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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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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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의 담론 386.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5-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1부



李斯墓
李期墓在蔡国故城的西南部,位于李斯楼东南角,是一个高大的土冢。墓的四周砌有石阶,墓前树有墓碑,上刻“秦丞相李斯之墓”。墓的四周松柏掩映,花木丛生,墓西不远处有李斯跑马岗和李斯饮马涧。据传,李斯青年时期经常在此处纵马驰骋,马渴了就在此涧沟中饮马,后人便称此处为跑马岗和饮马涧。整个墓区岗岭http://www.google.co.kr/imgres?imgurl=http://www.qunxiong.info/picture/20100101086_R.jpg&imgrefurl=http://www.qunxiong.info/archives/2010/01/000007.php&h=375&w=500&sz=118&tbnid=k3v7kWbTEWoeUM:&tbnh=98&tbnw=130&prev=/search%3Fq%3D%25E6%259D%258E%25E6%2596%25AF%25E5%25A2%2593%26tbm%3Disch%26tbo%3Du&zoom=1&q=%E6%9D%8E%E6%96%AF%E5%A2%93&hl=ko&usg=__PkpxNa8WkQZ5Q5VZZ_5w1lPYOgI=&sa=X&ei=fdWDT7zDL8yiiAf7rZHdBw&ved=0CGEQ9QEwDQ高耸,涧水澄清,云浮碧野,鸟语花香,是一处风景优美的游览胜地。唐朝诗人胡曾专为李斯墓题了诗,其诗曰:“上蔡东门狡兔肥,李斯何事忘南归?功成不解谋身退,直待咸阳血染衣。”宋朝大诗人刘敞也为李斯墓题了诗。诗为:“二事三公何足论,忆牵黄犬出东门。天人忌满由来事,枉持沙丘有旧恩。”


http://baike.baidu.com/view/167671.htm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86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5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1부



