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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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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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2.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장강(長江:양자강)문명의 기치

염제능묘 본전 벽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장강(長江)문명의 기치
  

호남성 주주 박물관 관장 부연구원 조경장(曹敬庄)


  
잔소리;반도사관에 매몰된 국내 사학계에 대륙내의 동이족 상고사가 제대로 연구될 리 없다. 다음은 대륙 내 향토사료 중에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양자강 문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신농씨의 역사를 밝힌 향토사료 논문을 입수 번역 소개한다. 동이족 태호 복희씨의 황하문명이 상고시절 벼농사가 이식되기 이전의 수렵채취의 모권제 문명(정확히는 모권제와 부권제의 과도기)을 담보하고 있다면 양자강 문명은 신농씨에서 비롯한 벼농사 문명을 담보하고 있다. 양자강의 벼농사가 황하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으로 보면 황하 유역의 동이 핏줄 태호복희 문명과 역시 동이 구려족 출신 신농씨의 문명 양대 산맥이 상고 대륙사를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남북통일시대를 대비해 호금도가 직접 관여한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한중간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독립문제를 둘러싸고 이지스함 6척과 미사일을 포함한 첨단 무기를 대만에 팔아 잇속을 챙기려는 미국과 외교적 갈등관계가 지속되고 있으며 북핵 문제를 고리로 6자회담을 계기로 통일한국 이후의 대륙내 동북3성 소위 [헤이룽장성=흑룡강성],[랴오닝성=요령성], [지린성=길림성]내의 주요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동요와 북방영토 반환에 대한 가능성에 위협을 느끼고 중국 공산당내 최고위층까지 개입해 문제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다.

중국내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모국 대한민국 그것도 통일 한국을 가지게 될 조선족은 지금도 전 세계로 다니며 소수민족 장족 국가 티벳의 독립을 외치는 달라이라마의 위험과 다를 것 없으며 대만 독립을 수시로 외치는  천수이볜 대만 총통의 위협과 다를 바 없다. 위그루족의 자치와 독립문제도 두통거리중의 하나다. 만일 통일 한국 이후 조선족의 동요가 심하고 북방영토 반환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면 중국의 수많은 소수민족 독립문제로 중국은 최소한 공중분해는 안 되더라도 체제불안의 가능성은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후진따오 등 새로운 장쩌민 후계체제로 하여금 동북3성을 영원히 중국역사로 편입하는 작업을 극비리에 진행할 필요가 있도록 부추겼다.

그 첫 실마리로 나온 것이 치우총 재건사업과 북경 인근 탁록의 염황치 3조능 묘 재건 사업이었으며 대륙내 동이족의 적장자를 대한민국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대륙내 일개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상고사로 비정함으로써 대중화사의 하나로 편입하려 한 것이다. 동북3성의 조선족이 대한민국 한겨레의 지엽이 아니라 마치 대만이 독립국가가 아닌 중국의 일개 성인 지엽으로 보는 식으로 대한민국이 중국내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의 일부로 보는 견해가 새로이 대두된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보면 동이족은 중국역사의 일부로 편제가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임혜상이다)

결과적으로 동이족은 사실상 지나 한족을 포함 55개 소수민족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중국의 조상으로 새로이 자리매김되었다. 필자는 대륙 곳곳에서 동이족이 중화족의 조상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러나 그 의미는 중화족이 우리 동이 한겨레의 핏줄이라는 말이 아니라 바로 위에 언급한 동이역사 지나사 편입의 시도로 퍼진 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더욱 상고사로부터 정당화 하기위해 기존의 지나족의 시조를 황제로 삼은 것에서 동이족 염제 신농씨를 새로운 지나족의 조상으로 포함해 염황시조를 말하고 다시 조선족을 비롯 같은 혈손인 묘족과 요족에서 가지치고 나아간 적지않은 소수민족과 월족(장족) 등을 아우르기 위해 치우천황(14대 자오지 환웅)마저 포함해 염황치 3조상을 거론하게 되었다.

고구려사 역시 중국이 한겨레의 통일 이후의 아시아 패권을 놓고 한중역사 전쟁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가 아우르고 있는 영토나 종족이 현재의 중국내 소수민족 절반을 아우르는 엄청난 대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율곤 이중재가 김부식의 삼국사를 인용해 고구려 양원왕 평원왕때 수도가 지금의 섬서성 서안(장안)이라고 적시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굳이 광개토대왕때의 영토가 아니라도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와 그 복속 인민이 얼마나 무지막강한 제국인지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동이족의 역사를 중국역사의 일부로 편제하려는 시도속에서 가장 급선무로 해야 할 과제가 바로 고구려사였다.

그러나 고구려사 훨씬 이전의 상고사로 들어가면 대륙을 무대로 판친 것은 아니 석권한 것은 바로 말 그대로 한겨레 핏줄 동이족의 역사였지 지나족의 역사는 그림자도 없었다. 지나족이 그림자를 비추기 시작한 것은 유방때인데 이는 뒤에 동이족 초나라의 역사와 진시황의 단명한 진나라 역사를 조명하면서 정치사적으로 희랍문명과 로마문명의 먹고 먹힌 관계가 문화사적으로 거꾸로 먹어치운 관계가 초나라와 진나라 역사 가운데에도 있었음을 설명하겠다.  즉 로마제국이 희랍을 정치적으로 먹어치우고 희랍문명은 속에서부터 로마문명을 먹어치운 문명의 회돌이가 바로 진시황이 6국을 병탄할 적에 정치적으로 먹어치운 초나라의 고도의 세련된 문화에 의해 불과 천하통일 십유여 년만에 다시 멸망한 것은 동이족의 역사가 얼마나 강인하게 흐르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물며 이 영향은 초나라 사람 유방과 같은 초나라 사람 항우의 초한전에서 보듯이 그 알갱이는 동이족의 역사였으며 장자방이라든가 한신 등이 모두 동이족(韓) 사람이었고 유방의 한(漢)나라 조정을 꿰어차고 앉은 중신은 죄 다 동이족 초나라 백성들었으며 그 문화 유풍 역시 초나라 문화였다. (앞으로 담론 시리즈에 소개할 예정이다)아래 소개하는 신농씨의 상고 역사는 대국적으로 필자가 독자들에게 대륙사의 진실을 보여주려는 원대한 스케줄의 일환으로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소개하는 향토사료다. 이를 집필한 대륙 현지의 지나 향토사가들은 비록 신농씨가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입장에서 연구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성만큼은 우리 동족이 연구하는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연구가 거의 전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좋은 자료라 아니할 수 없다. 좋은 양식이 되기를 바란다.(안원전)    




  

중화민족이 생식하고 번영하는 넓디넓은 토지 위에는 두 줄기의 자매 강이 있는데, 하나는 장강이고 하나는 황하(黃河)이다. 이들은 중화민족의 어머니 강이다. 어머니의 젖줄기가 커다란 장강 남북과 황하 상하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명의 하나인 중화문명(中華文明)을 양육했다.

크고 넓은 장강은 숲이 우거진 곤륜(崑崙)산맥의 빙설이 뒤덮인 깊은 곳에서, 멀리 아득한 문명부터 시작하여 세차게 용솟음쳐 나와 힘차게 흘러 내려 거세게 만 리로 흐르고 만대까지 흘러 이 토지 위에서 윤기 있고 기름진 요람을 만들고 문명을 양육하고 휘황찬란한 필적을 남겼다. 하지만 매우 오랜 시기동안 사료(史料)의 소실에 의해서인지 혹은 역사가의 편견에 의해서인지 그들은 황하문명만을 중화문명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숭배하면서 장강문명을 푸대접했다.

근래 몇 년 들어 수많은 전문가들이 장강문명에 대한 깊은 연구와 토론을 진행하여 대량의 연구 성과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일신시키고 견문을 일치시켰는데, 이는 바로 장강문명과 황하문명이 함께 중화문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어떤 사람은 “장강문명은 중화문명의 선구이다.”라고 제기하여 위대한 장강문명이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위대한 문명은 반드시 위대한 민족에 의해서 창조된다. 혹은 한 위대한 민족의 탄생과 발전의 과정 속에서 위대한 문명이 창조된다. 동시에 한 위대한 민족과 위대한 문명은 반드시 자신의 위대한 인물을 창조하는데 그가 민족의 대표이고 문명의 기치이다.





