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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정만주원류고>에 기록된 백제사 - 발해와 한판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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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정만주원류고>에 기록된 백제사 - 발해와 한판뜨다. | 나의 관심정보   2009/01/0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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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에서 원나라 시기 까지 백제의 기록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중국공산당의 동북공정 뒤엎을 史料 찾았다!


●흠정만주원류고’, 백제를 중국 동부 지배한 황제국으로 기술

●온조왕~다루왕 사이 11명의 왕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소정방이 멸망시킨 것은 일부분,신라 멸망 후에도 백제는 존속

●한반도 서부 중심의 백제사는 일제의 역사 왜곡


흔히 백제라고 하면 의자왕, 삼천궁녀, 낙화암 같은 패망의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떠올린다. 그것은 백제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면보다 어둡고 수치스러운 면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제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백제가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이고, 대륙 깊숙한 요서(遼西)지역에 수도를 가질 만큼 강력한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은 망각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삼국 중 제일 먼저 패망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나라였다.  

잃어버린 백제사를 복원하기 위해선 백제의 뿌리인 부여에서 실마리를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부산(鳧山)과 역산(繹山)을 차지하고 마침내 서국(徐國)의 영토를 짓밟아 해방(海邦)에 이르니 회이(淮夷)와 만맥(蠻貊)과 저 남쪽 이족들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감히 순응하지 않는 이가 없어 노후에게 순종했다.”

노송이란 동방의 동이족을 몰아내고 노나라를 세운 주공(周公)을 칭송하기 위해 자손들이 쓴 글로 여기에 나타나는 부, 역, 서택, 해방, 회이, 만맥, 남이는 노나라 건국 당시 오늘의 산둥성,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푸젠성 일대 동남방 지역에 분포해 있던 동이족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부(鳧)는 9이(九夷)의 다섯 번째인 부유(鳧臾)로 바로 부여국의 전신이다. 이순의 ‘이아석지주’와 형병의 ‘논어주소’는 “동북지역 구이의 다섯 번째가 부유”라 했다. ‘자회보’에는 “부유는 동방의 나라 이름인데 바로 부여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논어’ 자한 편에도 “구이의 다섯 번째인 부유는 바로 부여”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고대문헌을 통해 오늘날 취푸를 중심으로 한 산둥성 일대가 노(魯)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 부여의 발상지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산둥성의 부산이 부여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대 역사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는 바다.

예컨대 중국 역사학자 허광웨(何光岳)는 그의 저서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서 “‘후한서’ 등 사서에 이미 부여, 동명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동명이 나라를 세운 것은 동한시대 중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명 이전에 이미 부여족이 존재했다. 이 부여족은 어느 지역에서 기원했는가”라고 묻고 “사료로 보건대 동한 이전 부여족의 발원지는 산둥성 추현 부근에 있는 부산, 즉 부유”라고 했다.


▶ 복희에서 부여로 정통성 계승한 백제


사마천이 쓴 중국 역사 ‘사기’는 황제(黃帝)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공자는 분명히 ‘황제 이전에 신농씨(神農氏)가 있었고 신농씨 이전에 복희씨(伏羲氏)가 있었다’고 했는데 사마천은 왜 황제를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복희를 한족의 시조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지지(輿地志)’의 다음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산은 추현에 있다. 살피건대 어대(魚台)지방의 지형이 마치 오리가 날아가는 모양과 비슷하다. 세상에서는 복희가 이곳에서 팔괘(八卦)를 그었다고 한다.”  

중국인이 한족의 시조로 받드는 황제보다도 훨씬 앞선 시기에 동양 인류의 시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복희가 있었고, 그의 활동무대는 다름 아닌 부여의 발원지 부산이었다는 기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올해 4월 필자가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중국 산둥성 줘청(鄒城)시 이산(繹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산호(微山湖)부근에 실재 부산이 있었으며 복희의 사당을 비롯한 유물유적들이 집중해 있었다.

이처럼 고대 문헌기록과 유물유적들은 산둥성 부산이 동이 부유의 근거지이고, 부유가 부여의 발원지이며 곧 복희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희가 동이족의 시조이고 부산이 동이문화의 발상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복희 시대는 고대국가 수립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씨족사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세기’에 의하면 동이 9족이 모여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고조선이다. 그러니까 부유에서 9부족으로 발전하고 9부족이 모여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단군은 동이의 국조(國祖)이고 복희는 동이족의 시조(始祖)이며 부유는 동이 역사의 출발점이 된다

