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11 4
  View Articles
Name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Link #1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2&sn1=&divpage=4&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3084
Subject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반론 [2]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반론 [2]








대수맥 (2009-04-14)  



  http://blog.naver.com/nero1003/70040590938 혹은 http://blog.daum.net/nero1003/?_top_blogtop=go2myblog


  



이에 구환(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니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기를 24년.....10월 3일에 신인 왕검은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00을 거느리고 단목의 터에 정착했다.....신시(.神市)의 옛 법규를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단군세기>

- 이는 다음의 기록에서도 증명이 되는데 그가 처음 환웅에게 제후국으로 봉토를 받은 檀墟國의 군장이 아닌 하나의 <비왕>으로 책봉을 받은 환웅국의 <왕검>으로서 가장 특출한 능력과 신망을 얻어 차츰 세력판도를 넓히는 과정을 엿보게 된다.   또한 신인왕검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라 안팎의 정세와 혼란상도 더불어 감지되며 정황으로 보아도 웅족(熊族)의 나라 중에서 단국(檀國)이 가장 강성했음을 알 수 있다.   <태백일사>에 <신시 개천으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되는 해에 단군왕검이 되었다>함은 아마도 이는 환인(桓因)에서 분리된 환웅(桓雄)부족이 남만주(南滿州) 지역으로 남하해 신시(神市)에 도읍하고 대인국(大人國)을 세운 해부터 계산한 것인 듯하다.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봉을 받아 왕검(王儉)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서 귀화하는 자 천 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나 신인왕검(神人王儉)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裨王)이 되었다.   비왕이 된지 24년 만에 웅(熊)씨의 왕이 전쟁 중에 죽으니 왕검은 마침내 그 자리를 이어 받아 구환(九桓)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태백일사 삼환관경 본기 제4>

- 위 기록으로 추정해 볼진대 거불단(居弗檀)환웅은 어머니 쪽에 박달국(檀墟國)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터에 서자(庶子)인 神人王儉 즉 檀君(BC 2370년 5월2일 출생)이 매우 영특하다는 소문을 듣고 14세 때 대읍(大邑)을 맡겨 스스로의 통치능력을 검증한 결과 인물의 됨됨이가 훌륭함을 알게 되어 매우 총애를 했고 후에 檀國의 왕이 부족간의 전쟁 중에 죽자 강력히 밀어 비왕(裨王)의 직을 잇게 하니 비로소 군장들의 난을 진압하고 나라를 안정시킴 듯 하다.

※ 결론적으로 <아사달>은 일반명사로 도읍을 의미하는 평양(벌내)과 같으며 단군세기와 태백일사 등 대부분의 고기(古記)에서 단군(신인왕검)은 모국인 단허국에서 환웅의 보호아래 성장하다가 24년 후 제2의 도읍지인 아사달로 와서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다고 기록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앵무새]의 어이없는 착시(錯視)가 박살이 나는 순간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력을 얻고 入國을 하는 데 난데없이 <그런 이유로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는 단군의 혈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란 해괴망칙한 소리는 무엇인가?   본말을 거꾸로 뒤집어도 한참을 뒤집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단군 조선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유립은 이번에도 만주를 지목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이렇게 구체적으로 위치를 찍고 있다>하였는데 그렇게 안목 없는 소리만 하지 말고 위의 글을 읽으면서 이유립이 얼마나 정확하게 단군부족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만주지역으로 움직여 나갔는지 재삼숙고 해보기 바란다.   아울러 내가 앞서 제시한 글에서 환인국-환웅국의 강역에 대해서는 귀가 아프도록 설명해주었으니 지금이라도 <환국-배달국-단군 조선이 다 같은 동네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환국의 경우 5만리 떡밥이 낑겨 있었을 뿐이고, 환국의 변방에서 배달국이 일어나서 만리장성 북방에 퍼져 있었다 정도였던 것. - 이 퍼진 정도가 얼마나 될지는 이유립도 잘 몰랐던 게 분명하고...>라는 어린애 소꿉놀이는 그만 해주기 바란다.    이런!    그리고 <이유립은 자국에 불리한 것은 쓰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춘추필법에 따라 그런 이야기는 애초에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라는 이야기는 또 웬 이야기인가?   이 사람은 정말로 뻔히 그런 전쟁 상황이 나오는 <태백일사 삼환관경 본기 제4>의 기록도 무시하려는 것일까?  춘추필법이 그런 망발에 울다가 자빠지겠구나!


[Tip]

단군이 일어설 때 이미 회대(淮岱)지방에는 환웅계열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회수(淮水)와 대산(岱山) 사이의 이 땅은 가장 평평한 평야지대로서 회수(淮水)의 발원은 하남성 남쪽의 동백산(桐白山)인데 동으로 안휘성 북쪽을 지나 강소성으로 들어가 대운하로 합류하고 대산은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인 산동성 태안현(泰安縣)의 북쪽에 있는 태산(泰山)을 말하는데 아홀단군 때 방고씨(邦古氏)를 이곳에 봉했고 서언왕(徐匽王)의 대서(大徐)제국이 이곳에 있었다.

조선이 습수(濕水)*선수(鮮水)*열수(列水)*조수(潮水)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은 이 무렵부터 桓族이 이 강들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로서 서쪽 감숙-신강에서 황하를 타고 섬서를 지나 다시 황하*회수*한수漢水*장강을 안고 산동*하북*열하를 잇는 조수-선수 계선 북쪽의 넓고 길게 이어진 지역을 어울렀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런 정황을 감안할 때 최초의 [평양]은 수인씨족과 환족시대에 근거지로 삼은 곳으로서 bc 714년 주 환왕 때 진 영공(嬴公)이 도읍으로 삼은 섬서성 미현(郿縣)이며(태백산이 물 건너 동남에 있고 미현 부근에 넓은 뜰이 있음) 다음으로는 bc 421년 진 유공(晋 幽公) 19년에 대부 한무자(韓武子) 한계장(韓啓章)이 서울로 삼은 산서성 임분현(臨汾縣) 부근의 [평양]일진대 이곳들이 환웅국과 관련성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덧붙임 글]  부족의 범칭(凡稱)으로서의 氏

<원본죽서기년>의 기록에 의하면 나라이름 대신 모두 [씨]를 붙였는데 이는 아득히 먼 조상에 대한 경외와 그의 후예임을 찾고 잊지 않으려는 부족의 염원이 나타난 우리 민족의 습성이 고스란히 기록된 까닭이었다.   그 후 지나에서도 하(夏)와 상(商)때까지 동방계 언어인 <씨>를 사용해 族의 공동체로서 표시했고 주(周)시대엔 <가家>로 변화했다가 전국시대에 국가(國家)로 발전했으나 이족(夷族)에 대해서는 이를 숨기기 위해 여러 가지 갈래로 바꾸어 기록했으면서도 그 중 바꾸지 않고 특별하게 취급했던 것은 숙신씨(肅愼氏) 뿐으로 이를 하(夏)시대부터 변함없이 쓴 이유는 이 동방집단이 옛날부터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강한 국가조직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도 환웅부족의 강대함이 증명된다.


[앵무새]의 다음 말이 또 어떻게 전개되는지 한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자.   지금부터는 이미 앞서 말한 내 반증의 핵심과 전체 흐름을 충분히 인식하였을 터이니 설명하기 쉽게 단락으로 구분하여 이야기하려 한다.


◀ 단군은 9환을 통일 후, 삼한을 세웠다고 한다...(이 부분은 논쟁의 전개에 있어서 별로 필요 없는 듯하다).........[단락 1] 그럼 회, 대 지방은 어찌 되었을까?   그곳에는 분조分朝를 두었다고 한다.   단군은 태자 부루를 도산에 보내 치수의 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이때 나라의 경계를 정했다.   유주, 영주와 회, 대 지방을 단군 조선의 영토로 하고 그곳에 분조를 두었다.(단군세기 단군왕검 조)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여긴 옛날부터 우리 땅이라고 해온 곳이다.   그걸 또 정했다고 써놓는 것을 보면 이유립의 기억력을 알 만하다.  이유립의 기억력이라 하니...........[단락 2] 다음과 같은 구절을 한 번 보자.  <겨울 10월에 북쪽을 순행하고 돌아오다 태백산에 들러 삼신에 제사 지내고 신령스러운 약초를 구했는데 이것을 인삼 또는 선약이라 했다 - 4세 오사구>   저기 나오는 태백산은 백두산인데, 백두산의 인삼을 자랑하는 건 좋지만 수도가 송화강변에 있는 임금이 북쪽을 순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쪽 변경의 산에 오른다는 게 말이 되나?   이것은 무의식중에 평양에 수도가 있다고 써놓은 오류의 하나다.........[단락 3] 회, 대 지방 이야기로 돌아가자.   분조를 설치한 우리 땅이었던 이곳은 또 세월이 지나자 스르르 한족의 땅으로 둔갑해 있는 중이다.   22세 단군 색불루 때 기록을 보자.   <11월에 몸소 구환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쳐부수고 화친한 지 얼마 안 되어 또 크게 싸워 쳐부수었다.   이듬해 2월 황하 가에까지 이들을 추격하여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회와 대의 땅으로 옮겨가 살게 하고 짐승들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이 무렵 남국藍國이라는 나라가 나온다.   김산호는 아무 근거 없이 남국을 양자강 위쪽 해안가에 비정했던데, 이유립의 설정에 따르면 남국은 고죽국 옆(즉 요서 지방)에 있었던 나라다.   2세 단군 부루 조에 나온다.   <처음에 우나라의 순임금이 유주와 영주를 남국의 인근에 두어 부루가 군사를 보내 정벌했다>   즉 유주-영주 인근이 된다(영주는 지금 요서의 조양을 가리킨다).   또한 색불루 다음 아홀 때 기록에는 남국과 함께 남쪽으로 정벌에 나서서 여섯 읍을 은나라에 설치했다고 나온다. 대체 남국이 양자강 이북에 있으면 은나라는 강남땅에 있었단 말인가?   색불루 때 기록에는 남국이 고죽군과 함께 은나라 국경 가까이까지 진출했다 하고, 심지어 그 장수 여파달이 장안 이서의 빈과 기 지방을 점령하고 여黎라는 나라까지 세웠다고 나온다 ▶


