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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사의 여명과 역사의 수난 - 송호수,두계학파와 실증사학 -신복룡




민족사의 여명과 역사의 수난  
  
2003-03-27 오전 10:21:18 송호수
  
  

  
겨레라는 한 집단이 삶을 지탱해 나가는데 그 발전적인 이음은 몇 가지 요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는 '뿌리의식'을 망각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많은 종족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으나 우리는 우리들의 민족적인 뿌리의식이 상당히 해이해 있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타의적인 요소의 작용이 적지 아니했다고 보겠지만 그래도 문화민족을 자처하는 우리로서는 퍽이나 그 민족적인 원천(源泉)을 모르고 또 유독히 알려고 애쓰지 아니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인류의 역사란 민족적인 자기보존을 위해서 민족과 민족끼리 격렬한 싸움질을 해가면서 자족존속(自族存續) 투쟁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민족은 중국적인 콧김과 왜국적인 입김의 틈바구니에서 제정신의 뿌리를 온당하게 가누어 보지 못한 채로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흘려버렸다. (고조선이 끝난 이후 오늘까지)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서의 단군조선사가 우리들에게 왜 중요한가를 몇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자. (필자주)


단군조선의 역사가 우리 국사의 전반(前半)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민족사상의 뿌리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하면 '5천년 역사'라고들 흔히 말하고 있는데 고조선을 빼어 버린다면 어찌 '5천년 역사'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저 2천년에 불과한 민족사로 자처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단군 역사를 부정한다면 우리의 교육이념으로 현재하고 있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 그 역사적인 산출(産出)근거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홍익인간'이란 삼국유사의 고조선(王儉朝鮮)조에 처음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족사의 여명기가 퍽 오래 전인 민족과 별로 그렇게 오래지 못한 민족들이 이 땅덩어리 위에는 나름대로 스스로의 역사를 이끌어 오고 가고 있다.  그 가운데서 우리 민족의 그 역사적 여명기가 어떻게 시작되어 있는지 몇 가지 기록들에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삼성기(三聖紀 : 안함로 安含老 579~640 지음)
우리 한국(桓國)은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다. ···이르되 한국이니 천제(天帝)는 한임(桓因)이라 7세(世)를 전하였는데 그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

  그 뒤에 한웅(桓雄)씨가 대(代)를 이어 백산(白山) 흑수(黑水) 사이에서 천신(天神)의 조칙을 받들어 천부인을 가지고 5사(五事 : 穀, 命, 病, 刑, 善惡)를 맡아 세상을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다스리며 검벌(神市)에 도읍하고 나라를 배달이라 하였는데··· 한웅의 방계(傍系)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靑邱)를 개척하였다.  환웅천왕의 전통은 18세(世)에 연조가 1565년 간이었다.

그 뒤에 신인왕검(神人王儉)이 대를 이어 불함산 박달나무 터에 이르르니 그는 지극한 신덕(神德)과 성현의 어짐을 겸하였었다.  천왕의 조칙을 이어받아 나라를 세우니 천하백성이 모두 기뻐하며 천제의 화신(化身)으로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단군왕검은 한웅천왕의 옛 규범을 다시 이어받아 아사달에 도읍하고 개국하니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