허광웨이는 ‘동이원류사’에서 부여족의 발전경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부여는 바로 구이의 하나였던 부유의 후예다. 일명 부유(浮楡), 어여(於余)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산둥 린이 일대에 살다가 뒤에 한 갈래는 서진하여 하남성 내향의 어중으로 옮겨갔고, 다른 한 갈래는 동북지방으로 옮겨가 부여국을 세웠다. 이것이 북부여(北夫餘)다. 북부여는 전연(前燕)에 의해 멸망했다. 북부여의 다른 한 갈래는 동쪽으로 나아가 졸본천(卒本川)으로 옮겨갔는데 이것이 동부여(東夫餘), 또는 졸본부여라 칭한다. 동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왕족의 또 다른 한 갈래는 남조선 지역으로 건너가서 백제국을 세웠는데 뒤에 당태종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유의 후예인 부여족의 한 갈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중 굳이 부여족의 정통성을 따진다면 필자는 백제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고구려는 나중에 동부여를 병합함으로써 부여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데 반하여, 백제는 부여장(夫餘璋), 부여륭(夫餘隆), 부여풍(夫餘豊) 등 왕조의 성씨를 아예 부여로 쓰고 또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남부여(南夫餘)라는 국명을 쓰면서 부여를 계승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 산동성 제수(濟水)에서 국명 유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시조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진으로 삼았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그 후 처음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기꺼이 따라왔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국명에 왜 제(濟)자가 들어갔는지 논리가 빈약하다.

허광웨는 이에 대해 ‘동이원류사’에서 백제의 ‘제(濟)’를 산둥성의 제수(濟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즉 남쪽으로 내려온 부여족은 부락이 점차 늘어나자 옛 산둥성 ‘제수’로부터 유래한 그 뿌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필자도 백제의 ‘제(濟)’를 산둥성의 제수로 보는 데 동의한다.

우리는 그동안 백제의 발상지를 한반도의 하남 위례성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백제라는 나라 이름에 대한 명확한 유래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백제의 발상지가 지금의 산둥성 추현의 부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백제 국명의 유래도 제수와 연관지어 찾아야 옳다.

지금도 제수는 산둥성을 가로질러 흐른다. 현재 산둥성의 성 소재지 지난(濟南)시는 제수의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수는 옛 사독(四瀆), 즉 강(江), 하(河), 회(淮), 제(濟) 등 사대수(四大水) 중의 하나로 허난성현 서쪽 왕옥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산둥성으로 들어간다. 그 하류는 동북쪽으로 흘러 황하와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

이처럼 제수 주위에 여러 동이부족 집단이 형성되어 국명을 백제(百濟)라 했을 수도 있고 또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100여명에 이르는 부여족이 제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 해서 백제라 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백제는 산둥성의 제수와 연관지어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이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건국시조 설화부터 논의가 엇갈린다. 예컨대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의 고대문헌기록은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주서(周書)’ 49권 백제전, ‘수서(隋書)’81권 백제전 등 중국 사서 가운데 일부는 백제의 건국시조를 구태(九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백제의 초기역사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 사라진 백제 초기 역사  

일본의 옛 문헌인 ‘신찬성씨록’(24권 제번 우경 하) 구다라노기미(백제공) 조에는 “구다라노기미가 백제국 추모왕의 30세 손인 혜왕의 손자 문연왕 후손이다”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왕세계표에는 혜왕이 온조왕의 18세 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추모왕으로부터 계산하면 19세 손이 된다. 이것은 ‘삼국사기’ 왕세계표에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 11명의 왕이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 ‘신찬성씨록’(24권 제번 우경 하) 후지이노수쿠네 조에는 그가 ‘백제 추모왕의 10대손 귀수왕의 후손이다’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귀수왕(214~234년)은 시조의 5대 손, 동명왕의 6대 손이라 되어 있다. 역시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에 4명의 왕이 빠져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보다 ‘신찬성씨록’에 왕이 4대 혹은 11대나 더 많다는 것을 통해 초기 백제의 역사가 잘려나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추모왕의 아들로 전하는 음태귀수왕, 추모왕의 손자라고 하는 덕좌왕 등의 이름이 보이나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잘려나간 초기 백제의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백제 역사의 뿌리가 상당부분 삭제된 것은 백제 건국 초기의 수도변천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는 처음 하남 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국가 성립을 선포한 다음 불과 10여년 만에 수도를 한산, 즉 지금의 남한산 일대로 옮겨 2년 후 왕궁을 지었다. 10여년 만에 수도를 옮기고 연이어 궁전을 건립하는 대역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영역이 100여 리에 불과했던 백제 초기의 경제능력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옮기기 이전, 하북 위례성에 이미 초기 백제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고 바로 이 하북 시대의 백제사가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하남 위례성에 한반도 백제가 수립되기 이전 하북에 대륙백제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대륙백제를 세운 시조는 구태이고 한반도 백제의 시조는 온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온조의 기록만 남고 대륙백제의 역사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후기 신라의 역사편찬자들이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재편하면서 백제사의 시작을 신라 창건보다 후대로 끌어내리려 한반도로 이주해온 후 온조왕 시대를 백제의 창건 기준으로 설정하고, 온조 이전 대륙백제 구태왕 시대를 잘라버린 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반도 백제는 자생적으로 성립한 나라가 아니고 대륙 서북지역으로부터 선진적인 제도와 기술문화를 가진 동이 부여계통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와서 건립한 나라다. 따라서 한반도 하남 백제 이전에 대륙의 하북 백제가 있었다는 논리를 전면 부인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하남 위례성을 한성으로 인정해 왔다. 그러나 한강은 역사적으로 강(江)이지 하(河)가 아니다. 백제가 실제 요서 진평 등을 지배한 기록이 중국문헌 여러 군데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하남 위례성의 ‘하’를 한강이 아닌 지금의 랴오닝성 요하(遼河)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초기 백제 역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하남 위례성 시대 이전 대륙의 하북 백제와 그 시조 구태에 대한 연구가 수반돼야 한다.


