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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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담론32 드골주의와 드골식 전후청산





프랑스 정부는 2차대전이 끝나자 국민화합과 민족정기 수립 및 사회정의 구현차원에서 나치스 협력자 및 비시정권 참여자들을 사법의 심판대로 올려 처벌함으로써 한점의 의혹이 없이 터파했다.  

프랑스 드골 장군은 나치협력자 처리 전담 재판소를 두어 나치협력자 200여 만명을 법의 심판대 위에 세워 프랑스 국민에게 공개했으며 그 중 20여 만 명에게 사형 및 강제노동, 징역형, 전 재산 몰수 및 공민권 박탈 등을 선고해 사실상 프랑스 사회에서 완전히 제거시켰다.

프랑스 반역자 숙정은 3 종류의 특별법원에서 처리되었으며, 비시정권 아래에서 장, 차관이나 고급 공무원을 지낸 자는 탄핵재판소에서, 언론인 작가 등의 문인은 전국에 분산되어 있는 특별법원에서, 그 외 죄상이 경미한 협력자 및 반역자들은 최하위 공사(公事) 재판에서 처리했다.

특히 당시 협력 언론인 행적을 추적한 프랑스 전국작가위원회(CNE)는 숙청대상 언론인 148명을 선정했으며 그 중 93명이 중형으로 처벌되었다. 잡지 토「오토」의 사주이며,「쁘띠 니소와」를 비롯 여러 지방신문을 거느린 신문재벌 알베르 르죈느는 1944년 10월 20일 , 특별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최초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리스티드, 브리앙 등 유명 정치인 전기작가로 파리 언론계에서 필명이 널리 알려진 조르주 쉬아레즈 역시 1940년 12월 「오쥬르뒤」紙 주필로 임명된 뒤 몇 주 사이에 친 독일 논조로 글을 실었다는 이유로 1944년 10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했다.

친독 신문, 잡지에 친독 기사를 실었던 35세의 젊은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수 역시 1944년 6월 16일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우리의 모 윤숙이나 김 활란, 이 광수, 김동환, 최 남선 류에 해당하는 인물인 독일 선전방송을 한 장 에롤드 역시 45년 10월 11일 샤티용 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여기에 비하면 친일 논조를 밥 빌어먹듯 자주 한 우리의 조선, 동아와 수많은 매국 언론가들은 오늘날 어떤가?   우리는 200여만 명의 십 분지 일 만 법의 심판대에 올려 처벌했어도 오늘날 같은 사회정의와 도덕기강이 무너진 어지러운 사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 진오, 김 성수, 김 활란 등이 애국자로 변신한 한국의 케이스와는 전혀 다르게 나치협력 인텔리겐챠 즉, 사회에 영향력을 지닌 언론인, 학자, 문인은 예외 없이 사형 및 전 재산 몰수와 공민권 박탈 및 강제 노동, 무기 징역에 처했으며 나치스 치하 비시정권 하에서 보름이상 발행한 신문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언론사 사주와 경영자를 법의 심판대에 올려 처단하고 모든 재산은 몰수해 국고로 환수시켰다. 드골 정부가 국민에게 사회정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적어도 프랑스 인에게는 친일 매국노였던  김 성수, 방 응모의 동아, 조선이 민족지로 변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만일 드골 치하의 프랑스라면 당연히 사형에 처해져야 했을 친일 매판 자본가의 두령 한민당 당수 김 성수를 부통령으로 기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반민특위에 의해 처단되었어야 할 친일 매국노들을 옹호해 오히려 정치기반으로 삼아 자신의 독재정권을 공고히 하는 추잡한 일은 안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이 승만은 친일 매판자본가 출신 한민당과 손잡고 정부통령을 분점하고 다양한 친일세력을 정치기반으로 삼은 댓가로 애국자로 변신시켜주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반면 프랑스의 친독 매국노처벌은 아주 혹독했다. 주섭일 내일신문 상임고문의 다음 글을 한번 보자.

          반역자 처단이 프랑스를 단결시켰다

   "애국적 국민에게 상주고 민족을 배반한 범죄자에게는 반드시 벌
  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 독일로부터 프랑스가 해방됐을 때 드골 장군은 나치 협력자 숙청을 위한 원칙을 이렇게 제시했다. 그는 런던과 알제의 망명 정부 시절부터 조국을 배반한 나치 협력 프랑스인을 준엄하게 심판할 것을 천명하고 준비했다.