제44세(世) 구물(丘物) 임금 때에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라 하였으며····· 단군임금은 무진(戊辰)개국으로부터 그 국통이 47세를 정하였고 역년(歷年)은 2096년간이었다.  임술년진(秦)나라와 같은 때에 대해모수(大海慕漱)가 웅심산(熊心山) 일어나 나라를 열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 일연 一然 1206∼1289)
고기(古記)에 이르되 옛 한국(桓國)에 한웅(桓雄)이 있었으니 인세(人世)를 탐구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삼위산과 태백산을 굽어보시고 그 곳이 「홍익인간」 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천부인(天符印)세개를 주어, 가서 그 곳을 다스리라 하였다.  
이에 한웅은 3천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정 신단수(神檀樹)아래 이르러 검벌(神市)이라 하니 이가 환웅천왕이다.  풍백, 우사, 운사 등의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 명령, 질병, 형벌, 선악 등을 맡아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에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한마을에 살았는데 항상 한웅에게 선인(仙人)되기를 빌었다.  그래서 한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너희들은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일심으로 원도(願禱)하면 선인이 될 것이다 하니 웅족과 호족은 쑥, 마늘을 먹고 3주일을 금기재계 하니 웅씨네 딸은 선녀(仙女)가 되고 호족은 되지 못하였다.  이에 웅씨네 딱은 혼인할 배우자를 구하였다.  한웅이 혼인을 허락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왕검이다.

○ 단군세기(檀君世紀 : 이암 지음 1363년)
고기에 이르되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요 어머니는 웅씨왕(熊氏王)의 딸이었다.  신묘년 5월2일 인시(寅時)에 박달나무 아래에서 나시니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원근(遠近)이 모두 승복하였다.  14세 되는 갑진(甲辰)에 웅씨왕이 그 신성함을 들고 비왕(裨王)으로 천거하니 대읍(大邑)의 국사를 섭행하였다.

무진 당요 (唐堯) 때에 단국으로부터 이사달의 박달나무 터에 이르니 나라 사람들이 천제자(天帝子)로 추대하였다.  9한(九桓)을 섞어 하나로 통일하니 그 신성한 덕화(德化)가 멀리까지 뻗쳤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이르니 비왕위(裨王位)가 24년이요 제왕위(帝王位)가 93년이었으며 나이는 130세였다.

이상에서 삼성기(三聖紀), 삼국유사(三國遺事), 단군세기(檀君世紀) 등의 원문을 제시해 비교하여 보았다.  물론 우리의 민족사적 시원(始源) 부분만을 대비하여 본 것이다.  이러한 3본의 문헌은 모두가 그 역사적 실증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인(桓因)시대, 한웅(桓雄)시대 또 단군(檀君)시대를 명백히 하는 세단계의 왕조사(王朝史)가 분명하게 그 선을 그을 수 있게 시대별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문헌으로서는 고조선을 명기(明記)한 책들이 적잖이 있다.  

예컨대 중국측, 소련측의 외국문헌과 국내문헌으로서는 전기한 삼성기, 삼국유사, 단군세기 등 이외에도 제왕운기라든지 규원사화(揆園史話) 신단실기(神檀實記), 조대기(朝大記), 태백유사, 단기고사(檀奇古史), 동국여지승람, 한단고기(桓檀古記)등 많은 문헌들이 상당수가 있다.  이른바 야사(野史)류의 딱지가 붙은 채로 많은 사학자의 시야(視野)밖에서 묻혀져 있었던 사료들도 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소위 학계에서는 통칭인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란 그렇지 않은, 즉 말하자면 국권에 의한 것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학자가 찬술한 것이라고 구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사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왕권(王權)적인 차원에서의 것이기 때문에 공신력을 부여하기도 하겠지만 반면 절대 권력의 소유자인 왕명에 의하여 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국왕이나 그 주변이 집권의 정당성에 대한 합리화를 변론하기 위하여는 전조(前朝)의 사(史)를 왜곡 격하시킨 예가 얼마든지 있다.  

이에 비하여 권력도 없는 벼슬 못한 무명학자가 민족적인 충정에서 양심에 따라 불편 부당하게 서술한 것, 즉 권력에 의한 비리적인 왜곡 명령에 굴하지 않고 위협을 받지도 않고 양심과 지조의 소명의식에서 정론으로 엮은 사서가 얼마든지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과연 어느 쪽이 바른 사관일 것인가 이다.  

