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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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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 영토에 대한 이야기 세 번째...반론 [2]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 영토에 대한 이야기 세 번째...반론 [2]



  대수맥 (200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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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초기인 진 헌공(晉 獻公) 때도(BC 677-651) 최북단 국경이 곽산(霍山)부근 이었고 汾水를 따라 河水와 만나는 지역의 동쪽과 심수(沁水)의 서쪽지역 즉 하수*분수*속수*회수로 둘러싸인 지역이 晉의 영역이었으므로 霍山의 북쪽은 韓侯의 땅이고 분습(汾濕)의 서쪽 땅인 포(浦)와 굴(屈) 부근에는 산융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국어 진어晉語>

이 무렵에도 삭방(朔方)은 황토지대인 경수와 낙수의 북쪽지대를 말하였으며 유(幽=幽州)는 서주시대엔 기(岐=岐邑)의 북쪽인 洛水 상류 북쪽에서 소여기(昭余祁)의 북방으로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BC 707   장 조을(將 祖乙)을 보내 곧바로 연(燕)의 도읍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영구營丘) 남쪽의 교외에서 싸운 후 승리를 알려왔다  <단군세기>
         釐(리)공 25년 北戎이 齊를 침공하자 정(鄭)나라에서 태자 홀(忽)을 보내 도와주었다.  <사기 제태공세가>
          山戎이 연나라(당시 태행 부근)를 넘어서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희공은 나라의 교외에서 싸웠다.  <사기 흉노전>
          노 환공(魯 桓公) 6년(BC 707) 北戎이 齊를 공격하자 齊侯는 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鄭太子 忽이 군대를 끌고 가 齊를 구원했다.   6 월에 北戎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北戎의 장수인 대량(大良)과 소량(少良) 및 갑수(甲首) 300명을 잡아 齊에 바쳤다.  <춘추좌전>

이 시기 전역상황이 우리 기록과 잘 맞아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로서 [환단고기]의 진정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하지만 몇 나라가 연합하여 겨우 대적하면서 포로 몇 명을 잡은 것을 마치 齊와 鄭의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록한 춘추필법을 부렸음을 이어지는 사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여러 제후들이 北戎에 대항해 齊를 수비했기 때문에 齊에서는 구원하러온 제후들에게 가축과 곡식을 보내고 魯로 하여금 서열을 정하게 했는데 鄭은 뒤로 밀려났으며 태자인 忽은 전공이 있는데도 뒤로 밀려나 이를 분하게 여겼다.  <춘추>

전공(戰功)에서 鄭나라가 밀린 것을 보면 실제 北戎과의 전쟁에서는 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모든 문헌에서 朝鮮을 北戎*山戎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임혜상은 <중국민족사>에서 진(秦) 이전엔 동방족을 山戎과 北戎으로 호칭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齊환공의 등장과 세력 강화]

1) 래국병합(萊國倂合)

제 환공이 관중에게 공격의 순서를 물으니 관중이 계책을 내어 “萊가 齊의 창업주인 강태공 때부터 가장 걱정거리로 먼저 침이 마땅하고 또한 萊人은 용감하나 왕이 어리석어 힘으로 이기기보다는 꾀를 써야 망치기 쉽다” 하며 황금으로 萊의 곡식과 나무를 샀는데 萊王이 깨닫지 못하고 “황금은 나라의 보배이거늘 齊나라의 군신들이 이같이 함부로 쓴다” 하고 백성들을 모아 나무를 베고 곡식을 모아 팔았다.   얼마 안 되어 萊人들이 먹을 곡식과 땔나무가 없어 齊에게 다시 사려 한즉 갑자기 수출을 금지시킨 후 궁핍해지자 군사를 발해 멸하였다.

   ▶래국(萊國)이 신하인 자맹(子猛)의 말을 듣지 않자 齊가 이를 병합해 버렸다<설원說苑 정련正諫편>
   ▶齊 간공簡公(BC 485-481)이 여자들과 함께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기 제태공세가>란 사실은 이미 래이(萊夷)가 齊나라에 합병되었음을 의미한다.

2) 연합군의 결성

   ▶단제는 병력을 보내 須臾(하북성과 산서성 사이의 부족)의 군대와 함께 燕을 정벌케 하니 燕이 齊에 위급함을 알려 齊가 대거 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 대패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  <단군세기>

   ▶齊 桓公23년 山戎이 燕을 정벌하자 燕은 齊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桓公은 燕을 구하기 위해 마침내 山戎을 쳐서 孤竹에 이른 다음 돌아왔다.  <사기 제태공세가>
   ▶44년 뒤 산융이 연을 치자 연은 제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치자 산융은 도망했다.  <사기 흉노전>
   ▶제 환공이 장차 산융과 고죽을 치면서 사람을 시켜 魯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노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놓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신하들이 말하길 “군대가 수천리를 가서 蠻夷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자 왕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서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설원說苑 권모權謨편>
   ▶魯 莊公 30년 겨울에 제와 노가 만나 산융을 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산융이 연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춘추 좌전>

※ 여기에서 <위략>은 산융*북융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솔직하게 조선이라고 기록해 후에 그 자료가 멸실되어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방족은 중국 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한때 서쪽의 양揚*거拒*천泉과 함께 東周의 서울인 낙양에까지 침입했는데 그 주력은 조양*상곡*우북평 지방의 구려맥계 번조선(番朝鮮)으로 태행산에 있는 당산(唐山)지방의 고죽국 및 동쪽의 영지국과 연합해 남쪽의 齊와 魯를 위협하였다.   아울러 태원의 산융은 지속적으로 燕을 공격했는데 1차(bc 7c)는 燕을 치고 齊까지 진격해 제교(齊郊-제외곽인 변방지역)에서 싸우다가 물러섰고 44년 후 2차로 燕을 멸하기로 작정하고 공격하다 제환공의 진하연합군이 오자 물러간다.

   ▶1차전 때 조선의 명을 받아 산융이 연을 멸하니 고조선이 중간의 연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제환공과 무역을 했다 (이때 조선의 국호가 처음 나오게 됨)   <관자>

3) 진하연합군(趙*齊*衛*許*魯 등)의 북방 진격

제 환공이 북벌한 山戎은 북적北戎=견이畎夷=구려맥句麗貊으로 분수汾水*심수沁水 지역에 있었고 이곳이 당시의 遼東이며 <설원*관자>에 요수를 건넜다 한 요수가 태행산맥의 요수를 말하는데(춘추시대엔 遼水가 太行의 遼지방에 있었음) 이 시대의 북쪽 개념은 산서성과 태행산맥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晉나라 부근에 적狄*적翟*호胡*맥貉*도하屠何가 있고 이들은 맥국(貊國)에 속했으며 또한 북쪽에 산융*영지*고죽이 있었는데 이들도 예맥이다.  <설원*관자*국어>

<관자>에 보면 영지(令支)의 아래에 부산(鳧山)이 있고 부근에 고죽(孤竹)이 있으며 제수(齊水)와 河水가 만나는 곳인 태행산맥의 남쪽 끝에 진(晉)의 석침현(石沈縣)이 있는바 제 환공은 이곳에서 太行과 비이(卑耳)를 넘었다 했으니 孤竹과 遼水가 태행산맥에 속하며 卑耳계곡과 접한 곳엔 맥(貊)족이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비이에 강이 있는데 요수이며 비이산과 비이계곡이 있다.  <설원*관자>

孤竹을 벌하기 전에 건넌 강이 遼水이고 遼는 太行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동쪽에 세이천(洗耳泉-허유가 귀를 씻은 곳으로 卑耳?)이 있는데 齊水와 河水가 만나는 곳의 북쪽으로서 이곳 부근에 로潞*여黎*요遼란 지명이 있음은 물론 遼에서 太行쪽이 동쪽이 되어 지명이 요양遼陽=요양轑陽 이니 遼東과 같아 여길 흐르는 강이 遼水이다.   바로 이때 <요>가 태행의 중부에 있으며 晉의 북쪽이 되므로 이곳에 살던 부족이 孤竹이고 遼의 북쪽과 남서쪽에 山戎이 거주함이 들어맞게 된다.

또한 무종(無終)이 bc 542년 晉나라와 太原에서 싸웠는데 무종은 중산(中山)으로 만일 난하에 있었다면 2000리를 달려온 것이 된다.   사실 태행산맥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산맥을 넘어 쉽게 태원까지 침략한 것으로 결국 태행 서쪽의 遼와 동쪽의 中山이 遼東이고 이 지역에 산융과 영지와 고죽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晉의 분수 서쪽인 태원의 아래쪽에 이굴(二屈)이 살고 있다.  <국어>
   ▶bc 569 위강이 5가지의 이점을 말하며 晉과 무종(적*융*산융*적적) 과의 화친을 역설하였다.   그 중에서 晉이 무종의 세력을 얻음으로서 중국의 제후를 호령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고 하였다.  <춘추좌전>
   ▶중산의 사람 中人은 종인(終人)을 말한다.  <회남자 도응훈道應訓>

이지離支=영지令支는 태행의 북쪽에 위치한 대(代)의 부근에 있었는데 代는 춘추 시 晉의 북쪽인 구주(句注) 즉 항산(恒山)아래 태원 위쪽인 호타수 상류에 있었으며 전국 땐 역수(易水) 상류 즉 상산(常山)의 북쪽에서 항산(恒山)에 걸쳐 거주지를 이동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따라서 齊 환공의 북벌 경로는 晉의 북쪽과 태행산맥 줄기를 따라 행해졌으며 그곳에 산융*영지*고죽이 있었는데 환공21년(bc664-663)엔 산융만 벌했을 뿐이고 bc 661-656 사이에 영지와 고죽 순으로 북벌을 해 bc 650년에 완료되었으나 다만 일시적이었다.

