 주작도위(主爵都尉) 양복(楊僕)은 누선장군(樓船將軍)이 되어 예장(豫章)을 - 지금 강서성(江西省) 남창시(南昌市) -통해서 각각 이수(離水)에 창오에 이르렀다.
치의후(馳義侯) - 월(越) 지역 출신으로써 이름은 유(遺)임 -에게는 파(巴)와 촉(蜀)의 사면된 죄수들을 중심으로 야랑(夜郞)의 군대를 동원하여 장가강(牂柯江)을 - 여러 설(說)이 있으나 서강(西江)의 원류인 북반강(北盤江)을 취함 - 내려가게 하였다. 모두 반우(番禺)에서 집결하였다.

(*)참고 말씀 -2 (*)
한무제(漢武帝)가 남월(南越)을 평정(平定)하는 것은 결국 3개 부대로 나누어서 분진합격(分進合擊)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복파장군(伏波將軍)인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 부대,
2) 누선장군(樓船將軍) 주작도위(主爵都尉) 양복(楊僕) 부대 - 바로 이 사람이 고조선(古朝鮮) 왕험성(王險城)을 공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3) 그리고 치의후(馳義侯) 월인(越人)인 유(遺)의 부대가 한 부대입니다.

그런데, 이 “세 부대를 다스리는 장군(將軍)의 이름이 매우 특이하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먼저 나중에 고조선 왕험성(王險城)을 공격하러온  누선장군(樓船將軍)인 양복(楊僕)의 경우, 주작도위(主爵都尉)입니다. 이는 적(敵)과 싸울 때, 적군(敵軍)을 지휘하는 임금과 장군(將軍)에게 ‘작위(爵位)를 수여할 수 있는 경찰(警察)총감(摠監)’이란 뜻입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누선(樓船)이라하는 것은 오늘날 말로 하자면 항공모함(航空母艦) 같은 배로써 배 위에 최소한 3층의 누각(樓閣)이 있는 배이고, 높은 배 위에서 낮은 적선(敵船)을 향하여 비(雨)오듯 활(弓)을 쏠 수 있음은 물론 대부분의 경우 투석기를 장착한 ‘물(水) 위에 떠있는 요새(要塞)’를 뜻합니다.

복파장군(伏波將軍)의 직책은 위위(衛尉)입니다. 이는 ‘적(敵)의 궁궐(宮闕)을 호위(護衛)하는 경찰총감’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치의후(馳義侯)란 명칭은 ‘국제적인 정의(正義)를 치달리게 한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이 치의후(馳義侯)의 이름이 유(遺)라는 사실은 <사기(史記)집해(集解)> 서광(徐廣)이 주(註)임을 전게서(前揭書) 역자(譯者)인 정범진(丁範鎭) 선생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범진 선생은 이 세부대가 “모두 반우(番禺)에서 집결하였다.”라고 해석하였지만, 이는 최종 집결지를 나타내기 때문에 “모두 반우(番禺)에서 집결하도록 하였다.”로 해석하여야만 자연스럽습니다.