2차대전 후 새 사회 건설과정에서 나치 협력자에게 면죄부를 발부해 재등장시키는 과오를 범한다면 "국민을 단결시킬 수 없다"는 것이 드골의 판단이었다. 민족배반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애국적 국민을 이념적으로 분열시켜 힘을 약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국민단결의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드골은 미리 내다보았다.

그래서 그는 나치 협력자를 준엄하게 심판해 프랑스사회에서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드골은 <>나치 독일의 점령을 정당화한 투항주의자 <>히틀러의 괴뢰정권인 비시정권의 모든 공직자와 지원세력 <>나치 독일과 추축국(일본과 이탈리아)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인 등을 나치 협력자로 개념 규정했다.

그가 국내 레지스탕스(반 나치 저항단체)를 총지휘하면서 프랑스가 해방되기 전에 나치 협  력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려 집행하게 하고 독일군에 총격을 가하는 등 시민전쟁을 펼친 것은 조국해방투쟁이면서 미국의 군정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드골은 미군이 진주하기 앞서 레지스탕스가 행정력을 먼저 장악해 군정을 저지할 수 있었다. 수도 파리가 레지스탕스의 봉기로 해방돼 드골이 연합군 진주에 앞서 입성한 것은 군정을 결정적으로 좌절시켰다. 드골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역자 숙청을 철저하게 집행했다.

드골은 비시정권의 고관대작을 심판하는 최고재판소를 파리에 설치하고, 일반 나치 협력자를 응징하기 위해 지방 숙청재판소를 각 현 소재지마다 세웠으며, 경범죄에 해당하는 협력자들을 추궁하기 위해 시민법정을 창설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을 찬양하면서 영.미 연합군을 증오하고 드골의 임시정부 "자유 프랑스"를 테러집단으로 매도한 언론인과 지식인 반역자들을 가장 먼저 파리 숙청 재판소의 도마 위에 올렸다.

친 비시정권의 일간지 <오늘>의 정치부장 조르주 슈아레즈가 1차로 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를 받고 44년 11월9일 총살당했다. 다음으로 <자동차신문> 사장 르전과 <오늘>의 칼럼니스트 폴 샤크 등이 줄줄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드골의 대숙청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언론인들이 첫 번째 심판대상이 돼 거의 모두 사형으로 다스려진 배경은 드골이 후에 회고록에서 밝혔듯 "도덕성의 상징이기 때문"이 었다.

언론인에게 면죄부를 주면 곡필을 휘둘러 국가의 도덕성과   윤리를 마비시키는 암적 존재가 되기 때문이었다.

나치 협력자 숙청재판은 1차대전 승리의 영웅이며 드골의 군 선배인 비시정권의 수반 페탱 원수도 반역자로 규정해 사형을 선고했다. 드골은 그를 무기징역형으로 감형했으나, 라발 총리는 사형선고 후 즉각 처형되었다.

숙청재판은 프랑스 임시정부 대통령 드골의 훈령에 의해 집행됐고 형법 75조 국가반역죄와 87조 간첩죄가   적용됐다. 드골의 임시정부는 200만명을 나치 협력 혐의로 내사했으며, 이중 99여명을 일단 체포해 조사했다.

재판 결과 6763 명에게 사형선고(사형집행 767명), 2702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 1만637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 2만2883명에게 징역형, 2044명에게 금고형이 선고됐다. 시민법정은 9만5천명에게 부역죄형을 내리고, 7만명의 시민권을 박탈했으며 공무원 12만명에게 파면 등 행정처분을 가했다.

프랑스는 드골의 반역자 청산 성공에 힘입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지식인. 대학 등 사회 각 영역에서 나치 협력자를 도려냄으로써 자유와 평등, 사회정의가 넘치는 새 나라를 건설했다.

