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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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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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16.건륭(乾隆)의 딸은 신분이 낮은 공부(孔府)로 시집갔는가?



건륭(乾隆)의 딸은 신분이 낮은



공부(孔府)로 시집갔는가?








평소 공자를 흠모한 건륭제가 역대 어느제왕도 사후 이런규모의 사당을 못가져 부러워했다는  태화전과 같은 규모의 공묘 본전. 태화전보다 벽돌 하나 적으며 용을 새겨놓은 열주의 화려함을 보면 그 스케일을 알 수 있다.  공자의 후손이 곡부지방의 지역맹주 행정관으로 통치했던 행정부 "공부"  입구와 공부 사저(공자후손들이 통치하던 개인 저택). 마지막 사진은 공부 전시관의 강택민 휘호.왠지 강택민이 알고 한 소린지 모르고 한소린지 몰라도 그 뿌리가 동이족에서 왔다는 소리로 들려 찍지 말라는 것을 찍었다. 강택민의 휘호를 대단히 귀중하게 여겨 역시 사상성이 철저한 공산당원임을 느끼다. 염황자손는 불망시조요-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은 잊지못할 중화의 시조요, 중화문명 원원유장이라-중화문명의 뿌리가 그 근원이 멀고도 유장하다. 근자에 중국정부는 염황자손이라 하여 동이족의 조상인 염제를 황제와 그 근본을 동일시 하다가 14대 자오지 환웅이신 치우천자를 염황치라 하여 3조상으로 대우하고 있다. 강택민 대에 이르러 동이족 조상 신농씨가 황제헌원과 나란히 양대 조상으로 떠받들어지다가 근자에 염황치 3조상으로 잡으며 치우천왕까지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염황자손는 불망시조요-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은 잊지못할 중화의 시조요, 중화문명 원원유장이라-중화문명의 뿌리가 그 근원이 멀고도 유장하다-라는  강택민의 휘호는 역사의 회귀본능의 싹을 보여주는 것이라 그 중요성이 있다. 본 이영선의 글은 건륭제의 공주가 공부에 시집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가 현지산동성 곡부 공묘 공부에 가보니 건륭제는 자신의 딸을 자신이 흠모하는 공자의 혈통에 대기 위해 시집보냈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공주가 좋아하는 음식을 북경에서 공수함은 물론 진위는 모르겠지만 공주가 좋아하는 은행 알로 만든 요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현재 한반도의 공씨는 백프로 공자후예들로 산동반도에서 온 우리 핏줄 동이족 은나라 후예인 노나라 후손들이다.  흔히 국내의 얼뜨기 족보학자마저 아직도 황국사관에 젖어 우리의 찬란한 대륙1만년사의 실체를 모르고 한국인의 성씨는 죄다 지나대륙에서 온 중국인이라 자조섞인 푸념으로 말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으로 한국인의 성씨가 귀족의 경우 대부분 고려때 자리를 잡았고  그 이전에는 중국에서 온 것이 사실이나 중국대륙의 모든 성씨가 동이족의 역사였으므로 인해 본래 우리 성씨였음을 알아야 한다.



공자는 동이족의 혈통으로 은나라 왕족인 송미자 (宋微子)의 후손인데(석학 임혜상은 ""금인(今人)이 고증하기를 은상(殷商)은 동이계에 속하며(今人考證 殷商屬夷系)"라 해서 은상은 동이계에 속한다 못박음), 공자후손의 족보를 기록한 대형 비문을 이고 있는 힘센 거북은 거북같아 보이는데 사실은 거북이 아니고 하늘에서 무거운 비문을 짊어지는 사명을 받은 동물 비희(일명 패하)라고 현지 가이드는 말한다. 아래는 공부 안에서 한 컷 찍은 것으로 현지인처럼 행세하는것이 혼자하는 답사여행에 유리해 어수룩하게 입고 다녀 행색이 말이 아니다.
명나라의 호승지 라는 사람이 쓴 [진주선(眞珠船)]에 구룡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1.비희 : 일명 패하 . 모양은 거북이를 닮았는데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한다. 돌비석 아래에 있는 귀부(龜趺)가 이것이다.2.이문 : 모양은 짐승을 닮았느데, 먼데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전각(殿閣)의 지붕위에 있는 짐승머리가 바로 이것이다. 일명 조풍(嘲風)이라고도 하는데 험한 곳을 좋아한다.또한 치미라 하며, 화재를 누를 수있다.3.포뢰 : 모양은 용을 닮았는데 , 소리지르기를 좋아한다.  종(鐘)위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다 속에는 큰 고기인 고래(鯨)가 있는데,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가 포뢰를 치면 번번이 놀라 크게 운다. 종의 소리를 크게 하고자 할 때는 포뢰를 종위에 조각하고 고래 모양으로만든 당(撞)으로 친다.4.폐안 : 일명 헌장(憲章)이라고도 한다. 모양은 호랑이를 닮았는데, 위엄과 힘이 있어 감옥의 문에 세운다.5.도철 : 마시고 먹는 것을 좋아 한다. 그래서 솥의 뚜껑에 세운다. 6.공복 : 물을 좋아하는 성질을 가졌다.   그래서 다리의 기둥에 세운다.한편 범공이라고도 하는데 마시기를 좋아한다.7.애자 : 죽이기를 좋아 하여 칼의 콧등이나 칼자루에 새긴다. 8.산예 : 모양이 사자와 닮았고 연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에 새긴다. 또한 앉기를 좋아하는데, 부처님 자리의 사자가 바로 이것이다.일명 금예(金猊)라고도 한다.9. 초도 : 모양이 소라고동을 닮았다. 닫기를 좋아하여 문고리에 붙인다.