아무튼, 이 남월(南越) 원정(遠征) 부대는 정복(征服)이 그 목표가 아니라, “해외(海外)에의 교역로(交易路)를 내겠다.”라는 목적아래서 편성된 부대임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왜냐?
분진합격(分進合擊)하는 세 부대의 지휘관의 ‘정식 직책(職責)’이 모두 적장(敵將)과 임금에게 한(漢)나라 체제(體制) ‘안(內)’에서 작위(爵位)를 주는 부대임을 노골적(露骨的)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부대의 진격(進擊) 속도가 토벌(討伐) 조칙(詔勅)이 내린 것이 원정(元鼎) 5년 가을 - 즉 기원전 112년의 가을인데, 행군(行軍)해서 전투가 시작되고, 애초부터 만천하(滿天下)에 공개한 남월(南越) 반란군에게 한(漢)나라의 작위를 주면서 토벌(討伐)이 끝난 것이 원정(元鼎) 6년 겨울 즉 기원전 111년 겨울이라는 1년의 세월이 걸린 것을 보아서도 잘 알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해모수(解慕潄)의 대한국(大漢國)이 “그래 교역로(交易路)를 열어라. 그 대신 살상(殺傷) 전쟁은 삼가할 것이며, 나아가 남월국(南越國) 사람들이 비록 적장(敵將)이라고 하더라도 죄다 한(漢)나라 체제 안(內)에서의 작위(爵位)를 주고, 그 신분(身分)에 합당하도록 대접을 하여라.”라고 하는 사전합의(事前合意)가 없는 한 이루어지기 힘든 토벌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누선장군(樓船將軍)은 선박으로써 오늘날 파양호(鄱陽湖) 남쪽에 있는 남창시(南昌市) 즉 옛 명칭 예장(豫章)에 복파장군(伏波將軍) 부대를 상륙(上陸)시키고 나서 계속 장강(長江)을 따러 나가서 절강성(浙江省)및 복건성(福建省)의 항구(港口)를 도해(渡海) 하면서 남월(南越)의 수군(水軍)이 배후(背後)로 부터 공격을 할것을 일일히 수색하면서 반우(番禺)까지 오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강서성(江西省)의 파양호의 남창시(南昌市)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 명칭 예장(豫章)이고 오늘날 명칭이 남창시(南昌市) 주변으로는 좌측(左側)으로는 복건성(福建省)쪽으로 갈수 있는 공강(灨江)이 북류(北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파장군(伏波將軍)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은 결국 백제(百濟) 사람들이 훗날 애용하던 그 길을 따라서 묘령(苗岭)산맥을 넘어서 북강(北江)을 통해 반우(番禺)로 접근함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 강서성(江西省)의 파양호(鄱陽湖) 남안(南岸)의 <예장(豫章)=남창시(南昌市)>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묘령(苗岭) 산맥을 넘기 위해 이용한 공강(灨江)을 볼 수 있는 곳
http://parkchina.com.ne.kr/map/gangseo.JPG

아무튼 복파장군 노박덕(路博德)은 공강(灨江)을 통해 묘령(苗岭)을 넘어 ‘중국(中國)의 영남(嶺南)’으로 들어서는데 오늘날 북강(北江) 옛 명칭 회수(滙水)로 들어가기 때문에, 만약에 전투가 벌어졌다면, 가장 ‘피해’를 많이 볼수 있는 입장에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할 것입니다.

또 치의후(馳義侯) 유(遺)는 서남이(西南夷)인 파(巴)와 촉(蜀)의 <사면(赦免)된 죄수(罪囚)>들을 이끌고 장가강(牂柯江)을 통해서 집결지인 반우(番禺)로 오게 되는데, 이 장가강(牂柯江)에 대한 학설은 여럿이 있지만, 좌계가 볼때에는 가장 현실성이 있는 것이 북반강(北盤江)입니다.
그런데 이 북반강(北盤江)은 귀주성(貴州省)에 있는 강(江)입니다.

오늘날 귀주성(貴州省) 지도를 보면 왼편의 운남성(雲南省)과의 경계 지역에 육반수(六盤水)라는 도시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반수(六盤水) 남쪽에서 불(乀)자 방향으로 ‘광서(廣西) 장족 자치구’ 즉 광서성(廣西省)으로 흘러들어가는 강(江)이 있습니다.
이 강이 바로 북반강(北盤江)인 것이지요.

(*) 1 (*)
: 치의후(馳義侯) 유(遺)가 내려온 장가강(牂柯江) 즉 북반강(北盤江)을 볼 수 있는 곳
http://parkchina.com.ne.kr/map/guijus.JPG


이 북반강(北盤江)은 광서성(廣西省)에 들어가서는 귀주성(貴州省)과 광서성(廣西省) 경계를 타고 동류하넌 남반강(南盤江)고 합류해서 그 방향을 역시 귀주성(貴州省)과 광서성의 경계를 타고 동류하다가  동남류(東南流)해 오는 홍수하(紅水河)와 합류해서 이름을 홍수하(紅水河)로 바꾸어서 계속 동남류(東南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광서성(廣西省) 남령시(南寧市)를 통해 북동류(北東流)하는 류강(柳江)과 합류 이름을 검강(黔江)으로 바꾸어서 이윽고 광동성(廣東省)으로 들어가 서강(西江)이 되는 것입니다.

