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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담론 382. 대륙향토사료를 통해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3-초인이 진나라를 섬기던 역사의 공헌 및 통일전쟁의 서막을 올린 감무(甘茂)
안원전 담론 382.



대륙향토사료를 통해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3








초인이 진나라를 섬기던 역사의 공헌

및 통일전쟁의 서막을 올린 감무(甘茂)


○ 춘추5패설
순자(荀子)의 설: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합려 월구천
후한의 조기(趙岐)의 설: 제환공 진문공 송양공 진목공 초장왕
唐 안사고(顔師古)의 설: 제환공 진문공 송양공 진목공 오부차 
 

*息壤 땅에서의 감무(甘茂)
진나라는 육국(六國)이 모두 그 재상들의 호칭을 상국으로 부르고 있어 그들 나라와 같이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특별히 승상(丞相)이라는 최고의 관직을 새로 만들어 좌우(左右)에 각각 한 사람씩 두어 감무(甘茂)를 좌승상(左丞相)에, 저리질(樗里疾)을 우승상(右丞相)으로 삼았다. 위장(魏章)은 자기가 승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위나라로 갔다. 무왕이 옛날에 장의가 한 말을 생각해 내고는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를 향해 말했다."과인은 서융(西戎)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아직까지 중원(中原) 제국의 번성한 모습을 보지 못했오. 만약 우리가 삼천을 얻어 중원과 통하는 길을 뚫는다면 나는 한 번 중원으로 가서 공성(鞏城)과 락읍(洛邑) 사이를 구경하고 싶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오. 두 분 승상 중 어느 분이 나를 위해 한나라를 정벌하여 삼천으로 통하는 길을 뚫어 주겠오?"▶저리질(樗里疾)/진혜왕(秦惠王)의 서제(庶弟)로써 저리(樗里=지금의 섬서성 渭縣 남)에 살았기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처음에 서장(庶長)으로 임명되었다가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지략이 뛰어나 지낭(智囊)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공(鞏)/지금의 하남성 공의시(鞏義市)를 말한다. 춘추때는 제(制)와 호뢰(虎牢)로 바뀌었다가 다시 전국 때 공(鞏)으로 바뀌었다.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전략상의 요충지다.- 저리질이 먼저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우리가 삼천으로 통하는 길을 얻기 위해서는  한나라의 의양(宜陽)을 취하여야 하는데 의양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멀어 군사들의 노고가 많을 뿐 아니라 그 비용도 적지 않게 들  것입니다. 더욱이 위(魏)와 조(趙) 두 나라가 한(韓)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할 것이니 신은 삼가 삼천으로 통하는 길을 얻기는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의양(宜陽)/전국(戰國) 때 한나라가 신정성(新鄭城)으로 천도하기 전의  도성(都城)이다. 지금의 하남성 의양현(宜陽縣)이다. 한나라는 그 도성을 평양성(平陽城 ;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의양성(宜陽城)-신정성(新鄭城)으로 옮겼다.-무왕이 다시 감무의 의견을 물었다. 감무가 대답했다. "신은 왕을 위해 위나라를 설득하여 같이 한나라를 정벌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왕이 크게 기뻐하며 감무를 위나라 왕에게 보내 설득하도록 하자 위애왕은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한다면 돕겠다고 약속을 했다.  감무는 원래 저리질과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혹시 저리질이 중간에 자기가 하는 일을 방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먼저 자기와 함께 한나라에 갔던 부사(副使) 향수(向壽)를 보내 진무왕에게 고하게 하였다.  위나라는 이미 대왕의 명을 받들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위나라가 우리를 돕는다할지라도 원컨대 대왕은 한나라를 정벌하려는 생각을 잠시 거두시기 바랍니다.  진무왕은 향수가 전한 말을 의심하여 즉시 식양(息壤)의 땅까지 가서 감무를 만났다. 무왕이 감무를 보자 물었다. ▶식양(息壤)/ 사기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에 나오는 진나라의 지명이나 그 위치는 미상이다.- 상국께서 과인을 위해 위나라의 도움을 얻어 한나라를 정벌하겠다고 하면서, 위나라에 가서 과인의 명을 전하여 그들의 허락을 받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국께서 다시 ' 잠시 한나라 정벌을 멈추십시오!'하니 무슨 까닭에서입니까? 감무  "무릇 천리의 험지를 통과해서 한나라의 대읍을  공격하는 것은 몇 달 동안의 짧은 시간으로 이루어질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옛날에 증삼(曾參)이라는 공자의 제자가 비읍(費邑)에 살고 있을 때 증삼과 동명이인인 노나라 사람이 살인을 하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 증삼의 모친에게 ' 증삼이 살인을 했습니.'라고 고했습니다. 그때 베틀에 올라가 베를 짜고 있던 증삼의 모친은 그 사람을 돌아보며 ' 내 아들은 사람을 죽일 사람이 아니오!'라고 대답하더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던 베틀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 '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리고 고하자 증삼의 모친은 잠시 베틀의 북을 멈춘 다음에 생각해 보더니 ' 내 아들은 절대로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오!' 라고 말하며 베를 짜기를 계속했습니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또 한 사람이 달려와 ' 살인을 한 사람을 확인해 보니 정말로 증삼 이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증삼의 모친은 곧바로 베틀의 북을 던져버리고 담장을 뛰어 넘어 도망쳤습니다. 무릇 증삼의 어진 마음이야 그 모친이 제일 잘 알고있었겠지만, 세 사람이 계속해서 달려와 증삼이 살인을 했다고 말하니 그 인자한 증삼의 모친마저도 결국은 증삼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신의 지혜로움은 증삼에 미치지 못하고 대왕께서 신을 믿으시는 마음은 증삼의 모친이 증삼을 믿는 마음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왕의 옆에 있으면서 신을 비방하는 자는 어찌 세 사람에 한하겠습니까? 신은 단지 대왕께서 다른 신하들의 말을 듣고 일의 중도에 베틀의 북을 던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한나라의 정벌을 잠시 미루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비(費)/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에 있었던 제후국이었으나 춘추 때 노나라에 편입되어 노나라 삼환씨(三桓氏) 중 계손씨(季孫氏)의 식읍이었다가 전국시대 때는 독립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무왕  "과인이 다른 사람의 참소하는 말을 듣지  않겠다고  이 자리에서 상국과 함께 맹세하리다!"  이윽고 그 임금과 신하가 서로 희생을 잡아 그 피를 입술에 바르며 맹세를 하고 다시 그 증거로 '식양(息壤)'이라는 글자를 써서 감무에게 주었다. 진무왕은 즉시 오만의 군사를 일으켜 감무를 대장으로 향수를 부장으로 삼아 한나라의 의양을 공략하게 하였다.  감무가 이끄는 진나라의 오만 군사가 의양성(宜陽城) 밑에 당도하여 포위하기를 다섯 달이 넘었지만 의양성을 지키던 수장(守將)이 굳게 지켜 결코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자 진나라 본국에 있던 우승상(右丞相) 저리질(樗里疾)이 무왕에게 감무를 비방하면서 말했다. "우리 군사들이 출전한지가 오래되어 피로에 지쳤습니다. 지금 철군하지 않으면 큰 변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무왕이 저리질의 말을 듣고 감무에게 철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감무는 철군의 명령을 듣지 않고 즉시 서찰 한 통을 밀봉하여 무왕에게 보냈다. 무왕이 봉함을 뜯어보니 그 안에서는 '식양(息壤)'이라는 두 글자가 써 있었을 뿐이었다. 무왕이 감무가 출전할 때 한 말을 생각해 내고는 말했다. "감무가 옛날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했음에도 내가 철군령을 내린 것은 나의 잘못이로다!"