1. 사료의 기록: 염제 신농씨가 장강 문명을 창업하다.

비록 염제 신농씨와 관련된 역사의 기록이 적고 상세하지도 않으며 중국의 정사(正史) 중에도 염제에게 기(紀) 혹은 전(傳)을 세우지 않았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서도 잠깐 언급하는데 그쳤을 뿐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경(經), 사(史), 자(子), 집(集) 중에 분산되어 나타나는 염제 신농씨에 관한 자질구레한 기록 중에서 염제 신농씨가 장강문명을 창립하는데 위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염제 신농씨에 관한 사료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염제 신농씨가 살았던 시대에 관한 기록이다.

《장자 도척(庄子 盜跖)》편에서 말하기를 “신농의 시대는 드러누우면 곧 거처이고 일어서서 다시 어슬렁거리며 걸었으며, 백성들이 그 어미는 알아도 아비는 몰랐고, 고라니와 사슴과 함께 살았으며, 밭을 갈아 음식을 먹고 방직하여 옷을 입었으며, 서로 해치려는 마음이 없어 이때에 이르러 덕이 흥성했다.(神農之世, 臥則居居, 起則于于, 民知其母, 不之其父, 與麋鹿共處, 耕而食, 織而衣, 無有相害之心, 此至德之隆也.)”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보면, 염제 신농씨 시대는 “백성이 그 어미는 알아도 아비는 모르는” 원시사회의 모계씨족 공동사회 단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상군서 화책(商君書 畵策)》편에는 오히려 “신농의 시대에는 공동으로 경작하고 방직하여 여자들은 방직하여 옷을 만들었고, 형벌과 정책을 쓰지 않아도 다스려지고 무장한 병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천하를 다스렸다.(神農之世, 公耕而織, 女織而衣, 刑政不用而治, 甲兵不起而王.)”라고 했다.

《여씨춘추 애류(呂氏春秋 愛類)》에는 더욱이 말하기를 “신농이 가르쳐 말하기를; 남자가 그 해에 밭 갈지 않는 자가 있으면 최하등급이 되거나 굶주림을 당하고, 여자가 그 해에 실을 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천하에서 그 추위를 당할 것이므로 남편이 몸소 밭 갈고 아내가 몸소 방직하면 백성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했다.(神農之敎曰: 士有當年而不耕者, 則下下或受其飢矣; 女有當年不績者, 則天下受其寒矣, 故身親耕, 妻親織, 所以見致民利也.)”

하나는 “백성들이 그 어미는 아나 그 아비는 모른다.”라고 했지만, 하나는 “남편이 몸소 밭 갈고 아내가 몸소 방직한다.”고 하여 아내에게 남편이 있는데 아들이 어찌 그 아비를 모른다는 것인가?

진대(晉代) 황보익(皇甫謚)이 지은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이러한 관계에 대한 해답을 풀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염제 신농씨는 강(姜)씨였는데……수(水)씨 여자를 맞아들여 제왕 임괴(臨魁)를 낳았고……(炎帝神農氏, 姜姓也……納奔水氏女, 曰聽, 生帝臨魁……)”라 하여 여기서 부부, 아들의 관계가 명확해졌다.  

가정의 출현은 모계 씨족사회의 해체를 의미하고 부계 씨족사회의 탄생은 원시 공동체사회의 해체와 사유제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전의 사회관계의 해체와 새로운 사회관계의 탄생은 한번의 명령에 의해 단 칼로 베어버리는 것처럼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이른 것도 있고 늦는 것도 있고 먼저인 것도 있고 나중인 것도 있으며 빠른 것도 있고 느린 것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염제 신농 시대에 어떤 지방은 여전히 모계 씨족 사회의 생활을 하고 있었고 어떤 지방은 이미 부계 씨족 사회의 문턱을 넘어선 곳도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염제 신농 시대는 원시사회가 모계 씨족사회에서 부계 씨족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대로 인류사회의 문명 초창기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료 속의 염제 신농 시기의 두 가지 사회 상태에 관한 기록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 하겠다. 고고학의 자료는 그 시대가 대략 지금으로부터 5000년에서 6000년 사이이고 마침 중화문명사의 초창기 시대와 서로 부합되며, 따라서 염제 신농씨는 중화문명 초창기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두 번째는 염제 신농씨의 활동 지역에 관한 기록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기록하길, 염제 신농씨는 “천자의 덕을 갖추었고, 무회씨를 계승한 후 불로 나무를 이어 남방에 재위하며 하(夏)를 다스렸으므로 염제라고 불렀다.(有聖德, 繼無懷氏后, 以火承木, 位在南方, 主夏, 故謂之炎帝)”, “120년간 재위하고 붕어하여 장사(長沙)에 장사지냈다.(在位一百二十年而崩, 葬長沙.)”라고 되어 있다.

송대(宋代) 나필(羅泌)이 편찬한 《로사(路史)》에 기록하길, 염제 신농씨는 “진(陳)에 도읍하고 사(沙)에 궁전을 짓고 장사(長沙)라고 했으며, 붕어하여 장사 차향(茶鄕)의 끝머리에 장사지냈는데 이것이 차릉(茶陵)이라고 하는 소위 천자의 묘이다.(都于陳, 盖宇于沙, 是爲長沙, 崩葬長沙茶鄕之尾, 是曰茶陵, 所謂天子墓子.)”라고 했다.

나평(羅苹)이 나필에게 이 사료에 주석을 달아줄 때 말했다. “신농의 도읍을 조사해보면 마땅히 남쪽에 있어, 고로 전제(顓帝)의 도읍은 북쪽이었고, 태호(太昊)의 도읍은 동쪽에 있고 소호(少昊)의 도읍은 서쪽이었다. 다만 여러 대에 걸친 먼 요록(紀略)을 믿어야 하나 전하는 자가 무질서하여 확정할 수는 없다.(考神農之都, 宜在南方, 故顓帝之都在北, 益以之太昊之吊, 少昊之在西. 爲信第世遠紀略, 傳者亂, 不得其定.)”

염제 신농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사료에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호북(湖北) 수주(隨州), 즉 “열산(烈山)에서 태어났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섬서(陜西)의 보계(寶鷄), 즉 “강수(姜水)에서 자랐다.”는 설이다. 사실 한 사람에게 출생지는 모종의 기념하는 의미를 제외하고 일생의 사업에 있어 얼마나 큰 작용과 영향이 있단 말인가?

염제가 백여 년을 재위하는 동안 어찌 어느 한 지방에만 얽매여 있었겠는가? 하물며 당시 사람들은 아직도 어렵에서 농경으로 향해 가는 시대에 처해 있었는데 하물며 염제 신농씨가 위대한 개척자란 말인가?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가 사업을 창업하고 성취했던 지역이다. 한대(漢代) 유안(劉安)이 편찬한 《회남자 주술훈(淮南子 主術訓)》에서 말하기를, 염제 신농씨는 “그 지역이 남쪽으로는 교지(交趾: 지금의 영남(岭南) 일대)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유도(幽都: 지금의 하북(河北) 북부)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양곡(暘谷: 지금의 산동(山東) 서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삼위(三危: 지금의 감숙(甘肅) 돈황(敦煌) 일대)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하여 범위가 중국의 절반 이상에 이른다.

물론 이것은 주로 염제 신농씨의 영향이라 간주해야 하겠지만, 대체로 염제 신농씨 부락 및 그 부락연맹의 활동지역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염제 신농씨와 그의 씨족은 ‘남방에 위치한’ ‘사(沙)에 궁전을 짓고 장사(長沙)라고 한’ 사람들이며, 그 본인의 최후 귀착점은 “붕어하여 장사(長沙) 차향(茶鄕)의 끝머리에 장사지내고 차릉(茶陵)이라고 한” 것이다.