이후 프랑스사회는 민주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고 "반인류 범죄 법"을 도입해 지속적으로 반역자를 응징하고 있다. 나치 협력 세력의 대화합 논리를 거부하고 대숙청에 성공한 배경은 그가  자유 프랑스의 임정세력(주로 우파)과 국내 레지스탕스(주로 사회.공산당의 좌파)의 인사들만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해 좌우연합  전선 구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랑스의 해방정국 주체 세력 형성은 드골식 청산을 시도한 반민특위를 좌절시키기 위해  친일파와 합작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선택과 정반대이다. 여기서 한국의 친일파 청산의 성패가 갈린 것으로 해석된다.  -한겨레21(인터넷 한겨레) http://www.hani.co.kr/  

그럼 여기에서 잠시 교양주의에 입각, 드골이 누구인지 다음의 참고자료를 훑어보고 담론을 계속하기로 하자.

-? I.드골의 생애

  De Gaulle. Cgarles Andre Joseph Marie 1890 ∼ 1970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 북프랑스의 릴에서 독실한 카톨릭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에 생시르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페탱 원수의 부하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부상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1920년 귀국하였다.

그 해 폴란드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 생시르 육군 대학 교관이 되어 군사 이론과 군 지도자론을 담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기갑 사단장으로 있다가 국방차관으로 임명되었다. 44년의 파리 해방 뒤 임시 정부 부석, 45년에는 수상 겸 국방상을 거쳐, 47년에는 반공단체인 프랑스 국민 연합을 조직하였다.

51년 제1단으로 성장하였으나 53년에는 당을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그의 시대는 끝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58년 알제리에서 쿠테타가 일어나고 제4공화국이 무너지려 하지 그는 다시 정계에 나타나, 같은 해 6월 수상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을 기해 제5 공화국이 수립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62년에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는 에비앙 협정을 국민 투표에 부쳐 가결시킴으로써, 약 7년에 걸친 알제리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외교 정책에서는 프랑스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하여 반미 정책을 쓰고, 64년 중공을 승인하였으며, 핵무기의 개발과, 유럽 경제 공동체의 추진과 영국의 가맹의 거부, 금본위 제도의 부활 주장, NATO 군사 기구로부터의 탈퇴(1966) , 미국의 월남 정책 반대 등, 미. 소 간의 틈바귀에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전개하였다.

68년의 이른바 5월 혁명으로 말미암아 드골 집권 체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69년에 실시한 국민 투표에서 패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저서에는 54∼59년에 걸쳐 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회상록』이 있으며,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Ⅱ. 드골리즘과 외교정책

  1. 드골의 역사인식

  드골의 역사인식의 특징은 대략 6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그는 역사를 통해 얻은 경험을 중요시했고,
둘째로, 프랑스대혁명은 끝났지만 사회적 불안정은 계속된다고 보고 국가의 안정성과 지속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셋째, 국가 원수의 기능과 행동은 큰 폭을 가지고 상황을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최고의 충성심을 강조하였다. 다섯째로 그는 조국 프랑스의 위대성을 추구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역사 전반에서 프랑스가 자연적 국경을 통일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한다.

그의 인격형성과 골리즘의 체계화에 핵심적 역할을 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그의 외교정책과 국제관계에 대한 기본 이념 또는 비전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유럽을 〔국가들의 유럽〕이라고 파악하고, 이 속에서 전통적인 국가들, 특히 프랑스가 존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둘째,  정치에 대한 국가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셋째, 의회에 대한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했다.

넷째, 프랑스 역사의 지속성의 이념에 집착한 채 프랑스의 영구한 운명과 상황들을 돋보이게 하고 이를 통해서 정통성의 개념을 재발견하고자 노력했었다. 다섯째, 외교정책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신중성을 잃지 않았다.
여섯째, 그에게 있어서 제3세계를 향해 취하였던 협력은 프랑스 외교정치에서 중요한 특성을 만들었고, 이것은 탈 식민지라는 역사인식에 부응하였던 신중한 정책의 다른 한 측면이다.

  2. 프랑스와 미국과의 관계

  드골은 미국의 물질적 힘의 지배와 주요 유럽 국가들 사이의 힘의 상대적 결핍은 프랑스가 세계 서열에 들어서는 것을 어렵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미국 산업사회의 물질적 가치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드골의 미국에 대한 비판·저항은 미국의 헤게모니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약화시켜 프랑스의 독립적 행동을 확보하고 그 위에서 독립적인 유럽을 구상하려고 한 것이었기에 근본적이기보다 전략적인 것이었다.

