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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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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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43 대륙 향토사료로 뿌리가 동이계인 동이 토가족을 들여다 본다.5-중원 동이족 문화의 영향





중원문화의 영향

중원문화는 토가족문화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첫 번째로, 토가족은 이 지역의 한족사람들을 융합한 후에 형성된 단일민족으로 토가족 문화 중 한(漢)문화의 인자가 있다.(지나 사학자는 파인의 문화가 동이족 태호복희의 후예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나한족의 영향을 받았다고 비튼다. 한족이란 용어자체가 상고엔 없었다:안원전)

두 번째로, 토가족의 선민인 파인은 풍부한 한문화를 흡수했다. 파문화는 형성 발전과정 중에 일찍이 중원문화의 중요한 영향을 받아 중원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파문화는 끊임없이 풍부해졌다.(물론, 중원문화도 파문화의 수많은 성분을 흡수했다.

토가족 선민인 파인의 문화가 한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에 관해서는) 고고학계가 상세하고 확실한 자료로 증명할 수 있다. 악서(鄂西) 장강 연안에서 발견한 하상(夏商)시기의 파문화 유적에 상당하는 도기군으로부터 전체적으로 관찰해보면, 이러한 문화유적은 아마도 악서 원시문화의 기초 위에서 중원 이리두(二里頭)문화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온 일종의 새로운 문화인 것 같다.

파 문화 유적에 분포하는 의도(宜都: 지성(枝城)), 지강(枝江), 당양(當陽) 등지의 몇몇 유적 중에서도 상(商) 문화의 요소를 적잖이 포함하고 있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의도(宜都)의 청강하(淸江河) 하류에서는 상대(商代)의 청동 뢰(罍: 고대의 술 항아리)가 발견되었고, 의창(宜昌) 중보도(中堡島) 맞은편 기슭의 장강 북쪽 기슭에서는 상대의 대구존(大口尊: 큰 주둥이 술잔)과 도가니(坩堝) 등의 도기조각(陶片)을 수집했다. 이는 파 문화 유적의 분포지역과 비슷할 뿐 아니라 중첩현상도 나타나는 것이다. 무산(巫山) 대창패(大昌壩) 유적지에서는 은허(殷墟) 만기(晩期)의 청동 술잔(尊)이 출토되었다. 은허의 갑골문 중 다섯 조각에서 ‘파방(巴方)’을 언급하고 있어 파 문화와 상 문화가 관계를 형성한 적이 있음을 설명한다.

기원전 11세기에 파인은 주 무왕이 주(紂)를 정벌하는 전쟁에 참가하여, ‘파의 군대가 용맹하고 예리하며 가무로써 제압했다.(巴師勇銳, 歌舞以凌)’. 주 무왕 혹은 주공(周公)이 ‘대무무(大武舞)’를 만든 것은 바로 파인이 주(紂)를 정벌한 전쟁에 참가했을 때 ‘가무로써 제압’했던 동작에서 기원한 것이다. 주(周) 시기에 파인은 주 조정의 제후 집회에 참가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파인은 주 조정과 교류하는 중에 중원문화를 흡수했고 또한 발전했다. 투동(渝東)의 소화(昭化), 파현(巴縣), 부릉(涪陵), 풍도(豊都), 봉절(奉節) 등지에서 출토된 파식 유엽형검(巴式柳葉形劍)은 중원지역의 서주(西周) 초기의 고분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파촉(巴蜀)으로 전입된 후 일종의 독특한 지방적 풍격을 지닌 무기로 발전되었다. 상서, 악서, 투동, 검동북에서 자주 보이는 호뉴순우(虎鈕錞于)도 춘추시기의 파인이 중원의 순우의 이러한 물질문화 요소를 받아들인 후에 발전하고 제조된 것이다.

이밖에 파와 진(秦)은 비교적 빨리 연계가 발생했다. 기원전 632년(진 목공(穆公) 28년)에 진은 백리 떨어져 있었는데 “발교(發敎)를 봉하여 파인이 조공을 바쳤다.” 기원전 611년(노(魯) 문공(文公) 16년)에 파와 진, 초는 연맹을 결성하여 공동으로 적을 멸하였다. 진과 파의 이러한 정치관계는 필연적으로 물질문화의 교류를 가져왔다. 파현, 소화, 부릉 등지의 파인 고분에서 출토된 창구심복원저부(敞口深腹圓底釜: 주둥이가 넓고 배가 깊고 둥글고 낮은 형태의 가마솥) 및 칠합(漆盒: 옻칠한 통), 채칠반(彩漆盤: 옻칠한 채색 쟁반), 칠렴(漆奩: 옻칠한 경대)은 진 문화 혹은 중원문화의 영향을 현저히 받았다. 진(秦)이 파(巴), 촉(蜀), 초(楚)를 멸하는 과정 중에 파에 대해서는 회유정책을 펴고, 촉과 초에 대해서는 또 다른 종류의 정책을 펴 그 물질문화가 비교적 크게 파괴되게 하였으나 파의 물질문화는 오히려 가장 많이 보존되었다.