또한 개념상의 문제이다.  권력의 횡포에 의한 날조왜곡사를 정사(正史)라고 하고, 아무 관권(官權)과 지위도 없는 한사(寒士)가 애국적인 충정에서 정론을 편 기록을 야사(野史)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정확, 정당한 표현이 되겠는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권력적인 측의 기록과 그렇지 못한 측의 기록을 정(正)과 야(野)로 구별하기보다는 그 내용에 있어서 바른 기록과 공평성을 잃은 것과 구분하는 것이 정, 야사의 옳은 가치 기준일 줄로 안다.

정사니 야사니 하는 가치 불명확한 연장(기구)으로 올바른 숨은 기록들을 난도질 해버린다면 사관의 바른 줄기가 어떻게 바르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고조선(王儉朝鮮)에 관한 문헌이 부족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렇게 부족하게끔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즉 그 하나는 외세에 의한 타의적인 소각, 탈취 등의 방법으로 없애버린 것이요 또 하나는 이러한 외적(外敵)의 만행에 탈취 당하지 않기 위하여 숨겨져 오던, 문헌자료들의 장구한 세월의 은닉행각이 자연히 부식(腐蝕) 내지는 유실 마멸의 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세 번째 이유로서는 앞서 말한 사료멸실의 외세적인 작용에서도 그 명맥이 잔존하였던 사료들도 없지는 아니하였으나 이것들을 보잘 것 없는,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조차도 없는 야사류로 팽개쳐 묵살해 버린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고조선에 관한 기록들이 없어지게 된 수난사를 들어보면 적어도 10대 수난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고구려 동천왕 18년(224)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침공하여 많은 문헌들을 소각(燒却)하였음.

  둘째,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史庫)가 소실되었음.

  셋째,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典籍)을 모두 탈취하였음.

  넷째, 신라 경순왕 원년 (927) 후백제의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책을 전주(후백제의 수도 : 완주)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멸 당할 때(935) 방화 소각함.

  다섯째, 고려인종 4년(1129)금나라에 서표(誓表)를 바친 후 주체 서적은 철수해 갔음.

  여섯째, 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난으로 홀필렬(忽必烈)에 의해 많은 전적이 소각 되었으니 삼한고기(三韓古記)가 이때에 없어짐.

  일곱째, 근세조선 태종 11년(1411) 5부학당(五部學堂)을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권장하고 비유교 서적은 일체 소각하였음.

  여덟째,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이 방화에 의하여 소실되었음.

  아홉째, 병자호란(1636)때 아까운 사서(史書)들이 수 없이 잿더미가 되었음.

  열째, 일본강점(强占:1910) 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놓고 군경을 동원하여 전국 명문대가들의 소장서적 모두를 탈취 압수하여 51종에 달하는 20여만 권을 소각해 버렸음.

이렇게 엄청난 10대 수난사로 우리의 사서(史書)들은 잔존(殘存)할 여지가 없었다.  더욱이나 중국적 사대사관(事大史觀)의 격랑(激浪)속에서 민족사서가 그 명맥을 이어오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겨우 잔명(殘命) 정도에 불과 하지만 유력한 자료들이 남몰래 전해져 왔던 것이다.  

즉 단군사와 관계되는 사료들로 국내 것과 국외 것들을 몇 가지 들어 볼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그 자료들의 분류는 국내 것이 물론 월등히 많다.  그런데 혹자는 국외 것에 증빙이 문헌적으로 되어져야만 믿을 수 있다는 태도들을 갖는 성향을 볼 수가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국내적 역사사실이 국외문헌상에 등재되어 있어야만 확신이 선다는 것은 문화적 사대성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자기 나라의 사건이 타국의 기록에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국내 기록이 주가 되어야 한다.