드골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그를 믿을 수 없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취급했던 루스벨트는 북아프리카 공격에서 드골의 참여를 배제시켰고 이는 결정적으로 양자 사이의 긴장을 초래하였다.

루스벨트의 평화전략은 미국 자신이 평화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일단 패배한 국가들은 미국의 전략적 구조에 복종해야 하며, 그래서 프랑스가 미국을 구원자 및 중재자로서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드골은 영·미의 전략적 계획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영·미 군대가 프랑스의 저항운동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여 남부 프랑스 공격에서 프랑스 군대를 사용하지 못할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에 드골에 대하여 유화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드골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프랑스의 영광과 위대성에 집착하였고, 특히 자유프랑스의 위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려 했던 골리즘을 전시외교에서도 견지하였다.

1958년과 1959년 사이의 8개월은 전후 유럽을 재건하고 프랑스의 독립외교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미국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기로, 드골의 기본입장은 프랑스가 '미·영·프'로 구성되는 삼두지도체제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가 세계문제에 대한 공동정책을 수립하는 데 참여해야 하고, 핵무기를 배치하는데도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드골의 독자적인 핵개발정책을 포기시키려 하면서도 소련에 맞서 프랑스 영토에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배치해야 했기에 드골에 정면 반대할 수 없었다.

한편 드골은 프랑스 영토에 배치한 핵무기의 통제와 사용에 대한 결정권을 프랑스가 보유하는 경우에만 배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케네디 역시 나토를 위시한 동맹문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특권 있는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드골의 열망을 반대하며 드골의 독립외교정책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드골은 케네디가 중대하게 다루었던 냉전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냉전이 자신의 독립외교와 기동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소련이 언젠가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고 서구세계 특히 프랑스와 연합하여 서구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드골은 초국가적 기구에 프랑스를 몰입시키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시장을 프랑스 경제를 현대화시키는 동시에 서유럽을 프랑스 체제하로 동원할 수 있는 지렛대로 받아들였던 반면 케네디는 하나의 통합된 초국가적 서유럽을 건설하고, 공동시장을 서독을 정착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즉 소련의 서구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저지시키는데 서독을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결국 드골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을 지원하였지만 케네디의 대유럽 군사·외교적 도전을 좌절시키고, 유럽공동체 건설에 있어서 독립적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3. 드골의 유럽재건에 대한 노력

  드골은 재집권한 후 그의 인생을 걸고 전후 유럽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특히, 프랑스 역사상 누렸던 영광과 위대성을 다시 찾는 동시에 파괴된 유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가 제1의 서열을 확보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는 전후에 유럽의 상황을 고려할 때 기본적으로 '함께 뭉친 유럽' 또는 '단결한 유럽'을 구상하고,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배제하고 러시아는 유럽의 일원으로 파악했다. 1940년대에 유럽재건에 대해 그는 국가들이 구성요소가 되고 국가들의 독립을 엄격하게 존중하는 국가 연합적인 조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에 드골은 1958년 재집권하면서부터 통합과 초국가성에 입각한 유럽적인 조직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반대하고 유럽을 조직화하는데 있어서 국가의 독립과 안보를 해치지 않는 방향에서 추진하고자 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유럽방위공동체를 공격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드골은 1961년 2월 당시 외상인 푸세를 중심으로 하여 특별위원회를 결성, 유럽의 정치적 동맹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외무장관들의 주기적인 회합을 위한 정치적 기구를 만들어서 회원국가들의 유럽정치를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발효할 경우 3년 후에는 통일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점진적으로 연합 속에서 기존의 유럽공동체를 이에 집중시키는 기구를 구성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유럽경제 공동체의 회원국들, 특히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이에 저항하였다.

