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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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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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5.안록산(安祿山)과 맞선 당(唐)대의 명신(名臣) 안진경(顔眞卿)

안록산(安祿山)과 맞선 당(唐)대의


명신(名臣) 안진경(顔眞卿)



안록산의 난에 등장하는 중심인물 양귀비 양옥환.태어날때부터 옥가락지처럼 둥글고 풍만하게 생겼다 하여 옥환이라 했다. -구름은 그대 치마 모란은 얼굴인 듯 그대 소매 봄바람 난간을 스치고 머금은 이슬 오오, 양귀비여! 선녀 서왕모(西王母)의 군옥산(群玉山)에나 가야 만나랴 달밤의 요대(瑤臺)에나 가야 만나랴- 이백 <청평조사(淸平調詞)>
*일설에는 양귀비가 고구려 안시성 장군 양만춘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양귀비는 고구려의 원수를 갚으려고 당을 멸망시키려 하였으며 안록산과 뜻이 같으므로 안록산은 짐짓 양귀비를 양모로 모시겠다고 하자 황제가 허락하므로 먼저 양귀비에게 절하고 다음에 황제에 절하였다.
안록산(安禄山)은 영주유성(营州柳城)태생이며 胡인으로 본래성은 강씨이고 조상은 아사달이며 모친은 무당으로 돌궐에가서 살았다. 부친은 검모잠으로 고구려 포로들속에서 전투영웅(轧荦山,虏所谓斗战神者)으로 받들리운다. (검모잠이 보장왕의 외손자 안승을 내세워 부흥운동을 전개. 검모잠과 안승과의 알력싸움에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망명 보덕왕 작위받음)

안록산이 태여날때 밝은 빛이비추고 야수가 떠들면선 그 기상을 알렸다.(有光照穹庐,野兽尽鸣,望气者言其祥。-신당서기록에서) 범양절도사 장인원(范阳节度使张仁愿)이 이를 알고 군사를 풀어 려장(庐帐)을 수색하고 죽이려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숨겨주었으므로 죽음을 면하였다.
모친은 검모잠의 이름을 거꾸로 따서 잠모산이라고 이름지었다. 어려서 고아로 되였으므로 모친은 잠모산을 데리고 고구려 유민 장수 안연언에게(少孤,随母嫁虏将安延偃)재가하였다。개원초기에 안연언은 장군 안도매와 함께 돌궐을 떠나 당에 투항하였다.

