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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제국의 건설자, 당태종 이세민
당제국의 건설자, 당태종 이세민  


당제국의 건설자, 당태종 이세민
           시기가 되면 신속한 결단이 필요하다

오정윤(꿈나무미래학교 교장, 명지대 문화콘텐츠과 교수)


역사는 도덕적인 원칙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첨예한 이익의 다툼이 있어야 비로소 꿈틀거린다. 비정과 음모가 뛰어난 천재적인 정치가는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결단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악독한 수단, 무고(誣告), 반란, 살육을 저지르고, 뒤이어 예의도덕과 정의를 부르짖으며 통치질서를 수립한다.

당나라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구현하여 ‘정관(貞觀) 년간의 다스림(貞觀之治)’이라고 찬양을 받은 당태종 이세민이 바로 위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결단의 순간에 부딪히자 형제(兄弟)와 부자(父子) 사이의 인정과 의리를 일거에 버리고 가차없이 그들을 처치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냉혹한 면모를 역사에 남겼다.

이때는 당(唐)나라 무덕(武德) 9년(서기 626년) 6월 4일 오전이었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성은 당대(當代)의 제일가는 국제도시로 매우 번잡하고 발전한 도성이었다. 황성(皇城)의 내성(內城)에 위치한 해지(海池)라는 인공못에는 오색으로 치장된 화려한 범선(帆船)이 두둥실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선상(船上)에는 당고조(唐高祖;618-626)) 이연(李淵)이 조정의 대신인 배적(裵寂;570-632), 소우(蕭瑀), 진숙(陳叔)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으며 궁녀들은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당고조 이연은 이미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아직도 입궁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어젯 밤에 이연의 둘째아들인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은 황제에게 밀서를 올려 태자 이건성(李建成?-626)과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626)이 ‘후궁들과 음란한 짓’을 저질렀고, 또한 이들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다.

“세민은 결코 형제(兄弟;이건성은 형이고, 이원길은 동생)를 업신여기지 않았는데, 그들은 도리어 저를 해하려고 합니다. 마치 왕세충(王世充)과 두건덕(竇建德)이 복수하려는 태도와 같습니다. 세민은 지금 죽어서 부황(父皇)과 영원히 이별하고, 혼령이 명계(冥界)에 이르러 왕세충과 두건덕을 만났다해도 결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없이 당당하다고 자신합니다......”

당고조 이연은 세민이 올린 밀서에서 건성과 원길이 후궁들과 음란한 짓을 저질렀다고 고발한 일은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고, 세민의 실질적인 의도는 왕세충과 두건덕을 내세워 당(唐)을 건국하는데 가장 공로가 많은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세민은 양세충과 두건덕의 세력을 격파하여 당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따라서 태자인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은 점차 세력이 강대해지는 진왕 이세민을 일찌기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이세민은 이에 당고조 이연에게 두 사람이 자신에게 독수(毒手)를 가하고자 일을 꾸민다고 고하였다.

이연은 밀서를 모두 읽고 이세민에게 곧바로 통보했다.
“내일 밀서의 내용을 조사할테니 입궁하라.”

또한 이연은 태자와 원길에게도 똑같이 입궁을 하도록 지시하고, 배적, 소우, 진숙과 같은 조정의 원로도 입궁시켜 세 명의 불화를 해소시키려고 생각했다.

이연은 이를 위해 특별히 해지(海池)에 배를 띄우고, 대신들과 함께 세 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세 명의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연(李淵)은 본래 수(隋)나라의 대신으로, 대업(大業) 11년(서기 615년)에 수양제(隋煬帝)에게 발탁되어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이 되었고, 계속해서 태원도(太原道) 안무대사(安撫大使)를 거쳐 태원유수(太原留守)에 올라, 장안성의 동쪽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역량의 핵심적인 중추를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에 수나라는 무모하게 세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실패하고, 수년에 걸친 기근(饑饉)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특히 수양제의 폭정으로 천하의 백성들이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되자, 지방을 할거하고 있는 장수들과 농민수령들이 각지에서 다투어 봉기를 일으켰다.

수나라 군대와 봉기군들은 주로 하북, 하남, 강회(江淮;양자강과 회수 지역)지역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며, 수양제가 친히 머물고 있는 진강도(鎭江都;지금의 강소성 양주시)를 중심으로 산서와 장안 일대만이 그나마 평안을 유지하였다.

이연의 군대는 바로 이 지역 일대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력이었다.

산서(山西)는 태산(泰山)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중원의 척추(脊椎)라고 불렸다. 이곳은 거주민이 많았으며, 나라의 양식(糧食)을 보관하는 중심지였으며, 문사(文士)들이 집중된 요지였다. 이곳의 백성들과 문사들은 한결같이 이연의 수중에 넘어가기를 희망했다.

이연은 천하를 도모하는 일에 좀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지방의 세력과 은밀히 연락의 끊을 놓지 않으며, 천하의 정세를 관망하였다.
수나라 대업 13년(617년) 7월, 이연은 모든 준비가 충분하고, 수나라 정권이 벼랑의 위기에 몰리자 돌연 봉기를 하고 장안으로 향하였다.
이연의 장자인 이건성은 좌로3군(左路三軍)을, 차자인 이세민은 우로3군(右路三軍)을 이끌고 분수(汾水)와 위수(渭水)를 따라 진격하여 그 해 11월에 장안성을 공격하였다.

이듬해 수양제는 강도(江都)에서 신하들에게 살해되고, 이연은 장안성에 입성하여 수나라를 멸하고, 국호를 당(唐), 년호를 무덕(武德)이라 정하였다. 당나라를 세우는데 공이 큰 세아들, 즉 장자 이건성은 태자로, 차자 이세민은 진왕(秦王), 넷째 이원길은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이연에게는 본래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셋째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세아들은 모두다 능력이 뛰어나 이연이 천하를 얻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큰 아들 이건성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어질고 관대한 성품을 가졌다. 둘째아들 이세민은 용기있고 의연하며, 과감하고 지혜로웠다. 특히 배짱과 인내가 출중하여 기회가 오면 전력을 다해 뛰어들어 쟁취하고야 마는 집념이 뛰어났다. 셋째 원길은 다급하고 정열적인 성격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였다.

