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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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담론29.악이 선위에 군림하다. 친일지 동아,조선의 원죄






악이 선 위에 군림하고, 매국노가 애국자 위에 군림하고, 정당하지 않은 부의 분배로 인한 불공평이 난무하고, 정경유착으로 인한 수의계약과 특혜, 담합이나 세금포탈, 탈루 등으로 부의 축적과정이 정당하지 않는데 올바른 시민의식이 자리잡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부도덕하게 돈을 벌고 학맥이나 인맥 등 지연과 학연의 줄타기를 통해서라도 권력을 쥐면 그만 이라는 생각이 사회전반에 만연하면 정치판은 고등사기꾼 집단으로 전락하는 게 당연하다.

이런 세상에서 언론이 언론의 자유를 핑게삼아 권력 해바라기성 교수들을 동원해 언권유착의 사주 논리를 정당화하는데 익숙하고 그 물에 녹아든 곡필아세의 논조를 정론직필이라 우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한국의 정당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겉으로는 민주화를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인중심의 독재정당이 되어 선거철만 되면 깨고 만들고 합하고 헤치고 난장판이 되는 것이 바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있는 우리의 정치판이며 정당사이다.

10 여 년 전 필자는 속리산 전국대학생 낭가대회에 참여해 준 당시 박 준병 민자당 사무총장에게 당(黨)이라는 글자가 본래 집 당(堂)자 안에 흑심 품은 권좌 도둑놈들이 모여있는 게젤샤프트 글자인데, 집안에 마음이 검은 이기주의 인간들이 바글바글 모여 서로 이용해 먹으려 하다가 수틀리면 서로 걷어차고 헐뜯고 하는 조직을 뜻해 당이라 했으며, 당인이라 하는 것도 노골적으로 말하면 힘을 합쳐 나라를 훔치고 감투를 나누어 갖는 마음이 검은 도둑놈들이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 기억이 있다.

또 시중의 농담으로 각종 부류의 인간 중에 한강에 빠지면 제일 먼저 건져줘야 할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인이 위대하고 고마운 사람이 아니라 너무 더럽고 시꺼먼 해서 늦게 꺼내면 한강까지 더럽게 오염될까봐서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의 정치인이 뼈아프게 되새겨 들어야 할 금언으로 한국인이 기성 정치인을 얼마나 더럽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조직이 병들고 사회가 병들면 이웃간에 정이 있을 리 없다. 민심은 이반하고 인간이 인간을 불신하며 패륜이 사회기강을 좀먹는다. 사회정의가 도착되어 병들다보니 길가에서 아녀자들이 치한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불의를 목격해도 정의감을 갖고 분노하는 자 하나 없다. 내 일이 아니면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아주 이기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인간만이 양산된 결과이다.    

개성상인 등 전국 보부상을 한 허리에 찬 고리대금업자 이 종한(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받음), 가렴주구의 대명사이자 공주갑부 김 갑순보다 한발 앞서 조선 최고 갑부가 된 민 영휘(본명 민 영준으로 아버지 민 두호는 "쇠갈구리"별명으로 유명),

화신백화점 사장 박 흥식, 탐관오리로 돈을 긁어모은 공주갑부 김 갑순, 친일 금융가 한성은행장 한 상룡,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대구 경일은행, 금융조합을 만들어 승승장구하며 일제에 협조한 경북 최고부호  장 직상(수도청장 장 택상의 부친으로 아버지 장 승원은 대한광복회에 피살),

두산그룹의 연원 <박 승직 상점>의 박 승직(두산 박 두병 아버지)-OB 맥주의 뿌리가 박 승직의 소화(昭和)기린맥주,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포항소주 사주 문  명기, 호남의 친일 금융자본가 현 준호, 친일 호남 거대지주 문 재철,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군수품 특수로 축재한 호남재벌 경성방직의 김 연수등과 같은 거대 친일 매판, 착취자본이 민족자본 위에 군림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며 올바로 사는 사람보다 권력을 이용해 법망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 적당히 넘어가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희화화된 언어유희가 현실로 자리잡고, 이권을 얻어 돈을 벌고 새치기하는 인간이 빤지르르하게 더 잘산다면 누가 법과 질서를 지키겠는가.