소화(昭化) 포륜원(寶輪院) 선관장(船棺葬)의 시기는 파현(巴縣) 동순감(冬筍坎) 선관장의 만기(晩期)와 엇비슷하다. 즉 진이 파촉을 멸한 후의 고분인데 가장 늦은 것은 서한(西漢) 초기까지 갈 수 있다. 그 매장방식이든 아니면 기물(器物)이든 모두 기본상 동일한 문화 내포를 표현했고, 사천(四川) 달현시(達縣市) 서한(西漢) 목봉묘(木奉墓)에서 출토된 도기와 동기 그리고 병기는 부릉(涪陵) 소전계(小田溪)의 전국(戰國) 토갱묘(土坑墓)에서 출토된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파문화가 특색 있는 민속과 풍속을 지닌 것에 이르러서 중원의 문인에 의해 ‘만이(蠻夷)’의 풍속의 일부분으로 여겨진 것은 그 유지 기간이 더욱 길다.

월(越), 복(濮) 문화의 영향



선진시기에 월과 복 두 민족도 일찍이 오늘날 토가족 지역에서 활동했는데, 비록 후에 월인과 복인의 주체가 토가족 지역에서 퇴출되었을지라도 월, 복문화의 토가족 지역에 대한 영향은 결코 완전히 소실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량의 월, 복인이 이주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소수의 월, 복인이 토가족 지역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기타 부족과 융합하여 토가족이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복인도 토가족의 근원 중 하나인 것이다. 월, 복문화는 토가족 문화에 대해 일정한 영향을 생성했다.

1. 월, 복인의 토가족 지역 및 그 문화 유적으로의 진입.



복월의 거주지는 지금의 호북 자귀(秭歸)에서 사천 봉절(奉節) 일대까지를 중심으로 하는데, 그들은 ‘귀이(歸夷)’라 불리기도 하고 ‘복(濮)’이라 불리기도 했다. 월, 복은 일찍이 파인과 뒤섞여 거주하거나 인접하게 살아, 서주(西周) 초기에 파, 복, 등(鄧), 초는 주실(周室) 왕기(王畿)의 남쪽에 거주했다. 춘추(春秋) 전기에 파, 복은 모두 강한(江漢) 유역에서 활동했다. 후에 복의 활동 중심지역은 점차 서남쪽으로 이동하였고, 파의 활동 중심지는 서쪽을 향해 파중(巴中)으로 들어갔다. 이 때문에 상당히 긴 시간 내에 월, 복 및 그 후예인 료(僚), 양(儴), 단(蜑) 등의 민족 문화는 파문화와 함께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었다.

월인이 창조한 기하형(幾何形) 인문도(印紋陶: 도장무늬 도기)는 상(商)대 중기의 반룡성(盤龍城) 유적지 속에서 일찌감치 발견되었다. 이것은 강한(江漢) 지역에서 출현한 후에 또 지금의 삼협(三峽) 지대에 도달했다. 고고학자는 의창(宜昌) 백묘자(白廟子) 상주(商周) 유적지에서 기하형 인문경도편(印紋硬陶片)을 채집했으며 중보도(中保島) 유적지의 상주 문화층에서 비슷한 도편(陶片)을 발견했다. 이는 월문화가 매우 일찍 파인 활동의 중심지대로 도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투동(渝東) 봉절(奉節), 무산(巫山), 무계(巫溪), 운양(云陽)과 악서(鄂西) 파동(巴東), 자귀(秭歸), 의창(宜昌), 래봉(來鳳), 은시(恩施), 이천(利川), 건시(建始) 그리고 상서(湘西) 보정(保靖), 영순(永順) 등지의 강가와 하천에 연한 벼랑 위에서 일찍이 여러 곳의 현관장(懸棺葬) 혹은 애장(崖葬)을 발견했다. 봉절, 무산현 경계의 몇몇 현관장에서 전국시기의 파식유엽형검(巴式柳葉形劍)과 장식 혹은 도안이 들어간 초나라 칠기 나무빗을 발견했다. 현관장은 고대 월, 복 민족 및 그 후예인 료(僚), 양(儴), 단(蜑)인이 실행했던 옛 매장 제도의 하나다.

