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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소성(江蘇省) 숙천(宿遷)의 연개소문 外(신완순)


강소성(江蘇省) 숙천(宿遷)의 연개소문


안녕하십니까?

중국(여기서의 중국은 현 중국이 아님)대륙 전체를 누비고 다니며 당나라 이세민을
혼내 준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오늘은 강소성 宿遷(숙천, 수천)지역에서 찾아 봅니다.

숙천지역은 강소성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의 동이맹주(東夷盟主) 서언왕(徐偃王)이
이 지역에 나라를 세워 주변 36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던 바로 서주(徐州)지역입니다.
중국 5대 담수호 중의 하나인 홍택호(洪澤湖)와 락마호(駱馬湖)가 있고 그 유명한
경항운하가 지나는 곳으로서 강과 호수와 산과 평야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지역이며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가 태어난 곳입니다.

이 곳은 전에 제가 글을 올렸던 고구려 절세미인 아희와 수양제의 전설로 유명한 단양(丹陽)으로부터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개소문과 당태종 사이의 마산대전이 벌어졌던 산동성 청도시 즉묵의
남서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목적은 고구려 강성시 백만대군을 보유했고 유, 연, 제, 노, 오, 월 을
다스렸다는 최치원 선생의 말을 고증하기 위해 하나하나씩 그 진실을 벗겨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숙천지방정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장산삼림공원(嶂山森林公园)에 대한 소개가 나오는데
그 장산삼림공원안의 유적을 설명하는 곳에 연개소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在灵赭山南麓有藏军洞。相传唐时高丽酋长盖苏文率兵入侵,唐将屡战屡败,匪寇遂深入腹地。
唐将薛仁贵领兵藏于洞中伺之。寇至,仁贵突然出击,将敌人兵马斩获殆尽。此处附近尚有点将台、
冷饭台。传说点将台是薛仁贵出兵打仗前点将的高台;锅框山是唐军埋锅煮饭的遗址;鏊子山是当地
百姓给唐军摊煎饼的地方;冷饭台是唐军吃饭的地方。
当时供唐军生活用水的水井有72口(现已发现6口,其中1口较完整)。

  园区北端交界处有一遗址,名曰青墩。据1963年《淮阴地区考古调查》介绍
:青墩有一米多厚的汉文化层,下面有一米厚的西周文化层,面积约5000平方米。
 在园区东北端交界处有一座西汉古城遗址。古城北有清凉院,相传为唐代入侵者盖苏文扎营地。
古城西侧曾于1996年出土一古棺,棺内有头盔、护心镜、铁剑、铜茶壶等,
充分证明此处为古代兵家鏖 战之地。
当时供唐军生活用水的水井有72口(现已发现6口,其中1口较完整)。

영자산(靈赭山) 남견(南麓)에 장군동(藏軍洞)이라는 동굴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때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을 하여 싸웠으나
당나라 장수는 고구려에 싸우면 싸우는 대로 연전연패했다. 적은 내륙 깊숙히 들어왔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는 병사를 거느리고 이 동굴에 숨어서 적을 엿보고 있었다.
적이 다다르자 설인귀는 갑자기 출격을 하여 적병과 병마를 베고 빼앗아 위태롭게 했다.
이 부근에는 장대(將臺)와 냉반대(冷飯臺)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장대(將臺)는 설인귀가 출정전에 높은 대에 올라 장대를 세운데서 유래하며,
과광산(鍋框山)은 당군이 솥을 걸어 놓고 밥을 해 먹던 터를 말하며, 오자산(鏊子山)은 당시
백성들이 당군에게 솥을 걸어 놓고 전병을 만들어 주었던 곳이며, 냉반대는 당군이 밥을
먹던 곳이라 한다.

공원 북쪽 경계지역에 서한(西漢)의 옛성(古城) 유허지가 하나 있다.
고성 북쪽에는 청량원(清凉院)이 있는데 전하는 바에 당나라시대에 침입자 연개소문의
병사가 주둔하던 주둔지(영지)가 있다.
고성서쪽은 1996년에 출토된 고관(古棺)이 있는데 관 속에는 투구와 호심경, 철검,
동차호(구리 차 주전자)가 있어 이 곳이 고대에 병사들이 격전을 벌이던 곳이라는게 증명이 된다.
당시에 당나라 군사가 생활용수로 쓰던 우물이 72곳이 있는데, 현재 6개의 우물이 발견되었고
그 중의 하나는 정비가 끝났다.

이상이 연개소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출전 : http://www.suqian.gov.cn/sqgk/syl02.htm

차이나 강소성 지도 : http://homechina.co.kr/data/jiangsu/jiangsu.htm

또한 이 곳에서 가가운 지역에서 2002년 11월 왕묘를 하나 발굴했는데, 여기의 설명으로는
서한때의 사수왕(泗水王)묘라고 하는데 발굴된 유물을 보면 봉황의 문양이 보이며,
나무로 만든 말(木馬), 나무로 만든 돼지(木猪) 등이 눈에 띠는데
제 생각엔 동이의 맹주 서언왕이 통치했던 지역이고 또한 부여나 고구려의 5부와 관련된
동물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동이족 왕의 무덤이라 생각됩니다.

http://www.suqian.gov.cn/sswl/index.htm (사수왕릉)

위 연개소문에 관한 전설(?)에서 보듯이 당시 당나라 군대는 연개소문의 군대에 싸우는대로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군기가 빠진 오합지졸을 당나라군대라고 하는데 고구려 병사의 용맹앞에 맥없이
쓰러지는 저 군사가 바로 오합지졸 당나라군대입니다.
얼마나 당의 군사가 피폐하고 어려웠으면 냉반대(冷飯臺)라는 곳이 있을까요?
찬밥을 먹던 누대가 바로 냉반대 아닙니까?
차이나는 그 들의 역사를 숭상하고 이적의 역사를 말살할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조그만 곳에서 이렇게 역사의 진실이 줄줄줄 밝혀지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땅이 요동지역뿐이라면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진을 치고 있는 군대가
적군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 당시에 이 곳이 바로 고구려와 당의 접경지역이며 격렬한 전투지였기에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려고 하지만
여기의 연개소문의 전설에서 보듯이 단양주의 전설을 보듯이 산동성 청도의
마산대전을 보듯이 바로 이 곳이 고구려의 중심지역이 아니라면
이런 전설이 남아 있겠으며 고구려가 수와 당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 할 수 있었을까요?




            


  1 / 글쓴이 : 신완순 / 2006-07-14 오후 2:36:35  

  산동성 청도의 마산대전(馬山大戰)을 아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산동성의 청도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서 휴양지로도 차이나내에서도 이름이
높으며, 한국 사람이 5만명 이상 거주하는 우리와는 연관이 많은 지역입니다.
저도 청도를 세 번 정도 다녀왔는데, 한국 사람이 많은 관계로 지내기는
큰 불편이 없는 곳입니다. 새로 개발되어 도시가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제가 소개하려는 마산대전(馬山大戰)도 지금의 청도시에 편입되어 있는
즉묵(卽墨, JIMO, 지므어) - 청도에서 동북방 방향 차로 1 ~ 2시간 거리 - 에서 일어났습니다.