서주초, 형인(荊人) 잔존부락인 -동이족 전욱(顓頊) 자손 계련(季連)의 미(羋)씨 성 자손-이 이미 서쪽으로 이동하여 단수(丹水)와 석수(淅水: 모두 河南省 河川)사이에 당도했다.(초(楚)의 왕들은 무왕(武王)처럼 대대로 웅씨(熊氏)가 계승했지만, 성(姓)은 한결같이 미(羋)였다) 육웅(鬻熊:or죽웅)이 수령할때 좋은 시기를 포착해 초민족을 거느려 폭군 상나라 걸왕을 등져 포기하고 서쪽을 향해 주문왕(周文王)에게 몸을 의탁해 주문왕(周文王)에게 신임을 받았다. 주무왕(周武王)이 계승한 후에 남쪽을 도모하고자 하매 초인이 이를 눈치채고 육웅(죽웅)의 아들 웅려(熊麗)의 영솔하에 족속을 일으켜 수산(睢山)과 형산(荊山)사이로 옮겨가 잠시 황량한 들판에서 피해 살았다. 무왕을 이어 주나라 성왕(무왕 아들로 강태공 사위)이 어린나이에 들어서자 주공단이 섭정하는 동안 의심을 받아 초나라로 망명해 화를 피하니 초인은 최고의 손님(上賓)으로 공경했다.  이에 주공이 그 덕에 크게 감격하여 다시 주나라 조실로 돌아가 이일을 왕에게 호소하니 주성왕(周成王)이 감동하여 이에 주성왕(周成王)은 웅려의 손자 웅역(熊繹)을 초군(楚君)에 봉했다. 이로써 형초(荊楚)는 제후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해 초국(楚國)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초인은 수세기동안 참담하게 경영한 뒤 웅거(熊渠) 초에 이르러 위험지경에 빠졌다. 웅거는 웅역(熊繹)의 4 세 손으로, 재능과 학식을 겸해, 진취적 정신을 가진 군주로, 군사를 정비하고 무예을 익혀, 중원지방에 변란이 일어난 틈을 타, 강토를 개척하는 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삼묘(三苗)는 일찌기 형초(荊楚)에 귀순했으며, 웅거(熊渠)는 정벌의 중점을 서부와 동부에 두었다.서부를 정벌하는 중에 용국(庸國:지금의 호북(湖北) 죽산(竹山)경내)을 공격해 치고, 강토개척의 서막을 열었다. 토벌중에 초인은 지금의 호북(湖北) 중부 양월(揚越)로 공격해 치고 세력을 강한(江漢) 평원으로 밀고 들어갔다. 계속 신속히 원정에 착수해 지금의 호북(湖北) 악주(鄂州)경내의 악국(鄂國)을 쳐 공격했다.
 
西周初年,荊人的殘部主要是季連的羋姓後人,已西遷至丹水與淅水之間。鬻熊為首領時,審時度勢,率楚民背棄商紂王,西行投奔周文王,並受到周文王的器重,周武王繼位後,有圖南之意,楚人覺察後,在鬻熊之子熊麗的率領下,舉部南遷至睢山與荊山之間,暫時避棲于荒野之地。周成王時,周公避禍于楚,楚人敬之如上賓,周公大感其德,周公回朝後訴說此事,感動了周成王,于是周成王封熊麗之孫熊繹為楚君。荊楚開始躋身于諸侯之列,楚國正式誕生了。
楚人經過一個多世紀的慘淡經營,至熊渠時初露崢嶸。熊渠是熊繹第四代孫,是一位既有才識又有進取精神的君主,他整軍習武,趁著中原動亂之機,開始了開疆拓土的進程。三苗早已歸順荊楚,熊渠把征伐重點放在西部和東部。在西征中,攻打了庸國(今湖北竹山境內),拉開了拓疆序幕。吊討中,楚人攻打了位於今湖北中部的揚越,勢力推進至江漢平原。接著遠征,攻打了位於今湖北鄂州境內的鄂國。