현관장의 매장 도구 중에도 역시 선관(船棺)이 있으나, 파인의 선관장법(船棺葬法)과 근본적으로 달라 파인의 선관은 지하에 매장하는데 비해 월, 복의 선관은 벼랑 위에 두었다. 천동(川東)의 몇몇 현관장에서는 파인의 유물이 발견된 것은 결코 파인이 현관장을 행했던 증거는 될 수 없으며 단지 양(儴), 단(蜑) 민족이 파인의 물질문화를 흡수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남제서 상서지(南齊書 祥瑞志)》의 기록에 따르면, 제(齊)나라 건원(建元) 원년(479년)에 부릉군민(涪陵群民) 전건(田健)이 거주지의 바위 사이에서 순우(錞于)를 발견했는데, “단인(蜑人)은 이를 신물(神物)로 여겨 사당에 모셨다.” 전국시대 이래로 투동에서 발견된 순우는 파인의 기물로 단인은 신물로 여겨 사당에 묘셨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월, 복의 후예의 하나인 단인의 파인의 물질문화에 대한 수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파와 월, 복은 모두 남방 민족으로, 처한 지리환경이 비슷하고 수많은 지역에 섞여 혼합되어 거주했다. 이로 인해 문화 상 비교적 많은 교류가 있었다. 파인의 고분 중에 자주 출현하는 종류인 원공절요월(圓銎折腰鉞: 자루구멍이 둥근, 허리 잘린 도끼)과 원인월(圓刃鉞: 둥근 날 도끼) 중에는 위쪽에 파의 문자부호가 주조되어 있는 것이 있다. 월(鉞)은 사실 월인 특유의 병기(兵器)다. 파인은 월을 사용한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비록 파인의 월과 월인의 월은 형식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 사이에는 심후한 문화연원관계가 있다.

파인은 나무를 받침대로 지탱하여 거주하는데 이름은 간란(干蘭)이다. 월, 복의 후예 료인(僚人)도 간란에서 거주했다. 《위서(魏書)》에서 말하길, 양익(梁益)의 사이에 료인이 종류가 매우 많아 산과 계곡에 흩어져 거주했다. “수적목(樹積木)에 의지하여 그 위에 거주하는데 이름을 간란이라 하였고 간란의 크기는 그 가구의 인원수에 따랐다.” 지금의 사천 기강(綦江)에서 생활하는 ‘남평료(南平僚)’인도 역시 간란에서 거주하여, “사람은 이층에서 거주하고 사다리로 올라갔는데 이름을 간란이라 했다.”

파인은 강과 하천가에 거주했다. 배를 잘 띄우기로 유명했고, 월인도  배를 다루는 기술에 능해 “수행(水行)으로 산에 거하여 배를 차(車)로 삼았다.” 《회남자 숙진훈(淮南子 俶眞訓)》에서는 ‘월영촉정(越舲蜀艇)’으로 불리는 게 유명한데, 사실상 파가 촉에 비해 더욱 ‘부주(浮舟)’에 능했다. 파와 월, 복 사이의 문화상 교류는 훗날 이 지역의 문화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2. 월, 복 문화의 토가족 문화에 대한 영향

월, 복 문화는 파문화에 대한 상술한 영향 외에 토가족 문화에도 중요한 영향을 주어 지금의 토가족 문화 중 수많은 요소가 월복문화와 관계가 있다. 즉, 토가족 문화의 몇몇 특징계통은 월복(越濮) 문화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다.

(1) 복인(濮人)의 결혼 풍속과 토가족의 결혼 풍속

복인의 결혼 풍속에 관련된 기록은 고문헌에 비교적 드물게 보인다. 하광악(何光岳) 선생은 “옛 복인의 자유연애는 남녀의 노래를 통해 쌍쌍이 야반도주하던 유풍이 아직 이 지역에 남아 있어 춘추시대에 이런 사랑노래는 화하인(華夏人)에게 음탕한 *‘상간복상(桑間濮上)’의 노래로 여겨졌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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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광악(何光岳) : 《남만원류사(南蠻源流史)》, 강서교육출판사(江西敎育出版社) 1998년, 제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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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면(呂思勉) 선생도* 복인의 후예가 거주하는 지역은 “공도(邛都)의 습관은 한가롭게 노닐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는 대략 장가가(牂牁可)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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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면(呂思勉) :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중국대백과전서출판사(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87년판, 제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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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가를 부르는 토가족 아가씨)(노래를 불러주는 토가족 총각)