푸세는 이 안을 약간 수정하여 제2차, 제3차 안을 제출하였으나 회원국들의 반대, 특히 은폐된 초국가성이라고 공격한 네덜란드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였다. 이런 푸세안의 초국가성은 원래 드골의 사상과는 반명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유럽의 현실을 그대로 인식한 드골의 〔상황의 정치와 기회의 정치〕의 일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골은 유럽을 재건하는데 있어서 비유럽적인 실체가 들어가는 것을 기본적으로 반대하였다. 유럽이 대서양 세력과 그 영향권에 편입한다면 유럽적인 실체를 상실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럽은 그 자신의 생활방식을 보유해야 하며, 그래서 강력한 유럽 전체의 목소리를 반영시키고, 과거에 담당했던 주체적 역할을 다시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까지 미국의 지배에 종속되어 왔고, 다른 한편으로 소련의 영향에 노출된 유럽국가를 재결합하는 데에 있어서 전통적인 국가들과의 협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같은 협조 속에서 그는 초국가주의를 배제하는 동시에 유럽의 정통성을 되살릴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의 외교정책 역시 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이러한 외교정책만이 궁극적으로 프랑스에 독립, 안정 그리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드골은 유럽연합에 독일을 가두어 두려고 노력했다. 그는 모두를 위해서 독일이 다시 침략을 할 수 없도록 약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유럽재건에 있어서 독일을 문제해결의 열쇠로 인식하고 독일에 대해 화해와 억압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그는 양국의 협력을 위해서 서로간에 화해의 무드를 성립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독일점령정책을 엄격하게 유지하였다. 그는 독일이 다시 중앙 집권화 된 제국으로 탄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것이 매우 원만한 관계를 가진 소국들로 형성되는 국가연합으로 유지되기를 바랬다. 이러한 그의 구상은 전후 독일이 다시는 유럽의 이웃나라들을 위협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4. 드골의 탈 식민지화 정책

  드골의 저서 『희망의 회고록』에서는 프랑스가 탈 식민지화의 길에 접어들게 된 두 가지 동기를 지적하고 있다. 우선 식민지를 계속 추구하는 것은 프랑스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식민지 정책은 파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미래에 더 큰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평소 소중하게 생각하였던 민족자결원칙이란 시각에서 프랑스가 통치하고 있었던 해외영토들을 해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의 탈 식민지화 정책과 관련해서 먼저 살펴볼 것은 알제리이다. 프랑스에게 132년간이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알제리에서 1940년대 후반부터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1954년 11월 4일 이후 민족주의운동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무력해방운동으로 전환하자 프랑스는 그 진압을 위해 군사행동을 강화하였고, 알제리를 프랑스 본국의 일부로 영구히 통치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런 강경 노선이 국내외의 저항에 부딪치게 되자 드골이 이끄는 제5공화국은 식민지화를 종식시키되 〔프랑스 연합〕의 틀 속에서 존재하는 알제리를 만들려고 했다. 알제리가 이에 반대하고 계속 저항하자 1959년 9월 16일 드골은 3가지 선택, 즉

①독립을 수반하는 분리 ②완전한 프랑스화 ③프랑스 원조와 프랑스와 긴밀한 연합에 의존하는 알제리인에 의한 알제리인의 정부를 제시하였다. 이후 완충장치들이 충족되면서 알제리는 독립했다.

드골이 알제리 문제를 해결한 후 힘써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하는 해외영토를 어떻게 탈 식민지화하는가'와 '해외영토에 적절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프랑스연합〕이란 현상을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해체하느냐'였다.

집권 초에는 아프리카 영토를 가능한 지켜보려고 노력을 기울였으나,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아프리카 구 식민지들이 스스로 발전과 전진을 추구하려 하는 민족정신을 갖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자신의 발전을 위해 대 아프리카 부담을 줄이려는 현실주의적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인도차이나는 베트남, 라오스, 캄프치아 3개국을 포함하는 지역으로서 옛 프랑스의 식민지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프랑스는 중국과 근접한 위치에 있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데 주력하여 100여 년 간 식민지로서 통치하였다.

프랑스는 대 인도차이나의 정책에서 프랑스의 범위 내에서 막연한 자치정부를 갖춘 〔자주적 연방〕을 제시하는 등 프랑스의 영역 안에 그들을 두려하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의 해방의 움직임과 물결이 이는 가운데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에서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대패하고 난 후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책이 대입되기 시작하였는데 곧 초기 정책과 전략에서 보다 유연한 정책과 전략으로 바꾸어지기 시작했다.

