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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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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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담론 348. 분명한 내막-서안사변(西安事變)의 수수께끼

    장슈에량(장학량. 張學良. 병음: Zhāng Xuéliáng. 영어 Peter Hsueh Liang Chang. 1901년 6월 3일 - 2001년 10월 15일)은 중국의 군벌이다. 랴오닝 성의 하이성 출신. 20세기 중엽의 중국 군벌.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에서 장쉐량이 장제스를 구금하고 제2차 국공 합작을 요구한 시안(西安) 사건을 주도하였다. 중국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쭤린은 펑톈(봉천:심양)군벌의 수장이었으며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1928년 장쭤린이 일본 관동군에 의해 폭사한 후, 장슈에량이 이끌게 된 봉계 군벌은 항일 성향으로 전환하였다./1931년에 관동군의 공격으로 만주 선양의 영향력을 잃었다.1936년 반공산군 공세를 위해 방문한 장제스를 시안(西安)에서 감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한 시안사건을 주도하여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다. 이 사건으로 10년간의 징역형을 받아 감금되었고, 출감 후 1949년에 대만으로 끌려가서 국민당 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다.장제스의 사후 1993년에 처음으로 대만 출국이 허용되어 미국으로 떠났으며, 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 거주하였다.  미국 하와이에서 101세로 사망한 '시안사변'의 주역 장슈에량은 '국공 연대 항일 투쟁'을 성사시켜 자칫 일본 주도로 흐를 뻔 했던 중국 근대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은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다음은 '중국 최대의 풍운아'로 손꼽히는 장슈에량 국부군 동북부 사령관의 주요연대기.
△1901.6.3 랴오닝성 태안에서 동북 군벌 장주어린의 맏아들로 출생.
△1916 위훵과 결혼
△1919-20 동북 3성 육군강무당의 제1기 포병과 입소. 훗날 육군 소장까지 진급
△1922 장주어린의 '동북 3성' 독립 선포 후 동북3성 육군 정리처 참모장 임명
△1928 장주어린, 선양 부근 일본군 설치 폭발물에 사망. 군벌 할거 국면 종식.
△1930 전국 육해공군 부(副)총사령관 승진
△1931.9.18 일본군 침략, 선양 함락
△1933 동북 3성 함락으로 부총사령관직에서 해임
△1934 허난성, 후베이성 등 3개 성 공비 토벌 부총사령관
△1936.12.12 시안사변 발생. 장제스 체포 후 '내전 중지 및 공산당과 연대한 항일전쟁' 설득, 성사시킴
△1937-1991 10년 징역 끝나 출감한 뒤 국민당 정권에 의해 반세기 연금
△1955 기독교 귀의
△1991 연금 해제 후 하와이로 건너감
△2000 부인 자오이디 사망
△2001.10.15 101세로 사망
(홍콩/연합뉴스)