초족의 갈래는 다원적이었는 바, 황하 장강(양자강)유역에서 고 선주민(古先民)과 장기간 왕래하면서 전쟁과 융합을 하던중에, 마침내 형초지구 형성에 있어 공동 언어, 공동 경제생활, 공동 문화와 공동 심리 등 민족적 바탕과 특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초민족으로 거듭나게되었다. 초족(楚族)은 바로 초(楚)의 땅에서 얻은 이름이다. 그러나 초족의 족원(族源)이 어디에서 기원했느냐 하면, 혹자는 본원이 초지에서 토착적으로 항상 살았던 토착민 족이라 말하는 둥 그 역사기원이 중설분분하나 진실성은 없다. 일찌기 20세기 20년대 말에 곽말약이 <중국고대사회연구>라는 서책에서  "초는 본래 만이(蠻夷)니, 곧 회이(淮夷)"라 생각한다고 했다. 회이(淮夷)는 즉 초인(楚人)이니 즉 만형(蠻荊)이다.  ...회이,서이,형만은 널리 퍼져 매양 관련지어져 말하니, 이들 계열은 반드시 같은 동족일 뿐 아니라, 은(殷:동이족 95% ;임혜상)의 동일 맹족(혈족적으로 느슨한 동일족)이 된다. 후일, <은주청동기명문고석>,<금문총고> 등 책중에 초인은 곧 "웅영족(熊盈族:곰토템족)임을 명확히 인정한다. 초(楚)의  조상들이 회수(淮水) 아래 떠돌며 살았으며 엄인(奄人), 서인(徐人)등과 더불어 함께 동방국(東國)에 속했다.   ....웅영(熊盈)은 마땅히 곧 육웅(鬻熊:or 죽웅)이며, 영육(盈鬻)은 한가지 소리가 전음(轉音)되어 바뀐 字이다.웅영족은 주인(周人)이 압박하매 남하하기 시작해 강에 이르러, 강이 가로막아 다시 서쪽 위로 올라가 악(鄂)에 이르렀다. 호후선(胡厚宣)은 <초민족원어동방고> 한 글 가운데 진일보하여 "초의 시조는 축융(祝融)이 된다"고 주장한다. 축융(祝融)은 곧 육종(陸終)이니....즉 수인(遂人)이 곧 여(黎)족이고; 육종, 수인, 여 모두는 동방민족이다. 때문에 그후 주민족의 동방압박이 황하유역으로 미치니, 점점 상황이 변하여 동방민족이 마침내 허다히 서로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왔을 뿐 아니라, 초민족의 세력이 심히 강하여 점점 남방의 강한(江漢)유역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곽말약, 호후선 두 선생은  초민족 동방설을 인도하니 지금에 이르러 그 영향력이 거듭 심원하여, 적지않은 학자가 이 학설을 따른다 < By 安原田 譯>

    楚族是多元的,在黃河、長江流域遠古先民的長期交往、爭戰與融合中,終於在荊楚地區形成有共同語言、共同經濟生活、共同文化和共同心理素質的楚族。楚族就是以楚地而得名。但是,楚族的族源來自何方,或者原本就是楚地土生土長的民族,歷來眾說紛紜,莫衷一是。早在本世紀二十年代末,郭沫若在《中國古代社會研究》一書中,就認為“楚本蠻夷,亦即淮夷”。淮夷即楚人,即蠻荊,……淮徐荊舒每連言,必系同族,且為殷之同盟。 後來在《殷周青銅器銘文考釋》、《金文叢考》等書中,又明確認定楚人即“熊盈族”。楚之先世居淮水下遊,與奄人徐人等同屬東國。……熊盈當即鬻熊,盈鬻一聲之轉。熊盈族為周人所壓迫,始南下至江,為江所阻,復西上至鄂。
  胡厚宣在《楚民族源於東方考》一文中進一步提出“楚之始祖為祝融”。 祝融即陸終……即遂人即黎;而陸終、遂人及黎皆為東方之民族也。……惟其後以周民族之東方壓迫,及黃河流域之漸漸改變,東方民族遂多相率南遷,而楚民族勢力甚強,乃漸擴土於南方之江漢流域。 郭、胡二先生倡楚族東方說,至今仍影響深遠,不少學者從此說。http://big5.xinhuanet.com/gate/big5/hb.xinhuanet.com/cwh/2005-03/03/content_3813113.htm




후베이성[湖北省]을 중심으로 활약한 나라로, 시조는 제(帝) 전욱(顓頊)의 자손 계련(季連). 웅역(熊繹) 때에 주나라의 성왕(成王)으로부터 초의 제후로 봉해져, 단양(丹陽)에 정착한 뒤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래, 초나라 백성은 중원제국(中原諸國)의 백성과는 종족을 달리하는 남방의 만이(蠻夷:荊蠻)로 불려 멸시를 받았다. BC 704년 웅통(熊通)은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칭하였는데, 아들 문왕(文王)이 영(郢)으로 천도한 뒤, 더욱 국세가 신장하였다. 특히 장왕(莊王)은 BC 597년 진(晉)나라 군대를 필(邲:河南省 鄭縣)에서 격파하여 결국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이로부터 초는 진나라와 남북으로 대립하여 약 1세기에 걸쳐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그 사이에 양쯔강[揚子江] 하류에서 오(吳) ·월(越)이 일어나자 한때 초나라의 소왕(昭王)은 오나라에 밀려 도읍을 약(鄀)으로 옮겼다.
그 후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하고, 또 월나라가 쇠퇴해지자 초는 다시 세력을 회복, 양쯔강 중 ·하류를 모두 차지하는 강국으로서 전국칠웅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위왕(威王)은 BC 334년 월나라를 멸하고 저장성[浙江省] 서쪽의 땅을 차지하였는데, 다시 제(齊)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세력을 중원으로 뻗치는 동시에, 영토를 사방으로 확대하였다. 이 무렵에 초는 7웅 가운데서 영토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가장 많았다. 그러나 점차 진(秦)의 압박을 받아 BC 278년 수도 영이 함락되자 진(陳)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BC 241년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으나 BC 223년 결국 진에게 망하고 말았다. [출처] 초 [楚 ] | 네이버 백과사전







초나라와 진나라는 인접하여 민족간의 왕래가 밀접했고 민간인들의 교류도 빈번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의 경제문화가 진나라를 능가하자 초와 진의 교류도 자연히 초나라의 물질과 인재가 진나라로 많이 유입되었다. 본 장의 제1절에서 서술한 원인처럼 전국말기에 이르러 “초나라의 인재가 진에 등용되어” 당시의 두드러진 역사문화 현상을 이루었다.