곽말약은 <은주청동기명문고석> <금문총고> 등에서-초인은 명확히 웅영족!!
*郭沫若在《殷周青铜器铭文考释》、《金文丛考》等书中,明确认定楚人即“熊盈族”。
  <사기초세가>에 기재하기를 초의 선조는 전욱고양에서 출자했고 고양은 황제의 손자로 창의의 자식이다
《史记·楚世家》载:楚之先祖出自帝颛顼高阳。高阳者,黄帝之孙,昌意之子也。
초국시인 굴원-<이소>에서 자칭 전욱고양의 후예, 증조는 백용이다. 굴원은 초국 웅성熊姓왕실후예로 굴땅에 봉해져 지명으로 굴씨가 됨
楚国诗人屈原在其《离骚》中亦是自称:帝高阳之苗裔兮,朕皇考曰伯庸。而屈原实为楚国熊姓王室后裔,因封于屈地,故以地名为氏。 
사기진본기에 진의 선조는전욱의 묘예 여수 대비...舜에게 영嬴씨 성 받아. 결론; 초楚나라 웅영족의 범위가 진秦나라에까지 확대됨!!
《史记 秦本纪》中明确记载:秦之先,帝颛顼之苗裔孙曰女脩……大费拜受,佐舜调驯鸟兽,鸟兽多驯服,是为柏翳。舜赐姓嬴氏……  如此一来,“熊盈族”的范围又扩大到了秦
* 1920년대 말 곽말약, <중국고대사회연구>에 초는 본래 만이 또한 회이로 회이는 곧 초인으로 곧 만형이라 생각하고 이들은 반드시 동족이고 은殷의 동맹이다.  
早在本世纪二十年代末, 郭沫若在《中国古代社会研究》一书中,就认为 “楚本蛮夷,亦即淮夷”。 淮夷即楚人,即蛮荆,……淮徐荆舒每连言,必系同族,且为殷之同盟。
 후일 <은주청동기명문고석> 后来在《殷周青铜器铭文考释》、금문총고 등 책 가운데에《金文丛考》等书中,또 명확히 인정하기를 又明确认定초인은 곧 웅영족 楚人即“熊盈族”。
  초인선조 회수하류에 엄인 서인 등 동일 족속과 东国이룸.웅영은 마땅히 곧 죽(육)웅으로 웅,죽은 이자일성으로 글자만 다르고 소리는 하나……웅영족은 주인이 압박해 남하하여 강에 막혀 다시 서쪽 위로 진출해 악鄂에 도달.  호후선은 초민족원우동방고에서 진일보한 이론 내놓았는데 초의 시조는 축융
楚之先世居淮水下游,与奄人徐人等同属东国。熊盈当即鬻熊,盈鬻一声之转。熊盈族为周人所压迫,始南下至江,为江所阻,复西上至鄂。胡厚宣在《楚民族源于东方考》一文中进一步提出 “楚之始祖为祝融”。
후일 서욱생은 <초문화의 연원과 삼묘문화의고고학추측>에서 진일보한 근거를 제시했는데 묘만집단의 논단은 고고학의 성취와 연계해  초인과 삼묘의 선조는 그 뿌리가 동일하여 초인의 선조는 마땅히 형초지구의 토착거주민으로 묘족 혹은 묘만집단에 속했다고 명확히 주장했다.
*后来在《楚文化的渊源与三苗文化的考古学推测》一文中,又进一步根据徐旭生指出的先楚与三苗同属南方的 “苗蛮集团”的论断,联系考古文化成就,明确提出“楚人与三苗的先祖是同源的”,即楚之先祖应为荆楚地区的土著居民,属于苗族或苗蛮集团。
* 新中国成立后,特别是七、八十年代以来,随着考古事业的发展,一些学者联系江汉流域的地下发掘成就,认为此有一土生土长的原始文化,即“先楚文化”,其创造者是楚之先民,因此,楚族本来就源自荆楚地区。俞伟超在其《关于楚文化发展的新探索》一文中指出:如果同黄河中游地区的仰韶、龙山文化相比较,江汉平原的这些虽有类型差别的原始文化(指大溪文化、屈家岭文化和湖北龙山文化----笔者注),可以归为一个大系统。从分布的范围来考虑,这个文化系统应当就是楚文化的祖先
*根据传说,秦国的先祖好像是来自于东部海滨地带,秦国赢姓,《中国历史地图集》内在江苏淮安,扬州一带标有熊盈二字,据说盈通赢,熊指的是熊姓的楚族。难道秦人是从东部沿海来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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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李斯, ? ~ 기원전 208년 )는 중국 진나라의 승상이다. 법가에 그 사상적 기반을 두어, 도량형의 통일, 분서등을 실시하여, 진시황을 도와 진의 법치주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시황제의 사후, 조고와의 권력 싸움에 져서 살해되었다.
[편집] 생애초 상채(上蔡)의 사람으로, 젊은 무렵에는 말단 관리로서 초나라를 시중들고 있었다. 이사는 측으로 사람의 분뇨를 먹어 사람의 모습을 보고 도망가는 쥐와 자금고 안에서 사람의 모습에 무서워하지 않고 편히 자금을 먹는 쥐를 보고, 「사람이 있는 환경에서만 사람의 영리함 등 가치가 정해져 버리는 것인가」라고 한탄하여, 법가의 순자荀卿의 제자가 되었다.
동문으로서 한나라(韓)의 공자 한비(韓非)가 있었다. 모두 순자로부터 배웠고, 진나라에 들어가 여불위의 식객이 되어, 여불위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 받아 추천을 받고, 진왕 영정(秦王政, 후에 진 시황제가 된다.)을 모시고, 그 시종이 되었다. 이사는 진왕 영정의 명령으로 타국에 잠입하여, 각국의 왕족과 장군의 사이의 이간책을 실시하여 공적을 세우고, 객경(客卿, 타국 출신의 대신)이 되었다.
기원전 237년 순조롭게 출세하고 있던 이사이지만, 노애(嫪毐)라고 하는 타국 출신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국내에서 타국 출신자의 평판이 나빠져, 이윽고 외국인의 추방령이 나왔다. 이대로는 곤란했던 이사는 편지를 영정에게 내 추방령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 편지는 실로 이로 정연한 명문으로, 후에 문선에도 수록되고 있는 만큼이었다. 영정도 이 명문에 설득되어 추방령의 철회를 결정했다.
권력자인 여불위가 자결한 후에, 더욱 더 영정의 신뢰가 두터워진 이사이지만, 그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이 있었다. 동문인 한비이었다. 영정은 그 전에 한비의 저작인 한비자(韓非子)를 읽고, "이 작자와 친하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후회는 없다."라고 할수록 심취하고 있었고, 만약 이대로 한비가 등용되어 버리면 자신의 지위는 매우 위험해진다고 생각한 이사는 정에 한비의 중상 모략을 하여 투옥시키고, 옥중에 있는 한비에게 독약을 건네주어 죽어버렸다.
이렇게 하고, 라이벌을 제거한 이사는 진나라의 부국 강병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기원전 221년에 결국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하여, 영정은 진 시황제(秦始皇帝)가 되었다. 진나라의 통일 후에 시황제는 승상인 왕관(王綰), 어사대부 풍겁(馮劫) 등 중신으로부터, 주나라의 제도인 봉건제를 채용하여 시황제의 왕자들을 각지의 왕으로서 봉하도록 진언이 있었다. 하지만, 이사는 거기에 맹반대하고, 주나라가 왜 멸망했는지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더 한층 강한 군현제도의 시행을 말했다. 또, 정치에 쓸데없는 비판을 실시하는 학자들의 저서를 모아 분서를 실시하도록 진언 했다.
기원전 210년 가을 7월에, 시황제가 순행 도중에 사망하여, 이사는 조고(趙高)와 함께 위조를 만들고, 호해를 즉위 시켜 진 이세황제(二世皇帝)로서 태자 부소를 자결시켰다.