▶ 중국 요서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

백제가 요서(遼西)를 지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97권 백제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백제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백제의 소치(所治)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소치(所治)’라는 표현이다. ‘치(治)’는 고대사회에서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군치(郡治) 현치(縣治)일 경우에는 지방장관이 거주하는 군청, 현청 소재지를 뜻하고 국가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 즉 국도를 의미했다.  

예컨대 ‘한서(漢書)’ 고제기에 ‘치진중(治秦中)’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치’는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성이라는 뜻으로, 한(漢) 고조가 진중(秦中)에 수도를 정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백제소치’도 백제국의 도성, 즉 국도를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그동안 이 ‘치’를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점’이라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라 때 금주, 영원, 광녕 일대라 추정했다.  

그러면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국도를 정했다가 한반도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흠정만주원류고’는 그 시기를 양나라 천감(天監)시대로 보았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한반도로 천도해 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 백제열전에 있다.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熊)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흠정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晉平城)이라고 적시했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족이다’라 했다. 내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서경’ 우공편). 산둥성 내산(萊山) 밑에 살아서 그들을 내이(萊夷)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와 옌타이 일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1년에 북제(北齊)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의 직을 수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동청주는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에 해당된다. 역사학자 허광웨는 ‘부유인이 본래는 산둥성에 있다가 차츰 이동하여 춘추시대에 요서에 도달하고 전국시대에 다시 오늘의 지린성 부여지역에 도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원래 한반도 지역에 있던 백제가 중국의 요서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잠시 경략했다기보다, 대륙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제 세력이 나중에 차츰 남하하여 한반도에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의 요서 지배에 관한 기록은 ‘송서’ 이외에도 ‘양서’ 백제전, ‘남사’ 백제전, ‘자치통감’ ‘위서물길전(魏書勿吉傳)’ 등에 나타나는 명백한 사실임에도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를 위시한 식민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를 부정하거나 묵살하는 태도를 취했다. 요서 지방은 한반도 서남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천 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백제가 이곳에 진출해야 할 필요성이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 국사교과서는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다”라고 기술하여 백제의 요서 지방에 대한 지배를 진출로 폄훼했고, 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술 더 떠서 “근초고왕은 해상무역에도 힘을 기울여 요서지방에 무역기지로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하여 지배와는 상관없는 무역기지의 건설로 왜곡했다. 이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를 탈피하지 못한 데서 온 오류다.  

대륙 백제의 수도 요서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미궁에 싸인 한성 백제 이전의 백제사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 왕과 제후 거느린 대제국  

‘흠정만주원류고’ 3권은 “사서(史書)에 ‘백제는 무예를 숭상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했는데 그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다”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다. “백제는 여러 제후나 왕을 세워 그들의 공훈에 보답했는데 송(宋), 제(齊)나라 시대로부터 이미 그러했다. 이는 백제의 땅이 넓고 백성도 많았다는 증거다.”

일부 사학자들 중에는 ‘백제가 왕과 제후를 거느린 대제국이었다’고 말하면 코웃음을 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흠정만주원류고’의 이 기록은 ‘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 나타난 사료를 근거로 한 것이다.  

‘남제서’ 백제전에는 “건무(建武) 2년에 백제의 모대왕(牟大王)이 자기의 신하 사법명을 매라왕, 찬수류를 벽중왕, 해례곤을 불중후, 목간나를 면중후로 책봉한 뒤 형식상 남제에 국서를 보내 승인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건무는 남제 명제(明帝)의 연호로 서기 494년이며 신라 소지왕 16년, 고구려 문자왕 3년, 백제 동성왕 16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백제가 자체적으로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이야기인데, 모대왕이 남제에 요청한 사법명 등의 왕후 관작칭호 앞에 붙여진 명칭이 대체로 북 중국의 동부해안 지대 지명인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백제의 왕과 제후는 단순히 명의상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실제 백제세력이 이 지역 해안지대까지 뻗쳐 있었음을 말해준다.

옛날 천자(天子)밑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 있었다. 제후와 왕공을 분봉(分封)하는 것은 대제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비록 강성했지만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왕과 제후를 거느리지 못했다.  

