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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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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잡계과학으로 본 CEO의 조건
복잡계과학을 이용한 이순신장군의 전승비결!  
2006/09/05 17:25

http://blog.naver.com/pack7001/50008339269

  
‣ 이순신장군의 전승(全勝)비결 속에 스며있는 복잡계과학!(1)




  복잡계(複雜系) 차원에서 본 유능한 리더란 에너지를 활성화 시킬 수 있어야 하고 분출된 에너지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순신(李舜臣) 장군이야 말로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복잡계에 걸 맞는 명장(名將)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조직(組織)을 항상 시간적, 정신적, 지리적으로 혼돈의 가장자리로 몰고 갔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비평형적인 복잡계의 특성을 군사작전에 철저하게 활용했다. 물론 그 당시에 이순신장군이 복잡계과학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역사를 다 뒤져보아도 복잡계를 그 만큼 잘 이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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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적인 비평형을 이용한 학익진(鶴翼陣)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지는 임진왜란 사상 최대의 해전(海戰)으로 이 해전을 계기로 조선수군(朝鮮水軍)이 남해안의 제해권(制海權)을 잡게 됨으로서 일본의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좌절시켰다.

1592년(壬辰年) 7월 7일에 이순신 장군이 원균과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은 거제도(巨濟島)와 통영만(統營灣) 사이에 있는 견내량(見乃梁)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아서 대해전(大海戰)을 펼치기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간파하고 왜선(倭船)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펼칠 계획을 세운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朝鮮水軍) 연합함대는 먼저 판옥선(板屋船) 대 여섯 척으로 하여금 일본수군(日本水軍)의 선봉(先鋒)을 급습(急襲)하여 적선(敵船)을 유인하도록 하였다. 이에 왜선(倭船)들이 일시에 몰려나오자 아군(我軍) 함선(艦船)들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敵)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였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뒤 쫒아 오는 적의 주력 함선들을 넓은 바다 쪽으로 유인하면서 도주하던 이순신 장군의 연합함대는 돌연 적 앞에서 모든 배가 일시에 방향을 180도로 선회(旋回)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며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적을 포위한 채 함포사격으로 적을 섬멸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 한산도대첩에서 적선 70척을 대파(大破)하고 다음과 같이 장계(狀啓)를 올리고 있다.




      *서기(西紀) 1592년(壬辰年) 7월 8일(乙丑)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장계(狀啓)

  이른 아침에 적선(敵船)이 머물러 있는 견내량(見乃梁)으로 항해했다. 한바다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倭)의 대선(大船) 한 척과 중선(中船) 한 척이 선봉(先鋒)으로 나와서 우리 함대(艦隊)를 몰래 보고서는 도로 진(陣)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大船) 서른여섯 척과 중선(中船) 스물네 척, 소선(小船) 열세 척으로, 모두 일흔세 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碇泊)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내량(見乃梁)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板屋船)은 서로 부닥치게 될 것 같아서 전투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왜적(倭敵)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閑山島)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敵)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먼저 나온 적선(敵船)을 뒤쫓아서 엄습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적선(敵船)들이 일시에 돛을 올리면서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자, 왜선(倭船)들도 따라 나왔다. 그때야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地字)․ 현자(玄字)․ 승자(勝字) 등의 총통(銃筒)들을 쏘아서 먼저 적선(敵船) 두세 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사기가 꺾여 물러나므로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선(敵船)을 불태우고 적(敵)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 「난중일기」네이버 지식 iN



  순천부사 권준(權俊)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倭)의 층각대선(層閣大船)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倭將)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도 먼저 돌진하여 왜(倭)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倭將)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重傷)이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倭敵)을 비롯하여 머리 열두 급을 베고,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은 왜(倭)의 대선(大船)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倭將)을 비롯하여 머리 열여섯 급을 베었고, 현양현감 배흥립(裵興立)이 왜(倭)의 대선(大船)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덟 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倭)의 대선(大船)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네 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쳐부수어 일시에 불태웠다. 좌 돌격장 급제 이기남(李奇男)은 왜(倭)의 대선(大船)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좌 별도장 본영 군관 전 만호 윤사공(尹思恭)과 가안책(賈安策) 등은 층각선 두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섯 급을 베었다. 낙안군수 신호(申浩)는 왜(倭)의 대선(大船)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층각대선 두 척을 총통으로 뚫자 여러 전선(戰船)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세 급을 베고 우리나라 사람 두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은 왜(倭)의 대선(大船)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세 급을 베었고, 발포만호 황정록(黃廷祿)은 층각선 한 척을 쳐부수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힘을 모아 불태우고 머리 두 급을 베었다. 우 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宋應珉)은 머리 두 급을 베었고,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崔天寶)는 머리 세 급을 베었고,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李應華)는 머리 한 급을 베었고, 우 돌격장 급제 박이량(朴以良)은 머리 한 급을 베었고, 내가 타고 있는 배에서 머리 다섯 급을 베었고, 유군 일령장 손윤문(孫允文)은 왜의 소선 두 척에 총을 쏘고 산 위까지 추격하였으며, 오령장 전 봉사 최도전(崔道傳)은 우리나라 소년 세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그 나머지의 왜(倭)의 대선(大船) 스무 척, 중선(中船) 열일곱 척, 소선(小船) 다섯 척 등은 좌도와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부수고 불태우니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놈 사백 여 명은 형세가 아주 불리하고 힘이 다 되었는지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으며, 그 나머지 대선 한 척․ 중선 일곱 척․ 소선 여섯 척 등 모두 열네 척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 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노곤하고 날도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므로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에서 위력을 보인 학익진(鶴翼陣)은 본래 조선수군(朝鮮水軍)이 즐겨 쓰던 정자(丁字) 타법을 개량한 것으로 학(鶴)이 날개를 펴듯 적(敵)을 둘러싸서 공격하는 진형(陣形)이다. 학익진(鶴翼陣)은 앞의 그림에서 보듯이 적(敵)은 아군(我軍)에게 종대(縱隊)가 되도록 하고 아군(我軍)은 횡대(橫隊)가 되도록 배치(配置)하여 마치 학의 양 날개로 적(敵)을 감싸 안듯 포위하는 진법(陣法)이다.

