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Total : 530 (529 searched) , 5 / 16 pages  

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다운로드 #1    호필(湖筆)_창시자_몽염(蒙恬).hwp (28.5 KB), Download : 505
제 목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19.호필(湖筆) 창시자 몽염(蒙恬)과 복향련




호필(湖筆) 창시자 몽염(蒙恬)과 복향련



▶몽염(蒙恬):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10년에 죽은 진나라의 장군이다. 몽오의 손자이고 몽무의 아들이다. 그 조상은 제나라 사람이었으나(동이족 제나라인이라는게 몽염의 키워드임)그 조부나 부친은 모두 진나라의 명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옥리(獄吏)의 신분이었으나 진시황 26년 기원전 221년 가문의 힘으로 장군이 되어  제나라 공격군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출전하여 흉노를 공격해 지금의 내몽고 하투(河套)인 하남(河南)의 땅을 수복한 후에 그 땅에 장성을 쌓았다. 몽염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감숙성 민현(岷縣)인 임조(臨洮)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지금의 요녕성 요양(遼陽) 북쪽의 요동(遼東)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10여 년 동안 북쪽 변경 지방을 지킴으로써 흉노의 땅을 진동시켰다. 진시황은 이에 몽염을 매우 총애했다. 진시황이 병사하자 그 조서를 위조한 조고와 이사가 호해(胡亥)를 이세황제로 세웠다. 이세 황제는  부소(扶蘇)는 자살하게 만들고 몽염은 사람을 시켜 죽였다. *몽염과 망진자호야Click here!*몽염과 부소의 죽음&조고의 척살Click here!
▶ 붓의 기원
"몽염이 태자 부소와 함께 진시 황제의 명을 받아 만리장성의 축을 쌓았다. 몽염이 산중의 토끼털로 붓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 몽염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붓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진 이전에도 붓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이 증명되는 붓이 출토되어 몽염이 최초로 붓을 만들었다는 설은 많은 이견을 가지고 있다. 중국 신석기 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도자기(채도)에서 붓의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또 1932년 은허 발굴에서 도자기의 조각에 "祀"라는 글자가 발견되어 붓의 흔적이 확실하여 은나라 때에 이미 붓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오늘날 중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붓은 1954년 호남성 장사시에서 전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붓대가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붓대의 길이는 18.5cm , 털의 길이는 2.5cm, 직경은 0.4cm,이며 붓털은 질이 좋은 토끼털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호북성 강릉현 황산에서 한나라 무덤에서 나온 붓이 있다. 이 붓에는 붓털에 먹의 흔적까지 역력히 남아 있고 현재의 붓의 구조와 다름이 없다. 붓의 명칭도 각각 달리 불리었다. 초나라에서는 율(律), 오나라에서는 불률(不律), 연나라에서는 불(拂), 진나라에서는 필(筆)이라 했고 우리 나라에서는 붓이라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진나라 이전의 붓은 대개 자연에서 재료를 취해 만든 원시적인 붓의 형태였고, 오늘날처럼 동물털과 대나무로 만들어진 붓은 진 이후로 만들어졌다. 붓은 송나라에 들어와 모든 학문과 예술의 발달로 문인, 묵객의 필수품으로 등장하였다. 명.청시대에 와서는 붓의 제조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붓이 단순한 서화 용구로서 뿐 아니라 하나의 공예품으로 각광을 받게 되어, 붓대의 장식과 재료에 대나무 이외에 도자기, 상아 등이 사용되고 거기에 화려한 조각, 채색 둥 대채로운 장식을 넣어 조형의 아름다움을 갖추기에 이른다.
▶이사 (李斯 ; ?~BC 208): 중국 진(秦)나라의 정치가로서 초(楚)나라 상채(上蔡:河南省 上蔡縣) 출생이다. 순자(荀子)에게 배운 법가류(法家流)의 정치가로서, 진(秦)나라로 가 승상(丞相) 여불위(呂不韋)에게 발탁되어 객경(客卿)이 되었다. 정국거(鄭國渠)라는 운하를 완성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시황제(始皇帝)가 6국을 통일한 후에는 봉건제에 반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진언하여 정위(廷尉)에서 승상(丞相)으로 진급하였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시켰다.   통일시대 진나라의 정국을 담당한 실력자로, 획기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시황제가 평대(平臺:河北省 鉅鹿縣)에서 병사하자 환관 조고(趙高)와 공모,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고 시황제의 장자 부소(扶蘇)와 장군 몽염(蒙恬)을 자살하게 하였다. 이 당시 시황제의 큰아들 부소(扶蘇)는 이단적인 사상이 씌어 있다는 이유로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게 한 승상 이사(李斯)의 조처에 반대한 까닭에 북쪽 변방인 상곡군(上谷郡)에 유배되어 있었다. 결국 이사와 조고는 만약 부소가 제위를 잇는다면 자신들의 관직을 박탈함은 물론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소와 그의 친구이자 상곡군의 장군인 몽염(蒙恬)에게 가짜 조서를 보내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 편지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죽었다. 이사와 조고는 죽은 시황제의 시체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자, 포어(鮑魚:소금에 절인 냄새가 심한 생선) 한 가마를 수레에 같이 실어 시체의 냄새를 숨겨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시황제의 막내 아들 호해(胡亥)로 제위를 잇게 한다는 억지 조서를 꾸몄다.  그 외에도 황자 12명과 공주 10명을 모조리 죽였다. 하지만 얼마 후 조고의 참소(梭訴)로 투옥되어 셴양[咸陽]의 시장터에서 처형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붓은 중국 전통의 글을 쓰는 도구로, 붓 중에서 가장 유명한 ‘호필(湖筆)’은 휘묵(徽墨), 단연(端硯), 선지(宣紙)와 함께 ‘문방사보(文房四寶)’라 불린다. 이 호필은 절강성 호주시(湖州市)의 선연진(善璉鎭)에서 나오는데 이 붓을 제작한 시조가 바로 몽염(蒙恬)이다.