○ 단군조선을 적은 중국문헌
   · 산해경(山海經)
   · 삼국지(三國志)
   · 명일통지(明一統志)
   · 성경통지(盛京統志)
   · 위서(魏書)
   · 광명일보(1977.7.14)

  여기서는 당란(唐蘭)의 발표에 의하면 방사선탄소 측정에서 5천7백8십5년전의 대문구(大汶口) 문명권을 산동반도 지방에서 발굴했는데 소호(少昊)씨가 그 지역을 통치했다는 것과 그 당시에 이미 문자(文字)까지 사용하였다고 함.

○ 고조선을 인정한 북한기록
   · 조선통사(朝鮮通史) : 여기서는 조선족의 청동기는 B. C 2천년 전부터라고 하였음.
   · 조선사(朝鮮史) : 우리의 청동기가 B. C 2천년 전부터라고 했음. · 중앙통신(1981.8.18): 평양부근에서 4천년 전의 청동기, 생활도구,  곡식종자 등을 발굴.
   · 고조선 연구(古朝鮮硏究 : 리지린著)

○ 소련측에서 발표된 단군조선사
   · 고조선(古朝鮮) : 유 엠 푸진 지음, 소련과학원 시베리아 분원 역사언어   철학연구소 간행

  여기에서 "일본사관(日本史觀)이 중국계기자(箕子)가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고 날조했으며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의 왕궁과 중앙행정기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라고 하였음.

○ 국내 기록에서의 단군조선
   · 삼국유사(三國遺事)
   · 제왕운기(帝王韻紀)
   · 삼성기(三聖紀 : 安含老 지음)
   · 삼성기(三聖紀 : 元종仲 지음)
   · 단군세기(檀君世紀 : 이암  지음)
   · 조대기(朝代記)
   · 단기고사(檀奇古史)
   · 태백진훈(太白眞訓)
   · 삼한관경본기(三韓觀境本紀)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응제시주(應製詩註)
   · 조선사략(朝鮮史略)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동국통감(東國通鑑)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단전요의(檀典要義)
   · 단전(檀典)
   · 천을선학경(天乙仙學經)
   · 대동사강(大東史綱)
   · 역대제철성신록(歷代諸哲誠信錄)
   · 단군교포명서(檀君絞布明書)
   · 삼일신고(三一神誥)
   · 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
   ·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
   · 신단실기(神壇實記)
   · 규원사화(揆園史話)
   · 신단민사(神壇民史)
   · 한단휘기(桓檀彙記)
   · 단군고(檀君考)
   · 삼법회통(三法會通)
   ·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
   · 대종교중광 60년사(大倧敎重光 六十年史)
   ·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上下)
   · 조선전(朝鮮傳)
   · 동사(東事)
   · 해동이적(海東異蹟)
   · 도덕연원(道德淵源)
   · 조선사화(朝鮮史話)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 조선종교사(朝鮮宗敎史)
   · 조선유기(朝鮮留記)
   · 단경(檀經)
   · 동국사략(東國史略)
   · 북부여기(北夫餘記)
   ·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記)

  이상에서 열거한 대략의 문헌 이외에도 책명과 내용의 단편만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서

   · 단군본기(檀君本紀)
   · 단군기(檀君紀)
   · 부여사(夫餘史)
   · 고기(古記)
   · 삼성밀기(三聖密記)
   ·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 배달유기(倍達留記)
   · 삼황내문(三皇內門)
   · 백호통소의(白虎通疏義)
   · 주리삼국사기(朱離三國史記)
   · 조리통전약지(朝離通典藥志)
   · 요사예지(遼史禮志)
   · 표훈천사(表訓天詞)
   · 대변경(大辯經)
   ·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
   · 오제설(五帝說)
   · 진역유기(震域留記)
   · 삼한비기(三韓秘記)
   · 해동고기(海東古記)
   · 진천문지(晋天文志)
   · 선사(仙史)
등을 들 수가 있다.  책명이나 내용의 극소한 단편정도 만이라도 현전하는 것이 이런 정도인데 그렇지 못한 완전 실전된 문헌이야 그 얼마인지 가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뿌리의 역사적 사실을 밝힐 수 있었던 증거문헌의 인멸은 민족의 맥락상에 그 중대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근자에 새로이 은장되었던 고전들이 밝혀지고 또 고고학의 눈부신 발굴은 이른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유적이 고조선의 강역구내인 요령성(遼寧省)지역에서 나왔다는 것 등 사필귀정의 사실(史實)이 정립단계에 왔다고 보아진다.  