리산을 하산하는 길에 1936년 서안사변때 장학량은 12월 모일 이른 새벽, 군대를 화청지로 몰고와 총격전을 벌이며 장개석의 5칸방에 들이닥쳤다. 장개석은 바로 뒤의 리산 중턱 바위 틈에 숨어있다가 수색조에 의해 잡혀나와 수하장군 장학량의 요구- 즉, 모택동의 공산당과의 싸움을 중지하고 모택동과 손잡고 일본군을 먼저 물리친다는 소위 국공합작에 서명하기로 역사적인 결단을 내린다. 물론 이것으로 장은 모에게 패배하고 대만으로 내 몰린다. 보다시피 장개석이 숨은 바위틈은 경사가 가파른 바위 위로 10여미터를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바위 틈위는 한 사람이 겨우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경사가  너무 가파르기때문에 지금은 쇠사슬을 설치해 관광객으로 하여금 한번씩 올라가 보도록 배려하고 있다. 쇠사슬을 잡고 올라가는 관광객이 보인다. 필자도  쇠사슬을 잡고 겨우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당시  쇠사슬없이 어떻게 올라갔을까 생각해 보니 뒤에 총을 들고 있으면 분명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긴 했다. 공산화가 되어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난 지금, 장개석의 입장에서 보면, 모택동을 먼저 몰아내야 했다는 장개석의 정치적 판단은 무척 옳았다. 그러나  증산도의 천지공사 내용이념으로 보면, 남북대치에 의한 휴전선 태극 설정과 금강산의  이북 의탁 공사를 생각할 것 같으면, 모택동의 대륙 공산화는 대국적인 순리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마르크스,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은 유대인 프리메이슨이 주도 했으므로 사실상 세운의 일꾼으로 프리메이슨이 그 핵의 자리로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모택동이 세운공사의 대국적 바탕마련 사명을 맡았기때문에 장개석은 모에게 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로보면, 서안사변은 천지공사 내용이념으로 보아도 한반도 문제에 있어 중대한 방향 전환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양옥환 양귀비의 목욕탕 바로 옆에 있는 1936년 12월 서안사변을 맞이할 즈음의 장개석이 집무했던 5칸방 정경. 장이 쓰던 침대와 이부자리까지 그대로 있다. 장개석은 일본의 대동아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같은 섬서성 북부 도시 연안에 근거지를 둔 모택동의 공산당과 치열한 혈투를 벌여 대륙통일에 있어 모택동보다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 모택동은 물자면이나 모든 면에서 국민당의 힘에 압도당해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국민당의 장학량으로 인해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 행운아다. 모택동은 공군력이 제압당해 연안의 깊숙한 계곡 아지트에 숨어 사는 신세였다. 장개석의 부하인 장슈에량(장학량)은  모택동과의 전쟁에만 열을 올리는 장개석에게 모택동과 힘을 합쳐 먼저 일본군을 몰아낼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되자 1936년 12월 모일 새벽에 군대를 이끌고 장개석의 5칸방 집무실을 습격 모택동과의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는 서안사변을 일으킨다. 이때 장개석은 새벽에 깜짝놀라 화청지 바로 뒤의 험준한 산위 300여 미터를 올라  겨우 혼자 숨을 수 있는 바위틈에 숨는다. 하지만 장학량이 거느린 수색조에게 몇 시간 만에 붙잡혀 나와 장학량의 요구대로 국공합작에 응하기로 결론을 내린다. 장학량은 부친인 동북삼성 최대군벌 장작림(위안스카이가 맡았던 군벌)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해 개인적으로도 일본타도에 더욱 관심이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장개석을 차후 대륙을 통일할 인물로 보고 대만으로 쫓겨갈때 함께 추종하지만 장개석은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린 그를 종신형에 처해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 총통 사후에나 석방되어 다 늙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죽을 때까지 대만 정보부의 엄격한 보안속에 사실상 연금생활을 했으며 회고록만 몇 박스의 테이프로 남긴 것으로 알려져 대만 정부에 의해 다각도로 검토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연안(延安)은 모택동의 빨치산 운동 본부이자 대장정을 시작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모택동은 연안에서 장개석은 서안에서 각각 전쟁을 이끌다 서안사변을 계기로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모택동은 그 틈을 타 열세를 만회하고 장개석을 대만으로 내몰게 된다. 중국 공산화의 일등공신은 역설적으로 서안사변을 일으킨  장개석의 휘하 장군인 장슈에량(張學良)이다. 황허가 누렇게 흐른다.  시내좌측인 사진좌측에 모택동이 숨어있던 양가령 빨치산 유적지 토굴부대가 있고 인근에 이후 지하에서 나와 건설한 조원 빨치산 유적지가 있다.중국의 유명한 신화서점이 필자 사진 뒷산의 바위산에 있는데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바위산에 빨간 페인트로 신화서점시발지임을 쓴것이 인상적이었다. 연안 1935년 10월 마오쩌똥(毛澤東, Maozedong), 조우언라이(周恩來, Zhouenlai) 등 지도자들이 중앙홍군(紅軍)을 거느리고 2만 5천리 장정을 마치고 샨시(陝西, Shanxi)성 북부에 이르러 중국혁명의 총 지휘부를 연안에 설립했다. 지금까지 연안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팔로군(八路軍) 총부 소재지 왕지아핑(王家坪, Wangjiaping),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유적지 훵황샨(鳳凰山, Fenghuangshan), 바오타샨(寶塔山, Baotashan), 양쟈링(楊家嶺, Yangjialing) 등 중국혁명의 유적지 360여곳이 남아 있다.

*증산도 천지공사의 핵인 금강산 문제를 풀려면 이북의 공산화와 모택동의 공산당 대장정과 연안의 공산당 투쟁과정을 보아야 하고 일본의 대동아 전쟁과 서안의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연안의 모택동이 서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장슈에량(長學良)이 일으킨 서안사변(西安事變)에 의한 국공합작이 엄청난 국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 뿌리는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에 있고 그 핵심은 프리메이슨 혁명(러시아)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프리메이슨 세력이 가톨릭 전제군주국을 쳐 없애기 위해 프리메이슨 유대인들이 주도가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이다. 서안사변이 왜 중요한가 하면 1936년 12월 서안 사변이전의 상황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의 세력이 막강해서 모택동은 연안의 계곡에 있는 양가령 혁명기지(후일 자원 혁명기지 보탑산 혁명기지를 전전한다)에 숨어 국민당군의 폭격이 심해 머리를 감히 들지 못할때였다. 모택동은 장개석에게 제공권을 빼앗긴데다  군사적 역량이 절대 열세에 있었을 뿐 아니라 외교권까지도 열세에 있어 지금도 당시 유일한 서방 여기자가 인터뷰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다. 섬서성이 황토고원이므로 계곡의 산을 파 토굴로 수없는 방을 만들어 거의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놓은 양가령 혁명기지는 당시 상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필자는 이곳을 가 보고 과연 장개석이 당시의 공군 전력으로 이 곳을 폭격하려 해도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때 모택동이 한 유명한 말이 바로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종이호랑이(老虎紙)라는 공갈용 메시지였는데 이 말은 혁명이 끝나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양가령 혁명기지 시절 모택동의 불굴의 의지를 가장 잘 표현한 말로 등장하곤 한다.