먼저 2003년 3월 16일 청도신문망에 게재되었던 기사를 소개합니다.

马山传奇
青岛新闻网 2003-03-16 00:00:00

即墨马山,海拔233米,是即墨西部平原上惟一的一座高山,也是一个充满了神奇的地方。
现在已知,马山最早的名称出现于唐代,似乎与“牛”有些关系,名叫“牛脾山”,
据说这是因为山形如“牛脾”的缘故。后来山上还有过一座“牛王庙”,供奉着“牛王诸神”,现已仅存遗址。
明清时代,此山又因双峰隆起,远眺如“马鞍”状,故又叫“马鞍山”、“高鞍山”。今天所称的马山,
就是“马鞍山”的简称。
즉묵(卽墨)마산(馬山)은 해발 233미터로 즉묵의 서부 평원에 유일하게 우뚝 선
고산으로서 신기(神奇)한 지방으로 충만된 곳이다.
현재 이미 알듯이, 마산은 당나라시대에 처음으로 그 이름이 나타났으며,
그 것은 흡사 소(牛)와 유사한 관계가 있어 우비산(牛脾山)이라 불려왔다.
이렇게 된 연유는 산의 형세가 마치 소의 지라와 같아서이며, 나중에는 마산은 또한
"우왕묘(牛王墓)"라 불려졌고 "우왕제신(牛王諸神"으로 받들여져 왔다.
현재 이 곳은 유적지로서 보존되고 있다.
명청시대에는 이 산이 쌍봉이 융기되어 있는 모습으로 인하여 멀리서 보면 말안장같이
보여 "마안산(馬鞍山)" , 또는 "고안산(高鞍山)이라고도 했다.
오늘날에는 마산(馬山)으로 불리며 마안산을 간략히 부르는 말이다.

 马山山脉主要是由“四峰一岭一涧”组成。东面主峰为马山,西面为大山,东南为宝鞍山,
西南为团山,西面的一条南北走向的山岭为长岭,四峰间还有一条东西走向的宽阔深涧叫大王沟。
마산산맥의 주 요체는 사봉(四峰), 일령(一嶺), 일간(一澗)으로 되어 있다.
동쪽의 주봉은 마산이며, 서쪽은 대산, 동남쪽은 보안산이다.
서남은 단산(團山)이며 서쪽의 한 봉우리는 동북방 방향으로 길게 고개를 형성하여 산령을
이루었다. 네 봉우리 간에는 하나의 동서로 된 넓고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대왕구(大王溝)라 불리고 있다.

 据清代肖英斋本《马山志》和《即墨乡土志》记载,唐贞观十七年(643年),
高丽国(朝鲜)的大将盖苏文杀死了自己的君主,自立为国君后,便率领着大军渡海侵犯即墨。
唐太宗得知后,即亲自统率部队,由登州和莱州方向迎击来犯。唐朝太宗曾屯兵于马山的西南坡,
并率领着十余骑乘着月色登山窥探敌营。不料,这一行动被盖苏文发觉,即率领亲兵追赶太宗于团山。
太宗不能脱身的消息报知龙骧将军金杰后,他提刀备马夜上团山。
等到金杰的快马来到马山前坡的山涧时,正遇上盖苏文。
只见金杰隔涧怒喝,声如轰雷炸顶,回荡在山谷。不明真相的盖苏文见有援兵,立刻收缰回马,
放过了太宗,悄然逃遁。
청대의 초영제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에 실려 있는 기사에 따르면
당조 정관17년(643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그 군주를 살해하고 스스로 나라의 군후(君後)가
되어서 대군을 이끌고 해(海)를 건너(渡海) 즉묵지방을 침범했다.
당태종이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친히 부대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거쳐 래주(萊州)를 향해
오는 적을 격퇴하기 위해 나섰다. 당태종은 마산의 서남쪽의 고개(坡, 파)에 주둔했다.
10여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달빛 아래 산에 올라 적 진영을 정탐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연개소문에게 발각이 되어 연개소문이 병사를 이끌고 단산(團山)에서
당태종을 추격했다. 당태종이 능히 추격에서 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알게된
용양장군(龍骧將軍) 김걸(金杰)은 칼과 말을 준비하여 단산에 올랐다.
김걸이 쾌마를 타고 마산의 앞 고개의 산골짜기에 다달았을 즈음 정면에서 연개소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김걸이 노하여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를 향해 부르짖는 모습을 보니
마치 큰 우레와 같이 정상에서 터지는 듯 하여 산골짜기로 도는 듯 했다.
연개소문이 구원병이 있음을 본 것의 진상은 분명하지 않으나 말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가게
되어 당태종은 풀려나게 되었으며 근심어린 모습으로 도망가 숨었다.

在第二天的“马山大战”中,金将军作战非常英勇,多次率先杀入敌阵,抱旗追敌四十多里。
只因身上多处受伤,壮烈殉国于马山脚下。后人每每感念金杰将军的英雄事迹,
便将团山称作是将军峰。到了元代,朝廷又册封金杰将军为“忠勇王”,于是人们为了纪念他,
又将其当年断喝盖苏文的这条山涧取名为“大王沟”。据说,明清时山上还曾修筑过一座“大王庙”,
另有一座碑碣,上刻“金杰叱盖苏文处”字样。有关唐太宗发兵征高丽的事,在《旧唐书》里还有记载。
2일째 되던 날, 마산대전(馬山大戰) 중 김걸장군의 작전이 매우 뛰어나 손수 여러 차례 적진을
베어 나갔으며 40여리 이상을 적을 추격했다. 몸의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마산 아래에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숨졌다.
후에 사람들은 김걸장군의 영웅적인 사적을 보고 감회에 젖었으며 단산(團山)을 장군봉으로
불렀다.
원대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충용왕(忠勇王)으로 책봉이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그를 기리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의 연개소문이 머물렀던 산골짜기를 대왕구(大王溝)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연유로 명청시대에 산 위에 한 기의 사당을 만들어 "대왕묘(大王廟)"라 했다.
묘비에는 "김걸이 연개소문이 있는 곳에서 질타했다(金杰叱盖苏文处)"고 되어 있다.
당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구당서>에 또한 나와 있다.

하략  

위의 주소는 http://www.qingdaonews.com/content/2003-03/16/content_1110455.htm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보면서

마산대전(馬山大戰)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이야기이며 이러한 사실이 <마산지>와
<즉묵향토지>에 실려 있다는 것에 대단히 놀랍습니다.
여러분이 현 차이나의 산동성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많이 들어 온 등주(登州),
래주(萊州)하고도 위 즉묵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인용한 원문을 보고 싶습니다.
그들은 김걸장군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마산대전이라고 할 정도로
대규모 전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이 전투에 참여한 사실만 봐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김걸이 죽은 걸로 봐서 고구려의 대승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태종이 정탐하러 갔다가 연개소문의 군사들에게 발각이 되어 오줌을 쌌을 것으로
추측할 때 얼마나 통쾌합니까?
이러한 과정을 볼 때 안시성전투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눈알에 화살이 꽂힌 것도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2 / 글쓴이 : 신완순 / 2006-07-14 오후 2:55:28  

  산동성 봉래의 고구려 고성(古城)과 당태종의 전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산동성 봉래지역에 전해져 오는 전설을 중심으로 해서 글을 올립니다.