라고 생각했다. 상술한 두 선생의 고증은 복인의 혼인 습관의 최대 특색이 노래를 매개로 하는데 있으며 종종 산과 들에서 서로 평생을 약속하기도 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러한 원시적인 자유연애와 한(漢) 민족 고대의 ‘부모의 명령이 중매의 말’이 되던 결혼 풍속은 뚜렷이 다른 것이다.  토가족의 옛 혼인 풍속은 복인의 유풍을 계승했다. 줄곧 건국 전까지 이어져 호북의 은시(恩施),  선은(宣恩), 학봉(鶴峰)의 경계 지역에서는 매년 봄가을이 되면 ‘여인회(女兒會)’를 열었고, 상서의 영순(永順), 용산(龍山), 보정(保靖) 등지에서는 오히려 ‘조총회(挑蔥會)’가 있었다. 아가씨들이 무리를 이루어 예정된 산과 들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밥을 지어먹고, 노숙하며 젊은 남자들과 노랫소리로 서로 연애하고 밀애하는 속칭 ‘방창(放敞)’은 어떤 사람도 간여할 권리가 없었다.

청(淸)나라 사람의 ‘죽지사(竹枝詞)’에 이것에 대한 기록이 있다. “영산(映山)에 붉은 색을 놓느라 여인은 바쁘고, 고개 위에서 총채(蔥菜)를 메고 향을 맡는다. 노래 부르며 나뭇잎에 기대어 서로 연애하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음을 불어 길을 막고 사람의 마음을 녹이네.” 이러한 노래를 매개로 한 결혼 연애 풍속은 명청(明淸) 즈음에 더욱 성행했다. 건륭(乾隆) 《영순부지(永順府志)》권2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토사(土司) 지역이 만산(萬山) 중에 처하면,……일반적으로 경작하러 출입할 때 남녀가 동행하며 친하거나 소원함에 구속받지 않았다. 길에서 서로 만나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음란한 노래를 매개로 하여, 비록 자신의 남편이 앞에 있어도 두려워서 피하지 않았다.” 아마도 옛날 지방지의 작자는 토가 부락의 혼인 연애 풍속에 대해 과장되고 추하게 묘사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만 노래를 매개로 하는 복인의 혼인 연애 풍속의 유풍이 확실히 토가족 지역에 전승되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http://www.cn-zjj.com/lmjx/zn/jd/mdh.htm
*동이족의 봄 꽃놀이를 노래한 <시경>의 주남, 소남의 뽕나무를 배경으로 한 남녀상열지사의 국풍은 양자강 유역에 있던 동이 9려족의 각 계파가 즐겨 부르던 소위 남풍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우스갯얘기같지만 지금에 와서 현대의 <뽕>이란 남녀상열지사의 3류 영화도 바로 동이족 고유의 주 전공 잠사(누에실크)와 직결되어있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9가(九歌) 자체도 9이(九夷), 9주(九州), 9하(九河:곤륜에서 발원), 천유구중(天有九重:「회남자」), 구소(九韶:제순의 음악)를 상징하고 있지만 중국문화의 뿌리를 차지하고 있는 「초사」가 바로 동이족의 정신세계에 줄을 대고 있으며 바로 「시경(詩經)」의 주남과 소남의 국풍편이 「초사(楚辭)」의 이소(離騷)와 줄을 대고 있는터다.  양자강 유역은 전통적으로 동이 9려족과 형오, 백월, 초, 묘요계 등 동이 9족이 둥지를 틀고 황하의 소위 서하족(주)보다 더 높은 문화를 열어가고 있었다. 이는 후일 양자강 경덕진의 월도요라든가 주남과 소남의 국풍 시가의 전통을 이어받은 굴원의 초사가 후일 당나라 두보에 이어진 것을 보더라도 그 문화의 깊이를 알 수 있으며 비단이 양자강 유역의 동이 9족에서부터(래이족) 비롯해 오늘날까지도 양자강 유역인 항주 소주에서 가장 발달한 것 만 보아도 이를 증명할 수 있고 동이 9족의 전통을 이은  비단으로 짠 고려의 종이라든가 초(楚) 나라의 특수한 문화에 영향받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일파의 도가(道家)사상을 보더라도 동이족에 바탕을 둔 이 곳문화의 우수성과 특성을 읽어낼 수 있다.(안원전)