마비백(馬非百)이 열거한 《진승상연표(秦丞相年表)》에 따르면 진 무왕(武王)이 처음 승상(丞相)을 두고부터 진시황(秦始皇) 시대까지 진나라는 모두 좌우 승상 21명이 있었고 진의 승상을 역임한 초인은 1/3을 차지했다. 이쯤 되면 진나라의 각 방면에서 일하는 초인이 얼마나 될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진나라에서 일하는 초인이 진나라의 역사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진의 재상에 몸담고 있는 초인의 성과만 말하더라도, 진나라 제왕의 업적을 견고히 하고 진 왕조를 건립했으며 진문화를 번성시켰다고 할 수 있고 모두 진나라를 섬겨 크게 이익을 얻은 초인이다.

어떤 의의에서 보면 심지어 초인이 진을 섬겨 공헌을 세우지 않았다면 진나라도 6국을 삼켜 신속한 승리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며 진 왕조가 천하를 통일하는 문화 상황을 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면적으로 보면 진나라의 관직에 몸담고 더 나아가 진 왕조의 요직에 있던 초인은 진나라의 갑작스런 승리와 진 왕조의 건립에 탁월한 공적이 있으며, 또한 진문화가 막다른 길로 걸어 들어가고 진 왕조가 단명하게 된 데도 책임이 있다.

진에 들어가 재상이 되어 사적에 매우 상세히 전기가 기록되어 있는 초인으로는 감무(甘茂), 위염(魏冉)과 이사(李斯)가 있는데, 특히 이사는 공로와 죄가 모두 인정되는 인물이다.



1. 통일전쟁의 서막을 올린 감무(甘茂)


*저리자 감무열전자료 http://blog.naver.com/hyh1822?Redirect=Log&logNo=20117602521

진나라가 정식으로 승상의 관직을 둔 것은 진 무왕(武王) 2년(기원전 309년)이다. 이때 진 무왕이 임명한 좌우 양 승상 중 한 명은 진 혜문왕(惠文王)의 이복동생이자 진 무왕의 숙부인 저리질(樗里疾: ?―기원전 300년)이고 다른 한 명이 바로 초나라 사람 감무다.

감무는 초나라 하채(下蔡: 지금의 안휘(安徽) 봉대(鳳臺))의 평민으로, 잠시 하채의 성문을 관리하는 소관리로 일하는 사거(史擧) 선생과 함께 “백가학설을 공부했으며(學百家之說)” 후에 진에 들어와 장의(張儀), 저리질(樗里疾)을 통해 진 혜문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진 혜문왕은 그의 재능과 식견을 마음에 들어 하여 그를 장군에 임명하고 그에게 서장(庶長) 위장(魏章)을 보좌하여 한중(漢中)을 정벌하게 했다.

당시의 천하대세는 “초나라가 강하면 진나라가 약하고, 진나라가 강하면 초나라가 약하여 양립할 수 없는(楚强則秦弱, 秦强則楚弱, 其勢不兩立《사기․소진열전(史記․蘇秦列傳)》)” 시기여서
“진나라가 하고자 하는 일로는 초나라를 약화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秦之所欲弱者莫如楚 《사기․소진열전(史記․蘇秦列傳)》).” 진나라가 단양(丹陽)에서 초군을 대파한 승세를 이용하여 초나라의 서북쪽 요지인 한중(漢中)을 정벌하여 초를 약화시키고 진을 강화하는 목적에 도달했고, 진나라와 초나라의 힘이 서로 필적하던 태세를 초보적으로나마 바꾸었다.

감무는 한중에서 공을 세워 진 혜문왕의 초를 공격하여 약화시키려는 마음을 깊이 움직여 진나라에서 입장을 확고히 하여 진나라에서 믿고 신뢰하는 객경(客卿)이 되었다.

진 무왕이 즉위한 그 해(기원전 310년)에 이미 진나라에 항복한 촉나라의 재상 진장(陳壯)이 반란을 일으키자 감무가 명을 받고 촉의 반란을 평정했다. 촉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초나라의 상류에 위치하여 진인이 초나라에 들어가는 경로였다. 진나라는 촉나라를 얻고 진나라의 물력과 인력을 크게 보강하게 되었고, 6국을 병탄하고 제왕의 위업을 건립할 경제적인 보장이 생겼을 뿐 아니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초나라를 위협할 수 있어 초나라가 서쪽으로 향하여 진나라와 교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소위 “촉나라를 얻으면 초나라를 얻고, 초나라가 망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다(得蜀則得楚, 楚亡則天下幷矣《화양국지․촉지(華陽國志․蜀志)》).”는 말이다.

따라서 촉나라의 국경을 통제하는 것이 진나라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다. 감무는 촉나라의 난을 평정하여 진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강한 국가의 지위를 굳건히 하게 해주었고, 천하를 통일하는 물질의 기초를 구비했으며 초나라를 파괴하고 제후를 멸하는 전략적 준비를 완성했으니 그 의의의 크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러한 큰 공을 세운 감무는 촉나라에서 진으로 돌아오자마자 무왕에게 좌승상으로 선발되어 우승상 저리질과 함께 군정(軍政)의 대권을 장악했다.