연안 공산당 본부 토굴 속에서 중미회담 마오,헐리 미대사 ,주은래



분명한 내막

서안사변(西安事變)의 수수께끼

서안(西安) 사변이 있은 지 반 세기가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항일(抗日) 대적 당시의 서안의 풍파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사건이 고위층과 연관되어 있어서 비밀에 부쳐져 있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몇 가지 내막은 분명히 알 수 있다.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張學良), 양호성(楊虎城) 두 명의 장군은 서안에서 장개석(蔣介石)에게 ‘병간(兵諫: 무력을 써서 군주에게 간함)’하여 내전 중지와 대외적 일치단결을 무리하게 요구하였다. 장학량과 장개석은 서로 형제라 칭하였는데, 장학량의 동북군(東北軍)은 장개석이 동북에 있을 때의 수문장으로 장학량은 장개석에 대해 군사적으로도 전부 듣고 수용하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정변을 일으켜 장개석을 감금하게 되었을까?

  1931년 9.18사변 이후, 동북은 점차로 일본의 심한 압제 속에 처하게 되었다. 동북 주둔군 중 최강의 군사적 역량을 자랑하던 장학량의 동북군은 장개석의 명령 아래 계속 퇴각하며 어떠한 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서북으로 철수만 하였다. 동북이 함락된 이후 전국의 형세는 극심한 긴장국면에 처했는데 이 때 장학량은 서북으로 퇴각하고 있었지만 항일 애국의 정신은 여전히 강렬하여 급기야는 장개석이 서북으로 군무 시찰을 나왔을 때 양호성 장군과 함께 그를 억류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이 사변에는 장개석 외에도 다른 20여명의 각 당정요원이 억류당했으며, 장개석을 협박하여 8개 항의 구국 주장의 승인을 받고 나서야 그를 석방하여 남경으로 돌려보냈는데 이 때 장학량이 몸소 장개석을 호송하여 갔다.

  장학량이 남경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은 이번 일이 십중팔구는 절망적이라 생각하고 장개석의 성격으로 보아 분명 장학량을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뜻밖에도 그를 평생 동안 연금하도록 할 뿐이어서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장학량 측근의 수행비서 및 지낭단(智囊團)의 말에 따르면 그의 부인 우풍지(于鳳至)의 비밀 전보 한 통이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원래 9.18전야에, 장학량은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동북에서 침략 전쟁을 강행할 것이라는 소식을 얻고 즉시 장개석에게 어찌 처리할 것인지를 물었었다.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답전을 보내 분명히 지시하길 “일본군대가 차후에 동북에서 어떠한 도발을 일으킬지라도 우리 측은 저항할 수 없으니 충돌을 피하도록 하게. 우리 형제가 순간적인 분노에 휘말려 국가 민족을 내버려 두고 돌보지 않아선 안 되네.”라고 하였다.

9월 8일 일본 관동군은 심양(沈陽)을 침략하고 북대영(北大營)을 포격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졌다. 장학량은 당시 북평(北平)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후, 재차 급전을 보내 장개석에게 알렸고 국민정부군사위원회에게서 되돌아온 답변은 “장학량은 지금 심양에 주둔하고 있는 동북군 장군 왕이철(王以哲), 영진(榮臻)등에게 절대 일본에 대항하지 않도록 엄중히 타이르고 반하는 자는 군법으로써 다스리라. 아울러 요녕(遼寧)에 주둔한 육공군은 계속 후퇴하고 일본군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라. ‘심양(沈陽)사건’은 중앙의 처리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장개석도 비밀리에 장학량에게 전보를 보내길 “심양에서 일본군이 행동한 것은 지방의 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최대한 충돌을 피하여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막게. 일체의 대일 교섭은 중앙의 처리를 기다리도록 하게”라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서 그는 또 장학량에게 친필 서신을 보내 대항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가 한 말은 영국은 이미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과 프랑스 등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 모두 중국이 일본과 맞서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국제 정세가 우리에게 아주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이밖에 국내 상황도 매우 복잡하여, 용운(龍云), 이종인(李宗仁), 백숭희(白崇禧), 진제당(陳濟棠), 그리고 중공세력이 모두 중앙에 대해 심각한 위협을 형성하고 있다. 동시에 장강(長江)에 또 대 홍수가 나고 천재지변도 돌볼 겨를이 없는데 전쟁을 치러낼 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서 지금은 잠시 물러남으로써 역량을 축적하는 방책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세력을 축적하고 ‘구국비전공약(九國非戰公約)’으로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며 국제 연맹이 합리적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하여 국제형세의 변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장학량은 일리가 있다고 여겨 반격 준비를 하던 군대를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그 후, 일본군의 침공이 있을 때 마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알려 지시를 받고자 하였지만 늘 대항하지 말라는 전문만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강산이 함락되는 것만을 묵묵히 지켜본 채 군대를 관내로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반년도 지나지 않아 동북 3성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였고 장학량은 맞서 싸우지 않는 장군이라는 불명예만을 안고서 할 수 없이 그 직위를 그만두고 출국 하였다.

