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11 7
  View Articles
Name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Link #1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my&no=1513
Subject  
   홍사(鴻史) B.C267년 공자(孔子)의 7세 후손인 공자순(孔子順)이 서문을 쓰다 (송준희)
송준희 (2007-02-02 11:06:41, Hit : 256, Vote : 2)  



  홍사(鴻史) B.C267년 공자(孔子)의 7세 후손인 공자순(孔子順)이 서문을 쓰다

개천대학장 겸 미- s - Baylor Univ 명예교수 이신 송호수 교수님이 소장하고 있는
홍사(鴻史)에 대해서 질의하신분이 있어 소개합니다

그 책자는 운영자도 보지 못하였음을 알립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연락처로 연락을 하셔서 여쭈어 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전화 738-7750, 이메일 songhosu@korea.com
- 110-240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94번지


< 송호수 교수님 저서 소개 >

- 한겨레의 뿌리 길(역사)
- 한겨레의 뿌리 얼(사상)
- 위대한 민족
- 위대한 조국
- 개천경

- 출판사 : 한터



홍사(鴻史)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송호수 박사님 저서 "한겨레의 뿌리 길"에 나오는 내용중
송박사님이 소장하고 계시는 "비서(泌書)"중 "홍사"라는 책자의 서문을 소개합니다

이책자 출처를 송박사님에게 전화로 여쭈어 보았습니다
"OOO씨 종중"에서 집안대대로 소장해오던 책을
올바른 우리역사를 밝히는데 사용해 달라고 기증받은 책자라 합니다

진위여부를 떠나 하나둘 우리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지닌 "비서"들이 하나둘 세상에 나오고 있음이니 이 어찌 가슴벅찬 일이 아니겠습니까 ?

아래 "홍사서문"을 한번쯤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홍사(鴻史) 이책은


중국 안리왕(위나라 제7대왕) 10년,
즉 서기전 267년 공자(孔子)의 7세 후손인 공자순(孔子順)이 서문을 쓴 책으로

발해 대야발이 단기고사의 서문을 쓴 시기가 서기 729년이므로
무려 단기고사보다 996년전에 서문이 쓰여진 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고바랍니다



< 홍사(鴻史)서문 >


동방에 나라가 있었으니 가로되 동이라 별의 분포로서는 기미(箕尾)이고 땅은 선비(鮮卑)에 접해 있었다

처음에 단군신인(檀君神人)이 있어
드디어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니 요(堯)와 더불어 나왔다

우순(虞舜)이 동이에서 났으니 포의자(浦衣子)로부터 수학(受學)하였다
중국에 들어와서 천자가 되어 백왕을 뛰어 넘는 정치를 했다.

광성자(廣成子)는 남보다 월등한 지혜의 도학(道學)이 있어
황제(황제)가 그의 내문(內文)을 받아 요제(堯帝)에게로 그 대를 이은 임금이었다

소련(少連) 대련(大連)이 거상(居喪) 석달을 게으르지 않고 피눈물로 3년을 잘했으니
나의 부자(夫子 = 孔子)가 착하다고 칭찬했다

하우(夏禹)와의 도산회의(陶山會議)에서 부루사자(扶婁使者)를 보내어 국경을 정하였다

유위자(有爲子)는 한얼이 낸 선인으로서 그 빛나는 이름이 중국에 넘쳤다.
이윤(李尹)이 그 문중에서 수학하였다

은나라 탕(湯)이 이윤을 불러 현인(賢人)을 물으니


동방을 가르쳐

- 그 나라는 국세가 크지만 교만하지 아니하고
- 그 나라는 군사가 강하나 침략하지 아니하며
- 그 나라는 풍속이 어질어 가는길을 양보하고
- 그 나라는 배곺은 사람에 밥을주어 안굶기며
- 그 나라는 남녀가 거처를 달리하여 유별하고
- 그 나라는 남녀가 자리를 한테하여 안앉으니

가히 예의 바른 동방의 군자국이다

이런고로 은태사(殷太師) 기자(箕子)도 주(周)나라에 신하 될 마음이 없고,
동이(東夷) 땅으로 피해 살았다

나의 선조인 부자(夫子 = 孔子)도 더럽지 아니한 동이에 살고자 했다

나의 벗 노중연(魯仲連)도 또한 동해(東海)를 밟고져 하는 뜻이 있었다
나 또한 동이에 살고 싶은 뜻이 있다
지난해 동이 사절의 입국하는 그 늠름한 모습을 보았는데 과연 대국(大國)다움의 금도(襟度)가 역력하였다