먼저 [단락 1]에서 앵무새는 또 다른 어리석음을 벌이고 있다.   정말 이 사람은 역사를 제대로 해석할만한 능력이라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여긴 옛날부터 우리 땅이라고 해온 곳이다.   그걸 또 정했다고 써놓는 것을 보면 이유립의 기억력을 알 만하다.   이유립의 기억력이라 하니...>라는 어릿광대 같은 놀음이 절대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불단환웅은 환웅국의 마지막 天王이라는 건 모든 기록에서 확실하다.   또한 그는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고신국(高辛國)의 말기적 혼란(지摯와 요堯의 권력투쟁)과 본국 내에서의 대군장들의 득세 속에서 과감한 결단으로 우리 민족의 재도약과 중흥을 위해 <신인왕검>에게 자리를 물려 새로운 [단군조선]을 탄생케 한 인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우(愚)를 범하여 지금 [앵무새]같은 헛소리만 지껄이게 된다.

- 이 시기 제후국인 高辛國에서 高辛의 뒤를 이은 摯와 堯 사이에 9년간에 걸친 권력암투가 벌어져 마침내 堯가 정권을 승계하는데 성공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帝嚳妃 娶(此+言)氏女 曰常儀 生帝摯也...제곡비 취차씨녀 왈상의 생제지야...<사기 권1 오제본기 4p 正義>
  帝王紀云...帝摯在位九年 政微弱 而唐侯(堯)德盛...제왕기운...제지재위구년 정미약 이당후(요)덕성...<사기 권1 오제본기 4p 正義>

※ 우리 민족의 방계(傍系)였던 高辛과 환웅국 출신인 상희常羲(상의常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지摯나 상의가 우리 민족혈통임은 민족씨칭인 제준(帝俊)의 이름이 상희(常羲)로 불려졌기 때문이다.   황보밀(皇甫謐)등 상당수 중국학자들은 常儀란 이름을 들어 제곡고신을 帝俊에 비정할 만큼 常羲는 우리 민족이라고 공인된 추세이다.

- 우리 민족의 혈통인 父姓을 따르지 않고 모계 성을 따르는(이기씨伊祁氏)가운데 지(摯)를 누르고 새로운 지나 지역 통치자로 등장한 요(堯)는 천천히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우리민족의 꾸준한 거점지역이자 핵심강역이었던 하북*산동*하남성을 의식하여 산서성 평양부(平壤府)로 근거지를 옮기면서까지 노골적인 독단행동을 취한다.   이어 우리 강역인 우이(嵎夷)지역을 신하인 희중(羲仲)에게 감시하게 하는 등 도전적인 입장을 드러내었다.

  昔堯命羲仲宅 嵎夷曰暘谷...석요명희중택 우이왈양곡...<후한서 동이열전 704p>
  帝堯者...以親九族 九族旣睦 便章百姓 百姓昭明 合和萬國...分命羲仲 居郁夷 曰暘谷...제요자...이친구족 구족기목 편장백성 백성소명 합화만국...분명희중 거욱이 왈양곡...<사기 오제본기  4~5p>

※ 이 때문에 공자는 <서경>에서 中國史의 시작을 요(堯)로부터 기록(오자지가조 유피도당 유차기방(하) 五子之歌條 惟彼陶唐 有此冀方(夏) -저 옛날 요임금으로부터 이 중국을 다스려오셨는데...>하고 있으며 범문란(范文瀾)은 중국통사간편(中國通史簡編)에서 堯를 부락추장으로 보아 여러 추장들의 추천을 얻어 대추장인 임금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나라를 이어받은 신인왕검인 단군이 가장 먼저 할일이 무엇이겠는가?   체제 재정비와 아울러 보다 새롭고 굳건한 토대를 세우기 위한 강역확정과 나라 관경정립이 당연한 수순(治水의 道 전수와 예羿를 통한 십일十日의 난亂 해소 그리고 산동과 하북지역인 유주幽州*영주營州에 대한 강역 재정립과 관경확정 등 여러 기록에서 명백히 보인다)인데도 그걸 망각한 어리석은 연구자세로도 모자라 아예 이제는 <사대모화>적인 태도로 저들의 입장만을 침을 튀기면서 찬송하는 치졸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정말  <단군은 태자 부루를 도산에 보내 치수의 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이때 나라의 경계를 정했다.   유주, 영주와 회, 대 지방을 단군 조선의 영토로 하고 그곳에 분조를 두었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는가?   이런!   이런!  - -...ㅠ ㅠ ㅠ....뭘 모르고 함부로 말한 듯하여 다음 글로 덧붙여준다.

- 님검이 된 후 왕호를 단군으로 칭한 후 비서갑 하백(非西岬 河伯)의 딸을 후비(後妃)로 맞아 누에치기와 베 짜는 일을 관장하도록 하니 누에를 쳐서 고치를 만들어 명주실을 뽑아 명주와 비단을 만들었다.
- 단군은 환웅국과 기존 삼사(三師)계열의 군신(君臣)들을 무시할 수 없어 풍백(風伯)인 팽오(彭虞)에게 토지 개척을 명하니 각 부족의 장정을 동원해 제방을 쌓고 물길을 새로 내며 공동작업으로 초목을 불 질러 화전을 일군 다음 새로운 농지를 골고루 나누어주자 백성들이 불평을 하지 않고 모두 즐거워하였다.      
- 성조(成造)는 궁실을 짓고 고시(高矢)는 농사짓는 일을 맡아 농사법을 개량하여 백성들에게 장려하도록 함하였으며 신지(神誌)는 글을 만들어 기록하고 기성(奇省)은 병을 치료하는 법과 치료약을 개발해 백성에게 베풀도록 하고 나을(那乙)은 부족들의 화합과 백성들의 관리를 맡게 하여 나라 안의 호구와 인구를 조사해 징병과 부역과 조세를 관리토록 하였으며 치우의 후손인 우작(尤作)에게 병마를 다스리는 일을 맡기니 이들 후손이 람후(藍侯)가 되어 명성을 드높였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요(堯)가 환웅국을 이은 단군조선의 취약성을 이용해 지(摯)를 극(克)하자 사방에서 군장들의 발호가 일어난 정황이 <산해경 해내경>의 <제준帝俊이 예羿에게 붉은활과 흰 화살을 주고 하국下國을 도우라고 명했다  이에 예가 비로소 하지下地의 많은 어려움을 구했다>라는 문구로 짐작이 가능하며 이를 다시 어우른 羿는 오히려 유궁국(有窮國)에 근거를 두면서 제곡고신의 地를 통치하니 이에 堯는 제곡의 터전도 지키지 못하고 산서성 평양부(平壤府)로 서천(西遷)하는 걸 보게 된다.   따라서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도 <치우이후 300년간은 별일이 없었다 亦○ 矣其後三百年無事...>라 하였으니 강역은 여전히 그대로였음을 잘 알려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Tip]

자꾸만 淮*岱 淮*岱 하는데 이젠 나도 지겹다.   그렇게 까막눈인지...원!   그래서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심정으로 요堯와 순舜 그리고 우禹 시대에 일어난 治水와 管境에 관한 일련의 과정들을 참고로 덧붙인다.

BC 2284  나라에 큰 홍수가 있었으나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해 治水에 성공하였는데 우수주(牛首州)에 그가 홍수를 막은 공로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BC 2267  부루(扶婁)가 명을 받고 도산(塗山)으로 가서 서徐*회淮*대岱*엄淹 지방의 군장들을 모아 치수법(治水法)을 가르쳐 주려하는 도중에 낭야성(琅耶城)에서 반달을 묵었는데 이때 순(舜)이 소식을 듣고 사악(四岳)을 거느리고 와서 治水와 공납(貢納)에 관한 여러 일을 말하였다(우공虞貢을 바치다 는 기록과 사근동후肆覲東后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이 회맹(會盟)에서 경계를 정했는데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에 대한 강역을 확정하고 이미 서쪽으로 옮긴 요(堯)를 감시토록 회*대(淮·岱)에 별도로 분주(分主)를 둔 후 순(舜)에게 도와주도록 명하였다.

요(堯)는 이미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여 도움을 주지 않아 治水에 실패하고 순(舜)에게는 동족으로서의 좋은 감정으로 태자 부루를 보냄으로서 치수를 성공시키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는데 이 무렵 舜이 사공의 직책에 있던 禹를 파견한 일을 말한다.   회대(淮岱)는 고대부터 동방족의 활동 중심지로 그 지역을 여러 소국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하면서 이들의 행동과 치적에 대한 감군(監君)의 역할을 동이족의 수장이었던 舜에게 맡긴 것이다.   아울러 당시 현이(玄夷)는 九夷의 하나였고 창수(滄水)는 동해의 푸른 물이니 결국 <玄夷의 滄水使者>는 北方夷로서 대륙의 동해안까지 진출한 박달조선의 사자 <부루>였음을 알 수 있다.