   ▶노 장공과 제환공이 겨울에 만나 산융이 연을 침범하므로 이를 벌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한 후 그 해 겨울에 산융을 공격해 벌하고 다음해 봄에 노획품을  노 장공에게 갖다 주었다.  <춘추좌전>

왜냐하면 제 환공 23년(662)에 산융이 다시 燕과 형(邢)과 위(魏)을 치고 있는데 이 때 형과 위는 조성(趙城)의 북쪽에 있으므로 연(燕)도 계(薊)가 아닌 조성(趙城)에 있던 남연(南燕)을 친 것이다.

   ▶狄人이 형나라를 치니 관경중(管敬仲)이 제 환공에게 말해 형을 구했다.  <춘추좌전>  -여기에서 “구했다”는 말은 이미 망한 형(邢)을 齊 땅인 이의(夷儀)로 옮긴 것을 말함

2차 산융의 침입시 구원군으로 燕에 간 환공(이름:無知)은 산융이 물러서자 여세를 몰아 고죽국을 침입했으나 비이곡에서 매복해 기다리고 있는 조선계의 군세가 자못 흉험함에 놀라 一矢도 쏘지 못하고 황급히 퇴각해 놀란 환공이 정신을 가다듬고 4년을 군비축적에 힘쓴 후 고죽국을 침공해 비로소 멸하였다(사기 흉노열전).   허나 이때부터 번조선의 복수전에 내내 시달림을 받는다.

환공 7년에 산융이 다시 燕을 공격하자 이를 격퇴한 후 환공 10-11년 사이에 북진을 감행하여 산융과 영지를 격파(관자 권8 王言 제21)하였지만 단군조선의 원군이 도착해 대패한 후 본래 지역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렇듯 桓公의 진하연합군(秦夏聯合軍)은 초기의 승세를 굳히지 못하면서 역공(逆攻)의 전술에 걸려 전세가 불리해지자 魯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때 魯에서는 도와준다고 약속하고 군대를 보내지 않자 할 수없이 화해를 구걸하며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귀로(歸路)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魯를 치려고 했으나 관중(管仲)이 말리는 바람에 분풀이를 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아직은 勢의 약함을 절감하면서 연을 회복시키는 걸로 위안을 삼고 계속 응징을 받지 않으려면 燕의 시조 소공(召公)이 했던 것처럼 다시 올바른 정치를 펴고 초기의 심정으로 다시 周왕실을 존중하라는 충고를 하였다.

   ▶옛 召公의 덕정을 다시 바로잡고 옛 周나라 成王과 康王때와 같이 周 왕실에 공물을 바칠 것을 명하였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 모두 제나라를 따랐다.  <사기 제태공세가>

   ▶燕나라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天子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는데 그 조공품이 成周때와 같았다 그리고 연 장공에게 召公의 법도를 다시 세우고 잘 따르도록 했다.  <연 소공세가>

아무튼 제 환공이 산융을 벌하고 할연(割燕=복연復燕)을 했는데(bc 650) 韓侯가 멸한 北燕과 산융이 멸한 南燕을 합친 후 召公의 옛 직(職)을 잇게 한 것이다.   당초 소공을 봉한 北燕의 땅인 태원 아래쪽의 소여기(昭余祁)를 일시 탈환해 주었으며 그 후 춘추 말과 전국시대를 맞이해 진(조양자趙襄子)의 북방정책 추진과 조(무령왕)의 북진정책으로 밀려 동천(東遷)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이르러 연 문후(燕 文侯) 때의 강역은 趙와 晉의 북방에 있으므로 호타하와 易水의 하류가 아닌 상류 즉 恒山의 동쪽에 있던 易水의 상류와 서쪽에 있는 호타하의 상류지역으로 이때 燕의 서쪽은 운중과 안문이 되고  북쪽에 임호와 누번이 있는 태행산맥 북의 구주부근과 현 대동시 주변에 자리함

산해경 북산경 북차삼경은 태행산맥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산과 여기서 발원해 나가는 강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시작은 洛邑 위쪽의 河水 즉 서쪽은 왕옥산에서 동쪽은 맹문에서 시작해 태행산맥 북쪽인 안문산(서쪽)과 갈석산(동쪽)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산해경은 갈석산을 태행의 북단으로 인식하고 이것은 <사기 소진열전>의 “남쪽으로 안문과 갈석의 풍요함을 차지한다”는 말과 일치하며 燕山과 燕水가 있는데 북차삼경의 40번째 산이고 경산과 청장수 다음에 기록되고 있으므로 이 부근이 태행산맥을 따라 춘추 때 중북부에 있던 遼지방 부근이고 태원부근(晉陽)이며 태행의 서쪽 측면이 되어 초기 燕의 위치임이 명백하다.

BC 661년부터 제 환공의 북벌에 대한 대대적인 동방부족의 역습이 시작되었는데 魯 민공 2년(bc 661)에 狄人이 위(衛)를 형택(熒澤)에서 괴멸시키자 제*송*노가 성을 초구(楚丘)에 서둘러 쌓은 다음 衛의 도읍을 옮기게 하였다.   이 시기에 燕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으며 魯 희공10년(bc 650) 狄人이 온(溫)을 멸하고 그 해 齊와 허(許)가 북융(北戎)을 치다가 이득이 없자 희공 11년에 관이오(管夷吾)를 융(戎)에 보내 화평을 청하고 있다(적=북융=융)   이어 노 희공 13년(bc647)에 초구(楚丘)에 있던 衛 공격*14년 정(鄭) 공격*15년 晉이 분수 남쪽 곤도(昆都)에서 참패를 당하기에 이른다.

20년 후(bc 636년 경) 융적(戎翟)이 낙읍(洛邑)의 주 양왕(周 襄王)을 공격하자 정(鄭)의 범읍(氾邑)으로 도망한 후 진(晋)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세가 강해 병을 발하지 못하고 육혼(陸渾)까지 내어주다가(단군조선은 이를 자대子帶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14년 만에 BC 622년에 진 문공(晋 文公)의 도움으로 탈환해(한서 흉노전 939P) 환도하였다.   이때 진(秦)이 강성해져 목공(穆公)이 서융8국(西戎8國)을 지배하니(한서 흉노전 939P) 드디어 BC 623년 서방백(西方伯)으로 올라섰으며(십팔사략 166P) 이 무렵 기산岐山*양산梁山*경수涇水*칠수漆水의 북쪽에 의거義渠*대협大劦*오씨烏씨*구연朐衍의 융(戎) 과 晋의 북쪽에 임호와 누번 그리고 燕의 북쪽에 산융이 있었고 100년 후(BC 599) 견디지 못한 진 도공(晋 悼公)이 위강(魏絳)을 통해 戎狄과 화의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한서 흉노전 939P).

[齊*趙의 비상飛上]

환공 23년에는 단군조선의 세력이 내부사정으로 잠시 물러간 틈을 이용해 예맥조선의 접경에 비로소 다다르니 이후 燕과 齊가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관자).   그 후 북쪽의 안정을 기반으로 산동성의 회(淮)와 대(岱)지방을 공략해 서국(徐國)과 서국(舒國 -bc 656)*래국萊國(bc567)*산동성 남부에 있던 수국遂國(bc682)까지 멸하여 영토가 1000리의 방국(方國)으로 커지게 된다.   잇달아 근국(根國)과 모국(牟國)은 노(魯)가 공취하고(bc 617) 산서성의 여국(黎國)은 진(晋)이 공략하니 이때에 산동의 엄국(奄國)등 부여계 8 國이 멸망하였다.   이를 두고 진하인의 史書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관중이 제나라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어 이적을 물리치는 등 중국을 바르게 하지 않았다면 중국인들 모두는 옷섶을 왼편으로 하는 동이인이 되었을 것이다.  <주자가 주해한 논어>
   ▶제환공이 현명한 재상  관중과 명장 성보(城父)를 얻어...조*위*허*노 등 10여국을 통솔하여 연을 구하며 태행산을 넘어 불리지국을 격파하고 연을 지나 고죽을 이긴지라...중국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을 얻은 고로 공구씨(公丘氏)가 관중의 공을 찬양하여 가로되 미관중오기피발좌임 微管仲吾其被髮左袵이라 하니 피발은 조선의 편발(編髮)을 가리킨 것이요, 좌임은 조선의 좌편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상>

BC 450  산서성 代縣의 서북쪽 인 구주산(句注山)으로 숨어들어 기습한 조양자(趙襄子)에게 代가 정벌되어 드디어 濊(번조선)와 인접하게 되었다(십팔사략 상 110P*사기 흉노열전).

이 무렵 趙나라가 대와 句注山 지역까지 북진하고 魏나라가 河西*上郡지대로 진출함으로서 드디어 戎(단군조선)의 경계와 접경을 이루게 되었다(사기 흉노열전).   이 시기 단군조선이 갑자기 힘을 쓰지 못하고 쇠퇴를 보이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43세 단군 물리(勿理)의 재위 때로서 속칭 융안(隆安)의 사냥꾼이라는 우화충(于和沖)이 스스로 장군을 칭하면서 오랫동안 서북쪽에서 웅거하며 할거하다가 마침내 무리 수만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키는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던 시기였다(환단고기 단군세기).