이 곳은 옛 날의 등주(登州)지역으로서 발해(대진국)가 공격을 한 곳이였고 유사이래로
우리와 연관이 많은 지역이며 지금은 연태시로서 이 곳에는 한국사람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봉래의 당태종의 전설 http://www.shandongok.com/web/sdgs/2003-10/1067065295.html

원문은 위 사이트를 참조하시고 원문카피가 되질 않아 해석만 해서 올립니다.
(조금 전에 모두 번역을 하여 글을 완성하여 올리려다가 그만 이유없이 날라가서
다시 올립니다.)

아래는 위 사이트의 내용에 대한 번역 및 해석입니다.

(당태종과 관련하여 붙은 지명은 해설없이 괄호안에 처리합니다.)

봉래의 당태종 전설 (唐太宗在蓬萊的傳說)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 정관18년(644년), 당태종 이세민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친히 고구려를 치기 위해 봉래의 남쪽 산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행운이 있어 황제를 태운 가마를 볼 수 있었다.
(마을 이름 : 가전촌) 당시 고구려 연개소문은 당태종의
동정(東征)소식을 접한 후에 그를 막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왔다.
백성들과 당군은 가전촌 동 2 리 되는 마을에 황제의 가마를 호위하고 있었다.
(마을 이름 : 호가구촌 護駕溝村)

그 후 당군은 마을에 집결하여 남쪽 고산에 진을 치고 고산 아래에서
연개소문 군사와 싸웠다.
연개소문 군사들은 크게 패한 후 도망가 고산 북쪽 약 15 리쯤 되는 곳에 진을 치고
병마를 정비하고 더불어 병영의 주위에 흙으로 성과 담을 쌓았다. 후에 사람들은 그 성을
고성(古城)=(고구려 고성)이라 했다.
후에 성의 동쪽 마을은 고성동촌으로, 남쪽은 묘(苗)씨 성들이 많이 살아
고성묘가촌(古城苗家村))으로, 성의 서쪽은 이씨가 많아
<고성이가촌(古城李家村))으로 불리어졌다.
당태종의 형이 있었는데 산 아래의 마을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는데 장(張)씨 성이 많아
참마장가(站馬張家)라 불렸다.

당태종의 형은 연개소문의 병사들과 싸우다 죽었다.
당태종은 참마장가의 남쪽에 사당을 세우고 대왕묘(大王廟)라 하고 그를 기렸다.

(중략)

태종이 고산 정상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에 물이 없어 굉장히 초조해 하다가
허리에 찬 보검을 빼서 바위를 내려치니 칼이 반자나 들어갔고 갈라진 틈으로 칼을 타고
샘물이 솟았다. 물은 끊임없이 나왔고 후인들이 일검천(一劍泉)이라 했으며 지금도 줄지 않고 나오고 있다.

한 번은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송가촌 서산을 지나던 중 병마가 지치고 피곤하여
쉬도록 명한 뒤 창을 힘껏 던지니 긴 창이 멀지 않은 곳에 박혔는데,
그 때에 거기에서 샘물이 솟아나 관병이 기뻐하여 돌로 1 m 정도의 물굽이(우물)을
만들어 인마가 마시게 되니 인마만(人馬灣)이라 했다.

(중략)

태종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서 내려와 북상하여 마을의 북쪽 2 리 되는 곳에서
연개소문의 병사와 싸웠는데 연개소문군이 대패하였다.

(중략)

하루는 독산(禿山)에 올라 칠순의 백발노인과 바둑을 두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종은
17번을 내리 지다가 노인이 한판 더 두자하여 최후에 당태종이 이겼는데 노인이
홀연히 사라졌다. 당태종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산을 18반(十八盤)이라 했다.

또 하루는 태종이 산을 내려와 순시하던 중 누런진흙개울에 이르렀는데 날은 어둡고
방향을 잃어 헤매이던 중 홀연히 한 사람이 나타나 길의 방향을 알려준 뒤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용산대왕이어서 태종이 그를 감사하기 위해서 용왕산의 사당을 하나 수리하여
용왕묘라 했다.

(중략)

당태종은 배를 건조하기 위해 사람을 찾던 중 술 잘 먹는 주선(酒仙)을 알게 되어 그를 찾으러
가던 중 눈이 내렸다. 눈 오는 도중 한 마리의 꽃사슴이 있어 뒤쫓던 중 사슴은 잡지 못하고
사슴이 있던 곳에 초가집을 하나 발견하고 들어가게 되었다.
집으로 들어가니 죽어 있는 노인을 보게 되었고 벽에는 커다란 배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죽은 노인의 침대밑에서 누런 가죽으로 된 큰 책이 잇어 펼쳐보니 각종 배를 만드는 도형이
들어 있어 태종은 기뻐하며 진귀한 보물(珍寶)를 손에 넣게 되었다.
태종은 조선도(造船圖)를 얻은 후에 병사를 거느리고 용산을 떠나 현의 성에 이르러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였다. 그 때 남왕촌 동북 5 리의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날도
저물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숙가부촌(宿駕埠村)이라 했다.

다음 날 현의 성을 떠나 멀지 않은 곳에 행차를 하였는데 그 때 연개소문은 당태종이 이 길을
지나갈 길을 미리 알고 부근에 가마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있었는데,
이 곳은 란가당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때는 밤이 깊고 바람과 비까지 더해져서 태종은 연개소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태종은 현의 성 남쪽 묘산의 아래의 개울에 몸을 숨겼다.
이 곳은 왕구촌(王溝村)이라 한다.

날이 밝아 비 갠 후에 태종은 가마를 정비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현의 서남쪽의 강을
건너다가 태종의 가마가 홀연히 물 속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 곳은 락가하(落駕河)라 한다.
가마를 세워 동쪽으로 가던 중 멀지 않은 강가에서 투구와 갑옷을 말렸는데 이 곳은
쇄갑하)라 했다.

태종은 현의 성으로 들어가게 된 후 대대적으로 배를 만들어 배를 댈 바닷가의 부두를 찾다가
승상 의징의 건의에 따라 부두를 가구(家口)를 선택했다.
때가 늦은 가을에 이르르매 태종은 병마를 배에 싣고 바람에 파도를 가르며 요동으로 향했다.

이상이 봉래에 전해져 내려오는 당태종의 전설입니다.