족보 없는 가문처럼 '뿌리 없는 국사' 이것은 어른다울 수 없는 후손에 대한 창피다.  우리세대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바루어 놓아야 할 지상과제다.  

국사망실의 원인이 외세의 침략에서 였건 내적인 사대주의에서 였건, 어쨌든 위에서 든 바와 같이 적잖은 문헌들이 기히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고 볼 때 거족적인 협력의 중지를 다해서 기필코 국사복원의 과업은 달성시켜야 할 것이다.
                                                      
                                                  송호수(철학박사·개천학회장)
                                                  (자유발언 1989년9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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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中華史觀’ 고구려 넘본다… 省마다 한국측 조직적 번역-대응

http://news.empas.com/show.tsp/20030417n04574/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사에 대한 한국의 주요 연구서와 논문을 집중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중국은 그동안 고구려와 발해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취급하긴 했지만 한국측의 연구성과를 조직적으로 번역할 정도로 우리의 고구려와 발해사 연구현황에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국사학계에서는 개혁개방시대에 중국이 한국측의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한중 고대관계사 연구에 돌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앞으로 한중간의 고대사 연구에서의 갈등이 한일간의 고대사 연구 갈등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인 노태돈(盧泰敦)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작년 말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 ‘고고문물연구소’에서 내 책 ‘고구려사 연구’(1999년)를 번역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으며 최근 헤이룽장(黑龍江)성의 한 중국학자는 책 내용 중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문의해 왔다”며 “애초에는 지린성에서 주관하는 지방정부의 연구인 줄 알았으나 여러 성에 나눠 번역하도록 한 것으로 봐서 지린성보다 위쪽의 중앙정부가 체계적으로 번역작업을 지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발해사 전공인 송기호(宋基豪)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중국은 지린성 옌지(延吉) 옌볜(延邊)대 ‘발해사연구소’를 중심으로 내 책 ‘발해정치사 연구’(1995년)를 비롯해 발해사에 관한 우리측의 주요 저서와 논문들을 번역해 왔다”며 “이제 발해사에 대한 번역작업은 거의 끝마치고 고구려사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사학계에서는 중국 정부가 고구려 발해 유적에 대한 한국 학자들의 현지조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했던 것으로 봐서 한국측 연구의 번역작업이 순수한 학문적 교류의 관심에서 촉발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측 논리를 공박하기 위한 정보수집의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긴밀히 교류해 온 북한측의 연구성과보다는 한중수교 후에야 교류가 시작된 남한측의 연구성과가 학문적인 측면에서 앞선 것으로 보고 있다.

국사학계는 이와 관련, 작년 말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고구려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사학회 주최로 ‘발해사의 연구현황과 과제’란 주제로 각각 학술대회를 잇달아 열고 한중 고대관계사 분야를 집중 조명했다.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에 따르면 중국측은 오래전부터 발해사를 자국사로 취급해 왔으며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자국사로 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 교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 학계와 치열한 논쟁을 벌여 온 한국의 고대사학계가 21세기에는 강대국이 될 것이 확실한 중국 학계와 또다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정부와 학계의 적극적인 대처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중국학계주장…고구려 史 ▼

중국에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해석하는 견해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널리 퍼졌다. 80년대 들어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과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 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면서 중원(中原)문화의 영향이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도 중국은 고구려를 동이(東夷) 가운데 가장 강대한 민족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중국은 90년대 들어와 고구려와 중원 왕조는 기본적으로 화평관계를 유지했고 대립기간은 극히 짧았다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귀속시키려 하고 있다. 고구려가 수(隋)와 전쟁한 기간은 불과 5년, 당(唐)과 전쟁한 기간은 12년으로 전쟁기간은 극히 짧았으며 대부분의 기간은 수당에 신복(臣服)했다는 주장이다.