시황제 사후 기반이 흔들려 버린 진나라에 대해서, 다음 해에 마침내 진승 오광의 난을 비롯해 반란이 연발하여, 국내는 대혼란이 되었다. 이 때에 되어도 2세 황제는 흥청망청하고, 궁정의 밖의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사는 이것을 어떻게든 충고하려고 했지만, 이것을 이용한 조고의 책략으로 2세 황제가 분노하게 되었다.기원전 208년 이사는 우승상 곽거질(霍去疾)과 장군 풍겁(馮劫)과 함께 아방궁의 축조를 멈추도록 2세 황제에 고했지만 거절 당하고 곽거질과 풍겁은 자해 했다. 그리고도 재삼 이세황제에 간하였지만, 오히려 2세 황제의 분노를 사 조고에게 중상 모략되고, 조고에게 집요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조고가 날조 하여 올린 죄(초나라 항량의 군사에게 이사의 장남으로 삼천군 태수의 이유가 초나라 군과 내통 하고 있었다고 하는 죄)를 인정해 버려, 저작거리에서 요참형을 당하였다. 그 때에 이사는 차남(이름은 미상)에게 대해서 "나는 이전에 너와 고향 상채로 붉은 사냥개를 데려 오고, 토끼 사냥을 잘 하고 있었지만, 또 하고 싶은 꿈은 …" 말했다고 한다. 이윽고 이사의 일족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또한 이사의 아들은 시황제의 공주에게 장가를 가고, 그의 딸은 시황제 왕자에게 시집갔다고 전해진다.이사는 법가 이론의 완성자 한비에 대해서, 법가의 실무의 완성자로 여겨진다. 이사는 한비를 모살한 일이나 위조로 부소를 죽인 일, 그 밖에도 유생을 철저하게 탄압한 분서 갱유에 깊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후세의 평판은 매우 나쁘지만, 진의 중국 통일에 두어 가장 큰 역할을 이루어 있었다. 사마천도 사기에 대해 이사가 길을 잘못하지 않으면 그 공적은 주공, 소공에 비견 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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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는 왜 조고의 음모에 동참했을까?
  좋은 말로 포장하면 개국 초기의 진나라를 법가로 안정시키기 위해서라고도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결국 이사 본인이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사는 법가로 한평생을 달려 왔고 그 법가로 진나라를 통일까지 이르게 했는데, 진시황이 마지막에서야 지목한 후계자인 장남 부소는 진시황에게 미움을 받을만큼  법가가 아닌 유교적인 인물이었기에 부소가 등극하면 법가의 이사는 팽당하거나 최소한 권력에서는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그 권력 놓치기 싫다고 환관과 손을 잡기까지 했는데, 결국은 그 때문에 그 본인은 물론, 일가가 모조리 죽게 되고 나아가선 진나라까지 망하게 되었으니 이사의 해악이 크다고 하겠다.  만약에 여기서 이사가 현명한 선택을 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사 본인도 역사의 유명한 공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라고 본다.
-왜 진시황은 부소를 미워하고 호해를 이뻐했을까? 1  
표면적으로는 부소가 유교적인 인물인데다가, 진시황의 폭정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속내용은?  첫번째로, 역사에서 왕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왕자들이라는 점이다. 그중에서 최강의 왕위계승권을 갖는 왕자, 즉 장남은 왕의 믿음직한 후계자가 아니라, 언제 자기 자리를 노릴지 모르는 최고의 역적 후보가 되는 것이다. 두번째로, 부소의 출생이다. 진나라는 바로 바로 후계자를 임명하는 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가 영정을 바로 태자로 임명했던 것이나, 자초의 아버지 안국군이 자초를 바로 태자로 임명했던 것이나, 그게 다 진나라의 법률에 의한 것이었다) 진시황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태자 결정을 미루었는데... 이에 대해서 부소의 모친이 초나라 왕녀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진시황은 역사에 외척열전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그 시절 부인 관계는 베일에 싸여져 있지만, 다른 정황들이나 특히 진나라에 반기를 든 진승 오광 등이 스스로 부소와 항연이라고 칭했다는 점을 보면, 거의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항연이야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었다지만, 진나라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그 진나라의 태자를 자칭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상하다. 즉, 다시 말해서 진나라의 태자를 사칭하는 게 초나라인들의 지지를 얻을 구실이 되었다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부소가 초나라의 후손, 즉 부소의 모친이 초나라 왕녀였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진나라에서는 외척들이 큰 힘을 발휘했으며, 진시황 이전 시대에는 거의 초나라계 외척이 계속 힘을 쥐고 있었던만큼, 그런 외척들의 시달림(승상까지 지낸 창평군도 초나라 외척이었고, 창문군도 초나라 외척이거나 최소한 그쪽의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을 기억하는 진시황으로선 초나라계 외척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부소의 태자 임명은 꺼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로장생을 꿈꾸며 오래 오래 황제를 하고 싶던 진시황이  후계자 선정이라는 그 자체를 좋아했을 리 없었겠다.
-왜 진시황은 부소를 미워하고 호해를 이뻐했을까? 2
부소는 그래서 미워한다고 치고, 그럼 호해는 왜 전국 순방길에 데려갈 만큼 이뻐했을까?  이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너무 당연하고 역사에서 흔한 경우라 하겠다. 요점은 호해가 막내아들이라는 점이다. 장남이 아버지를 위협할만큼 큰 상황에서도 막내는 아직 충분히 어리광을 부릴 나이일 수 있으니, 왕위를 노리는 게 아닌가 싶을 시커먼 장남보다야 재롱 부리는 막내가 이뻐보이는 건 당연하다.  더 중요한 건, 그 어머니다. 장남의 모친은 대부분 정비, 즉 첫번째 부인이다. 막내의 모친은 대부분 최근에 얻은 첩이다.  첫번째 부인은 아무리 젊어 봐야 이미 여성의 전성기를 훨씬 지난 상황이고,최근에 얻은 첩이야 뭐 아직 젊고 아름다운 시절이다.  게다가, 정비는 좋든 싫든 정치세력화하여 그 중심에 있다.최근에 얻은 첩은 아직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정비의 몸에서 난 장성한 태자가 멀쩡히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뒤늦게 태어나 앞가림도 못 하는 어린 막내 아들을 무리하게 태자로 세우려는 일이 자주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다.
http://blog.daum.net/dominna/484