영주(營州) 유역(柳域)의 호인(胡人:원래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인 검모잠 장군 아들로 강씨 성本姓康에서 성과 이름을 바꾸었다.-安禄山 本姓康。母阿史德-안록산의 실체Click here!)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 천보 6년(747)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興慶宮)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그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양귀비는그러한 안록산의 우람한 몸집을, 특히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한다.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곤 했다. 심지어 목욕이 끝난 다음에는 오색천으로 요람을 만들어 안록산을 어린애처럼 굴게 하고 그를 요람에 눕히기도 하였다. 수십명의 궁녀가 요람을 흔들어 양귀비 앞에 올 때 마다 안록산은 그녀를 "엄마" 하고 불렀다. 40대 후반의 아들을 둔 20대의 젊은 엄마, 그들은 아마도 변태적인 사랑을 좋아했던 것 같다. 한번은 안록산이 양귀비를 품에 안고 그녀의 신체 중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힘껏 비비자 뜻밖에 그녀의 젖가슴에 상처가 나게 되었다. 결국 현종에게 들통이 나지 않기 위해서는 붉은 비단 천으로 가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중국어로는 "허즈(诃子)" 또는 "뚜떠우(肚兜)"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브래지어의 시초"라고 한다.  /안진경 (顔眞卿 ; 709~785)은  중국 당(唐)나라의 서예가로서 자는 청신(淸臣)이며 산둥성[山東省] 낭야(琅邪) 임기(臨沂) 출생이다.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렸다. 남북조시대 이래로 그의 선조 가운데 안등지(顔騰之)·안지추(顔之推)·안사고(顔師古)·안근례(安勤禮) 등이 모두 고문자학(古文字學)을 연구했고 서예에도 뛰어났었다. 인척관계에 있던 은영명(殷令名)·은중용(殷仲容) 부자도 또한 당대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였다. 그리고 안진경은 "집안이 가난하여 종이와 붓이 없었으므로 담벽에다 황토로 연습하여 서예를 익혔으며, 해서(楷書)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안진경(顔眞卿)의 자는 청신(淸臣)이고 산동성 낭야(琅邪) 임기(臨沂) 출생이다.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렸다. 안진경은 역사깊은 문인 가문의 후손으로 그의 5대조 안지추는 육조시대를 대표하는 사대부의 한사람으로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저술했으며 4대조인 안사고는 당나라초기의 대학자로 반고의 <한서>를 주해했고 <오경정의 (五經正義)>를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이들 외에도 안씨 가문에서는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이 가문이 전통있는 학자 집안임을 인정하여 왔다. 안진경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고 박학하여 문장에 뛰어났다. 734년 안진경은 진사로 된후 742년에 과거에 급제해 현위(縣尉)로 되었다. 2년후 현위직에서 사임하고 낙양에 가서 장욱(張旭)한테서 서예를 배웠다. 안진경이 열심히 서예를 익혔기에 장욱은 자신이 장악한 모든 서예기법을 안진경에게 전수했다.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平原太守)가 되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맞았으며, 이때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朝廷)을 위하여 싸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헌부상서(憲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장(叛將)인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감금당하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것으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즉, 평론가들은 〈중흥송마애 中興頌磨崖〉·〈원차산비 元次山碑〉·〈송광평비 宋廣平碑〉·〈안씨가묘비 顔氏家廟碑〉 등과 같은 만년의 작품을 높이 친다. 〈제질문고 祭侄文稿〉의 필적, 〈제백부고 祭佰父稿〉· 〈쟁좌위 爭座位〉· 〈채명원 蔡明遠〉· 〈송류태충서 送劉太沖敍〉 등의 첩(帖)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면서도 급작스럽게 꺾이는 등 변화무쌍하며 전서체(篆書體)와 주문(文)을 겸비했다. 또한 스스로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어 한 획도 2왕(二王:王羲之·王獻之 부자)의 필체와 비슷한 것이 없었다. 소동파(蘇東坡)는 안진경의 서예와 두보(杜甫)의 시, 그리고 오도현(吳道玄)의 그림을 최고의 모범이 된다고 평했다. 안진경의 서예는 후대의 유공권(柳公權)·양응식(楊凝式)·소식·황정견(黃庭堅)·미불(米)·채경(蔡京)·조병문(趙秉文)·동기창(董其昌)·왕탁(王鐸)·유용(劉墉)·전풍(錢)·하소기(何紹基) 등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안진 경의 가문에서 만들어놓은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대부터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과거시험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다. 명(明)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 이르러서는 간행된 서책의 글자체가 모두 안진경체로 되었는데, 이른바 '노송체자'(老宋體字)로서 수백 년 동안 성행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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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전이 화청지에서 직접 촬영한 양귀비 족자.
지금의 섬서성 서안 임동(臨潼) 소재 화청지 정경과 화청지 앞의 양옥환 양귀비 상에서 한 컷. 당현종과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화청지 내부의 양귀비 목욕탕 해상탕(海常湯). 화청지의 뒤에 보이는 산은 리산(驪山)으로 여와궁이 있으며 유방이 강제노역을 하다가 도망간 곳이며, 장개석이 이 화청지 5칸방에서 집무하다가 수하장군 동북군벌 장작림 아들 장학량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이 뒤산으로 도망가 바위에 숨었다가 잡혀나와 유명한 모택동과의 국공합작에 서명한 곳이다. 또한 염제 신농씨의 한 부족 지파인 열산씨(烈山氏)의 최초의 발양지 역시 이 곳 섬서 임동(臨潼) 여산(驪山)으로 알려지고 있다.염제부락은 산과 들에 불을 놓아 먼저 불에 태우고 난 후 개간하는 원시 화전경작 농업 생산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열산(烈山)은 점차 그 분파 씨족의 명칭으로 진화되었다.열산씨의 ‘열(烈)’에 관하여는 고대 문헌 전적 중에 열(列), 려(厲), 뢰(賴) 등으로 써져 있기도 하다. 문자학의 각도에서 고찰해보면, 이 글자의 옛 음은 모두 같다. 따라서 《노사(路史)》를 주석한 나평(羅萍)은 열산씨(列山氏), 열산씨(烈山氏), 려산씨(厲山氏), 뢰산씨(賴山氏)는 명칭은 비록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사실 가리키는 것은 동일하다고 여겼다.