기원전 308년, 젊은 혈기가 왕성하고 웅지가 왕성하던 진 무왕은 감무에게 “수레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인 삼천의 땅을 얻어 주나라 왕실을 엿보고자 하는(欲容車通三川, 窺周室 《사기․진본기(史記․秦本紀))” 염원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무왕이 공공연히 털어놓은 이러한 욕망은 비록 동주(東周)의 왕도를 유람하고 싶은 욕망과 진나라의 무력을 과시하여 위세를 부리고 싶은 면도 있었지만, 사실상 이는 전대의 진 효공(孝公)과 진 혜문왕(惠文王)이 중원에 창을 겨눠 천하를 쟁패하려 했던 숙원으로, 전 양대 진왕은 조건과 시기 모두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 공공연히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무왕의 표출은 마침 진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지위를 확립한 후에 공공연히 선포한 정치 목표였다. 진인이 동쪽 중원의 중심지역으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한(韓)나라의 서부 중진(重鎭) 의양(宜陽: 지금의 하남(河南) 의양)을 거쳐야만 했다.

그래서 무왕은 감무의 지략을 이용하여 감무를 파견하여 병사를 이끌고, 의양을 공격하여 주(周)의 수도인 낙양(洛陽)의 통로를 열었다. “의양은 큰 고을이며, 또 상당, 남양에는 재물과 양식을 비축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름은 현이지만 사실은 군이었던(宜陽, 大縣也, 上黨、南陽積之久矣, 名爲縣, 其實郡也《전국책․진책(戰國策․秦策)》).” 이곳은 한(韓)나라가 진나라를 방어하는 최후의 방어선이었고 한나라는 전국의 정예부대 10만을 모두 모아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켜 요처를 지켰다.

감무는 의양을 공격하여 얻는데 어려움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기 전에 무왕과 그를 절대 신임할 것을 요구하여 철저히 약속한 후, 군대를 지휘하여 의양을 포위하여 공격하는데 5개월에 이르는 긴 시간이 걸렸다. 저리질(樗里疾) 등이 감무를 비방하여, 공격하여 빼앗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기에 포위한지 오래되어도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하자 무왕이 내심 동요하여 군대를 철수하려고 할 때, 감무가 이전의 맹약을 들어 무왕이 전국의 병사를 모두 일으켜 대거 진격하도록 했고 의양을 함락하지 못하면 절대로 살아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맹세로 병사들을 격려하고서야 마침내 다음해 의양을 함락하고 한나라 군사 6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더 나아가 감무는 승세를 타서 다시 군대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한나라 선왕의 묘지인 평양(平陽) 근 70리에 이르는 무축(武逐: 지금의 산서(山西) 임분(臨汾) 서남쪽-임분은 帝堯廟)까지 성을 쌓았다.



http://yangco.net/new0822/data/file/1china_4/00e39561_s기원전%20307년%20의양의%20싸움%20당시%20정세도.jpg

의양이 진의 수중에 들어가자 한나라는 문호를 개방하여 원기가 크게 상했고 중원 제후는 가슴이 드러나 진의 창을 향해 복부를 들이대는 꼴이 되었다. 득의양양해진 진 무왕은 즉시 저리질을 파견해 수레 백대와 군대를 이끌고 멀리 낙양을 향해 가 주(周) 천자를 알현했다. 진나라의 용맹하고 위풍당당한 군대가 중원의 중심지역에서 위세를 떨치자 주왕은 전율했고 천하는 질겁했다. 이어서 진 무왕도 주나라의 수도로 친히 들어가 숙원을 풀었다.

그는 천자의 왕권을 상징하는 몇 대의 진왕들이 탐내던 용무늬 주정(周鼎)을 보고는 너무 흥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시합하듯이 역사(力士)의 수중에서 정(鼎)을 빼앗아 들어올렸다. 그러나 천자의 정이 너무 무거워 진왕의 힘이 견디지 못해, 무왕은 뜻밖에도 이로 인해 경골(脛骨)이 부러져 죽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학자는 평가하길, “무왕의 재위 기간은 4년밖에 안되지만, 진나라의 통일 운동에서 세운 위대한 업적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첫째는 승상제도의 창립이요, 그 둘째는 의양을 제차 공격하여 빼앗은 것이다.(武王在位盡四年, 而其再秦國統一運動上所建立之偉績, 厥有二端. 其一爲丞相制度之創立, 其二爲宜陽之再次功拔.)” 무왕의 이 양대 업적은 모두 감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승상제도를 정식으로 건립한 것은 분명 통일 사업의 수요에서 착안된 것이다. 감무가 처음으로 진의 승상이 된 것은 감무가 재능이 높고 공적이 큰 것 이외에 아마도 승상제도의 건립하는데 감무와 의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의양의 공격과 함락은 감무에게서 계획되고 감무에게서 완성되었다. 진은 의양을 얻어 효산(崤山)의 요새와 읍지를 통제하여 주 수도의 교외까지 이르는 동진(東進)의 전초 진지가 생겨 가까운 시일 내에 천하를 요동시키고 6국을 멸할 희망을 얻었다.


의양의 전쟁은 진나라가 정식으로 통일전쟁을 발동하였다는 표지이며 진나라가 이로써 통일전쟁의 서막을 열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전 진나라의 동서(東西) 정벌은 모두 단지 통일전쟁의 준비로 보아야 한다. 진나라를 위해 통일전쟁의 서막을 연 사람은 바로 초나라 사람인 감무다.

감무는 진나라에서 크게 이바지 했는데, 첫째는 그 지혜와 용기가 뭇사람을 능가하여 당시 천하에서 존경하여 심복하는 ‘현인(賢士)’이자 ‘현상(賢相)’이었던데 있고, 둘째는 진나라를 위해 전력으로 통일전쟁을 계획하고 발동하여 무왕의 신임을 깊이 받은데 있다.
무왕은 그 기백을 과시하다 단명하고, 감무도 공적이 큰 것으로 인해 질투를 받았는데, 그 뿌리가 튼튼하지 않아 밀려나 할 수 없이 진나라를 떠나 최후에 위(魏)나라에서 죽었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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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의양(宜陽)의 싸움 !