대저 동이는 수천여년 이래로 우리 중화와 우방의 우의가 있었다
백성들이 서로 가서살고, 와서 살아 접하는 기회가 끊이지를 않았다

나의 선조 공부자(孔夫子)께서도 동이가 더러운 곳이 아니라고 한 그뜻이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또한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 또한 느낀바 있어 그 실정을 기록하여 뒷 사람에게 보이고져 한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주(周)나라 난왕(난王) 47년 癸巳也)

곡부(曲阜) 공자순(孔子順) 기(記)
- (出 東國烈傳)


-----------------------------------------------------------

(해설)

(1) 기미(箕尾)

동북간방(東北間方)을 의미함.
두 별의 이름 곧 기수(箕宿)와 미수(尾宿)를 말하는데
기주(冀州)와 유주(幽州)가 기미에 해당(별의 호칭에서는 "수", 잠을 잔다는 뜻으로 "숙"으로 발음함)


(2) 안리왕 : 위나라 제7대왕

안리왕 10년은 서기전 267년에 해당되고 발해 대야발이 단기고사의 서문을 쓴 서기 729년보다
996년전이니까 단기고사보다 거의 1000년전의 공자 약 7세 후손의 글이다

(3) 난왕 : 주나라 제37대왕

(4) 공자순의 이 글이 "홍사" 서문으로 되어 있다


추가로 궁금한 사항은 송호수 박사님의 홈페이지가 없는 관계로 전화나 방문을 통한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 전화 738-7750, 이메일 songhosu@korea.com
- 110-240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94번지


< 한민족의 뿌리역사 - 앞글 >


믿거나 말거나
"우리의 뿌리 길은 이렇다"
애꾸눈 세상에 가면 두눈 가진 놈이 병신이다

중국적 사대사관,
일본적 식민사관,
서구적 실증사관

이러한 맹독성적인 사대주의 합병증은 끝내 무서운 불치병인 "국사치매환자"로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된 실성한 망령병 환자들에게 "우리의 뿌리의 길"은 이렇다고 !
외쳐봤자 적반하장으로 비웃을 것은 뻔하다

조상이 있어 나있고, 나 있어 조상 있다.
단군과 무관하다면 조선족이 아니지
그대는 조선족이 아닌가 ?

한얼님이 천만이라도 조상없이 못 태어나고
자손들이 억만이라도 조상없는 자손 없다

아무리 외쳐봤자, 짐승은 모르고 사람은 안다
믿거나 말거나 !
"우리의 뿌리 길은 이렇다"

단군조선 2천년은 세계 통치사의 기적이다.
2천년간을 이은 단일왕조가 단군조선 말고 또 있었던가 !
세계 문명사의 최초 최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동방에 군자국이 있다"고 했다

"단군신화"는 총독부가 1938년에 조작했다.
총독부 이전에는 우리 5천년사에 "단군신화"라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었다

총독부가 단군조선 없앤지 7년만에 패망했고 총독부가 퇴각한지 환갑이 다되도록
아직도 총독부 사학파 잔당들은 총독부가 검정한 "단군신화"를 믿고,
우리가 검증한 "단군실사"는 안 믿는다.

단군사의 진서를 위서라하고, 총독부의 "단군신화론"은 정론이라 한다

철들자 노망든다는데 노망들기 전에 철좀 들어라.
이미 나와있는 "단기고사, 한단고기, 규원사화"와 아직 공개못한 "홍사, 동국역대, 단서" 등 새로운 고전들을 서로 보완하여 대입시켜 엮었다

국민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풀어 쓴
우리 역사의 총체적인 진실이 여기에 있다


조선 4333(2천)년 상달 초사흘

개 천 제   한 터 송호수


< 사료의 멸실 원인 >


사료의 멸실원인은

첫째는 외세에 의한 사료의 타격(전쟁에 의한 방화, 탈취 등) 때문이요
둘째는 종교적외세에 의한 종교사대적 핍박 때문이다

첫째의 원인인 정치적 외세에 의한 사료적 타격은
줄잡아도 10대 수난사를 들수 있는데 즉,

제 1차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10월 위장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함하여 많은 사서를 소각함

제 2차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 연합군에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가 소진됨

제 3차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장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함

제 4차
신라 경순왕 원년(927) 후백제의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책을 전주(완주, 후백제 수도)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벌당할 때 방화 소각됨

제 5차
고려인종 4년(1126) 금나라에 서표를 바친 후 주체서적은 철수해 감

제 6차
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난으로 흘필렬에 의해 소각됨.
삼한고기, 해동고기가 이때 없어짐