차릉이란, 염제 신농씨가 이곳에서 차를 재배하였고 또 이곳에 안장되어 얻은 이름이다. 차릉현 한속(漢屬) 장사(長沙)는 송(宋) 영종(寧宗) 가정(嘉定) 4년(서기 1211년)에 차릉의 강락(康樂), 하양(霞陽), 상평(常平)으로 나누어진 세 현에 영현(酃縣)을 설치하였는데, 소위 ‘차향의 끝머리(茶鄕之尾)’가 바로 영현(1994년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民政部)의 비준을 거쳐 영현을 염릉현(炎陵縣)으로 개명했다.)이다. 소위 중국식 이름 바오지-보계(寶鷄)라는 ‘천대산(天臺山)’의 일설은 민간의 전설일 뿐이지 사료에는 결코 기록된 바 없다.

영현의 염제릉에 매장된 사람은 어느 염제인가? 염제 신농씨는 전국(戰國)시대의 《세본(世本)》에서부터 불리기 시작했는데, 한대(漢代)의 송중자(宋仲子)가 《세본》에 주석을 달 때 말하기를 “염제 즉 신농씨는 염제가 신호(身號)이고 신농은 대호(代號:대를 이어 이름을 칭하는 관직명)이다.(炎帝則神農氏, 炎帝身號, 神農代號也.)”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염제가 8대를 이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17대를 이었다고 한다. 이점은 황보밀(皇甫謐)이 그의 《제왕세기(帝王世紀)》중에서 매우 명확히 설명했다.

“《역》에 말하기를, 포희씨가 몰락하고 신농씨가 일어났는데 이를 염제라 하였다. 염제 신농씨는 강씨성이었다. ……강수에서 자랐다. ……남쪽에서 재위했고, ……또 본래 열산(호북(湖北) 수주(隨州)) 에서 일어났다 하여 혹은 열산씨라고도 부른다. ……진영으로부터 노곡부(魯曲阜:노나라의 산동성 곡부)에 도읍했다. ……120년간 재위하고 붕어하여 장사에 매장하였다. 수씨 여자(水氏女)를 맞아들여 제왕 임괴(臨魁)를 낳았고 다음 제왕은 승(承), 다음 제왕은 명(明), 다음 제왕은 직(直), 다음 제왕은 리(厘), 다음 제왕은 애(哀), 다음 제왕은 유망(楡罔)이었다. 모두 8대였고 합이 530년이었다.(《易》稱庖犧氏沒, 神農氏作, 是爲炎帝. 炎帝神農氏, 姜姓也. ……長于姜水. ……位在南方, ……又曰本起烈山, 或稱烈山氏. …自陳營都于魯曲阜. ……在位一百二十年而崩, 葬長沙. 納奔水氏女, 曰聽, 生帝臨魁 , 次帝承, 次帝明, 次帝直, 次帝厘, 次帝哀, 次帝楡罔. 凡八世, 合五百三十年.)”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영현 염릉에 묻힌 사람이 제 1대 염제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후에 그의 7대 자손들도 이 토지 위에서 분투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염제 신농씨가 개척한 중화 농경문명의 주요 활동지역은 바로 장강지역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장강 문명을 창업했다는 것이다.

《주역 계사하(周易 系辭下)》에는 “포희씨가 몰락하고 신농씨가 일어났는데, 나무를 패어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구부려 쟁기를 만들어서 땅을 경작하는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니 어찌 두루 이로움을 취하지 않았겠는가. 한낮에 시장을 열어 천하의 백성들을 집중시키고 천하의 물건들을 모아 서로 교역하고 각각 있을 자리에 있게 하니 어찌 두루 한담하지 않겠는가.(庖犧氏沒, 神農氏作, 斫木爲耜, 揉木爲耒, 耒耨之利, 以敎天下, 盍取諸益. 日中爲市, 致天下之民, 聚天下之貨, 交易而退, 各得其所, 盍取諸噬嗑.)”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군서 화책(商君書 畵策)》에는 “신농의 시대에는 남자가 밭을 갈아 양식을 해결하고 여자가 방직하여 옷을 짜 입었다.(神農之世, 公耕而食, 婦織而衣.)”고 기록되어 있다.

《회남자 수무훈(淮南子 修務訓)》에는 “옛날 백성들이 풀을 먹고 물을 마시고 나무의 열매를 채집하고 권패류의 살을 먹어 자주 질병에 걸리고 독에 중독 되어 해를 입었으므로 신농이 이에 백성들에게 오곡을 파종하는 것을 처음 가르쳐주고, 토지의 건조하고 습기 있고 비옥하며 높고 낮음을 직접 보고 여러 가지 풀의 맛을 보고 샘물의 달고 쓴 맛을 맛본 다음 백성들에게 알려 힘든 것은 피하고 쉬운 것을 골라하게 했다. 이때 당시에 하루에 70개의 독을 만났다.(古者民茹草飮水, 采樹木之實, 食蠃之肉, 始多疾病毒傷之害, 于是神農乃始敎民播種五谷, 相土地燥濕肥高下, 嘗百草之滋味, 水泉之甘苦, 令民知所避就. 當此之時, 一日而遇七十毒,)”고 기록되어 있다.

《신론(新論)》(한대(漢代)의 환담(桓譚)이 편찬함)에 “옛날에 신농씨가 복희를 계승하여 천하를 다스려 위로는 하늘의 법을 살피고 아래로는 땅의 법을 취하였고, 이리하여 처음으로 오동나무를 깎아 거문고를 만들고 생사를 다듬어 현을 만들어 천지신명의 덕을 통하게 하고 천지의 조화를 합하였다.(昔神農氏繼宓羲而王天下, 上觀法于天, 下取法于地, 于是始削桐爲琴, 練絲爲弦, 以通神明之德, 合天地之和焉.)”고 기록되어 있다.

《오월춘추(吳越春秋)》(동한(東漢)의 조엽(趙曄)이 편찬함)에 “옛날 백성은 수수하여, 배고프면 날짐승과 들짐승을 먹고 목이 마르면 이슬을 먹었고 죽으면 백모로 싸서 들판 한복판에 던졌다. 효자는 부모가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여 탄환을 만들어 지키며 ‘대나무를 이어 흙을 던져 쫓아내네.’라고 노래 불렀다. 이리하여 신농은 활줄을 나뭇가지에 묶어 활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화살을 만들어 활과 화살의 이로움으로써 천하에 위엄을 떨쳤다.(古者人民朴質, 飢食鳥獸, 渴飮霧露, 歿則裹以白茅投于中野. 孝子不忍見父母爲禽獸所食故作彈以守之, 歌曰 ‘繼竹續竹, 飛土逐突’之謂也, 于是神農弦木爲弧, 剡木爲矢, 弧矢之利, 以威天下.)”고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외기(資治通鑒外紀)》(송대(宋代) 유서(劉恕)가 편찬함)에는 신농이 “백성에게 오곡을 파종하고, 질그릇을 만들고, 도끼를 주조하고, 보습과 쟁기를 만들고, 호미로 김매는 것을 가르쳤다. …….(敎民播種五谷, 作陶, 冶斤斧, 爲耒耜 ,鉏耨)”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의 염제 신농씨의 공적에 관한 기록은 그 본인의 일생에 대한 기록보다 더욱 풍부하고 훨씬 상세하고 확실하지만, 편폭에 제한이 있는 관계로 우리는 또한 위에 기술한 다른 내용의 몇 가지를 인용하여 요약해보면 그 책들은 염제 신농씨의 8대 공적에 대해 기록했다.