섬서성의 부소사당.부소묘. 扶苏墓呈长方形,长约30米,宽6米,高约8米,墓旁有扶苏祠,为陕西省重点文物保护单位.


진나라의 흥성이 의지한 것은 무력 정복과 천하 쟁패의 발전노선을 장기적으로 신봉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형성된 진문화는 단지 본 지역문화를 고수하고 타 지역문화를 융합한 혼합체일 수밖에 없었다. 이사(李斯)가 《간축객서(諫逐客書)》에서 말한 것 같이 진나라의 부와 강대함은 직접적으로 타국의 영토를 겸병하고 타국의 재물을 약탈한 것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고고 자료가 반영하듯이 말기의 진문화는 여전히 진이 건립되기 전의 문화 요소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미 6국의 문화 요소가 대량으로 혼합되어 있었다. 진인은 융적(戎翟)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외진 곳에 거하여 무지했으며, 급히 공적을 세우려는 욕망과 실용적인 선택으로 관동 화하문화를 대했기 때문에 관동 제하의 물질적 자원은 탐욕스럽게 약탈했지만, 관동 제하의 정신문화는 어리석게도 배척했다. 진인의 문화 건설은 시종 물질문화만을 중시하고 정신문화는 무시했다. 진문화의 발전도 시종 물질문화의 발전과 정신문화의 발전이 평행을 이루지 못했고, 후기로 갈수록 그 불평형성은 더욱 심각해져서 체계가 완비된 성숙한 문화를 이룰 수 없었다. 진문화의 비성숙은 인류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는 심오한 사상을 가진 학자를 배양해내지 못하고, 개인의 부귀를 추구하는 용맹하고 전쟁에 능한 장수만을 길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에서 특출하게 나타난다. 게다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무예를 숭상하고 문(文)을 버린 진인은 학자를 경시하고 배척했다.(本 안원전 담론中)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1부