참고로 김 연수는 동아일보 김 성수 동생으로, 김 성수는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후원아래 일본의 군수물자보급소 역할을 한 경방을 운영하다 학교와 동아일보에 관계하면서 동생 김 연수를 내세워 경방을 뒷 조종했으며 와세다 대학 동문 장 덕수를 고려전문학교의 후견인으로 내세우고 조선총독 사이토와 각별하게 지냈는데 동아일보를 맡긴 측근 대리인 송 진우는 월 1회 사이토 총독을 만나 김 성수에게 보고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넘겨져 재판을 받은 바 있는 김 연수의 공판기록에 의하면 "피고인은.... 일본 경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4255년(1922)부터 4272년(1939)까지 사이에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위시하여 중앙상공주식회사, 만주국 봉천 소재 남만방직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조선인 회사 및 일본인 회사 약 15 개 회사의 중역으로 피임되어....경기도 관선 도 평의원, 만주국 명예 총영사, 중추원 칙임 참의로 피임되었고, 4273년(1940)에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의 전쟁완수에 적극적 협력을 시키기 위하여 소위 <임전보국단>이라는 것이 결성되자 동단 간부로 피선되었고,

4275년(1942) 초경에 조선인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적극 협력시키기 위하여 조직 결성된 <국민총력연맹>의 후생부장으로 피임되었고, 동년 말경에 조선의 장래 유의한 지식인 청년학도를 여지없이 말살시키기 위한 일본의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제정한 소위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함에 있어 그 제도의 정신과 취지를 고의로 호도 선전하여 순진한 청년학도의 심리를 혼돈시키어 지원병으로 지원하도록 하기위한 학병제도 유세사 동경파견단에 참가하여 동경 소재 명치대학 강당에 참집한 재동경 조선인 유학생에게 학병제도 정신 함양 강연 한 것..' 이라 하여

그의 형 김 성수 보다 친일 활동반경이 오히려 좁았던 그의 친일 행각을 익히 알 수 있다.  

경우야 어찌되었건 이들 일제하 매판자본가 그룹의 상징 고하 송진우와 설산 장덕수가 살해된 것은 민족정기 수립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해방후의 재빠른 변신과는 전혀 다르게 해방전의 김 성수는 한 체육부 기자가 일장기를 말소하자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반민족적이었으며

사이토에게 경성방직을 위해 특별 배려받은 것에 대해 각하께 깊은 감사말씀 올린다고 편지보낸 바 있을 정도로 친일성향이 아주 깊었다: 김 성수는 93년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대상자 발표 8 인 중 한 명이다) 이쯤에서 「말」 지의 정지환 기자의 다음의 글을 소개한다.(2001-3-30 정지환 jhjeong@digitalmal.com)


▲ 민족혼을 두 번 우롱한 친일 매국노들 (좌로부터) 방응모(전 조선일보 사주), 김성수(전 동아일보 사주), 김활란(전 이화여대 총장)



'황국신민'이 일본을 꾸짖는 이율배반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과 조선·동아의 원죄

남북화해와 평화구축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보수적인 미국정부의 등장과 이에 편승한 국내 냉전세력의 준동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위기에 부닥쳤다.

월간 『말』이 이번호부터 ‘냉전세력 심층연구’라는 대장정에 들어간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첫번째 작업으로 선택한 것은 냉전세력의 ‘사상적 진지’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은폐된 뿌리 찾기.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의 거울을 통해 그들의 추악한 원죄를 들여다봤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시도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의 ‘뻔뻔스러움’과 ‘망언’을 규탄한, 다음과 같은 한국언론의 보도는 정곡을 찔렀고, 시의 적절했다.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인의 ‘뻔뻔스러움’과 일본 정부의 방조행위를 규탄…조선 8도를 36년간 굴욕적인 식민통치를 하고도 ‘한일합방’을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이라느니 ‘국제관계의 원칙에 기초한 합법’이라는 망언과 대국민 세뇌를 서슴지 않는…이처럼 진실조차 왜곡하려는 일본인들의 속내를 우리 젊은 세대들이 제대로 알아야…침략과 식민통치로 주변국가를 짓밟은 과거의 범죄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하여 ‘군국주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전근대적인 허황된 사고….”(『조선일보』 2001년 2월 25일자 사설)


◈ 조선·동아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만 탓할 것인가 ◈

『조선일보』는 2월 16일자 사설에서도 “일본 역사교과서는 ‘왜곡’ 덩어리…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이라며 억지주장…‘한국은 일본지배 덕분에 저만큼 살게 됐다’는 식의 황당한 주장” 등의 표현을 동원, 비판의 날을 세웠다. 『동아일보』도 일본 교과서 규탄 대열에 동참했다.