즉, 처음으로 보습과 쟁기를 만들어 백성에게 땅을 갈고 파종하는 것을 가르치고, 여러 가지 풀을 두루 맛보고 의술과 약품을 발명했으며, 삼(麻)을 처리하여 천을 만들어 의상을 제작하고, 처음으로 시장을 개설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교류했으며, 오동나무를 깎아 거문고를 만들고 생사를 다듬어 현을 만들었고, 활줄을 나뭇가지에 묶어 활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화살을 만들었으며, 질그릇을 제작하여 그릇을 만들고 도끼를 주조했고, 주택을 건설하여 평안하고 조용히 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는 염제 신농씨가 백성들을 이끌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의술과 약이 없어 영락하여 유랑하던 날들에서 벗어나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묵을 집이 있으며 의술과 약품이 있고 게다가 시장에 갈 수 있으며 음악을 들을 수가 있고 풍년을 노래할 수 있는 날들을 보내게 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얼마나 거대한 변화인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장강문명은 얼마나 찬란한 경관인가? 이러니 사람들이 어찌 대대로 염제 신농씨를 기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염제 신농씨를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구전으로 증명하다: 삼상(三湘: 중국 남부의 양자강(揚子江)·상강(湘江)·원강(沅江)의 세 강) 사수(四水)의 염제 신농씨의 전설고사에서부터 그가 장강문명을 창업한 족적을 추적하다.

역사의 진행과정은 사적(史籍)에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민간에 구전된다. 염제 신농씨는 중화민족의 시조가 되고 장강문명의 창업자가 되어 필연적으로 그가 분투하여 필사적으로 싸우던 소재 지역에 수많은 전설고사를 남겼을 것이고 오랜 세월동안 삼상과 사수의 민간에 대대로 전해오던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 고사는 다른 방면에서 염제 신농씨가 장강문명을 창업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호남(湖南) 영현(酃縣: 지금의 염릉현(炎陵縣))의 염제릉을 중심으로 한 염제 신농의 전설권은 관련 민간문학 전문 학자들의 연구 통계에 의하면 “지금까지 아직도 6,70편의 전설고사가 대중의 입에서 살아 있다. 이 전설의 분포상황은 주주시(株洲市) 28편(영현 17편, 차릉 8편, 예릉(醴陵) 2편, 유현(攸縣) 1편), 형양시(衡陽市) 15편(형동(衡東) 5편, 남악(南岳) 3편, 상녕(常寧) 2편, 뢰양(耒陽) 2편, 형양 2편, 기양(祁陽) 1편), 침주(郴州)지역 6편, 영릉(零陵)지역 3편, 소양(邵陽)지역, 악양(岳陽)지역, 익양(益陽)지역, 상덕(常德)지역, 회화(懷化)지역 각 1편, 상서 토가족(湘西土家族)-묘족(苗族)자치주 7편이다.”(2)

필자가 보기에는 삼상과 사수의 염제 신농씨에 관한 전설고사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1985년에서 1990년까지의 시기에 나는 주주시 민간문학의 3대 집성(즉, 중국민간고사, 가요, 속담 집성 호남권의 주주 분권)의 총편집장을 맡게 되었고 이야기 파트의 주편을 겸임하게 되어 주주 지역의 100만자가 되는 민간전설고사를 선택하여 편집하고 출판하는 책임을 맡았다. 내 수중에는 염제 신농씨의 전설고사가 28편이 아니라 38편이 있었는데, 민간에 유전되고 있는 우리가 아직 수집하지 못한 것이 또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러한 민간전설고사를 전면적으로 보면 아예 ‘염제사(炎帝史)’의 한 부분이며 이 위대한 역사서가 대중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사람들에게 대대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아래에 우리는 본문의 첫째부분에서 사료를 수집한 것을 궤적으로 하여 오늘날 여전히 유전되고 있는 이러한 염제 신농씨의 전설고사를 살펴보자.


  
염제의 어머니 안등(安登)은 태양이 자신의 품속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나서 바로 염제를 낳아 이름을 석년(石年)이라 했다고 한다. 매가 날아와 그에게 해를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흰 사슴이 뛰어 와서 그에게 젖을 주었다. 안등이 외출할 때마다 매와 사슴이 와서 석년을 길렀다. 호남성 염릉현 염제사당에 모셔진 어린 아기 염제(석년)를 젖먹여 기른 양위(두 분) 양모 매와 사슴 조각.



염제 신농씨는 어느 시대에 살았는가? 전설 《염제의 세 어머니(炎帝的三個母親)》(3)는 우리에게 이 정보를 알려준다. 염제의 어머니 안등(安登)은 태양이 자신의 품속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나서 바로 염제를 낳아 이름을 석년(石年)이라 했다고 한다.

산에 가 야생 열매를 채집하여 허기를 채워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석년을 산 속의 보금자리 안에 두었고 석년은 혼자 산 속 보금자리에 누워 머리 위에는 태양이 내리쬐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 때, 매가 날아와 그에게 해를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흰 사슴이 뛰어 와서 그에게 젖을 주었다. 안등이 외출할 때마다 매와 사슴이 와서 석년을 길렀다.

이렇게 하여 석년은 어머니가 세 명이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세 군데 우리가 주의할만한 곳이 있는데, 하나는 염제의 부친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모른다. 두 번째는 염제가 어려서부터 매와 사슴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염제의 모친이 야생 열매를 채집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장자 도척(庄子 盜跖)》편에 기록된 “백성들이 그 어미는 알아도 아비는 몰랐고(民知其母, 不之其父)”, “고라니와 사슴과 함께 살았다.(與麋鹿共處)”라고 한 것과 같지 않은가? 이것은 염제 신농씨 초기의 사회 면모였다.

염제가 농경문명을 창업한 후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는 아내(비)가 있고 안장을 할 때 그의 아내는 외지에서 친상의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 ‘망부석(望夫石)’이 되었고(《연지석(胭脂石)》)(4), 그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사냥을 하다가 병으로 죽었으며(《신농태자(神農太子)》)(5), 심지어 또 한 명은 유복자였다(《‘파공보살’은 원래 파공이다(“婆公菩薩”原來是坡公)》)(6). “백성이 그 어미는 알아도 아비는 알지 못했다(民知其母, 不之其父).”는 상황은 이 시기에 끝났다. 염제 신농씨의 시대는 바로 모계 씨족사회에서 부계 씨족사회로 향해 가는 과도기이며 또한 최종적으로 부계 씨족사회의 질서를 확립한 시대이다.

우리가 다시 민간 전설 속의 염제 신농씨의 활동지역을 살펴보면 호남(湖南)보다 염제 신농씨의 지명에 관한 전설이 더 많은 곳이 없다. “신농이 일어나 기산(淇山)의 남쪽에서 오곡을 재배하여 구주(九州)의 백성들이 비로소 곡식을 먹는 것을 알게 되었다(神農作, 樹五谷淇山之陽, 九州之民乃知谷食).”(《관자 경중무(管子 輕重戊)》)

호남 의장현(宜章縣)에 기전령(騎田岭)이 있는데, 신농의 시대에 “이삭이 많이 열린 좋은 벼가 생산되었고, 감미로운 샘물이 나왔다(嘉禾生, 醴泉出)”, “신농이 덕을 쌓아 보습과 쟁기를 만드니 땅이 이에 응하여 감미로운 샘물이 나오고, 신농이 밭에서 김을 매니 하늘이 이에 응하여 이삭이 많이 열린 좋은 벼가 생산되었다(神農修德作耒耜, 地應地以醴泉, 神農就田作耨, 天應之以嘉禾).”(《례․함문가(禮․含文嘉)》) 전해지는 바로는 호남 가화현(嘉禾縣)이 바로 염제 신농씨가 하늘의 뜻을 얻어 이상이 많이 열린 좋은 벼(嘉禾)가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7). 예릉시(醴陵市) 성의 북쪽에는 ‘예천(醴泉)’이라는 우물이 있고 동한(東漢)시기에 예릉현을 설치하였는데 현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8).

전해지는 바로는 염제가 뢰산(耒山)에서 쟁기와 보습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곳의 산 이름이 뢰산이고 물 이름은 뢰수(耒水)이며 현을 설립하여 뢰수의 남쪽을 다스려 현의 이름을 ‘뢰양(耒陽)’이라 하였다 한다. 침주(郴州)는 염제의 대신이었던 침요(郴夭)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악(五岳) 중에 오로지 남악(南岳)의 형산(衡山)이 “기세가 마치 나는 듯” 했는데, 원래 남악은 바로 입에 아홉 알의 이삭을 물고 있는 주작(朱雀)으로 신농에게 옥편(玉鞭)으로 맞아 땅에 떨어져 변한 것이다(9)!