몽염은 2천 2백 년 전의 진(秦)나라 장군이다. 진시황(秦始皇)은 6국을 통일한 후,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 흉노를 공격하여 황하(黃河)의 하투(河套)지역을 수복하도록 명령했다. 후에 또다시 민공(民工)을 징집하여 만리장성을 수축하여 흉노의 한족에 대한 침입과 약탈을 막고 중원 지역의 경제문화 발전을 보위했다. 이렇게 혁혁한 무공을 지닌 대 장수가 어떻게 붓을 제작한 시조가 되었을까?    
        
원래 붓을 발명하기 전에 중국의 선조들은 무엇을 기록하려면 칼로 대나무 조각이나 나무 조각 위에 문자를 새겨 넣어야 했으므로 시간과 힘이 상당히 많이 들었다. 몽염은 군대를 이끌고 변방에 주둔하여 지킬 때 진시황에게 군대의 상황을 자주 보고해야 했다. 군대의 상황은 변화가 아주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문서의 왕래는 매우 빈번하였다.

그러나 칼로 대나무 조각 위에 글자를 새겨 넣는 것은 속도가 매우 느렸다. 몽염의 부하는 군대의 상황을 잘못 전하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서둘러 새겼으나 어떤 때는 그래도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몽염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다급해지면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는 말처럼, 한번은 몽염이 정말로 급하게 전달할 일이 있어, 되는 데로 한 사병의 무기에서 붉은 술을 한 움큼 뜯어 나무막대에 묶은 다음 어떤 거무스름한 색깔이 나는 곳에 담갔다가 흰색의 얇은 비단 위에 시험적으로 글씨를 써 보니 느낌에도 괜찮았고 칼로 새기는 것보다 속도도 빨랐다.