제3세계는 2차 대전 이후 주로 아시아·아프리카 및 중남미에서 오랜 식민지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 해방된 신생국가들로 결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드골이 제3세계가 골리즘이 극명하게 반영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제3세계의 저발전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재집권 후 이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 지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실시하였다. 그는 단순한 경제원조에서 경제협력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는데 이것은 상호발전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경제원조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이들 국가와 친선·유대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제 북아프리카 제3세계를 하나의 조직화된 전체로서가 아니라 경제협력의 파트너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범적인 경제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 지역에 번영과 안정을 가져와서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영향권이 다시 설립될 것을 기대한 것 같다.

이와 같은 북아프리카 접근에 있어서 결정적 변화는 점진적으로 국제주권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에게 독립 또는 자치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동시에 자치 능력을 기르는데 협력하려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Ⅲ. 결론
  
  철저한 역사 인식에서부터 출발한 골리즘은 드골의 평생을 관통하면서 형성되고 내외적 시련을 겪으면서 견고해졌다. 이 골리즘은 그의 특유의 민족주의 이념을 잉태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작용하였으며, 이 양자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일련의 프랑스의 이념들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프랑스는 국가에 의해서만 존재하였다.”라고 한 그는 조국에 뜨거운 봉사와 애정으로 뭉쳐진 골리스트적 민족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그의 특유한 행동양식과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골리즘과 민족주의 이념은 파시스트 독일과 비시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조국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성숙해졌고, 정권을 재창출하고 하야할 때가지의 통치기간에 골리즘은 내면화되면서 일련의 프랑스 이념들을 잉태시켰다.

  이러한 골리즘은 국내정책에는 물론이지만 외교정책 - 유럽재건주의 - 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그가 제시했던 댜양한 재건 모델은 이상적 접근이면서도 현실적 접근을 상당히 포괄하였다.

「함께 뭉친 유럽」「단결된 유럽」「조국으로 구성된 유럽」을 제시하는 한편, 유럽적인 연방을 제시한 것은 바로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 비전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접근 속에서도 지속적인 방향은 민족국가의 속성을 약화시켜 무국적인 국가로 만들어 갈  ‘초국가적조직’을 건설하는데 일관성 있게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식민지 문제에 대한 드골의 접근은 깊은 사색과 고민의 그리고 국내외적 협박의 연속선상에서 「탈식민지화」로 연결되었고, 여기서도 이상주의적 정책과 현실주의적 정책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순수하게 골리즘을 추구하려는 이상주의적 정책은 전후 국제환경의 변화와 구식민지의 자각으로 인하여 그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나 변화와 적응을 동시에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정책 -비동맹외교정책- 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구식민지들을 계속 프랑스제국의 속박에서서 풀어줌으로써 프랑스가 국제문제에  참여하고 개입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현실적 발상으로 전환하였다.

이는프랑스가 구식민지들과 특별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더 많은 세계문제에 개입한다면 그 영광과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는 현실적 접근을 의미한다. 결국 프랑는 북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식민지들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국제적 비난을 스스로 회피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국제도덕을 가지고 유엔에서 5대 상임이사국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Ⅳ. 드골의 골리즘에 대한 평가

대통령 사를 드골의 「강력한 유럽, 강력한 프랑스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은 프랑스 정치사를 통하여 가장 다양한 해석과 추론을 낳았다.

우선 그의 초기 경력에 대한 평가를 내려보자면 드골은 명석하고 성실하며 열의에 찬 장교로서, 군대경력을 거치는 동안,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독창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로 유명했다. 이러한 평가는 제1차 세계대전때 베르됭 전투에 참가한 그가 3번씩이나 부상을 입고 2년 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했으나 5회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고, 프랑스 육군 수훈보고서에 그의 이름이 세차례나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뒷받침해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드골은 기갑여단을 지휘하였는데, 자신의 이론을 2차례의 전차전에 적용시켜 당시 정력적이며 대담하고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을 얻었다.

좌파 정치인들이 꺼리는 카톨릭 교도인 군인출신이면서, 국민적 영웅인 페탱 장군을 배신한 반역자 정도로 취급되던 드골은 자신의 지도자적인 자질과 임무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 하나로 조국에 헌신하고, 국익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에 몰입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골은 국민의 후원 속에서 본격적인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을 위한 주요 정책들을 수행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드골의 사상·정책·행동 등의 가장 근본이고, 최상에 위치한 목표였다.