당(唐)대의 명신(名臣)이자 서예가인 안진경(顔眞卿)은 덕과 재능을 겸비하고 문무를 함께 갖추어 그의 일생에 관해서 매우 신비로운 색채로 물들게 되었다.
안진경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위었으나 다행히도 좋은 모친을 두었다. 모친에게 좋은 교육을 받고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책을 읽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마침내 당 현종(玄宗) 개원(開元)연간에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안진경이 18,9세 되던 해에 큰 병을 앓아 백일이 넘게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에 스스로를 북산군(北山君)이라고 하는 한 도사가 그의 집 문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도사가 선단(仙丹)을 꺼내어 그에게 복용하게 하자 그의 병이 즉시 좋아졌다. 도사가 안진경에게 말했다.

“너의 이름은 이미 선방(仙榜)에 올랐으니 스스로 알아서 잘 정리하여 절대로 벼슬 사회에 깊이 빠지지 말거라. 만약에 속세의 일을 벗어날 수 없다면 죽을 때 반드시 완전한 형체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득도하여 신선이 될 수 있어.”

도사는 말을 마치고 또 다시 그에게 선단을 한 알 주고 그에게 복용하게 하고는 재차 경고하였다.

“너는 절대로 자중해야 해. 백년 후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안진경은 벼슬길에 오른 후, 먼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맡았고 그 후에 계속 태자의 태사(太師)를 맡았다. 그러나 공무가 아무리 바빠도 안진경은 신선이 되는 도를 닦은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당시에 양국충(楊國忠)이 여동생 양귀비(楊貴妃)의 세력에 의지하여 조정에서 한 나라의 주인이라 자처하고 있었으나 안진경은 유달리 그의 모든 행동을 배척했다.

양국충은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기회를 틈타 그를 평원군(平原郡: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평원현(平原縣) 서남쪽)의 군수(郡守)로 좌천시켰다. 이와 동시에 안진경의 사촌형인 안고경(顔杲卿)도 상산군(常山郡)의 태수를 대리하게 되었다.

이때 안록산(安祿山)의 모반을 하려는 음흉한 야심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간파되었다. 안진경은 안록산이 장래에 반드시 모반을 할 것이라는 걸 예측하고 남몰래 저항할 준비를 했다.

그는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핑계로 평원성을 튼튼히 하고 성호를 넓히고 몰래 병사를 소집하고 말을 사들이고 양식을 비축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고 날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도처를 유람했다. 안록산은 안진경이 큰 뜻을 품지 않은 문약한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경계하지 않았다.

천보(天寶) 40년 11월에 안록산이 범양(范陽: 지금의 북경)에서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황하이북의 광대한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평원군만이 충분한 준비를 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12월 12일에 낙양(洛陽)이 함락되었다. 이어서 안록산은 군대를 지휘하여 서쪽으로 가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바짝 접근했다.

안록산의 부하 무관인 단지광(段之光)은 죽은 낙양 수장의 목을 가지고 평원군으로 와 투항을 권유하다가 안진경에게 죽임을 당했다. 안진경은 또 사촌형인 안고경과 연락하여 안록산의 측근 장흠주(蔣欽凑)를 살해하고, 안록산의 ‘내부’에 커다란 갈등이 빚어지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순간에 하북(河北)의 17개 군이 안진경을 맹주로 추대했고 병력은 모두 20만이 되어 빼앗겼던 땅을 많이 되찾았다. 후에 안록산의 반격으로 인해 안고경은 비명에 죽었고 안진경도 강요에 못 이겨 평원군에서 물러났다.

‘안사의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안진경은 조정에 의해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졌고 세상에는 ‘안노공(顔魯公)’이라 불리었다. 안진경은 관리로서는 청렴하고 공정했고 사람됨은 바르고 곧아서 줄곧 탐관오리들의 배척과 공격을 받았다.