이리하여 그는 부하에게 그가 하던 모양을 따라 글자를 쓸 수 있는 도구를 많이 만들도록 명령하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서둘러 문서를 작성했다. 북방의 황량한 사막에는 이리가 매우 많아 사병들은 이리 사냥을 자주 하여 이리의 가죽을 벗겨 가죽옷을 만들고 쌩쌩 부는 북풍을 막았다. 버리는 이리 털로 시험적으로 붓 머리를 만들어 보니 글자를 쓸 때 효과가 더욱 좋았다. 국경 밖의 초원에는 유목민족이 소와 양을 방목하며 살았으므로 양털도 자연히 많아 어디에서나 주을 수 있었으므로 양털도 붓 머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북방에는 대나무가 없어 당시의 붓은 이리 털 혹은 양털을 나무 막대기의 한쪽 끝에 휘감아 묶어 매우 초라하고 투박한 도구로 아직은 지금 말하는 붓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한 단계 발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을 위해 호화롭고 웅장한 아방궁(阿房宮)을 지으려 했는데, 이때 대량의 자재가 필요했다. 따라서 진시황은 대 장수 몽염을 북방으로부터 쌀밥에 생선국을 먹고 비단이 많이 나는 강남일대로 보내어 은량(銀兩)과 각종 물자를 호송해 오도록 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몽염은 무리를 이끌고 지금의 호주시 선연진에 도착하여 마침 사방으로 흩어져 쉬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크게 소리 지르는 게 들렸다.

“빨리 와서 살려주세요! 사람이 물에 빠졌어요!”

몽염이 급히 강가로 가서 보니 물 속에는 동그란 잔물결이 나타나 있고 수면 위에는 새까만 장발만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상황이 매우 위급하여 몽염은 급히 강물로 뛰어 들어 있는 힘껏 물에 빠진 사람에게로 헤엄쳐 가 별로 힘들지 않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냈다. 그 사람은 미목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복향련(卜香蓮)이라는 아가씨였다.

그녀의 부친은 변경을 지키는 징집에 응하여 소식이 전무했고, 그녀의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던 모친도 얼마 전에 가난과 병이 교차하여 세상을 떠났다. 복향련 혼자 외롭게 남아 살아갈 길이 없었으나 지방 관가에서는 그녀에게 세금과 곡식을 내라고 닦달했다. 그녀는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려 하늘에 구하여도 응답이 없고 땅에 구하여도 소용이 없어 할 수 없이 강에 뛰어들어 자진한 것이다.

몽염은 그녀의 신세를 듣고 매우 동정하여 자신의 돈주머니를 꺼내어 복향련에게 주며 그녀를 위로하고 부하에게 그녀의 숙식을 적절히 안배해 주도록 했다. 이때 소리를 듣고 서둘러 온 마을 사람들은 몽염이 비록 대 장수이지만 마음이 선량하고 친절하며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잇달아 그의 앞에 와서 둘러싸고 각자의 불행을 토로했다.

몽염은 묵묵히 들으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는 길게 탄식하고 병사들에게 징집해온 은량을 고통을 받는 마을의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하고 병사들에게 노잣돈을 나누어 주며 그들이 각기 제 갈 길을 가 스스로 출로를 찾도록 했다.

몽염 자신은 이때부터 군장을 벗어 버리고 보통 백성의 옷을 입고 전원으로 귀의하여 농사를 지으며 날을 보냈다. 호주 일대는 산 좋고 물 맑으며 환경이 그윽하고 고요했다. 그는 예전의 붓을 제작하고 싶은 염원이 다시 마음속에 일어났다. 몽염은 깊이 연구하여 이상적인 붓을 만들어내기로 결심했다.

붓을 제작하려면 우선은 좋은 붓 모(毛)가 있어야만 한다. 몽염은 우선 돼지의 털을 사용했는데 돼지털은 너무 뻣뻣해 붓을 만든 후에는 작은 솔 같아 글자를 쓰니 마치 벽에 솔질을 한 것 같았다. 몽염은 다시 말갈기로 바꿔 시험해보았는데, 말갈기는 더욱 부드러웠지만 갈기가 서로 붙지가 않아 이렇게 만들어진 붓 머리는 한데 모이지가 않고 항상 흩어져 있어 글자를 쓰기가 불편했다. 몽염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붓 모를 바꾸어가며 반복해서 시험했다.

하루는 몽염이 길에서 양털을 한 움큼 주웠는데 그는 양털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적당하여 이것을 되는 데로 대통에 꽂아 기쁘게 복향련의 집으로 돌아왔다.