진시황은 동이족이다. 1973년,진시황릉을 재조사한 바 있는 전 북경대 화춘구교수(당시62세)는 74년 중국 제1 언론사인 신화사통신 사회부 이귀형기자와 인터뷰에서,"진시왕은 동이족이었고, 유적은 모두 동이족 유적임을 확인하였다"고 인터뷰한 사실이 당국에 보고되어 74~75년 당국으로부터 당국에 먼저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년간 감금되었다가 하남지방 관리직으로 전출된 후, 5년후인 80년에 폐암으로 사망한 바 있다. 진시황릉의 장수 병사들은 모두 상투를 틀었다. 한족은 결코 상투를 틀지않는다.사학자도 아니고 고고학자도 아닌 건축학자 천징왠.올해 69세인 천징왠은 1957년 서안건축공정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후,진시황릉에 대해 끊임없는 연구를 했었고 퇴직전까지는 강소성 국토국에서 근무했었다.병마용에 대한 그의 의혹은 병마용과 진시황릉이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전차의 바퀴 간 거리를 똑같이 표준을 정해 통일했는데 갱내 어떤 전차들의 바퀴간 거리가 차이가 나는 점. 진시황시대의 사람들의 옷이 주로 검은 색이었는데 갱내 무사들의 전포가 칼라인 점. 또한 그 시대의 군대는 주로 보병과 기마병이었지만 갱내 군사진영을 보면 전차부대 위주로 편성된 점 등을 의혹으로 제기했다......1984년 천징왠이 ‘대자연 탐색’이라는 잡지사에 그동안 수집한 증거들을 내놓으면서 병마용의 진정한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라고 인민일보 게재.
2005년 11월 중국언론에 진경원(陳景元)이라는 중국인이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기사가 실렸다.병마용이 발견된 후 그 장소가 고대황릉이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비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에 진시황의 매장무덤이 있다는 점에 진씨는 최초의 의문을 품었다. "병마용이 고대의 룰과 달리 진시황릉의 동쪽방향에 있다는 것" 궁금증을 품고 있던 진씨는 1976년 서안을 찾아을 때, 서안 박물관 담당자에게서 병마용이 진나라 통일 후 10여년 지난 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다. 병마용을 자세히 관찰한 진씨는 병사들의 복장양식과 마차바퀴가 진시황시대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옷색깔을 흑색으로 통일했는데, 출토된 병사들의 옷색깔은 전체적으로 빨강색과 녹색의 전투복에다 자주빛 남색의 바지차림이라는 것.진씨는 또 마차바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갱내를 조사한 결과, 마차의 바퀴형태가 서로 다 달랐다. 진씨는 이 역시 병마용이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증거라고 판단했다. 진시황은 통일 이전에 이미 진나라 영토 내에서 차동궤(車同軌) 바퀴가 아니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통일 후엔 모든 마차 바퀴를 하나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명령한 진시황이 어째서 자신의 무덤에 부하들 맘대로 바퀴를 만들도록 윤허했단 말인가. 진씨의 의문이다.진씨는 974년 3월 24일 이지역 농민이 밭을 갈다가 병마용을 발견한 뒤 고고학자들이 이 유물을 진시황릉 건축의 일부분이라고 너무 결정을 빨리 내렸다고 주장한다. 진씨는 또한 그해 5월께 진시황릉에서 진나라 시대 무사들의 무덤이 출토됐다고 보도한 <신화사>도 그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씨에 따르면, 이 보도를 중시한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이 국가문물국에 병마용을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시하자마자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단이 재빨리 현장을 조사한 후 주위에 진시황릉 외에는 대형 무덤이 없다는 이유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을 진시황으로 단정해 버렸다는 것. 이에 대해 진씨는 왜 황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순장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고 병마용에 대한 충분한 과학적 조사도 없이 결론이 내려졌다며 그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진씨는 과학적이고 학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씨는 당시 문화대혁명의 막바지였던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을 중앙집권의 상징이던 진시황과 연계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실제 주도한 사람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화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강청(모택동의 부인)이라고 믿고 있다.  http://cafe.daum.net/chosunsa
그는 진나라에 시집간 진선태후가 죽어 고향인 초나라로 가는 행렬로 보았는데 추결만이(魋結蠻夷)라 해서 동이족은 본래 상투를 했는데 동이족 초인(楚人) 이 상투를 틀어 초인으로 진나라에 시집간 진선태후가 죽은 것으로 본 것이다.


상투튼 태호복희 성인과 동이족으로 알려진 상투튼 석가부처님(석가모니 부처는 단군의 자손이다[석학 한글학자 강상원 박사] ) http://www.youtube.com/watch?v=7hU3_QrTBSA&feature=youtu.be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신체발부 수지부모, 즉 신체의 모든 것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것이므로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부모한테 물려받은 머리털을 보존하기 위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여자들은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다. 상투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온 구절만으로도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상투튼 모습을 볼수 있고, 신라의 토용가운데 인물상에서도 상투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조선시대에도 상투를 틀었다. 극히 일부지만 요즈음도 상투를 틀고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상투에서 중요한 것은 결혼한 남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진나라를 섬긴 초인 중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모든 사람 중에서 이사(李斯)만한 인물은 없다. 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6국 연합을 쓸어 진 제국을 창건한 것이 가장 으뜸가는 공로요, 형벌을 숭상하고 백성들을 짓밟아 진 왕조를 파멸시킨 것이 이사의 대죄다. 이사의 천추의 공로와 죄는 후세사람들이 사람에 따라 보는 시각이 틀리고 의견이 분분하여 평론이 그치지 않는다.

이사(李斯: ?―기원전208)는 초나라 상채(上蔡: 지금의 하남 상채 서남쪽) 사람으로 자칭 “상채에서 태어난 평민이고, 서민들의 촌락에서 자란 백성이다(上蔡布衣, 閭巷之黔首).”라고 했다.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그가 젊었을 때 군(郡)의 하급관리가 되었는데 “관청의 변소에서 쥐가 오물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見吏舍厠中鼠食不浩, 近人犬, 數驚恐之)” 다시 “창고에 들어가서, 곡식을 먹는 창고의 쥐들이 넓은 건물 안에 살고 있었으므로 사람이나 개를 겁내지 않는 것을 보고(入倉, 觀倉中鼠, 食積粟, 居大廡之下, 不見人犬之懮)” 문득 깨달아 길게 탄식했다.
“사람의 잘나고 못난 것이 쥐와 같으니, 그것은 스스로 처한 바에 달렸을 뿐이구나!(人之賢不肖如鼠矣, 在所自處耳!)”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이러한 깨달음은 그가 자연계의 불공평에서 촉발되어 얻은 사회 불공평에 대한 인식으로, 그의 비천한 신분에 처한 불만정서가 분출되어 생긴 인생 불평등에 대한 분개였기 때문에 이것은 그의 인생관 형성과 인생 노선의 선택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분발하여 향상해 초나라의 대학자인 순황(荀況 순자-순경荀卿)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어 후에 법가의 대표적 인물이 되는 한비(韓非)와 함께 순황을 섬기며 천하를 통치하는 “제왕의 기술”을 배웠다. 다 배우고 나서 그는 깊이 생각하여 “초왕은 섬길만한 인물이 못되며, 6국이 모두 약소하여 공을 세울만한 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서쪽 진나라로 가고자 했다(楚王不足事, 而六國皆弱, 无可爲建功者, 欲西入秦).”《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갈 때, 그는 순황에게 하직 인사를 하며 말했다.