그런데 백제가 ‘중건후왕(衆建侯王)’, 즉 자체적으로 여러 제후와 왕을 책봉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는 제후국이 아니라 대제국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지역은 서북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도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강역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었다. 또 위(魏)나라 때 물길(勿吉)과 도모해 고구려 땅을 빼앗아 동북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해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 신라의 60~70성을 취하여 그 강토가 더욱 넓어졌다.” 이것은 ‘흠정만주원류고’에 나오는 당시 백제의 강역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는 융성기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의 서북과 동북쪽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소유했고 이런 기초 위에서 왕과 제후를 거느리는 제국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서력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경주평야에 신라를 세웠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에서 건립했으며,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한강유역에 터잡고 출발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중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됐고 20년 후 고구려, 그로부터 다시 19년 후 백제가 성립됐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기록을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처음에 백제의 부용(附庸) 국가였는데 나중에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겸병하여 백제와 대등한 이웃나라가 됐다.”

‘흠정만주원류고’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것일까. 아마 북사(北史)의 다음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신라는 백제에 부용되어 있던 국가다.” 여기서 ‘부용’이란 큰 나라에 부속된 작은 나라, 즉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국가를 말한다. ‘맹자’에는 ‘강역이 50리가 안 되어 제후에게 부속된 작은 국가를 부용국이라 한다’는 설명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신라는 원래 독립국가가 아니라 백제의 부속국가로 있다가 나중에 차츰 발전하여 독립국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보다 먼저 신라가 건국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신라와 백제의 출발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 기록이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주로 한반도 이주 이후의 역사로 한정한데 반해 중국의 고대사료는 그 이전 대륙시대 역사까지 포괄하여 다룬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 것이다.


▶ 삼국 중 가장 생명력이 길었던 백제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고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금강하류로 침입했다. 이로써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됐다.’

이것은 백제 멸망에 대해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는 668년, 신라는 935년에 멸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상식이다.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패망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흠정만주원류고’의 기록을 통해서 본 백제의 패망 시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아마 ‘북사(北史)’와 ‘구당서(舊唐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북사(北史)’에는 “백제에는 5방(五方)이 있고 방은 10군(郡)을 관리한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6방이 각각 10개군을 관리한다”라고 했다. 두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군이 50개 내지 60개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해 빼앗은 것은 37군이다. 빼앗지 못한 군이 5분의 2나 된다. 이것은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됐음을 뜻한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멸망한 백제는 일부분에 불과하며 절반 가까운 세력이 그대로 남아 백제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는 것이 ‘흠정만주원류고’의 주장이다. 또한 삼국 중 백제가 최후까지 남았다는 사실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후당 시기에 백제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사서에 실려 있고 원(元)나라 때도 백제가 중국과 내왕한 사실이 사서에 등장한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1280~1367년까지 존속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백제는 935년에 멸망한 신라보다 최소한 수백년 가량 더 존속했고,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나라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느 민족이나 자기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미화하고 과장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미화나 과장은커녕 오히려 축소되고 폄훼된 경향이 짙다. 중화 중심의 사대(事大)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백제사는 두 번에 걸쳐 크게 왜곡되는 수난을 겪었다.

첫째, 고려 시기 신라 중심으로 삼국사의 정통을 세우는 과정에서 초기 백제사의 상당부분이 삭제 혹은 훼손되었다고 본다.

둘째, 일제에 의한 왜곡으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먼저 한국사 연구에 손을 댔는데, 이때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백제사를 총관(總觀·전체를 대충 살펴봄)하는 ‘백제약사’와 ‘백제사강화’를 저술했다. 이마니시의 백제사 서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백제가 신사시대(信史時代)로 들어간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고 그 이전은 전설의 시기로 파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가 왜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보호와 통치하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마니시의 이와 같은 백제사 인식체계는 백제의 후진성과 타율성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 흠정만주원류고’의 가치  

광복이후 일제에 의해 왜곡된 백제사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연구인력의 제한과 문헌자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백제사 인식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때 편찬된 책이다. 흠정이란 황제의 저술 또는 황제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저술을 뜻한다. 청나라 건륭 43년에 아계(阿桂)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이 책은 부족, 강역, 산천(山川), 국속(國俗) 네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간행됐다.

당시 조선은 친명배청(親明排淸)정책을 견지하는 바람에 조선과 청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한국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미화했을 리 만무하다. 단지 자신들의 터전인 만주의 고대사 원류를 추적하다보니 우리 민족사의 한 축인 백제사와 만나게 되고 그것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기술했다고 봐야 한다. 이 ‘만주원류고’에 보이는 백제는 후진적이고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강토는 광대하고, 인구는 많고, 역사는 깊고, 문화는 우수하고, 국력은 강대한 대제국이었다.  