  학익진(鶴翼陣)의 위력(威力)은 학(鶴)이 날개를 펼치는 순간에 적선(敵船)을 아군(我軍)의 포격 유효 사거리 안에 집어넣을 수 있으며, 적선(敵船) 측면에 대한 사격(射擊) 조준면적이 커지기 때문에 아군(我軍) 함선(艦船)의 공격에 치명타를 당하게 되어있다. 또 하나 간과(看過)할 수 없는 이점(利點)은 화력의 집중력이 역전(逆轉)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5열 종대의 적선 100척과 이순신 장군의 함선 10척이 대적(對敵)을 한다고 가정할 때 병력의 차이는 100:10이다. 그러나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면 접전(接戰)하는 시점(始點)에서는 선두(先頭)에서 쫒아오는 적선(敵船)과 아군(我軍)의 함정(艦艇)이 5:10으로 역전(逆轉)된다. 그리고 판옥선(板屋船)은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 장착(裝着)된 2문 내외의 화포에 비해서 측면에는 10여 문이나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학익진으로 전환하는 순간 화포의 위력이 5배나 증가된다. 학익진의 형태에서 5열종대로 추격해오는 적의 선두함선 5대가 10문의 화포를 발사할 수 있다면 학익진을 펼친 아군의 10대의 함선에서는 100문의 화포를 가동할 수 있으므로 화력에서 10:100으로 순간적으로 역전(逆轉)시키면서 적의 함선을 초토화(焦土化)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익진으로 역공(逆攻)하는 순간에 에너지의 집중현상이 일어난다. 또한 에너지의 집중이 일어나는 순간에 평형에서 비평형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그런데 학익진이 성공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비결들이 있었다. 학익진의 위력은 함포전에서 나오기 때문에 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함포의 성능이 좋아야 하고 함선의 회전력이 빨라야 했으며 학익진을 펼칠 수 있는 조직력 -축구에 비교하면 기본 포메이션의 변화-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당시 왜군은 접병전(接兵戰)으로 만 일관했기 때문에 사거리(射距離)가 짧은 조총(鳥銃)의 사거리에서 벋어나려면 넓은 바다에서 포격전(砲擊戰)위주로 전투를 벌려야 했다.    

  조선수군이 보유한 판옥선(板屋船)은 선체가 U자형의 평저선(平底船)으로 바닥이 평평해서 빠르게 달릴 수는 없었으나 홀수선 -배가 물속에 잠기는 선- 이 낮아 안정감과 방향전환이 뛰어났기 때문에 수심이 낮은 남해(南海)와 같은 연안(沿岸)에서 유리했다. 또한 이중 돛으로 역풍(逆風)에도 전진(前進)이 가능했고 많은 함포로 무장되어 해전(海戰)에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양측의 노를 반대로 젓는 것으로 제자리에서 회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판옥선에는 파괴력이 월등한 천자총통(天字銃筒) 등을 장착할 수 있었으며 이 총통(銃筒)에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장전하여 발사하면 사거리가 500보나 되는 위력적인 화포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수군의 조총은 사거리가 100보 내외에 불과했기 때문에 근접전만 피하면 승산이 있었다.

  반면에 왜군(倭軍)의 대표적인 주력선(主力船) 세끼부네는 선체(船體)의 밑 부분이 V자형의 협저선(狹底船)으로 속도가 빠르고 장거리 항해에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암초(暗礁)가 많고 수심(水深)이 낮은 연안에서의 항해나 방향 전환 등에서 불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협저선이였기 때문에 배의 측면에 화포를 장착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조선수군은 전쟁 전에 이미 거북선이나 판옥선을 제조할 수 있는 선박 제조기술과 일본보다 월등히 성능이 좋은 화약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월등한 하드웨어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 학익진법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학익진에도 취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아군의 함선보다 속도가 빨랐던 왜선을 따돌리고 학익진을 펼치기 위해서는 아군의 선봉과 본진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했으며 각 함선들의 방향 전환이 빨라야했다. 또한 학익진을 펼치기 전에  중심부에 적의 빠른 전함이 접근하거나  학익진의 중심부를  뚫고 지나가면 학익진이 와해되어 숫자가 우세한 적의 함선들에게 각개 격파를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그림에서처럼 학익진의 중심부를 보강할 수 있는 함선들을 배치해야 했던 것이다.  