“비천함보다 더 큰 부끄러움은 없으며, 빈궁함보다 더 심한 슬픔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비천한 지위와 고달픈 지경에 놓여 있으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이기심을 탓하여 실행하지 않는 것에 자신을 의탁한다면, 이는 선비의 진심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장차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의 왕에게 유세하려고 합니다.(詬莫大于卑賤, 而悲莫甚于窮困. 久處卑賤之位、困苦之地, 非世而惡利, 自托于無爲, 此非士之情也, 故斯將西說秦王矣.)”《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이 말은 그가 변소의 쥐와 창고의 쥐에게서 깨달아 형성한 인생관의 명백한 표현으로, 오직 자신의 사욕을 꾀하는 그의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는 개인의 공리의 추구를 가장 중시하여, 의를 중시하고 이익을 경시하며 곤궁함을 굳게 지키는 선비를 경멸하였으므로, 그의 이러한 말도 사실상 스승의 가르침인 ‘인의’를 배반하고 ‘무위(無爲)’의 도학을 비판한 선언으로 초문화 정신 전통과 결별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인생관을 품었기에 필연적으로 진에 들어가 존귀와 영예를 얻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가 이러한 가치관을 확립했기에 자연히 진문화의 전통과 투합할 수 있어 그가 진나라에서 공명과 부귀를 얻기에 유리했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의 사욕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것은 반드시 그 자신을 파멸시키는 비극적 운명을 초래할 것이었다.

기원전 247년, 이사가 진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먼저 진나라의 재상 여불위(呂不韋)에게 의탁하였는데, 재능과 학문이 출중하여 여불위의 마음에 들어 “낭에 임명되어(任以爲郞)” 진왕 영정(嬴政)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진왕에게 진언했다.:

진 효공 이래로, 주나라 왕실의 영향력이 미약해져서 제후들이 서로 병합하였고, 관동의 여섯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나라가 승세를 잡고 제후들을 통치한 지가 모두 여섯 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하는 것은 진나라의 군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대저 진나라의 강대함과 대왕의 현명하심이라면 부뚜막을 청소하듯이 제후국들을 멸망시키고, 황제(皇帝)의 대업을 성취하면서 천하를 통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만년 만에 한 번 있을 기회입니다. 지금 게을리 하시어 빨리 성취하지 않으시면, 제후국들이 다시 강해져서 서로 모여 합종하는 맹약을 한다면, 비록 황제(黃帝)와 같이 현명할지라도 통합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自秦孝公以來, 周室卑微, 諸侯相兼, 關東爲六國, 秦之勝役諸侯, 盖六世矣. 今諸侯腹秦, 譬若郡縣. 夫以秦之强, 大王之賢, 由灶上騷(掃)除, 足以滅諸侯, 成帝業, 爲天下一統, 此万世之一時也. 今怠而不急就, 諸侯復强, 相聚約從(縱), 雖有黃帝之賢, 不能幷也.)《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이 말은 대세를 통찰하여 시대의 임무를 명백히 가려 진나라의 앞날을 명시한 말로, 진왕의 의지와 부합했다. 종전에 위염이 이미 진나라의 패업(覇業)를 추구하여 제업의 창립을 추진했지만, 그를 공격하여 그를 대신한 범수(范睢)가 진 소양왕을 위해 계획하여 진 효공 이래로 부지런히 추구해온 ‘패왕의 위업’을 다시금 강조했다. 정치목표의 하강은 필연적으로 분투정신의 헤이를 초래했다. 오로지 패업만을 추구하다보니, 단지 제후들을 복종하게는 할 수 있어 “제후국을 군현(郡縣)으로 삼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6국이 만약 진나라의 겸병을 막을 힘이 없어 잠시 쉬며 회복할 수 있다면, 상황은 필히 서로 모여 합종하여 협력해서 진에 저항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통일의 어려움이 크게 증가될 뿐 아니라 진나라가 패망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사는 진왕에게 “제후국들을 멸하고 제업을 성취하면서 천하를 통일할” 높은 정치 목표를 분명히 제시했고, 또한 6대가 남긴 공적을 분발하여 제후를 멸망시켜, 마치 부뚜막의 먼지를 청소하는 것처럼 쉬운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만년 만에 한 번 있을 기회”를 잡아, 제후국을 강하게 공격하여 재빨리 얻는 속성통일대업의 방침을 제정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후안무치하게 탐욕스러운 마음을 품어” 원대한 뜻을 지니고 있던 진왕을 진심으로 탄복시켜 “이사에 대한 예우로서 장사(長史)로 삼고, 그의 계략을 들었다(乃拜斯爲長史, 聽其計).” 진왕은 이사의 구체적인 계획에 따랐다. “은밀히 금과 옥을 지닌 사절을 파견시켜 여러 제후들에게 유세하게 하였다. 제후국의 명사 가운데 뇌물로써 움직일 수 있는 자에게는 후한 예물을 보내 결탁하고, 수긍하지 않는 자는 예리한 칼로 찔러 죽였다. 또한 그 나라의 군주와 신하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계략을 쓰면서, 진왕은 뛰어난 장군으로 하여금 그 뒤를 수행하게 했다.(陰遣謀士賫持金玉以游說諸侯. 諸侯名士可下以財者, 厚遺結之; 不肯者, 利劍刺之. 離其君臣之計, 秦王乃使其良將隨其后.)”《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6국은 진나라의 매수와 암살이 겹치고 이간질과 정벌이 병행되자, 안팎으로 궁지에 몰려 심하게 쇠약해졌다. 이사의 계략은 마치 진나라의 겸병의 여정 위에 있는 전차에 목표를 명확히 하고 마력(馬力)을 충분히 더해주어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진행과정을 대대적으로 가속화한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진왕은 이사를 매우 총애하여 그에 대한 예우로써 객경(客卿)으로 삼았다.  