장학량의 아내 우봉지(于鳳至)는 떠나기 전 일부러 장개석의 전문을 장학량에게 몸에 지니고 가라고 하였다. 런던에 도착한 후 그는 이 전문을 런던 HSBC은행의 금고에 보관하였다. 그들은 장개석의 변덕스런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이것으로 추후 장개석과 대치상황이 올 때 맞설 증거물로 보관하려 했던 것이다.

  서안사변이 평화적으로 해결된 후, 하응흠(何應欽), 진과부(陳果夫), 진립부(陳立夫), 당생지(唐生智), 장계(張繼)등은 모두 장학량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봉지가 이를 알고 즉시 장개석 및 서안사변의 산 증인인 송자문(宋子文)에게 전보를 쳐 상황을 설명하였다. 전보는 9.18사건 때 동북군이 저항하지 않은 것은 장학량이 위원장의 명령을 따라 행한 결과로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서안사변은 장학량이 지도자의 이름이 청사에 길이 남도록 하기 위해 항일의 열정이 솟구쳐 간언하게 된 것이라는 거였다. 전보에는 또 장학량은 장개석이 12월 12일 서안에서 양 군대의 장교와 사병 및 각계인사를 불러 모아 놓고 훈화를 할 때 과격분자로부터 위험에 빠질까 두려워 12일 새벽, 병간의 명목으로 장계석의 신상을 보호하였고, 후에 장개석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몸소 그를 남경으로 수행하였다고 썼다.

전문의 마지막에는 또 장학량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런던의 HSBC은행 금고에 보관해 놓은 9.18 이후 중앙 및 장개석이 동북군에게 내린 지령 및 문서 등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장개석은 이것을 두려워하여 장학량에게 잔혹한 수단을 감히 쓰지 못하였고 동시에 장학량의 신변 안전을 확보하라 명하며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장학량이 자유의 몸이 된 뒤 후환이 생길까 두려웠고 그가 자유를 얻은 후 우봉지(于鳳至)가 비밀 전보를 공포할까봐 두려워 감히 석방하지는 못하고 그를 인질로 삼아 연금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수행의 위험성을 익히 알면서 장학량은 왜 모험을 감행하려 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이는 충동에 의한 결정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심사숙고를 거친 후에 내린 판단이라 하기도 한다. 서안사변의 전 과정에서 언제 또 어떻게 장개석을 풀어주었는지에 대해서 각 측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데, 어떤 이는 12월 28일에 미춘림(米春霖)의 수행 아래 장개석을 호송하여 남경으로 돌려보내지기로 했으나 장개석이 남경에서 성탄절을 보낼 것을 요구하여 25일 당일 오후 장학량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독자적으로 몸소 장개석을 남경까지 수행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라 지적하였다.

또 다른 견해는 장학량이 이와 같은 중대한 조치를 경솔하게 결정할 리가 없으며 주도면밀한 숙고를 거쳤을 것이라 여긴다. 12월 19일 사변의 8일째 날, 장학량은 영국≪Reynolds newspaper(泰晤士報)≫기자 Fulasa에게 전보를 보낼 때 장개석과 남경으로 돌아가 국민들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만약 국민들이 그가 서안사변을 일으킨 것이 잘못이라고 비난한다면 기꺼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염석산(閻錫山)은 12월 17일 공상희(孔祥熙)에게 보낸 밀전에서 장학량이 일찍이 그가 있는 곳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자신이 직접 남경에 가서 사죄할 마음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주은래(周恩來)가 장학량이 직접 장개석을 남경으로 수행하려는 일에 대해 알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상술한 두 견해에 따라 두 가지의 가능성을 유추해 낼 수 있다.

하나는 주은래가 이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으며 25일 오후 세시 반에 장학량이 장개석 부부와 함께 공항으로 갈 때가 되어서야 장학량의 경호원 손명구(孫銘九)의 보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급히 공항으로 갔지만 장학량과 장개석은 이미 비행기를 타고 떠난 후였다. 또 하나는 주은래는 일찌감치 장학량의 생각을 알았으며, 장학량의 생각을 바꾸도록 별별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은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주은래 본인도 석방 전날 밤 중남해(中南海)에서 있은 연회석상에서 똑같은 의사를 표명하였다.(안원전의 21세기 담론)  