제 7차
조선 태종 11년(1411) 5부학당을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교유학 서적 일체를 소각함

제 8차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典籍)이 방화에 의하여 소실됨

제 9차
병자호란(1636)때 아까운 사서들이 수없이 잿더미가 되어 버림

제10차
일본강점(1910) 이후 일본이 식민지 교육정책(조선사편수회)으로
군경을 동원하여 탈거, 개조 혹은 소각해 버림

그 첫 번째 원인은 이상에서 열거한 정치적 외세에 의한 사료의 멸실이요,
그다음 원인은 종교적 외세에 의한 핍박이니,
적어도 이나라 사서의 십대수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약간의 사료마저도 종교적 편견 때문에 사대적으로 곡필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옛날 단군조선에서는 신지고글(神誌高契)이 편수한 배달유기(제3세 가륵 3년 신축)가
있었다는 것이 단군세기에 명기되어 있고,
고구려에서는 유기 백권이 있었고,
그후 신라에서는 신라본기,
백제에 백제본기 등이 있었다는 것이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와 우리의 여러 고문헌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우리의 유일한 고사인 삼국사기는 사대성이 강한 유학자 김부식의 지휘하에 쓰여졌고,
삼국유사는 독실한 불승인 보각국사 일연에 의해 쓰여졌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애국적인 민족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듯이 삼국유사는 불교적으로 윤색되었고
삼국사기는 존화주의적으로 각색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민족사론은 왜래신교에 의해 한없이 천대, 삭탈 내지 박멸당하는
그런 비극적인 운명이 적어도 외래교세(한자로 된)의 유입 이후로 지금까지
약 1,600년간을 계속되었다

특히 상고사 분야는 위패조차 없는 무주고흔이 되어버리고 만 셈이다.
그런 중에도 그나마 외래신앙들이 밀어닥치면서 "미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천시하며 짓밟아버렸다

하기야 "애꾸눈 세상에 가면 두 눈 가진 놈이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라는
말이 있다

형편이 그리되고 보니 주인 신앙은 미신이고, 밖에서 굴러든 나그네 신앙은
정신격으로 되어진 것이 오늘에의 우리주변(단군상, 불상 손)의 신앙관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우리의 사서들이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은 이유로 거의 전부가 소각당했거나
아니면 약간의 잔존품이 있었던 것 마저도 후환(미신 등)이 두려워서
아주 깊숙이 은장될 도리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사서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더불어 고대로부터 원시 경전이 천우신조로 오늘에까지 보전되었으니
거기에 담겨진 사상을 추출하고 그 가치를 규명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 망실된 민족사의 재조명 >



우리 민족의 사서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고나 할까

명멸직전의 풍전등화처럼 되어진 처지에 놓인 천장지비의 이 희귀사서들이 멸실되기 직전에
천행으로 당시의 찬수관이었던 일십당 이맥(一十堂 李陌)의 손에서 간추려
졌다는 사실이다

일십당은 구서령을 내린 성종의 다음 대인 연산조에 문과에 등과하여 직간을 하다가 괴산으로 유배를 당한 사실이 있었다

그는 그 귀양지에서도 그냥 쉬지 않고 꾸준히 보기 드문 사서들을 모아 채록하는 것으로 나날을 보냈다고 되어있다

그러다가 그는 중종이 등위하면서 소환되어 찬수관직을 맡게되었다는 것이다
이 "찬수관"이란 직책이 전대(세종, 예종, 성종)에 거두어들인, 내각속의 비장서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직책이었던 것이다

여기가 바로 우리 민족 사서의 운명상으로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일십당은 귀양지에서 틈틈이 채록해둔 자료와 찬수관으로서 내각의 비장서에서 따 담은 사록들을 한데 묶어서,
당시의 정황으로서는 햇볕도 못볼 운명적인 사서, "태백일사"를 편찬해냈던 것이다

일십당 이맥이 찬술한 태백일사(海東人物志, 檀書에는 太伯遺史라 되어 있음) 가  
☞ "단서"는 송호수 박사님 소장 비서(秘書)중 한권

어떤 경위를 거쳐서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해학 이기(海鶴 李沂)의 소장서"로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해학 이기(海鶴 李沂 : 1848~1909) : 한국말의 우국지사,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

"해학 이기"는 망국의 울분을 못 이겼던 학자로서, "홍암 나철" 등과 10여명의 동지를 모아, 매국노 5적신을 권총으로 주살할 것을 결행하였으나, "권중현"만 부상을 입히고
실패하여 진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홍암 나철과 해학 이기는 구국투사로서 지기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육탄적인 구국방법은 이미 늦었음을 깨닫고 민족사관 정립에 의한 정신무장으로서의 거시적 구국운동
으로서의 방향전환을 하는데 뜻을 같이 하였다