광복된 지 어언 60년인데 우리가 아직도 식민사관의 잔재를 벗지 못한 채 고대사연구를 국내의 한정된 자료에 의존하면서 ‘흠정만주원류고’와 같은 소중한 역사기록을 방치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저 심백강 박사



http://coo2.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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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 <만주원류고>-고구려/백제/신라 등 동이북방 민족 총서 조회 : 1239

  글쓴이 : 허성정 / 2004-09-01 오전 07:46:47  홈페이지 : http://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 | 고구려



삼국사기가 신라 후손의 역사책이라면,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발해 후손의 역사책이다. 즉 삼국사기가 신라 경주 출신인 김부식이 쓴 역사책이라면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백두산 출신의 후금인[청 건륭 42년(1777년) 청 한림원]이 쓴 역사책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신라중심으로 서술되고,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발해 즉 만주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일만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바이칼호 연안, 시베리아, 만주, 칸(한)반도, 그리고 연해주는 우리 한(칸)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어떤 국호를 가진 나라가 세워졌건 그것은 하나의 민족에 의한 다수의 국가 건설이었을 뿐이다. 즉 수많은 국가들은 한민족 연방의 한 부속국가였을 뿐이었다.

곧, 만주와 몽골, 시베리아 지역에 부여가 세워지건, 고구려가 세워지건, 옥저가 세워지건, 발해가 세워지건, 금나라가 세워지건, 요나라가 세워지건, 실위국이 세워지건, 후금이 세워지건 그것은 모두 우리 한민족 연방국가의 일 개 부속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또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신라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백제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가야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아니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아니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그것은 모조리 다같은 한민족에 의해 세워진 일개 정치집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후금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면서, 설령 중국으로 편입됐다 하더라도 강역상 만리장성 이북 지역은 여전히 중국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특히 만주원류고에서 다루는 지역은 중화족의 강역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강역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결단코 중화족의 역사책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 다시 말해서, 고구려인/발해인의 역사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만주원류고는 고구려의 태학박사 이문진 (李文眞)이 AD 600년(영양왕 11년)에 왕명으로 기존에 전해 오던 역사책인 《유기(留記)》 100권을 편집하여 만든 《신집(新集)》5권이 1100여년이 흐른 후에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만주가 중국의 강역이 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 마저 중국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현대의 다물정신은 전쟁을 통한 강역회복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인식을 통한 민족사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 시대에는 이제 자연지리적인 강역은 별 의미가 없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산천을 넘어야만 영토를 빼앗아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현대엔 굳이 몸에 총칼을 메고 산넘고 물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타국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재물을 빼앗아 올 수 있다.

따라서 옛날과 같이 무력을 통한 고토수복은 이젠 다물운동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다물운동은 잃어 버린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찾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역사인식은 앞으로 무한경쟁시대에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중요한 벼리가 되 줄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서 소개하는 만주원류고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흠정만주원류고>로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입수한 복사본이다.이제 서론은 접어두고 만주 원류고의 개략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권1부터 권7까지는 부족을 다루고 있다.



권1 : 숙신, 부여족

권2 : 읍루, 삼한, 물길족

권3 : 백제족

권4 : 신라족

권5 : 말갈족

권6 : 발해족

권7 : 완안, 건주족

권8부터 권13까지는 각국의 강역을 다루고 있다.

권8 : 부여, 숙신, 읍루, 삼한의 강역

권9 : 물길, 백제, 신라, 흑수말갈의 강역



특히 신라 강역과 관련해서 신라의 강역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길림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신라의 계림은 경상도에 있지 않고 만주 길림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 판에서 잘못된 정보에 터잡아 고구려 멸망후 만주지역을 신라가 자동흡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견해는 오류이므로 이를 시정하기로 합니다. 한편, 신라의 계림을 만주의 길림으로 보는 만주원류고의 시각에 따르면 고구려의 강역은 박창범 교수의 삼국의 천문관측지점도대로 바이칼에서 동몽골, 흑룡강에 이르는 것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검토를 요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권10 : 발해의 국경

권11 : 요의 강역

권12 : 금의 강역

권13 : 원의 강역



권14부터 권15까지는 산천을 다루고 있는데 권14가 산악을, 권15는 하천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만주일대의 산악, 하천을 다루고 있다. 권14에 바로 그 말썽 많은 도문강(두만강?)이 나온다.끝으로 권16부터 권20까지는 국가의 습속을 다루고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신라구주(新羅九州) 항목을 다시보면 ~



< 만주(滿洲)는 6세기부터 7세기까지 신라(新羅)땅 >

지금까지 국사교과서에서는 신라가 압록강 두만강을 벗어나서 만주에도 존재했다는 구체적인 발표는 접하여 보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만주까지 신라땅"이라는 표제는 매우 충격적인 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18세기에 기록되었으니 과연 위와 같은 이야기가 사실일까를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위와같은 말을 하면 황당무개한 것으로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서에 그런 기록이 있다면 무심코 지나칠수는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高麗)나 근세조선시대의 어떤 기록에도 만주가 신라땅이었다고 나타낸바 없었는데 1778년까지도 만주에서는 만주가 신라땅이었다는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만주원류고」에서 "길림에서 광령까지" 신라땅으로 기록하였을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高麗)나 근세조선에서도 모르고 있었던 비밀(?), 만주가 신라땅이라는 자료가 어디에 있었을까?

18세기까지도 만주가 신라땅이라는 흔적이 있었다면 지금도 발견될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왔으며 만주에서 고구려(高句麗)가 있었다는 것에만 연연하여 오고 있었다.