--中 서안사변 70주년 맞아 장쉐량 집중 재조명 | 중국-대만
2006/12/12 07:23
    (선양=연합뉴스) 조계창 특파원 = 중국이 최근 서안사변(西安事變) 70주년을 앞두고 이 사건의 주역이었던 장쉐량(張學良.1898.6∼2001.10)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서안사변은 1936년 12월12일 당시 만주에서 동북군을 이끌고 있던 장쉐량이  장제스(張介石)을 체포함으로써 공산당과 국민당이 힘을 합쳐 일본에 투쟁한다는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를 만든 사건을 말한다.    중국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10살 때 장쉐량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전기를 통해 공개할 정도로 그를 후하게 평가하고 있다.    장쉐량 재조명 작업의 테이프를 끊은 곳은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에 있는 장씨수부(張氏帥府)박물관.     이 박물관은 지난 6일부터 장쉐량유물전시회를 열고 그가 노년에 사용하던 유물 50여 점을 최초로 공개했다.    이들 유물 중 노년의 장쉐량이 식사할 때 사용하던 턱받이와 미키마우스 모자, 장난감, 인형 등은 한때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군인 장쉐량의 모습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10일 이 박물관에서 열린 서안사변 7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는 대만에서 오랜 연금에서 풀려나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 장쉐량이 아버지 장쭤린(張作霖)이 생전에  자신의 장지로 점찍어 놓았던 원수림(元帥林)에서 가져온 기와 1장을 받고 나서  귀향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공개되기도 했다.    장쉐량 연구로 성가가 높은 랴오닝성 정치협상회의 학술선전문학역사위원회  자오제(趙杰) 부주임은 이날 토론회에서 "99년 6월 친구를 통해 장쉐량에게 기와  1장을 전달한 적이 있었는 데 장쉐량은 그것을 받은 뒤로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장쭤린은 만주사변으로 동북이 함락되는 바람에 끝내 원수림에 묻히지 못했다. 바로 장쉐량은 이곳의 기왓장을 받아들고 맘이 무거워져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맘이 없어졌다"며 "지금도 이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시안사변 당시의 전후 상황에 대한 구체적 증언도 언론을 통해 공개돼 중국  역사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장쉐량의 경호부관 출신으로 1980년 9월에 사망한 런차오수(任朝樞)의 아들  화리(華理.75))씨는 11일 요심만보(遼瀋晩報)와 인터뷰에서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얘기를 토대로 "장쉐량이 장제스를 같은해 12월25일 석방하고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난징(南京)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두 사람은 따로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고 말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비행기에 태워 보내고 따로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향하는 자리에서 부하들에게 "동북군의 깃발은 너희가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고 당부한 것으로 그는 전했다.    랴오닝성 안산(鞍山)시는 사회 각계 인사의 모금을 받아  '장쉐량출생지기념관'을 보수해 오는 16일 새로 개관식을 가질 예정이다.    특히 이번 개관식에서는 120t짜리 화강암으로 만든 기념비도 함께 제막될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천하제일장(天下第一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념비는 높이가 9m에 너비가 2.5m, 기석의 높이와 너비만 각각 2.5m와 3m에 달해 화강암으로 조각된 비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꼽히고 있다.    안산시 관광국 관계자는 이와 관련, "장쉐량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아 기념비를 제작했다"며 "세계에서 가장 큰 화강암 기념비로 기네스북에도 이미 등재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phillife@yna.co.kr    blog.yna.co.kr/phillife(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6/12/11 15:15 송고