당태종이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당태종과 관련된 지명이 붙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저는 이 전설을 보면서 전에 제가 소개해 드린 산동성 즉묵시의 마산대전과 강소성 염성 강호현의
몽롱탑에 대한 전설 그리고 강소성 숙천지역의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내용을 볼 때에
이 곳 산동성, 강소성 일대는 그 때 당시(고구려 보장왕 시절, 당태종 시절)에 고구려의 영토가
분명하다고 보여집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고구려군의 이동경로에 대한 것입니다.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길에 나서면서 전국 각지의 군사를 모으고 배를 만들어서 바다를
건너서 가는 걸로 나오는데 이에 대응한 고구려군의 신속하고 과감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산동성, 강소성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라면 당태종의
동정 소식을 접하고 그렇게 빨리 군사를 정비하고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서 산동성이나
강소성까지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위의 전설에서 보듯이 당태종의 동정 소식을 듣고 고구려의 연개소문군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요동정벌이 아닌 중국의 동쪽, 황하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출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구려는 자기 땅에서 당군을 기다리고 있던거라 생각됩니다.

둘째, 병법과 진의 설치

위의 전설을 보면 당군은 처음에 고구려군과 싸워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에 이긴 당군은 물도 없고 보급로도 어려운 산 정상에 진을 치고
있고, 패배한 고구려군은 군사를 정비하고 한가로이 성을 쌓고 있습니다.
당군이 산 정상에 진을 쳐서 얼마나 병영의 생활이 어려웠으면 물이 없어 물을 구하기
위해 칼로 바위를 치고 창을 던져 물이 나오나 안나오나 보는 등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자기네 영토라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보급로를 확실하게 하고 난 뒤
전투를 할 것입니다. 전 중원대륙을 통합하고 차이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고 일컫는
당태종과 수 많은 전투에서 풍부한 경험을 한 그 유명한 재상과 장수들이 있을진대
싸움에 이겨 산 정상에 진을 친다? 한 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고구려의 영지로 들어와서 전투에서 패했기때문에 수비하기 위해 산 정상에 올라간
겁니다.

셋째, 보급과 지원군의 문제

위의 전설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매복에 걸려 황급히 개울에 숨고 가마가 물에 빠지고
투구와 갑옷을 처량하게 말리고 있는 등 지원군이 멀리 있기 때문에 즉 선발대가
고구려영지 깊숙히 들어오다 보니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몽롱탑의 전설에선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쫒기다 우물에 숨고 즉묵시의 마산대전에서도
혼자 정찰을 나갔다가 김걸장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고
숙천의 전투에서도 당군이 연전연패하자 설인귀가 장군동에 숨어서 기습을 노리고 있으며
물이 없어 우물을 72곳이나 개발을 하고 찬밥을 먹는 등(냉반대),
전투지역이 당의 영지였다면 보급과 지원군이 언제든지 얼마든지 댈 수 있을 터인데,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바로 보급로가 멀고 지원군이 먼 곳이 있기 때문,
즉 고구려의 영지로 깊숙이 들어와 전투를 벌인 결과라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위의 전설과 여타의 제가 소개해 드린 것을 종합하여 볼 때
당나라의 태종과 군사들은 고구려 영지로 동정이라는 말로 깊숙이 들어왔지만
결과는 당태종이 물 속에 숨고, 우물에 숨고, 칼로 바위를 내려치는 등
중원의 황제로서는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패배와 모욕감을 안고 싸운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3 / 글쓴이 : 신완순 / 2006-07-14 오후 3:10:03  

  강소성 양주의 고구려 고민사와 수양제릉


안녕하십니까?

강소성 양주(揚州)의 고민사(高旻寺)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양주(揚州)를 살펴보면 양주는 강소성 중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강(양자강) 하류의
북쪽에 있으며, 강회(江淮)평원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양주는 풍경이 수려한 고장이며, 역대로 문인이 많이 배출된 문화의 도시이며, 유구한 역사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곳에는 운하가 지나고 있으며, 한나라와 수나라의 릉묘가 있으며
당.송 시기의 옛 성 유적지가 있고, 명. 청시기의 정원과 많은 자연경관과 수려한
관광자원이 많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이 곳에 수나라 때 지어졌다는 고민사(高旻寺)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고민사(高旻寺)

【高?寺】国家重点保护寺院。位于扬州市南郊古运河与仪扬交汇处的三汊河口。
扬州八大古刹之一。始建于隋代,相传庙僧多精通医道,治愈高丽太子之病,
高丽国王赠以金银扩建寺院。寺建成时,取高丽国的高字和多的字,定名为高寺。
寺内原有大殿、御碑亭、金佛殿、天中塔、御碑寺、藏经楼诸建筑。

위 원문에 대한 출처 : http://www.chinacsw.com/cszx/yangzhou/guji1.htm

고민사(高旻寺) 소개 2 : http://www.yztoday.com/luyou/luy22.htm

고민사(高旻寺)는 국가 중점 보호 사찰이다. 양주시 남쪽 옛 운하와 의양이 서로 돌아
드는 3개의 하천이 교차하는 하구에 있다. 양주의 8대 고찰중의 하나이다.
수나라 시기에 처음 건축이 되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곳에 의술(醫術)에 정통한
승려의 사당이 있었는데 고구려의 태자가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왕이 금과은 등
재물을 기증해 사원을 확장하여 세웠다. 절을 건립할 때에는 고구려국의 높을 고(高)자와
많은 글자들을 취하여 고민사(高旻寺)라 이름을 지었다.
절 내에는 대전이 있고 (대웅보전), 어비정(御碑亭), 금불전(金佛殿), 천중탑(天中塔),
어비사(御碑寺), 장경루(藏經樓) 등의 여러 건축물이 있다. (이하 후략)

이상이 고구려가 건립했다는 고민사(高旻寺)에 대하여 원전의 설명입니다.
위 사이트를 제외한 다른 많은 사이트나 정부기관 또는 관광안내 사이트 등에서도 고민사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지만 위의 고구려가 건립했다는 기록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곳 양주의 고민사에 대하여 주목하는 점은 이 곳 양주가 고구려와 수, 당시기와의
전투 등의 여러가지 역사적 진실이 숨어 있고 또한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원전의 설명을 보더라도 수나라 시기에 이 곳이 고구려의 땅이 아니면 설명이 안됩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여러 번의 대전을 치루어서 원수와도 같은 관계일 것입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태자가 병을 치유하기 위해 그 멀리서 이 곳까지 와서 치유하는 것도
말이 되질 않고 또한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 고민사가 양주의 8대 고찰중의 하나일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는데 이 먼 곳에 고구려의 왕이 많은 재물을 들여서
태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라지만 적국의 땅에 절을 지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곳은 수나라 전부터든 수나라로부터 빼았았든간에 수나라 시기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분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빼어난 곳에
절을 건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양주하면 수양제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위에 소개해드린 사이트에서 보면 고민사 바로 밑에 수양제릉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수양제릉(隋煬帝陵)

【隋炀帝陵】江苏省文物保护单位。位于扬州市区西北7公里处邗江县槐泗乡槐二村雷塘。
隋大业十四年(618),隋炀帝杨广被部将宇文化及缢死于江都宫。初殡于宫内流珠堂,
后改葬于城西北25公里吴公台下。唐武德三年(620),唐高祖以帝礼葬于雷塘今址,
其墓年久荒芜湮没。清嘉庆十二年(1807),学者阮元发现后,重立墓碑,....