이연은 태원에서 기병(起兵)하였을때 군의 지휘권을 모두 가족에게 일임하였다. 자신은 전군(全軍)을 직접 통솔하고, 좌우군은 건성과 세민에게 맡겼으며, 원길에게는 태원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하여, 후방의 안전과 보급을 담당케 하였다.

이연의 세 아들 중에서 재능과 지혜 면에서 보면 이세민이 단연코 뛰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 익히기를 좋아했으며, 독서는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다. 그는 흉중에 대의를 품고 스물이 되기도 전에, 수나라의 조정이 위기에 빠져들자 암암리에 재력을 기울여 각지의 영웅들과 교분을 맺으며, 천하를 얻고자 하는 목표를 하나씩 이루어갔다.

기병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도 이연(李淵)은 매우 염려를 하며 신중하게 처리하였지만, 이세민은 적극적으로 부친을 설득하고 시기를 재촉하였다. 이때에 이미 이세민은 천하에 뜻을 두고있는 야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었다.

이연이 장안성을 점령 하였을때는 아직도 각지에서 기병한 영웅들이 천하를 할거하는 상태였다. 이때는 서로 왕을 칭하고 황제를 자처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누가 최후의 승리를 얻을지 판단할 수 없는 때였다.

군웅할거의 국면은 무덕 원년(618년)부터 무덕 7년(624년)까지 무려 7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당나라는 이때 6차례의 커다란 전투를 치루고 나서야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세민은 천하사방을 누비며 각지의 군웅을 제압하고, 중원의 세계를 당(唐)나라의 천하로 일원화 하는데 특수한 공로를 세웠다. 당나라 천하의 반은 그가 싸워 빼앗아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세 아들 중에서 유독히 이세민이 공을 세우게 된데는 물론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역대로 황실의 관습에 따르면 태자는 황권(皇權)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줄곧 외정(外征)에 나서는 예가 극히 드물었다. 태자는 주로 궁중에서 황제의 국정을 도우고, 중앙의 권력구조를 안정시키는게 주요한 임무였다.

이러한 이유로 태자 이건성은 장안성을 점령한 이후 그다지 공로를 세울 수가 없었다. 이는 이건성의 군사적 재능이 없는 문제와는 별개였다. 실제로 태원에서 기병하여 장안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이건성의 군사적 재능은 이세민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태자라는 특수한 지위때문에 그는 이세민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가고 있을때 궁중에서 안타까운 세월만 보내야했다.

이세민이 지휘한 주요 전투는 크게 네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설거(薛擧;?-618), 설인과(薛仁果)부자를 평정한 전투를 들 수 있다. 설씨는 수나라 시기에 감숙성 지역에서 세력을 갖고있던 대부호 집안이다. 그들은 대업 13년(617)에 수나라를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고 그 해 7월에 칭제(稱帝)를 선언했다. 이연이 태원에서 봉기하여 장안을 공격하는 시점에, 설거 부자도 농서(隴西)에서 장안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쌍방의 의도는 중원의 중심지를 점령하여, 천하 제패의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전술이었다.

이연보다 한발 늦게 장안성에 도착한 설거 부자는 부득이 뒤로 물러나 진을 치고 이연과 팽팽하게 교전하였다. 밀리고 밀리는 각축전이 연일 계속되어 쉽게 어느쪽이 승리를 한다고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세민은 이 전투에서 서토원수(西討元帥)를 맡아 1년여의 전투를 치룬 끝에 드디어 30만에 이르는 설거 부자의 병력을 철저하게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당(唐)의 세력은 관중(關中)의 근거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는 한(漢)의 대장군 한신이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중(漢中)을 돌파하고 삼진(三秦)을 평정한 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주요한 싸움이었다.

둘째는 유무주(劉武周;?-622)를 평정한 전투이다. 유무주는 마읍(馬邑;지금의 산서성 삭현)의 호걸로 대업 13년(617) 2월에 기병하였다. 그는 중국 북방의 강대한 유목민족인 돌궐족(突厥族)의 지지를 받고 있다가, 당 무덕 2년(619년) 4월에 이연의 주력군이 장안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대부분 주둔하게 되자, 이 해 9월에 그 허점을 타고 이연의 근거지인 산서성의 태원을 공격하였다.

이 해 11월에 산서로 출정한 이세민은 이듬해 4월까지 빼앗긴 대부분의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곳은 중원의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태산의 동쪽과 남쪽을 공격하는 세력의 배후를 치는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이었다. 이곳을 사수한 당나라는 이후 공격의 방향을 동쪽과 남쪽으로 돌릴 수 있었으며, 통일의 조건을 좀더 빨리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는 왕세충과 두건덕을 평정한 전투를 들 수 있는데, 이제까지 이세민이 지휘한 병력의 규모에서 제일 많았고, 공로면에서도 가장 의의가 컸으며, 또한 가장 힘겨운 전투였다.

이세민이 당고조 이연에게 보낸 밀서중에 특별히 건성과 원길이 자신을 해하려 하는 태도를 들먹이며, 마치 왕세충(王世充;?-621)가 두건덕(竇建德;573-621)이 복수하려는 태도와 같다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왕세충은 수나라의 가장 용맹한 장수로, 당나라 무덕 원년(618년)에 가장 큰 규모의 농민봉기군인 와강군(瓦崗軍)을 격파하고, 이듬해 4월에 동도(東都) 낙양(洛陽)에서 황제를 칭하고 정(鄭)나라를 세웠다.
두건덕은 하북과 산동 지역에 봉기한 농민군의 우두머리로 수나라 말기에 하(夏)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무덕 3년(620년) 7월, 이세민은 유무주를 평정하고, 이연으로부터 왕세충의 근거지인 낙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세민이 이끄는 병력은 하남(河南)으로 내달으며 낙양성 주변의 도시를 일거에 함락시켜 나갔다. 이세민의 의도는 낙양성으로 통하는 보급로와 연락선을 모두 끊어놓아 낙양성을 고립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왕세충과 이세민의 병력은 낙양을 사이에 놓고 수개월간 팽팽하게 대치하였다. 이듬해 3월, 하왕(夏王) 두건덕은 왕세충의 지원요청을 받고 하북의 십만대군을 이끌고 돌연히 이세민의 배후를 공격화였다. 앞뒤로 공격을 받은 이세민은 우선 최고의 정예병을 차출하고 두건덕과 일대 격전을 준비하였다. 호뇌(虎牢;지금의 하남성 형양현 사수진)의 일전이라 불리우는 이 전투는 소수의 정예부대인 이세민의 군대가 다수인 두건덕의 대군을 일거에 급습하여 괴멸시키면서 끝을 맺었다. 왕세충의 부대는 결국 외부의 지원을 받지못하고 낙양성에서 이세민에게 쓰디쓴 패배를 맞고 말았다.