          BC 2284년에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박달임검은 풍백인 彭虞=彭吳에게 명해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니 백성들이 편히 살수 있게 되었다......BC 2267인 갑술67년 태자 扶婁를 塗山(안휘성 양자강 남쪽의 당도當塗와 북쪽의 도산 등 2개가 있음)에 파견해 우사공(禹司空)을 만나게 하고 오행치수법을 전해준 후 나라의 경계를 정했으니 幽州와 營州(현 산동성*산서성*하북성 일대)의 두 곳이 우리에게 속하게 되었고 이를 淮*岱지방의 제후들로 나누어 다스리게 하여 우순(虞舜)이 그 일을 살피도록 했다 <단군세기>

          이 때 신지(神誌)가 보옥(寶玉)과 궁시(弓矢-정예 전사 집단을 지휘해 보호하였음을 말한다)를 가지고 수행하다 <단기고사>

          순(舜)은 [단군의 명에 의해] 서토지역의 관리와 동이부족에 대한 지원을 맡자 ......상당한 덕성을 지닌 8명을 뽑아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 후 첫째 사람들에게는 후토(后土) 즉 땅(중심=5)의 어른이란 직책을 주고 둘째 인물들에게는 중심을 제외한 4개 지방 사람들에게 단군조선의 5개 치도방침(治道方針)을 전하는 책임을 맡겼다 <좌전>

          禹는 玄夷의 滄水使者로 부터 금간옥첩을 받았다 <오월춘추>  

※ 도산(塗山)은 안휘성 회남시(淮南市) 동북쪽*방부시(蚌埠市) 서쪽에 있고<서경> 도산국(塗山國)은 박달조선의 지나 지역 연결의 선봉국으로 회이(淮夷)계이며 수춘현(壽春縣) 동북에 자리 잡은 것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이때에도 우리의 영역은 남서로 산동은 물론 안휘와 강소성 등 동쪽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옛날 치우가 활동하면서 강역을 확정한 무대이며 후세 서언왕(徐偃王)의 나라도 이곳이고 서국徐國*회국淮國*엄국奄國도 여기에 있었다.   낭야성(琅耶城)은 우리 말소리 값인 가한성(可汗城)이라고도 하는데 산동성 제성현(諸省縣) 동남에 있으며 번한왕(番韓王) 낭야가 세워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


[단락 2]에 들어서는 더욱 황당하다.   아주 자랑스럽게 <이것은 무의식중에 평양에 수도가 있다고 써놓은 오류의 하나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평양은 맞다고 치자!   헌데 이 사람은 평양이란 명칭이 우리의 도읍을 가리키는 일반범칭이며 여러 차례 이동되어지는 地名임을 깨닫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이러니 이런 사람을 붙잡고 내가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입만 아플 뿐인데......하여튼!!!!!!   먼저 기록들을 살펴보자.

           도읍을 평양에서 백악산(白岳山) 아사달로 옮겼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제1 고조선  古記 인용>

白浪水(大凌河=白水 흰 물로 바로 뒤의 백산白山흰 머리산 에서 발원 함)가 능원(凌源)을 흐르는데 동남쪽의 대성자(大城子)에 백산*백수가 있다는 점이 지명추정에 참고 될 만하다.   이 백악산 아사달은 평양성이 오늘날 대동강 평양이라는 설도 있다고 기록한 일연조차 한마디 언급이 없는바 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임을 즉각 짐작케 한다.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니 지금의 송화강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의 조대기 인용>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 언덕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하였다. 속말강(涑末江) 남쪽에 있는데 이것이 곧 그 땅이다.   속말강은 혹 소밀하(蘇密河)라고 하였다.   대개 소밀蘇密*속말涑末*속말粟末은 모두 소머리란 뜻이다. <규원사화>

위 기록에서 도읍의 위치가 분명히 태백산 서남쪽에 있음을 알게 된다.   또 지금의 평양이 아님을 분명히 짐작케 해준다.   그는 <조대기>에 나오는 도읍지가 송화강이라는 신인왕검때의 사실만 고정관념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그 후에 백악산 아사달로 이도(移都)한 일은 몰랐던 듯하다.   아울러 그곳은 <규원사화>에 보이는 기록처럼 분명히 태백산 서남쪽에 있다(이의 해석을 두고 규원사화에서는 춘천*중경현덕부*동천왕의 평양으로 추정되는 요양 등 많은 異說을 소개하고 있으나 그 당시의 시대적 사고관 및 정황으로 판단한 것이므로 이는 다시 잘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저기 나오는 태백산은 백두산인데, 백두산의 인삼을 자랑하는 건 좋지만 수도가 송화강변에 있는 임금이 북쪽을 순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쪽 변경의 산에 오른다는 게 말이 되나?   이것은 무의식중에 평양에 수도가 있다고 써놓은 오류의 하나다>란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오류이다.   왜냐하면 4세 단군 오사구는 북쪽에 있던 아비가 정도(定都)한 이전 도읍지를 순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백산에 들러 인삼을 구하고 서남쪽으로 순행하여 지금의 도읍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아직도 단군조선의 도읍을 반도로 보는 [조선조 사대모화주의자]들이나 [부일궤변망상학자]들의 주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앵무새 놀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락 3]을 보기로 한다.   또 漢族의 땅으로 둔갑해 있는 중이라니?   그야말로 무서운 집념이다.   한번 저들의 지독한 사탕발림에 빠지면 그렇게도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사람은 정말로 어떤 견해를 주장하려면 오직 그 논거에 맞추기 위해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전후 기록들을 면밀히 분석하지 않는 고질적인 악습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그런 편협한 시각이 여실히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색불루> 단군의 商나라 공격은 오랫동안 각축을 벌인 단군조선의 남쪽 제후국인 람국藍國(중국 기록엔 분명히 람이藍夷로 표현되어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대목이다)과의 해묵은 갈등때문이었다.   또한 색불루가 등장하면서 商나라에 대한 공격이 거세어진 이유는 그의 단군조선 왕위 찬탈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무렵의 기록에 대한 [앵무새]와 같은 엉뚱한 해석과 곡해를 만들기 때문이다.

[갈등의 시작]

BC 1616   상군 중정(商君 中丁)이 약하자 藍侯가 商의 영토를 잠식해 마침내 회*대의 지방에 서국(徐國)과 파국(把國)을 세우고 하남성 서부 깊숙이까지 진출하였다(우리 기록)
BC 1563   중정 이후 남이가 공격을 시작하더니 거의 300여 년간 이해관계 해결을 위한 공방전을 벌였다(후한서 동이열전 70p)

           至于仲丁 藍夷作寇 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지우중정 남이작구 자시혹복혹반 삼백여년

※ 분쟁의 단초는 태무(太戊)때 서융(西戎)과의 영역문제에서 발단하여 이로부터 동구이(東九夷-동부지역 夷族)의 공격에 困하였다.

BC 1556 무렵   외임(外壬)에 이르자 비인(邳人-산동성 승현縢縣 남쪽에 근거지를 두었으며 성탕成湯이 동이계 左將 중훼仲虺를 봉한 나라)과 신인(姺人)의 세력이 흥성했다.
BC 1543 부터   하단갑(夏亶甲) 시기에는 남이(南夷*藍夷)와 신인(侁人)의 침략이 거세어졌는바 <후한서>에는 람이(藍夷)를 정벌한 것처럼 기록했는데 이는 화해를 요청해 국면을 전환한 까닭이고 이 때문에 안전을 보장 받은 다음 東夷의 본거지인 동쪽 가까운 지역으로 다시 이동해 도읍을 상(商)으로 정했다.   이어 양갑 무렵에는 단산융(丹山戎)의 줄기찬 침습에 곤하였다.
BC 1525   祖乙은 북쪽과 서쪽에 웅거하고 있던 동이가 공격해오자 대패하여 급히 경耿*형邢으로 도주했다.   다음해 庇(비)로 돌아온 후 周의 <고어>에게 빈(邠)의 땅을 주어 侯로 봉한 후 서쪽으로 진입해 오는 戎狄들을 방위케 하였다.

이때 빈(邠)지역은 동방부족이 이미 점거하여 근거지를 정착시키고 있던 추세로 주로 칠수漆水*저수沮水*위수渭水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니 빈(邠)에 겨우 발을 디딘 주(周)부족이 이에 밀리고 상(商)이 다시 비(庇)로 옮겨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이 감지된다.

BC 1401   반경(盤庚)은 속진후 다인(多忍)이 귀주(鬼州)에 침입하여 점령하자 도읍인 경(耿)을 버리고 하남성 언사(偃師)로 도망해 도읍을 은(殷-北亳북박))으로 하고 나라를 은(殷)이라 바꾸었다.   이때부터 동방족은 은(殷)의 서쪽에 있는 부족을 창을 잘 쓴다 하여 융(戎)이라 했고 주(周)에 들어서는 빈(邠)과 기(岐)를 중심으로 이족(夷族)의 명칭을 융(戎)과 적(狄*翟)으로 부르게 되었다.