간단히 번역을 하면

<수양제릉>은 강소성 문물 보호대상의 문화재다. 양주시. 구의 서북 7 km 의 한강현 괴사향
괴이촌 뢰당에 있다. 수 대업8년(618년), 수양제 양광은 강도궁(江都宫)에서
부장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격을 당하여 죽었다. 처음에는 궁내의 류주당에 묻혀 있다가
후에 성(城) 서북쪽 25 km 에 잇는 오공대에 다시 장사를 지냈다. 당 무덕3년(620년) 당고조가
지금의 뢰당에서 장례를 지냈다. 그 무덤은 세월이 많이 흘러 뭉개져 없어졌다.
청 가경13년(1807년) 완원(阮元)이라는 학자가 이 무덤을 발견후에 묘비를 다시 세우고...(후략)

이상이 수양제릉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었습니다.

전에 제가 소개해 드린 단양의 단양주에 대한 전설에서도 수양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단양은 양주의 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양주의 전설 중에 용선(龍船)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용선의 호화와 사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여러 고서에 전하고 있고, 실지로 사서에는
수양제가 낙양에서 강도(江都, 양주의 동쪽, 지금은 양주시에 편입되어 있음)에 운하와 강을
이용해 유람을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양주의 서북쪽에 전에 제가 소개해 드린 금호(金湖)에 고려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곳 양자강 줄기를 따라 강회지역은 이 당시에 고구려의 영토였음이 분명합니다.

강소성 지도 : http://homechina.co.kr/data/jiangsu/jiangsu.htm

수양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이 곳이 고구려의 땅이었다면 우문화급은 누구일까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수나라 말기에 산동성이나 이 곳 강도 등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한 수나라 황실이 쫒겨 다니다가 고구려의 제후에게
살해된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구당서에는 이러한 반란을 묘사하고 당고조 이연과 당태종 이세민이 진압을 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이들이 고구려의 제후들로서 당나라와 맞서 싸운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4 / 글쓴이 : 신완순 / 2006-07-14 오후 3:18:01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바친 항복문서


안녕하십니까?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태종과의 전설은 대륙의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제가 관련된 전설을 소개한 것만도 여러 건이 됩니다.

이 것은 고구려의 영토가 대륙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오늘은 과연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했느냐 하는 것을 전설과
소설 그리고 경극을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일단 료동성 해성역사소설 의용군연의(義勇軍演義)에 나오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부터 소개합니다.

"......却说唐王征东来到了城西南的一个小山头了望,高丽大兵十万人马一齐向这边掩杀过来.
唐王心里发慌,拨马就跑.高丽大将盖苏文举起长矛在后面紧追.唐王李世民所骑战马飞奔着,
'呱达达......'一下,这马就停住了.你猜怎么着?原来前面是一条长长的、宽宽的、深深的、
泥泞巴唧的淤泥河.唐王这一看可傻了眼喽.难道大唐江山气数已尽?难道我大唐帝国就这么断送给你们?
难道我大唐的国君要向你们俯首称臣?想到这,面对高丽大将步步逼近的枪尖,他一抖马缰绳,喊了声'驾',
那匹战马四蹄扬空猛然一跃,怎么了?没过去.这河啊,太宽了.战马的四条腿全插进三尺多深的淤泥里.
战马使劲地往上抬腿想从泥坑里蹦出去,心想,这里哪是我驰骋之地?我得出来驮唐王上疆场杀敌呀?
可是这匹战马越陷越深.这可乐坏了盖苏文.只听盖苏文说:'唐王,你的大大的投降,我的大大的有赏.
'唐王一听,我大唐江山疆域辽阔,物产丰饶,历代瑰宝在我皇宫里应有尽有,怎么还要你来赏我?
只是我今天察看地形,太无戒备之心,被尔追赶至此.待我冲出淤泥河,我要率百万唐兵,倾国之师,
无数儿郎杀你个片甲不留.正在唐王想着事儿的当儿,盖苏文把弓箭对准唐王,命手下扔过去纸笔,
命唐王写降书,说道不写降书就把唐王一箭射死.唐王面对降书掩面痛哭,心下一想,这回是彻底失败,
大唐江山是没个救了.忽然不远的山头上霹雳一声,有人大喊:"我主休慌,臣薛仁贵救驾来也!盖苏文
你哪里逃?'只见一员身穿白衣白甲手持长枪的白袍小将从山上骑马飞奔而来,说事迟,那时快,
三枪两枪杀退盖苏文的十万大兵,而那盖苏文早被白袍吓得魂飞魄散,逃出老远.薛仁贵救主心切,
用长枪往马肚子底下一穿,双膀一用力,唐王连人带马被挑了上岸.唐王大喜,封这员小将为游击将军,
后来加封安东都护,镇守辽东,至此无人敢犯.此是后话.方才讲的这段故事叫淤泥河救驾多亏薛礼.

위의 원문 출전 : http://www.ylch.net/lianzai/z003.htm

대략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당 태종의 동정(東征)시 이 곳(해성:요녕성 海城)의 서남쪽에 다다렀을 때 고려대장 연개소문은 1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당태종을 잡으러 오고 있었다. 이세민이 당황하여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는데 연개소문이 긴창을 곧추 세우고 뒤에서 추격을 해왔다. 어느 순간 말이 멈춰서서
보니 앞에는 길고 넓고 깊은 진흙뻘강인 어니하(淤泥河)이 있었는데 당태종은 우습게 생각하고 설마 당나라가 운세가 다해 고구려에 물려주고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고구려 장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려는데 "이세민이다"라는
함성과 함께 들리면서 쫒아 오니 말의 네 다리가 세자도 넘는 진흙뻘강으로 빠져들어
빠져 나올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깊게 진흙수렁속으로 빠지게 되어 연개소문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연개소문 : 당나라 왕아 ! 네가 항복을 하면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노라.

당태종은 이 말을 듣고 " 당나라의 땅은 넓고 물자는 풍부하고 진귀한 보물은 황실에
가득가득한데 상은 무슨 상을 준단 말이냐? 내 비록 오늘 지형을 잘 살피고 준비를 못하고
추격을 당해 이 곳까지 와 진흙구덩이에 빠졌지만 백만당병을 거느리고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연개소문은 활과 화살을 잡고 당태종을 조준하고 수하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명한 뒤 당왕에게 항복문서를 쓰라고 명령했다. 만약 항복문서를 쓰지
않는다면 화살 한 방에 죽을 것이다. 당왕은 항복문서를 앞에 놓고 통곡을 하였다.
이 때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벽력과 같은 함성이 들리는데 " 왕께서는 마음 놓으시오,
신(臣) 설인귀가 구하러 왔습니다. 연개소문 너 어디에 있느냐? " 라고 하여, 보니 흰 옷과
흰 갑옷을 입고 손에는 긴 창을 꼬나들고 젊은 장수가 산 위에서 말을 달려 나는 듯이 달려
와서 연개소문의 10만대군을 물리쳤다. 연개소문은 옷을 붙잡고 혼비백산하여 멀리 도망을
쳤다. 설인귀는 왕을 구하려고 장창으로 말의 배 밑을 푹 찔러 양 어깨로 힘을 써서 사람과 말을 강 위로 끌어 올렸다. 당왕은기뻐하며 젊은 장수에게 유격장군으로 삼고 훗날 안동도호부에
봉하고 요동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어니하(淤泥河)에서 왕을 구한 설인귀"라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상이 위 원문을 번역해 본 것이며 이 이야기는 근대에 일본이 요동을 침략했을 때 의용군으로
참전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경극에 나오는 이야기를 각색해서 고붕(高鵬)이라는 자가
병사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위의 의용군연의 또한 연극(경극)용 소설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한족 입장에서 쓴 이야기이며 실제 경극에 나오는 이야기도 위의 내용과
흡사합니다.