적송자(赤松子)는 신농의 우사(雨師)로 차릉현(茶陵縣) 운양산(雲陽山)에는 적송자가 한장량(漢長良)이 공부하고 검술을 익히는 것을 도와주던 ‘시검석(試劍石)’(10)이 있고 유양(瀏陽)에는 적송산(赤松山)이 있다. 특히 영현(酃縣) 염제릉(炎帝陵) 일대에는 염제 신농씨의 장례에 관한 수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망약단장초(亡葯斷腸草)》(11)에서 말하는 것은 염제 신농이 여러 가지 약초를 두루 맛보다가 단장초(斷腸草)를 잘못 먹어 죽었다는 것이고, 《염제하장(炎帝下葬)》(12)에서 말하는 것은 금룡(金龍)이 기쁘게 신농을 맞이하여 신농의 관을 염제산 아래의 미수(洣水)강 속 용궁에 매장했다는 이야기이며,

《도괘금구(倒挂金鉤)》(13)에는 한 어부가 용궁에 들어가 염제의 관이 용궁에 놓이는 광경을 친히 목도했다고 기술했고, 차릉현의 ‘철갑산(鐵甲山)’과 ‘감뇌산(砍腦山)’, 영현의 ‘향고요(響鼓坳)’, 자흥시(資興市)의 ‘석인배(石人排)’등 수많은 지명이 염제신농씨의 장지가 요구하는 기준에 모자랐기 때문에, 혹은 염제를 장례할 때 모든 산이 고개를 숙였는데 오로지 한 산만 고개를 숙이지 않아 그 머리를 베였기 때문에, 혹은 염제의 관을 맞으러 가 너무 오래 기다려 석산이 되었기 때문에 등등으로 얻게 된 이름이다.

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전국의 염제 신농씨에 관한 민간 전설권은 주로 세 곳인데 하나는 섬서(陝西)의 보계(寶鷄)이고, 또 하나는 호북(湖北)의 수주(隨州), 다른 하나는 호남의 영현으로, “호남은 관련 전설이 가장 많은 곳이다(湖南是有關傳說的最多處).”(14) 세 곳 중에 두 곳이 장강 유역으로 한 곳은 강북에 있고 한 곳은 강남에 있어 태어난 곳과 묻힌 곳이 서로 호응을 이루는데 이 어찌 우연의 일치이겠는가? 마땅히 이러한 장강유역에서 대량으로 유전되고 있는 염제 신농에 관한 전설고사는 바로 염제 신농씨가 장강문명을 창업했다는 생생한 증거자료라고 말해야 한다.

염제 신농씨의 위대한 업적과 풍부한 공로에 관한 전설고사는 사료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훨씬 생생하다! 매우 흥미 있는 것은 이러한 전설과 고사가 진술하는 것이 바로 사적에 기록된 염제 신농씨의 그러한 공적들이라는 것이다. 편폭에 제한이 있어 우리는 이곳에 이러한 전설고사를 서술할 수는 없으니, 아래에 종류를 나누어 일부 제목을 열거하는 것으로 우리는 민간전설과 사료가 어떻게 서로 어울려 빛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염제 신농씨가 “처음으로 농경을 창업하여 백성들에게 땅을 갈고 파종하는 것을 가르친” 이야기가 반영된 전설고사로는 《신농이 곡식을 훔치다(神農盜谷)》(15), 《곡식은 어떻게 해서 인간에게 온 것인가(谷是怎樣來到人間的)》(16), 《만화곡(萬華谷)》(17)등등이 있고, 염제 신농씨가 “여러 가지 풀을 두루 맛보아 의술과 약품을 발명한” 이야기가 반영된 전설고사가 가장 많은데,

《신농이 사약을 연구하다(神農學蛇藥)》(18), 《유리사자(琉璃獅子)》(19), 《생강의 이야기(生姜的故事)》(20), 《백지의 이야기(白芷的故事)》(21), 《마늘의 이야기(大蒜的故事)》(22), 《찻잎의 이야기(茶葉的故事)》(23)등등이 있으며, 염제 신농씨가 “삼(麻)을 처리하여 천을 만들어 의상을 제작한” 이야기가 반영된 것은 《삼과 천의 이야기(痲與布的故事)》(24), 《인류의 첫 번째 옷(人類最早的衣服)》(25)등이 있고,

염제 신농씨가 “처음으로 시장을 개설한” 이야기를 반영한 것으로는 《태양이 머리 위에 솟았을 때(太陽當頂的時候)》(26)가 있으며, 염제 신농씨가 “오동나무를 깎아 거문고를 만든” 이야기를 반영한 것으로는 《신농의 거문고(神農琴)》(27)가 있고, 염제 신농씨가 “활줄을 나뭇가지에 묶어 활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화살을 만든” 이야기를 반영한 것은 《신농태자(神農太子)》(28)등등이 있다.

이러한 민간 전설고사로 우리가 묘사하는 염제 신농씨가 장강문명을 창업한 이야기는 매우 생동적이며 감동적이고, 빛이 사방에 환히 비치는 것이다. 게다가 염제 신농씨가 장강문명을 창업하는 과정 속의 개척정신, 창시정신, 용맹정신, 진취정신, 무사(無私)정신, 봉헌정신이 더욱 두드러지며, 이러한 ‘염제의 정신’은 바로 중국에 대대로 전해오는 민족정신이다.

한 가지 말해두어야 할 것은 본문에서 열거한 제목들은 호남에서 유전되는 염제 신농씨에 관한 전설고사에만 국한 된 것으로 이것만 가지고 염제가 창업한 장강문명의 찬란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외에 호북의 수주와 신농가(神農架)에 유전되는 수많은 감동적인 염제 신농씨의 전설고사도 똑같이 이 한 가지 주제를 이야기한다.

3. 고고학에서 명시하다: 염제 시대에 상강(湘江) 유역에는 확실히 비교적 발달한 농경문명이 존재했다.      

역사가 침묵할 때는 분묘(墳墓)가 이야기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수많은 문제들이 역사상의 기록이 없거나 기록이 상세하지 않거나 혹은 기록이 잘못되었을 때는 오로지 고고학의 발굴에 의지해서 설명한다는 말이다. 역사의 기록은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사적(史籍)으로 책에다 기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설로 대중의 입에 기록하는 것인데, 그러면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 바로 지하에 묻힌 문화유적으로, 지하에 기록하는 것이다.

일정한 의의에서 말하자면 지하의 옛 유적지와 옛 고분 속의 역사 자료에다 ‘기록’하는 것은 지상의 자료보다 더욱 정확성과 권위성을 지니고 있다. 염제 신농씨의 시대에는 문자로 기록된 역사 자료가 없었는데, 그렇다면 지하의 자료는 어떻게 이 시기의 역사를 ‘기록’했는가? 근래 몇 년 동안 문물 고고학의 커다란 성과가 염제 시대 상강 유역에는 확실히 비교적 발달한 농경문화가 존재했다고 대답해 준다.

염제릉에서 20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주주현(株洲縣) 마산(磨山) 유적지(29)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염제 시기 상강 유역의 농경문명의 면모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문화의 내포가 가장 풍부한 고문화 유적지이며, 마산은 커다란 논두렁이 중앙에 높이 올라온 약 10미터정도 되는 대지로 현재 보존되어 있는 유적지 면적은 약 3만 평방미터이다. 이것의 북쪽 2킬로미터 지점은 많은 산이 높이 솟아 있고, 남쪽 3.5킬로미터 지점은 상강의 지류인 녹수(淥水)로, 작은 계곡 한 줄기가 마산의 서남쪽 끝에서 녹수로 흘러들어간다.

마산에 살던 선민들이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은 매우 안목 있는 일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녹강(淥江)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고 북쪽으로는 나무가 울창한 산림에서 사냥을 할 수 있었으며, 마산 사방의 평탄한 토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였다.―이 모든 것은 염제 신농씨가 “토지의 건조하고 습기 있고 비옥하며 높고 낮음을 직접 보았다”는 것에 완전히 부합한다.