드골의 이러한 노력은 〈골리즘〉이라는 독자적인 용어로 표현될 만큼 세계사적으로 위대하고 가치 있었던 드골 자신만의 정책 이념이라 할 수 있다. 골리즘을 바탕으로 한 드골의 정치적 투쟁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고, 드골은 전쟁으로 약화된 프랑스를 세계 열강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계획에 대한 국내적 반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이러한 드골의 책략은 "이기주의, 오만, 냉담, 교활", "경험, 직관력, 영혼이 아니면 이성의 융통성"이라는 내용으로 두 가지 관점에서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다.

점차 환영받던 드골의 외교노선이 불안을 자아내고, 드골의 미국 인식이 지나치게 자신의 반미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 것이라고 널리 인식되면서 골리즘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드골의 정책은 점차 위기에 놓이게 된다.

드골이 드골리즘에 기반을 두고 여러 정책을 실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공감대 형성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같은 이유로 오만하고 성질이 급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드골 특유의 자신감과 적극적인 행동과 사고로 인해 골리즘이 활기차게 진행되어 전후에 프랑스의 입지가 확고하게 세워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나라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미국이라는 경제·정치 대국에 대해 위축되는 외교 정책을 펴고 있으나 프랑스는 자신들의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들만의 프랑스, 자신들만의 유럽 연합을 이끌어 가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드골의 골리즘으로 인해 당시에 형성된 국가의 지위와 국민의 의식이 그대로 계승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다.(http://sookmy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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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프랑스 식민지시절 알제리의 프랑스용병 아르키(harkis) 처리문제(50만 명 모집 중 15만 명 아르키(harkis) 프랑스군 철수 이후 알제리 체제에 의해 식민지 청산작업으로 학살)Click here!


학살된 15만 '아르키'들 명예회복 나서다
[현지보고] 프랑스, 불특정 인물 'X' 상대 반인도범죄 소송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박영신(jocaste) 기자    



지난 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 극우당 국민전선(FN)은 프랑스의 축구영웅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의 출신을 문제삼으며 지단의 아버지가 아르키(harkis)였다고 공격했었다. 이에 대해 지단은 일간지 뤼마니떼(l'humanite)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 아버지는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자랑스러운 알제리인이다'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다.

아르키. 현지에서 징발된 회교도 보충병, 특히 알제리 독립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위해 싸운 알제리인을 일컫는 아르키는 그래서 알제리인들에게는 '배신자'요, 프랑스인들에게는 '조국을 등진' 용병에 불과한, 참으로 불명예스런 이름이다. 알제리 전쟁에서 자발적이건 강제에 의해서건 아르키 50만 명이 모집됐으며 이들 중 15만 명이 프랑스군대 철수 이후 알제리 체제에 의해 학살됐다.

참혹한 역사의 귀결이었을까. 프랑스가 알제리를 지배한 132년의 긴 세월과 또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 했던 피묻은 전쟁은 지금까지도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었으며 이것은 아버지 세대를 거쳐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 2세들이 프랑스를 향해 증오를 키우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됐다.

'전쟁은 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

지난 10월 14일, 아르키와 그들의 가족으로 구성된 1962-재향군인송환자협회(ARRAC)가 파리 법원에 불특정 인물 X를 상대로 반인도범죄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이것은 은연 중에 알제리전쟁 당시의 프랑스 제 4, 5공화국 정부와 알제리 정부를 겨냥한 것이라고 지난 11월 5일
사건 담당 알랑 부스께(Alain Bousquet) 변호사는 밝혔다.

소송은 동시에 지난 10월 23일 출판된 조르주-마크 베나무(Georges-Marc Benamou)의 저서 '프랑스의 거짓말, 알제리전쟁의 회고(Un mensonge francais. Retours sur la guerre d'Algerie)'를 문제의 정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이 책은 알제리전쟁 종결에 합의하는 1962년
3월 19일 에비앙(Evian)휴전협정 서명을 가속화하려 했던 드골(de Gaulle) 정권에 의해 아르키와 알제리 출신이면서 알제리 독립 후 프랑스로 철수한 프랑스인들을 말하는 피에-느와르(pieds-noirs)들이 의도적으로 희생됐다고 증언해 동요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번 소송은 특히 1960년에서 1969년까지 드골 정부의 총리를 지낸 피에르 메스메르(Pierre Messmer, 87세)를 구체적으로 지목해 눈길을 끈다.