당 덕종(德宗) 건중(建中) 3년, 회령(淮寧) 절도사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켰다. 재상(宰相) 노기(盧杞)가 안진경을 모해하기 위해 황제에게 건의하기를, 안진경에게 가서 이희열을 설득하게 하면 병졸 하나 없이도 능히 반란을 평정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진경은 당시에 이미 70여세였는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의연하게 여주(汝州: 지금의 하남 임여(臨汝) 일대)로 갔다. 이희열은 안진경이 온다는 말을 듣고 맞서기 힘들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안진경이 온몸에 바른 기운이 깃들어 있어 권세와 무력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고 부귀로도 현혹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기세로 그를 제압하기 위해 이희열은 그를 만날 때 수하의 천여 명에게 안진경을 단단히 에워싸게 하고 빛이 번뜩이는 커다란 칼로 위협을 더했으나 안진경은 불굴의 기상을 지니고 크게 소리쳤다.

“대 당나라 회령 절도사 이희열은 명령을 받아라!”

이희열은 안진경의 기세에 눌려 할 수 없이 안진경 쪽으로 걸어와 읍한 다음 그를 관역(館驛)으로 모시고 천천히 투항을 권하려고 준비했다.

이후에 이희열은 온갖 방법을 다 하여 안진경을 투항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위협을 하든 아니면 유혹을 하든 간에 모두 안진경의 질책을 받았다. 이희열은 안진경에게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을 보좌할 것을 요구했지만, 안진경은 이미 늙어 쓸모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희열은 사람을 시켜 정원에 마른 장작을 쌓아 놓게 하고 불을 붙인 뒤 안진경을 위협하며 말했다. “끝까지 투항하지 않는다면 불에 태워 죽이겠다!” 안진경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길을 향해 걸어갔다. 이희열 수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끌고 돌아왔다.

흥원(興元) 원년 8월 3일, 이희열은 최후의 날이 곧 올 것임을 예감하고 사람을 보내어 안진경을 교수형에 처하게 했다. 형이 집행되기 전에 안진경은 망나니에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수도를 했었는데, 수도한 사람들은 죽을 때 형체의 완전함을 중요하게 여긴다네. 자네가 만일 이 점을 도와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네.”

그는 말을 마치고 몸에 하고 있던 허리띠를 풀어 망나니에게 건네주었고, 망나니는 과연 그의 뜻에 따라 행했다.

이희열의 반란이 평정된 후에 안진경의 가족들이 그의 관을 경성으로 호송하여 안장하기를 바라여 경성에 분묘를 팠다. 관을 열고나서 사람들은 관은 이미 썩었지만 시체는 부드럽고 생기 있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고 사지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수염과 머리카락도 까맣고 주먹을 굳게 쥐어 벌리려 해도 벌릴 수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둘러서서 보던 사람들은 놀라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는 길에, 수행하던 사람들은 상여가 갈수록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고 안장할 지역에 도착해서야 그들이 호송한 것은 빈 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순간 거리와 골목의 이곳저곳에 이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졌다.(범사(范汜) (안원전의21세기 담론 )


안록산때 인물 고선지Click here!


참고;노씨는 문헌에 13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1본만을 수록하고 나머지는 미고이다. 노씨는 중국 주나라 건군공신 강태공의 후예가 제나라 노현에 봉해짐으로써 노씨라 했다 한다.우리나라 노씨의 시조 노수는 중국 범양사람으로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냈다.755년(신라 효성왕 14년)에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정착하여 우리나라 노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이 9명의 형제가 각각 본관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9형제가 광산(해), 교하(오), 풍천(지), 장연(구), 안동(만), 안강(곤), 연일(증), 평양(판), 고산(원)으로 각각 봉작된 바에 따라 본관을 삼고 각기 분관하였다. 그런데 이 9형제 중 광산노씨가 큰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교하, 풍천노씨도 각기 자기가 큰집이라고 보첩에 나타나 있어 다소 의견이 있는 것 같다. (1985년 경제기획원조사 가구수 : 48,742가구 인구수 : 260,067명)

*안록산은 고구려인이다. 구재용(인용Click here!

지나의 사서에서 보면 신당서에서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安禄山,营州柳城胡也,本姓康。母阿史德,为觋,居突厥中,祷子于轧荦山,虏所谓斗战神者,既而妊。及生,有光照穹庐,野兽尽鸣,望气者言其祥。范阳节度使张仁愿遣搜庐帐,欲尽杀之,匿而免。母以神所命,遂字轧荦山。少孤,随母嫁虏将安延偃。开元初,偃携以归国,与将军安道买亡子偕来,得依其家,故道买子安节厚德偃,约两家子为兄弟,乃冒姓安,更名禄山。及长,忮忍多智,善亿测人情,通六蕃语,为互市郎。

또 구당서에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였다.