(2) 복인의 장례 풍속과 토가의 장례 문화

복인의 장례는 현관장(懸棺葬), 정상(停喪), 악상(樂喪) 등등과 같이 본래의 특색이 있다. 현관장은 관을 절벽의 중간에 놓고 돌에 구멍을 뚫고 나무말뚝을 박아 그곳에 방치하거나 혹은 절벽 위의 동굴 속에 두고 그대로 방치하여 풍화시키는 것이다. 정상은 사람이 죽은 후에 시체를 반드시 마을 교외의 산이나 들에 수 년 동안 안치시켜 놓은 뒤 다시 그 뼈를 절벽의 중간에 매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악상은 그 장례 의식을 말하는데, 가족이 슬퍼하지 않고 반대로 영전에서 북을 치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거워한다. 진(晉)나라 사람 원숭(袁崧)은 《의도기(宜都記)》에서 현관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의도산(宜都山)은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수백 장(丈)이 서 있는데, 어느 한 아궁이를 절벽 사이에 끼웠는데 보기에 길이가 수 척(尺)은 되어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홍수가 나면 사람들은 이 옆에 배를 정박시키고 불을 때서 밥을 짓는다. 고로 말하기를 아궁이를 절벽에 끼웠다(揷灶崖)고 했다.” 원숭이 말한 ‘아궁이를 끼웠다(揷灶)’는 것이 바로 옛 복인이 현관할 때 끼우던 나무말뚝이다. 당나라 사람 장작(張鷟)은 《조야첨절(朝野僉截)》에서 이 장례 풍속에 대해 상세히 서술했다.

“오계만(五溪蠻: 옛 복인의 후예, 지금은 토가족이 많음)은 부모가 죽으면 마을 밖에 그 시체를 방치하고 삼 년이 지나면 묻었다. 북을 치고 답가(踏歌: 무리를 지어 발로 박자를 맞추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중국 고대의 예술 형식)하며 친족들이 먹고 마시며 춤추고 놀며 한 달여 동안 관을 제작하여 강가의 높은 산 중턱에 감실(부처를 모셔두는 작은 방)을 파서 제사를 지낸다. 산 위에 굵은 밧줄로 매달아 중간부분까지 내려 더욱더 높게 올리는 것이 지극한 효라고 여겨 종신토록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처음 상을 치르게 되면 3년 동안 소금을 먹지 않았다.”

복인의 이러한 장례 문화는 토가족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보인다. 원(元)나라 사람 황민(黃閔)의 《원주기(沅州記)》에는 “진주(辰州) 숙포(淑浦)의 서쪽 40리에 귀장산(鬼葬山)이 있다. 그 중 절벽에 관이 있는데 멀리서 보기에 길이가 10여 장(丈)이 돼 보여 귀장(鬼葬)의 터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동치(同治) 시기의 《보정현지(保靖縣志)》에는 “선인목(仙人木), 현의 동북 6리 유향암(乳香岩) 강가의 절벽 위 동굴 입구에 나무상자 하나가 가로놓여 있는데 이름하여 ‘선인목’이라 했고, 오늘날에 이르러 배에서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고 했다.

민국(民國)시기의 《영순현지(永順縣志)》에도 역시 기록되어 있다. “선인관(仙人棺)은 남위주(南渭州)에 있고 관은 석벽에 매달려 있는데 그 연대는 알지 못한다.” 이 외에도 용산현(龍山縣)의 융두진(隆頭鎭), 상식현(桑植縣)의 용담평(龍潭坪), 장담평(長潭坪), 마합구(馬合口), 악서 파동(巴東)의 용선하(龍船河), 의창의 삽조애(揷灶崖), 천동(川東) 봉절의 회갑동(盔甲洞), 팽수(彭水)의 만년창(萬年倉), 수산(秀山)의 장서동(藏書洞) 등지에 모두 현관(懸棺)의 풍속이 있다. 특히 상식현의 용담평에 현관이 가장 많아 서른 세 무덤이 있다. 또한 춘추시기에서 민국시기까지 줄곧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복인의 장례 문화가 토가족 지역에 미친 영향이 매우 깊고 광범위한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토가족 사람은 또한 정상(停喪)의 풍속이 있었다. 게다가 예부터 지금까지 줄곧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수서 지리지(隋書 地理志)》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군(南郡), 청강군(淸江郡)의 만좌(蠻左)는 “처음에 죽으면, 즉시 시체를 중정(中庭)에 내놓고 실내에 두지 않으며, 염(斂)이 끝나면 산 속에 옮겨놓았는데 13년을 기한으로 했다.” 민국 초기까지 와서 토가족 노인이 사망하면 “염이 끝나면 산 속에 옮겨놓았는데 13년을 기한으로 했다.” 건국 초기에까지 와서는 토가족 노인이 죽으면 정상을 많이 하여 작게는 열흘에서 보름, 많게는 3년에서 5년을 기한으로 했다.