  
복잡계과학으로 본 CEO의 조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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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複雜系)에서 어떤 조직(組織)이 창발현상(創發現象)을 일으키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조직내부에 요동(搖動)이 발생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 조직외부의 환경변화인 섭동(攝動)이 조직내부에서 발생된 요동과 양(陽)의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조직내부에 요동이 발생하려면 그 조직의 에너지가 결집되고 활성화 되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을 끌고 나가야할 CEO의 신뢰성(信賴性)이 확보되어야 하고, 인재(人材)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기용하여 조직을 활성화 시켜야한다. 그러니까 어떤 조직에서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평형구조가 깨지고 비평형구조로 활성화 되면 요동이 발생하는데, 이때 발생된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려면 그 에너지를 결집시키려는 리더의 신뢰성이 최우선이며 모아진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직내부에서 발생된 요동과 조직외부의 환경변화인 섭동(攝動)이 맞아 떨어지도록 대비하는 것이 곧 미래지향적인 안목(眼目), 즉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수많은 역사(歷史)가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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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한제국(漢帝國)을 창건한 유방(劉邦), 명(明)나라의 시조(始祖)인 주원장(朱元璋), 중화인민공화국 초대주석 모택동(毛澤東), 나폴레옹 Napoleon Bonaparte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한 결 같이 보잘것없는 빈농(貧農)이나 섬 출신으로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으며, 국가적인 혼란기에 청․장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은 과감하게 격동(激動)의 중심에 뛰어들어서 국가적인 에너지를 성공적으로 결집시켰으며, 구태의연(舊態依然)한 평형상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웠던 것이다.

  *39세에 중국을 천하통일 한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다섯 번째의 지방순행 도중 하북성(河北省) 사구(沙丘)에서 50세로 급서(急逝)하자 진(秦)나라는 빈농출신 하급 장교였던 진승(陳勝과 오광(吳廣)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봉기(蜂起)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유방(劉邦)은 이때 고향인 패(沛)에서 현(縣)의 하급관리였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등의 추대를 받아 군사를 일으켜 패공(沛公)이라 칭하였다. 유방(劉邦)은 패(沛)의 풍읍(豊邑)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풍현(豊縣)- 출생으로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가업은 돌보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다 장년에 이르러 하급관리 -진(秦)나라의 정장(亭長:10리 정도의 땅을 관리하는 낮은 벼슬)- 가 되었다.