10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당나라는 하남, 하북, 산동을 평정하고 중원의 중추를 장악하게 되어서 통일왕국을 공고화 하는데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하였다.

당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이세민을 찬양하는 시에서 ‘충(充;왕세충)을 잡고 두(竇;두건덕)를 죽이니 천하가 평안해졌다(擒充戮竇四海淸)’라고 극찬하였다.

네번째는 유흑달(劉黑闥;?-623)을 평정한 전투이다. 유흑달은 두건덕의 부장으로 호뇌전투에서 패한뒤 잔여부대를 이끌며 항전하다가, 무덕 4년(621년) 7월에 하북의 남부에서 재차 기병하였다. 그 세력이 점점 확대해가자 그 해 12월, 이세민과 이원길이 정토(征討)부대를 인솔하고 3개월에 걸친 토벌전을 펼쳐 쉽게 승리를 얻었다.

하지만 유흑달은 체포를 면하고 패주하여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렸다. 이에 태자 이건성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 지역을 관장하였다. 이건성은 진압과 위무(慰撫)라는 양면작전을 구사하여 유흑달의 잔여부대를 대부분 당에 귀순시켜 봉기 자체를 무력화 하였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이건성도 이세민에 못지않게 군사적인 능력과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나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봉건전제 정치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앙의 병권은 태자와 기타 황자(皇子;황제의 아들)가 분할하여 통솔하였다. 이러한 전략의 특별한 장점이라면 군사력을 장악한 태자와 중앙정치의 여러 부문이나 조정대신들 사이에 안정된 균형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서 약점이라면 태자가 공훈이 적거나 무력하면, 인위적인 정치적 안배나 황권(皇權)의 적자계승이라는 도덕원칙은 태자의 현실적 지위에 연계되어 쉽게 흔들린다는 점이다. 만일 여러 황자들의 공훈이 크거나 능력이 대단하면 태자의 지위나 성망(聲望)은 심각한 영향을 받게된다.

당나라 초기의 황실은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당고조 이연은 봉기를 성공시켰으나 본래부터 특출한 군사전략가가 아니었다. 이연은 전쟁이라는 처절한 과정을 두려워 하였으며, 넷째 이원길은 용맹은 하였으나 정치적 재능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이연은 대부분의 중대한 결정을 이세민에게 의탁하였다.

이세민은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능력이 뛰어낫고 또한 야심도 만만치않아 이러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는 모든 전투에 친히 나가 어떠한 위험도 므릎쓰고 승리를 났아채 한걸음씩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천하의 정세가 점차 안정되어갈 무렵에 이르러 이세민의 위망과 세력은 태자 이건성을 압도할 지경이었다.

무덕 4년(621년) 7월, 이세민은 포로로 잡은 왕세충과 두건덕을 압송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장안성에 입성할때 대대적인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나이 스무 세살이었던 진왕 이세민은 황금갑옷을 입고 위풍도 당당하게 성문에 들어왔다. 1만기의 기병이 앞장서고 그 뒤를 이세민이 따랐다. 25명의 장군들이 이세민을 호위하고, 그 앞뒤로 군대 취타대가 개선곡을 연주하였다.

장안성의 주작대로에 몰려든 백성들은 이세민을 우러러 보면서 감탄과 환호를 끊임없이 보냈다. 이세민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며칠 전 낙양성에서 발생한 사건을 떠올렸다.

그 날, 이세민은 부중(府中)의 핵심 참모인 방현령(房玄齡;578-648)과 평복(平服)을 하고 성내에 유명한 도사 왕원지(王遠知)를 만났다. 두사람이 왕원지가 머물고 있는 곳에 이르렀을때, 그가 밖으로 나오면서 이세민에게 가장 공경스러운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가운데에 계신분은 혹시 진왕(秦王)이 아니옵니까?”

이세민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원지는 계속 말했다.
“대왕의 몸에서는 태평천자(太平天子)의 기운이 넘쳐 있습니다. 삼가 보중(保重)하십시오.”

이세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웃음만 지었다. 하지만 그 날 발생한 일은 이세민에게 심각한 인상을 남겼다. 잠에 들어서도 천하를 태평스럽게 다스린다는 ‘태평천자’라는 말이 머리에서 맴돌아 한 숨도 이루지 못했다.

이세민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일은 방현령이 사전에 각본을 짜고 만든 계획이었다. 방현령은 진왕부(秦王府)에서 가장 심계(心界)가 깊고 이세민의 심사(心事)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세민이 출정하여 각지를 정복 하였을때, 많은 장수들은 재물을 모으기에 바빴지만, 방현령은 오히려 관부(官府)의 문서와 서책을 수거하여, 그 지방의 문사(文士)에게 넘겨 이세민의 신망을 얻어냈다.

이세민은 방현령이야말로 일평생 진왕부(秦王府)의 참모로 있을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미 왕원지를 안배한 계획을 통해서도 이세민을 태평천자로 만들려는 야망이 드러났다.

이세민도 물론 그런 야망이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자신의 참모 중에 몇 명이 죽음을 무릎쓰고 대사(大事)에 동참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다는데 있을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이미 태묘(太廟)에 이르렀다. 이연은 그곳에 성대한 주연을 베풀고, 고제(古制)에 따라 ‘음지(飮至)’의 예를 거행하였다. 음지의 예는 황제가 장군에게 술잔을 내려 공훈을 치하하고, 장군은 황제에게 전과를 보고하는 예식이었다. 태자 이건성은 이세민의 어깨를 부여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둘째의 공훈은 천하를 덮고도 남는구나.”
형제는 서로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이 해 10월, 이연은 세민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새로운 관호를 내렸다. 이는 세민의 공훈에 합당한 관명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세민은 매우 득의만만 하였지만, 이연이 태자의 지위를 바꿀 의도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세민은 천하가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구실을 붙혀 천책부(天策府;진왕 이세민의 거처)에 문학관(文學館)을 설치하여 사방에서 문사(文士)들을 초청했다. 그중에는 가장 유명한 것은 18학사(十八學士)였다. 이 18학사는 세개 반으로 나뉘어져, 서로 돌아가며 부중에 남아 있다가 이세민이 궁중에서 돌아오면 함께 시국이나 정책에 관해서 토론을 가졌다.