정인보는 해학 이기의 "묘지명"을 썼고 또 "해학유서"를 교열했다

해학은 끝내 합방되던 해에 절식 자결하고 말았다
살신구국으로 일생을 불태운 해학의 문하에는 "운초 계연수(雲樵 桂延壽)"가 있었다

운초는 묘향산 석벽에서, 고운의 고각인 천부경을 탑본하여 정사년(1917) 정월 초 10일에 서울의 "단군 교당 도하(檀君 敎堂 道下)"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 송 박사님은 이 사건이 "천부경 유포"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고 있음


근자 일본사학계에서는 "한단고기"를 평가해 말하기를

"한국의 사적(史的) 고전으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정도밖에 알지 못했던 일본인들은 지금 여기에 새로운 고기를 알게 되면서 이것을 부상시켜 연구하고 있다. ......... 이
책은 만몽에서 중국 및 서역까지 비춰주는 주옥의 지보인 것이다"

라고 말하며 대단히 군침을 삼키고 있다

☞ 한단고기 : 해학 이기 선생이 교열하고 운초 계연수 선생이 편저(합편)한 책

- 삼성기 상 : 안함로 撰
- 삼성기 하 : 원동중 撰
- 단군세기  : 이  암 編
- 북부여기  : 범  장 編

-------------------------------------------------------------------------


< 이맥 李陌 : 1455(세조 1)∼1528(중종 23)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정부(井夫). 좌의정 원(原)의 손자이다.

1474년(성종 5)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뒤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4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곧 성균관전적에 제수되고, 이어서 벼슬이 누천되어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장숙용(張淑容)이 연산군의 은총을 기화로 호화주택을 짓고 축재에 광분함을 보고, 수차례에 걸쳐 이를 탄핵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외방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몰려나면서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사예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헌부장령을 겸하고서 관기확립에 힘썼다.

벼슬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는데,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

그동안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에 대해서는
조선 중기 중종 때 학자라는 것밖에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의외로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상당한 학식과 지위에 있었던 기개가 강건한인물로 밝혀졌다.

이맥은 공교롭게도 "단군세기"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행촌 이암의 현손(5세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암의 고손자다.

거꾸로 이야기 하면 이맥의 고조부가 이암이라는 이야기다.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에서부터 한국본기 신시본기에 이어서 고려국본기 까지 우리 고대사 전체를 서술한 사서인데 이암이 저술한 단군조선 부분만 빠져있는 것을 보면 가문에 전해진 무슨 유훈같은게 있어 그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 만을 저술하고 가셨기 때문에 남은 부분을 채워 고대 역사서를 완성한다는 취지에 의해서 그리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이다.

1911년 한단고기가 계연수에 의해서 편찬되었을 때 그책의 감수를 맡았고 당시 태백일사의 소장자였던 사람도 고성이씨인 해학 이기 인 것을 보면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잃어 버린 우리의 역사를 후손에게 알려야 한다는 지대한 민족적 소명에 의해서 이루어 진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코 우연한 일이라 할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배경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구서의 유시에서 알수 있드시 조선 제7대왕 세조에서부터 예종, 성종조 3대에 걸쳐 전국의 고서들을 수집을 한다.고대 사서를 소장 한자는 관가에다 갖다 바치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할정도로 살벌한 때이니 그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종 기축 9월(1469년9월) 예종실록을 보면 "상기 고대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로서 서울에 있는 자는 시월 그믐까지 승정원에 바치고, 바깥 지방으로서 도(道)에 가까이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그리고 멀리 있는 자는 12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에 바치게 하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 주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시켜 고발하게 할 것이다. 고발한 자는 위의 조항에 의거해 상을 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니 속히 안팎에 알리도록 하라"는 기사가 있다.

소지하는 것만으로 참형에 처해질 때인데 그런 책을 저술한다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목숨을 담보로한 민족적 신념과 의절의 정신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당연히 이책은 출판을 전제로한 책이 아니다.문밖을 나설수 없음을 이맥 스스로 잘알고 있었다.책을 저술하여 돈을 벌 것도 명성을 얻을 것도 아무것도 기대 할 수 없는 그런내용의 책이기에 그런 당시에 이런책을 저술한다는 것은 일신의 안녕을 저 버린 그야말로 진정한 민족혼과 애국심의 발로라고 하겠다.