  *「중국사서설」p.106



  그러다 여산(驪山)의 황제릉(皇帝陵) 조영공사에 부역할 인부들의 호송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호송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자 자신도 도망하여 산중에 은거(隱居)하였다. 유방(劉邦)은 초기에는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항량(項梁), 항우(項羽)와 연합세력을 구축하였으나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벌이는 사이에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키고, 진(秦)나라의 법이 지나치게 가혹하였으므로 약법삼장(約法三章)만을 발표하고 다른 법은 모두 폐지하여 민심(民心)을 수습하였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 우선하여 신뢰성(信賴性)부터 확보하였던 것이다. 유방(劉邦)은 농민출신으로 한량(閑良)에 불과했으나 사람을 아끼고 베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활달하고 큰 도량으로 인재를 포용력 있게 등용하고 소하(蕭何), 조참(曹參), 장량(張良), 한신(韓信) 등과 같은 명신(名臣)들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기용하여 10만에 불과한 군대로 40만이 넘는 항우군(項羽軍)과 자웅을 겨루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해하(垓下)의 결전에서 항우(項羽)를 대파(大破)하고 천하를 다시 통일하여 한(漢)나라를 창건하였다.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 황제가 되기까지는 유방(劉邦)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주원장(朱元璋)은 호주(濠州)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 의 빈농(貧農) 출신으로 넷째아들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는 지주(地主)의 소를 키우면서 자랐다고 한다. 그는 17세 때 고향을 휩쓴 기근과 역병으로 부모형제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은 생계를 위하여 황각사(皇覺寺)에 들어갔으나 탁발승(托鉢僧)으로 쫓겨나야 했다.  그런데 이시기는 원(元)나라의 실정(失政)에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므로 총명했던 주원장(朱元璋)은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원장(朱元璋)은 동경(東京) 홍건군(紅巾軍)에 소속해 있는  곽자흥군(郭子興軍)에 지원 입대하여 격랑(激浪)의 중심으로 뛰어들게 된다. 주원장은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곽자흥의 심복이 되고, 곽자흥이 전사하자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으며 한림아(韓林兒)가 이끄는 용봉(龍鳳)의 홍건정권(紅巾政權)으로부터 좌부원수(左副元帥)에 임명되었다. 이후 주원장은 양자강(揚子江)을 포함하여 원(元)나라의 강남(江南) 거점인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본거지로 삼았으며 한림아(韓林兒)와 유복통(劉福通) 등이 원군(元軍)에 패배하여 쇠퇴하자 홍건군(紅巾軍)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러나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주원장(朱元璋)이 각지의 군웅(群雄)들을 제압하고 마지막으로 장사성(張士誠)의 부대와 강소(江蘇)에서 대진(對陣)하고 있을 때,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양 진영(陣營)이 협곡을 중심으로 대치한 외길 한복판에 산 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원장은 사활(死活)이 걸린 그 작전을 포기하고 산 오리가 새끼를 낳아 제 발로 길을 비킬 때 까지 여러 날을 기다렸다. 주원장의 이러한 의도가 적에게 알려지자 전세는 불리하게 기울었다. 그런데 일부 부하들의 불평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진영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장사성의 부장들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속속 주원장의 휘하로 투항해 왔던 것이다. 아군(我軍)의 부하장수들에게 인간적인 믿음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적군(敵軍)들까지 주원장의 인간적인 면모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신뢰성(信賴性)을 확보하게 되면 모든 것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야말로 화살 한발 쏘지 않고 마지막 결전을 승리로 이끈 주원장(朱元璋)은 그 후 원(元)나라를 멀리 북쪽으로 물리치고 명(明)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모택동(毛澤東)역시 유방(劉邦)이나 주원장(朱元璋)과 같은 농촌 출신이었으며 비슷한 경로를 밟아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建國)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할 중요한 점은 이들 모두가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역전(逆轉)에 역전 끝에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민심(民心)을 이반(離反)하지 않았고 주변 인재들을 과감하게 등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방(劉邦)의 공신(功臣)이었던 명장(名將) 한신(韓信)은 항우(項羽)에게서 푸대접을 받다가 유방(劉邦)의 신하(臣下)가 되었으며 한때 장개석(張介石)의 수하에 있었던 주은래(朱恩來)는 장개석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가 모택동(毛澤東)의 참모(參謀)가 되었다. 그러니까 조직을 발전시키려면 인적인 에너지 자원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유방(劉邦)은 천하를 차지하게 된 비결을 묻자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하는 것은 장량(張良)만 못하고, 국가를 다스리고 위무하는 것은 소하(蕭何)만 못하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싸우는 일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뛰어난 인걸(人傑)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 인걸을 잘 썼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천하를 통일하기 전(前)과 후(後)에 너무나 다른 행동을 보였다. 이들은 한 결 같이 목적을 달성한 후에 목숨 걸고 자신들을 보필한 참모들과 공신들을 철저하게 숙청해 버리고 만다. 이런 면에서 나폴레옹은 비록 말년에 유배(流配)를 당하여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이들보다는 더 영웅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은 새로운 시대와 역사를 열기위한 뜨거운 시민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프랑스혁명으로 사회적인 혼란과 대외적인 전쟁이 일어나면서 군사력이 사회전체에 커다란 힘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자 국민들은 나라의 혼란을 막기 위한 강력한 정부를 희망했다. 처음에는 나폴레옹도 프랑스 대혁명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1795년 파리 중심부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은 곧 여단장으로 승진하면서 야심을 품게 된다.




  *나폴레옹은 1769년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본래 코르시카 섬은 14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제노바 령이었는데 18세기 초부터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으며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그는 파리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7살 때인 1786년에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코르시카로 돌아가서 국민군 부사령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파인 파올리와 대립하게 되자 마르세이유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편협한 애향심을 버리고 혁명중인 프랑스에다가 운명을 맡겼다.

  그리고 1793년에 왕당파반란을 토벌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하여 영국군에게 점령되었던 툴롱 항을 탈환하는데 최초의 무훈(武勳)을 세웠다. 이 일로 자코뱅파의 인정을 받지만 그 때문에 테르미도르 반동 때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1796년에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 위한 이탈리아의 원정군사령관이 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그 결과 체결된 캄포 포르미오 조약(條約)에서 프랑스는 벨기에와 롬바르디아를 양도받았다.

  나폴레옹은 이 승리로 말미암아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1798년에 이집트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은 비밀리에 프랑스로 돌아와서 **1799년에 쿠데타로 총재정부(總裁政府)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게 된다. 그리하여 프랑스혁명은 전쟁을 통해 등장한 군인의 독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세계 역사 속에 나폴레옹의 이름이 떠오르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으로 사회 안팎이 혼란에 빠지고 질서가 무너지게 되자 국민의 인기를 얻거나 야망을 가진 군인이 권력을 쥐게 될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곧 군인 나폴레옹에게 그와 같은 계기를 가져다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지만 프랑스와 서유럽 여러 나라 제도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많은 개혁을 이루어냈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절대왕정이 다시 부활하였지만 프랑스혁명 후 보수와  자유진영의 대립이 계속되었다가 1848년 이후는 자유진영의 공격이 성공했고 그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꽃은 마치 전염병처럼 유럽 전체로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의 개인적인 야심과 독재정치로 혁명의 불꽃이 시들었다가 50여 년 만에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쓸쓸하게 최후를 마치게 된 것은 모처럼 타오른 민중의 에너지를 엉뚱하게 이용한 대가(代價)였다고 할 수 있다.