安禄山,营州柳城杂种胡人也,本无姓氏,名轧荦山。母阿史德氏,亦突厥巫师,以卜为业。突厥呼斗战为轧荦山,遂以名之。少孤,随母貯厥中,将军安波至兄延偃妻其母。开元初,与将军安道买男俱逃出突厥中。道买次男贞节为岚州别驾,收获之。年十余岁,以与其兄及延偃相携而出,感愧之,约与思顺等并为兄弟,冒姓为安。及长,解六蕃语,为互市牙郎。斋

상기의 기록을 정리하면

1)안록산은 영주유성의 호족(고구려인 거란인등을 통칭한말)이며 성씨는 강씨이다.

2)어머니는 아사덕(아사달의 오기인것으로 안다-아사달은 단군전설에 나오며 중국사서에서는 아사덕으로 나온다)씨이며 무당으로 돌궐에서 거주하여 잘록산에서 잉태하였다.

3)안록산이 태여나자 당군을 곧 수색하여 안록산을 해치려하였다.안록산이 사료 기록대로 아버지가 불투명하다면 군대까지 동원하여 사살하려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필시 고구려의 왕족계열이 아니면 이진충 고사비 고중상의 봉기와 관련된 가족의 후예인것이다.

4)안록산의 모친은 안록산의 명을 보존하기위하여 돌궐로 망명하며 성씨도 안씨로 바꾼다.

5)안록산과 가까운 이광필은 거란인 이해락(이진충의 봉기시 변절한 이해고의 형제?)의 아들이며 어릴때 함께 나라의 복수를 꿈꾼다.그러나 이광필은 안사란때 병을 필계로 은퇴하는데 아마도 이해고가 변절한것과 자신의 혈연관계를 안것이 원인이 아닌가?

6)안록산은 군사를 일으킬당시 고선지의 도움을 청하지만 고선지는 망설이면서 시일을 끌다가 당나라에 사살된다. 고구려인인 고선지가 망설인것은 이광필과 마찬가지로 부친 고사계가 당에 귀순한 변절자임으로 추정되며 고사계는 고사비가 군사를 일으킬때 배반한것으로 추정된다.

7)안록산을 군사 일으키도록 적극 권고한 고상(또는 고불위라고도 한다)은 고씨성으로 안록산과 같이 부친은 전해지지않으며 걸식하여 생계하면서도“高不危宁当举事而死,终不能咬草根以求活耳!”(고불위는 군사를 일으켜죽을 지언정 풀뿌리먹으면서 살지 않겠다)고한다.