   ▶융안(隆安)의(서쪽 내몽고 일대) 사냥족 우화충(于和沖)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무리 수만을 모아 서북쪽 36군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兵을 파견했지만 이들을 물리치지 못했다......겨울에 적이 도성인 백악산 아사달을 포위하고 급히 공격하니 막조선 좌현왕 가리(加利)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을 왔다가 반란군의 화살에 맞아 죽으며 대패하면서 임금은......해두(海頭)에 내려가서 거주하다 세상을 떴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 구물(丘勿)이 어명을 받고 병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했으며 이에 구지(九地)의 군사가 그를 따르니 동서압록(東西鴨綠) 18城이 모두 병력을 보내와 원조하였다.  <단군세기>
   ▶3월에 큰물이 반란군의 도성까지 밀려 들어와 적병이 큰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丘勿이 병 1만 명을 이끌고 배를 타고 기습 공격해 이들을 정벌하니 적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괴멸하여 마침내 두목인 우화충(于和沖)을 벨 수 있었다......3월 16일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단(壇)을 쌓고 제천(祭天)한 다음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했으며 나라의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치고 三韓을 三朝鮮으로 개칭하였다.  <단군세기>  

□  일진일퇴의 치열한 각축전(戰國시대  bc 401-222)

1) 東夷系의 後退와 再整備

전국시대 중엽에 이르러 대륙에 진출한 고조선의 선발 부족은 고조선의 영향력 약화로 華夏의 전위국가들의 연합된 세력에게 차츰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이 무렵 단군조선은 두 번째의 대격변 시기로서 우화충(于和冲)의 亂으로 득세한 구물(丘勿)이 새로운 단군으로 올라서는 정변기(政變期)였다.   때문에 삼조선과 제후(諸侯)들의 편 가르기로 인한 국세의 약화로 지배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융(驪戎)과 견융(犬戎)은 진(秦)에게 쫓기고 육혼(陸渾)의 융(戎)은 진(晉)에게 멸망하고 만씨(蠻氏)의 戎은 초(楚)에게 멸하고 이락(伊洛)의 戎도 진(晉)에 항복하고 산융(山戎)은 齊와 燕에 밀리며 적적계(赤狄系)인 동산東山*고락씨皐落氏*장구廧咎의 여로씨如潞氏와 갑씨甲氏*유호留呼의 탁씨鐸氏*백적白狄인 비고肥鼓등은 진(晉)에게 정복되었고 역시 백적(白狄)인 선우(鮮虞)는 조(趙)에게 토멸되고 래이(萊夷)와 개이(介夷)는 齊에게 근(根)과 모(牟)는 魯에게 회이(淮夷)는 秦 통일시 흡수되어 만리장성 서쪽에 번조선과 부용들만이 외로이 남았는데 그 후 秦이 이윽고 의거(義渠)를 굴복시켜 품에 거두자 동서 양쪽의 날개를 상실한 번조선이 약해졌다.

※ BC 644년 秦은 齊와 싸워 하서(河西)의 땅을 얻어 최초로 황하에 이르렀는데 이 때 차지한 기서(岐西)지방은 BC 2000년부터 고조선계 부여족이 서쪽으로 빈邠*기岐지방에 들어가 하 태강(夏 太康)이래 300년간 싸워 지킨 곳으로서 북변에 넓게 거주한 기(岐)의 양산(梁山)과 칠(漆)의 북방에 있던 의거義渠*진晉의 북쪽에 있던 임호(林胡)와 루번(樓煩)*태원지방 燕의 북쪽에 거주한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었다.

   ▶BC 659년 진의 목공 때 戎王이 요여(繇餘)를 파견하자 미녀와 악사 2인을 답례로 보냈으나 융왕이 기뻐해 끝내 돌려 보내주지 않았다.   드디어 戎을 쳐서 12國을 얻고 천리의 땅을 빼앗으니 西戎에 대한 패업이 이로서 이루어 졌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춘추와 전국시대를 관통하며 꾸준하게 강맹한 세력으로 나타나는 산융(山戎)이란 제후국에 대해서는 특히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周가 봉한 北燕과 南燕을 멸할 정도로 큰 힘을 가졌는데 이 당시 秦夏人들은 북방의 동방족을 맥(貊)으로 동쪽은 예(濊)로 부르기도 하였는바 貊의 주력이 山戎으로서 태행산맥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벌하면 山戎*北戎*戎이라 부르고 서쪽이나 남방으로 위세를 펼치면 적狄*적赤*적翟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조趙와 동호東胡가 땅을 맞닿았다>함은 서남 해변을 끼고 예수豫水=예수濊水까지 東夷의 땅이란 말로 조(曹) 동쪽의 河인 박락지수(薄洛之水)를 건너 바다 사이에서 조선朝鮮*요동遼東까지 번조선(番朝鮮)이 서기전 273 까지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아무튼 번조선(番朝鮮)은 수세기 동안 燕을 압박했으며 진 헤왕(秦 惠王)의 사위인 역왕(易王)이 秦을 업고 거만하자 이를 정벌코자 하려고 했을 정도의 국세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 대부(大夫) 례(禮-예羿가 後에 변한 명칭)가 간하여 중지했으나 그 후 燕과 朝鮮과의 전쟁에서 패한 燕이 우북평(영평부永平府) 어양(北京서쪽) 상곡(산서성 대동부大同府)을 다시 뺏기면서 칭신(稱臣)한 후 태자를 볼모로 보내었다.

조(趙)에서는 조양자(趙襄子)가 구주(句注)를 넘어 대(代)를 파하고 호맥(胡貊-번조선으로 서쪽 경계가 태원 동북부)과 접경했고 이어 <무령왕>이 임호와 누번을 공략해 대代-음산陰山-고관高關까지 축성한 뒤 새(塞)로 만들며 운중雲中*안문鴈門*대군代郡을 설치하였고<사기> 위(衛)도 뒤질세라 서하와 상군에서 戎과 접경했고 진은 소왕(昭王)때 의거융왕(義渠戎王)의 亂을 극복한 후 농서瀧西*북지北地*상군上郡을 취한 후 장성을 쌓고 있다.   연 또한 진개의 역으로 5郡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았지만 곧 원래의 강역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齊는 전단(田單)이 제수(齊水)부근에 살던 적인(狄人)을 벌하자 동방부족이 齊水 북쪽 천승현 지역으로 이동해 가고 북쪽의 조선령(朝鮮領)은 燕이 침략하므로 마침내 발해를 따라 동해까지 말발굽형의 지역을 고수하게 되는데 이 무렵 舊 황하 남북은 창해군(滄海君) 남려가 지켰으며 북쪽은 난하(灤河) 서쪽지역에서 어양까지 요동(遼東)이었고 무종(無終)에서 남쪽으로 舊 황하 즉 고하(沽河)하구까지가 낙랑(樂浪)의 지역이었다.

※ 이 시기 지명고증의 좌표로서 특히 주의할 점은 <25사 지리지와 여러 중국고지도中國古地圖>를 보면 당시 조선(朝鮮)의 습수(濕水)가 있던 산서성 항산(恒山)일대를 後代에 북평(北平)이라 했으며 明때에야 비로소 현 북경(北京)을 북평(北平)으로 부르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燕은 진개(秦開)의 役 이후 朝鮮과의 경계를 만반한(滿潘汗)으로 삼았는데 <반한>은 반한현潘汗縣=번간현番干縣이고 만(滿)은 보정부 만성(滿城)이니 영정하 상류가 번한(潘汗)이고 역수(易水) 상류지역이 만성(滿城)이므로 이때의 요수(遼水)는 상건하와 영정하이며 이 흐름의 중간인 영정하 동북에 <번한>이 있어 진개가 침략한 요동이고 남서쪽이 요서이다.   하지만 비록 진개가 동으로 번조선을 침략했으나 燕의 동쪽경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역시 요동임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강성함을 보이던 燕 소왕이 齊의 70여성을 뺏을 때 진개가 요동을 뺏은 것이어서 齊의 땅을 다시 잃을 때 번조선의 대공세로 失地를 회복했으며 이때 진개는 붙잡혀 죽은 듯한 기록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 특기할만한 사실은 요동의 명칭인데 춘추 이전엔 일정한 지역을 말하였으나 그 후로부터 진하(秦夏)세력의 동쪽 끝을 칭하는 보통명사화 되었다는 점이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秦夏영역의 점진적 확대는 동쪽을 요동이라고 一般稱化 시키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로서 동방족의 이동과 밀접한 관게를 이루어가면서 요동의 위치도 이동되어간다는 걸 항상 주의해야 한다.

   ▶이때 齊의 북방 燕의 동남방에 있던 적狄이 예濊이며 황하 하류 부근에 살던 예濊와 합쳐 창해군과 한사군의 일부에 속하게 되었다.  <수경*전국책>