과연 이 기록이 사실일까 ?

그리고 「만주원류고」 이외의 기록에 만주가 신라땅이라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1. 청나라에서 편찬한 「만주원류고」에서 만주(길림에서 광령까지)는 신라땅



「만주원류고」에서 신라에 관계되는 인용 사료는「北史, 梁書, 通志, 隋書, 冊府元龜, 舊唐書, 新唐書, 太平 宇記, 通考」등에 의하여 위치를 표현하고 있는데 「奉使行程錄」에서 " 自咸州北行至同州東望大山卽 新羅山深處與高麗接界"라 하였다.

案에 의하면 함주는 今함평부이고 동주는 금동산 在鐵嶺 開原之間, 동쪽으로 威遠堡 즉 吉林界, 남쪽으로 봉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許亢定行程錄」에 의한것이라 한다.

18세기에 나오는 지명 鐵嶺 開原과 吉林이 지금도 있다.

또 新羅九州 항목에는 「新唐書」 唐會要에 의하여 표현하였고 謹案에서 " 其疆土東南竝有今朝鮮之慶尙江原二道 西北直至吉林烏拉又西近開原鐵領"이라 하였고 개원 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결국 신라강역은 북쪽의 동쪽은 吉林에서 서쪽은 개월 철령까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 九州之設東至吉林西至廣 跨海蓋而包朝鮮幅員式擴矣"라고 하였는데 吉林 廣寧이 현재도 있고 廣寧 근처에 鐵嶺 開原이 있으니 신라의 서쪽은 開原 鐵嶺 廣寧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나타내고 동쪽은 길림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18세기에도 있는 지명이 현재 요하의 瀋陽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鐵嶺과 開原이 있고 서쪽에 廣寧이 北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北鎭=廣寧)

결국 「만주원류고」에서 신라는 동쪽 길림에서 서쪽의 개원 철령 광령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이를 신라가 高句麗 百濟를 멸한 뒤 설치한 9주에 포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여러 東夷 관계 기록들 즉 앞에서 열거한 사서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또한 百濟 高句麗 패망한 이후 그땅의 9주를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인용한「25사」동이전과 공통부분의 高句麗 百濟 패망의 땅은 황해 동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어떻게 생각하던지 18세기까지 만주에서는 신라땅이라는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만주원류고와 같은 내용이 기록될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다른 사서에서는 이와 유사한 기록이 어디엔가 있을수 있으므로 찾아봐야 할것이다.

서쪽의 廣 을 高句麗 패망 지명인 은산 신성 용도 둥의 서쪽에 있는 代와 燕慶사이의 恒山이 있는 지역의 廣靈으로 볼수 있으나 다른 지명인 開原 鐵嶺과 같은 지역에 없기 때문에 鐵嶺 서남쪽 지역에 있는 北鎭 즉 廣寧으로 보아야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2. 서남쪽은 평양성이고 동쪽은 신라라는 곳의 海州는 발해만 錦州 북쪽

「만주원류고」에 나타난 길림에서 광령까지의 신라땅을 다른 사서에서는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바로 해주를 경계로하여 신라땅이 있었다고 「遼史」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교과서도 황해도 해주 근처까지 신라땅으로 표기하는지도 모르지만 신라와 관련된 해주는「요사」에 찾아야하고 그 위치에서 옥저땅과 신라땅을 찾아보아야 한다.

海州는 신라뿐만 아니라 옥저땅으로 「삼국지」「후한서」에서 또 평양성과 신라땅의 경계로 「요사」에 등장한다.

현재 海州는 네 곳이 있다. 한국의 황해도 海州가 있고, 러시아의 연해주가 있고, 중국 요령성 海州가 있고, 강소성 海州가 있다.

海州는 옥저땅을 밝히고 평양성을 찾고 신라와의 경계를 찾는데 매우 중요한 지명이다.

① 평양성과 海州와 신라경계에 대한 기록을 보자.

『요사(遼史)』권 38에 의하면 " 암연현의 동쪽은 신라이며 옛 평양성은 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동북 120리 지점에 해주(海州)가 있다.(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고 하여 해주와 평양성과 신라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 황해도 해주는 서남쪽에 평양성이 있어야 하고 요나라땅이어야 하니 부적격인데 김부식도 해주성을 몰랐다고 하였으며 이땅이 「요사」의 해주로 볼 수 없다.

㉡ 중국 강소성 해주는 요나라 땅이나 평양성관계로 보아서 무리가 있고 高句麗와 신라의 경계로 보기에도 부적격이다.

㉢ 연해주는 평양성과는 방향이 일치하지만 동쪽이 신라라고 하였으니 부적격이다.

㉣ 은산 용도 고대인성 신성 북평 등 高句麗 동쪽에 있는 錦州 북쪽의 해주(海州)는 高句麗長城 근처에 있으며 요나라땅이니 가능성이 있는데 장성은 『삼국사기』高句麗장성 기록과 일치하고 있으니 이곳의 해주가 『요사』의 해주로 보여진다.