商의 도읍은 8차례 옮긴 것으로 나타난다.   <죽서기년>을 보면 박亳-효囂-상相-경耿-비庇-엄奄-북몽北蒙(은殷)-말沫(조가朝歌)등으로 모두가 낙읍(洛邑)의 동쪽 하수(河水)와 제수(齊水) 사이의 남*북에 있어 분수(汾水)와 심수(沁水)의 북쪽은 단군조선의 땅으로 전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商시대 전반에 걸쳐 박달조선과의 최북단 경계는 계력(季歷)이 침공한 연경(燕京)이 있는 태원 분양현(太原 汾陽縣)까지였으며 동변(東邊)은 은허(殷墟)가 발굴된 태행(太行) 동남부 아래 지역이다(최대 강역은 동쪽으로 강저방羌氏方*북변이 삭방朔方이었는데 주周 성왕成王시까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성탕(成湯)이 하(夏)를 멸했을 때 하남성 상구(商丘)를 중심지로 하여 왕국을 세우면서 하(夏)의 유민을 고죽(孤竹)등에 분산시켰다 하였으며 영역은 東으로 강수(江水) 西쪽은 하수(河水) 南邊은 사수(泗水) 北境은 제수(齊水)안이었고 商이 망할 때까지 이 영역에 큰 변화(단 泗水 지역은 크게 밀려나는 추세를 보인다)는 없었다.    商이 원래 東夷로서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하남성 상구(商丘)와 언사(偃師) 부근에서 자립하여 그 주변지역을 지배하며 성장했기 때문에 8대 옹기(雍己)까지 東夷와의 투쟁기록이 없고 9대 태무(太戊)부터 동쪽의 江水*淮水*齊水의 夷와 和好한 기록은 있으나 북쪽의 夷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다만 저강氐羌과의 접촉이 있었음)

[갈등의 심화]

BC 1291   商의 무정(武丁)이 우리의 거수국인 귀방(鬼方-섬서성의 서북일대 지역)을 점령하고 다시 군사를 몰아 색도(索度-산서성 내몽고부근의 색륜산索倫山 너머 서북만주 일대지역)와 영지(令支)를 침공했으나 절인적(絶人跡)에게 대군을 주어 공격하게 하니 그의 신용(神勇)에 놀라 크게 패한 후 화친을 청하며 공물을 보내왔다(단군세기 21대 소태단군 蘇台檀君)
BC 1285   11월에 몸소 구환(九桓)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싸워 殷나라 서울을 쳐부수고 곧 화친을 맺었으나 다시 크게 싸워 쳐부수었다.   이듬해 2월 하상(河上)까지 이들을 추격하여 승전의 하례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회와 대의 땅으로 옮겨가 살게 하여 짐승들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단군세기>

※ 이후 BC 1280까지 무정은 귀방과의 3년간 전역을 마치고 北邊의 土方(산서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구의 하투河套 지역)*西쪽의 강방(羌方-   13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했는데 저강氐羌이라고도 함)*南部의 형초(荊楚-형荊이라고도 함)*동경(東境)의 대팽大彭과 시위豕韋를 공격했으나 결국 강역은 동으로 강황(江黃-산동성 지역 서변 일부를 한때 장악하기도 하였다)을 서로는 저강(氐羌)을 남변은 형만(荊蠻)을 북쪽으로 삭방(朔方)을 넘지 못했다.

고등(高登)은 商의 무정(武丁)이 영토를 확장하려고 대륙 내 여러 東夷系 小國을 공격하자 단군의 명으로 군사를 이끌고 진입해 격전 끝에 이를 격파하고 토벌하는 가운데 이름을 돋보이게 된다.   이러한 배경은 곧바로 아들인 색불루가 BC 1286년에 마침내 후단군조선의 님검으로 올라서는 밑거름을 만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색불루는 아비가 여러 번에 걸쳐 치룬 商과의 전역과정을 지켜보면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위치를 일탈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하려는 의도를 주의 깊게 담아두고 있다가 제위에 오른 후 가장 먼저 일격을 가하고 있다.

[색불루의 등장 배경]

BC 1289   개사원(蓋斯原-내몽고 일대) 욕살(褥薩)인 구려맥 부족장 고등(高登)이 先王때부터 전쟁 경험이 풍부한 군대를 기반으로 은밀히 군사를 일으킨 후 무정이 빼앗은 귀방(鬼方)을 습격해 멸하자 놀란 일군(一郡)과 양운(養雲)의 두 나라는 물론 다른 군장들도 복종을 약속하니 세를 몰아 산서성 북부*내몽고 중서부*몽고 등을 공략해 여러 부족들과 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동안의 전공을 들어 단군에게 번한을 다스리도록 임명해 줄 것을 청하자 후에 크게 나라를 어지럽힐 것으로 생각하여 주저하다가 거듭 청하니 마침내 허락하고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보다 못한 <말한>이 님검에 반하는 고등(高登)을 토벌하려고 홍석령(紅石嶺)까지 이르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돌리고 말았다(21대 소태단군 蘇台檀君)
BC 1286   두막루의 아들인 색불루(索弗婁)때 단군의 밀명을 받은 <말한>의 왕 아라사(阿羅斯)가 그의 횡포를 응징할 마음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海城(요령성 안산鞍山 남쪽*개평蓋平 북쪽)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   이에 색불루는 더욱 힘을 얻으니 님검은 나라 안을 순행(巡行)한다는 핑계로 오가(五加)를 이끌고 해성(海城)으로 피신해 은밀히 서우여(徐于餘)를 불러 정사(政事)를 맡길 뜻을 알리고 살수(薩水) 100리를 묶어 封하여 섭주(攝主)로 삼고 호(號)를 내려 기수(奇首)라 하였다.   불만을 품은 색불루는 사람을 보내 이를 중지하도록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자립하여 왕을 칭하였다.   신하들과 함께 수천의 군사를 사냥꾼처럼 꾸며 사냥을 하는 체 하다가 님검의 궁궐을 습격하자 소태가 나라의 안정을 위해 옥책국보(玉冊國寶-제왕과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새긴 책과 국새國璽)를 넘겨주고 말았다.        서우여(徐于餘-청아왕靑芽王 종선縱鮮의 증손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첫 왕)를 폐하니 반발해 兵을 발하여 따르는 군장들과 함께 一戰을 일으킬 태세로 도읍을 향해 진격하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색불루는 번한(番韓)의 후(侯)에 봉하는 조건으로 회유하여 싸움을 그쳤는데 님검은 아사달에 숨어살다가 세상을 떴다.

이때에 비로소 박달계의 단군 계승 정통이 단절되니 박달씨(檀君族團)의 王系가 1048년으로 막을 렸고 이를 단군의 수명이 1048년이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소태왕 즉위 52년째 해)   그리고 색불루는 자립한 후 신경(新京)에서 즉위하는데 그곳은 구리(歐里)로 비정된 바 있으며 22세 단군에 즉위한 후 신도(新都)라 하는 새로운 [아사달]로 도읍을 옮기니 단군 소태가 양위 전에 남행하여 살수(薩水-우리말로 샛강*새물이다)에 이르러 <서우여>에게 이 부근 땅을 내리고 기수(奇首)라고 한 여길 색불루가 빼앗아 자신의 도읍지로 마련한 것이다.

BC 1266   람국(藍國-侯를 검달儉達이라 함)이 제법 강성해져 고죽군(孤竹君-산해관 서남방*천진의 동북방-동으로 발해에 면하였다 한다)과 함께 여러 적을 서쪽으로 밀어내면서 남천(南遷)하여 엄독홀(奄瀆忽-산동성 남부 지역으로 곡부현曲阜縣인 옛날 엄奄지역)에 이르러 은경(殷境)에 가까운 곳에 살면서 여파달(黎巴達)을 시켜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게 해 빈邠*기岐를 점거, 그 유민들과 서로 맺어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였는데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 사이에 섞여 살게 되었다.   람(藍)씨의 위세는 심히 강성해 항산(恒山) 이남의 땅 먼 곳에까지 미치었다. <단군세기*규원사화>

여기에서 <색불루>의 商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한 원대한 전략이 돋보인다.  그럴 만한 것이 그는 아비인 <고등>을 따라 商과의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그 지역의 지형과 지세를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은 오래 앞서부터 발해만(勃海灣)의 통로(桶路)를 이용해 대륙으로 진입하는 주요 루트를 알고 있었다.   이 시기엔 동방족이 단군조선의 지원으로 서쪽으로는 산서*섬서*감숙성과 동쪽으로 이미 번한지역이 된 하북을 중심으로 산동*하남 동부*회대*강소성까지 진출하여 크고 작은 나라를 세우고 있었으며<사기*한서> 華夏族들은 하수(河水)를 중심으로 낙읍(洛邑) 근방까지를 영역으로 삼았고 나머지 지역은 夷族이 지배하여 이들을 東方之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한(漢)때까지 발해만의 ∩형 바다는 500리의 평지로 되어 있었고 대요하 상류는 동서갈래의 지류를 이용해 평지를 지나 바로 산동반도에 다다를 수 있어 그 당시 가장 편리하고 용이한 이동노선이었음을 알아야만 한다.  

[제1로] 남북만주 - 요령평원 - 산동반도 - 淮岱지방
[제2로] 열하성 화룡和龍-상곡上谷 연접의 장초지대 또는 서 요하를 이용한 태행 동쪽 통로 진입
[제3로] 열하성 남변-밀운密雲-북경의 장초지대-상도하*난하 이용 북경아래방면 진입
[제4로] 열하성 운중雲中-안문雁門의 장초지대 이용-빈*기지역-함양咸陽*낙양洛陽지방 진출

1) 그는 먼저 공취한 빈邠*기岐 지역에 장군 여파달(將軍 黎巴達)을 보내 견이(畎夷)를 품에 안아 여국(黎國-산서성 장치현의 여성黎城)을 세워 서융(西戎-견융*견이)과 함께 섬서성 중부 지역을 다스리게 하여 商의 제후들과 사이에 섞여 살게 함으로서 서변을 제압하여 동방 부족의 안전을 배후에서 책임지게 하고
2) 번한(番韓)의 람후 검달(藍侯 儉達)를 시켜 고죽군(孤竹君)과 같이 여러 차례 東進을 하려고 시도해 온 商을 급격(急擊)해 서쪽으로 밀어낸 다음 곧바로 南으로 진격해 엄독홀(奄瀆忽)에 머물러 전력을 정비해 북쪽과 동쪽에서 협격(協擊)케 함으로서 동이부족들의 보호를 위한 단단한 전위국가 체제를 완성하니 이들이 춘추시대까지 고죽*산융*영지 등으로 진하족(秦夏族)들에게 굳게 인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색불루는 九夷의 하나인 서융(西戎-견이畎夷)와 합세해 섬서성의 빈(邠)과 기(岐)를 완전히 점령하고 商의 도읍인 박(亳)과 인접한 곳에 여국(黎國-黎國은 곧 여성黎城이다: 史記 周本紀 正義)을 세워 商과 商의 제후국 사이를 차단하니 후일 이 지역에서 周와 秦나라가 일어서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여黎는 산서성 여성현黎城縣 일대로 그곳에 있던 東夷의 유민은 곧 흘달왕 때 그곳을 점령해 눌러 살았던 우리 부족을 말한다)