한족들이 아마도 이 것을 쓴 목적은 당태종은 위기의 순간에도 하늘이 돕는 황제이며
고구려를 물리친 설인귀의 무용담을 기리기 위해서 각색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위의 지명 어니하(淤泥河)는 실지로 있으며 어디인가에 대해서 찾아 보았는데,
대륙 각 성 마다 어니하(淤泥河)라는 곳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바로 섬서성 서안 즉 장안 가까운 곳에 어니하가 있었고
산서성 대동(大同)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에서도 서안을 둘러 본 소감에서도 나오듯이 그 쪽 지역은
평시에는 흙먼지 날리는 메마른 땅이다가도 비가 오면 완전 갯벌처럼 푹푹 빠지는 진흙뻘밭이
된다는 이야기로 보면 우리의 전설속에 연개소문이 섬서성 장안(서안)을 점령하고 당태종에게
항복문서를 받고 다시는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고조 유방과 더불어 차이나 역대 최고의 황제라고 일컫는 당태종의 이야기가 나오는 경극에서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장면이 나올 수 있을까요? 또한, 차이나의 각 성의 당 태종의 전설에서 보면 연개소문에게 쫒기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또 쫒기고 살아나는 어떻게 보면 아주 도망만 다닌 군주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또한 강소성 염성의 몽롱탑 전설에서도 당 태종이 어니하에 빠져 우물 속에 숨고
산동성 즉묵시에서도 쫒기고 산동성 봉래에서는 도망치다 개울에 숨는 등
온통 어딘가에 숨고 진흙땅에 빠지고 도망다니는 그런 존재입니다.

덧붙여서 위의 이야기에서 설인귀가 흰 옷과 흰 갑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설인귀는 백호장군(白虎將軍)이며 연개소문은 청룡장군(靑龍將軍)으로 나옵니다.
청룡과 백호는 고구려의 사신도에서 보듯이 청룡은 동방의 상징이요, 백호는 서방을
상징하는 수호신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을 동쪽은 연개소문 즉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고, 서쪽은 설인귀 즉 당나라가 차지해 전체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여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형국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성립이 될 것입니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그 넓은 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어쩌면 고구려의 영토가 더 클 수도 있음) 사실을 고증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며 고구려가 일개 변강의 소수정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5 / 글쓴이 : 신완순 / 2006-07-14 오후 3:18:49  

  강소성 비주(邳州)의 애산(艾山)에 관한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강소성 비주(邳州)의 애산(艾山)에는 고구려군과 당의 설인귀와의 전투에 관한
전설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강소성 비주(邳州)는 전에 제가 소개해 드린 강소성 숙천지역의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가 열렸던 그 숙천지역의 북쪽에 락마호라는 담수호가 있는데 바로 숙천의
락마호 건너 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 비주(邳州)에 관해 <중국역사대사전- 역사지리>편에서 살펴보면 비주는 북주(北周)가
동서주(東徐州)에 비현(邳縣)을 두었으며 수나라 대업(大業)초에 폐했다고 나오며,
당나라 무덕(武德)4년(621년) 다시 비현을 설치했다가 당 태종 정관(貞觀)원년(627년)에
다시 폐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이 곳 비주(邳州)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싸움에서 고구려가 차지한 것으로
생각이 들며, 또한 당나라 고조 때 일시 당이 점거했다가 고구려와 당태종의 싸움때 고구려가
다시 차지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럼 애산(艾山)에 관해 알아 봅니다.

애산(艾山)에 관한 설명이 나오는 곳

소개 1) : http://www.xz.gov.cn/lhwh/zbjd/pix/090302061901.htm

소개 2) : http://www.newpz.com/pzgk/pz3/aisan.htm

艾山位于江蘇省北大門,蘇北魯南交界處的連防鄉境內,主峰海拔197.2米,幅員20平
方公里, 傳說古時遍山生艾,故名艾山.它由大小九個山頭組成,又稱"九頂艾華山".艾山
歷史悠久, 古有"國之巔泰之也,邳之巔艾之也"(艾山奶奶廟碑文錄)之說.据邳州史志記載,
早在周穆王時, 命徐子誕以邳為基地建立徐國,在艾山鑄鼎銘"艾",以艾山為徐國的鎮國之山.
東魏武定八年(公元549年),以艾山四境地區設置艾山縣,艾王城就座落在艾山的東腳下,
至今古艾王城遺址猶存.

애산(艾山)은 강소성 북쪽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동성 남쪽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애산의 주봉은 해발 197.2 m 이고 산의 넓이는 20 평방킬로미터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산기슭에 쑥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옛날에 " 나라에는 태산 봉우리가 있고, 비(邳)에는 애산 봉우리가 있다."(애산 할미 묘비문)
9개의 산봉우리가 있어 "구정애화산(九頂艾華山)"이라고도 불린다.
비주사지(邳州史志)의 기록에 보면 주(周)나라 목왕(穆王)때 서자탄(徐子誕)에게 명하여
비(邳) 지역을 서국(徐國)의 기반이 되는 땅으로 삼게 했다. 애산(艾山)에서 솥(鼎)을 주조하여
"애(艾)" 라 이름하고 애산을 서국의 나라의 이름을 떨치는 산(진국지산, 鎭國之山)이라 했다.
동위(東魏) 무정(武定) 8년(549년) 애산의 서 쪽에 애산현(艾山縣)을 설치했다.
애왕성(艾王城)은 애산의 동쪽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애왕성의 유적지가 있다.


唐朝時期唐太宗李世民曾派手下驍將薜仁貴東征,在這里與自東海入侵之敵展開一場鹿戰,
薜仁貴陽市飲用九龍溝一泉水后,力量陡增,一槍挑出的黑風口,因薜仁貴是白虎星下凡,
此泉就被后人稱為摪諄⑷獢。

당나라 때 태종 이세민이 수하의 날랜 장수인 설인귀를 보내 동정(東征)을 할 때에,
이 곳에서 동해로부터 침입해 온 적(고구려군)과 일전을 벌였다.
설인귀가 더운 날 구룡구의 샘물을 마신 후에 힘이 별안간 더해져 창(槍)을 한 번 휘두르니
흑풍구로부터 바람이 나왔다. 설인귀는 백호성(중국에서는 연개소문은 청룡장군, 설인귀는
백호장군이라 칭함, 경극에서도 나옴)의 정기를 받고 나왔으므로 이 샘을 후세 사람들은
"장순효(摪諄獢)라 불렀다.