주난왕(周赧王) 4년 기원전 311년, 진혜문왕이 죽고 그 아들 태자탕(太子蕩)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진무왕(秦武王)이다. 진무왕은 장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의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진나라를 떠나려고 했다. 진무왕이 장의를 위나라에 보내고 승상제도를 만들어 감무를 좌승상, 저리질을 우승상에 임명했다. 장의는 위나라에 들어가 상국이 되었으나 1년 후에 죽었다.

진무왕은 삼천(三川) 지방을 수레를 타고 통과하여 주나라 왕실을 엿보려 했다. 그래서 주난왕 7년 기원전 308년 좌승상 감무를 위나라에 보내 조나라와 함께 한나라 의양성(宜陽城)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했다. 의양성은 지금의 하남성 의양현 서북 낙수(洛水) 북안 한성진(韓城鎭)에 있었다. 의양은 낙수를 끼고 효산(崤山)과 민지(澠池)를 아우를 수 있는 한나라 서쪽 지역의 군사적 요새지다. 사서에는 “민지와 이효(二崤)는 실제로는 의양현 경내의 전력상의 요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나라는 이 곳에 10만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양식과 병기 등의 물자를 축적하여 몇 년이라도 버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의양은 비록 그 명칭은 일개 현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한나라의 가장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감무가 생각하기를 진군은 효산의 험지를 통과해서 천리길을 행군해야 하나 의양성의 성벽은 높고 병사는 많아 그 수비태세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음으로 해서 단 시간 내에 함락시킬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넉넉하게 갖고 지구전을 벌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저리질(樗里疾) 등은 그것을 기화로 진왕에게 참소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진왕에게 자기가 출전하면서 증삼(曾參)의 살인 사건과 중산국을 정벌했던 악양의 사례를 들어 의양성을 함락시키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기를 소환하지 않겠다는 것을 서약하도록 했다. 진무왕은 식양(息壤)이라는 곳으로 나아가 감무에게 맹세를 하고 그 약속을 문서로 써주었다.

그해 가을, 감무는 서장(庶長) 봉(封)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의양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그러나 진나라 군사가 5개월을 계속 쉬지 않고 공격했으나 의양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진나라의 친한파인 저리질과 공손석(公孫奭)이 관연 감무가 예상한 바와 같이 진무왕에게 의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을 참언했다. 진무왕은 두 사람의 참언을 듣고 마음이 동요되어 감무에게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회군하라고 명했다. 이에 감무는 식양에서의 맹세를 들어 진왕을 깨닫게 하자 진왕은 철군하라는 명을 철회하고 오히려 대량의 증원군을 의양의 싸움터에 보냈다. 오랫동안의 의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마음이 초조하게 된 감무는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전력을 다하여 의양성을 공격했다. 의양을 점령함으로써 진왕의 신임을 두텁게 하여 진나라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한 것이다. 만일 감무가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경우 안에서는 정적인 저리질과 공손석이 자기를 승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할 것이며, 밖에서는 한왕과 그 군신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진나라 안에서나 밖에서도 발 디딜 데가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무는 만약에 의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의양성은 자기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맹세를 하며 동시에 자기의 사재를 털어 의양성을 공격하는 장병들에게 상금을 걸어 독려했다. 진나라 군사들은 감무의 분전으로 인해 마침내 기원전 307년 의양성을 함락시키고 적군 6만의 목을 베었다. 진군은 그 승세를 몰아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무수(武遂)를 점령하고 그곳에 성을 쌓아 수비군을 두었다.

의양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을 때 초나라가 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경취(景翠)를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출동시켜 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의양으로 진격하던 초군이 미처 그곳에 당도하기 전에 동주군(東周君)이 그 행군을 막고 나섰다.동주군은 진무왕이 감무를 시켜 의양성을 공격하도록 명한 것은 수레로 삼천을 통하여 주왕실을 엿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나라의 대신 조루(趙累)가 판단하기를 의양성이 비록 지키는 쉽고 함락시키는 어려운 성이라 할지라로 초나라가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군을 의양성으로 출병시킨다면, 진왕과 감무가 의양성에 대해 두 사람의 개인적인 욕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대 도박을 감행한다면, 의양성은 어쩔수 없이 함락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동주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처지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루는 진언하여 친히 동주군으로 하여금 초나라 장수 경취(景翠)를 찾아가 초군의 행군을 멈추고 진나라가 의양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기다려 진나라가 군사들이 피로에 지치게 되면 그때 군사를 이끌고 의양성으로 달려가 구원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경취는 동주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나라 군사들이 의양성을 공격하다가 피로에 지칠 때를 기다려 진격을 하기로 정했다. 진나라가 기진맥진한 군사로 초군과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지금의 산동성 동명현(東明縣) 남쪽에 있었던 자극성(煮棘城)을 초나라에 할양하는 대가로 의양성에 대한 점유권을 인정받았다. 한나라는 그 내막을 모르고 경취를 극진히 대접했다. 이에 경취는 동주군에게 감격했다. 초나라의 대군이 가까운 거리에 주둔하는 바람에 진나라 군사들은 의양에 머물며 더 이상 동주국을 넘보지 못했다. 동주는 이로써 진나라에 점령 당하지 않고 보전될 수 있었다.

진나라는 중원에 견고한 성 중의 하나인 의양성을 점령하고 한 번의 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로 진나라의 강역은 중원으로 확대되었고 효산과 함곡관 지역을 완전히 제압하기에 이르렀다. 효함(崤函) 지역이란 지금의 하남성 신안에서 섬서성의 동관에 이르는 일직선 상의 험요지대를 말한다. 이로써 진나라는 효함의 험지에 의지하여 중원으로서의 출병과 퇴각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어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지형상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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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가 제나라와 국교를 단절하는 조건으로 상오 땅 600리를 할양하겠다고 약속한 장의는 정작 초나라가 제나라와 단교를 하고 약속한 땅의 할양을 요청하자 자기는 상오의 땅 6리를 말한 것이지 600리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이에 분노한 초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싸움에 패하고 오히려 초나라 영토였던 한중의 땅마저 진나라에 빼았겼다. 이에 진나라는 한중의 땅과 검중군을 교환하자고 제의하자 초회왕은 한중의 땅 대신 장의를 보내주면 검중군을 진나라에 할양하겠다고 했다.