호병장(胡炳章)은 상서 상식(桑植) 죽엽평향(竹葉坪鄕)의 들판을 조사할 때, 기타 토가족은 사람이 죽은 후 염하여 관속에 넣어 마을 근교 산이나 들에 옮겨 넣고 초막을 하나 세워 그 안에 관을 두는 것을 발견했다. 가난한 집은 관 위에 거적 하나만 덮어 바람과 비를 막았고 2년에서 3년을 기한으로 한 정상이 많았다. 상서 용산현 토가인은 반년에서 1년을 기한으로 한 정상이 많았다. 용산과 이웃한 악서 내봉현의 토가인도 역시 정상의 풍속이 있었다. “종전에 토민(土民)은……정상(停喪)……등의 악습이 있었다. 개설(改設)이후, 토민은 근면하여 오늘날에는 모두 초박(草薄)하고 충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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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同治) : 《내봉현지․풍속지(來鳳縣志․風俗志)》권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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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상의 풍속은 토가족의 속칭 ‘요상(鬧喪)’, ‘도상(跳喪)’이라 하고, 토가어로는 ‘살이하(撒爾嗬)’라 한다. 당나라 사람 번작(樊綽)의 《만서(蠻書)》에는 “초상이 나면 북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노래는 반드시 크게 불러야 하고 대중은 반드시 껑충껑충 뛰어야 하는데, 이것은 반호(盤瓠) 백호(白虎)의 용감함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부모가 죽으면 북을 치며 답가(踏歌)하고 친척들은 한 달 여를 춤추고 놀았다.”

《수서 지리지(隋書 地理志)》에는 “좌인(左人)은……처음에 죽으면, 시체를 관사(館舍)에 두고 동네의 소년들은 각기 활과 화살을 들고 시체 주위를 돌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활과 화살을 끼우는 것이 요점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평생에서의 즐거웠던 일로부터 마지막에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대체로 지금의 만가(挽歌: 애도하는 노래)와 비슷하다. 노래는 수십 수가 모자라는데, 수의와 침구를 관에 모아 산림으로 보내어 별도의 숙사에 관을 안치했다.”라고 했다.

《대명일통지 형주부(大明一統志 荊州府)》에는 “북을 쳐서 제사지내고, 길게 소리 지름으로써 성쇠를 나타낸다.”고 했다. 건륭(乾隆)시대의 《진주부지 풍속(辰州府志 風俗)》권 40에는 “보통 초상(初喪)은, ……친족들이 친하던 친하지 않던 간에 모두 와서 밤샘을 했다.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며 아침까지 계속했는데, 이것을 뇨상(鬧喪)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치(同治) 《장양현지(長陽縣志)》에는 “……장례의식에 참관하러 온 여러 손님들로 붐비고, 큰 북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는데, 한 편에서 노래 부르면 군중이 화답하거나 고금을 문답하면 모두 패관(稗官)이 사실을 부연하여 말하였다. 이것을 ‘상고를 울리고 상가를 부른다.(打喪鼓, 唱喪歌)’라고 했다.”

광서(光緖)시기 중경(重慶)의 《수산현지(秀山縣志)》에도 “상가(喪家)는 제물을 차려 바치는데 슬픈 노래 가사를 읊고 사내아이는 소리를 길게 뽑아 노래를 유도한다. 산야(山野)의 소가구는 촌의 주민들과 목동이 북을 치며 맹가(甿歌)를 불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현관(懸棺), 정상(停喪), 악상(樂喪)의 복인 장례 문화는 거의 토가족의 모든 지역에 보편적으로 분포하고, 비록 시대의 변화로 인해 간략히 변이가 되었지만, 이와 복족(濮族)의 장례문화와의 연원관계는 여전히 뚜렷하고 명백한 것이다.  

(3) 복인의 추계(椎髻) 풍속의 전승

추계는 옛 복인과 백월(百越) 집단의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는(斷髮紋身)’ 풍속의 전형적인 분야다. 근대 사람 전서강(田曙崗) 선생도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복계(濮系) 민족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추계’ 혹은 ‘편발(編髮)’인데, 이것은 백월민족의 소위 ‘단발(斷髮)’ 혹은 소위 ‘전발(剪髮)’․‘피발(被髮)’ 혹은 ‘찬발(劗髮)’이라 불리는 것의 의미와는 크게 다르다. 이것은 백복(百濮) 민족과 백월(百越)민족의 커다한 *구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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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강(田曙崗) : 《‘료’의 연구와 중국 서남민족의 몇몇 역사문제(‘僚’的硏究與我國西南民族若干歷史問題)》, 《귀주민족연구(貴州民族硏究)》의 1981년편 《민족연구자료(民族硏究資料)》제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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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가족 지역은 옛날에 추계의 풍속이 성행하여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고 비녀를 꼽지 않았으며 고작해야 가끔 흰 천 혹은 파란 천을 머리에 덮어씌우거나 감싼 사람이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다 할지라도 개토귀류(改土歸流: 서남소수민족에 실시한 행정제도) 후에 나날이 쉽게 변하는 새로운 풍속이다. 건륭(乾隆)《영순부지 지리지(永順府志 地理志)》권 6에 인용된 명대의 《영순선위사지(永順宣慰司志)》에는 “남녀가 상투(髻)를 늘어뜨리고, 짧은 옷에 맨발을 하고 천으로 이마를 감싸 맸다.”라고 되어 있다.(이 상투 역시 민족원을 찾아내는데 연구해야할 분야다:안원전)