ARRAC에 따르면 에비앙협정에 따라 1962년 7월 3일 알제리가 독립되는 날까지 프랑스는 알제리 내 프랑스 관할 지역의 질서유지에 책임이 있었다. 3월 18일부터 무장 해제된 프랑스 군대의 지방 고용인과 아르키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르키들에게 돌아온 것은 대량학살 뿐이었다. ARRAC는 알제리 정권의 아르키 대학살을 묵인한 프랑스 정부가 '반인도범죄'의 대상이라며 당시 군, 행정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메스메르는 이와 관련해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지난 5일 수요일 라디오 유럽-1(Europe-1)을 통해 밝히고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전쟁은 결코 깨끗하지 않다. 그것은 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고 말해 전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명피해는 필연적임을 시사, 자신에 집중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메스메르는 또 에비앙협정 서명 이후 알제리에서 수만 명의 아르키가 살해된 사실은 인정했지만 프랑스군대는 2만여 명의 아르키와 그 가족들의 본국송환을 준비했다며 마지막 전투에서 프랑스군대가 알제리 보충병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고 있다.

공소시효 없는 반인도범죄, 그러나...

그러나 현재 프랑스에서 반인도범죄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과 1994년 이후 일어난 사건으로 한정하고 있고 더구나 알제리 전쟁 기간동안 저질러진 모든 범법행위는 1968년 7월 31일에 발효된 사면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제기된 이와 유사한 다른 소송들도 꾸준히 '증거조사거부' 혹은 '공소기각(公訴棄却)' 결정의 대상이 돼왔다. 실례로서 지난 2001년 8월 30일, 알제리출신송환프랑스인협회와 함께 9명의 아르키가 파리 법원에 역시 X를 상대로 하는 반인도범죄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으나 기각됐고 2002년 3월에도 피에-느와르 11가족이 알제리전쟁 휴전이후 실종된 가족 친지들을 찾기 위해 같은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소송의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에도 뚜렷한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에 대해 '싸움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밝힌 부스께는 '아르키들의 소망은 명예회복이고 오늘날, 프랑스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며 이번 소송이 이전처럼 끝나지는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1945년 나치(nazis) 전범을 심판한 뉘른베르그 법정이 반인도범죄 최초의 법정으로서 최근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모리스 빠뽕(Maurice Papon, 93세)을 꼽을 수 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지롱드(Gironde) 도청 사무국장을 지낸 빠뽕은 2차 대전 당시 어린이를 포함한 1만1000명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 비시(Vichy)정부와 함께 대독 협력 사실이 발각돼 반인도범죄 명목으로 보르도(Bordeaux) 중죄재판소에 회부됐었다.

1997년 10월 8일 시작된 이 소송은 1999년 10월, 빠뽕이 10년형을 선고받으며 마무리됐지만 이것은 당시 87세의 빠뽕에게는 종신형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프랑스 사상 처음으로 국가 고위관료를 심판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빠뽕은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후에 법의 심판을 받은 전범으로 기록돼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도범죄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비록 3년 동안의 수형 생활 끝에 지난해 9월,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자유의 몸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프랑스인 55% "알제리에 사죄할 필요 없어"

한편, 대다수의 프랑스인(55%)은 132년에 걸친 식민정책에 대해 프랑스가 알제리에 공식적으로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여론조사기관 CSA가 일간지 라프로방스(La Provence)를 위해 지난 10월 15일과 16일 양일간 18세 이상의 프랑스인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이다.

프랑스가 알제리에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해야 한다고 평가한 프랑스인이 37%이고 55%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또 43%의 응답자는 1830년에서 1962년까지 132년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했을 당시, 알제리 상황이 더 나았다고 대답했으며 36%는 알제리 독립 이후가 더 낫다고 했으나 21%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인 10명 중 7명(66%)은 알제리 전쟁이 속 시원히 해명되지는 않았다고 했으며 반대 의견은 23%에 불과했다. 이밖에 68%의 응답자는 알제리전쟁 이후 아르키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가 부당했다고 평가했으며, 정당했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2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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