[今天歷史-4월 9일] 張-周 비밀회담

http://www.chinawatch.co.kr/chinawatch.php3?_Number=32246

1936년 4월 9일 국민정부 동북군의 장쉐량(張學良)과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샨베이(陝北) 푸스(膚施)에서 비밀회담을 갖고 내전을 종식시키고 항일전쟁에 협력하자는 데 합의했다. 장쉐량은 이 회담에서 자신의 재량이 미칠 수 있는 한에서는 공산군의 출로를 열어줄 수 있지만 기타 대부대의 이동을 허용하는 문제는 장제스(蔣介石)의 중앙군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밝혔다. 장쉐량은 당시 만주(滿洲)로 불리던 동북지방을 근거지로 한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아들로 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암살당한 뒤인 1928년 12월 29일 장제스의 북벌군에 투항했다. 장쭤린은 이해 6월 4일 전용열차로 이동하던 중 폭사했다. 국민정부는 장쉐량이 항복의 표시로 동북 전역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하자 그를 동북변방군 사령장관에 임명하여 자신의 군대를 계속 보유한 채 동북 3성에서 여전히 반 독립적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今天歷史-12월 29일] 東三省 청천백일기 게양만주사변으로 근거지에서 쫓겨난 장쉐량은 만주를 회복하기 위해 항일전에 나서고자 했으나 장제스는 ‘먼저 안을 안정시킨 뒤 외세와 싸운다’는 전략 방침에 따라 장쉐량에게 공산군 토벌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만주 출신으로 구성된 동북군은 장제스의 이 같은 전략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今天歷史-12월 29일] 東三省 청천백일기 게양장쉐량은 저우언라이에게 장제스가 일본에 항복한다면 그를 떠나겠지만 현재 상황은 장제스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공산군 점령지구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담 후 공산당은 동북군공작위원회를 설립하고 저우언라이와 함께 회담에 참석했던 리커눙(李克農)을 뤄촨(洛川)의 장쉐량 사령부에 파견하였다. 이 비밀회담 8개월 3일 뒤인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사변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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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kby54&folder=151&list_id=8263554
쑹메이링(宋美齡)은 시안을 폭격하려는 난징 정부의 결정을 보류시키고 1936년 12월 22일 시안으로 떠났다. 비행장에 나온 장쉐량(張學良)을 보는 순간 난징에서부터 굳어 있던 쑹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장제스(蔣介石)를 대신해 장쉐량과 옌안에서 급파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협상했다. 내전 중지, 항일전쟁 준비, 옌안을 지방정부로 인정, 장쉐량 신변보장과 장제스를 최고지도자로 추대할 것 등에 합의했다. 쑹이 온 지 3일 만에 모든 게 평화적으로 끝났다. 12월 25일 장제스는 석방돼 장쉐량과 함께 난징으로 돌아왔다. 성탄절에 장제스를 석방한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쑹의 성탄 예배 참석 때문이었다. 시안 사변이 난해하고 희극성이 강한 이유는 순전히 장쉐량과 쑹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난징까지 배웅한 장쉐량을 감금했고 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대만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호랑이를 풀어놓아선 안 된다”는 당부를 장징궈(蔣經國)에게 세 번이나 했지만 쑹은 장쉐량을 장제스 시신 앞에 인도해 작별을 고하게 했다. 장쉐량은 “두터운 정은 골육(骨肉)과도 같았지만 정견의 차이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았다”는 대련(對聯)으로 반세기에 걸친 은원을 정리했다.장쉐량은 쑹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 “쑹이 하루를 더 살면 나도 하루를 더 살 수 있다”고 술회했다. 88년 1월 장징궈도 세상을 떠났다. 뉴욕에 있던 쑹이 귀국해 국민당 원로들과 접촉했다.90년 6월 국민당이 마련한 장쉐량의 90세 축하연이 열렸다. 53년 만에 장쉐량의 모습이 공개됐다. 쑹은 불참했지만 당일 이른 새벽에 복숭아 9개를 장쉐량에게 보냈다. 참석했어도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나이도 94세였다. 두 달 후 이들은 교회에서 우연히 만나 10여분간 안부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다음해 3월 장쉐량은 미국으로 떠났고 6개월 후 쑹메이링도 뉴욕으로 돌아갔다.미국 컬럼비아대 장쉐량 자료실에는 쑹이 대륙 시절 직접 그려 선물한 폭하청천도(瀑下聽泉圖)가 제일 앞에 걸려 있다. 500여 통의 편지도 소장돼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쑹메이링과 주고받은 100여 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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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sahi.com/international/history/pdf/05_ko.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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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介石 연금한 西安사변 주역 張學良장군 회고담  


  
毛澤東, 문화혁명 안했으면 대만통일 실현
부친 張作霖, 살인 후 조선으로 도주
宋美齡 권유로 기독교에 귀의
29세때 동북군 사령관으로 중국 3분의 1 장악



중국의 제2차 국공(國共)합작을 가능케 했던 1936년 시안(西安)사변의 주역 장쉐량(張學良) 장군이 사건 발생 50년 만인 1986년 일가 조카들에게 자신의 인생역정과 관련해 최초로 심경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고백은 2001년 10월 중순 사망한 장장군이 자신과 관련한 어떤 사연도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한 장제스(蔣介石) 전 대만총통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장쉐량의 심경고백은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인 장유퀀(張友坤)이 당시의 녹음 테이프를 정리,12월12일의 시안사변 발발 65주년에 맞춰 주간 신문인 ‘난팡저우모(南方周末)’에 발표했다. 다음은 101세로 사망할 때까지 54년 동안의 연금과 10여 년간의 은둔을 되풀이하면서 감춰왔던 그의 가족사와 성장사 그리고 중국 현대사의 이면에 대한 회고를 요약한 것이다.    
    
  
  
나는 오늘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기독교적 역사관으로 말하겠다. 너희들의 큰어머니(장장군의 부인 자오이디·趙一荻 여사를 지칭)는 내 인생관에 중국의 민간신앙인 삼교구류(三敎九流)의 요소가 많다고 비난하나 어쨌든 기독교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할 참이다.

먼저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얘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국과 대만은 아직 통일이 되지 않고 있는데 일찍이 대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1966년 일어난 문화대혁명 직전이 아마 그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중국은 1958년부터 2년 동안에 실시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2선으로 물러나고 류사오치(劉少奇)와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마오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정국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반면 대만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진짜 형편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무려 10년을 이어간 문화대혁명을 자네들이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10년은 대만이 숨을 돌릴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하늘이 대만을 버리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의 조짐이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대만 대신 중국을 선택하려는 내부적 결단을 구체화하려는 움직임을 시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곧 이어 발생한 문화대혁명은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를 주자파로 매도해, 이런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때 만약 그런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다면 단언컨대 현재의 대만은 없다고 해도 좋다. 하늘은 대만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문화대혁명을 발동시켜 중국 대륙을 그토록 혼란으로 몰아넣었을까? 또 왜 류사오치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저우언라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을까? 답은 이미 나왔으나, 더욱 다행인 것은 그들이 이에 대한 과오를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 앞으로 30년, 40년 후에도 중국이 이처럼 노력을 기울인다면 대륙의 미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만을 수복하는 길은 현재처럼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이 아주 심란했다. (50년 동안 연금상태인) 나의 처지에 대한 신세가 한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대만의 정국이 나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 것이다.