여기서 “상투를 늘어뜨렸다.(垂髻)”는 바로 추계를 뜻하고 “천으로 이마를 동여맸다.(以布勒額)”는 것은 추운 계절에 천으로 머리를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 둘러 매 추위를 이긴 것으로, 그 외의 시간에는 추계를 주 머리장식으로 했다. 명대의 악서 토가족 시인 전규(田圭)는 《풍양구호(灃陽口號)》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상투를 높이 나선형으로 둘러 질박하게 치장했고 짧은 셔츠에 소매가 반쯤 끌리는 옷을 입었고 남자들은 관료의 말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관광객을 맞이하여 도인(道印)할 뿐이다.”

청나라 사람 전문(田雯)은 《야서 춘등(野書 春鐙)》에는 또 “답가(踏歌)하며 뿔 술잔으로 마시며 만(蠻)의 재능으로 놀며 추계(椎髻)하고 꽃 방울을 울리고 노래하며 차를 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진주부지 풍속(辰州府志 風俗)》에서는 또 “마을 안에서 추결(椎結)하고……”“옛말에 오계(五溪)에 성오(猩鼯)가 함께 살았는데 추결의 습관이 있었고 웃고 떠드는 소리를 냈다.”라고 말한다. 토가족 사람의 이런 추계와 야장(野妝)의 습관은 옛날에 매우 성행했으나, 단지 후에 개토귀류(改土歸流)로 한(漢) 문화의 전파 형세가 매우 강해 추계의 풍속이 점점 소실되어 이후의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는 풍속으로 대체되었다.

(4) 복인의 간란(干欄)과 토가족의 거주문화



*신석기 시대 주요 도기제작방법 중 하나인 니조반축법(흙덩어리로 쌓아가며 만드는 법) 신석기 중기 앙소문화 시절 이미 출현. 그릇형 솥과 속이 깊은 항아리 심복관.모두 니조반축법으로 흙덩어리를 가공해 붙여 만든 것이다. 양자강 하류 상해 항주 소흥 부근의 동이족 유적지인 하모도 유적지의 간란식 방옥 구조도.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목구조 건축물이라 자랑한다. 양자강 하류는 하천이 그물처럼 얽힌 습한 지대로 아래는 돼지 등 가축을 기르고 사람은 위에서 생활했다. 건축은 기후와 풍토를 반영하므로 지금의 한반도 건축 습성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길이가 23미터이므로 70평 이상의 대단히 큰 가옥이다. 잔소리-대륙의 구석기 신석기 시대는 모두 동이족이 열었으니 이들 문화는 모두 동이족 문화다. 본인의 홈피에 실린 고고학 발자취는 모두 동이 제 족의 것이라 생각하고 일별하면 편하다.


복인은 황하 중․하류의 복수(濮水)유역에 거주하였는데, 지대가 낮고 습하며 소택(沼澤)이 많고 독사와 맹수가 많아 습기 와 독사 및 맹수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복인과 그 후예민족은 위진(魏晉)시기까지 “수적목(樹積木)에 의지하여 그 위에 거주했으며, 이것을 ‘간란’이라 했는데 간란의 크기는 *가족의 수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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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권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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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수적목(樹積木)에 의지한’ 누추한 거주지를 인류학자들은 ‘수옥(樹屋)’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지면에서 약 1,2장(丈)정도 높고 큰 나무의 굵은 가지 위에 집을 짓고 나무줄기 위를 여러 곳 움푹 파서 사다리로 했는데, 사람들이 이곳을 잡고 기어오르고 내렸으며 사다리를 이용해서 오르내리기도 했다. 당송(唐宋)이후 수옥은 지면의 ‘간란’으로 변천했다. “사람들은 집에 사다리를 놓아 올라갈 때는 사다리로 올라갔는데 이것을 간란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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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 두우(杜佑) : 《통전 남평만전(通典 南平蠻典)》권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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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벼랑에 집을 지었는데, 각난(閣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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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환우기 창주(太平寰宇記 昌州)》권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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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간란 혹은 각란의 주택은 복인 및 그 후예민족의 주거문화의 일대 특색이다. 이것은 건조하고 통풍이 잘 되었으며, 안전성이 높아 보통 맹수와 독사가 위협하기 힘들었다.
토가족 거주문화도 마찬가지로 복인 문화의 유풍을 보존하고 있는데, 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식이 있다.:

(1) 수옥(樹屋).