戰國 동란기에 조趙*제齊*연燕 등의 나라에서 수많은 유민이 단군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고조선의 경제력이 월등히 우수했고 나라가 안정되었으며 이것을 그들이 충분히 알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좌이다.   참고로 번조선(番朝鮮)을 춘추까지는 發조선이라 하였다(管子에서 海內의 북쪽을 發조선으로 인식한다)   그후 趙 무령왕과 晉의 북방정책이 시작되면서 발조선이 발식신(發息愼)과 발조선으로 교차하다가 서쪽이 胡가 되어 匈奴와 합쳐지면서 동쪽을 따로 東胡라 부르게 된다.   결국 秦*漢 교체기에 이르러 북방의 貊과 동쪽의 濊가 합쳐져 예맥조선濊貊朝鮮*진번조선眞番朝鮮이 되어 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조(趙)는 무령왕(bc325-299)에 이르러 위세를 떨친다.   BC 5C 중엽까지 代 지역엔 胡貊(東胡)이 거주했고 BC 4C 말-3C 초엔 임호와 누번아 나타나며 이 때 北夷가 계속 趙의 북방에 육박해 오던 추세였다.   이때 북방에서 趙와 땅을 맞대고 있던 東胡가 출현하는데 단군조선계로서 상당히 强國이었음을 의미하고 BC 273년에 東胡와 代를 몰아냈다 하니 그 전에는 趙나라 동쪽의 河와 박락지수(薄洛之水)를 건너 바다사이 곧 동북쪽의 조선*요동으로 이어지는 땅엔 東胡가 그 북방에 조선*요동이 있었으나 BC 273년에 비로소 東胡가 조선*요동 쪽으로 代에 있던 胡들도 조금 북쪽으로 물러간 것임을 알게 된다.   趙 혜문왕이(bc294) 燕에게 막(鄚)과 역(易)땅을 준 이유도 두 나라 사이에 낀 강한 胡를 치려고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는 비의(肥義)와 5일간 천하를 논하고 서하(西河) 옆 황화산(黃華山)에 올라 루원(樓元)을 불러 <中山(常山 아래 호타수 상류)은 우리 뱃속에 있는 혹으로 북쪽에 燕(태행 북쪽 馬邑과 常山 사이)과 동쪽에 胡(번조선)와 서쪽에 임호와 누번은 물론 晉과 韓의 변방이니 우리가 강병을 길러 나라를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사직이 무너지니 어찌하오.   비록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다 하여도 胡 땅인 中山을 꼭 차지하고 말겠오>하며 호복(胡服)을 따라 입었으며 이를 입기 싫어하는 공자 成의 집에 찾아가서 <상산常山에서 대代와 상당上黨까지 동쪽은 燕과 東胡와 맞닿고 서쪽으로는 누번과 秦과 韓의 변방이 있으니 저는 이제부터라도 말 타고 활쏘기를 익히지 않으면 물을 끼고 사는 사람들과 황하와 박락수薄洛水를 어찌 지키겠습니까?   그래서 배가 쓸데없는 저는 말을 타고 활을 쏘아 三胡(임호*누번*동호)와 秦*韓의 변두리를 지키렵니다“ 한 후 스스로 胡服을 입고 士大夫를 거느리고 서북의 胡 땅을 쳤다.  <조세가趙世家>

2) 燕과 趙의 북방공동방어전략

燕 소왕이 趙와 역토(易土)해 막(鄚)과 역(易)을 얻음으로서(bc 294) 易水 근처로 이동해 이곳을 중심으로 長城을 쌓아 대비하자 <장의>가 소왕을 협박하며 말한 “趙가 晉에게 준 하간 땅....” 은 장수漳水와 河水 사이의 땅으로 이런 협박에 燕이 떼어준 “常山의 끝 5개 城”은 雁門과 碣石의 풍요로움이 있던 호타수 상류지역을 말하니 趙나라가 易土해 얻은 땅은 안문 과 갈석(常山 구문현의 갈석 임을 명심하라)의 땅이 틀림없다.  

드디어 무령왕이 中山을 치기 위해 출정한 지역은 常山의 남쪽인 형*곡양*단구*화양*치지새*고*석읍*봉용*동원 지역이며 燕王 희僖 원년(bc255)에 60만 대군으로 胡와 代를 침략하는데 이때의 代는 구주(句注)지역의 代땅으로 상곡군과 요서군 지역이다.   燕은 易土로 易水 水系를 방어했으나 나중에 趙의 이목(李牧)에게 전부 뺏기면서 500리를 북상한 그에게 포위되었는데 이때의 상황을 易水까지 이르렀다 했으므로 燕의 남쪽 경계는 분명히 易水 상류가 맞다.

3) 연태자 단(燕太子 丹)의 役으로 본 燕의 위치

秦의 침공으로 燕의 도읍이 함락 당하자 태자 丹은 요동에서 항전한다.   바로 이곳은 易水의 서쪽에서 요동(遼東)까지이므로(계薊와 2개월 거리) 이때 요동은 난하(灤河) 서쪽에 있어야 하니 代를 중심으로 북쪽은 상곡군*서방은 요서군*동으로는 요동군이 자리하게 된다.

요간(遼間)에서 산란(散亂)했다는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의 요간(遼間)은 습수 즉 상건하와 영정하의 남과 북 사이를 말하며 이때 정형과 신도 사이의 지역이 中山國이므로 燕의 남쪽이 될 수 없다.   결국 燕의 남쪽에 호타가 있다는 사실을 충족하는 지역은 호타의 상류지역인 하옥성(夏屋城)이 있는 지역 뿐이다.

  - 호타는 항산(恒山) 남쪽 태백산 서쪽의 로성(鹵城)부근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흘러 하옥 구주산 안문관 남쪽의 代를 지나 방향을 바꾸어 반달처럼 흐르다가 양곡에서 동으로 흘러 정형 북쪽을 지나 신도로 흐른다.

따라서 易水도 본류가 아닌 상산 부근의 역수 상류를 말해야 소진이 말한 호타와 역수*안문과 갈석이 趙와 남으로 경계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갈석은 항산과 상산사이 즉 관하가 흐르는 영구와 태백산 부근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文侯 당시의 燕은 결코 현 북경인 계(薊)가 될 수 없으며 지금의 大同市를 중심으로 東으로 조선과 요동의 경계인 마성(馬城)에서 南으로 구주산九注山*대代*옥산屋山*상산관常山關에 이르는 지역으로 비정된다.  


이런 역사적인 인식과 배경을 기반으로 다시 [앵무새]의 지저귐을 살펴보자.  [단락 3]은 내가 앞서 말한 <두 번째 이야기...반론>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기자(箕子)문제와 단군역년 고찰>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니 다시 반복하여 언급할 필요성조차 없는 허접스런 궤변망상일 뿐이다.   이어 [단락 4]는 두 가지로 압축될 듯하다.  하나는 막조선 그리고 나머지는 淮岱지역의 문제이다.   아주, 아주 궁금한 모양이다.   스스로 질문을 해 놓고 [모른다...-_-;;...역시 모른다...라고 자동응답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먼저 [막조선]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 무렵의 정세가 어찌하였는지는 지금까지 글을 읽어오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속적인 대변란과 격동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1) 匈奴의 공격으로 대패하자 동쪽으로 밀려 匈奴는 예맥조선과 접하게 되니 빼앗은 고조선 지역에 좌현왕(上谷=우리 땅 수리골) 과 우현왕(上郡=우리말 수리말)을 두었다.
2) 배후의 언덕이 사라진 번조선도 서쪽의 방패인 의거(義渠)가 秦에게 굴복하여 북진한 秦이 농서(隴西)까지 진출하여 長城을 쌓으니 여량(呂梁)의 서쪽을 넘겨주고 河水 남쪽의 齊와 太行 서남방 박락지수(薄洛之水)를 경계로 한 曹(曹와 東胡가 땅을 맞닿았다)를 비롯해 서북쪽에서 고개를 쳐든 燕과 외롭게 공방을 벌이고 있었는데 BC 282년 무렵 발생한 진개(秦開)의 역(役)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조양자(曹襄子)가 구주(句注)를 넘어 대(代)를 파하고 胡貊(번조선)과 접경했고 무령왕이 임호와 누번을 공략해 대代-음산陰山-고관高關까지 축성후 새(塞)로 만들며 운중雲中*안문鴈門*대군代郡을 설치하였다.  <사기>
   ▶진(秦)은 서하와 상군에서 戎과 접경했고 소왕(昭王)때 의거융왕(義渠戎王)의 난을 극복한 후 농서瀧西*북지北地*상군上郡을 취한 후 장성을 쌓았다.
   ▶연(燕)은 진개의 역 이후 5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았다.
   ▶제(齊)는 전단(田單)이 제수(齊水)변에 살던 적인(狄人)을 벌하자 그들이 齊水 북쪽 천승현 지역으로 이동해 가고 북쪽의 조선령은 연(燕)이 침략하므로 마침내 조선은 발해를 따라 동해까지 말발굽형의 지역을 방어하였다.

3) 나라의 강역이 흔들리고 정세의 혼란이 심화되는 가운데 많은 부족들이 이동을 시작하는데 이들을 등에 없고 세를 불린 대군장들의 발호(跋扈)가 두드러지면서 그동안의 국가체제가 변혁을 일으키는 국가적 事變들이 연이어 일어났다(우화충于和冲과 구물丘勿*五加의 난과 기후箕詡*한개韓介의 정변과 고열가高列加*해모수解慕漱의 흥기와 고진高辰*최숭崔崇의 낙랑국 이동*고두막한(高豆莫汗-東明)의 거병  

[환단고기]는 단군세기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보여주는 시각처럼 삼한-삼조선 체계를 주안점으로 삼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이 해체되고 국호國號가 변경(북부여)되어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전개되는 시점에서 글을 맺는 것이다.   이는 <번한세가>나 <마한세가>의 기술태도를 보아서도 명백하다.   즉 이유립은 대제국 단군조(檀君朝)가 해모수의 등장과 위만의 간교한 침탈로 종언을 고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번조선]도 위만에게 침탈당한 후 일단락을 맺고 [막조선]은 진*번조선이 와해됐음에도 망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삼조선 중 반도를 중심으로 위치해 중토의 민족들과의 공방전이나 침략 등으로 인한 투쟁이 없었고 진하인(秦夏人)의 기록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기에 우리 史書에만 주로 언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漢의 성장과 단군조선의 와해를 비롯해 위만의 난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발생하여 대륙과 진*번조선 지역의 이주민이 파상적으로 유입하자 오랫동안 투쟁으로 다져진 전투력을 지닌 그들을 막을 수 없어 빠르게 세력을 잠식당해 35대 맹남 이후 기록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오랫동안 잠잠했던 막조선도 열국시대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리는 것이다.   이는 그 후 막조선의 강역 내에서 여러 가지 움직임들이 새롭게 감지되며 後 三韓의 정황들이 점차 뚜렷하게 감지되는 걸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두 번째 [회대지역]의 상황이다.   이 무렵에 들어 분명히 몰락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시대적 정황들이 한꺼번에 겹쳤기 때문이다.  