반면 백제나 신라와의 관계는 대부분 전쟁기간이었다고 파악하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래 민족(고구려)이 한반도(조선반도)를 통치하는 것을 끝내고 수백년 이어진 전쟁을 종식시켜 한반도 민족통일국가의 건립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판도가 기본적으로 중국 영역 내부에 있었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427년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가 논란이 되자 이번에는 평양 천도 이후에도 중원 왕조와 예속 관계를 유지하며 중원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학계 주장…발해 史 ▼

중국은 발해가 속말말갈(粟末靺鞨)인이 중심이 돼 건립됐으며 당나라에 예속됐던 지방정권으로 보고 있다. 반면 한국은 발해는 고구려계가 중심이 된 문화였으며, 그 정치 경제 사회적 신분상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말갈계의 문화는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발해문화 속의 고구려적 요소를 애써 소홀히 취급하거나 왜곡하고 있다. 발해문화를 당의 주류 문화 속에 속말갈과 고구려 문화가 융합돼 성립됐다고 해석하거나, 발해 초기에는 고구려의 특징이 남아 있었으나 문왕(文王) 때부터 당 문화를 크게 받아들여 전체적으로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없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예 고구려적 요소를 거론조차 하지 않는 극단적인 의견도 있다.

박영철(朴永哲) 군산대 교수는 지난해 말 역사교육연구회가 펴낸 ‘역사교육’ 제84집의 ‘중국역사교과서의 한국사 서술’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가르치는 발해에 대해 중국은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大祚榮)을 말갈족의 한 부족인 속말갈족의 수령으로 서술하고,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동아일보 2003-04-17 18:50:00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두계학파와 실증사학

역사가는 얼마나 객관적이며 정확하고 정직할 수 있으며, 그들의 학통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고, 상황의 논리로부터 얼마나 용감할 수 있을까? 멀리는 사관(史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해 가까이는 이념의 굴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학은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복잡다단하다.

특히 한국 사학사가 이토록 어려움을 겪은 것은 일제시대라고 하는 타율적 세뇌의 과정이 너무도 길 고 집요했기 때문이다. 한 세대를 넘는 시간 속에서 일제의 세뇌를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 니었다. 그러나 한국사에서의 외압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역사학의 굴절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은 소극(笑劇)은 여염의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장수왕때 세원진건 사실

1979년 충북 중원(中原)의 입석리(立石里)에서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비석이 발견됐다. 그것이 국경을 개척하면서 세운 비석(척경비·拓境碑)인지 아니면 단순히 국왕이 수렵이나 순행을 나왔다가 세운 비석(순수비·巡狩碑)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비석이 여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여기까지 남진했다는 뜻이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 비석이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년)에 의해 세워진 것만은 틀림없지만 풍상으로 마모된 글자의 판독 과정에서 많은 견해들이 속출했다. 사학계에서는 관련 교수들의 학술회의를 마련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 비석이 언제 세워졌느냐 하는 것. 물론 이를 풀어줄 단서가 될 만한 글자가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문제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당시 사학계의 큰 어른이신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박사는 비석을 분석한 후 이 비석이 건흥(建興) 4년(475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젊은 학자들이 그 논거를 묻자 두계는 “내가 하도 오매불망(寤寐不忘)했더니 꿈에 그렇게 나타났다”고 대답했고, 자리를 함께 했던 후학들은 “이 학문적 집념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사로운 자리에서 오고간 객담이 아니고 학회에서 발표되어 학술지에 게재된 사실이다.(李昊榮, ‘中 原 高句麗碑 題額의 新讀’, ‘史學志’(13), 136∼138쪽, 1979)