* 「세계사 5000년」p.229

**「이야기 세계사 (하)」p.140

  이상에서 살펴본 역사적인 사례(事例)들을 복잡계과학을 통해서 종합해보면 리더십이란 결국 에너지의 효율적인 관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리더는 조직 내의 에너지를 활성화시켜야 하고, 자의(自意)에 의해서든 타의(他意)에 의해서든 활성화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 결집된 에너지를 조직의 외부 환경 변화인 섭동(攝動)과 연결시켜서 극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극명(克明)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스포츠 경기다.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똑같은 조건 내에서 거짓 없이 승부를 가리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축구의 경우에 4-3-3이나 4-2-4등의 포메이션formation은 어떻게 하면 상대팀을 꺾기위해서 선수(選手)라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가동(可動)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이며, 모든 경기의 작전(作戰)은 예측력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토탈축구total saccor로 세계축구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네덜란드 출신들의 축구감독들을 보면 이들은 분명히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이름에 관계없이 가장 의지가 있고 컨디션이 좋은 선수들을 투입할 것”이라고 했다.

  듣기에 따라선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그는 네덜란드 감독 시절에도 진짜로 그렇게 실행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대표팀 사상 최다골을 기록한 클루이베르트나 빅리그에서 명성을 날리던 세도르프조차도 팀 전력을 극대화할 수 없다면 그 카드는 버려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잘하든 못하든 늘 이름 있는 선수에만 의존해서는 대표팀 23명 전원의 에너지를 모을 수 없으며, 모두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는 기대와 긴장을 하고 있어야 선수들의 에너지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계과학을 이용한 이순신장군의 전승 비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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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적인 비평형을 이용한 명량해전(鳴梁海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鳴梁大捷)이  있었던  전남  울돌목에  세계최대 규모의 시험조류발전소가  가  건립된다. 해양수산부는 전남 울돌목에 1,000kw급 시험조류발전소 건설공사를 2007년 완공목표로 63억 원을 투입한다. 울돌목은 전남 진도(珍島)와 화원반도(花源半島)사이의 명량해협(鳴梁海峽)으로 조류속도(潮流速度)가 11노트 이상에 달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조류발전의 최적지로 본격적으로 개발될 경우 세계최대규모인 9만kw의 청정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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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鳴梁)은 해남(海南)과 진도(珍島)사이의 좁은 물길로 길이 1.5km에 좁은 곳은 폭이 500m 가 채 안 되는 곳이다. 십리 밖에서도 조류(潮流) 흐르는 소리와 소용돌이치는 물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여 붙은 이름이 바로 울돌목이며 한문으로 표기해서 명량(鳴梁)인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절대적으로 열세에 처한 조선수군으로 일본수군과 대적하기 위하여 고민하다 진도(珍島) 부근에 있는 명량(鳴梁)이 수로(水路)가 협소(狹小)하고 조류(潮流)의 속도가 빠른 점에 착안(着眼)하여 해상에 쇠줄을 설치하고 일본수군을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명량해전에서 일본수군이 완패(完敗)당한 이유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첫 째는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이순신장군의 전술이 적중했고, 두 번째는 일본수군의 자만심이 빚은 결과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본전함의 구조적인 취약성(脆弱性)도 하나의 요인(要因)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조선수군으로 일본수군을 저지할 결전(決戰)의 장소로 선택한 명량(鳴梁)은 진도(珍島)와 화원반도(花源半島) 사이에 위치한 해협(海峽)으로 층류(層流)로 흐르던 조류(潮流)가 갑자기 좁아진 해협 때문에  난류(亂流)가 형성되는 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가장 빠른 천혜(天惠)의 바다 요새(要塞)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복잡계에서 난류(亂流)는 평형상태로 흐르던 층류(層流)가 속도(速度)가 빨라지면서 비평형상태에 이르면 발생한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은 조류(潮流)가 비평형상태에 이르는 지점에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전술(戰術)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본수군은 13척의 조선수군이 명량해협에 일자진(一字陣)을 펴고 늘어서 있자 가소롭게 생각하고 앞뒤 가릴 것 없이 맹목적으로 돌진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일본수군의 주력선인 세끼부네의 구조는 급물살을 헤쳐 나가면서  전투를 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했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선체가 U자형인 평저선(平底船)으로 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나 안정감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수군의 주력선인 세끼부네는 선체가 V자형인 협저선(狹底船)으로 속도는 빨랐지만 선체가 물밑으로 깊이 잠기기 때문에 암초가 많은 연안에서 항해하는데 적합하지 않고 방향전환도 쉽지 않을 뿐더러 전복(顚覆)되기가 쉬운 구조였다. 또한 선체가 작은 요동에도 쉽게 좌우로 흔들렸기 때문에 병사들이 배 멀미를 해야 했고 더 큰 문제는 조총을 정조준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1597년 9월15일 이순신 장군은 대규모 일본함대 200여척이 어란포(於蘭浦)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에 있던 조선수군 전 함대를 해남(海南)의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으로 모두 이동시켰다. 전라우수영은 명량해협 바로 뒤에 있는 조선수군의 주둔지였다. 이순신 장군은 그동안 자신과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실전(實戰) 경험이 풍부하고 믿을 수 있었던 정예(精銳) 부하장병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패잔병과 어부들로 급조된 함대를 이끌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수군은 불과 13척으로 10배가 넘는 일본함대와 당당하게 대적했다. 그 결과는 장군의 스물두 번째 승리였다. 적선 31척을 격파하고 수천여 명의 적군을 수장시켰다. 반면에 아군 함정은 단 1척도 손상되지 않았고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2명뿐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절대 절명의 그 순간을 이순신 장군이 직접 기록한 난중일기를 통해서 보기로 하자.