1) 서언왕(徐偃王)에게 후왕(侯王)의 작위(爵位)를 사여(賜與)하면서 분조(分朝)로서 대륙의 남동변을 수호하도록 했지만 BC 680 년대 무렵 주 목왕(周 穆王)의 간책(奸策)에 걸려 초 문왕(楚 文王)의 急攻(기록을 보면 처음의 승세가 급격히 무너진 것으로 보아 周와 楚의 협격작전인 듯 하다-회남자淮南子)을 받고 대패하여 팽성 무원현 동산(彭城 武原縣 東山) 지역인 서산(徐山)으로 들어가 웅거한다.   하지만 곧바로 周穆王은 서북지역에서 견융(畎戎)의 맹공(猛攻)에 시달렸으며 楚文王도 그 후의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로 보아 徐山에서 둔진(屯陳)한 서언왕을 어쩌지 못한 듯 하다(그를 따라 간 백성이 수만이라 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 하지만 여왕(厲王 BC 878-842)-공위시대-선왕(宣王  BC 827-782)에도 지속적으로 세력을 지니고 있다가 결국 BC 512년 서국왕 장우는 다시 전국쟁패에 휘말려 吳에게 패배하여 힘이 많이 떨어지게 된다(좌전 노 소공 30년조).
3) 전국시대 중기이후 단군조선도 구물(丘勿)의 정변으로 내부사정이 어지러워지면서 대륙 남변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현격히 떨어지는 추세를 맞는다(이 때 만씨융滿氏戎이 초楚에게 근이根夷*모이牟夷가 노魯에게 래이萊夷*개이介夷가 제齊에 망한다).   결국 회대지역의 <한>들은 궁여지책으로 새롭게 일어나던 오(吳)*월(越)와 협력을 맺어 새로운 관계로 탈바꿈한다(이 시기부터 그쪽 지역에서 일어난 吳*越의 국력이 갑자기 강력해져 한때는 楚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위세를 보이면서 전국시대 후반에 들어 일시적인 패자覇者로 등장하는 현상을 생각해보라)

   ▶淮夷는 BC 515년 이후부터는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지 않아 고증할 길이 없다.   아마도 吳 혹은 越에 멸망되었을 것이다.  <부락성  중국통사  46P>
   ▶及楚靈會申 亦來豫盟(註: 左傳 楚靈王 蔡侯 陳侯 鄭伯 許男 淮夷會于申) 後越還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夏 侵滅小邦 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급초영회신 역래예맹(주: 좌전 초영왕 채후 진후 정백 허남 회이회우신) 후월환랑야 여공정전 수릉폭제하 침멸소방 진병육국 기화사이개산위민호  <후한서 동이열전>

※ 그러나 이는 조금 다르다.   절강성 지역의 越이 랑야(琅邪)로 옮겨 갈 때 큰 조력을 한 기록도 나타나 越과 함께 연합 세력을 형성하면서 재기하였다가 마침내 진시황(秦始皇) 때 붕괴하여 민호화(民戶化) 되었음(진시황이 유독 淮泗夷를 民戶로 해체하려 진력한 사실로 보아도 세력이 대단했음을 역으로 보여준다)을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핵심부족들은 여전히 변(卞)지역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잔존하고 있다가 우리나라가 열국시대에 돌입하면서 백제 세력이 같은 동족으로서 이곳으로 진출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던 기록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럼 分朝가 성립되어 있던 [앵무새]가 <뺏고 뺏어도 또 뺏는 회-대 지방은 어찌 되었을까?   역시 모른다>라는 구차한 주장에 대해서는 설명이 되었으니 더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지막으로 그대로 되받아준다면 <결국 이유립에게 있어서 이 지역은 한민족의 위대함을 오래도록 과시하면서 지켜온 터전임을 누누이 설명해 왔기 때문에 굳이 그 전말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이 이대로 환단고기나 우리의 역사 속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의 강변대로 <한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또 빼앗아야 하니까>라는 조잡한 결론보다는 <우리 민족의 史書인 高麗史에서도 고려의 선조족으로 기록되어있을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존재하는 가운데 후일 백제의 영광과 함께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 長淮茂族  장회무족  고려사 世家 권2 태조 16년조>

[단락 5]를 살펴보자.   [앵무새]는 또 여기에서 엉뚱하게 헛다리를 짚고 있다.   죽겠구만....<위만이 토벌 당했는데 우거는 멀쩡하다.  멀쩡할 뿐만 아니라 자꾸 침공해서 골치를 썩기도 한다>   쯧쯧...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그래서 관련 기록을 모두 발췌해보았다.

BC 128  몸소 보기(步騎) 1만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려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파破) 관리를 두었다.
BC 120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토討)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BC 122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海城) 이북 50리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언급한 글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위만을 토벌하여 맥을 끊었는데 우거가 계속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참 그렇게도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아니면 기록을 전혀 보지 않고 남의 말만 들어 옮겼을까?   조금만 눈여겨보아도 환히 알아볼 수 있는 구절들인데...여기서 위만을 토벌했다면 <討滅之>라고 하던가 <敗亡>이라고 해야 맞다.   하지만 해모수는 분명히 <남려성에서 破하고 그곳에 관리를 둔 것이다>   그 다음 기록에 토벌의 이야기가 나오나 여기에서도 틀림없이 <우거>가 대상이며 <이로움이 없었다>하여 전과(戰果)가 시원치 않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에서도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   어떻게든 고두막한高豆莫汗과 고주몽高朱蒙(추모鄒牟로 표현하겠다)을 연결하여 불리지의 아들이란 기록과 혼란을 야기 시킬 마음인 모양인데...어이구!!!   핀트를 잘못 잡아도 한참 어긋났다.   아마도 고두막한=東明과 추모=東明聖王의 문구를 보고 눈에 확 들어온 모양인데 아래 글로 대신한다.   결론적으로 <어라라?   이 고두막한의 아들이 고주몽이다>는 당신의 착각일 뿐이다.   그 어디에서도 그런 유사한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추모왕을 東明聖王이라 한 것은 시호(諡號)로서 [東明]을 사용한 것이다.   처음에는 <추모鄒牟=주몽朱蒙>를 사용했는데 이는 일생에서 두드러진 솜씨가 <활을 잘 쏜 능력> 때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때문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휘諱는 주몽이다-一云 鄒牟 一云 상해象解>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諱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이름>이라 하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하려 할때는 諱라고 하는 게 법도이다.   死後에 비로소  <東明=새발간=새로운 밝은 해>으로서 <동방을 새로 밝힌 왕=동방의 태양>이란 이름이 추가된 것인데 이는 高豆莫汗이 똑같이 東明王이라 불리면서 논형 길험편이나 이를 인용한 위략에 부여의 시조로 나오는 언급과 같다.

따라서 처음부터 해석을 엉뚱하게 하였으니 다음에 나오는 <위만을 토벌했다 하면 요서를 점령했다는 말이 된다>는 잘못된 주장이다.   따라서 가정(요서를 점령했다는 운운...)이 잘못되었으므로 이어 대무신열제에 대한 언급에서 <현도와 낙랑을  토벌해서 요동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대체 이 나라들은 영토가 왜 이렇게 고무줄일까?   언제 이렇게 쪼그라든 걸까?>란 기우(杞憂)는 어리석은 판단만 가득 찬 사람들이나 할 법한 넋두리일 뿐이다.  오히려 고구려의 영토는 추모(鄒牟)이래 지속적으로 정복활동(비류국*행인국*말갈족*북옥저*선비족*양맥국*현도군 고구려현*동부여*개마국*구다국*낙랑국)을 벌임으로서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추모(鄒牟)는 <연타발>의 지원으로 勢를 얻고 자립해 나가다 북부여의 눈길을 받는 정황이 여실하다.   결국 북부여왕은 그를 부르는데 바로고두막한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동부여를 이룩한 해모수족단의 방계로서 고구려후 고진-옥저후 불리지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아들이 없었던 북부여왕 고무서(高無胥)는 사위로 삼고 대를 잇게 하였는데 이는 데릴사위제를 이어온 고구려보다 그 이전부터 연연히 내려온 전통을 따른 것이다(사위도 아들로서 인정하며 모두 아들(子)이라 하여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기록들을 보라)   또 같은 高(해)씨계 혈족의 대물림인데 뭐가 그렇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인가?

※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모두 해모수의 아들로 표현되어 있는바 바로 그의 혈통이 북부여 입국(立國) 가문과 이어진다는 유래에서 出自가 원 북부여라는 걸 표현한 듯하다.   왜냐하면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모두루 묘지에도 분명히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추모집단은 소서노와의 혼인으로 계루부 대인인 연타발의 정치적*군사적인 지원을 받아 졸본부여의 집권층에 접근했고 뛰어난 활 솜씨와 전사집단의 힘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후 그 지역을 소란케 했던 말갈(졸본부여의 변경까지 진출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 부족)을 제압*복종시키는 과정에서 계루부의 협력과 신망을 얻으며 마침내 계루부의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비류부족이며 소노부대인인 <송양왕>을 계루부와 연합해 싸움으로서 승리해 복속시켜 강성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차지했으며(이때 졸본부여의 국호는 句麗였음) 그 과정에서 그가 속한 계루부가 연나부를 누르고 고구려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는데 후에 자식이 없던 고두막한계 북부여의 마지막 왕 <고무서>는 동족계로서 그의 능력을 높이 사 딸과 결혼시키며 사위로 삼고 나라를 넘겨준 듯 하다.   이 지역에는 추모가 도착하기 전에 秦*漢과의 투쟁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고구려 연합이 있었으며 맹주는 송양왕(松那=消奴)이었지만 추모의 등장을 계기로 계루(졸본부여)부로 바뀌면서 구려국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소서노(召西弩)에 대한 부분인데 그녀에 대해 알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비인 <연타발 延佗勃>의 이력(履歷)과 활동상이고 둘은 소서노의 두 아들에 대한 출자와 배경이 되는 세력족단들이다.