알고보면 문학관은 문학(文學)을 수양하는 곳이 아니었다. 18학사도 결코 학자가 아니었다. 바로 이세민이 양성하는 참모단이었다. 그 18학사에는 앞뒤로 재상을 역임하게 되는 방현령과 두여회(杜如晦;585-630)는 물론이고 후대에 정관지치(貞觀之治)로 불리는 시대에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었다.

태자 이건성도 용렬하거나 평범한 인재가 아니었다. 그의 수하에도 수많은 인재가 포진하고 있었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현사로 불리우는 위징(魏徵;580-643)은 물론이고 왕규(王珪), 위정(韋挺)과 같은 걸출한 협의지사도 있었다.

무덕 5년(622년)말, 하북에서 유흑달이 제2차 기병을 하자, 위징이 이건성에게 건의했다.

“진왕의 기세가 천하를 덮고 있습니다. 태자 마마는 그동안 궁중에 있었기에 백성의 신망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출정하십시오. 하북을 평정하고 그 지역의 인재와 교분을 맺어서 후방의 교부보를 확보 하셔야 합니다.”

이건성은 혼쾌히 찬성을 표시하고, 이연의 허가를 받아 위징과 함께 토벌전에 나섰다. 이 토벌전의 성공으로 이건성은 각종 정치적 포석을 선점하고 하북 지역에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세울 수 있었다. 아직은 이세민의 공훈을 능가할만한 전공은 아니었지만, 태자의 재능을 세상에 떨치기에는 충분한 기회였다.

또한 이때에 이건성은 동생 이원길을 대동하여 토벌전에 나섰다. 이유는 단 하나, 이세민에게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펴려는 의도였다. 두 세력의 연맹은 현저히 이세민에게는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동안 원길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건성은 이를 알고 그에게 태제(太弟)라는 직위를 허락하고 황위계승인으로 삼았다.

이세민과 이건성의 대립은 이미 수면 위로 부상하였다. 쌍방은 있는 힘을 다하여 방법을 구상하고, 함정을 설치하고, 상대방을 무력화 시키는데 자신의 역량을 쏟아부었다.

원길은 후궁의 세력을 포섭하는데 있어서도 이세민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이연은 말년에 향락을 추구하여 수많은 후궁에게 은혜를 내려 이미 20여명에 가까운 자식을 낳았다. 소황자(小皇子)들의 어머니인 후궁들은 향후의 신변보장을 위하여 정세면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는 태자에게 기울었다.

태자 이건성은 후궁들이 부친의 주변에서 자신을 좋게 말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친어머니처럼 받들면서 진귀한 선물을 자주 보내 환심을 샀다.

특히 소문에 의하면 이건성은 부친이 가장 총애하는 장첩여(張婕妤), 윤덕비(尹德妃)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물론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어쨋든 이건성은 황제의 주위에 듬직한 선전기구를 두었고, 실제로 그녀들은 정보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세민이 밀서에서 태자가 후궁과 음란한 짓을 저질렀다는 고발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성격이 불같은 이세민도 감히 태자의 비행을 들먹이며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자제할 수 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다른 방법을 통해 궁중에 선을 연결하였다. 그는 전장에서 많은 재물을 축적하고 그것을 궁중에 유입시켰다. 이 일은 주로 이세민의 정부인인 장손씨(長孫氏)가 맡았다. 그녀는 정치적인 감각이 뒤어난 여자로서, 남편의 사업을 위하여 주로 궁중에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거만하지 않고, 공손하며 선량한 성격과 태도로 궁중의 궁녀와 비빈들을 대하였으며, 지위가 낮은 많은 사람들과 은밀하게 교분을 맺었다.

당고조 이연은 군사적 재능은 떨어졌지만 결코 용렬한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여자를 좋아했지만, 여자의 정치간여는 일체 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따라서 총비(寵妃)들의 이연에 대한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따라서 후궁의 세력이 형제 사이의 승패를 가름짓는 결정적인 요인은 되지 못했다.

현재 사서에는 후궁의 영향력을 오히려 과장하였는데, 이는 여자가 조정의 정사에 간여함으로써 입게되는 폐해를 강조하다 보니 확대조장 되었거나 견강부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정치적인 재능과 감각을 가진 이건성과 이세민은 모두 인재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정성과 재력을 기울여 인재를 초청하고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또한 서로의 인재를 매수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이건성은 어느 날, 이세민의 막하장수인 위지경덕(尉遲敬德;585-658)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고 존비(尊卑)를 초월하여 친구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위지경덕은 단호히 거부하고 이를 이세민에게 보고했다. 이세민은 매우 아깝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장군은 어찌하여 받지 않았소? 나는 장군의 집에 보물이 가득하다고 해도, 결코 장군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오. 선물을 받고 교분을 맺었다면 그쪽의 의도나 움직임을 많이 알 수가 있었을텐데......”

배포가 큰 이세민은 이건성의 도전을 받자, 곧바로 태자의 수하를 매수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 방면에서 그는 태자에 비해 성과가 많았다. 그가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상당부분이 이건성의 측근이 계획에 어긋난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정세가 안정을 찾아가자 조정의 대신들과 지방의 장수들도 어느덧 태자와 이세민을 지지하는 파로 갈라졌다.

어느덧, 두 세력은 표면적인 대결에서 직접적인 충돌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현상은 서로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음해작전이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느날 이세민이 부름을 받고 태자의 부중에 가게 되었다. 이원길은 즉시 자객을 매복하여 이세민을 제거하자고 태자에게 제의했다. 이건성은 그 계획이 너무나 담대하고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또 한번은 이세민이 이건성의 부중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온 뒤에 객혈을 하면서 혼절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당고조 이연은 이건성을 불러 충고를 하였다.