장의(張儀)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10년에 죽었다. 희성(姬姓)에 장씨(張氏)다. 위나라 공족의 서출(庶出)이다. 일찍이 귀곡자에게서 학문을 배워 초나라의 상국 소양(昭陽)의 문객이 되었다가 도둑으로 몰려 곤장을 맞는 치욕을 당했다. 이어서 조(趙)와 동주(東周)로 가서 유세를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자질을 알아 본 동주의 소문군(昭文君)이 마련해 준 노자에 힘입어 진나라로 들어가 진혜문왕(秦惠文王)에게 유세하여 그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어 객경(客卿)에 임명되었다. 공자화(公子華)와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여 포양(蒲陽)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위왕에게 협박하여 위나라의 땅 15개 현을 진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진혜문왕 10년 기원전 328년 진나라의 상국에 올라 육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연횡(連橫)을 제창하고 육국으로 하여금 진나라를 받들게 만들었으며 군호(君號)를 사용하고 있던 진혜문왕으로 하여금 왕호(王號)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어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가 섬(陝) 땅을 점령하고 상군(上郡)에 요새를 견고하게 쌓았다. 후에 진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들어가 재상이 되어 위(魏)와 한(韓)을 설득하여 진나라를 받들게 하여, 제(齊)와 초(楚) 두 나라가 공손연(公孫衍)의 정책에 따라 합종으로 뭉치려는 것을 견제했다. 다시 진나라로 귀국하여 재상으로 복직했다. 혜문왕 왕호 9년 기원전 316년 사마착과 함께 촉을 멸하고 파(巴) 땅과 함께 진나라 영토로 했다. 다시 초나라로 들어가 초나라가 제나라와 외교관계를 끊는다면 진나라가 빼앗아 간 상오(商於)의 600리에 달하는 땅을 돌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초회왕으로 하여금 제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게 만들었다. 진나라는 그 틈을 타서 초나라를 공격하여 단양(丹陽)의 싸움에서 크게 무찌르고 초나라 땅이었던 한중(漢中)의 땅을 빼앗아 갔다. 이에 분노한 초회왕은 그를 잡아와 죽여 그 원한을 갚기 위해 진(秦)나라와 국교를 다시 정상화는 조건으로 장의를 초나라로 송환하라고 요청했다. 장의는 초나라에 보내졌으나서 초왕의 총신 근상(斳尙)과 총희(寵姬) 정수(鄭袖)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석방되어 진나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후에 다시 한(韓), 제(齊), 조(趙), 연(燕) 등 4국을 방문하여 유세하자 사국은 각각의 땅을 떼어 바치며 진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그 공로로 다섯 개의 성읍에 봉해졌으며 무신군(武信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진혜문왕이 죽자 그 뒤를 이은 무왕은 평소에 장의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고, 다시 진나라의 많은 신료들의 참소를 받아 진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들어가 상국에 취임했다. 다음 해인 기원전 310년 노환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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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양(宜陽)의 싸움



주난왕(周赧王) 4년 기원전 311년, 진혜문왕이 죽고 그 아들 태자탕(太子蕩)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진무왕(秦武王)이다. 진무왕은 장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의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진나라를 떠나려고 했다. 진무왕이 장의를 위나라에 보내고 승상제도를 만들어 감무를 좌승상, 저리질을 우승상에 임명했다. 장의는 위나라에 들어가 상국이 되었으나 1년 후에 죽었다.

진무왕은 삼천(三川) 지방을 수레를 타고 통과하여 주나라 왕실을 엿보려 했다. 그래서 주난왕 7년 기원전 308년 좌승상 감무를 위나라에 보내 조나라와 함께 한나라 의양성(宜陽城)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했다. 의양성은 지금의 하남성 의양현 서북 낙수(洛水) 북안 한성진(韓城鎭)에 있었다. 의양은 낙수를 끼고 효산(崤山)과 민지(澠池)를 아우를 수 있는 한나라 서쪽 지역의 군사적 요새지다. 사서에는 “ 민지와 이효(二崤)는 실제로는 의양현 경내의 전력상의 요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나라는 이 곳에 10만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양식과 병기 등의 물자를 축적하여 몇 년이라도 버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의양은 비록 그 명칭은 일개 현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한나라의 가장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감무가 생각하기를 진군은 효산의 험지를 통과해서 천리길을 행군해야 하나 의양성의 성벽은 높고 병사는 많아 그 수비태세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음으로 해서 단 시간 내에 함락시킬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넉넉하게 갖고 지구전을 벌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저리질(樗里疾) 등은 그것을 기화로 진왕에게 참소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진왕에게 자기가 출전하면서 증삼(曾參)의 살인 사건과 중산국을 정벌했던 악양의 사례를 들어 의양성을 함락시키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기를 소환하지 않겠다는 것을 서약하도록 했다. 진무왕은 식양(息壤)이라는 곳으로 나아가 감무에게 맹세를 하고 그 약속을 문서로 써주었다.