이곳이 『三國志』東夷 東沃沮에서 "海州衛本沃沮國地(明志)"라고 하였는데 「삼국지」「후한서」「진서」 동이 위치 배열도에 지명을 삽입한 경우 태원 북평의 高句麗 동쪽에 있으니 옥저 위치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 해주는 평양성과 옥저의 위치를 분명히 밝혀 줄 지명이니 연구해야 한다.

「요사」에 의하여 가장 타당성있는 錦州 북쪽의 해주는 「만주원류고」에 신라땅 서쪽 경계의 지명인 廣寧이 남쪽에 있고 동쪽에 鐵嶺과 開原이 있으니 이 이상 고구려와 신라경계를 명확하게 하여줄 海州는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옥저땅을 밝혀주는 지명으로 보여지고 만주라는 지명이 생겨나게된 원인을 밝혀줄 지명이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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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光岳
  
  1939年生,湖南岳阳人,历史学家,少年丧父,小学辍学后因家贫为人牧牛,自学历史地理、古典文学及古文字学等多种学科。1956年调任岳阳县农业技术员,1958年发明双季晚稻“倒种春”,升农技站长。1970年调岳阳市北区秘书。1977年任市文化馆干事。1978年调湖南省历史研究所古代史研究人员。1979年任全国青年常委。1985年获全国总工会自学成才金牌奖。1986年获“国家级有突出贡献的专家”,1987年获“湖南省先进科技工作者”铜牌奖,1998年获“湖南省优秀社会科学专家”称号,任副所长、副研究员。现任炎黄文化研究所所长、研究员及湖南省炎黄文化研究会会长,湖南中国古代史研究会副理事长、中国汉民族学会副会长。

  已出版《炎黄源流史》、《商源流史》、《秦赵源流史》、《夏源流史》、《南蛮源流史》、《东夷源流史》、《百越源流史》、《楚源流史》、《中原古国源流史》、《周源流史》、《汉源流史》、《楚灭国考》等。合著《岳阳楼志》,主编《中国帝王大全》、《中华姓氏通书》。自著出版21部学术专著,发表论文350篇,达一千万字。1993年傅朗云、杨阳等30我位教授在长春成立“东北何光岳研究会(筹)”,并写有《农民史学家何光岳》一书。1998年11月2日梁文忠、罗石贤、余三定、柳仁祥等260多人获批准成立“湖南省何光岳研究会”,并出版《史学奇才何光岳》一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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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页 >> 湖湘人文 >> 湖湘名人 >> 正文史学怪才和藏书大家——何光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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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xonl.com 07-09-12 21:51:15 【繁體浏覽 】  

     一个小学毕业的农民,自学成为历史地理学专家,撰写出版了《中华民族源流史》《中华姓氏源流史》系列专著37部,发表学术论文420篇,私人藏书达8.7余万册;他个性率真,不囿陈见,敢说敢为。他就是被称为史学怪才的何光岳。

放牛娃失学不失志        

    何光岳的老家在湖南岳阳县。10岁那年,新中国成立,他考取了县城的公费初中,但不久,由于家境贫困,只好辍学回家干农活。    

    每天清晨去放牛时,何光岳常常被乡村中学教室里传来的朗朗读书声吸引。于是,他便手牵牛鼻绳站在教室窗外倾听。有时他索性把牛关起来,在窗外看老师在黑板上写字。老师被他的求学精神感动了,破例让他进到教室里听课。从此,他一边放牛,一边当起了乡村中学的“编外学生”。年少的何光岳对盘古开天地、神农尝百草等民间故事以及各种历史史实尤为感兴趣。      

    1956年,何光岳被分配到农技站当技术员。当年,一场蝗虫灾害严重威胁农作物,乡亲们束手无策,他却不慌不忙,根据看过的那本清代《捕蝗法》,组织群众采取放火烧荒、鸡鸭啄食、砍隔离带缩小包围圈,再用药物集中消灭的方法,半个月便悉数消灭了蝗虫。      

    爱好历史、地理的何光岳每到一地,除了推广农业技术,就四处搜罗散失在农村的各种线装书、古碑、古帖。一天,他看见一位老农挑着两捆书往废品收购站走,就加快脚步追上老人。他顺手从挑子上抓过一部线装书,打开一看,竟是钟嵘的《诗品》,他立刻爱不释手。老人说这本书至少也要20元。他一摸口袋空空如也,只好用身上仅有的4斤粮票换了那本书。还有一次,他到长沙开会,在古旧书店发现了一本顾炎武的《天下郡国利病书》,卖12元钱。由于当时带的钱不够,他竟把身上一件新棉袄当了,买下那本书。      

    上世纪60年代初,何光岳把所有的钱都花在了买书上。不久,“文革”爆发了,他被当成“四旧窝主”抓去批斗,节衣缩食收藏的5000多册书,被洗劫一空。无奈之下,他背着一个黄挎包,带了一身换洗衣服和几本历史地理书,坐火车到了北京。在那里,他白天游览名胜古迹,晚上读书写作。    