[갈등의 고착]

무정(武丁)이후 문정(文丁)에 이르기까지 융적의 융성과 강세가 두드러져 연경지융燕京之戎*여무지융余無之戎*시호지융始呼之戎*의사지융翳徙之戎(상당上黨에 거주)*서락귀융西洛鬼戎들이 하수(河水) 북방에 대한 연합공격(심수沁水 동쪽의 여무余無와 기耆=여黎*분수汾水의 연경燕京)으로 곤하였고 이어 정程*필畢*의거義渠의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BC 1258   조갑(祖甲)은 서융(西戎)과의 싸움에 패한 후 원조선공(猿祖先公-동이의 최고신)의 제사를 폐지하고 商왕실의 직접 조상에 대한 제사로 바꾸며 동방족에 대한 저항에 진력을 기울였다.  
BC 1198   무을(武乙)에 이르러 조갑의 독단(獨斷)에 東夷(기주융冀州戎*의거義渠*서락귀융西洛鬼戎)가 기주(冀州)와 회수(淮水)까지 상류 깊숙하게 진출하여 도읍을 상(相-안양安陽 또는 은허殷虛라 함)에 옮겼다가 다시 말(沫-조가朝歌)로 옮긴 다음 진력을 다해 이를 막으려하다 패하고 도망하는 도중에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 무을이 포학暴虐하니 견융이 변방을 침범하였다.  <후한서>
▶ 무을이 쇠폐(衰弊)하자 동이가 점차 강성해져서 마침내 회대(淮岱)땅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토에 머무르게 되었다  <후한서 동이전>
▶ 무을은 황음무도한 짓을 좋아해 천신을 모독하고 농락하는 것을 즐기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황하와 위수사이로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  <사기>

당시 막강한 힘을 지닌 단군조(檀君朝)의 위력에 역대 이래로 영토확장 등의 모든 계획이 좌절되고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지닌 땅마저 빼앗기는 상황이 계속되자 한계를 절감하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이에 대한 반감으로 천신(天神)이란 조선의 대리인형을 만들어 이를 모욕하고 농락하니 진노한 단군이 중토 내의 제후(諸侯)들에게 살해명령을 내린 듯 하다.

※ 이 무렵 商은 도읍을 5번이나 옮겨 백성의 불만이 많은 터에 색불루 때부터 도읍의 가까이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세워지면서(여국黎國등) 불안이 겹쳐 다시 남쪽의 조가(朝歌)로 도읍을 옮기고 있다.

BC 1191년부터   제을(帝乙)과 제신(帝辛-末王 주紂=수신受辛)은 스스로 제(帝)를 칭하고 동방족의 중핵지대인 회이(淮夷)를 공격하자 단군의 분노를 사서 국력의 소진으로 결국 주(周)에게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BC 1155   속진의 지방에 일부부족이 商과 연합해 우리 부락을 침입하니 <거굴지>를 보내 적장을 참살하고 궤멸시키다(속진의 지방에 푸른 몸과 누른 머리를 가진 큰 뱀이 나타나 큰 사슴을 물어 삼키니 사람들이 와서 위급을 고하므로 거굴지를 보내 참살하다- 단군세기)

帝乙때 곤이(昆夷)와 제신(帝辛)때 대수우여(大蒐于黎)*적(翟)*유소(有蘇)*고죽(孤竹)*기(耆)*우(吁)*곤이(昆夷)*여(黎)*용(庸)*촉(蜀)*강(羌)*발(髮)*미(微)*로(盧)*팽(彭)*복(濮)*밀인(密人)*숭인(崇人) - 기耆*형邢*여黎는 심수沁水 상당上黨에 산개(散開)하고 있었다.   결국 商末경에는 동방족이 태산(泰山)의 남부에서 양자강 유역까지 차지하니 商은 궁여지책으로 서쪽지역을 경략하게 되어 주족(周族)를 이용해 하서(河西)와 하동(河東)의 夷族을 침략하도록 유도하기에 이르렀다.


[앵무새]는 여기에서도 이런 정세변화조차 잘 알지도 못하면서 트집을 일삼는데 <이 무렵 남국藍國이라는 나라가 나온다.   이유립의 설정에 따르면 남국은 고죽국 옆(즉 요서 지방)에 있었던 나라다>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1) 부루단군 조에서 <처음 순임금이 유주와 영주를 남국의 인근에 두어 부루가 군사를 보내 정벌했다>   즉 유주-영주 인근이 된다(영주는 지금 요서의 조양을 가리킨다)   2) 또한 색불루 다음 아홀 때 기록에는 남국과 함께 남쪽으로 정벌에 나서서 여섯 읍을 은나라에 설치했다고 나온다. 대체 남국이 양자강 이북에 있으면 은나라는 강남땅에 있었단 말인가?   색불루 때 기록에는 남국이 고죽군과 함께 은나라 국경 가까이까지 진출했다 하고...라 한다.   이런 설정이 애초부터 잘못된 해석인 것이다.  

1) 에서 내가 앞서 이야기 하듯 틀림없이 영주營州의 약간 남쪽에 유주幽州가 있으며 그 南界는 하수(河水)에 이른다(두 州는 산동*산서*하북에 걸친다).   영주가 현 조양이라 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그래서 산동에 있던 남국의 인근에 있다 한 것이다.  또한 고죽국에 대한 비정도 아주 잘못된 인식에 의거하여 그릇되게 판단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모든 해석이 이상해지는 것이다.

※ 유주幽州는 堯때 12州의 하나요 舜때 冀州의 동북의 땅을 갈라 이름부르니 유매의 땅이라 하였다.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前燕(산서성 이석현離石縣)*南燕(산동성 당읍현堂邑縣 서남)*劉淵(治所는 離石)이 설치하였다.   영주營州는 堯 12주의 하나로 舜 때 靑州 동북의 땅을 갈라 설치하였다.  역시 후대에 들어 북쪽으로 옮겨졌는데 後趙(하북성 천안현遷安縣 서쪽)*後魏(열하성 조양현朝陽縣)*梁(호남성 道縣)*遼(하북성 昌黎縣)이다.   冀州와 靑州가 어디인지는 알 것이니 이 무렵의 유주와 영주가 산동에 있던 藍國의 인근이라는 건 자명한데 앵무새는 후대의 지명을 끌어다가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있다.

   고죽(孤竹)에 대한 모든 注들은 산융山戎*孤竹*영지令支를 같은 지역으로 보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특히 고죽을 商의 제후국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商은 河水 북쪽까지 勢를 뻗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급총주서 왕회해(汲冢周書 王會解)에 동북이(東北夷)로 분류하고 있음이 그걸 분명히 말해준다.   수경주(水經注)의 해석(漢 영제 요서태수 이야기*요서인이 고죽군 사당을 비여현에 세웠다 등)은 一考의 가치가 없다.   난하(灤河) 하류의 비여 부근은 周나라 때에도 북쪽으로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인식밖에 있던 지역이다.   맹자(孟子)에서 <백이가 주를 피하여 북해에 살았다>고 하므로 본래 孤竹은 태행산맥 줄기에 기대어 있는 나라이다.   아울러 이아(爾雅)에서도 북으로 보고 있고 제 환공(齊 桓公)이 북벌을 단행할 때 북쪽이라 말한 의미를 관자(管子)에서 대(代)부근에 이지(離枝)가 있다고 다시 확인시켜 주었는데 환공 당시 代는 구주(句注) 부근인 까닭에 代가 있는 태행산맥의 북부 즉 태원(太原)의 위쪽을 북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산융*고죽*영지는 태행산맥에 속한 요(遼) 부근에 있어야 한다(고죽에 관한 대부분의 주석들은 AD 200년 이후의 내용들이기 때문에 朝鮮이 난하에 있어 그렇게 추정한 왜곡이며 따라서 백이*숙제가 굶어 죽었다는 수양산도 하동河東 포판의 화산 북쪽인 하곡河曲에 건재하다).

2) 에서 본문을 보면 <람국藍國)이 자못 강성해져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을 쫓아내고 남쪽으로 이동해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는데 상(商)땅과 매우 가까웠다>는 기록인데 그대로 풀이하면 藍侯는 山東에서 동으로 출격하고 孤竹君은 河水 북쪽에서 동남으로 진격하여 주요 전역(戰役)을 河水지역 근처에서 치룬 듯하며 퇴각하는 商軍을 쫒아 지금의 곡부(曲阜) 동쪽인 <엄독홀-후에 엄국奄國의 주요 치소가 된다>에서 서로 만나 본진(本陣)을 설치하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商의 변경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아홀 때의 기록을 보면 <웅갈손熊乫孫을 보내 람국군(藍國君)과 함께 南征하는 병사를 살피게 하였다.   殷나라 땅에 6邑을 설치했다.   殷人들이 계속 서로 권력다툼을 하자 군사를 내어 진압했다>는 기록인데 아마도 이 무렵엔 색불루의 뜻을 이은 아홀의 명에 따라 친정군(親征軍)을 이끈 <웅갈손>이 합세한 듯하다.   그래서 南征이란 표현이 보인다.  이 사람이 왜 <대체 남국이 양자강 이북에 있으면 은나라는 강남땅에 있었단 말인가?>라고 한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는데 당연히 람국은 양자강 이북*산동을 중심으로 한 하수 남쪽까지에 있었으며 이때 商은 그 서쪽인 낙읍을 중심으로 서남쪽  에 걸쳐 北邊은 하서(河西)의 서쪽을 장악한 적인(狄人)지역에 막혀 하수(河水)를 따라 남쪽지역까지 東쪽은 여남과 안양까지로 하수(河水)를 중심으로 북쪽은 모두 이족(夷族)의 땅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단락을 나누어 보겠다.