   1) 연타발(延佗勃)의 출자와 배경

      예군 남려(濊君 南閭)와 이어지는 후손부족(後孫部族)으로 추정된다.   졸본인(卒本人)으로 계루부의 원족이며 해모수 시대에는 그를 도와 좌원을 지키는 장군으로 비류수의 서쪽에서 비류국 다음으로 큰 세력을 형성해 西奴國 혹은 西國이라 불리었다.   스스로 해모수와 同系로 자부하며 고두막한이 졸본에 있을 때에도 은밀히 도와주어 그 후광으로 세력을 길러 졸본지역에 있는 부여부족의 나라라는 뜻인 졸본부여라고도 자처했다.   남북갈사(南北曷思)를 왕래하며 재물을 모아 많은 富를 축적한 사람으로 주몽의 사람됨을 일찍이 알아보고 가만히 도와 나라의 기틀을 일으키고 도읍을 세우는데 공이 많았다.   후일 사람을 이끌고 구려하(九黎河-수수하秀水河 혹은 난하)로 옮겨가서 추모의 지원 아래 어업과 염업을 독점해 얻은 이득으로 추모가 북옥저를 칠 때 군량 千石을 바치는 등 도움을 준다.   이어 눌현(訥見)으로 도읍을 옮기자 스스로 자원해 유랑민을 구휼하며 거두어서 눌현을 중심으로 농사일에 종사하게 하는 등 왕을 부지런히 도왔다.   이런 까닭으로 소서노가 두 아들을 이끌고 나와 처음 자립한 터전이 모두 그가 다스렸던 영역 안에 있었다.

   2) 권력투쟁과 추종세력군

      추모가 나라를 건국함에 번조선계와 舊 진조선계인 <연타발>의 도움이 컸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입김이 커져 <소서노>를 중심으로 나라 세울 때의 아낌없는 지원과 졸본부여라는 기득권을 주장하며 번조선계인 <비류>를 밀었다.   그에게 王業이 이어질 공산이 커지자 추모를 따르며 구사일생의 험(險)을 겪었던 북부여계의 중신(重臣)들은 북부여의 후계를 이었음에도 비류를 택할 경우 이를 중대한 변고로 생각하고 家臣을 시켜 대왕이 동부여에 있을 때 취한 북부여계 부인과 아들 여달(閭達-난 유리로 보지 않는 입장인데 이는 추후 설명이 필요하다)이 아비를 찾는데 은연중에 도움을 주도록 공작을 꾸며 북부여계의 부족을 남하시킴으로서 소서노계의 견제에 힘을 기울인다.

     <여달>과 <예씨부인>에게 밀려난 <소서노>는 두 번째 결혼도 부질없었음을 깨닫고 부족장들과 상의해 비류와 온조를 부추겨 왕위 계승에 뛰어들게 하였는데 결국 비류계와 여달계의 치열한 무력싸움이 있었고 그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추모가 죽으면서 결국 <여달>이 왕위를 잇자 추모를 죽이게 만든 것으로 몰아세우는 노골적인 핍박과 여달계 측신(側臣)들의 반격이 시작되고 이에 명분과 힘을 잃은 소서노 세력은 보복이 두려워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근거지를 찾게 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 떠날 때 따랐던 백성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미루어 비류를 따른 부여계 비류국의 유민과 온조를 따른 소서노의 졸본부여계 계루부 유민도 같이 동행 한 듯 보이며 따라온 重臣 중에 부여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왕실의 성씨가 부여씨가 된 것 같다.

   ▶비류는 나이 어린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동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왔을때 우리 어머니는 가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데 그 힘을 보탬과 공로가 매우 컸음에도 대왕이 염세해 나라를 유리에게 맡기니 우리가 공연히 이곳에 있으면서 혹처럼 붙어서 쓸데없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새로이 살 곳을 찾아 나라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드디어 망명길에 올랐다.  <삼국사기>
    ▶그 世系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서 성씨를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
    ▶백제의 王姓은 부여씨인데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건길지(建吉支)라고 불렀다 <周書 백제전>

어떤 이유에선지 추모왕은 시신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으로 죽었다는 냄새가 짙으며 여달이 오자 곧 태자로 삼고 5개월 후에 죽었다는 것은 중신들인 오이 등이 왕의 후사(後嗣)가 나라에 없어 비류와 소서노의 세력에 밀릴 것을 알고 동부여에 몰래 사람을 넣어 공작을 꾸민 냄새가 짙다.

   ▶가을 9월에 왕은 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시자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이 흘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머리를 잡고 승천하여 하늘에 오르고 배려오지 않으시니 이 때 나이가 40세였으며 태자인 여달이 왕이 남기신 옥째찍을 시신 대신 용산에 장사하였다.

[소서노召西弩]   용맹하고 지혜로와 서노국(西奴國)의 작은 족장이라는 뜻인 이름을 얻었으며 후에 세운 <어라하국>은 진번지역인 발해만의 복주하(復州河)와 벽류하(碧流河) 지역이 초기 정착지로 비정된다.   소서노계는 처음 북부여의 거수국인 졸본부여의 한 부족으로서 비류국의 우대(優台)에게 시집가서 비류를 낳고 남편이 죽자 친정인 졸본지역의 서노국(西奴國)에 와서 살았으며 북부여의 명을 받은 계루부 대인인 <연타발>이 주몽을 도와주다 아비의 주선으로 시집간 것이다.   소서노가 아들 비류를 낳았다는 것은 곧 비류국으로 시집간 것을 말하니 이때 비류계 국왕인 송양왕은 기준의 후예로 진조선=북부여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류수 지역에 정착하면서 당시 연나부가 왕위를 잇던 졸본부여(구려국)의 原住 구성부족인 계루부 연타발 부족과 아들을 통한 혼인으로 연합을 이룬 것으로 보여진다(비류의 성씨가 優台系이고 온조는 추모계인 解氏임).

   ▶비류의 아비는 해부루의 서손이며 어머니 소서노는 졸본인 연타발의 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3) 이동과 정착

백제는 舊 황하하류의 요서군(遼西郡)에 속한 하북성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옛 진번계(眞番系)의 부족을 흡수하면서 일어나 하북성의 패수(浿水)와 대방의 대수(帶水)를 건너 마침내 나라를 세웠다.   여기에서 한수漢水=하수河水=구 황하黃河로 첫 도읍지인 하남(河南)은 하수 남쪽인 산동성 지역을 의미하는데 그곳을 근거로 삼아 후일 백제가 개척한 산동지역의 백제군과 하북성과 발해만 지역의 진평군이란 이름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서 주의 할 것은 기록을 작성한 북위 때의 대방은 현 요하근처로 옮겨졌으므로 <옮겨지기 전의 대방지역> 즉 帶方故地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대방고지가 유성과 노룡사이에 있다 함은 노룡(盧龍)이 난하에 있고 유성(柳城)은 황하어구(노황하老黃河)로서 곧 신하(新河)유역의 옛 대방지역을 가리킨 것이며 바로 이 무렵 나타나는 구대(仇台)란 이름은 망명세력을 이끌었던 비류를 아비인 우태(于台)계열로 비유해 칭한 존칭으로 보여진다.

  - 비류가 진번계의 후예이며 해부루 부족의 방계인 송양왕의 아들인 우태(優台)의 핏줄이므로 진번계를 이용해 난하 동부의 거점 확보에 도움을 받고 후에 그 세력을 흡수한 것이다.
  - 백제 시조가 구대(仇台)라는 기록이 <주서 이역열전周書 異域列傳 과 수서 동이열전隋書 東夷列傳>에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의 관직인 [우태]로 추모가 소서노의 나라를 [어하라]로 책봉하면서 내린 우태라는 관직(갈사국의 도두왕이 투항해 오자 태조왕은 그를 우태로 봉하였던 기록도 보인다)이며 우태(優台)의 음차<우優와 같은 음音 우优의 오기인 구仇>이며 부여계통의 언어로 <우치>로 읽히는데 원래 <태台는 치=디> 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 仇台(優台)가 해부루의 서손이라 하나 <구 삼국사*삼국유사>는 <노무자老無子>로 기록되었고 졸본부여(구대仇台)*동부여(위구대慰仇台) 등 부여 계에서 <구대>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비류의 생부(生父)인 우태(優台)는 부여계가 확실하다.   따라서 초기에는 비류의 아비=어미도 <우태>로 봉해졌으며 이를 호(號)로 삼아 <우태>로 통했고 그 職을 이어 비류도 우태로서 구태(구이)=우태(우이)=소서노=비류가 같이 사용된 것으로 구대묘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 기록에 보이는 대방고지(帶方古地)는 3地域이 있다.   1) 남만주 금주지방(후한서 지리지 낙랑군 대방현)   2) 발해만에 함몰한 대방(위서 한전韓傳 대방황지帶方荒地)   3) 북경과 발해만 지대의 대방(삼국지 위서 왜인전)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위치를 비정할 때 [대방]의 의미를 함께 새겨야 한다.   두 가닥의 강이 평야를 끌어안고 흐르는 모양이 마치 “허리띠와 같다”하여 <대방>이라 했다 하였으니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류와 온조가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은 대방고지(帶方古地)이다.  <수서 백제전*백제본기 서설>
   ▶백제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가 천 여리에 있으며 작은 바다의 남쪽에 처해 있다.  <위서>
   ▶그 나라의 동쪽 끝에 신라가 있으며 북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다.   서남쪽으로 큰 바다에 닿았고 작은 바다의 남쪽에 처해 있다.  <북사>