어떤 국면이었는지 얘기해 보겠다. 당시 장제스 총통은 여전히 건재해 있었으나 연로했던 만큼 두 명의 가능성 높은 후계자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2인자인 천청(陳誠) 부총통과 첫째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행정원(내각에 해당) 부원장이었다. 이중 천부총통은 야심이 정말 대단했다. 언제나 자신이 장총통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겠다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마음이 초조해지면 장총통에게 빨리 자리를 물려달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총통께서 이미 연로하셨으니 이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그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그런 상황이 자주 있다보니 장징궈는 나에게 비밀을 지켜달라면서 “만약 어느날 부친이 돌아가시면 나는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천부총통의 야심으로 미뤄볼 때 아마 부친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자신에게 자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같았다.
  
  
  
陳誠 부총통의 죽음  

아,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사람의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마도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때(1965년) 묘하게도 천부총통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만약 천청 부총통이 건재한 상황에서 장총통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그가 후계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고 대만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국민당은 즉각 옌자간(嚴家) 행정원장을 후임으로 선출했다. 옌자간은 인간성이 호방하고 온건해 천부총통처럼 야심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당연히 후임 행정원장의 자리는 부원장인 장징궈의 몫이 됐다.

천부총통이 사망한 후 장제스 총통도 몇 년 동안 노환으로 앓아 누웠다. 그가 수년 동안 앓아 누웠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행정원장으로 경험을 쌓은 아들 장징궈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는지에 대한 교육을 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얘기다. 결국 장징궈는 이 동안 당·정·군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확실히 배웠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 동안 국가를 관리하고 실력을 연마할 기회를 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장총통과 천부총통의 죽음이 순서가 바뀌었다면 이런 국면은 그리 쉽사리 오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심 아들 장징궈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에게 국방부장(국방부장관)과 경제위원회 주임 등의 직책을 맡기고 교육시킨 장총통의 의중은 결국 성공했다.

이후 십수년 동안 장징궈 총통은 선친과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나름대로의 업적을 남겼다. 그가 선친의 단점을 모두 다 간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고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대만을 통치하는 데 적합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자신이 상당한 권력을 위임한 능력 있는 참모들이 많았다. 예컨대 쑨윈쉬안(孫雲璇) 행정원장 같은 인물이 그랬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럴 수는 없다. 대만 총통이 되고자 했던 천청 부총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계략을 가지고 자신의 비원을 실현시키고자 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비원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이런 유사한 예는 대륙에도 있다. 장칭(江靑)이 대표적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전략과 지략으로 대륙을 휘둘렀는가. 그러나 결국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나.
  
  
  
나의 부친 張作霖은 조선으로  

이제 내 얘기로 좀 돌아가보자. 나는 1901년생으로 마차에서 태어났다. 기이한 일이나 아마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다. 이상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낳자마자 젖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모유를 먹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가난했음에도 우리집에서는 유모 한 분을 고용했다. 무려 40세가 넘으신 분이었다. 생각해보라! 이런 분의 젖이 오죽했겠는가. 이러니 어릴 때부터 몸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어느 의사가 나에게 몸이 아주 안 좋다고 했는데 나는 당연하다고 대답해줬다.

나의 부친 장쭤린(張作霖) 장군은 이때 사람을 죽이고 조선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부친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가서 청나라의 군인이 됐다. 부친이 군문에 들어선 계기가 아닌가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애국적인 인물이었다. 아마 16세 때쯤인가 싶다. 대총통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과 치욕적인 21개조 조약을 맺었다.

이는 정말이지 망국조약이었다. 우리 집안의 근거지인 동북3성 역시 끝장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울분이 치밀었다. 이런 울분에다 몸까지 좋지 않았으니 탈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급기야 피를 토하고 드러눕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영국인 의무대장을 불러 치료를 맡겼다. 그는 나의 증세를 잘 아는 듯 고민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편히 지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표를 한 장 주면서 강연을 듣고 오라고 했다. 톈진(天津)에 있는 난카이(南開)대학 장보링(張伯笭) 총장의 강연이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요지의 강연이었다. 나는 그의 강연에 신선한 감명을 받았다. 그와 교류하면서 점점 내 인생의 지향점이 드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본래 나는 의학을 공부하려고 했다. 그게 애국광이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유난했던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수차례 번민 끝에 나는 미국으로 가서 의학을 배우기로 했다. 지금의 선양(瀋陽)인 당시의 펑톈(奉天)에는 기독교청년회라는 것이 있었다. 장총장의 강연도 그곳에서 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프라이드라는 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내 계획에 흔쾌히 찬성을 표시하면서 3등 배표를 살 수 있는 70달러를 건네줬다.
  