1987년 호남성 문물고고연구소와 주주시 문물작업대 연합이 마산 유적지에 대해 시굴(試掘)을 진행했는데, 발굴면적 96평방미터에 8군데의 시굴 지점에서 대량의 도기(陶器)와 석기(石器), 골기(骨器)가 출토되었고 집터와 가옥유적을 발견했으며 하나의 공공묘지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출토된 문물에 의하면, 마산 유적지 하층문화 유적은 대체로 대계(大溪)문화 시기와 비슷하며 지금으로부터 약 5300년에서 7000년(상층문화는 용산(龍山)문화시기에 속함)까지로 바로 사적 및 전설 속의 염제 신농 시대와 일치한다.


*장강(양자강) 중류지구 호남 대계문화 채도기좌(彩陶器座):동방의 대문구 문화와 더불어 양자강 중류의 대계문화 유적지는 권족기(圈足器)가 성행하여, 채도 도안은 곧 앙소문화 묘저구(廟底溝) 유형과 더불어 유행한 꽃잎무늬 화판문(花瓣紋)과 서로 동일하다. 이 도기의 전신은 붉은 색을 입혔으며, 흑채화를 사용해 2개의 구름문양을 그려 넣었다. 학자들은 구름문양이 또한 두 개의 쟁기(犁)를 서로 교차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섬서성 바오지(보계)는 신농이 태어난 고향이고 호남성 차릉은 신농씨가 제위에 있으면서 쟁기와 보습을 만든 곳이니 동이족의 문화가 앙소문화로부터 대계문화 유적지까지 광범하게 퍼져있음을 볼 수 있다. *대계문화1Click here! *대계문화2Click here!*대계문화3Click here!*대계문화4Click here!*대계문화5Click here!

마산 유적지 하층의 도기는 조기와 말기의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조기는 진흙질 도기(泥質陶)를 위주로 하며 도기의 색깔은 백색이 많고(즉, 대계문화의 전형적인 대표 기물인 백도(白陶)), 소량의 등적색과 흑갈색이 있다.

도기의 형태는 세발 솥(鼎) 모양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사발(鉢), 쟁반(盤), 두 귀가 있는 단지(雙耳罐), 둥근 발 그릇(圈足器) 등이 있으며, 기물의 표면은 일반적으로 온통 무늬장식을 넣어 도장을 찍은 무늬, 부조한 무늬, 도장틀 무늬가 특히 발달했는데 무늬장식이 자잘하게 많고 기술이 정교하여 주로 줄무늬, 곡선무늬, 깃털 무늬, 그물 무늬, 점선 무늬, 끈 무늬 등이 있다. 말기에는 모래를 섞은 도기(加砂陶)를 위주로 하는 것으로 변화했고 도기의 색깔은 황백색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진흙질의 황백색 테두리를 두른 도기에 전부 붉은 옷을 칠했다(즉, 소위 말하는 채도(彩陶)임).

무늬장식에서는 각종 구멍을 새기고 둥지를 따라 한 것이 많아지고, 도기의 형태는 여전히 세발 솥 모양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은 긴 목 단지(高領罐), 가마솥(釜), 제기(豆)등이 있었고, 세발 솥의 다리는 조기의 송곳(錐)모양, 부채(扇)모양을 제외하고도 물고기 모양, 혀 모양, 안으로 움푹 들어간 모양, 등이 볼록한 모양, 원기둥 모양 등이 비교적 많이 나타난다. 각종 무늬장식을 넣은 이렇게 많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기는 당시의 도기제작기술의 진보와 도기 제작업의 발달을 의미한다.

또한 도기 제작업의 발달은 바로 농업발달의 반영이다. 특별히 한 번 짚고 넘어갈 만한 것은 백도(白陶)와 함께 같은 시기에 쓰이던 세발 솥(鼎)의 출현은 오로지 상강 유역의 몇몇 유적지, 예를 들어 차릉현 독령요(獨岭坳)유적지, 상담시(湘潭市) 퇴자령(堆子岭)유적지, 장사현(長沙縣) 남탁(南托)유적지, 골라시(汨羅市) 부산원(附山園)유적지, 화용현(華容縣) 거고산(車軲山)유적지 등의 몇몇 지방에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며,

상강(湘江) 중하류지역의 동쪽으로는 강서(江西)의 몇몇 유적지, 서북쪽으로는 동정호(洞庭湖)지역과 장강 양안의 몇몇 유적지에서 세발 솥의 출현은 용산(龍山)시기 유적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이에 따라 필자는 염제 신농씨족이 상강 유역에서 이러한 문화를 제일 먼저 창조한 연후에 점차 사방으로 퍼져나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마산(磨山) 유적지: 이곳에서 발견된 집터와 가옥 유적도 매우 주목할만한 것으로, 집은 남쪽에 터를 잡고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간막이 벽 하나가 방을 앞뒤 두개의 방으로 나눈 연이어진 방으로 앞쪽(북)의 한 간은 넓이가 약 3.7미터이고 뒤쪽(남)의 한 간은 넓이가 약 4미터이며, 그 길이는 탐사하는 데 한계가 있어 알 수 없지만 넓이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라 추측된다.

중간의 간막이 벽에는 직경 35센티미터인 기둥이 5개 있고 방 안에는 3개의 기둥이 있으며 방 안에서 또 대나무 조각이 섞인 붉은 흙덩이가 발견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집이 원목(圓木)으로 트러스를 삼고 기둥 사이에 먼저 대나무 조각을 두르고, 대나무 조각 위에 진흙을 발라 구워 벽을 만들고 지붕 위에는 띠풀을 덮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렇게 정교하고 이렇게 넓은 집은 사람들의 생활의 안정과 수준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며, 물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비교적 발달한 농경문명의 상징이다. 보아하니 나필(羅泌)이 쓴 《로사(路史)》에서 염제 신농씨가 “사(沙)에 궁전을 짓고 장사(長沙)라고 했다( 盖宇于沙, 是爲長沙)”라고 한 것이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산 유적지 하층문화유적은 대계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대계문화는 장강의 중류를 가로 지르고 운몽(雲蒙) 남북을 세로로 관통하는 대문화권이다. “역사 전설과 고고학 문화를 종합해서 보면 염제부락 및 그 연맹만이 아마도 큰 강의 남북에서 이러한 광활한 문화권을 창조해낼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이러한 광활한 문화배경과 이렇게 심후한 문화의 내막만이 아무도 이러한 위대한 인물을 낳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33).” 마산 유적지 및 상강 중하류의 몇몇 유적지 중에서 세발 솥이 출현한 문화현상이 시사하는 것으로 볼 때 필자는 마산문화가 분명 상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일 것이라 생각한다.

상강 유역의 이러한 문화는 대계문화의 조류를 이끌던 핵심 문화이다. 만약에 진일보하게 이러한 문화현상을 염제 신농씨와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염제 신농씨의 부락에서 마산 및 상강 중하류 지역을 개발하고 마산 문화를 창업하였으며 염제 신농씨는 이러한 문화의 기치로써 그의 영향 하에 전체 장강문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은: 마산이라는 이 아름다운 오아시스이자 안정된 고향에서 마산 사람들은 대대로 살아 왔다. 이 점은 마산 유적지 하층문화유적에서 알 수 있다. 이곳의 상층유적은 용산 시기문화에 속하고 출토된 기물은 상향(湘鄕) 대자평(岱子坪) 유적지의 문화 면모와 뚜렷한 일치를 이룬다. 마산 문화는 줄곧 전체 상강 유역의 문화․장강문화와 같은 보폭으로 혹은 한걸음 앞서 발전했다.