            *서기(西紀) 1597년(丁酉年) 9월 16일(甲辰) (양력 10월 26일) 맑음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敵船)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돌목(명량)을 거쳐 곧바로 아군(我軍)이 진(陣)을 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敵船) 백 서른세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大將船)이 홀로 적진(敵陣)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건만 아군(我軍)의 여러 배들은 관망(觀望)만 하고 진군(進軍)을 하지 않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멀리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 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 수가 없었다. 배마다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우리 배에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하여 적을 향해 쏘아라."고 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 나는 배를 돌려 군령(軍令)을 내리자니 적들이 더 대어들 것 같아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서 중군(中軍)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돛대에 올리니, 중군장미 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安衛)를 불러 이르되, "안위(安衛)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너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것 같으냐? 고 하니 안위(安衛)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두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安衛)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安衛)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 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 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데다가, 안위(安衛)의 격군 일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 「난중일기」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 만호 송여종 (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줄줄이 와서 합력하여 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俊沙)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이다. 내 배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敵將) ‘마다시’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乭孫)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준사는 펄쩍뛰며 "이놈이  ‘마다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敵)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 이 때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는 침범해오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치며 나아가면서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게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너무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겨 밤을 지냈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명량해전은 그야말로 세계해전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기적에 가까운 완벽한 승리였다. 이순신 장군의 이와 같은 전승행진은 탁월한 전술 전략과 완벽한 준비 그리고 정신력에서 일본수군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시간적, 정신적, 지리적인 비평형성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복잡계과학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복잡계과학을 이용한 이순신장군의 전승비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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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적인 비평형을 이용한 바다의 배수(背水)의 진(陣)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신중론(愼重論)에 격노(激怒)한 선조(宣祖)는 원균(元均)을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하고 이순신 장군을 권률(權栗)장군 밑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했다. 그런데 원균이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에게 참패(慘敗)하고 전사(戰死)하자 조선(朝鮮)의 조정(朝廷)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그러나 조선 수군(水軍)은 원균의 참패로 이순신 장군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길러왔던 무적함대(無敵艦隊)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할 당시 한산도에는 군량미가 약 1만석이 있었으며 화약은 4천근, 총통은 각 함선에 장착된 것 말고도 3백 자루나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2척에 불과한 함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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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과 백성들로 부터 워낙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던 덕장(德將)이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나타났다는 말에 도주했던 패잔병들과 백성들이 다시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 때 13척에 불과했던 조선수군이 10개월 만인 1598년 7월 18일 절이도해전 때는 85척으로 불어났을 정도로 백성들의 지원이 드높았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水軍)을 폐하고 육전(陸戰)에 참가하라는 선조(宣祖)의 밀지(密旨)를 받고도 포기하지 않고 “저에게는 아직도 전선(戰船)이 열두 척이 있습니다.”라는 상소(上訴)를 올리고  패잔병과 어부들로 구성된 오합지졸 120여명과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일본 정예함대와 대적하기로 결심한다.

  그동안 이순신 장군은 백병전(白兵戰)에 약한 조선수군(朝鮮水軍)의 전투력을 보강하고 적에  대한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이순신장군은 승리에 도취되거나 자만하지 않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분석하고 부하들을 아꼈기 때문에 확실한 승산(勝算)이 있을 때만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그에게는 수군을 조련하거나 모자란 함선을 건조할 시간도 없이 왜군들이 몰아닥쳤다.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수군을 몰살하고 제해권(制海權)을 획득한 일본수군은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밀어붙이기 위하여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에 불과한 함선으로 어떻게 하든 이들을 막아내야 만 했다. 확실한 승산이 서지 않으면 선조(宣祖)가 명령해도 꿈쩍 않던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이 닥쳤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 결전(決戰)의 장소로 명량해협(鳴梁海峽)을 택한 뒤, 고전(苦戰)이 예상되는 전투(戰鬪)에 임하는 부하장병들에게 죽음과 삶을 초월하고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전의(戰意)를 불태웠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이순신 장군 자신이 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사실은 이순신 장군 본인도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임할 때 죽을 각오로 전장(戰場)에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전투가 끝난 후에 명량해전에 대해서 자평(自評)하기를 “이긴 것은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고 토로(吐露)하고 있다.