작은 바다는 발해(勃海)를 말하고 바다의 南에 百齊가 있다는 것은 발해의 남부인 대륙 동해안쪽에 백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방고지는 난하 이북의 옛 번조선 고지(古地)이며 이때에도 진번계 유민이 해상활동을 활발히 하며 富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인물은 소서노와 우태의 핏줄인 비류일 수 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백제는 장안에서 곧바로 동으로 6천리에 있는 영(瀛)과 빈(濱)의 바다 남쪽에 있다.   서는 월주(越州)와 경계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왜가 있고 북엔 고구려가 있다.   모두 바다를 건너야 이를 수 있으며 동으로는 신라가 있다.   王은 東西의 두 성(城)에 거처한다.   <신당서>

영瀛=영현瀛縣=영주瀛州는 황하 북의 하북성 하간(河間-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혹은 산동성 태산(泰山)에 있는 지명이고 빈濱=빈현濱縣=빈주濱州는 황하 북쪽의 산동성(중국고지도)에 있으니 앞서 대방현帶方縣*작은 바다의 남쪽 등의 기록과 대조할 때 百濟는 초기에 영현(瀛縣)과 빈현(濱縣)의 바닷가 남쪽 즉 현 산동성과 그 남부 지역인 양자강 일대까지였으며 이때 백제는 대륙과 반도 양쪽에 도성(都城)이 있었음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 1次 비류(沸流)의 근거지 십제(十齊 미추홀=메주골)

      <삼국유사>에 <온조가 졸본부여에서 내려와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라고 기록했는데 분명히 [바다를 건너 하남 위례성에 이르렀다] 라는 말이 없으니 졸본부여와 위례성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河南 위례성>이란 지명기록은 한반도 내에 없으므로(삼국사기에 한강 남쪽에는 위례성이 건립된 적이 없다 라는 기록) 문맥을 살펴보면 <河南=강의 남쪽>이니 발해만의 난하*서쪽의 백하 중 하나일 것이며(난하와 백하는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지나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또 <한서지리지>에 <북쪽으로 대수와 한수가 흐르고 있다> 는 구절로 추정할진대 [난하*백하*대능하] 중 어느 강을 가리킨 것 같다.

   - 그러나 대방지역은 시종일관 낙랑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비류 일행은 압력에 시달리게 되어 온조와 상의하여 근거지를 떠나 낙랑의 압력이 덜 미치는 남쪽으로 다시 이동하게 된다.

   ▶소서노가 사람들로부터 패대(浿帶)의 땅이 비옥하고 물자가 많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 사이의 바닷가 가까운 벽지에 이르러 10여 년간 살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재산을 모아 북쪽으로는 대수*서쪽은 큰 바다에 임하여 500여리를 차지하였는데 추모에게 사신을 보내자 그가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백제의 기원)에 책봉하였다.   재위 13년에 소서노가 죽자 장자인 비류가 뒤를 잇고......이에 온조가 마여*오간 등을 이끌고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처음 대방의 땅에 도착한 기록과는 달리 분명히 배를 타고 이동한 것으로 기록함) 마한의 미추홀에 다다라......<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따라서 이곳은 분명히 발해만과 패수라고 불린 난하 또는 백하의 하류 지역이며 번조선의 경계 지역이었던 곳으로 백제 小國이 소서노에 의해 기틀이 닦여져 13년 만에 나라를 세우고 비류가 뒤를 이었음을 보게 된다

   - 소서노가 아비와 함께 등장할 정도이면 그녀 집안은 졸본부여를 장악한 막강한 가문이고 부여의 왕이 제가회의라는 부족장 회의에서 선출될 당시에 <연타발>은 졸본부여의 왕족이나 실력자였을 것이며 집안 재물을 동원하여 고구려 성립을 도왔다는 것은 해상중계무역으로 큰 재물을 모아 그 재력을 바탕으로 졸본부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기반을 더 넓히기 위해 당시에 중앙 권력자 출신으로서 송양왕의 아들 우태와 소서노를 결합 시켰으나 일찍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소서노는 浿帶의 땅으로 내려와 대대로 해상중계무역을 한 집안의 내력으로 뛰어난 재능이 있어 무역선단을 거느리고 발해만과 압록강 水系와 반도 황해안 지역의 商圈을 장악하며 소금생산과 교환을 독점하여 재부(財富)를 축적했다.   당시는 後漢 말기로 흉노의 침입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한 後漢은 이를 제어하지 못해 이 공백기를 이용하여 패수와 대수를 넘나들며 무역권을 장악하며 반도의 황해도(교역 통로이며 중심지였던 평남 영유현永柔縣 미추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교두보(미두산성米豆山城*자모산성慈母山城과 청룡산성靑龍山城 등)로 확보하였다.   이를 근거지로 반도 서해 연안과 그것과 연결된 내륙수로를 오르내리며 반도 중남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듯 하다.

   □ 2次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온조溫祚의 근거지)  

      위례성은 <위의 성 즉 우 성=上城=王城>의 뜻으로 우리말 왕인 어라가 살고 있는 곳 <어라>의 변형인 <위례>라는 해석도 있다.   이 때의 이도지(移都地)를 1차 도읍지인 위례성에 대해 하남 위례성으로 불렀기 때문에 하북 위례성(河北 慰禮城)이라는 말이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반도로 이동해서는 정도처(定都處)를 한성(漢城)으로 불러 하북 한성(河北 漢城)과 하남 한성(河南 漢城)의 명칭이 교차하여 나타나는 것이다(아무튼 온조는 반도로 이동해서도 이 무렵을 건국 기년으로 삼아 계산했으므로 이 때의 기간을 산입해서 기록을 검토해야만 풀려진다)

   - 河南은 河水 南으로 황하 남쪽이니 비류일행은 일차 근거지를 출발하여 하남지역인 산동반도에 도착한 듯 하다.   왜냐하면 1차 근거지는 당시 위만과의 접경지로서 힘의 공백이 되어 있는 땅이었지만 서로는 위만*동으로는 낙랑*북으로는 말갈에 둘러싸여 困하게 되자 나라의 자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다시 이주를 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원래 요동과 요서는 영정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있던 군이었는데 이 하북성 북부지역인 요서군을 백제가 차지하여 4세기인 진나라 때까지 점유하였다.  <송서 백제전>

     ▶백제는 하북성 북동에서 일어나서 진-송-제 시대까지 중토지역은 양자강의 좌우인  강북과 강남의 양쪽 해안을 차지하고 만주와 반도에서는 서해안 남단까지 차지하였다.  <북사>

   □ 반도지역(半島地域)으로의 進出  

      낙랑의 계속되는 압력에 시달린 <비류>는 자구책으로 온조와 어미인 소서노와 같이 상의한다.   원래부터 상인집안으로 뼈가 굵은 어미는 지난날 막조선*낙랑국 등과 교역을 하면서 아직 살만한 땅이 많은 반도의 중계 무역 핵심지역(황해도 지방)을 거점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온조는 재종숙부 을음(乙音)을 비롯한 중신들과 바다를 건너 반도의 황해도 지역(재령강載寧江 유역인 평남 강서군 함종현咸從縣의 북쪽인 영유현永柔縣 미추홀인 태조산太祖山 위 미두산성米豆山城과 산 하나를 넘어 해발 559M의 청룡산靑龍山의 미추홀인 청룡산성靑龍山城)을 통해 상륙한다.

      이 때의 이동로는 산동반도-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요동반도 대련시 용담산성-평남 평원군 영유현 미두산성을 짓고 체류-산 넘어 평성시 청룡산 청룡산성을 위례성으로 삼아 정착-말갈의 잦은 침입으로 황해도 평산의 둘레 7225척의 석성(石城)인 태백산성(太白山城-일명 성황산성城隍山城)으로 이동-다시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미추홀]로 내려가 정착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미두산성米豆山城은 성*성읍을 뜻하는 우리말 미지의 이사형異寫形인 미두*미추로 읽힌다)

  ※ 태백산성은 반도로 이주한 진번한의 근거지인 재령(載寧) 장수산성(長壽山城)으로부터 100여리로서 그 앞을 흐르는 예성강을 <위 례성강>으로 이름 짓고 대륙의 도읍인 위례성을 본 땄는데 강 상류인 수안군 위라천(遂安郡 位羅川)도 <위례천>의 변음화이다.

   - 이로 말미암아 대동강을 한 때 한수(漢水)로 불렀으며 이 지역은 후에 곧바로 반도로 이동한 변한족단에 의해 점유되어 황해변한의 근거지가 되었으나 <다루왕>의 반도 진입으로 다시 백제령으로 되었다.  

반도로 이동한 온조 일행은 [미추홀]에 도착하게 되고 비류와 상의해 비류는 미추홀을 중토와 연결하는 거점지대로 만들기로 하면서 온조는 마한의 배려로 마한의 가장 북단에 위치한 동북방지역 백리를 얻어 새로운 터전을 잡게 되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때에 마려 등이 온조에게 <마한의 쇠패가 끝이 왔으니 곧 가서 도읍을 세우고 패업을 이룰 시기입니다> 고 말하자 온조가 이에 배를 편성하여 바다를 건너 비로소 마한 미추홀이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들판이 텅텅 비어 있고 사람들이 살지 않은지 오래된 곳이었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바로 이 때에 비로소 바다를 건너 하남 위지성(河南 慰支城)에 이르렀다는 말이 나오는데 원래는 <하남 위지성>도 발해만의 산동성 지역에 있던 <하남 위례성>을 그대로 옮겨 이름 한 것으로 보이며 <나라 이름도 그 이전 것을 그대로 써서 백제라 했다> 했으니 백제의 초기 위치는 발해만 지역(태풍의 눈인 대륙백제의 단초가 여기에서 잡힌다)에 있었음을 추정하게 된다.