“징용 같은 강제연행이나 종군위안부 등에 관해서는 기술조차 외면…한마디로 악의적인 역사왜곡…극단적인 보수사관에 바탕한 왜곡 날조로 치닫고 있는 것…(일본 우익세력들이) 왜곡된 문제의 교과서를 불합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외교관 출신의 노다 에이지로 교과서 심사위원을 심사위에서 내쫓은 것…터무니없는 역사의 왜곡이나 날조를 바로잡는 데 적극 나서야…현 정부가 당장의 한일관계만을 염려하여 역사왜곡 등 근본적인 문제점을 들추지 않고 단호한 해결을 미루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큰 죄를 짓는 것.”(『동아일보』 2001년 2월 20일)

그런데 여기서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과연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을 당당하게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이런 원초적 물음을 던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선일보』는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오른 “한일합방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킨 합법적 정책”이란 대목을 ‘망언’으로, “한국은 일본지배 덕분에 저만큼 살게 됐다”는 대목을 ‘황당한 주장’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정작 『조선일보』는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체결한 조약…데라우찌를 비롯한 7명의 총독과 일제의 30년 통치로 문화조선 건설 결실”(『조광』 1940년 10월호)이라고 보도했던 원죄가 있다.

또 『조선일보』는 2월 16일자 사설에서, 중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한 일본 역사교과서를 ‘억지주장’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중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제가 실시한 징병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조선통치사의 새로운 기원을 이룬 것이자 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 것에 대하여 이미 본란에 수차 우리의 찬성의 뜻을 밝힌 바 있거니와…종래 조선 민중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의무를 실현케 하는 것…황국신민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황국(皇國)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국방상 완전히 신민(臣民)의 의무를 다 하여야 할 것이다.”(『조선일보』 1938년 6월 18일자 사설)

‘갈충진성’은 “모두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충성한다”는 뜻이거니와, 『조선일보』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싸우다 죽으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대해 역사적·법률적 단죄가 내려지거나, 혹은 『조선일보』가 스스로 독립투쟁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 적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조선일보』는 뻔뻔스럽게도 ‘적반하장’의 대응책으로 일관해 왔다. 1988년 12월 13일 언론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방우영 회장의 발언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그는 이철 의원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때 친일을 하는 굴종의 역사도 갖고 있지 않느냐”고 다그치자 정색을 하며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왜정 때 왜놈에게 친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친일을 했다는 생각은 선조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지금 역사를 다시 쓰자는 겁니까?”

◈ 잘못된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은 당연한 일 ◈

방우영 회장은 정녕 몰랐단 말인가. 잘못된 역사는 당연히 다시 써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실제로 김영삼 정권 초기 그런 시도가 있었다. 제6차 교육과정 개편에 따라 문민정부 교육부는 1993년 9월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위원회’(위원장 이존희 서울시립대 교수)를 구성하고 9명의 연구위원을 임명했다.

이들은 7개월 동안의 공동연구를 통해 국사교과서 개편작업을 추진, 1994년 3월 18일 심포지엄을 열고 연구위원 전원합의로 확정한 ‘준거안’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서도 친일언론과 관련된 근현대사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침략과정에서 형성된 매국적 친일세력에 관해 설명한다.
●보안법, 조선교육령 등을 통해 일본이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만들고자 했음을 설명한다.
●1920년대 문화통치의 본질이 민족의 독립의식을 약화시키고, 식민지 착취를 극대화하려는 데 있었음을 설명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되고 민족주의 세력은 타협적 민족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분화되어감을 설명한다.
●일제가 자행한 민족말살 정책, 일본어 사용 강제, 신사참배 강요, 일본식 성명으로의 개조, 황국신민화 정책 등을 설명하되, 이 과정에서 노골적인 친일세력이 형성되었음을 설명한다.
●일제가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각종 법령과 사상전향제도 등을 설명한다.
●일부 민족지도자들이 일제 말 일제의 황국신민화 운동과 침략전쟁에 협력하였음을 간략히 기술한다.
●광복 후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 통일국가 건설이 민족의 과제였음을 이해하게 한다.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기술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반민법 제정, 농지개혁 등 건국 초기의 활동과 제주 4·3항쟁, 여순사건 등을 이해하게 한다.