  그런데 전투란 누구나 목숨을 걸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필사즉생(必死卽生)이란 임전훈(臨戰訓)이 오히려 불안한 전투를 앞둔 병사들의 사기(士氣)를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정신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이 백전노장(百戰老將)으로 그동안 한 번도 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부하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장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부하장병들의 전투의지(戰鬪意志) 분발(奮發)과 결사구국(決死救國)의 각오를 다지려 했던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불사(不死)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비평형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자기도 모르게 초인적(超人的)인 힘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적이 두려워서 도망치는 순간에는 평형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에 정신이나 육체가 경직되면서 공황(恐慌) 상태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일시에 무력(無力)해진다. 이순신 장군은 바로 이점을 우려했기 때문에 평소의 그답지 않게 부하들을 독려(督勵)하면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각인(刻印)시켜 줌으로써 바다에 배수(背水)의 진(陣)을 쳤던 것이다. 다음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중에서 명량해전 전날의 기록으로 그 당시 장군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볼 수 있다.


          *서기(西紀) 1597년(丁酉年) 9월 15일(癸卯) (양력 10월 25일)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陣)을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옮겼다. 벽파정(碧波亭 )뒤에는 명량(鳴梁)이 있는데 숫자가 적은 수군(水軍)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으며 또 이르되,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법으로 다스려서,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 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르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해협에서 133척의 일본군과 대적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수군은 칠천량해전으로 잃어버린 제해권(制海權)을 탈환하고 일본의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와해시킴으로서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 「난중일기」


               미래를 경영하기 복잡계과학을 이용한 이순신장군의 전승비결(2)  
                  

복잡계과학으로 본 CEO의 조건(2)  
2006/09/06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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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중에서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전쟁이나 스포츠 등에서 그 위력을 적나나(赤裸裸)하게 확인할 수 있다. 2003년에 발발한 미국의 대 이라크 전에서 스피드의 위력이 극명하게 나타났는데, 첨단장비를 동원한 정예화 된 미군이 이라크 전역을 순식간에 폭풍처럼 몰아쳐 버렸을 때, 미군(美軍)의 전격전(電擊戰)은 비단 직접 당한 이라크인들 뿐만 아니라 CNN을 통해서 본 세계인들 모두가 전율(戰慄)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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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일본에서 시작되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이종격투기’를 보노라면 선수들의 몸집보다는 스피드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2003년 ‘K-1’ 8강전에서 맞붙은 밥샵과 마르코 필로포비치 전을 꼽을 수 있는데 이 경기에서 마르코 필로포비치는 상대선수인 밥샵이 신장 17Cm, 체중 69Kg이 더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집만 믿고 탱크처럼 저돌적으로 숨 돌릴 새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밥샵을 아웃복싱을 구사하며 재빠르게 피하다가 1R 2분 26초 만에 상대방 콧잔등에 날카로운 펀치를 적중시켜 한방에 KO시켜버리는 명승부를 연출했다. 힘이란 물리법칙에서처럼 몸집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피드가 붙어야 한다.




*P(힘) = M(질량) × S(속도)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스피드의 위력을 보여주는 한판승부였다.

  그러나 기업의 구조조정은 조직의 몸집만 줄인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보수화된 거대조직을 개편하려면 지연, 학연, 인맥 등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경직된 조직을 유연성 있는 조직으로 변화시키려면 그만큼 조직의 효율성을 높여야 하고 효율적인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조직 내의 네트워크와 팀워크가 잘 다져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력관리가 잘 되어야 하는데 사실상 CEO의 업무는 70퍼센트 이상이 인재의 선발과 육성, 적재적소(適材適所)에의 배치에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조직이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구사하려면 조직원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야 한다. 특히 기업내부의 신속한 의사전달과 결정구조는 ‘스피드 경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거대조직의 문제점은 상급직원과 하급직원, 본사와 현장, 회사와 고객 간의 의사소통의 단절에 있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경영의 기법에서 ‘현장경영’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세계최고의 유통회사인 월마트는 고객의 요구에 대한 반응속도에 관한 한 세계제일이라고 할 만큼 현장경영을 중요시하는 회사다. 그러나 IBM의 위기는 ‘현장경영’이 전혀 되지 않은데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IBM의 조직형태는 전형적인 피라미드구조였다. 1980년대 중반 IBM의 경우 최 말단 영업사원에서 사장에 이르기까지의 단계가 무려 11개 층이나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결재라인이 최고 11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으로는 현장의 고객의 목소리, 의사결정 속도, 고객에게 빠른 피드백feed back을 줄 수 없었다. IBM조직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주요 의사결정이 IBM본사의 중역회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주요 신제품의 개발과 시장에의 발표는 본사의 중역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러한 의사결정들이 하부조직에 권한 위임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장으로의 진입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컴퓨터 관련 제품수명이 4~5년에서 6개월 이내로 단축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중앙 집중적인 조직구조 하에서는 시장의 변화에 신속히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구조조정을 하고 현장경영, 스피드경영 등을 시도해도 시장의 변화의 물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기업의 경쟁에서 도태(淘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업의 쇠퇴를 막기 위해서는 기업을 ‘닫힌 시스템’에서 ‘열린 시스템’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차세대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조직원들을 재교육시켜야 한다.