기원전 237년, 진나라의 공실(公室) 대신들은 객경이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나누어 가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한(韓)나라에서 온 수리공(水利工) 정국(鄭國)이 진에 들어와 인공수로를 건설한다고 유세하여 이것으로 진나라를 이간질하고 한나라를 생존시키기를 기도한 사건을 핑계로 해 진왕에게 빈객들을 축출하라는 명령을 내리라고 부추겼다. 만약에 이 명령이 집행된다면 이사의 진나라에서의 순조로운 발전과 단번에 출세할 수 있는 앞길이 바로 물거품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재능과 식견이 탁월한 정치가로, 진나라가 객경들을 축출하면 자신의 앞길도 망칠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진나라의 통일 사업에 차질이 있을 것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초인적인 담력과 지모로 진왕에게 그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올렸다. 이 상서에서, 그는 기개가 넘치는 진술 사(詞)로 거리낌 없이 문장을 펼쳤다. 지금까지의 객경이 진나라의 발전을 위해 이루어낸 거대한 공헌을 예로 들고, 더 나아가 진나라가 지금의 부유함이 있게 된 이유는 널리 사방의 물산을 취한데 있으며, 진나라가 지금의 강대함이 있게 된 이유는 외부로부터 온 인재들을 널리 등용한데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금 빈객들을 축출하여 적국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줄여서 적국에게 보태주어 나라 안으로는 저절로 텅 비게 되고 나라 밖으로는 제후들에게 원한을 사게 되면, 나라를 구하고 위기를 일소하려 해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今逐客以資敵國, 損民以益讎, 內自虛而外樹怨于諸侯, 求國無危, 不可得也.)”

천하에 뜻을 두고 공훈과 업적을 세우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강했던 진왕 정(政)은 상서를 읽고 나서 그 언사에 깊이 감동하여 “빈객에 대한 축출 명령을 취소하고, 이사의 벼슬을 돌려주었다(乃除逐客令, 復李斯官.)”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이사의 상서는 그의 걸출한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식견을 드러내었으며, 또한 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정객(政客)으로써 진왕의 심리 욕구를 엿보고 비위를 맞추는데 능한 재주를 반영했다.

왜냐하면 진왕 정의 공로와 업적에 대한 욕구는 결국은 제후가 할거하는 천하를 자신의 천하로 만들어 만세의 시황제(始皇帝)가 되고 싶은 사욕이었기 때문이다. 진왕 정은 이러한 사욕을 분투해야할 최고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그 사욕을 실현하는데 유리한 건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가 당돌하게 상서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진왕 정의 사욕을 재빨리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발전 면에서 보면 이사 상서의 의의와 효과는 단지 그 개인 지위를 다시 회복하여 날로 빛나게 하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중대하고 심원한 의의는 역사의 조류에 순응하고 시대의 눈높이에 서서 진나라의 이익에 착안해, 후퇴하는 거센 추세를 만회하여 통일 사업의 순조로운 완성을 보장한데 있다.

본 장 제1절에서 서술한 것처럼 진문화의 천박함과 편파성은 진나라가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는 재능과 식견이 탁월하고 군사적 책략이 출중한 정치가, 사상가, 군사 전략가를 배출해내지 못하게 했다. 진 효공 이래로 진나라가 6대에 걸쳐 빠르게 발전한 것은 바로 상앙(商鞅), 장의(張儀), 감무(甘茂), 위염(魏冉), 범저(范雎), 채택(蔡澤), 여불위(呂不韋) 등 대량의 외래 인재들이 진왕을 보좌하고 진나라 정치를 보조한 결과다.