준거안은 당시 역사학계의 학문적 업적과 수준을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중앙일간지 중에 유일하게 심포지엄에 직접 참석한 『문화일보』 기자의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쓴 기사의 제목은 「국사교과서 민족사관 중심 개편­일제잔재 청산…독립운동사 대폭 보강」이었다.

그러나 친일행각의 원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을 『조선일보』에겐 대다수 항목이 뼈아픈 대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의 일방적인 여론조성 속에서 준거안은 ‘멱살잡이’를 당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거니와, 준거안의 극히 일부분만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한편 ‘항쟁’이냐, ‘사건’이냐 등 지엽말단적인 ‘용어’ 문제로 논쟁의 본질을 흐리는 전술을 채택했다. 동시에 전형적인 ‘색깔논쟁’을 유발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새 국사교과서 논란``―``주사파(主思派) 등 80년대부터 새 작업…‘대구폭동’ 등 항쟁·봉기로 규정…운동권선 사실(史實)보다 미화(美化) 치중」(3월 20일) 「어느 나라 교과서인가」(3월 22일) 「북한 선전자료 복사판 우려」(3월 24일) 등이 대표적인 기사에 해당한다.

결국 친일파 문제를 국사교과서에 제대로 기술하려던 시도는 ‘여론재판’에 의해 좌절되는 비운의 종말을 맞아야 했다. 『세계일보』 등 일부 언론이 “역사에서의 ‘고정관념’과 ‘이념편향’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학자가 만든 시안을 매카시즘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와 관련, 당시 연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당시 방송통신대 교수)는 1998년 발간한 『한국의 논리­전환기의 역사교육과 일본인식』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인신공격성의 비난과 사상공세적인 위협이 난무하였다. 학문과 교육을 논한다는 자세가 크게 흐트러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 문제에 정치와 여론의 입김이 너무 직설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점은 앞으로 역사교육의 독자성과 중립성을 확보해 나가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멍에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 역사적 죄악 숨기려 리허설까지 강행 ◈

대한민국의 거대언론이 한국현대사 바로세우기의 ‘멍에’가 되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사실 『조선일보』가 역사를 왜곡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다음 기사 「진성호 『조선일보』 기자에게 보내는 편지」 참조). 그들은 아예 자신들의 역사적 죄악을 축소·은폐하기 위해 치밀하게 ‘리허설’까지 준비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 『조선일보와 40년』에서 1988년 언론청문회를 앞두고 열흘 동안 편집국 간부인 김대중, 송희영 등의 도움을 받아 모의청문회를 가졌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방우영 증인은 체제언론의 장본인으로 언론을 왜곡하고 권력에 추종했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냐?”

당시 리허설에서 나왔던 예비 질문 중의 하나이다. 아무리 리허설이라지만 기분이 나빠진 ‘주연’ 방 회장은 질의를 맡은 ‘조연’ 송희영 부장에게 “이봐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라며 화를 냈다.

바로 그때 ‘연출’을 맡은 김대중 주필(당시 논설위원)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낙제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무서운 질문이 나올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이성을 잃지 말고 차근차근 답변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결국 언론청문회에서 방 회장이 친일행각 문제에 대해 전면 오리발을 내밀고 역공에 나섬으로써 어느 정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치밀한 준비 끝에 얻은 개가(?)였던 셈이다.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야 할 기자들이 도리어 진실을 축소하고 은폐하기 위한 ‘연극놀음’에 출연한 이 낯선 광경은 일그러진 한국언론 풍토에서나 볼 수 있는 ‘블랙 코미디’가 아닐까.

『조선투위 18년 자료집』에 등장하는 다음의 장면도 친일행각에 대한 『조선일보』 경영진의 뒤틀린 심리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엔 1975년 자유언론수호투쟁 당시 『조선일보』 발행인과 편집인들이 즐겨 쓰던 다음과 같은 빈정거림이 소개돼 있다.

“(『조선일보』는) 광주학생사건(일제시대에 발생한 항일투쟁을 말함)을 2단으로 싣고도 민족지 했어! 신문은 그런 거야.”

그것은 그들이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대한 죄의식을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사실 일제시대에 『조선일보』는 “광주학생사건은 조선의 불행이자 학생의 불행”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결국 박정희의 언론탄압에 맞선 농성기자들에게 유신체제에 맞설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한 셈이다. 『조선일보』 친일문제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일보』는 2월 25일자 사설에서, 일본의 국사교과서 왜곡을 가리키며 “과거의 범죄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 진실조차 왜곡하려는 일본인들의 속내를 젊은 세대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조선일보』야말로 “과거의 범죄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하고 있다. 이 사실을 “젊은 세대들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

◈ 동아가 독립유공자 재심사 결사 저지한 까닭 ◈

『동아일보』도 자신의 친일 원죄 때문에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바로세우기를 좌절시켰던 전력이 있다. 그 전말은 이렇다.