1992년 11월에 당대의 저명한 문물 고고학자인 나철문(羅哲文) 선생이 영현 염제릉을 고찰해보고 감격에 마지않아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다. “염황은 모두의 시조이고, 남북으로 인문을 개시하여, 자손들이 모두 앙모하며 대대로 한 마음으로 합하였다(炎黃皆始祖, 南北啓人文, 子孫齊景仰, 世代結同心).” 전문가의 시는 전문가의 시답게 들끓는 격정이 있고 학술상의 참된 지식과 명철한 견해가 있어 삼가 이곳에 기록하여 본문의 맺음말로 삼았다. 1994년 9월 주주(株洲) 문경헌(問耕軒)에서.(작자는 주주 박물관 관장이며 부연구원임)




주석:
(1) 유지일(劉志一): 《장강문명은 중화문명의 선구다(長江文明是中華文明的先驅)》, 대만(臺灣) 《역사월간(歷史月刊)》 제 52기에 기록.
(2) 무서서(巫瑞書): 《염제릉 전설권 및 그 원시문화의 의의를 논함(論炎帝陵傳說圈及其原始文化意義)》, 《호남사범대학 사회과학 학보(湖南師範大學社會科學學報)》 1993년 제 3기에 기록.
(3), (11), (20), (24), (26), (27), (28), 나병생(羅炳生) 등: 《염제 신농씨의 전설고사(炎帝神農氏的傳說故事)》, 광명일보(光明日報)출판사 《염제와 염제릉(炎帝和炎帝陵)》에 기록.
(4), (5), (6), (12), (13), (14), (16), (17), (19), (21), (22), (23), (29) 조경장(曹敬庄) 주편: 《중국민간고사 집성 호남권 주주시 분권(中國民間故事集成湖南圈株洲市分卷)》에 기록.
(7) 《천강가화(天降嘉禾)》, 《중국민간고사 집성 호남권 가화현 자료본(中國民間故事集成湖南圈嘉禾縣資料本)》에 기록.
(8), (10), (29) 조경장(曹敬庄) 주편: 《주주문물명승지(株洲文物名勝志)》, 중국문사(中國文史)출판사 1991년판에 기록.
(9) 팽옥성(彭玉成): 《남악은 주조가 변한 것이다(南岳是朱鳥化的)》, 《중국민간고사 집성 호남권 형양시 분권(中國民間故事集成湖南圈衡陽市分卷)》에 기록.
(15) 염제와 보계(寶鷄) 과제조(課題組) 저: 《염제, 강염문화(炎帝、姜炎文化)》, 삼진(三秦)출판사 1992년판.
(18) 《중국민간고사 집성 호남권 침주지역 분권(中國民間故事集成湖南圈郴州地區分卷)》에 기록.
(25) 나병생(羅炳生), 산초(山樵): 《염제의 호남 영현에서의 전설(炎帝在湖南酃縣的傳說)》, 장강문예(長江文藝)출판사 《염제(炎帝)》에 기록.
(31) 진효화(陳曉華): 《염제시대 상동지역의 물질문명(炎帝時代湘東地區的物質文明)》, 인민(人民)출판사 《염제와 중화문화(炎帝與中華文化)》 1994년판에 기록.  
-End-




참고자료:
東夷民族論說--연변 송호상 저--  

동이민족 논설(東夷民族 論說)

☞ 출처 : http://chiwoo.org "치우학회"



4334년(서기2001년) 8월 27일 연변대학에서 있었던 제2회 치우학술대회 자료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 송호상씨는 동이민족의 유적을 찾아 중국전역을 3년반 동안 헤매었던 사람으로서,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등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사실임을 확인하신 분입니다. 중국 동포 학자들은 연구를 하지 못하고, 하지 않고 있는 상고시대의 유물을 자기 돈을 들여가며 확인한 결과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4334년 연변대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려고 했었다면서 내놓은 자료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게하는 글입니다 !


< 東夷民族 論說(동이민족 논설) >

                              길림성 연길시 개발구 송호상(0443-2856131)

고대 우리 민족에 대한 학술대회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나는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동이민족 문화, 즉 우리 조선민족의 옛 문화와 역사에 관련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선민족은 옛날 동이민족으로 이름을 날리었고, 동이민족은 일만년의 빛나는 유구한 문화와 역사가 있으며, 환국 제1조(桓國 第1朝)인 환인으로부터 천부삼인, 천신·지신·인신(天賦三印, 天神·地神·人神)의 삼신일체, 천부경 81자(三神一體, 天符經 81자)와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철학적 경전으로 이어져온 훌륭한 민족이나, 동족상잔과 외래침략으로 아직도 정통적인 올바른 국사하나 없는 민족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 조선민족의 책임이며 민족의 수치이므로, 일제의 왜곡된 식민지사관에서 벗어나 올바른 우리의 국사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진정한 역사의 과거를 알고 장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 사학자들의 급선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세의 사학자들은 왜곡된 역사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를 않으며, 재야학자들의 논설을 비판마저 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오늘날까지 그릇된 역사의 전통관념이 만연하여, 각종 종교는 없는 조상을 무조건 믿고 숭상하면서도 실존한 조상은 신화, 전설로 인식하여 서울에서는 서로가 골이 터지도록 싸우고 있으며, 이는 올바른 국사가 없는 탓이며, 따라서 사학자들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한 민족의 문화와 역사란, 기록된 고대 문헌과 고고의 물증, 시간, 장소 등이 확인될 때 비로소 정확하게 성립될 수 있으며, 만인의 공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그런데 현세의 사학자들은 문헌과 문헌의 이론적 연구만을 반복하여 현실 고증이 적은 史冊을 써왔기에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소생은 증거 있는 역사를 쓰고자 3년 반 동안 우리 동이민족 시조 역사의 발원지인 중국 땅 960만 ㎢의 넓은 광야 속에서 유적을 찾아 4만 2천km를 헤매면서 고고 관찰을 진행한 결과, 일만년(一萬年)의 동이역사가 어제의 일인 듯 허다한 새 발견과 문헌의 의문을 해결하였습니다.

① 배달환국 환웅시대의 제 14대 왕이었던 자오지 치우천황의 묘를 상고 문헌에 의하여 현재의 산동성 문상현 남왕진(山東省 汶上縣 南旺鎭)에서 발견하였으며, 그곳에 치우사당을 짓고 동상을 세우기로 1997년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금년 5월에는 이 문상현(汶上縣)에서 수리공사(水利工事) 중 석회암으로 된 길이 2.38m, 넓이 0.83m, 두께 0.31m의 '치우총(蚩尤塚)' 비석(사진1 : 입수즉시 게재예정)과 화강암에 석각된 된 길이 1.1m, 넓이 0.55m, 두께 0.15m의 '치우사' 표지석(사진2 : 입수즉시 게재예정)이 발견되었으며, 소생은 지난 8월 1일 제4차의 산동성 문상현 고찰과 함께 치우사와 동상을 수복하기로 협의서를 정식 작성하여 2002년부터 착수하기로 했습니다.

② 산동성 미산현(微山縣)에는 환웅시대 제5대 왕인 태호의(太 儀)의 아들인 복희(伏羲)씨 묘가 있고 '인론지시(人論之始)'라고 써여져 있으며, 지금은 신령을 모시고 있는 절당이 되었습니다.

③ 호남성 형산시(湖南省 衡山市)에는 동이족인 소전지자 염제신농씨 묘(小典之子 炎帝神農씨 廟)가 있고, '유구필응(有求必應)'이라는 문장에 그 역시 절당이 되어 있습니다.

④ 강소성 운운항(江蘇省 運雲港)에는 신라촌과 신라정(新羅村과 新羅井)이 있고, 천하제일서(天下第一書)라 하는 장군애암(將軍崖岩)에 있는 200여 평방미터의 암화(岩畵)에는 5000여년 전의 천문기상의 연구와 고대의 각종 석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⑤ 광동성 광주시(廣東省 廣州市)에는 제3대 환검(단군)의 현손{桓儉(檀君)의 玄孫}인 번우(番 )씨가 세운 번우국(番 國)이 지금의 번우시(番 市)로 되어있고, 광주(廣州)에서 200km 나가 신흥현 육조당(新興縣 六朝堂)에는 동이조상의 영상(靈像)을 모시고 있는 신라촌과 양씨촌(新羅村과 楊氏村)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비록 한족화(漢族化) 되었으나 조상은 고려(高麗)라고 대답합니다.