  기업이란 결국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기업을 이끌어나갈 조직원들 중에서 그 시대에 한발 앞서나갈 미래지향적인 감각과 창의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또한 생산성향상을 위하여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포상제도가 병행되어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CEO의 가장 중요한 임무란 바로 그 기업의 조직원들로 하여금 미래지향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그 창출된 아이디어를 성사시킬 수 있도록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강한 추진력과 일관성에 있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는 2003년 12월호에서 ‘대가들이 뽑은 대가’(guru‘s gurus) 1위에 피터 드러커가 선정되었다고 보도했다. HBR은 인터넷 검색엔진의 검색순위, 서적, 미디어 등에서 인용된 순위를 계량화해서 200명의 ‘경영의 대가’들의 순위를 매긴 후 이들에게 다시 ‘누구를 대가라고 하는가? ’라는 설문을 통해 ‘대가들이 뽑은 대가’를 선정한 결과 피터 드러커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GE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키운 잭 웰치가 회장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달려가 자문(諮問)을 구한 사람이며  ‘현대경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지도력이란 영리함이 아니라 일관성으로 유지된다.”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역시 현대경영학의 대가답게 마치 선문답(禪問答)처럼 내뱉어낸 단순명료한 일갈(一喝)인데 ‘일관성’이란 이 한마디에는 모든 현대적 경영기법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동양철학에서 부르짖고 있는 핵심사상인 중용(中庸)처럼 쉽게 이루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목표가 설정되어야 하고 정확한 목표를 세우려면 앞날에 대한 중․단기적인 안목(眼目)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지향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관성 있게 회사경영을 하려면 시장의 변화에 끊임없이 대응할 수 있는 조직 관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뒤따라야 하고 유연성 있는 조직을 만들려면 조직 내의 커뮤니케이션, 팀워크, 인력관리, 인재양성, 현장경영 등이 뒤따라 가야한다. 그러므로 기업경영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사실은 그 조직은 끊임없이 변신해야 한다. 특히 정보화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21세기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의 물결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그 변화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안목과 용기와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위험 없는 도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무사안일(無事安逸)이나 자만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은 없다.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속도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제일의 정보기업이었던 IBM이 파산위기에 몰리고 일본이 장기불황의 늪에 빠졌던 것도 이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감지하지 못한 결과였다.

  개인이나 기업, 국가를 막론하고 일시적인 성공에 방심하고 자만했다가는 순식간에 역전 당할 수 있는 것이 21세기 같은 복잡하고 스피드한 세상의 특징이다. 특히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 짧아진 현대에서는 위기도 성공도 순식간에 일어나고 그 파급효과도 엄청나게 커졌다고 할 수 있다.

  IBM을 절대 절명의 도산 위기로 몰아넣었던 원인은 첫째가 1980년대에 진행된 반도체사업의 급속한 발달 때문이었다고 한다. 반도체산업의 발달은 그 당시 메인 프레임main frame위주의 컴퓨터산업 구조를 급격히 해체시키며 중앙의 대형컴퓨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독립적인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시장을 형성시켰다. 둘째는 대형컴퓨터 개발경쟁의 하드웨어hardware중심에서 퍼스널 컴퓨터간의 운영시스템인 소프트웨어software중심으로의 컴퓨터산업의 구조변화였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컴퓨터시장을 거의 석권(席捲)하였던 IBM은 특히 제3세대 컴퓨터였던 시스템/360으로 1960년대 및 1970년대의 컴퓨터시장에서 독점적 위치를 확보한 이후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다. IBM은 과거에 비해서 영업보다는 기술개발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시스템/360의 성공은 IBM의 컴퓨터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시야를 좁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작은 성공이 큰 화를 부르게 된 것이다. 시장이 미니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개방형 시스템으로 흘러가는데도 IBM경영진들은 메인프레임에 의존하는 독자적인 폐쇄형 시스템을 고수하였다. 만일 그 당시에 IBM이 미니컴퓨터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다면 불과 2~3년이면 미니컴퓨터 시장의 주도권도 잡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IBM의 또 하나의 최대 실수는 퍼스널 컴퓨터간의 운영체계, 즉 소프트웨어software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지 않고 MS: Microsoft의 빌 게이츠William Henry GatesШ에게 운영권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IBM개발팀이 퍼스널 컴퓨터의 운영체계를 찾고 있던 중 빌 게이츠를 만나게 되는데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을 중퇴했던 무명의 빌 게이츠는 퍼스널 컴퓨터의 운영체계가 엄청난 사업이라는 것을 간파하게 된다. 그리하여 빌 게이츠는 IBM이 원하는 운영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션의 Q-DOS를 그 당시 빈털터리에 불과했던 그에게는 상당히 거금이었던 5만 달러에 사들여 IBM과 운영권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 퍼스널 컴퓨터의 기본 운영체계로 보편화된 MS-DOS의 모체였으며 빌 게이츠를 일약 세계최고의 갑부로 밀어 올려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이 제조업에서 미국을 따라 잡았다고 방심하고 있을 때 *IT산업이라는 보도(寶刀)를 갈고 있었던 미국에게 역습을 당하게 되었던 것과 같은 비슷한 상황이 컴퓨터 산업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나 기업의 경쟁에 있어서 시장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내다볼 수 있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은 아주 중대한 일이다. 예측력이 없다는 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선박과도 같은 것이다.

  난파선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선박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CEO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신뢰성과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뢰성(信賴性)과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복잡계과학으로 재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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