◀ 다시 단군 아홀 때 기록을 보자.......[단락 1] <2년 을유에 남국군 금달이 청구군, 구려군과 더불어 주개周愷에서 모여 몽고리의 군사들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쳐부수고 오지에 깊이 침입하였다.   회와 대의 땅을 평정하여 그것을 나누어 포고씨는 엄에, 영고씨는 서에, 빙고씨는 회에 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에 지레 겁을 먹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주개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저 몽고리라는 것은 몽고를 가리키는 것인지라 북방의 어디를 가리킨 것임은 분명하겠다.  자, 근데 여기서 또 회와 대의 땅을 평정했단다.   여긴 언제 또 뺏겼던 걸까?   도대체 이 땅은 뺏어도 뺏어도 한족의 땅이니 이를 어쩌면 좋지?.........[단락 2]   여기서 한심한 부분 하나 이야기하고 가자.   남국의 장수 이름 중 하나가 웅갈손이다.   저렇게 보면 뭐 괴상한 당시 이름처럼 보이겠지만 한자가 이렇다. 熊乫孫. 저 갈자를 봐라. 저 글자는 가加에 ㄹ을 붙여서 만든 글자다.   즉 훈민정음 창제 후에 만들어진 글자다.   비슷한 글자로는 도에 ㄹ을 붙인 돌乭, 거에 ㄱ을 붙인 걱巪자 등이 있다.   이런 걸 사서라고...-_-;;.........[단락 3] 이 색불루, 아홀 기간을 환단고기는 한 분기점으로 삼고 있다.   이때를 기점으로 진한은 진조선이 되고, 마한은 막조선, 번한은 번조선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 무렵이 바로 기자가 동래했다는 때다.   따라서 삼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써야하겠다는 생각이 이유립에게 들었던 것이다.   이때 8조 법금도 나온다.   잘 알려지다시피 규원사화는 이 시기로 단군조선 47대가 끝나버린다.   그러나 기자조선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었던 이유립은 47대는 그대로 두고 기자 조선만 없애기 위해 재위 연대를 두 배로 늘리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단기고사는 이때 기자가 세운 것이 아닌 기자조선이 성립한 것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데, 환단고기에는 그런 사실은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단기고사에 나오는 기자 조선 창립자인 서여西余와 비슷한 이름의 서우여徐于餘를 등장시켜 번조선의 첫 왕으로 만들어놓았을 뿐이다.   이후 단기고사의 기자조선 왕명을 차용하여 번조선의 왕명을 이어가게 하다가 말미에 교묘한 수작을 부려놓게 된다.   이 점은 다음 편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환단고기에서 주장하는 이때 조선의 영토는 만주를 차지한 진조선, 지금의 하북성 일대의 번조선, 한반도를 차지한 막조선과 분조가 설립되어 있는 산동-서주의 땅이라 하겠다.   대충 이유립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의 영토관은 이랬던 모양이다.   붉은색이 진조선, 파란색이 막조선, 주황색이 번조선, 초록색이 분조-구이다.   그럼 이 땅들을 어떻게 차례차례 잃어버리는지 다음에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


[단락 1]에서 하는 주장이 참으로 몰지각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모르고 있는 걸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니 말이다.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찬찬히 설명을 해주는 게 도리인 것 같다.   먼저 아홀(阿忽) 시기의 정세변화를 정확히 이해해야 만이 이 문제의 핵심에 이를 수 있으며 정확한 판단에 기초한 올바른 분석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초기엔 별 일이 없었지만 차츰 商나라와 국경문제로 매우 시끄러웠는데 원래 東夷계 나라로 전통과 풍속이 우리와 거의 같고 나라 경계 역시 애매해 전부터 충돌이 잦았다.   하지만 새롭게 나라를 일으켜 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管境의 확고한 정립의 필요성을 느껴 색불루 때부터 전과는 확연하게 달리 여러 제후들의 연합군을 출동시키고 친위원정군을 합세케 하는 전략으로 전환하여 직접 본국에서 파견한 군신들을 임명해 다스리는 통치구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회대(淮岱) 즉 황하(黃河) 남쪽에서 회하(淮河) 중*하류일대뿐만 아니라 상류지역은 물론 황천湟川과 인근의 강하지대(江河地帶)인 사수와 그 지류들인 여수*영하*서비하*운하*회하*타하*수하에까지 이르는 지방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이 무렵부터 갑자기 淮*岱를 넘어 泗水지역까지 자주 언급되면서 徐*奄*淮國 등 제후국의 이름들이 등장하며 이는 후일 서언왕이 주변 수십 개의 소국들을 등에 업은 강대한 세력으로 발돋음하는 기록으로 여실히 증명된다).   그래서 갑자기 <그것을 나누어 포고씨는 엄에, 영고씨는 서에, 빙고씨는 회에 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에 지레 겁을 먹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임을 왜 모르는지???   <도대체 이 땅은 뺏어도 뺏어도 한족의 땅이니?>라니.........이런 무식함을 나도 어쩌면 좋을까?

1) 엄국(奄國)  중심 치소(治所)가 산동성 곡부지역으로 그 일대이며 후일 周왕조 성립 시 노(魯)나라의 땅이 된다.
2) 서국(徐國)  중심치소가 안휘성 서주(徐州)지역으로 이 지역 사람들을 古來로 서이(徐夷)라 했고 주(周)때 서언왕(徐偃王)이 매우 강성했다.(강소성 사홍泗洪*사수泗水 남쪽 홍택호洪澤湖의 서북쪽 지역)
3) 회국(淮國)  회수(淮水)지역 일대로 회수(淮水)의 하류는 안휘성과 강소성에 걸쳐 흐르는데 이 지역에 살던 동이를 회이(淮夷)라 하였다.

동이는 상 무을(商 武乙) 때부터 넓은 지역을 분할통치하기 시작하여 태산지역(岱)과 회수지역(淮)으로 양분되었으며 이때 회수지역으로 남진한 부족이 예(濊)계 서씨(徐氏)부족이었다.   이 부족은 周의 강왕(康王) 때부터(bc 1078) 九夷를 이끌고 周를 역격(逆擊)해 서쪽으로 진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아 목왕(穆王)에 이르러서는 결국 서씨부족의 팽창을 크게 우려해 동방제후의 땅을 분할해 <서 언왕>의 통치구역임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황지潢池 동쪽으로 사방 500리 땅인데 산동성 곡부曲阜 근처의 사수泗水지역은 후퇴한 후의 거주지이므로 반드시 회수와 사수가 포함된 영역이니 바로 회수 상류의 하남성 신양시 황천湟川이 황지이며 안휘성 북부와 하남성 동부 지역으로서 회수의 지류로 여수*영하*서비하*운하*회하*타하*수하등 대소 하천이 줄줄이 있는데 이 때문에 회하淮河의 또 다른 이름이 예수濊水가 되었다)

서국(徐國)은 계속 팽창해 주 여왕 때는(bc878) 괵중을 격파하고 선왕 때 소공에 명해 반격을 가했지만 오히려 패해 유왕 때 대대적인 반격을 받았으며 그 후 양자강 유역을 석권한 초(楚) 문왕의 공격을 받고 물러가 강소성 최북단인 서주시 패현에 거주했는데 산동성과 인접한 곳이었다.   다시 팽성으로 옮긴 서국왕(徐國王) 장우는 오국(吳國)에 패했으나(좌전 노소공 30년 bc 512) 그럼에도 회사(淮泗)지역은 여전히 서이(徐夷)의 근거지였다가 마침내 진시황 때 해체되고 만다(일설에 의하면 楚 문왕때 물러난 곳이 산동 남부의 팽성으로 춘추 때부터 齊의 영역이었으며 진시황 때 민호(民戶)의 역(役)을 피해 주력부족이 이동한 곳이 요동반도의 졸본천으로서 혼강 유역에 졸본부여를 세우고 있다가 후일 온조가 내려올 때 졸본부여의 서(徐)씨가 같이 내려와 여씨계(餘氏系)가 되었다고도 한다)

▶  상의 왕실이 쇠미해지자 여러 동이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후한서 서강전>
▶ 서이(徐夷)는 회사서이(淮泗徐夷)라 한다.  <후한서>
▶ 회사이(淮泗夷)를 모두 민호로 하여 분산하였다.  <사기 진시황본기>
▶ 제나라의 망명자가 요동으로 갔다.  <사기 조선열전>

[회대지역 淮岱地域]   지나대륙에서 물자생산이 풍부한 동부해안 일대를 망라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의 동방부족을 화하인(華夏人)들은 우이嵎夷*래이萊夷*양이陽夷로 부르고 춘추전국시대에 들어 서서히 노(魯)와 제(齊)에 편입되었다.    진(秦)의 통일 후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일대 동이들의 결집을 방해하는 정책을 써서 민호(民戶)로 만들기도 하였다.