  
  
“나는 지모가 대단했다”  

나는 부친이 반대할 것 같아 몰래 도망가려 했다. 이때 독일 유학생 출신이자 나의 영어선생인 천잉(陳英)이라는 분이 아이디어를 줬다. “부친에게 군사학을 배우러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하게. 부친은 자네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니 보내주실 걸세”라면서. 나는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즉시 부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웬걸, 부친은 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천선생이 다시 나에게 다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에 펑톈에 설립된 강무당(講武堂·오늘날의 사관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보라는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틀림없이 미국유학을 보내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강무당 입학을 요청했다. 그러자 부친은 “좋다. 우리 부대의 대대장을 맡으면서 다녀라. 졸업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겨우 20세의 나이에 아버지 부대(동북군 군벌)의 대대장이 됐다. 이후 미국 유학은 진짜 물 건너갔다.

군대에서 나는 한마디로 승승장구했다. 20세 중반에 27사단장이 됐고 군벌간의 전투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아버지가 일본군의 손에 의해 돌아가신 후인 29세에 동북군 사령관으로 승진한 것은 너희들도 잘 아는 일이니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다.

자랑 같지만 나는 지모가 대단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했다. 너희들은 내가 지금 웃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나에게 무슨 특출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장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의 권유로 믿게 된 하느님이 정해놓으신 일이다.

올해 나는 86세다. 정말 많은 일을 봐왔고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것들이 다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당시 무솔리니의 권위는 대단했다. 나중에 전범으로 잡혀 총살형을 당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시 내 젊은 시절로 돌아가보자. 나는 28~29세에 이미 천하의 전권을 장악했다. 사람들이 만약 내 역사를 쓴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동북군 사령관 겸 전국 육해공군 부총사령관이자 70만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산둥(山東)·허베이(河北)·산시(山西)성을 총지휘한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겨우 29세의 나이에 슈퍼맨이 되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도 아니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던가? 마찬가지로 아니다. 이 말은 내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지금까지 살게 될지는 정말 꿈도 꾸지 못했다. 때문에 노는 것과 식도락을 즐기는 쪽으로 유달리 신경을 많이 쓴 편이었다. 중국의 3분의 1을 내 손안에서 주무르기도 했다.

내가 원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일본인들이 나를 없애려고 그토록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의 회유  

일본인들은 왜 ‘9·18사변(1931년 일본 관동군이 장쉐량의 근거지인 펑톈을 점령한 사건)’을 일으켰는가. 바로 나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조국을 침략하기 위해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전략은 다른 게 아니었다. 다른 장군들에 대해서는 별로 욕을 하지 않고 나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모욕하고 온갖 유언비어를 다 만들어냈다. 심지어 가짜 사진까지 조작해내 나의 권위에 상처를 입히려고 했다. 당시 내가 동북지방의 중심세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려 했고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일본의 회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내가 동북지방의 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장제스 총통의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와 합작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아마 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폭사당한 후였을 것이다. 그들은 히야시라는 인물을 파견해 조문을 했다. 그는 주중 일본공사로 나중에 일본에서 승승장구해 대신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아무튼 나는 무척 슬펐으나 웃으면서 그를 맞았다. 히야시는 나와의 대화에서 나를 자신들의 괴뢰로 만들겠다는 흉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연히 그것은 말도 안되는 제의였다. 그러나 나는 히야시에 대해서는 정말로 경외의 마음을 가졌다. 몸을 던져 절을 하고 싶을 정도로 유능하고 설득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는 결코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후 각종의 준비 끝에 나는 난징정부와 합작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당황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나를 여전히 30세 이전의 아이로 생각하고 나를 속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나의 이같은 전략은 1936년 12월12일 시안에서 장총통을 체포, 항일전쟁을 요구했을 때도 발휘됐다. 장총통은 나를 믿었으나 나는 그의 예상을 깨버리는 일대 용단을 내리고 구국전선에 내 몸을 던졌던 것이다.
  
  
  
▶ 제2차 국공합작 계기를 제공해준 시안사변  

1936년 12월12일 발생한 시안사변은 한마디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항일을 위해 장쉐량이 일으킨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장제스 주도의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해 무려 5차례 토벌작전을 전개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고삐를 더 죄면 2만5000리 대장정에 나선 공산당의 홍군을 섬멸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때문에 장제스의 국민당은 각종 군사도발을 일삼으면서 호시탐탐 전면적인 중국 침략을 노리던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견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일반 민중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내전보다는 항일을 갈구하고 있었다. 산시(陝西)성 홍군 토벌을 위해 시안에 주둔중이던 동북군 사령관인 국민당 청년장군 장쉐량은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항일이 내전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이런 자신의 생각을, 토벌을 격려하기 위해 12월4일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에게 눈물로써 토로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의 건의를 묵살했다. 결국 그는 12일 새벽 부하 장군인 17로군의 양후청(楊虎城) 사령관과 전격 군사행동에 나서, 장제스의 숙소인 화칭츠(華淸池)를 습격해 그를 체포했다. 이후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 마침내 국민당은 장제스를 살리기 위해 장장군의 요구대로 공산당과 협상을 단행, 12월24일 국공내전 종식과 항일을 선언했다. 1924년에 이은 제2차 국공합작이 출범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장쉐량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하극상을 일으킨 죄인이라는 생각에 장제스를 따라 난징으로 간 후, 54년의 기나긴 연금과 10년에 걸친 미국 은둔생활을 시작하는 긴 여정에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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