⑥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옛 한글)}는 조선의 한글이 세종대왕의 발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하 6m 깊이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문자는 C14 측정결과 거금 3850년 전의 것으로 확인하였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000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전 중국각지에는 동이민족의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음을 학자들이 공인하는 바이며, 하기에 동방의 역사는 동이선조 구환족(또는 구려족){九桓族(또는 九黎族)}의 문명사로서 만년(萬年)의 유구한 역사가 감숙성 돈황과 금악, 태백산 흑수, 요녕성 서납목론하(甘肅省 燉煌과 金岳, 太白山 黑水, 遼寧省 西拉沐 河)(또는 서요하西遼河, 서압록강西鴨綠江) 일대에서 발생·발전하였으며, 9000여 년 전 적봉시 오한기흥륭와(赤峰市 敖漢旗興隆 )에서 북경의 연산남북(燕山南北)을 중심으로 발전한 홍산문화(기저, 「홍산고국문화론」){紅山文化(己著, 「紅山古國文化論」)}가 있고, 산동성에는 후이, 북신(后李, 北辛) 문화 등 8000여 년 전의 동이족 역사를 증명하는 허다한 유물, 유적과 문헌이 있습니다.

동이민족의 연원을 말하자면 소련의 저명한 인류역사학자인 오과라기야부(奧科羅基耶夫)의 《인류의 발생과 이동》이란 논문에 의하면 "지금부터 만여 년 전에 파미르 고원에는 능가선무(能歌善舞)의 황색인종이 녹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 민족이 햇빛을 따라 동으로 이동하여 천산(天山)과 아이태(阿爾泰)산맥에 살았기에 아이태어계 족(阿爾泰語系 族)"이라 하며, 차츰 동으로 이동하여 바이칼(패가이 : 貝加爾)호, 몽고사막으로 분산(分散)한 그 일파가 9000여 년 전에 적봉시 오한기흥융와 보국토향(赤峰市 敖漢旗興隆  保國吐鄕)에서 살았고, 6000여 년 전에 적봉시 홍산(赤峰市 紅山)에서 홍산고국(紅山古國)(즉, 배달환국 桓國)을 세운 것이 환국 제2조(第2朝) 한웅시대로서 이 배달환국 문화가 홍산문화이며, 홍산문화 계열은 지금부터 8000여 년 전 흥륭와(興隆 )문화에서 - 홍산문화 - 하가점 문화까지 계속 발전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국가문물국이 고도로 중시하여 1993년 8월 14일∼24일간에 미, 영, 일, 대만 등 세계 11개국 100여명 학자들이 참가한 "중국북방 고대문화 국제학술연토회"를 적봉시(赤峰市)에서 개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이 문화가 동이족 토착인의 문화로서 동방고대 문화의 발원지이며 세계문명의 창시문화라고 학자들이 공인하였습니다.

동이족이 창립한 홍산(紅山)문화는 이집트나 바비론문화보다 근 2000년을 앞선 세계 태초의 문화였으나 그 발견이 늦어 세계사에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홍산(紅山)문화는 절대 신화나 전설이 아니며, 9500년 전 사람의 손으로 가공한 옥월(玉鉞)이 오한기 천근영자(敖漢旗 千斤營子)에서 발견된 이래, 8000년 전의 흥륭와(興隆 )문화로부터 시작한 유물과 유적은 전 중국 각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상고의 문헌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었다고 역력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이민족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므로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의 비준으로 '동이고국 전문(전업:專業)위원회'가 산동성 제령시(濟寧市)에 설치되었으며, 1998년 4월 28일∼31일간에 이 제령시에서 전국의 동이역사학자 30여명이 참가하여 창립 경축대회와 동이고국사연토회(東夷古國史硏討會)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동이민족은 9000년 전부터 중국 땅의 토착인으로서, 옛날에는 구환족(九桓族)(또는 구려족 : 九黎族)이라 하였고, 4700년 전 환웅시대 14대 왕 치우(蚩尤)의 전성시대 해양문화시기부터는 치우(蚩尤)족, 삼묘(三苗)족이라 불렀으며, 2700년 전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는 구이, 팔만, 칠융, 육적(九夷, 八蠻, 七戎, 六狄)의 민족으로 부르는 등 또다시 동서남북 이만융적(夷蠻戎狄)으로 갈라 수십 종의 민족명칭이 존재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구환족을 분해하여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종족명칭이었습니다. 동이민족을 말할 때 세계적으로 북극의 에스키모, 남미주의 인디안족이 다 동이족의 후칭이며, 중국의 조, 만, 묘, 려, 악륜춘, 악온극족(鄂倫春, 鄂溫克族) 역시 동이족의 후칭(後稱)입니다. 또한 중국의 삼황 - 천황·지황·인황 - (三皇 - 天皇·地皇·人皇 -) 이 동이족의 상고 시조이며, 환웅, 복희, 신농, 치우, 헌원, 고신, 환검과 요, 순, 우의 전체가 동이족의 선조였음을 고대문헌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이족의 습속(習俗) 특성을 말하자면, 옛날 어린아이의 베개를 돌, 모래로 베웠기에 뒷골이 납작하며, 소위 문신, 몸단장으로서 앞 이빨을 두대씩 뽑아버리기도 했고, 머리는 짧게 후에는 남녀 막론하고 외가닥으로 땋았습니다.

고고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수천 년 후에 남은 두골(頭骨)이 톱으로 베어버린 모양이라 거치형 두골(鋸齒形 頭骨)이라 하며, 이러한 두골(頭骨)은 요령성(遼寧省)과 산동성(山東省)에서 제일 많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상고 문헌에 동이민족은 쌍각지(雙脚趾)라 하여 새끼발톱이 두 조각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근세에 남경(南京) 남쪽 남향 우수산(南鄕 牛首山)과 구용시, 광동(句容市, 廣東) 사람들의 대다수, 강소성 일대 등의 한족들이 쌍각지(雙脚趾)인 사람이 많다고 하기에 각별히 조사한 결과 사실 흔히 볼 수 있었으니, 이들은 동이족이 동화된 한족으로 보여지며, 현재에도 역시 민족으로 말하면 100%라고는 못하나 조선족, 만족, 묘, 여, 악온극, 악륜춘족(朝鮮족, 滿족, 苗, 黎, 鄂溫克, 鄂倫春족) 등에 쌍각지( 雙脚趾)가 많았는데 역사의 기록대로 동이족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종족의 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같이 서기전 근 8000년 동안 중국 땅을 휘몰아치던 동이민족은 제1차 치우(蚩尤)와 헌원(軒轅)의 영토 분쟁, 제2차 후국(候國)인 서주(西周)의 상(商) 침략, 제3차 이상(夷商)의 전쟁 등 민족의 내부 분열과 동족 상전(相戰)으로 중화족에게 멸망을 면치 못하였고 차츰 한족화(漢族化)되었으나, '조상이 누구냐?' 물으면 고려(高麗)라 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땅에는 없애버릴 수 없는 수천 년 전의 역사 유물과 유적이 중국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지금 땅속 4∼5m의 깊이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이민족 역사의 발생지가 동방의 중국이며, 역사의 상고문헌이 중국에 있는 이상 올바른 역사를 찾으려면 그 발원지인 중국 땅에서 찾아야 설득력이 있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의 학자들은 국내에 있는 기존 사책(史冊)의 문헌만을 반복 연구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올바른 역사가 나올 수 없고, 심지어는 동이족이 조선족이 아니라는 일부학자들도 있으니 이런 성급한 결론은 삼가함이 좋을 듯 합니다. 중국의 허다한 고대 문헌에서 동이족은 조선족이라는 논설과 문장을 어렵잖게 볼 수 있으며, 내가 쓰고 있는 「동이민족사」에는 왜 동이족을 조선족이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학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일부의 학자들 중에는 왜곡된 역사를 조선어로 번역하여 자기의 저작인 것처럼 책을 출판하는 경우까지 있는데 참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학자들은 힘을 모아 올바른 민족사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불철주야로 쓰고 있는 동이사, 민족사, 고고사, 문화사 등은 내가 알든 모르든, 남이야 무엇이라 하건 말건 내 나름대로 쓰고 있으며, 우리 제2세가 없어지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니 여생의 숙원이라면 올바른 역사를 완성하여 후손에게 남기려는 것뿐입니다.

2001년 8월 20일
길림성 연길시 개발구 송호상(0443-285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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