(*)2(*)
치의후(馳義侯) 유(遺)가 내려온 반강(盤江)-홍수하(紅水河)-검강(黔江)-서강(西江)의 흐름을 지도(地圖)에서 살필수 있는 광서성(廣西省)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seojang.JPG

이는 대단히 ‘긴 강(江)’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인데,  신기하게도 사마천(司馬遷)의 남월(南越) 열전(列傳)에서는 이 치의후(馳義侯)가 이끄는 부대원 들이 ‘파(巴)와 촉(蜀)의 사면(赦免)된 죄수(罪囚)’들이 그 주력부대(主力部隊)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매우 <이상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
간혹 영화에도 나오지만, ‘특수부대’는 “어짜피 죽는 사형수(死刑囚)를 사면(赦免)해서 특공(特功) 작전을 펼치는 경우”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형(刑) 집행(執行)을 할수 있는 - 다시 말하여 ‘사법적 질서’가 완전히 확보된 후(後)에야 비로서 ‘죄인(罪人)을 감옥’에 가둘수가 있는데,  “파(巴)와 촉(蜀) 지역은 사실 한(漢)나라가 신독국(身毒國)으로 길을 내기 위해서 사신(使臣)을 보낸지 얼마 안되어서 파(巴) 사람들과 촉(蜀) 사람들을 형법(刑法)을 어겼다고 감옥(監獄)에 가두고,이를 다시 사면(赦免)해서 전투에 내보낸다.”는 것은 납득(納得)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3부대 모두가 근본적으로 물(水)을 타고 내려가는 부대이고, 또 한무제(漢武帝)의 조칙(詔勅)에서도 분명히 수군(水軍) 10만 명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치의후(馳義侯) 유(遺)에게 배당된 군대는 2만명은 될 것입니다.

만약에 한(漢)나라가 파(巴)와 촉(蜀) 지방에 들어가서 짧은 시간 안(內)에 가둔 죄수(罪囚)가 2만명이 되고, 이를 사면(赦免)해서 남월(南越)을 토벌하는 군대로 삼았다면, 2만명의 죄수(罪囚)를 가두는 순간에 폭동(暴動)이 일어나서 한(漢)나라는 파(巴)와 촉(蜀) 지방 즉 오늘날 귀주성(貴州省)과 사천성(四川省) 지역에 발(足)도 못 들여놓을 것이 뻔한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남월(南越) 열전(列傳)의 미스테리(mystery)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남월(南越) 열전(列傳)에서 곧 살펴보게 되겠지만, 공강(灨江)-묘령(苗岭)산맥-북강(北江)을 넘어온 복파장군(伏波將軍) 위위(衛尉)까지도 “죄수(罪囚) 부대를 거느렸다.”고 남월(南越) 열전(列傳)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더 신기한 것은 복파장군(伏波將軍) 장군이 ‘집결지(集結地)’인 반우(番禺)에 도착(到着)하였을 때에는 신기하게도 그 도중(途中)에 뚜렸한 전투(戰鬪) 기록(記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수(罪囚)부대가 겨우 1,000명 밖에 없었다.”라고 사마천(司馬遷)은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역사(歷史) 기술(記述)’입니까?