[단락 2]는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한심한 부분 하나 이야기하고 가자>란 정도는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분명히 [앵무새]의 주장처럼 필사본이니 그 과정에서 벌어진 가필(加筆)이나 오독(誤讀)으로 인한 잘못의 소지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참고로 [Tip]을 하나 선사하고 간단하게 줄이겠다.   같은 사실을 <규원사화>에서는 분명하게 <웅갈손  熊乫孫>이란 人名을 그 당시 존재하였던 작위(爵位)인 웅가(熊加)인 을손(乙孫)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신바람 나서 있지 말고 다른 부분에 대한 정밀한 탐구와 분석을 해주기 바란다.   그것 하나 때문에 <이런 걸 사서라고...>하는 경망스러움은 조금 너무한 생각이 든다...... -_-;;

그리고 [단락 3]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고조선의 정세변화를 모르고 함부로 억측을 하는 듯하여 아래와 같은 충고 한 마디를 해주겠다.

          1) 규원사화의 찬자(撰者)는 새로 제위를 이은 <색불루>가 전혀 국호(國號)나 체제를 바꾸지 않고 나라를 그대로 이어간걸 보고 단군조선의 맥을 인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삼한(三韓)을 그대로 따른 삼조선체제로 존속시켰으며 새로이 관경을 조정하는 국면에서 다만 지나의 분조체계(分朝體系)를 한층 강화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 후 기자가 조선에 봉하였다는 문제도 단군조선과는 무관하다는 일관된 판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언급이 없으며 색불루 이후의 단군조선의 왕계(王系)를 고열가(古列加)까지 변함없이 연결시키는 입장을 보여준다.   다만 번한과 마한을 따로 삽입하지 않은 이유는 저술의 목적이 [단군기檀君記]였기 때문이다.
          2) 환단고기에서는(이유립의 입장이라 하니 그렇게 받아들이겠다) 그렇게 보지 않았다.   단군조선의 정통이 바로 그 시점에서 끝났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혈통주의에 입각하여 前*後 단조(檀朝)로 분리하는 입장(단군 소태蘇台와 색불루索弗婁의 치세治世 기록)을 서술 태도에서 보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그래서 규원사화의 관점과 달라진 것이다).   아마도 이유립은 내가 서두에 말한 삼조선체제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때문에 번조선과 막조선을 따로 붙여 기록하고 기자문제를 연결시키지 않는 올바른 자세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삼조선이 분립 할 무렵이 바로 기자가 동래했다는 때다.   따라서 삼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써야하겠다는 생각이 이유립에게 들었던 것이다>라는 억측은 [앵무새]의 엄청난 착각이다.   기자조선을 어떻게라도 살리려고 혈안이 된 이 사람은 여기에서 별 해괴망측한 주장을 함부로 내뱉는다(삼조선 분립 시 번조선 서우여는 1285-1225이고 箕子 東來의 계기인 殷 멸망은 1122년으로 비정되어 가장 짧게 잡아도 무려 103년 차이가 난다).   허나 기자조선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던 이유립이 이를 반증하기 위한 사료적 정확성으로 삼한-삼조선체계가 변함없는 우리의 관경체제임을 명쾌하게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시피 <규원사화>는 이런 사실을 적시하지 않은 채 단군조(檀君朝)를 이 시기에서 끝내버린다.   단군왕계 47대는 모든 사서가 동일하니 이의 모순을 없애기 위한 실마리로서 기능할지도 모르는 [환단고기]의 기록이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이에 대한 설명은 아래 [Tip]를 보시기 바란다.

          3) 단기고사도 같은 입장으로 보이나 단지 번조선을 기자(奇子)조선으로 하여 조금 달리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나 서술태도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동일하다.   즉 단기고사는 번한이 새로운 체제로 탈바꿈한 상황을 기록한 [환단고기 번한세가 하]의 번조선을 기자조선으로 이름하였다.  이는 두 저서가 동일하게 제 1대 번조선 왕을 <환서여桓西余 또는 서우여徐于餘>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후의 世系도 다르지 않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를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다만 단기고사는 막조선을 따로 기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웬 <단기고사는 이때 기자가 세운 것이 아닌 기자조선이 성립한 것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데...>라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내가 조금 당황스럽다.  이 사람은 [사대모화주의자]들처럼 기자 동래설을 철저하게 숭배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이유립도 그런 허황된 거짓을 명백히 알기에 책을 더럽힐까봐 <환단고기에는 그런 사실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저서가 동일하고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단기고사에 나오는 기자 조선 창립자인 서여西余나 환단고기의 서우여徐于餘가 동일한 인명으로 기록된 것이며 이후에도 단기고사의 기자조선 왕명王名이나 번조선의 왕계王系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조금만 정신 차리면 환해질 그런 이상스럽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며 무슨 대단한 결점을 발견한 사람처럼 시끄럽게 떠드니 오히려 자신의 무식함과 편견에 가득 찬 역사해석 태도만 잔뜩 드러냈을 뿐이다.   이 사람은 제대로 파악하려는 학문적인 자세조차 내팽개친 채 이제 노골적으로 한화(漢化)되거나 부일(付日)된 남의 집 머슴 같은 행동을 부끄러움 없이 내보이고 있다.   그래서 더 글을 계속하기엔 내 자신이 창피하고 속이 메스꺼워진다.


[Tip]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기자(箕子)문제와 단군역년 고찰

진(秦) 이전의 <죽서기년*상서*한시외전*논어*좌전> 등에서는 기자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조선에 갔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이후 <상서대전*사기>에 <周 武王이 殷 멸망 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신하로 여기지 않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한 이유는 상서대전에 원인이 있다(고힐강).   유학을 정당화하려 요*순*우*탕*문*무*주공을 성인으로 올렸는데 무왕이 신하로 商의 帝辛을 克한 것이 부담이 되어 성인으로 商의 현신들을 위했다고 할 필요성에서 미자와 비간은 큰 문제가 없었으나 다만 극히 저항적이던 기자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이 난처함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으로 달아난 기자를 봉했다 조작했으며 사마천도 이를 알았기에 꼭 기록해야하는 조선열전(朝鮮列傳)이나 무왕의 업적이 기록된 주본기(周本紀)에도 넣지 않고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그런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로보아 기자가 조선을 계승했다고는 쓰지 않은 듯하다.

1) 비슷한 시기에 저술한 <회남자*대대례기>에 이런 기록이 전혀 없으며 <서경> 周나라 편에 있는 주축세력들인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논공행상에 있어 子와 男에게는 50리 사방의 땅을 주었는데 그런 기자에게 수천리 강역의 조선의 제후나 왕이 되게 해주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書經 150p).

※ "중국은 황제 이래 천하에 100리 사방의 나라가 1만을 헤아릴 만큼 많았다고 하는데 중국의 왕제(王制一禮記)에 대해 상고해 보아도 9州에만도 173국이었다....그러나 夏*殷을 지나 周의 시대에 이르러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침략하고...춘추시대엔 주요한 나라가 12나라...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겨우 일곱 나라로 도태되었다-심팔사략 상 16p"를 보아도 백리정도 국가로 출발해서 춘추에 이르러 강대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사기색은*수경주*대청일통지>는 각기 다른 기자묘를 전하는데 모두 황하유역의 근접지점인 하남성과 산동성에 있다.

   - 기자족들은 결코 산서성 및 하남성에서 동북방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쪽인 산동성 지방으로 집결하여 영주하였음이 확인되는 유적(周의 기기명箕器銘)들이 출토되고 있다(윤무병  한국상고사의 제 문제  135P)
   - 기자족이 세운 나라는 하남성에 있는 미자의 송나라에서 식객노릇에 불과한 조그마한 지역국이다(大靑一統志 권 72  史林  87P)

3) <한서*후한서*삼국지>에서는 <상서대전*사기>의 기자와 번조선 서우여를 동일시한다.   <사기>의 기자조선설과 <사기집해>에서 사마표가 주장한 기자 이름 서여(胥餘)를 바탕으로 번조선 30대 서우여(徐于餘)로 비정하나 양자 사이에 연대의 불일치(거의 103년 차이)가 많다.
4) 商의 성씨는 子성으로 기자는 <箕 지역에 봉한 子○>라는 의미이거나 수많은 기자가 있을 경우도 있고 周 왕실 70여개 작은 나라중 하나이니 왕실영역 자체가 매우 작은 처지에서 기자조선설은 상식 밖이다.   아울러 다른 많은 기록을 보아도 周나라가 단군조선을 정벌한 기록은 단 한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정복한 殷의 수습에 골몰할 때여서 전면전을 벌일 여력도 없었다.
4) 기자조선은 춘추시대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아 존재했어도 그 이전에 멸망하였을 터이니 쟁점인 기씨조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단군조선에 귀의한(走之朝鮮) 기자가 부름에 응하지 않자 기자가 있던 지역이며 기자족의 웅거지인 산서성 태곡(太谷-太原 부근)의 기(箕)를 압박하려고 바로 남쪽 아래에 서둘러 곽(霍*藿)을 봉후(封侯)하기도 하였는데(상서대전 권3*東方學志 제15  19p*천관우 조선상고사의 제 문제  138P) 그 후 箕는 燕*晉에 정복되었다(漢書 권28 下 지리지 下*春秋 僖公 33년조)

※ 천관우는 이렇게 말한다.   신흥 周왕조가 황하 이북에 단 한군데(패邶*용鄘*위衛를 제외하고) 쐐기를 박는 전진기지로 분수(汾水) 유역의 곽(藿)을 택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적어도 周나라가 제1차로 관심을 두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위협을 느끼는 반주세력(反周勢力) 기자국(기국箕國)이 그 유역에 엄존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동방학지  15  49p)

   箕國의 위치가 고고학상 殷나라 유적의 분포에서 핵심지역이 아니고 殷을 정복한 周의 세력범위에도 들지 않았다.   아마 周의 신하되기를 거부하며 패망이 서러운 나머지 눈물을 흘린 기자의 도망을 箕國 전체의 조선에로 귀의로 보았음이 틀림없고 더욱이 그런 원수의 나라인 武王의 부름에 응했다는 것은 국가존망의 위기 상황에 몰렸다고 밖에 해석이 들지 않으므로 기자조선은 한반도나 요령지역이 아니라 周나라의 위협을 직접 받게 될 처지에 있음직한 箕國으로 보고 싶다.   그리고 이들은 후일 燕*晉에 망한 뒤 동족이 있던 산동성과 하북으로 몰려들었다.