< 나철 羅喆(1863~1916) >

대종교(大倧敎)의 교조(敎祖).

호 : 홍암(弘巖)
출생지 : 전남 순천
주요수상 : 건국훈장 독립장(1962)
주요저서 : 《삼일신고(三一神誥)》 《신단실기(神檀實記)》



호 홍암(弘巖). 전남 순천 출생. 벼슬이 부정자(副正字)에 이르렀으나,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1907년 매국(賣國) 대신들의 암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탄로가 나 신안군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특사로 풀려나 1909년 음력 1월 15일 중광절(重光節)에 대종교를 창시하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음력 3월 15일을 단군승천기념절(檀君昇天紀念節)로 정하고 대제(大祭)를 지냈다.

1916년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詞)에서 일제의 학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저서에 《삼일신고(三一神誥)》 《신단실기(神檀實記)》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정인보 鄭寅普(1892~1950.11) >

한학자 ·역사학자.
본관 : 동래
호 : 담원 ·미소산인
별칭 : 자 경업, 아호 위당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서울
주요수상 : 건국훈장(1992)
주요저서 : 《조선고전해설》(1931),《양명학연론》(1933)


본관 동래(東萊). 자 경업(經業). 호 담원(앳園) ·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 위당(爲堂). 서울 출생. 생부는 은조(誾朝)이며 백부인 묵조(默朝)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생모는 달성 서씨이며, 양모는 경주 이씨였다.

어려서부터 외삼촌 서병수(徐丙壽)를 통해 이건방(李建芳)의 휘하에서 양명학 등을 수학하였다. 1913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양명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역사에서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그의 학문관은 이때 기초가 이루어졌다.

1923년부터 연희전문의 전임이 되어 한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하였으며,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조선고전해설》(1931) 《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1933) 《오천년간 조선의 얼》(1935) 등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환기시키고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935년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 ·간행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에 따라 조선어강좌가 폐지되자 1938년 연희전문을 사임하고 전북 익산군에서 은거 중 8 ·15광복을 맞이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국학대학의 초대학장을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4월 장관 임영신이 관련된 독직사건의 처리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사직,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 ·25전쟁 때 북한군에게 피랍되었다. 199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실심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다.

저서에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이 있고 1985년에 《담원 정인보 전집》이 발간되었다.




< 이기 李沂(1848~1909) >


한말의 실학사상가·계몽운동가.
본관 : 고성
호 : 해학
별칭 : 자 백증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전북 만경
주요수상 : 건국훈장 독립장(1968)
주요저서 : 《해학유서》


본관 고성(固城). 호 해학(海鶴). 자 백증(伯曾). 전북 만경(萬頃) 출생. 실학(實學)을 연구, 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려다 김개남(金開男)의 반대로 구례(求禮) 자택으로 돌아왔다. 1899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할 때 양지위원으로 아산(牙山)의 토지를 측량하였고, 1905년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려고 나인영(羅寅永)과 미국에 가려 하였으나 일본공사의 방해로 가지 못하였다.

그해 일본에 가서 일본천황과 정계 요인에게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항의를 하였다. 그리고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항일운동과 민중계몽운동을 하였다.

1907년 나인영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이 일로 체포되어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珍島)로 귀양갔다.

석방된 후 서울로 돌아와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면서 민중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저서에 《해학유서》가 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디지털한국학 인물정보 외 참고 인용
* 야후 백과사전 인물정보 참고 인용


-------------------------------------------------------------------------




< 망실된 민족사의 재조명(2) - 송호수 박사 >


이제 사안을 국내사로 돌리되 그 국내사가 종전의 반도사가 아니고
광활한 대륙사임이 여기 저기서 새로이 일부 학자들의 피나는 연구 끝에 개발되어 다대한 수확을 올리고 있다

즉 삼국시대 강역에 관한 문제이다

경도대학의 우에다 교수가 "지금까지의 동양사를 새로 써야 할 것 같다"라고 주장한 중대한 이유는,
평양에서 서남으로 35키로지점에 있는 덕흥리 고분 발굴 때문이다

그 덕흥리의 고분에서 발굴된 상황 때문에 동양사를 새로 써야 하겠다고 우에다의 발표를 인용,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이 크게 보도한 것이다 (1980년 11월 12일자)

그 발표에 의하면
이 덕흥리 고분은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무덤인데
이 벽화에는 정무보고차 "진"에게 온 태수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태수들은 모두가
지금의 북경에서 내몽고에 이르는 지방을 맡은 태수들이었음이
그 고분속의 기록으로 보아 확인되었다고 한다

북경에서 내몽고에 이르는 지역을 고구려가 통치한 고구려 국토였음이 확실해졌으니
종전의 강역사는 휴지가 되어 버린셈이 아닌가 ?