복향련은 자신이 몽염에 의해 구해졌으므로 줄곧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왔다. 그녀는 몽염이 붓 만드는 것을 연구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일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지금 몽염이 죽통과 양털을 들고 그녀의 집에 온 것을 보고 황급히 흰 천을 찾아오고 또 부뚜막에서 아궁이의 재를 한 움큼 집어와 물과 잘 섞었다. 그녀가 몽염에게 말했다.

“예전에 듣자니 장군께서 명필이시라 들었는데 제게 몇 개 써주시어 제 견문을 좀 넓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몽염은 단번에 승낙하고 아궁이 잿물을 묻혀 진지하게 ‘불율필(弗聿筆)’이라고 커다랗게 세 글자를 썼다. 복향련은 “명필이세요. 명필!”하며 연신 소리쳤다. 곧이어 또다시 궁금한 듯이 물었다. “‘불율필’이 무엇입니까?” 몽염이 설명해 주었다.

“이것은 글자를 쓰는 도구이지요. 북방의 연(燕)나라 지역은 불(弗)이라 하고, 남방의 초(楚)나라 지역은 율(聿)이라 하며, 동방의 오(吳)나라 지역은 불율(不律)이라 하지요. 지금 양털을 죽통에 꽂은 것은 남방과 북방의 결합이니 제가 이것을 ‘불율필’이라 한 것입니다.”

복향련은 이 말을 듣고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몽염은 이 붓을 창턱에 놓고 몸을 돌려 복향련에게 자신이 붓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가려고 한다는 계획을 이야기 하고 복향련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다고 했다. 이 말에 복향련의 얼굴이 빨개지니 수려한 뺨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웃으며 승낙했다.

다음날, 복향련은 창턱에 놓았던 붓이 보이지 않자 한참을 찾았는데, 알고 보니 굴러 떨어져 공교롭게도 창턱 아래의 석회수가 담겨있는 항아리 속으로 빠져 있었다. 그녀는 붓을 들어 빗으로 정성껏 붓 모를 가지런히 빗고 또 머리 위의 비녀로 날이 없는 털을 골라냈다. 그녀는 이렇게 붓 모를 고르며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어제 몽염이 한 말이 떠올라 마음이 흐뭇해졌다. 복향련의 이러한 정리를 거치자 붓은 더욱 가지런해져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졌다.

이날 몽염이 다시 오자 복향련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맞이했고 손에는 그 붓을 들고 있었다. 몽염은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붓을 받아서 아궁이 잿물을 묻혀 글자를 쓰는데 붓이 유달리 자유자재로 잘 써져 그야말로 마음대로 써내려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붓이 석회수 속에 빠져 양털에 있는 지방을 모두 빼내었고, 거기다 붓 모를 잘 다듬었으니 자연히 이전 것들과 크게 달랐던 것이다. 몽염은 미친 듯이 기뻐했고 복향련도 연신 격찬했다. “장군께서 예전에는 보검을 품으셨더니 지금은 또 붓으로 신통력을 얻으셨네요!”

몽장군이 좋은 붓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위 마을 사람들이 잇달아 와서 배웠다. 몽염은 낮에는 농사짓고 채소밭에 물을 주며 밤에는 붓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다가 과도한 피로로 이듬해 가을에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그를 기념하고 그의 은덕에 감사하기 위해 선연진 동남쪽 모서리에 몽공의 사당을 지었다. 공예가들이 몽염 장군의 소상을 만들려고 할 때 복향련도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리하여 공예가들은 몽염을 도와 붓을 만든 여인의 상도 만들어 몽염상 옆에 함께 놓았다. 사람들은 그 둘을 기념하기 위해 몽공의 사당 앞에 있는 하천의 이름을 몽계(蒙溪)로 바꾸었다. 진나라 시대 이래로 몽공의 사당은 여러 번 전쟁의 재난을 당했으나, 사람들은 이 붓을 만든 시조가 중국 민족을 위해 세운 거대한 공헌을 영원히 잊을 수 없기 때문에 훼손될 때마다 백성들이 다시 수리하였다.