어라하국(於羅瑕國-주서 백제전  어라於羅는 왕을 의미하고 하瑕는 존칭어이다)은沸流의 나라이며 召西弩가 세운 나라이기에 후에 백제에 연합된 후 그 나라 백성은 비류계 말로 왕을 따로 어라하於羅瑕*건길지라 불렀다.   또한 백제는 초기부터 4仲之月(2*5*8*11월)에 남단南壇*남교南郊 등 도성의 남쪽에 단壇을 만들고 天地에 왕이 친히 제사(祭祀)를 지내며 희생을 바쳤는데 이는 대륙의 비류계 왕조에서 거행했고 시조묘에 행하는 묘사(廟祠)는 비류계에서는 구대(仇台)에게 년 4회와*동명에게 대한 제사를 온조계는 동명에게만 하였으나 진지왕 이후에는 모두 사라지고 만다.    


[百濟에 대한 小考]

백제에 대한 기록은 정리되지 않은데다가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많아 참으로 정론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만큼 나라의 성립과정과 국가발전이 축소 왜곡되거나 고의적으로 산란(散亂)시켜 놓은 느낌이 강하게 배어나온다.  이는 우리가 언젠가는 꼭 명확하게 밝혀놓아야 할 핵심과제이다.   그 대표적인 의문점들은 이렇다.

1) 왕 계보(王 系譜)의 탈락 가능성(脫落 可能性)

<제왕운기 백제기>에 “돌아보니 6백하고 78년이라 34王이 천복을 누리셨네”라고 하여 삼국사기의 31왕보다 3명이 많고 475년 존속한 고려왕조도 34왕인데 678년 지속한 백제가 31왕이라는 것은 의문이 생긴다.  

2) 낙랑*대방과 백제(樂浪*帶方과 百濟)

초기 백제사에서 낙랑과 대방은(말갈도 포함) 백제가 국가로 발돋음 하는 상황에서 적지 않게 반작용을 했는데 건국 시에는 낙랑과 말갈이 고이왕 이후부터는 대방이 주로 백제와 가장 많이 접촉한 것으로 나타나 백제의 건국지가 반도가 아님을 은연중에 역설해 주고 있다.

3) 두 개의 百濟에 대한 의미심장한 考察

<남사>와 <북사>는 동일 인물인 <이연수>에 의해 편찬되었음에도 전혀 다른 두 개의 백제 건국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南朝와 北朝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두 개의 백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남사>는 南朝의 역사로 이들이 접촉한 백제는 반도에서 馬韓의 小國이었다가 점차 三韓의 일부를 잠식하여 결국은 대륙에 진출한 것으로 보았고 <북사>는 北朝의 역사로 이들과 관련된 백제는 원래 대방고지(帶方古地)에서 시작하여 東夷의 强國으로 성장했다고 본다.

두 기록을 모두 존중한다면 백제는 帶方의 옛 땅에서도 나라를 세웠고 馬韓의 지역에서도 건국했다는 얘기가 성립되며 따라서 백제는 대방의 옛 땅과 마한의 한 소국에서 동시에 나라 세움이 진행되었거나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南朝의 기록에서는 전혀 대방의 옛 땅과 백제를 관련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아 대방 옛 땅에서의 건국이 마한에서의 건국보다 먼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당시 대방 땅은 北朝에 가까우며 北朝에 속했으므로 북에서 내려온 백제의 건국을 먼저 그리고 정확하게 알았을 터이며 이를 南朝에서는 전혀 모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東明의 후손으로 구대(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신의와 믿음이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고지에(책을 쓴 시대에는 옛날에 대방이었던 땅으로 인식하여 그렇게 기록함)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여식(女息)을 그에게 시집보내니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북사>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의 삼한국이 있었는데 그 첫째를 마한이라 하고 둘째를 진한이라 하며 셋째를 변한이라 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열두 나라이며 마한에는 쉰 네 나라가 있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구이며 작은 가구는 수천으로서 총 10만여 호이니 백제는 곧 그 중에 하나이다.  후에 점차 강대해져서 모든 작은 나라를 어울렀다.   그리고 그 나라는 본디 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일천여리에 있었다가 진나라 시기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가졌을 때 백제는 요서와 진평 두 군의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남사>  

4) 국호(國號)의 이중성  

비류와 온조가 떠날 때 오간(烏干)과 마려(馬黎)등 [열 명의 신하]가 그들을 받들고 함께 남하했으며 온조가 도읍을 정할 때도 그들의 의견을 중시하여 받아들였고 또한 이들로 보익(輔翼)을 삼았다 하여 처음에는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로 할 정도로 건국 초부터 이들 일족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으로 군림한 것 같다.   이들은 철기문화에 익숙한 유이민 집단으로서 무사단 성격을 강하게 갖는 일정한 세력기반을 가진 씨성족단으로서 河南으로 이주하기전의 본래 지역에서는 온조를 도와 작은 나라를 형성할 수 있는 일정한 읍락을 이끈 우두머리 층이었을 걸로 보여진다.   그 가운데 진(眞)씨와 해(解)씨가 주도권을 쥔 세력이며 이 문벌들은 백제의 성장과 함께 家臣그룹으로 발전한 10臣의 세력이 되어 姓을 부여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8姓 大族
沙씨(조이계 徐族)*燕씨(졸본계)*협劦씨(가야계)*解씨(환족계)*眞씨(진번계)*國씨(낙랑계)*木씨(가야계)*묘苗씨(우양계)

5) 王姓과 血統 문제  

백제는 ① 왕실의 씨성이 부여씨를 주로 해씨*모씨 등이 있는 점  ② 부여의 건국시조를 나타내는 동명묘를 설치했다는 점  ③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조서에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고 한 점  ④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한 점  등이 일관되게 씨족의 기원을 부여에 두었던 세력이 왕권을 유지한 것을 말하고 있으니 추모가 북부여를 이을 때 이를 싫어한 일부 부여부족들이 비류계에 포함된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어미인 소서노는 우대에게 시집갔다가 추모에게 재가한 여인으로 이설에는 형제가 모두 우대의 生子로 백제본기엔 주몽의 生子로 대립되어 있는데 비류는 우대의 아들로 부여씨이며 온조는 추모의 아들로 해씨가 된다.   따라서 비류의 혈통이 부여계였으므로 부여의 전통이 강조될 때에는 부여계 이름인 <구대>가 백제의 기원이 강조되면 <비류>가 사용되어 망명 전에는 <구대>로 사용하다 나라를 세운 후 <비류>라는 이름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었는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으로 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 또 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周書>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이 부분은 후대 책계왕 때의 일이 삽입된 것임)  <북사>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괄지지에서 말하기를 백제성에서는 그 조상인 구태묘를 세우고 해마다 4차례 그곳에 제사한다.  <한원 백제조>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하여 처음으로 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을 국성에 세웠는데 해마다 4차례 그곳에 제사한다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가운데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濟海)고 해서 나라 이름을 百濟(비류의 국호)라 불렀다.  <수서 동이열전 백제전>

   ▶왕의 성은 부여씨인데 於羅瑕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鞬吉支라고 부르는데 중국말로는 왕이라는 뜻이다   처는 於陸이라고 일컫는데 중국말에서 왕비이다.  <주서 백제전>

※ [어라하]는 대왕이라는 뜻의 부여에서 유래한 王號로 보이며 부여의 王名 중 의려*의라는 바로 어라(大)를 뜻하는 보통명사이었을 것임

6) 國家의 성격(정복국가적 성향)

이들이 남진할 때 고구려에서는 이미 기마전이 보편적인 수단이었고 당시의 지배방식이 거점지배 방식을 주로 했으며 세력집단이 떠나올 때 이미 여달족단과 주도권을 다툴 정도로 대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행한 오간*마려 등 10臣과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는 것은 대규모 기마전사 집단 세력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고구려의 선진 문화를 체험하고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이미 국가조직을 편성한 경험과 기마와 철제무기 등 우수한 군사적 능력을 지니고 있어 외부 세력의 위협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처가 가능하였다.   때문에 영역의 확대 과정에서 새로 편입된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통치를 위해 部 체제를 초기부터 도입하여 내부적인 토착 세력과의 연합으로 반발을 무마하며 그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기가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놓쳐서는 않된다.

이주초기에 영역을 남*북 2부를 시작으로 동*서 2부로 다시 나누었는데 당시 강역설정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으며 처음부터 王都 이외의 지역을 중앙에 편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영역을 지역적으로  분할책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방위명 部가 성립되었다(특정인물의 출신 部 소속 표기가 초기부터 나타나는 점)   부족적 성격의 지방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4方 部가 생겼고 초기는 王都를 中部로 하지 않고(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사비 때에도 中部는 왕도가 아닌 고사성古沙城이었음) 4부로 운영하고 있음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7) 비류와 온조 기록의 이상한 산란散亂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도읍지를 정하려 자리를 살펴보았다 10신하는 강남이 자리가 좋으니 이곳으로 정하라 하였다  비류는 따르지 않고 강북의 위례성(彌鄒忽-난하*백하 지역)에 정착하니 온조는 (계속)강남에 내려와 위례성(慰禮城-황하 이남 지역)에 자리를 정하고 10신하도 따라와 살았으므로 처음에는 십제(온조의 국호)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저습하고 짜서 농사가 잘 되지 않아 그곳에 살지 못하고 위례성에 가보니 잘 살고 있어 후회의 세월을 보내다 사망하자 그 백성들이 위례로 내려와 나라가 드디어 크게 되었으므로 백제라 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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