그런데, 이는 극히 단순합니다.
사마천(司馬遷)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막기 위해서 대한국(大漢國)과의 협상(協商), 또 대한국(大漢國)에 종속된 군(軍)에 대해서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죄인(罪人)부대라는 것은 대한국(大漢國) 좀더 쉽게 말해서 전(前) - 가락국(駕洛國)에 종속된 (왜냐하면 중국대륙 해안가이기 때문에) 군(軍)을 표현할 때에 ‘죄인(罪人)부대’라고 기술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파장군(伏波將軍)이 공강(灨江)-묘령(苗岭)산책-북강(北江)을 통해 반우(番禺)까지 오는 동안에 전(前)-가락국(駕洛國)의 군대(軍隊)를 ‘벅수군’으로써 맡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상정(想定) 하지 않는 한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 당신들의 그 걱정을 위수사항(衛戍事項)으로 삼는 벅수군을 만듭시다. 그리고 서로가 도전(刀錢)을 받아서 문제가 생길때에는 영산화백(靈山和白) 화백회의로써 천독(天毒)들을 모시고 합의하도록 합시다.  또 이 도전(刀錢)으로써 열란 남방(南方)교역(交易)의 이익을 같이 나눕시다.

10만 수군(水軍)이고, 또 복파장군(伏波將軍)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이 고대 군사용어로 중군(中軍)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최소한 4만 군대는 확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4만 군대가 ‘벅수군’으로 다 맡기면서 결국 반우(番禺)에 도착할 때에는 1,000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을 때에 가장 조심해야하는 점인 것입니다.
본시 권력(權力)의 본질은 ‘질투(嫉妬)입니다.
속칭 “같은 하늘 아래 두 임금이 있을수 없다.“는 것은 이 ‘권력의 질투의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아낙이 남편과의 침대(寢臺)에서 ‘같은 침대 위에 두 여인(女人)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사마천(司馬遷)은 한(漢)나라 최고의 무문(武門)인 이광(李廣)의 손자 이릉(李陵)을 변호(辯護)하면서 궁형(宮刑)을 당하면서, 한무제(漢武帝) 아니 - 제왕(帝王)이 지니는 그 끝없는 ‘권력의 질투성’을 실감(實感)하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그는 사기(史記)를 적을 때, “궁형(宮刑)을 당하기 전(前)에 낳은 자식(子息)까지 죽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사가(史家)이다.  한(漢)의 제왕(帝王)의 ‘질투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현명(賢命)한 독자(讀者)라면 ”도대체 왜 이런 비현실적인 글을 썼을까?“를 생각하도록 글을 쓰겠다.”고 무서운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을 때, 궁형(宮刑) 당한 불행한 사가(史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禮義)라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을 당한 후에 친우에게 자신의 심정을 기록한 것이 <보임안서(報任安書)>라는 기록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습니다.

(원문(原文))
腸一日而九回,居則忽忽若有所亡,出則不知所往。每念斯恥,汗未嘗不發背沾衣也

(해석(解釋))
"하루에도 간장이 아홉구비로 꼬이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정신이 멍멍하고, 밖에 나가면 어디로 가야할 지 막연합니다. 제가 당한 수치를 생각할 때마다 등에 식은 땀이 흥건하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정신(精神) 상태를 좌계는 정확히 이해(理解)합니다.
개인적으로 군부독재와 투쟁하다가 고문(拷問) 당한 사람의 후유증(後遺症)에 대해서 많이 대화(對話)를 나누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 사마천(司馬遷)이여...
멸문(滅門)을 막기 위한 곡필(曲筆)이여!!
그리고, 이 곡필(曲筆)된 부분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학자(史學者)의 어리석음이여....

역사여... 그 잔인한 기록이여!!!

(알림: ===
감정이 복받쳐서 이만 가름합니다.  다음 회(回)에는 남월(南越)열전(列傳)을 비롯한 사이(四夷)개척 ‘민예허왕국의 공지화(空地化) 미스테리, 조선(朝鮮)열전과의 상관성, 그리고 전(前) 가락국(駕洛國)과 북부여가 통합된 것이 바로 대한국(大漢國)임을 검토하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출처] 가락국기의 해모수, 대한국과 사마천 / 좌 계 (단군의땅) |작성자 소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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