“세민이 혼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태자가 해치려 그렇게 했다고는 믿지는 않지만 향후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일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세민이 객혈을 하면서 혼절한 것은 다른 요인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처럼 시기적으로 공교롭게 맞아 떨어져, 결국은 잠재된 양측의 세력을 충돌 직전에까지 몰아 넣었다. 이후로 쌍방의 참모는 매사에 긴장하며 정세를 주도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구당서]나 [신당서]등 여러 사서에는 건성과 원길이 세민을 여러차례 공격한 기록은 있어도, 세민이 그들 형제를 공격한 일은 하나도 기재되어 있지않다.

현실적으로 태자인 건성은 합법적인 황제의 계승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방면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음험한 수단이 필요한 쪽은 세민의 세력이 더욱 강하였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을 가하여 목표를 성공시킨 쪽도 역시 세민이었다.

단지 사서에 그러한 기록이 없는것은 세민이 권력을 장악한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무덕 7년(624년)에 벌어진 양문간(楊文干)사건에서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양문간은 일찌기 동궁을 지키는 장수로 이건성의 심복이었다. 후에 그는 경주도독(慶州都督)으로 임명을 받아, 지금의 감숙성 서쪽 지역에 근접한 섬서 지방을 다스렸다.

무덕 7년 6월, 당고조 이연은 세민, 원길을 대동하고 인지궁(仁智宮;지금의 섬서성 요현에 위치)에 나아가 피서를 즐겼으며, 태자 건성이 지키고 있었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이때 건성의 밀명을 받은 양문간이 병사를 일으켜 장안성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숱한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오히려 이때의 사건은 태자 건성을 모함하기위해 꾸며진 일이었다.

실제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추리한다면 이렇다.

태자 이건성은 줄곧 이세민에 대항하여 동궁(東宮;태자의 거처)의 무장역량을 강화하였다. 이건성이 양문간을 경성으로 불러 들인 목적도 이러한 성격의 초청이었을뿐, 양문간이 감히 반란을 일으킬 의도는 없었다고 본다. 결코 반란의 동기가 없는 이유는 우선 태자는 그런 필요성이 없었고, 또한 성공의 가능성도 없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황제가 장안을 비워두고 있는 시기에 병력의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세민은 이를 조용히 흘려 보내지 않았다. 그는 즉시 사태를 확대하여 이연에게 밀고했다.

이연은 밀서를 받자 매우 화를 내며 장안에 조서를 내려 태자 이건성을 인지궁으로 불러냈다. 태자는 십여명의 위사(衛士)만 대동하고 급히 인지궁으로 달려와 사태를 해명하고 사죄를 하였다. 이연은 화를 누그러 뜨리지 않았고, 비분강개한 건성은 벽에 머리를 찧고 혼절하였다.

이연은 건성을 연금시키고 경주(慶州)에 사신을 보내 정확한 사태를 조사하게 지시했다. 장안에서 급히 경주로 돌아온 양문간은 사태가 엉뚱한 방향으로 꼬이자, 전혀 생각지도 않은 모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연은 경주도독 양문간이 기병(起兵)을 하자 이세민에게 토벌을 명하고, 출정에 나서는 그에게 약속했다.

“양문간은 적지않은 사람과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빠른 시일 내에 토벌을 마치면 너를 태자로 앉히겠다. 건성은 죽이고 싶지 않으니 촉왕(蜀王)으로 봉하여 봉지(封地)로 추방하겠다. 그곳은 백성도 적고 토지도 황폐하여 통제하기가 쉬울 것이다. 설사 반란을 일으켰다 할지라도 쉽게 제압할 수가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연은 처음으로 태자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세민이 출병을 한 다음에, 많은 대신들은 면밀히 사태를 분석하고, 태자가 결코 모반을 꾸미지 않았다고 변호하였다. 이연도 점점 진상을 알게되면서 그것이 형제간의 다툼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이건성의 연금을 해제하고 장안성의 수비를 다시 명하였다.

반란이 평정된 후, 이연은 두 세력에게 책임을 추궁하였다. 결국은 동궁부(東宮府)와 진왕부(秦王府)의 참모들이 태자와 진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기에 발생한 일로 결론이 났다. 동궁부에서는 왕규와 위징이, 진왕부에서는 두엄(杜淹)이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양문간의 모반사건은 실로 우습게 결말이 났다. 하지만 이연의 가슴에는 건성에 대한 이전의 신임이 많이 수그러졌다. 또한 황제의 내심에는 언제나 불안한 요소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건성과 세민의 충돌은 이 사건 이후로 더욱 첨예하게 벌어졌다. 실제로 무덕 7년(624년)이후 두 형제의 충돌은 매우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당나라의 조정은 황제의 명령과 태자, 세민의 명령이 상호간에 뒤섞여 혼란이 가중되었다. 관리들도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면서 임기응변으로 사무를 처리하였다. 이처럼 불안한 대치국면은 결코 오래 갈 수가 없었다.

당고조 이연은 이때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까? 부친의 입장이라면 세 형제 중에서 특정한 어느 쪽을 편애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위치에서 본다면 반드시 태자를 옹호하여 황제의 계승권을 유지시켜야 한다. 이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다.

이연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러한 도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세민의 세력은 황제의 견제를 더욱 강하게 받기 시작했다.

이연은 급하게 세민의 세력을 누르려 하지않았다. 국가에 변고가 발생한다면 아직은 세민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이연은 오히려 태자의 세력을 키워서 세민을 견제하도록 유도하였다.

널리 알려진대로 봉건전제 정치에서는 황제와 그 계승권자를 제외하고는 쉽게 무장역량을 갖추지 못하는게 상식이다. 그러나 이세민은 당나라 초기의 특수한 사정에 의해서 태자와 대등한 무력을 가질 수 있었다.

당나라 조정이 안정을 유지하자 정세는 이세민에게 점점 불리한 국면으로 치달았다. 무덕 5년(622년)이래 전국적으로 나라를 흔들만큼 커다란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세민은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전투가 자주 있어야 무력을 유지할 수가 있지만, 평화시에는 무력을 마음대로 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처럼 당나라의 조정이 안정을 찾아간다는 의미는 그만큼 이세민의 무력이 약화되고 그의 입지가 제한 받고 있는 징표가 아닐 수 없었다.