산동(山東) 곡부(曲阜) 일대에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황제의 공주가 신분이 낮은 공부(孔府) 연성공(衍聖公)에게 시집간 전설이 줄곧 유전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공주가 결혼할 때 예단을 들고 서있는 줄이 5백리에 이르렀다고 하며 결혼 의식이 얼마나 성대하고 공주의 생활이 얼마나 사치했는지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천진인민출판사는 공자의 직계후예인 공덕무(孔德懋)가 저술한 《공부내택질사(孔府內宅軼事)》를 출판했는데 여기에도 이러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공부내택질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건륭이 딸이 있었는데 효성현(孝聖賢)황후의 소생이었다. 이 공주는 얼굴에 사마귀가 있었는데 관상가의 말에 따르면 액운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공주를 신분이 낮으면서도 왕과 귀족 대신들 보다도 더 현귀한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멀리 공부(孔府)로 시집보내는 길밖에 없었다. 건륭은 처음 공부에 갔을 때 딸을 이곳으로 시집보내기로 약속을 했지만, 한족과 만주족은 통혼할 수 없어 이러한 민족의 규율을 피하기 위해 건륭은 딸을 중당대인(中堂大人) 우민중(于敏中)의 집에 양녀로 보내고, 연후에 다시 우가(于家) 규수의 명의로 72대 연성공(衍聖公) 공헌배(孔憲培)에게 시집보내었으며, 이에 따라 공부(孔府)의 후예들은 그녀를 우부인(于夫人)이라 불렀다.

《공부내택질사》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헌배는 건륭 37년 12월 공주와 결혼했다. 공주가 결혼한 후 생일을 치를 때 건륭은 궁궐의 사람들을 보내어 생일을 축하하고, 상을 하사하였으며, 효성현 황후가 죽었을 때는 공소환(孔昭煥), 공헌배 부자와 공주가 모두 북경에 와 황후의 관을 전송했다. 이처럼 말이 근거가 있고 사리에 맞는다.

이러한 전설을 역사로 믿을 수 있을까? 청대 역사에 정통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수많은 모순점을 지적해 낸다. 여지군(余志群)이 《제노학간(齊魯學刊)》1985년 제5기에 발표한 문장에서는 이러한 견해의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건륭 황제에게 이러한 공주가 있다는 것도 부정했다.

여지군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건륭의 일생에서 3명의 황후가 있는데, 즉 효현순(孝賢純)황후, 납나씨(納喇氏)황후, 효의순(孝儀純) 황후이다. 효현순 황후는 건륭 2년에 정비로 황후에 책봉되어 단혜(端慧)황태자, 칠황자 영종(永琮)를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고 또 황장녀(皇長女)와 황3녀 고륜화경공주(固倫和敬公主)를 낳았다. 건륭 13년에 황태후로 추대되었고 덕주(德州)에서 붕어하였다.

납나씨 황후는 건륭 2년에 한비(嫺妃)로 봉하여지고 건륭 10년에 귀비가 되었다. 효현순 황후가 붕어하자 그녀는 육궁(六宮)의 일을 보좌하며 황귀비가 되었다. 건륭 15년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황12자 영기(永璂), 황13자 영경(永璟)과 황5녀를 낳았다. 납나씨 황후는 건륭 21년에 붕어하였다.

효의순 황후는 건륭 10년에 영빈(令嬪)으로 봉하여져 이후에 비가 되고 건륭 24년에 귀비가 되었으며 건륭 30년에 황귀비가 되었다. 인종(仁宗: 가경(嘉慶)) 및 황14자 영로(永璐), 황17자 영린(永璘), 황7녀 고륜화정공주(固倫和靜公主), 황9녀 화석화락공?和碩和洛公主)를 낳았다. 건륭 40년에 붕어하자 영의(令懿) 황귀비의 시호를 주었다. 건륭 60년 가경황제가 등극하자 추가로 효의순 황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여지군은 건륭 왕조의 역사를 펼쳐 보면 효성현 황후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공부로 시집보낸 공주에 대한 단서도 없다고 말했다. 또한 건륭이 처음으로 곡부에 이른 것은 건륭 13년 2월이라고 지적하였다. 또 이때는 우민중이 절강(浙江)의 학정(學政)으로 임명되었을 때로 북경의 중당대인을 맡지 않았다고 하였다. 우민중이 호부상서(戶部尙書)를 맡고, 대학사(大學士)에 참여한 것 등은 훗날의 일이다.