<후한서*삼국지>는 <한서>의 8조 금법 시행설(사실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번조선 서우여가 시행한 걸로 나온다)에 기자의 40대 후 기준왕설을 추가했다.   역사 편집 순서로 보면 후한서가 늦으므로 삼국지를 단순 모방한 건 아닌 각자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두 사서에서 언급한 <8조금법과 기준왕설>은 적어도 그 무렵 번조선사가 사료로 있었다는 점을 거꾸로 입증한다.   이는 처음 <8조금법 시행설>을 주장한 漢書 당시에도 적용된다.   바로 이런 기록들이 고려나 조선시대의 창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1) <한서와 후한서>의 논리전개과정으로 보아 사기집해 당시 이미 번조선의 서우여에 대한 역사기록이 존재하여 이를 의식해 기자 이름이 <서여>라 주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2) 명시적으로 “기자 40여대 후손 기준왕”이란 표현을 사용한 <삼국지>의 저술 태도로 보아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나오는 번조선의 王代와 역사적 실체를 입증한다.

※ 고려 이후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의 영향으로 기자조선설이 추가되어 혼란을 초래했다.   <삼국유사>는 고조선(기자 포함)-위만조선을 <제왕운기>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보를 설정*제시 하여 조선시대 내내 반복되었다.

마지막으로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단군수명이 단군역년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임을 우선 주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것은 진조선의 실제 역사와 부합되는 숫자이며 [앵무새]의 <재위 연대를 두 배로 늘리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주장을 단번에 뭉개버리는 핵심문제이다.   <삼국유사>의 1908년은 정확하게 삼한-삼조선 기간으로서 단군기원(2333)에서 대부여로 국명을 바꾼(425)까지를 계산한 시기와 일치한다.   또한 ,응제시주>의 단군역년지수 주장과도 부합하고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삼한-삼조선 기간(2333-426]과도 들어맞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삼국유사>의 단군 수명 1908년 설을 통해 [환단고기] 기록의 진정성을 극명하게 확인해준다.







Mimesis (2009-04-15 01:31:49)  

조재범님의 의구심대로...지나 피가 확실한 것 같네요...  



대제국고려의증거 (2009-04-16 09:36:32)  

맹자의 초상화를 보면 얼굴이 길고 이마가 들어가고 피부가 희고 눈이 작고 찢어졌습니다. 맹자는 기록에도 동이족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공자는 자신은 동이족인 은나라의 후손이라고 했지만 그의 초상화를 보면 눈이 크고 얼굴이 검고 둥글며 이마가 튀어나왔습니다 누가봐도 같은 민족이 아닙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공자의 아버지는 은나라왕족의 후손이지만 어머니는 한족이라 햇습니다. 결국 공자는 동이족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몽골이 천하를 차지하고 계급을 나누었을때 고려인과 남송인을 분리했는데 몽골인의 눈에 보기에 구분이 쉬웠던 모양입니다.게다가 고려인을 우대하였고 원의 환관은 대부분 고려사람이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신이경(神異經)》에 이르기를,
“동방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남자들은 모두 흰 띠에 검은 관을 쓰고 여자들은 모두 채색 옷을 입는다. 항상 공손하게 앉아 서로를 범하지 않으며, 서로 칭찬하고 헐뜯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구해 준다. 얼핏보면 바보스러운 것 같은데, 그를 이름하여 ‘선인(善人)’이라고 한다

자기 민족의 훌륭한 역사를 돈과 시간을 들여 찾고자 노력하는 숭고한 사람들을 무식한 근거로 욕하는 사람들은 그 혈통이 의심스럽습니다. 뉴스를 보면 지하철선로에 빠진사람 위험에 빠진사람을 유독 우리나라사람들만이 자기 목숨까지 걸어가며 구해줍니다.이는 짱개들의 기록속에도 남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할줄아는 우리 선조의 나라인 고조선시대부터 우리민족의 특징입니다.그런 훌륭한 노력을 짱개들은 옛날부터 바보같다고 비웃었습니다.조상의 훌륭한 역사를 되찾자는데 이를 비난하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들은 아무래도 우리와 같은 조상을 모시지 않나 봅니다.고려때 귀화한 한족이 조상일지도..........

추신)대수맥님 글쓰고 나서 저장해놓으세요 안그럼 또 날라갑니다 저도 한두번 날라간게 아니라 글쓰면 저장부터 해놓습니다. 관리자님이 오류를 좀 고쳐주셨으면  



대수맥 (2009-04-20 09:20:04)  

Mimesis님 그의 글을 읽다보면 겉으로는 아주 객관적인 척하면서 교묘하게 부일사대모화관을 찬양하고 저들의 주장을 그대로 맆싱크하는걸 볼 수 있답니다. 그래서 이건 뭐...저들이 부르짖는 유사역보다도 못한 궤변망상학입니다.

대제국고려의 증거님 정말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공자에 의해서 맹아가 싹텄다는 느낌이 보면볼수록 확 들어온답니다. 그리고 도움말 감사합니다. 저도 이젠 저장부터 하는 습관이 되는 것 같아요.  



 no 
 subject 
 name 
 date 
hit
305
 “동북공정은 한반도 흡수통합 위한 中의 공작”

안원전
2006/09/22 5721
304
 “베이징大선 고구려를 한국史로 가르쳐”

안원전
2006/09/16 6365
303
 “중국 金나라 시조는 안동 권씨일 것 ”‘금조사연구’ [5]

안원전
2008/08/22 5118
302
 “지중해”가 “발해”라!!!

안원전
2006/08/10 7029
301
 “毛澤東이 모택동이지 왜 마오쩌둥인가”“원음표기 되레 국어생활 혼란 야기 ‘옌볜’ 등은 중국말도 우리말도 아냐” [3]

안원전
2008/03/03 5390
300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1]

안원전
2007/03/26 5678
299
 《黃帝故里故都歷代文獻匯典》學術研討會紀要

안원전
2007/03/27 5261
298
 『만주원류고』에 나오는 신라의 위치에 대한 고찰 [1]

안원전
2008/08/22 5573
297
 『한겨레21』길윤형 편집장에게 묻는다

안원전
2017/06/25 4387
296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 영토에 대한 이야기 세 번째...반론 [2] [1]

안원전
2009/04/25 5824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반론 [2]

안원전
2009/04/25 5467
294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이야기 첫번째...반론 [2]

안원전
2009/04/25 5648
293
 가락국기의 해모수, 대한국과 사마천/ 좌 계

안원전
2009/01/06 5123
292
 가슴 뭉클한 대한민국의 비밀

안원전
2010/07/01 4464
291
 각 국가와 각 민족, 그리고 외래종교는 본원적 제정신으로 돌아가라 ! 안창범 [2]

안원전
2008/03/09 4939
290
 강상원-박사인도유럽어족의-조상어가-되는-산스크리트어는-1만년을-간직한-한반도-사투리다

안원전
2014/09/24 3781
289
 강소성(江蘇省) 숙천(宿遷)의 연개소문 外(신완순)

안원전
2009/01/30 5283
288
비밀글입니다 고고학 다운로드

안원전
2002/01/13 6749
287
 고고학적 발굴과 중국 사료로 추적한 고조선의 비밀-“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안원전
2006/10/13 6513
286
 고구려 시조 주몽이 한고조 유방 건국 도왔다

안원전
2007/06/16 6594
285
 고구려 을파소, 케인즈와 피라미드 경제학

안원전
2009/01/06 5007
284
 고구려 최대영역은 동북아시아 전역

안원전
2005/01/21 8305
283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될 수 없는 7가지 이유

안원전
2006/11/04 5950
282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될 수 없는 7가지 이유

안원전
2007/04/14 5583
281
 고대 차이나의 왕들은 모두 동이족&

안원전
2006/03/29 9641
280
 고려산(高麗山)의 전설 -KaoLi Shan 1

안원전
2006/10/02 7350
279
비밀글입니다 공백

안원전
2002/01/13 7064
278
 공주사대 역사교육과 동문들 "이명희 교수는 학교를 떠나라"

안원전
2013/10/04 3994
277
 광동성(廣東省)에는 3세 가륵 단군의 현손 번우씨가 세운 번우국(番禺國)이 현존

안원전
2009/10/21 4717
276
 광복군의 결의

안원전
2014/10/26 3319
275
 구당서 신당서 의거 동이의 위치지도

안원전
2002/03/08 6711
274
 국조 단군왕검의 탄신일을 잊고 사는 대한민국 (1부)

안원전
2017/06/26 3833
273
 김구선생 홍익 대한민국의 꿈

안원전
2010/04/25 3970
272
 김정란, "'여자 박정희' 박근혜에게 묻는다" "당신이야말로 대장 간첩의 딸 아닌가" "한나라 해체해야" [1]

안원전
2004/12/11 7135
271
 김정일 발언, 공룡 중국 핵분열 -소련 붕괴 주역 美, 대 중국 쪼개기 [1]

안원전
2006/08/25 6854
270
 나라 망신의 주범 박근혜와 한심한 언론들

안원전
2016/07/03 3481
269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

안원전
2010/05/29 5949
268
비밀글입니다 내부로부터의 방문자

안원전
2002/01/12 8022
267
 노론·친일파 세상과 박노자, 한겨레

안원전
2017/06/25 3736
266
 누가 한국사를 왜곡했나?

안원전
2009/04/24 4982
[1][2][3] 4 [5][6][7][8][9][10]..[11]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 Styx

?/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