이건성은 유흑달의 반란을 평정하여 군사적인 재능을 인정 받았고, 하북 지역을 위무하여 정치적인 능력을 아울러 인정 받았다. 비록 양문간의 모반사건으로 잠시 타격을 입었으나 무고로 밝혀지면서 이연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이연은 역대 이래로 준수되어온 황제의 적자계승권을 결코 바꾸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유교이념이 통치철학으로 더욱 공고화되면서 조정의 대신들과 지방관리, 장군들은 대부분이 태자를 지지하였다.

이건성은 우세한 환경을 발판으로 세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무덕 7년(624년) 말, 이원길은 이연의 면전에서 세민의 참모인 위지경덕을 모함하여 하옥시키고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세민은 강렬하게 위지경덕의 방면을 요구하여 해는 피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세민의 주요 참모의 하나인 정지절(程知節)이 강주자사(康州刺史)로 임명을 받았다. 정지절은 세민에게 나아가 이를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대왕, 태자마마의 세력은 노골적으로 진왕부의 날개를 짜르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강주로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세민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면서 눈물을 머금고 정지절을 강주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진왕부의 핵심 참모였다. 건성은 일찌기 원길에게 ‘진왕부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방현령과 두여회이니 늘 조심하라’고 말한적이 있다.

태자 건성과 원길은 방현령과 두여회를 제거하기위하여 이연에게 상서를 올렸다.

“우리 세 형제의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자는 방현령과 두여회이니 이들에게 죄를 내리셔야 합니다.”

이연은 곧바로 조서를 내려 두 사람이 하루빨리 진왕부를 떠나 다시는 진왕의 명령을 받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조서를 받고 장안성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행적은 그 후 잠시동안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두 세력의 충돌은 무덕 9년(626년)에 폭발하였다. 이 해 여름에 당나라의 북방에 있던 돌궐족이 수만의 기병으로 국경을 습격하였다. 관례에 따라서 세민이 출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건성은 원길을 보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건성은 이 기회를 빌어 세민의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기도했다.

이연도 형제간의 세력경쟁을 끝맺기 위해서 건성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원길은 출정에 앞서 뜻밖에도 진왕부의 용장으로 소문난 위지경덕, 정지절, 단지현(段志玄), 진숙보(秦叔寶)를 부장으로 요구하고, 또한 진왕부에 속한 정예병을 차출하였다.

진왕부로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원길의 계획은 노골적으로 진왕부의 세력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만일 원길의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조정의 의심을 받을 것이고, 받아 들이면 진왕부는 빈껍데기 세력으로 변할 것이다.

이제는 세민에게 남은 것은 중대한 선택 뿐이었다. 방현령은 진왕부에서 축출되기 이전에 장손무기에게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계책을 일러준 적이 있었다.

“지금 시기적으로 우리에게는 중대한 위기국면일세. 돌연한 사태가 벌어지면 진왕부는 화를 피할 수가 없어. 지금은 생사존망(生死存亡)의 확률이 각기 반반이니 항시 때를 준비하고 있게나.”
두여회도 이세민에게 강력하게 건의를 하였다.

“사태가 위급하면 가장 빠른 시기에 기병하여, 일거에 동궁과 제왕의 세력을 제거해야 주도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방현령과 두여회가 떠나자, 건성과 원길의 세력은 기고만장하여 더욱 진왕부를 압박하였다.

이연이 원길의 요구를 승인하자, 진왕부의 선택은 마지막 시기에 도달하였다. 위지경덕과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세민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번에 기병하지 않으면 많은 장수들이 진왕부를 이탈하여 목숨을 부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폐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면 이 길밖에 없습니다.”

세민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장손무기를 방현령과 두여회에게 급히 보냈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장손무기에게 호통을 쳤다.
“대왕을 만나서 무엇하겠는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상 명령을 따를 수가 없네.”

이세민은 노발대발하여 소리쳤다.
“방현령과 두여회가 감히 나를 배반하다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세민은 위지경덕에게 칼을 건네며 계속 말했다.
“만일 두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단칼에 목을 베도 좋다.”
장손무기와 위지경덕이 방현령과 두여회를 찾아가 다시 말했다.
“대왕께서 결심했으니 빨리 돌아 가십시오.”

이 말을 들은 방현령과 두여회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도사로 변장하여 진왕부에 잠입했다. 이 날 저녁에 진왕부에서는 권력게임의 가장 극적인 군사쿠데타가 계획되었다.

다음 날, 6월 3일에 이세민은 이연에게 밀서를 보내 건성과 원길의 죄상을 고발하고 두 사람을 올가미에 가둘 준비를 진행시켰다.

정사(正史)의 기록에 따르면 이세민은 6월 4일에 손을 썼다고 기재되었다. 그 이유는 건성과 원길이 사전에 각본을 짜고, 원길이 출정하는 그 날 저녁에 연회를 여는 장소에서 세민과 진왕부의 부장을 일거에 살해한다는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계획은 건성의 부하인 왕질(王晊지)이 세민에게 몰래 통보하여 들통이 났고, 세민은 이에 부득이 손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완전히 허구가 아닐 수가 없다. 설사 원인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않더라도, 그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태자를 제거하였다면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전제되지 않고는 설명이 곤란하다.

역시 사서의 기재는 승리자를 위해 도덕적으로 미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태자 건성의 계획은 세민의 세력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고 끝내는 무력(無力)하게 만드는데 촛점을 맞추었다.

더욱이 진왕부의 병력과 장군을 차출하여 무력(武力)을 상실한 진왕으로 만드는게 건성의 핵심 계획이었다. 따라서 우세한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태자가 굳이 주연을 베풀어 세민을 제거하는 모험은 벌일 필요가 없었다.

건성의 실책은 자신만만 태도에 있었다. 세민의 계획은 대담하고 치밀하며 예상을 깨는 급습이었다. 이는 건성이 우둔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세력과 지위가 이세민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벌어졌다.

세민은 역시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다. 장안성에는 세민이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이 결코 많지 않았다. 병력이라야 진왕부에 있는 시위대(侍衛隊)와 암중에 양성한 무사를 합쳐서 8백여명에 불과했다.

태자의 동궁부는 규정에 따라 시위대가 수천여명이 되었고, 여기에다 제왕부의 시위대까지 합쳐 수에서는 진왕부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또한 동궁의 시위대는 수차례 선발하고 훈련시킨 정예병이었다.