8)안사지변에 참여한 모든 장령들에 대한 기록은 일율로 고구려와 관련없는것으로 서술되였는데 사실 그들의 출생지가 고구려의 고토인 영주로 안록산등이 태여나기전까지 발해가 흥기한곳이며 보장왕과 그의 후손이 왕으로 분봉받은곳이다. 이는 당지인이 대부분 고구려의 유민임이 틀림없으나 고구려 관련이 전혀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안사지변은 고의적으로 사실을 숨긴 기록이며 안사지변이 그리 빨리 낙양까지 점령할수 있은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라 고구려부흥을 꿈꾼 고구려유민들의 지지로 이루어진것임이 틀림없다. 더우기 당시 당조는 중흥성세로 한족들의 반항에 불구하고 신속히 전승할수 있은것은 단순히 지나에서 주장하는 정권쟁탈이 아니라 고구려 부흥을 위한 민족독립투쟁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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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7. 청수조사(淸水祖師)  안원전   2005/02/18  4329
335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6.소진(蘇秦)과 장의(張儀), 손빈(孫臏), 방연(龐涓), 범려의 스승 귀곡자(鬼谷子)  안원전   2005/02/14  5614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5.안록산(安祿山)과 맞선 당(唐)대의 명신(名臣) 안진경(顔眞卿)  안원전   2005/02/02  5782
333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4.수(隋)나라 때 조주(趙州)의 돌다리와 신선 장과로(張果老)에 얽힌 목수, 미장이, 석공의 조사(祖師) 노반선사(魯班仙師)  안원전   2005/02/01  4578
332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3.서왕모와 태상노군(太上老君) 및 노자로 환생한 태상노군(太上老君)과 <도덕경>을 전한 윤희의 일화  안원전   2005/01/18  5480
331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2. 사악한 마귀를 없애는 도교의 호법신 흑제- 현무대제(玄武大帝)  안원전   2005/01/13  5538
330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1. 여우 낭자(狐女)와 결혼한 해섬자(海蟾子) 유조(劉操) 유해섬(劉海蟾)과 신선 정양자(正陽子)&패굉문(貝宏文)과 아보(阿保)  안원전   2005/01/03  5711
329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90. 요(堯)시절의 팽조(彭祖)와 팽성(彭城:산동성 바로 아래 경계 江蘇城 徐州市로 항우가 기두한 곳 大彭氏國의 수도), 무이구곡의 유래  안원전   2004/12/09  6757
328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89. 송(宋)나라 때 화정현(華亭縣)에 시악(施諤)이 사왕(蛇王)이 된 이야기  안원전   2004/12/02  4546
327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88. 도롱이 짚으로 질병을 치료한 송(宋) 대 하남성 회양(淮陽)의 하사의(何蓑衣)  안원전   2004/11/29  5188
32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87. 잡귀를 쫓아주는 신 종규(鍾馗)  안원전   2004/11/29  5776
325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86.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총신 우사(雨師) 적송자(赤松子)  안원전   2004/11/11  6204
324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85. 기행이적으로 조조를 농락한 좌자(左慈)  안원전   2004/10/27  6536
323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84. 신농(神農)의 신령이 나타나 백성들이 숭배하고 제사했다.4 파수용궁(破水龍宮)  안원전   2004/10/22  4721
322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83. 신농(神農)의 신령이 나타나 백성들이 숭배하고 제사했다.3 ‘왕(王)’자(字) 물고기로 은혜를 갚다.  안원전   2004/10/22  5453
321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82. 신농(神農)의 신령이 나타나 백성들이 숭배하고 제사했다.2 금계(金鷄: 별나라에 있다는 전설 속의 닭)가 손을 쪼다  안원전   2004/10/18  4302
320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81. 신농(神農)의 신령이 나타나 백성들이 숭배하고 제사했다.1 (1) 수주(水酒)의 ‘인과응보’  안원전   2004/10/13  4829
319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80.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과 교유한 ‘태식(胎息)’ 수면법의 대가 진단노조(陳摶老祖)  안원전   2004/10/07  10737
318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9.독초에 중독되면 차(茶)로 해독한 신농(神農)과 차경(茶經)의 저자 다신(茶神) 육우(陸羽)  안원전   2004/10/04  5740
317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8. 2500년 이전의 동주(東周) 시기 하남(河南) 낙양(洛陽) 주신(酒神) 두강(杜康)신화  안원전   2004/09/24  5191
316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7. 호남성 염릉현 염제릉 용뇌석(龍腦石)과 용조석(龍爪石)&장례식 장면 전설《염제릉사화(炎帝陵史話)》  안원전   2004/09/13  5422
315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6. 신농의 위덕-간사함을 없애고 비열함을 다스려 백성들이 따르다.4-신비로운 녹원(鹿原) 백로가 조문하다 [1]  안원전   2004/09/02  5197
314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5. 신농의 위덕-간사함을 없애고 비열함을 다스려 백성들이 따르다.3-머리를 써서 청와(靑蛙)를 단죄하다.  안원전   2004/08/26  4165
313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4. 신농의 위덕-간사함을 없애고 비열함을 다스려 백성들이 따르다.2-태씨(駘氏), 태악(太岳)의 아내 원강(元姜)과 간통하여 의형제 태악(太岳)을 죽인 사건을 교묘히 판단하다.  안원전   2004/08/23  4381
312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3. 신농의 위덕-간사함을 없애고 비열함을 다스려 백성들이 따르다1-간신 영신(佞臣)을 제거하다  안원전   2004/08/17  4608
311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2.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장강(長江:양자강)문명의 기치  안원전   2004/08/10  6950
310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1. 요귀 수괴 흑풍괴를 물리친 동이족 신농(神農)의 거문고  안원전   2004/07/26  5579
309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70 대륙향토사료에 보이는 염제와 적송자(赤松子)의 민간전설 [1]  안원전   2004/07/19  5380
308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69 대륙향토사료에 보이는 염제와 황제의 민간전설  안원전   2004/07/15  4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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