  
역사학계에서는 두계와 그를 잇는 학파를 실증주의 학파라고 부른다. 실증주의를 특징짓는 명제는 과학만이 가장 타당한 지식이며 사실만이 지식의 가능한 대상이 된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사실과 과학에 의해 확인된 법칙을 넘어서는 어떠한 힘이나 실체의 존재 및 그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며, 어떠한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연구 방법을 배격한다. (金榮漢, ‘실증주의 사관’, ‘사관이란 무엇인가’의 59∼60쪽 1980)


이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진실로 서글퍼하고 우려하는 것은, 당시 83세의 노령이었던 두계가 한때 총명을 잃고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그 자리에 있던 젊은 학자들, 신학문을 배웠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그들이 이를 말릴 수도 없었던, 그래서 그것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학계의 풍토이다.


그 자리의 젊은 학자들은 두계의 그러한 발언을 듣고 감격해 이를 기록으로 남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 끼리만의 얘기로 알고 덮었어야 옳았다. 자신의 견해에 도전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재야 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준열(峻烈)히 비판했던 한국사학계가 이 대목에 있어서는 왜 그토록 참혹한 실수를 저질렀는가?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참여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 우리는 이병도를 중심으로 하는 세칭 두계학파의 형성 과정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1922년, 3·1운동의 여진(餘震)이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자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중심으로, 식민지 정책을 문화 동화 정책으로 바꾸면서 일본이 조선의 병합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조선사를 쓰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방침을 위해 총독부 훈령 64호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구성해 정무총감(政務總監)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가 그 위원장을 겸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당시 조선사를 일본인 학자들만 쓸 경우, 한국인에 대한 설득력이 약할 것이라고 판단한 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에 한국의 청년 사학자들을 참여시키기로 했고, 이완용이 그 인선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당시 와세다대(早稻田大)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고 있던 문중의 족손(族孫)인 이병도와 최남선(崔南善), 그리고 이능화(李能化) 등을 발탁했다.(‘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 122∼131쪽, 1938)


이들은 당시 식민지 사학의 첨병이었던 교토(京都)제국대 교수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총독부 시학관(視學官)으로 식민지 역사 교육을 주관했던 오다 쇼고(小田省吾) 등을 도와 ‘조선사(朝鮮史)’의 편찬에  착수했으며, 이렇게 하여 1938년에 완간된 ‘조선사’ 전35권은 식민지사학의 원전이 되었다.


◇해방후 한국사학계 주도

  
이제 와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병도 등, 이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멤버들이 1934 년에 창설된 진단학회(震檀學會)의 회원으로서 일제 시대의 한국사학계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정치 적 해방을 맞이한 이후에도 이 인력들이 한국 사학계의 중추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진단학파는 해방 이후 학회 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여 ‘한국사’ 전6권(을유문화사)을 집필 간행하는 등 한국 사학사에 주목할 만한 발자취를 남긴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후 이들과 이들의 후학들은 실증사학을 표방하면서 이선근(李瑄根)이 주도했던 민족주의 사관과 함께 쌍벽을 이루면서 한국 사학계를 지배했다.


물론 진단학회에는 김상기(金庠基)나 이상백(李相佰)과 같은 또 다른 무리의 훌륭한 학자들이 있었고, 학통과 진실 사이에서 고뇌한 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계의 학통은 여전히 도제와 같이 엄숙했고 선학(先學)에 대한 비판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신선의 현몽(現夢·꿈에 나타남)’ 앞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사관 잔재 아직도 남아


지금 우리 사회는 또다시 일본 교과서 왜곡으로 술렁거리고 있다. 저들의 곡필(曲筆)에 대해 비분강개 하기보다는 내부 식민지 사학을 청산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해방 반세기가 지난 지가 얼마인데 아직도 식민지 사관의 청산에 목을 매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뿐 아니라 어쩌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태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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