그해 가을, 감무는 서장(庶長) 봉(封)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의양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그러나 진나라 군사가 5개월을 계속 쉬지 않고 공격했으나 의양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진나라의 친한파인 저리질과 공손석(公孫奭)이 관연 감무가 예상한 바와 같이 진무왕에게 의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을 참언했다. 진무왕은 두 사람의 참언을 듣고 마음이 동요되어 감무에게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회군하라고 명했다. 이에 감무는 식양에서의 맹세를 들어 진왕을 깨닫게 하자 진왕은 철군하라는 명을 철회하고 오히려 대량의 증원군을 의양의 싸움터에 보냈다. 오랫동안의 의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마음이 초조하게 된 감무는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전력을 다하여 의양성을 공격했다. 의양을 점령함으로써 진왕의 신임을 두텁게 하여 진나라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한 것이다. 만일 감무가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경우 안에서는 정적인 저리질과 공손석이 자기를 승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할 것이며, 밖에서는 한왕과 그 군신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진나라 안에서나 밖에서도 발 디딜 데가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무는 만약에 의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의양성은 자기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맹세를 하며 동시에 자기의 사재를 털어 의양성을 공격하는 장병들에게 상금을 걸어 독려했다. 진나라 군사들은 감무의 분전으로 인해 마침내 기원전 307년 의양성을 함락시키고 적군 6만의 목을 베었다. 진군은 그 승세를 몰아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무수(武遂)를 점령하고 그곳에 성을 쌓아 수비군을 두었다.

의양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을 때 초나라가 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경취(景翠)를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출동시켜 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의양으로 진격하던 초군이 미처 그곳에 당도하기 전에 동주군(東周君)이 그 행군을 막고 나섰다. 동주군은 진무왕이 감무를 시켜 의양성을 공격하도록 명한 것은 수레로 삼천을 통하여 주왕실을 엿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나라의 대신 조루(趙累)가 판단하기를 의양성이 비록 지키는 쉽고 함락시키는 어려운 성이라 할지라로 초나라가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군을 의양성으로 출병시킨다면, 진왕과 감무가 의양성에 대해 두 사람의 개인적인 욕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대 도박을 감행한다면, 의양성은 어쩔수 없이 함락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동주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처지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루는 진언하여 친히 동주군으로 하여금 초나라 장수 경취(景翠)를 찾아가 초군의 행군을 멈추고 진나라가 의양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기다려 진나라가 군사들이 피로에 지치게 되면 그때 군사를 이끌고 의양성으로 달려가 구원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경취는 동주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나라 군사들이 의양성을 공격하다가 피로에 지칠 때를 기다려 진격을 하기로 정했다. 진나라가 기진맥진한 군사로 초군과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지금의 산동성 동명현(東明縣) 남쪽에 있었던 자극성(煮棘城)을 초나라에 할양하는 대가로 의양성에 대한 점유권을 인정받았다. 한나라는 그 내막을 모르고 경취를 극진히 대접했다. 이에 경취는 동주군에게 감격했다. 초나라의 대군이 가까운 거리에 주둔하는 바람에 진나라 군사들은 의양에 머물며 더 이상 동주국을 넘보지 못했다. 동주는 이로써 진나라에 점령 당하지 않고 보전될 수 있었다.

진나라는 중원에 견고한 성 중의 하나인 의양성을 점령하고 한 번의 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로 진나라의 강역은 중원으로 확대되었고 효산과 함곡관 지역을 완전히 제압하기에 이르렀다. 효함(崤函) 지역이란 지금의 하남성 신안에서 섬서성의 동관에 이르는 일직선 상의 험요지대를 말한다. 이로써 진나라는 효함의 험지에 의지하여 중원으로서의 출병과 퇴각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어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지형상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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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담론 특별기획 동이족의 영적문서를 빌어다가 개찬한 공자의 소작-나를 아는 자도 오직 「춘추(春秋)」요, 나를 죄줄 자도 그 오직 「춘추(春秋)」다   안원전    2002/10/30  8671
N   동이 대륙상고사 유적지 탐사를 마치고(안원전) 2002.8.16   안원전    2003/04/15  12420
432    안원전의 담론 391.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7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3부   안원전    2013/11/17  4197
431     안원전의 담론 390. NHK ‘료마전’의 료마와 요시다쇼인(吉田松陰)   안원전    2013/09/15  4555
430    안원전의 담론 389.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6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2부   안원전    2013/03/29  4105
429    *(특집)안원전의 담론 388. 대한민국 한류 디자인-대한민국을 새로 디자인하라!!   안원전    2012/09/07  4167
428   비밀글입니다  안원전의 담론 387.   안원전    2011/07/26  213
427    안원전의 담론 386.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5-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1부   안원전    2011/07/04  5796
426    안원전의 담론 385.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4-진나라 제왕의 위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위염(魏冉)   안원전    2011/06/07  4736
425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84. (漢字의 秘密) 한자(漢字)의 주인은 한겨레 韓민족이다.   안원전    2011/06/01  6943
424     안원전 담론 383. 소통(疏通)에 대하여   안원전    2011/05/24  2876
   안원전 담론 382. 대륙향토사료를 통해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3-초인이 진나라를 섬기던 역사의 공헌 및 통일전쟁의 서막을 올린 감무(甘茂)   안원전    2011/05/17  3334
422    안원전 담론 381.약초를 널리 보급하여 질병을 치료한 다릉(茶陵:차릉)의 ‘세 가지 보물(三寶)’   안원전    2011/05/11  3019
421    안원전의 담론 380. 염제(炎帝)가 불을 광범위하게 응용하던 이야기 2   안원전    2011/05/09  2682
420    안원전의 담론 379.염제(炎帝)가 불을 광범위하게 응용하던 이야기1   안원전    2011/05/09  2797
419    안원전의 담론 378.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2- “진나라가 망하고 초나라가 보전되는(亡秦必楚)”의 문화 운명   안원전    2011/05/03  2618
418    안원전 담론 377. 대륙향토사료를 통해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1-초나라가 갑자기 쇠퇴한 원인은 음란과 방탕 그리고 모든 통치계급의 부패와 문란   안원전    2011/04/30  2568
417    동이 대륙상고사 답사를 마치고2(2002) 續원고   안원전    2011/04/30  2560
41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76. 거영신(巨靈神: 강의 신)   안원전    2011/01/10  3039
415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75. 황하(黃河)의 수신(水神) 하백(河伯)   안원전    2011/01/05  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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