또한 태자는 오랫동안 장안성의 수비를 담당하여 수 만명의 금위군을 지휘할 수가 있었다. 명의상으로는 그의 관할에 속하지 않았지만, 금위군의 장군은 대부분이 태자의 측근이었다.

이처럼 병력상의 절대적인 우세때문에 태자는 세민이 감히 대항할 수가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지난날, 이연은 형제 사이의 불화를 목격하고 세민을 낙양에 보낼 생각을 하였다. 이때 태자 건성이 나사서 결사코 반대하였다. 만일 세민이 낙양에서 세력을 키운다면 결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건성은 이에 반대를 표시하는 원길에게 말했다.
“세민을 장안에 묶어두고 병권을 빼앗으면 날개를 잃은 새가 되고말지. 낙양에 보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거야.”

건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중대한 착오를 범하였다. 그들은 세민의 능력과 담력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였다.

6월 3일에 세민이 밀서를 올리자, 당고조 이연은 건성과 원길에게 통지하여 다음 날 입궁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태자의 정보원인 후궁 장첩여도 밀서의 내용을 건성에게 통지하였다. 건성은 원길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였다. 두 사람은 세민이 밀서를 올렸다는 사실은 어떤 의도를 사전에 준비하고 벌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원길은 세민의 성격을 보아서 기필코 궁지에 몰리면 병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판단했다.

“궁중의 시위대에게 명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형님은 병을 핑계로 입조를 거절하고 사태를 관망 하십시오.”

원길의 건의에 태자 건성은 반대하였다.
“그렇게 되면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 된다. 이미 도성의 주요한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여 방비토록 하였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 부황(父皇)의 면전에 나아가 진상을 밝히겠다.”

다음 날 아침에, 건성과 원길은 수 명의 측근만을 대동하고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을 통해 입궁을 하기로 하였다. 당시에 현무문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장수는 상하(常何)였다. 그는 과거에 건성을 쫒아 하북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적이 있어, 건성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현무문은 매우 조용하였다. 문을 지키는 수 명의 위사만이 대문의 양쪽에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현무문을 지나면 바로 임호전(臨湖殿)이다.

건성과 원길이 현무문을 통과하자 갑자기 문 주위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건성이 이를 눈치채고 원길에게 소리쳤다.
“아뿔싸, 위험하다. 말을 돌려라.”

갑자기 임해전에서 세민이 말을 타고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시오.”

건성이 움찔하는 사이에 원길이 재빨리 등에서 활을 꺼내 세민을 겨누었다.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용맹하였지만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침착성을 잃고 연신 세 대의 화살을 쏘았지만 세민을 맞추지 못하였다.

세민은 달려오면서 건성에게 화살을 날렸다. 건성은 등에 그대로 화살을 맞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때 위지경덕이 수 십기를 이끌고 임해전에서 달려 나오면서 원길에게 화살을 날렸다. 원길은 허벅지에 화살을 한 대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원길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세민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렸다. 세민은 화살을 피하려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원길은 앞으로 달려나가며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세민이 위험에 빠지자 위지경덕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원길에게 달려들었다.

“역적! 네가 감히 진왕을 헤치려 하다니......”
일순간에 사태가 불리해지자 원길은 재빨리 이연이 기다리고 있는 무덕전(武德殿)으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위지경덕이 부하들이 수십 대의 화살을 원길에게 날렸다. 원길은 이미 달아나지 못하고 온 몸에 화살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소란은 짧은 시간에 끝이 나고 현무문은 다시 평정을 찾았다. 하지만 혼란중에 건성의 측근 부장이 동궁으로 달려가 시위대장에게 변고를 알렸다. 동궁의 시위대장 풍립(馮立)은 곧바로 무장을 갖추고 말했다.

“사나이가 생전에 은혜를 입었으면 죽음으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풍립은 동궁부와 제왕부의 시위대 2천명을 곧바로 차출하여 현무문으로 달려갔다.

살육전이 끝난 현무문에는 갑자기 동궁부와 제왕부의 시위대가 출현하여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세민의 부장 장공근(張公瑾)은 힘이 장사였다. 그는 사태가 급하자 10여명이 닫아도 힘든 현무문의 대문을 혼자의 힘으로 닫았다.

풍립은 현무문이 닫히자 궁성에 나무를 걸고 침입을 시도하였다. 현무문 내에 포진한 세민의 병력은 백여명에 불과하였다. 만일 현무문이 돌파되면 세민의 세력은 일시에 괴멸되고 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현무문의 곁에는 문을 지키는 위사들의 군영이 있었다. 그곳의 장령 경군홍(敬君弘)과 여시형(呂時衡)은 현무문의 위수책임자인 상하와 마찬가지로 세민에게 매수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위사 백여명을 이끌고 동궁부의 병력을 측면에서 공격하였다. 갑자스럽게 측면을 공격받은 동궁부의 시위대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즈음 세민의 부인인 장손씨가 친히 진왕부의 병력을 이끌고 현무문으로 달려왔다. 동궁부의 시위대는 현무문을 쉽게 돌파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자 공격의 방향을 황궁의 서쪽에 위치한 진왕부로 돌렸다.

진왕부는 방현령과 수 십명의 시위대만이 남아 있었다. 동궁의 시위대는 일순간에 진왕부를 포위하였다.

궁중에 있던 위지경덕이 재빨리 건성과 원길의 머리를 가지고 동궁부의 시위대 앞에 나타나 소리쳤다.

“태자와 제왕(齊王)은 모반을 꾸몄다. 진왕은 폐하의 명령을 받아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너희들은 죄가 없으니 모두 물러나라. 수괴가 이미 죽었으니 죄를 묻지 않겠다.”

동궁부의 시위대는 담대한 위지경덕의 엄포에 대부분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태자와 제왕의 심복들은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자 모두 말을 타고 장안성을 탈출하였다. 이로써 현무문의 변고는 끝을 맺었다.

이연은 원로대신들과 선상에서 영문을 모른채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위사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현무문에서 변고가 발생했는데 자세한 사정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이연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황궁의 시위대를 급히 소집하여 사태를 파악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위지경덕이 몸에 회색 갑옷을 걸치고 손에는 장모(長矛;무기의 일종)를 쥐고 무덕전으로 들어왔다. 이연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위지경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현무문에서 변고를 일으켰소? 그리고 그대는 어인 일로 이곳에 왔소?”