만약 진나라의 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외래 인재를 모두 축출하면 반드시 “천하의 인재로 하여금 물러나게 하여 감히 서쪽 진나라로 향하지 못하게 하고, 발을 묶어 진나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使天下之士退而不敢西向, 裹足不入秦)” 이사(李斯)《간축객서(諫逐客書)》
진나라는 마치 자신은 텅 비고 적국에 자본을 더하는 것 같이 되어 진나라가 위태로움에서 보호하기 힘들어지게 되니 어찌 6국 연합을 소탕하고 천하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전쟁의 불길은 영구히 식을 줄 모르고 통일의 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진왕은 축객령(逐客令)을 물리자 대량의 객경들이 계속 진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제후국의 인재들도 더욱 다투어 진나라를 섬겼다. 진나라는 그 국력이 강하고 진취적인 용기와 인재가 많아서, 제후국은 승리할 방법이 없어 할 수 없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진왕은 이사를 깊이 신임하게 되었고 어떤 말이나 계획도 전부 듣고 신임하여 정위(廷尉)로 승진시켰다. 따라서 이사는 진왕에게 계책을 올려 “먼저 한나라를 얻어 다른 나라를 위협할 것(請先取韓, 以恐他國)”을 청했다.《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이 계책은 사실상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제후국을 병탄하는 것을 고려한 총 책략으로 강력한 무력으로 6국 병탄을 개시하려는 최후 단계의 총 전역(戰役)이었다.

이사의 계략은 “진나라는 한나라가 있어 마치 사람의 심장과 배에 병이 있는 것과 같았고(秦之有韓, 若人之有心腹之病)” 게다가 한나라가 가장 약하여 한나라를 얻는 것은 반드시 이룰 수 있으니 먼저 한나라를 손에 넣어야 “제후국을 모두 삼킬 수 있다(則諸侯可蚕食而盡)《한비자․존한(韓非子․存韓)》참고 ”는 것이다.(안원전의 21세기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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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참한 말로

BC 210(시황제 37년), 시황제는 아들 호해(胡亥), 이사, 조고 등과 함께 다섯 번째 순행을 하다 병을 얻어 사구(沙丘: 지금의 하북성 평향<平鄕> 동북)에서 죽었다.(향년 50세) 시황제는 죽기전에 환관 조고를 불러 장자 부소(扶蘇) 앞으로 편지를 쓰게 했다. "군(軍)은 몽염(蒙恬)에게 맡기고 함양에 돌아와 내 유해를 맞이하고 장례를 치루어라"는 내용이었다. 부소는 2년 전의 갱유사건 때에 시황제에게 그것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북방군 사령관인 몽염의 감독관이라는 명목으로 북쪽 변방으로 추방되어 있었다. 시황제는 자신의 장자 부소에게 후사를 맡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시황제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는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먼저 호해를 설득하여 제위를 계승하게 한 다음 다시 이사를 포섭하였다. 일단 그들은 시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순행을 계속하여 수도 함양에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시황제의 죽음을 공포하였다. 그리고는 부소(扶蘇)에게 "함양으로 돌아와서 장례를 치루어라"는 시황제의 유서를 "부소는 불효하니 자살하라"는 내용으로 고쳤다. 이것을 진짜로 믿은 부소가 자살하고, 둘째 호해가 제위에 올라 진이세(秦二歲)가 되었다. 조고는 낭중관(비서실장)의 요직에 취임했고 이세황제의 신임을 일신에 모아 국정을 맡아보게 되었다.

조고는 이세황제를 농락하여 점차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세황제가 즉위한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잇따른 반란으로 정세의 급변을 우려한 이사는 이세황제를 알현하길 원했지만 그것은 조고의 저지로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누차 상소를 올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사는 최후로 조고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리게 되었지만, 이세황제는 조고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었던터라 이사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이사는 모반의 혐의로 체포되어 일족이 모두 함께 투옥되었다.

그리하여 BC 208년 7월(이세황제 2년) 진나라 최대의 공신이었던 이사는 함양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이사가 죽은지 1년 후에 진나라도 망했다.


사마천은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 이사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사는 미천한 출신이지만 제후를 찾아 진나라를 섬겼다. 열국의 약점에 편승하여 시황제의 제업(帝業)을 보좌하고 자신도 승상에 중용되었다. 그는 '제왕술'을 배웠지만 국정에 임해서는 시황제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하지 않았다.높은 작록(爵祿)을 받아 먹으면서 시황제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아첨과 영합을 일삼았다. 법령을 엄하게 진행하였으며, 더욱이 조고(趙高)의 사설(邪說)에 부화(附和)하고 적장자인 부소(扶蘇)를 폐하고 서자인 호해(湖亥)를 옹립했다.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서부터 당황하여 2세 황제를 간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세상사람들은 이사를 일러 충성을 다했는데도 다섯 가지 대죄로 문책되어 주살되었다는 동정을 보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지금 든 결점이 없었다면 그의 공적은 주공단(周公旦)이나 소공석(召公奭)과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http://blog.naver.com/bonny21?Redirect=Log&logNo=80009693212
[출처] 진나라 통일의 일등공신 이사(李斯)|작성자 다크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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