이러한 주거 형식은 매우 원시적이어서 명청(明淸)이후에 토가족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거주형식을 채택하지 않았으나, 몇몇 매우 외지고 낙후된 산촌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가옥을 볼 수 있다. 광서(光緖) 《용산현지 산수지 팔면산(龍山縣志  山水志 八面山)》에 기록하기를 “수십 가구의 주민들이 거주하여, 나뭇가지를 걸쳐 이층집을 만들거나 혹은 나무 두 개를 배열하여 이것으로 출입문을 만들었는데, 벼랑이 끝나는 곳은 푸른 초목이 무성하게 바깥을 에워싸고 있어 울타리 역할을 한다.”라고 했다.

신중국 성립 후에 이러한 수옥은 임시성 주택이 되어 여전히 이어져 매번 추수할 계절이 되면, 토가인은 야생동물이 산지의 농작물을 손상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커다란 나무의 굵은 가지 위에 나뭇가지와 띠풀 등을 이용해 누추한 초가집을 지어 사람이 잠시 그 속에 살면서 농작물을 지켰다.

(2) 각란(閣闌).

각란의 건축특징은 ‘벼랑에 집을 짓는 것’이다. 즉, 주택을 벼랑의 측면에 짓는데, 높고 험준한 곳에 지음으로써 수재와 맹수로 인한 손상 및 무장 침입자를 막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옛날에 상서(湘西) 원강(沅江) 유수(酉水) 양 기슭의 토가족 백성들은 강가 벼랑의 중간에 주택을 많이 지었는데, 석벽에 가파르게 세워 대나무 사다리로 올라가 “기와가 비늘같이 늘어서고 산세의 높고 낮음에 따라 모래가 곱고 물이 맑았으며 누각은 물에 비춰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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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光緖) : 《용산현지 산수지(龍山縣志 山水志)》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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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이르러 이러한 벼랑 위의 각란은 비록 다시 볼 수 없지만, 유수 연안의 토가족 주민은 여전히 하안(河岸)에 집을 짓는데 아래는 나무기둥으로 지탱하고 주택은 나무기둥 위에 건축하며 강의 허공 중에 매달려 있어 복인의 유풍을 매우 많이 간직하고 있다.(산서성 항산(恒山)의 현공사라는 사찰도 각란(閣闌)에 속한다)

(3) 간란(干闌).

간란의 특징은 2층으로 분리되어 있어 사람은 위층에 거주하고 아래는 잡동사니를 쌓아 두거나 혹은 가축을 기르는 것으로, 토가족은 이를 ‘조각루(弔脚樓)’라고 칭했다. 이러한 나무 가옥은 산간의 절벽 옆에 짓거나 혹은 강가의 평야에 짓는데, 아홉 개의 기둥을 땅에 박고 대들보는 서로 마주 향해 관통하며 망루는 허공에 매달렸고 높은 처마는 위로 들렸으며 망루는 상하 두 층으로 나뉘어, 유일하게 가옥을 휘감고 있는 굽은 복도에는 공중에 매달린 나무기둥 한 줄이 있는데, 이 때문에 ‘조각루’라고 칭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토가족 백성 중에 비교적 부유한 사람이 이 가옥을 많이 지었다. “도시에 가까이 사는 주민들은 이층건물을 많이 지었는데, 위층은 거주하는 방으로 하고 아래는 물품을 저장하여 무역하는 장소로 썼다. ……산에 사는 사람은 논밭에 의지하여 초막을 짓고 벼랑 옆에 방을 두어 띠를 묶고 판자를 덮어 바람과 비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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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乾隆): 《진주부지 풍속지(辰州府志 風俗志)》권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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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람 전규(田圭)는 《복양구호(濮陽口號)》에서 “집집마다 물가에 벼랑 가옥을 지었는데 반은 길가에 있고 반은 떠 있으며 18세의 소녀가 문지방에 수를 놓고 정지된 배에 앉아 탄주(灘舟)를 넋을 잃고 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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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맹동하 풍경구는 호남성 상서 토가족 묘족 자치주 영순현 경내에 있다. 국가 삼림공원 장가계와 저명한 풍경구 천자산과 서로 인접해 있다.맹동하Click here!


봉황Click here!
猛洞河风景区位于湖南省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永顺县境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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