위지경덕이 무릎을 꿇고 힘있게 대답했다.
“동궁부와 제왕부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만, 제왕께서 이미 섬멸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너무나 놀라실까 두려워, 진왕의 명을 받고 먼저 입궁하였습니다.”

이연은 뜻밖의 사태에 놀라 배적에게 물었다.
“오늘 이런 사태가 벌어지다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배적은 이제까지 건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이었지만 이때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소우는 오히려 세민을 지지하고 있던차에 재빨리 이연에게 말했다.

“진왕은 총명하고 담대하여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다면 진왕에게 태자의 지위를 물려주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연은 그제서야 가슴을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짐도 그런 생각을 예전부터 하고 있었소.”

현무문 사태는 당시의 모든 정세를 종합하여 분석한다면, 매우 대담하고 모험적인 행동이었다. 성공의 확률은 그리 크지 않았던 거사가 뜻대로 이루어진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 세민과 참모들은 다른 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현무문이라는 지역을 선택하였다. 둘째, 적은 병력으로 가장 중요한 곳을 장악하고 일거에 상대의 수뇌를 제거하여 강력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봉쇄하였다. 셋째, 태자의 심복인 금위군의 장수를 매수하여, 그들에게 방심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다. 넷째는 오랫동안 거사를 준비하면서 시기가 오자 머뭇거림도 없이 일거에 거사를 시도하였다. 다섯째, 유능한 참모들을 많이 거느렸다는 점이다. 절대적인 세력의 열세에서 배반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준 참모들이 없었다면 그의 거사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여섯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민의 담대한 배짱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지위와 병력의 열세가 현저한 상태에서, 단한번의 기회가 찾아오자 생사를 걸고 전력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태자 건성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위와 세력의 절대적인 우세가 만든 방심이었다. 그는 세민을 제거할 수 잇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도덕군자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세민의 세력만 무력화 시키면 그다지 문제가 없다고 과신하였다.

전제정치의 권력게임에서는 변화가 무쌍하고 우연한 요소에 의해서 대세가 결정되는 예가 허다했다. 때문에 정치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우세한 지위나 유력한 세력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일단 상대의 허점이 드러나면 가차없이 공격하여 뿌리를 뽑는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비상수단까지 합하여 우세한 상황을 결정적으로 확정시켜야 비로소 게임은 끝이 난다. 후대에는 이러한 경험이 누적되어 권력게임은 더욱 음모가 만연하고, 비정하며 잔인해져 갔다.

그렇다면 현무문의 쿠데타는 정의로운 사건이었는가? 봉건적인 도덕규범에 따른다면 세민은 정당한 황위계승권을 찬탈하고, 형제를 죽인 부도덕한 인간이다.

이때문에 역사에서는 항상 부도덕한 인간이 승리를 거머쥐면 자신의 행위를 감추기 위하여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한다. 당(唐)대의 사학자들은 이 때문인지 건성과 원길을 포악하고 음란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이연마저 무능하고 줏대없는 황제로 만들었다.

이씨 가문에서는 유일하게 세민이 가장 총명하고 담대하며, 용기가 있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그려져 있다.

물론 이것은 대다수 믿을게 못된다는 점이다. 그의 인간상을 하나의 표준에 맞춘다면,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고, 권력에 대한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상과 현실, 도덕과 치적을 놓고 저울질하는 역사적 평가에 혼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현무문 사건은 일반적인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역사는 도덕적 원칙에 의해 발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무문 사건의 도덕적 평가는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실제로 전제정치에서는 비교적 우수한 정치가가 권력을 장악하는게 결과면에서는 역사에 유익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당태종의 인물을 다시 한번 평가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무덕 7년(624년) 6월 7일, 현무문 사건이 일어난지 사흘 후, 이연은 조서를 내려 세민을 황태자로 삼았다.

얼마 후, 이연은 또다시 조서를 내려 돌연 양위(讓位;임금에서 물러나는 의미)를 선언하고 세민에게 황제를 물려 주었다.

이세민은 이연을 태상황(太上皇)으로 모시고, 꿈에도 그리던 황제가 되었다. 이가 중국의 역사상 가장 걸출한 군주로 인정받는 당태종이다.

세민은 627년에 년호를 정관으로 고쳤다. 이때부터 ‘정관의 자스림(貞觀之治)’이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아래 당나라는 아시아의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동북방에 있는 고구려와 서쪽의 티벳(吐藩)을 제외하고는 천하의 모든 국가를 그 아래에 복속시켰다.

이연은 오히려 건성보다 똑똑하였다. 그는 권력의 대부분이 세민에게 넘어가자 홀연히 황제의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야망을 위해서라면 형제까지 죽이는 세민이 언제 자신마저 헤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태상황 이연은 훗날 술자리에서 당태종에게 현무문 사건이 일어났을때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당태종 세민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연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결코 양육(養育)의 은정은 잊지 않는다고 맹세하였다.

세민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은 그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태자와 원길을 가혹하게 처치했지만, 동궁부와 제왕부의 참모들은 매우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현무문 사건을 고비로 두 세력으로 나누어 팽팽하게 대결을 벌이던 조정은 급속하게 세민에게 통합되었다. 여기에서 정치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이익의 필요에 의해 움직인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세민은 이에서 알 수 있듯 대담하고 혁신적인 정치가였다. 결코 작은 일을 가지고 복수나 하는 그런 소인배는 아니었다. 일단 목표를 달성하자 그는 그것에 합당한 조치와 행동을 취하였다. 일찍부터 인재의 소중함을 경험한 그는 건성의 수하라도 능력이 있으면 중용하였다. 그 중의 한 명이 위징(魏徵)이었다.

위징은 강직하고 배포가 큰 인물로 황제의 면전에서도 정책을 서슴없이 비판하고 도덕적인 규범에 벗어나면 비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태종은 일찌기 위징이 죽고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남들은 위징 대감이 극언을 서슴치 않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열정과 충정이 가득해 보이오.”

사실 가혹한 통치가 자행되던 봉건전제 정치속에서, 황제가 위징과 같은 극언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가 않은 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당태종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다.

실제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돌아와 울화병으로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당태종은 위징을 생각했다고 한다.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죽음을 무릎쓰고 원정을 막았을 것이다.”

당태종은 고구려의 원정에는 실패하였지만, 당대의 가장 걸출한 정치가이며 책략가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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