그러기에 동양사를 새로 써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역사의 대혁신이 있어야 한다고 일본학자가 먼저 부르짖고 나서는 판에
오히려 우리 사학계에서는 무엇을 꾸물거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또 만주원류고가 지적한 북사, 당서, 수서 등 중국정사에서 고증한 것,
즉 신라의 국역이 만주의 3개성과 중국의 9개주까지였던 사실도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
(안호상 박사 : 배달동이는 동아문화의 발상지 p34 ~ 35)

다음 또 백제의 국역은
동성왕(제24세)조에 산둥반도 지방에서 7개군에 태수를 두어 통치했었고(남제서),

또 양자강의 좌와 우인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주서의 백제전이나 북사의 백제전 등 중국의 정사들이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놀랄 것은 백제 동성왕의 능까지 산동의 청도 서북에 있다(百支萊王之墓)는 사실이다 (임승국 교수설)

백제가 중국을 상당한 기간 통치한 것이다



< 삼국유사의 서(書)와 기(記) >



삼국유사에 나오는 "위서운(魏書云)"의 위서는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고
"위서"라는 사서책이다

즉 중국측의 위나라 사서인 것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명을 보면,
"한서, 후한서, 진서, 송서, 남제서, 위서" 등 모두가 서(書)로 되어 있다

고로 "위서"란 신화나 전설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런데 근자에 1938년 총독부에서 조선사 38권에 공식문서로 처음 등장하는 "단군신화"란 용어를
고전고적들이 역사적인 근거가 없어서 못 믿겠다는 오늘의 과학문명사회에서 "단군신화"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총독부 산물이다

왜적들이 우리의 민족정기가 서린 민족정사를 말살하려는 정략으로
단군사를 "신화"라고 하니까,  

그 정략속에 독소가 비장된 줄 모르고,
우리 스스로가 오히려 덩달아 "단군신화" 운운하는 것은 이 나라 사학계의 씻지 못할 큰 죄과이다

통탄하다 말고 오히려 가소롭기만 한 것 아닌가 !
우리 5천년사에서 "단군신화"라는 기록은 총독부 말고 어디에도 없다

또 "고기(古記)"라 하였는데 고기 라는 이 기(記) 역시 옛것을 기록한 책이 아닌가 ?
예컨대 옛 사서에 대한 기록에 "기"라고 한 책이 우리 것에 많다

특히 중국측에는 "서(書)"가 많고 우리역사에는 "記"자가 많이 달려있다

즉, 배달유기, 고조선기, 후조선기, 단군세기, 조대기, 삼성기, 삼성밀기, 고조선비기 등
모두가 우리 주변의 사서들에 적혀 있는 책들의 이름이다

이 "기" 역시 엄연히 역사를 기록한 서적들이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다

만약에 "전설운(傳說云)" 하였던지 "신화운(神話云)" 했으면 몰라도
"고기운(古記云)", "위서운(魏書云)"이라고 되어 있는데도
"단군신화"라는 신화가 붙은 차명을 내세우는 것은 학구적인 투시력이 아니다

그 "고기"나 "위서"가 어떻게 되어 있으며 또 어디에 있는가 ?
왜 어째서 주변에서 사라졌을까 ?
하고 탐색하는 것이 보다 예리한 효율적인 학구방법일 것이다

조건없이 손쉽게 얻어 볼 수 없다고 해서 명목만 남아 있는 유령적인 사서인양
몰아부쳐 일축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중략)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삼국유사를 쓴 일연승(1206~1289)은 고려말기 25대 충렬왕 때의 사람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몇가지 고기들이 있었다

그것은 즉 고기들이 확실이 있었다는 증인은 조선조의 세조, 예종, 성종 등의 3대왕이다

일연보다 약200년 후에 집권한 분이 세조대왕인데,
세조대왕의 유시에 의한 수상서목들이 거의 전부가 "記, 紀"자가 붙어 있는 서목들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시대에는 물론이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가 세조보다 200년 전인데 그러한 종류의 고기들이 그 때에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 일연이 인용한 위서는 중국에서
"동이(東夷)를 자랑하고 중화(中華)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없애버렸다고 한다
(단단학회 : 커밝한 문화사상사 p29)

(다음시간에 계속 ....)