    十年浩劫,带给大多数人的是一场灾难,而何光岳却利用这10年时间搜罗书籍,拼命读书、思考。10年后,他心里装着中国的历史和地理,也装着世界的历史和地理。        

“泥腿子”步入学术殿堂    

    由于一心扑在做学问上,何光岳过了而立之年才结婚。婚后,妻子生了两个女儿,一家人日子过得紧巴巴的,可他仍然没有放弃买书的嗜好。有一年腊月底,妻子把卖猪得来的80元钱交给他,让他去置办些年货,哪知他却挑了一担书回来,妻子被气哭了。    

    博览群书的何光岳可以随手绘出世界上任何一个国家、中国任何一个省的粗线条地图,并能说出中外地图上几乎所有城市、山川、河流的名称和位置。    

    1977年3月,上海复旦大学一位教授来岳阳考察洞庭湖的变迁。何光岳依据大量的文献和亲自考察得来的第一手材料,流利地回答了该教授提出的200多个问题。临别时,这位教授握住何光岳的双手说:“中国现在搞历史地理学的人凤毛麟角,你从一个农民自学到这样的水平,真难得!”    

    何光岳在历史地理学方面的自学成果引起了当地政府的重视。1978年7月,他被湖南省社科院录用为历史所的研究人员。“一个小学文化的农民,能搞出什么名堂?”有些人对他投来不信任的目光。然而,短短一年,何光岳就发表学术论文20多篇,出版了《中国历代分合考》《中国姓史》《岳阳楼志》等学术著作,令人刮目相看。          

笔耕不辍 终成大家      

    1985年5月,何光岳获得全国自学成才奖。3年后,他的一本25万字的学术专著《楚源流史》出版。与此同时,他被升为副研究员、历史研究所副所长,并获得“国家级有突出贡献的专家”称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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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사라진 단군의 진실을 복원하라 [1]

안원전
2007/06/29 6461
92
 [원문 번역]중국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작성 '동북공정' 개요

안원전
2006/09/22 5331
91
 [안영배 기자의 풍수와 권력]환구단과 천단의 천자(天子) 풍수 대결

안원전
2014/09/25 3528
90
 [산해경에 나온 (고)조선도 불교의 뿌리] [4]

안원전
2007/11/04 5322
89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고구려)라 불렀다.]

안원전
2007/11/04 5056
88
 [문화] 중국 역사 자료로 본 동북공정의 허구성

안원전
2006/09/06 6098
87
 [동영상]대학가에 민족혼의 바람이 불고있다 [3]

안원전
2003/12/25 9734
86
 [다시 보는 한국역사]<7>부여족과 불가리아

안원전
2007/05/23 6503
85
 [Why] 일본이 필사적으로 반출 막으려한 '독도팻말'의 비밀

안원전
2010/07/01 3553
84
 MB정부서 특수채 380조 발행..4대강 등 자금조달

안원전
2017/07/02 3723
83
 KBS 이인호 조부 "일본은 어진 나라라서 천하무적"

안원전
2014/09/03 2966
82
 KBS 다큐 일제강점기 이승만의 진실은?

안원전
2013/12/30 3026
81
 KBS 9시뉴스보도 (9월 9일) - 김종서 박사님의 연구내용 일부보도

안원전
2008/09/19 4528
*
 JSD [10]

안원전
2002/03/09 13699
79
 jeungsando.com,교회에서 쉬쉬하는 그리스도 이야기

안원전
2002/01/29 6844
78
비밀글입니다 Autumn calling

안원전
2002/01/13 5642

 <흠정만주원류고>에 기록된 백제사 - 발해와 한판뜨다

안원전
2009/01/06 4893
76
 <중국 25사 원문>의 동이족 개념

안원전
2002/03/08 6699
75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사람이 중심이다3 한홍구 기고 / 역사와 책임

안원전
2014/10/26 2891
74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사람이 중심이다 2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안원전
2014/10/26 3027
73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사람이 중심이다 1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안원전
2014/10/26 2584
72
 <발해의 정체> 이태백도 "발해는 외국"

안원전
2007/06/29 6168
71
 <근대 한민족사 엑스파일> 대륙조선은 어떻게 한반도로 축소되었나 ?

안원전
2007/03/13 6536
70
 <개천절 방북기>과연 檀君이 單君임을 확인한 행사 학술토론회, 북측 `대동강 문화` 강조 [1]

안원전
2003/10/11 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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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의 잔소리 한마디

안원전
2005/01/18 19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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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상고 대륙사의 대국적인 틀-안원전의 21세기 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연재의 변- [1]

안원전
2002/03/18 14475
67
 역사학자 시국선언 전문 “이명박 법정 세워라”

안원전
2013/07/09 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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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천년역사를 찾아서(환타지 코리아 동영상 포함) [22]

안원전
2003/10/07 1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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