이상이 비주(邳州)의 애산(艾山)에서 벌어진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나라 설인귀간의
짤막한 전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냥 보기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비주의 지명을 고찰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당 태종 정관원년(627년)에 폐했다는
비주의 지명연원을 볼 때 이 전투가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 시기이며 당나라 설인귀가
이 곳에서 패해 도주했기 때문에 (이 곳이 고구려의 땅이 되었기 때문에) 당에서
비주 즉 비현(邳縣)을 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 글쓴이 : 신완순 / 2006-07-14 오후 3:20:34  

  수, 당 시기의 이상한 인구의 변화


안녕하십니까?

차이나의 "신군사(新軍事)" 라는 사이트에 게재된 수당시기의 인구에 관한 기사가
있어 소개합니다.

신군사 사이트는 차이나의 군사관련 사이트로서 군사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은 보시면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역사의 비밀이 보일 것입니다.

수당시기의 인구에 관하여 (關于中國古代史上的人口---隋唐)

원문출전 : http://www.xinjunshi.com/html/2004-1-14/2004114222516.htm

아래 원문은 원래 간자체로 작성이 된 것인데 제가 번체자로 바꾸었으나 일부 지원이
안되는 글자는 깨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隋統一后,在文帝“開皇之治”時社會經濟相當繁榮,倉稟殷實,人口藩息。
到文帝末年,史書記載戶已達890萬戶,据《隋書。地理志》所錄,此時人口為4600萬。
這樣的話,口戶比就是5.17,至少看上去已經很合理。

수나라 통일 후 문제(文帝)시절엔 "개황의 치(開皇之治)라 불렸는데 사회 경제가 상당히
번영하고 먹을 것이 풍부해 인구가 번식을 하였다. 문제말년에 수서지리지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미 890만호(戶), 인구는 4600만명에 달했다. 호당 평균인구가
5.17명이다.

再從時代背景看,隋是大一統并且呈現富強的王朝,皇權加強士族被削弱,
這也使得戶口整理工作進行的更順利結果更精确。故《隋書》記載的官方統計我認為是可信的。
隋人口的巔峰是在煬帝大業五年破土谷渾之后。
此時國內尚未開始動亂,人口增長速度放緩但總的說來仍在增加。
加上新置河西四郡,是年隋的戶數無論如何也該突破900萬戶了。

수나라는 시대의 상황으로 볼 때 대 통일후에 부강한 왕조를 이루어 왕권은 강화되고
토족은 약해졌고 호구 정리가 이루어진 결과라서 정확할 것이다. 수서에 기록된 통계는
믿을 만하다. 수나라의 인구는 수양제 대업5년(609년) 토곡혼(土谷渾)을 격파한 이후가
정점이며 이 때는 국내의 동란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인구 증가의 속도가 더해졌다.
또한, 새로 신설된 하서(河西)의 4군이 더해져서 여하간 호구는 900만호를 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大業六年,公元610年,楊廣征高麗,天下始亂。緊接著的,自然又是諸侯混戰的局面。
直到628年唐朝統一,其間殺戮不止達18年,人口大量折損。
李唐號稱中國封建盛世,天下承平逾百年,加上氣候持續轉熱而使得農業的發展事半功倍,
境內戶口數長時間內都是在較快速的增長。
据《杜佑通典》記載,太宗時唐的戶數約為300萬戶。
太宗之前高祖治世8年,假設這段時間足以使得口戶比恢复到正常水平,則太宗時人口約為 1600萬。

610년 수양제(양광)가 고려를 칠 때부터 천하의 란이 시작되었다.
자연히 각 제후들의 혼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628년 당조가 통일할 때까지
18년 동안 살륙이 끊이질 않아 인구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두우통전(杜佑通典)에 의하면 당태종 대의 호구의 수는 300만호로 되어 있다.
태종이전의 고조 8년동안의 기간에는 호구의 비가 정상적으로 회복하여 태종 때 인구가
약 1600만명이다.

高宗永徽三年,長孫無忌奏稱天下戶數380萬。此時唐王朝根基已穩,
高門大閥的地位又再次下降,統計所得也更可靠一些。
高宗,武后執政時期,唐朝的人口增長率比之創業期的太宗時期可能更快。
《舊唐書》稱中宗神龍元年,公元705年,天下戶數約635萬戶。
這個數据与實際數量相比是只少不多的。接下來是著名的開元盛世了,
這一時期人口增長率并不見得比高宗時更快,但是 唐近百年的積累下,
到玄宗朝終于放出萬丈光芒。《通鑒》記載玄宗開元十四年戶數706萬戶,口數約4100萬。
這一年唐朝廷大規模清查隱瞞人口,故我相信這是所有數据中,比較可信的一個。

고종3년(652년)에 장손무기는 천하의 호수가 380만이라 했다.
이 시기는 당 왕조가 안정을 찾고 고관대작들의 지위가 재차 낮아진데서 따른 것이다.
고종, 측천무후 시기에는 당조의 인구의 증가율이 초기 태종의 때에 비해 빨라졌다.
구당서에 의하면 중종원년(705년) 천하의 호수는 635만호였다.
이 숫자는 실제 숫자에 비해 다소 적은 것이다.
<통감>의 기록은 현종 개원14년(726년)의 호수는 706만호, 인구는 4,100만명이다.
이 때는 당 조정에서 대규모로 인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믿을 만하다.

《杜佑通典》稱天寶元年唐戶數834萬,略低于《舊唐書》所載。
此時的人口杜佑稱是4500萬, 這樣的話,口戶比約為5.4。
這個比例放在其他時期是很安全的估計,但是終唐一朝,少有口戶比低于5.7的。
故而《舊唐書》850萬戶4900萬 人的記錄可能更可信一些。
唐戶口的最高峰,是在天寶十四年,公元755年。此時的戶數約為900萬,
人口在5100萬到5400萬之間。

<두우통전>에는 천보원년(742년) 당 호수가 834만호라 했다. <구당서>에도
간략하게 되어 있다. 이 시기의 인구는 두우통전에는 4,500만 명인데, 호수대비
인구는 약 5.4배이다. 이 것은 다른 시기에 비해 매우 안전한 기록이며, 당말에
적어도 호수대비 인구는 5.7배이다.
그러므로 구당서의 850만호에 4,500만 명은 믿을 만하다.
당 호구의 최고치는 천보14년(755년)의 기록이며 이 때의 호수는 약 900만이며
인구는 5,100만에서 5,400만 명 사이이다.