389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1. 8신선 중 일인 여동빈(呂洞賓)  안원전   2008/06/18  7223
388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0. 8신선 가운데 1인 남 채화(南采和)  안원전   2008/05/18  7231
387    담론349. 묻혀 있는 비밀-진시황릉의 비밀  안원전   2008/04/12  7596
386    담론 348. 분명한 내막-서안사변(西安事變)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8/03/11  7420
385    담론347.천고의 원안(千古寃案) 진시황 ‘갱유’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8/02/26  7161
384    담론346 누가 병마용을 불태웠는가? 진(秦)나라 용(俑: 진흙인형)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8/02/03  6338
383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4. 어디에서 왔는가?(來自何方)- 초(楚)문화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6/12/31  8585
382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3.《서경잡기(西京雜記)》의 작자는 누구인가?  안원전   2006/11/22  8565
381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2.‘공자(孔子)’의 진위-‘유학(儒學)’변천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6/09/23  7631
380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1.《좌전(左傳)》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6/09/01  8044
379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0.하도낙서(河圖洛書)의 수수께끼 [3]  안원전   2006/08/18  15588
378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9. ‘화하(華夏)’명칭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6/07/09  9272
377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8.《우공(禹貢)》은 어느 시기에 출판되었는가?  안원전   2006/06/24  7662
37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7.《유자(劉子)》의 작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안원전   2006/05/25  6676
375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6. 《관자(管子)》는 관중(管仲)의 작품인가? [3]  안원전   2006/04/28  6566
374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5. 《국어(國語)》의 작자는 좌구명(左丘明)인가? [1]  안원전   2006/03/28  6806
373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4.상고 배달족 종합지리서 《산해경(山海經)》은 어떤 책인가?  안원전   2006/03/11  7490
372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3. 《역경(易經)》은 어떤 책인가?  안원전   2006/02/16  6403
371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2. 《상서(尙書)》의 진위 논쟁은 언제 끝났는가?  안원전   2006/02/13  6003
370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1.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언제 출판되었는가?  안원전   2006/02/04  5856
369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30. 당 현종(玄宗)때의 신선 장과로(張果老)  안원전   2006/01/20  5690
368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9. 한종리(漢鍾離)-종리권(鍾離權)이야기, 계림 칠성암 ‘출미구(出米臼)’ 맞은편의 석벽의 ‘손잡이 없는 빈랑부채(無把葵扇) 유적지  안원전   2005/12/02  5157
367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8. 소선공(蘇仙公)  안원전   2005/11/14  5130
36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7. 불을 관리하는 화정관(火正管) 려(黎) 축융(祝融)  안원전   2005/11/14  7450
365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6. 서왕모(西王母)와 결혼한 남자 신선 중의 주인인 동왕공(東王公)  안원전   2005/11/14  6111
364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5.조도등의 동이족 소호의 부모 황아(皇娥)와 태백금성(太白金星)  안원전   2005/11/04  6047
363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4 당(唐)나라 때 도인 헌원집(軒轅集)  안원전   2005/10/27  5096
362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3. 수,당때의 신선 엽법선(葉法善)  안원전   2005/10/14  5528
361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2.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작자는 손무(孫武)인가?  안원전   2005/09/26  5404
360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1.《장자(莊子)》는 장주(莊周)가 저작한 것인가?  안원전   2005/09/08  5186
359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20.《주례(周禮)》는 누구의 저작인가?  안원전   2005/08/18  5234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19.호필(湖筆) 창시자 몽염(蒙恬)과 복향련  안원전   2005/08/08  6050
357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18.한(漢)나라 초기 명신 장량(張良)의 8대손―장도릉(張道陵), 장천사(張天師)  안원전   2005/08/01  5753
35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17.)《서유기 西遊記》와《봉신연의 封神演義》에 등장하는 이랑신(二郞神) 이빙(李冰)  안원전   2005/08/01  5720
355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16.건륭(乾隆)의 딸은 신분이 낮은 공부(孔府)로 시집갔는가?  안원전   2005/07/14  6293

[1][2][3][4] 5 [6][7][8][9][10]..[16] [NEXT]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