------------------------------------------------------------------------------------------------

< 운영자 후기 >


▒ 삼국유사 "위서"부분은 설란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하였사오니 참고바랍니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행태는 이제는 중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민족혼을 팔아먹는 짓은 매국보다 더한 짓입니다.
멀쩡한 사람들 바보 만드는 역사교육 제발 정정되어야 합니다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 아닙니까 ?


▒ 보완자료 조선왕조실록 "수거령"관련 사서목록


< 세조 3년 5월 26일 >


세조 3년 5월 26일(무자) :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 대변설(大辯說)
- 조대기(朝代記)
-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誌公記)
-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 동천록(動天錄)
- 마슬록(磨쳗錄)
- 통천록(通天錄)
-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 예종 1년 9월 18일(무술) >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志公記)》
- 《표훈천사(表訓天詞)》
- 《삼성밀기(三聖密記)》
- 《도증기(道證記)》
-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명경수(明鏡數)》 및
-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 성종 원년 12월 9일(무오) >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志公記)》
- 《표훈천사(表訓天詞)》
- 《삼성밀기(三聖密記)》
- 《도증기(道證記)》
- 《지리성모(智異聖母)》
- 《하소량훈(河少良訓)》
-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 《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

9200년 우리역사의 맥이 단 100여년만에 말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해방이후 단군관련 비서들이 하나 둘 세상에 나타나고 있으나 "진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나 필사본, 복간본 등으로 하나 둘 이세상에 빛을 발하고 있으니 그 "진본"이 이땅에 나올 날도 멀지 않았음이라


< 단군관련 "비서" 목록 >


1. 상고, 삼국시대
- 신지비사 (단군조, 신지선)
- 해동비록 (저자미상)
- 신지비사역술 (고구려 대영홍 著(저))
→ AD1412 년경 (조선 태종 12년경) 소각

2. 발해
- 단기고사 : 고왕천통 9~21, AD 707~719 대야발 撰(찬)
→ 1959년 기해복간본 현존
→ 1968년 "민족정사"로 계승 (윤치도 저)

3. 통일신라
- 제왕연대력 : AD 890년경, 진성여왕 20년경 고운 최치원 저 (삼국유사보다 약 390년전)
→ 1929년 기사 필사본 현존 (홍종국씨 소장)
→ 1957년 "해동춘추"로 계승(박장현 찬)

4. 고려

(1) 초 중엽

< 조대기 > : AD 926년 발해 멸망시 대광현 등 유민들이 고려에 망명귀화 할 때 가지고 온 고조선 역대실기 (삼국유사보다 약 350년전)
→ 일제때 압수, 소각
→ 고려말엽 "진역유기"로 계승 → 조선말엽 "규원사화"인용기록

< 조대기 계승 사서들 >

① 삼성기 : 고려중엽
- 삼성기 상편 (안함노 저)
- 삼성기 하편 (원동중 저)
→ 일제때 압수 소각
→ 1911년 계연수 편저 "한단고기"로 계승

② 저자미상 도가사서
- 고조선 비기(사) (표훈천사)
- 삼성밀기 (도증기)
- 지송기 (대변경)
- 삼한합유기 (동천록)
- 신선전 (지화록)
→ 일제때 압수 소각
→ 조선말엽 규원사화(단군실사)로 계승

(2) 말 엽

① 진역유기(3권) : 청평도사 이명 저술(삼국유사와 거의 같은시기)
→ 일제때 압수소각

② 단군세기 : AD1283년경 고려 충렬왕 9년경 이암 저
→ 일제때 압수 소각
→ 한단고기로 계승 (1911년 계연수 편찬)

5. 조선말엽

- 규원사화 (단군실사) : AD 1675년 조선 숙종 원년 3월 상순 북애자저, 고 양주동 소장 필사본 현존, 소위 도가사서중 최고의 것
☞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
- 동사서는 고려시대 조대기 및 앞서 언급한 도가사서 인용
→ 일제시대 "신단실기"등으로 계승

6. 일제시대

① 한단고기 : 고려시대 삼성기 상, 하, 단군세기 계승(1911년 계연수 편찬)

② 규원사화 계승본
- 신단실기 : 1914년 김교헌 저
- 동사년표 : 1915년 어윤적 찬
- 조선사략 : 1924년 김종한 저
- 대동사략 : 1928년 김광 저
- 조선역사 : 1934년 이창환 저
- 조선세가본 : 1938년 윤재구, 서계수 공저

7. 광복후

- 통일신라 제왕연대력 계승
·해동춘추 : 1957년 박장현 찬
- 발해 단기고사 계승
·민족정사 : 1968년 유지도 저


< 단군조선의 사서별 제왕 역대표 >




 no 
 subject 
 name 
 date 
hit
185
 (출간환영/송종성) 삼국사기 초기기록(무서운 책입니다) [7]