건륭 39년 7월 “비밀리에 내감(內監) 고운종(高雲從)에게 탐문 기록을 준” 사건으로 인해 우민중은 형부(刑部)로 넘겨져 엄하게 꾸짖음을 받고 처벌받았고 건륭 44년 12월에 병으로 죽었다. 다음해 6월 우민중의 손자 우덕유(于德裕)가 당숙 우시화(于時和)가 가산을 압박하여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고발하였다. 건륭은 대학사 영렴(英廉)에게 엄격히 조사하도록 하였고 사건의 경위는 공부(孔府)로까지 연루되었다. 공부 사건 기록에 따르면, 공소환이 이 일을 위해 건륭 황제에게 상주하여 말하길 “건륭 45년 7월 30일 아문(衙門)의 제독(提督)과 상의하여 본 아문이 다음과 같은 상주문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에 의하면 장씨(張氏)가 금년 정월에 일찍이 그의 딸과 공헌배의 처에게 각각 은 1만량(兩)을 나누어 주고 하인 요흥(姚興) 등을 거쳐 명백히 하였는데, 대략 이 재산은 모두 우민중의 재산으로 인척이 기회를 타 분할하였으므로 마땅히 이 은화를 몰수하여 국고로 귀속하여야 합니다. ……신의 조사에 따라 헌배의 처 우씨(于氏)의 보고에 따르면, 분상(奔喪)할 때 며느리의 생모가 며느리에게 잡색은(雜色銀) 1만량을 경평(京平: 옛날 북경에서 쓰던 저울)에 달아 주어 며느리는 이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부평(部平)으로 9천 5백량으로 바꾸어 부평은(部平銀) 360량 남짓을 모아 올해 2월에서 4월까지 계속하여 장전(莊田) 두 곳을 사들였고 국유지를 셈하면 16경(頃) 85무(畝) 1분(分) 남짓 됩니다”

공부에서 건륭황제에게 준 이 상주문은 우부인이 우민중의 친딸이며 양녀나 의녀(義女)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대중일보(大衆日報)》1986년 1월 4일에 게제된 조벽(趙璧)의 《건륭위하팔진공부(乾隆爲何八進孔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건륭이 공부에 시집보낸 공주는 효현순 황후(부찰씨(富察氏))의 소생이다. 효현순 황후가 이 어린 딸을 버려두고 죽자 건륭황제는 특별히 어여삐 여기었다. 건륭은 무엇 때문에 공부에 여러번 갔을까? 그가 정치상으로 공자의 명망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구슬려야 할 필요 및 산수풍경을 감상하며 문장을 마음대로 짓는 것 외에도 또 하나의 원인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그가 특별히 아끼는 딸을 공부에 시집보내면 그가 딸을 살피러 공부에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주가 결혼한 후에 건륭황제와 황태후, 황후가 모두 공부에 왔었다고 한다. 건륭이 공자 사당에서 숙식을 한 것은 고귀한 공부(孔府)의 연회에서 연나라 요리로 후히 대접하는 것 외에도 무대를 만들어 가극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공부는 황제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기 때문에 《타금지(打金枝)》를 노래할 수 없었다.

만약에 공부에게 시집간 건륭의 딸이 효현순 황후의 소생이라면, 효현순 황후가 건륭 13년에 죽었고, 윗 문장에서 모친이 죽을 때 이 딸은 아직도 어렸다고 했으며 어린 딸이라고 하면 3, 5세 정도밖에 안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공헌배와 결혼한 건륭 37년 12월에는 공주의 나이가 이미 27세에서 29세가 되었을 것이다. 황제의 딸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출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부내택질사》에서는 효성현 황후가 죽자 공소환, 공헌배 부자와 공주가 모두 북경으로 와서 황후의 관을 전송했다고 말하였다. 효성현 황후가 만약에 정말로 효현순 황후라면 효현순 황후가 건륭 13년에 죽었고 이때 공주는 아직 출가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북경으로 와서 황후의 관을 전송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공주가 결혼한 후에 황태후와 황후가 모두 공부에 왔었다는 말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공주는 건륭 37년 12월에 결혼했다. 이때, 효현순 황후가 죽은 후에 책봉된 납나씨 황후 역시 건륭 31년에 죽었고 가경의 생모는 비록 그 당시 살아있었다고 하나 그의 생전에는 귀비의 신분에 불과하였고 아들이 즉위한 후에야 효의순 황후에 봉해졌다. 이런데 어찌 공주가 결혼한 후에 황후가 공부에 왔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컨대, 건륭이 공주를 공부에 시집보낸 전설은 빈틈이 매우 많고 모순점이 많아 사실로 믿기가 어렵다. 역사상 이러한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여부는 관련 방면에서 진일보한 해명이 필요하다. (이영선(李永先))  안원전의 21세기담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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