關于唐極盛時期到底有多少人口,向來分歧很大。我基本都是按照古籍所記錄的來推算的,
但是近來看到不少專家的著述稱唐的人口最少有6500萬,有西方學者甚至說唐的極盛,
中國人口為1.4億。暫時看來,這也只能是各執一詞了。
公元756年安史兵變,戰火燒遍北中國,人口再次急劇減少。
此時北方民衆為避戰禍,大舉南遷。自西漢末開始的南移,到此時發生決定性變。
以后中國的人口重心就明顯向南傾斜了。

당조의 가장 번성기의 인구는 얼마나 될까? 종래로 기록의 차이는 매우 크다.
기본적으로 고서의 기록을 가지고 추산해 볼 때 근래에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저술한
것에 다르면 당의 인구는 최소한 6,500만 명 , 서방학자들은 심지어 당의 가장
번성기의 인구를 1억 4,000만 명으로 말한다.
756년 안사의 병변(安史兵變)으로 전쟁의 불길이 북중국에 두루 퍼져 인구가 재차
급격히 감소했다.
이 시기의 북방에 사는 민중들이 전쟁의 화를 피해 대거 남쪽으로 옮겨 갔다.
서한말부터 시작된 남으로의 이동은 이 시기에 결정적으로 변화가 생겨났다.
이후의 중국 인구의 중요 구심은 분명하게 남방에 치우쳐서 나타났다.

《通典》上有記錄唐乾元三年口數1700萬的,但這相當不可靠,此時兵亂未消國內動蕩,
戶口統計如何進行?這可能只是局部地區的口數。直到憲宗年間,唐號稱中興,
《舊唐書》記載憲宗元和年間戶數在240萬到250萬之間,口數約為1600萬,這等于說,
唐在隋末動亂后百多年里人口的增長全都白廢了,回到高祖太宗時期的水平線上。
以后百年,唐的戶口數也像唐的國勢一樣再也沒能恢复過來。在黃巢兵亂以前,
唐戶數的最高峰不超過500萬,不僅不如開元之初,也不及武后執政時期

<통전>의 기록으론 760년 당의 인구는 1,700만 명이다. 그러나, 상당히 신뢰할 수
없다. 이 시기에는 국내의 병란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는데 호구의 통계가 어떻게
진행될 수 있겠는가? 이 것은 일부 지역에 국한된 인구일 것이다.
헌종대에 이르러 당의 중흥기 임에도 <구당서>에는 헌종 원화원년(806년)의 호구의 수가
240만에서 250만명 사이이며 인구는 약 1,600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은
수나라 말기의 동란 이후 백여년이 흐른 당의 인구 증가가 전부 없어졌다는 이야기로서
고조나 태종 시기의 인구와 같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후 백년 동안 당의 호구수는 당의 국력과 맞물려 전처럼 회복되기는 어려웠다.
황소의 난(黃巢兵亂)이전에 당의 호구 수의 최고점은 500만을 넘지 않는다.
뿐더러 개원지초(713년경)와도 같지 않았고 측천무후집권 시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編輯:mhuo)

이상이 <신군사>에 실린 내용입니다.

정리해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년도 호수(戶數) 인구수(人口數) 호당평균(戶當平均)

수문제(604년경) 890 만호 4,600 만명 5.17 명

당태종 300 만호 1,600 만명 5.33 명

당 고종(652년) 380 만호

당 중종(705년) 635 만호

당 현종(726년) 706 만호 4,100 만명 5.80 명

당 현종(742년) 834 만호 4,500 만명 5.39 명

당 현종(755년) 900 만호 5,100 만명 5.66 명

당 숙종(760년) 1,700 만명

당 헌종(806년) 250 만호 1,600 만명 6.40 명

주목할 것은 위의 원문에서도 설명을 하고 있지만(불충분하다) 수나라 말기의 인구보다
당나라 초기의 인구가 무려 3,000 만명이나 사라진 사실입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3번의 전쟁에서 적어도 100 만명 이상이 숨졌다고 보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 등이 일어나서 많은 수가 사망하고 또한 운하 건설 등의 노동력 동원으로 많은 수가
사망하고 당 태종 10년, 15년, 16년, 17년, 18년, 22년 에 역병이 돌았다는 <신당서>의 기록을
참고한다해도 도대체가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무릇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일방적인 전쟁이 되면 금방 끝나고 그 나라를
멸한 것으로 사서에 기록됩니다.
그런데, 고구려와 수의 전쟁, 고구려와 당 태종때의 전쟁을 보면 오랫동안 전쟁이 지속됩니다.
이렇게 전쟁이 계속되다 보면 팽팽한 전쟁일수록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수비만 한다던가
아니면 공격만 할 수 없습니다.
지리한 영토를 주고 받는 싸움이 계속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차이나의 웹사이트를 뒤지며 찾아냈고 또한 찾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가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요동성에만 국한 것이 아니고 산동성, 강소성, 하북성, 하남성, 요동성 등 많은 지역에서의
전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나라의 4,600 만명의 인구가 당태종시 3,000 만명이 없어지고 1,600 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전쟁에서 많은 수가 사망했겠지만 고구려가 중원의 많은 땅을 지키고
있었고 또한 수나라나 당나라의 땅을 많이 차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관할 지역의 인구는 빼고 순수한 당나라 지역의 인구만 산정하니까
위의 숫자가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하나는 정확한 통계를 못 낸 탓도 있겠지만 수나라 말기나 그 이전 또는 그 이후에도
동이족의 호구를 자기들 호구에 편입하다보니 그런 오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분야에 정통한 분의 연구 부탁드립니다.

  7 / 글쓴이 : 신완순 / 2006-07-14 오후 3:22:45  

  건안(建安)으로 옮겨진 백제의 호구(戶口)


안녕하십니까?

구양수가 편찬한 자치통감의 당고종 의봉(儀鳳)원년(676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676년이면 백제가 멸망한 지 16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二月,甲戌,徙安東都護府于遼東故城;先是有華人任安東官者,悉罷之。徙熊津都
督府于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於徐、兗等州者,皆置于建安。

2월 갑술일에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옛성으로 옮겼다. 그에 먼저 안동도호부에 임명된
화인(華人, 중국인)들이 있었는데 모두 파면했다.
웅진도독부를 건안(建安)의 옛성으로 옮겼다.
우선 그 서주(徐州), 연주(兗州)등지에 있는 백제의 호구(戶口)를 옮겼다.
모두 건안(현 복건성 복구(福甌), 복건성 절강성 등지) 에 두고 다스렸다.

또 당고종 의봉2년(677년)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春,正月,乙亥,上耕籍田。
初,劉仁軌引兵自熊津還,扶餘隆畏新羅之逼,不敢留,尋亦還朝。二月,丁巳,
以工部尚書高藏為遼東州都督,封朝鮮王,遣歸遼東,安輯高麗餘眾;
高麗先在諸州者,皆遣与藏俱歸。又以司農卿扶餘隆為熊津都督,封帶方王,
亦遣歸安輯百濟餘眾,仍移安東都護府于新城以統之。時百濟荒殘,命隆寓居高麗之境。
藏至遼東, 謀叛,潛与靺鞨通;召還,徙邛州而死,散徙其人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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