안원전
2007/05/23 6101
184
 [다시 보는 한국역사]<7>부여족과 불가리아

안원전
2007/05/23 6791
183
 새로 쓰여져야 할 우리들의 역사 [6]

안원전
2007/05/18 6309
182
 한겨레 참역사2 [2]

안원전
2007/05/05 6521
181
 한겨레 참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가! 1

안원전
2007/05/05 6315
180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될 수 없는 7가지 이유

안원전
2007/04/14 5382
179
 (우실하) 중국의 역사관련 공정의 최종관 '요하문명론 [2]

안원전
2007/04/01 6247
178
 (홍보물) 일만년 천손민족의 역사 [76]

안원전
2007/04/01 6358
177
 (1일요청자료/집중조명) 당태종이 연개소문과 산동성에서 전쟁을 하여 패배하다 ! [4]

안원전
2007/04/01 6435
176
 (崔在仁) 國立서울大 盧泰敦 敎授 著書인 '檀君과 古朝鮮史'의 問題點을 批判한다

안원전
2007/04/01 6473
175
 《黃帝故里故都歷代文獻匯典》學術研討會紀要

안원전
2007/03/27 5017
174
 愛新覺羅의 논리적 증명 By 소나무 [5]

안원전
2007/03/27 5950
173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1]

안원전
2007/03/26 5408
172
 東夷族(동이족)의 우월성

안원전
2007/03/16 6204
171
  서방족과 황제 헌원 [1]

안원전
2007/03/15 6437
170
 한단고기 기행문 (하 용철 방송인)

안원전
2007/03/15 6432
169
 동이족은 왜 우리 민족이 될 수 없는가 [2]

안원전
2007/03/15 6020
168
 `중국판 단군` 황제 헌원 제사 우리는 한 핏줄` 13억 동족애 과시 [중앙일보]

안원전
2007/03/15 5667
167
 대한민국의 역사뿌리 중국으로 왜곡되어있다.

안원전
2007/03/15 5503
166
 중국사람이 말하는 단군의실존

안원전
2007/03/15 5823
165
 <근대 한민족사 엑스파일> 대륙조선은 어떻게 한반도로 축소되었나 ?

안원전
2007/03/13 6805
164
 장개석이 이시영 임시정부 전부통령에게 한 질문

안원전
2007/03/12 6091
163
 한반도백제와 중원대륙백제 (1) : 조국 백제의 재인식을 향하여 임승국

안원전
2007/02/18 7054
162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

안원전
2007/02/14 5884
161
 제목 : (중화패권주의 기사)주은래마저 매국노로 몰린다 [1]

안원전
2007/02/14 6464
160
 동이족의 뿌리는 묘족, 조상은 환인 [한민족] 율곤 이중재 선생의 한민족 뿌리찾기

안원전
2007/02/10 6999

 홍사(鴻史) B.C267년 공자(孔子)의 7세 후손인 공자순(孔子順)이 서문을 쓰다 (송준희) [1]

안원전
2007/02/03 11474
158
 중국의 거대한 음모- 화샤일통(華夏一統:모든 소수민족역사를 화화권 역사 하나로 버무려 통일한다) [1]

안원전
2007/02/02 6475
157
 선도 문화와 한국 혼(박성수)

안원전
2007/01/26 6966
156
 신라의 뿌리는 초나라.

안원전
2006/12/31 7246
155
 최초 확인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1]

안원전
2006/12/28 6402
154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안원전
2006/12/19 7949
153
  켈트신화의 전쟁신이며 가장 높은 天神 치우에 대한 노르딕 전승-고대 독일방언으로는 '찌우', 전승켈트어로는 '티우'/Tiw Tuesday는 바로 Tiw's day에서 유래 [323]

안원전
2006/11/21 8205
152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한겨레21 [2]

안원전
2006/11/12 7039
151
 잊혀진 왕국 제(齊) (특집:齊나라)

안원전
2006/11/12 6161
150
 달마동은 치우동(coo2.net)

안원전
2006/11/12 5759
149
  정용석,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

안원전
2006/11/12 6881
148
  이것이 적봉유역에서 발견된 <배달국, 고조선 유적>이다

안원전
2006/11/06 7322
147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될 수 없는 7가지 이유

안원전
2006/11/04 5745
146
 단군은 곰의 아들 아니다 -문헌상 기록들- [1]

안원전
2006/11/04 6929
[1][2][3][4][5][6] 7 [8][9][10]..[11]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Styx

?/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