국가보훈처는 1993년 김성수, 서춘, 이은상 등 친일행각 혐의가 있으면서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8인의 서훈을 박탈할 것인지를 재심사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것은 상처 입은 민족정기를 되찾기 위해 국가기관이 추진한 자연스런 시도였으며, 당시 친일연구가들과 독립운동단체가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얻어낸 성과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6천여 명에 이르던 독립유공자 중에는

△독립운동을 한 흔적이 전혀 없는 가짜
△광복 이후 누린 높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실제 공적보다 높게 평가된 사람
△친일행적이 뚜렷하게 드러난 일부 친일파

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1996년 9월 서춘, 김희선 등 친일행각이 들통난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이 박탈됐다(서춘의 경우, 아들이 1997년 8월 16일 독립유공자 배제결정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해놓은 상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동아일보』 창업주인 김성수는 건재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던 ‘거물’ 김성수는 독립유공자 재심사 과정에서 일제 말기에 총독부가 조직한 친일단체 총력동맹의 이사로 참여한 전력이 드러났다.

또한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지에 조선 청년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실었으며, 전국순회 시국강연을 통해 친일강연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기자는 1993년 당시 보훈처가 보사위에 제출한 8인의 명단과 자료를 최근 입수했다. 이 자료에는 김성수의 이름과 친일 혐의가 분명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1993년 7월 10일자 기사를 통해 시비를 걸면서 이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사 제목은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도 없이 작성 유출…보훈처 ‘유족에 사과·책임자 문책’」이었다.

『동아일보』의 불편한 심사와 의도가 역력히 드러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성수·이은상·이갑성·윤익선씨 등 8명 친일행적 논란… 서훈 취소 심의」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도한 『서울신문』 7월 9일자 기사와 비교할 때 그 논조가 대조적이다.

◈ 동아가 가로챈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 ◈

『동아일보』의 ‘항일투쟁 업적’으로 둔갑한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의 내막을 보더라도 일제시대 김성수의 시국관이 분명하게 읽혀진다. 사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신문에 실으며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은 『동아일보』가 처음은 아니었다.

최초로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한 것은 『조선중앙일보』였다(물론 당시 친일기사 양산에 여념이 없었던 『조선일보』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는 이 사건 직후 쫓겨났으며 해방 이후에도 『동아일보』에 복귀하지 못했다.

“히노마루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는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조그만 항일운동의 실천’에 대한 김성수의 분노는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가 지금까지 ‘『동아일보』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전해들었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또 하나의 역사왜곡인 셈이다.

『동아일보』는 2월 20일자 사설을 통해 “터무니없는 역사의 왜곡이나 날조를 바로잡는 일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 역사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은 『동아일보』가 귀담아들어야 할 금언이 아닐까.-

[朝東]아리,방응모와 김성수의 전언통신  
철원사람(incom10)

“김 사장, 제정신으로 하시는 일입니까? 반일·친일 논쟁이 에스컬레이트하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상상도 안 하십니까?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1985년 4월 조선일보가 지면으로 <동아일보> 사장에게 보낸 공개편지 중 일부다. 당시 `민족지-친일지 논쟁'이 벌어진 것은 동아일보가 그해 4월1일 창간 65돌 기념으로 사회면 머리에 조용만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을 실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 글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탄생과정을 밝히면서 조선일보를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으로, 동아일보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으로 묘사했다.

이 기사가 나간 지 보름 뒤인 4월14일 조선일보는 선우휘 당시 논설고문의 이름을 단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는 글로 지상 반격을 가했다. 선우휘 고문은 이 글에서 김성열 당시 동아일보사 사장을 향해 직설적으로 “두 신문사가 서로 상처를 입을 때 이 사회에 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라고 물으며 싸움을 중지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지면을 통해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 이라며 조선일보 공격을 멈추지 않자, 조선일보도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 이었다며 이번 기회에 “친일계보가 속속들이 파헤쳐져야 한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 논쟁이 서로의 치부를 들춰내자 서둘러 수습하고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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