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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 차경석과 동학식민권력의 왜곡은 인물에 대한 왜곡으로부터 시작된다                                

  • 승인 2017.09.09 22:10




                                

보천교에 대한 글을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가장 먼저 주목해야만 하는 주제가 차경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차경석은 1880년 6월 1일 출생하였다. 경석(京石)은 자(字)이고 본명은 윤홍(輪洪)이며 호는 월곡(月谷)이었다. 그는 강증산이 세상을 떠난 1909년 이후 1910년대 일제강점기의 무단통치하에서 증산의 교의를 계승하여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자칭·타칭 600만 명이라는 많은 신도를 확보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보천교 교단을 성장시켰으나 식민권력의 집요한 공작으로 1925년 경 이후로 교단의 변화·쇠퇴의 길을 걷다가 1936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당시 언론(동아일보 19290724)에 기사화된 보천교주 차경석의 모습

 기록에 의하면, 차경석은 ‘1890년 1월부터 1901년 2월까지 정읍군 입암면 안경현(安京賢)이란 자 밑에서 한적(漢籍)을 배우고 1904년부터 1908년 3월까지 일진회 평의원이었다. 1907년 6월 16일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 주막에서 우연히 강증산과 만난 이후 그 문하에 들어가(차경석의 종교활동은 고판례가 주도한 선도교와 함께 진행되었고, 고판례는 증산의 부인이며 차경석의 이종누이이다) 훔치교에 귀의하여 교리의 연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1909년 음력 1월 3일 교통(敎統) 전례식(傳體式)을 하여 교도(敎道)를 전수받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차경석은 10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공부법인 한(漢)나라 서적을 탐독하였고, 19세기 후반기 국내외 정세에도 관심을 가져 동학에도 가입해 활동한 지역 엘리트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의 간부였던 차치구(車致九 1851-1894)였다. 차치구는 정읍시 입암면에서 출생하여, 동학혁명 당시 정읍지역의 접주로 2차 봉기에서는 농민군 5천을 이끌던 수령이었다. 보천교 연구를 주도해온 안후상 선생에 의하면, 차경석의 부친은 가난했지만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 완력을 사용하기도 한 당대 민초들의 영웅이었다(안후상, 2000).



그러나 혁명의 패망과 함께 1894년 12월, 차경석 15세 당시에 흥덕현감 윤석진에게 체포되어 불의의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차경석은 분살형(焚殺刑)이란 참혹한 형을 당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삼십리 길을 걸어 선산(족박산)에 모셨다. 이때 어린 차경석의 울분과 비통한 심정 그리고 앞날에 대한 굳은 의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차경석도 동학군의 장령(將領)이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안후상에 의하면, 부친의 한을 가슴에 품었던 차경석은 1899년 동학 농민군의 잔여세력이 조직한 영학당(英學黨)에 가담하여 함께 봉기를 일으켰고, 영학당의 패배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일진회의 동학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송병준과 이용구 등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자 결별하였다. 또 손병희를 따라 활동한 적도 있었으나 그와도 뜻이 맞지 않아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이처럼 동학을 신앙했던 차경석이 강증산을 만난 것은 1907년이다. 기록을 보면, 1907년 5월 아우 차윤경(車輪京)의 문제로 세무관과 송사(訟事)할 일이 있어 전주를 가던 차경석이 용암리 물방앗간 앞 주막에서 증산을 만나게 된다. 이때 증산도 김형렬의 집을 떠나며 “이 길이 길행(吉行)이라. 한 사람을 만나려 함이니 장차 네게 알리리라.”고 하여 의미심장한 언사를 하였다.




이후 차경석은 증산으로부터 다양한 종교체험을 하면서 제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차경석에게 전수한 종통에 대해서는 증산 사후 논란이 되었고 김형렬 등 다른 제자들과의 관계도 매끄럽지 못했다. 종통 여부는 본 글의 관심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제쳐둔다. 다만 부친의 사망 이후 집안 살림살이가 더욱 기울어 형편이 빈한했고, 나중 차경석이 증산을 만난 것에 대해서도 집안에서는 ‘동학한다고 집안이 망했는데 또 이상한 사람을 끌어들여 집안을 아주 망치려 한다.’고 불만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협량소담(狹量小膽)이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자. 차경석은 개인적으로 울분과 원대한 뜻을 품었다 할지라도 자신 주변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국가가 식민화되는 상황에서 아직 채 제도화되지 못한, 더욱이 교조의 사망으로 혼란스런 교단을 정비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계통의 교단을 제도화시켜야 할 종교가가 만난 운명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외부적으로는 ‘식민지’라는 상황과 내부적으로는 뚜렷한 후계자 없는 교단의 분열양상은 특정 종교가의 교단 형성에 분명한 장애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단을 형성하려는 인물이라면 투철한 사명감과 종교적 신념을 지녀야 했을 것이다. 그보다도 큰 배포가 없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식민권력의 왜곡은 인물에 대한 왜곡으로부터 시작된다. 식민권력의 보고서는 교주 차경석의 심성을 이렇게 비난하였다. ‘협량소담(狹量小膽).’ 곧 ‘속이 좁고 담력이 없다’고. 그리고 이러한 차경석의 속 좁은 것을 다양한 일화로 입증하려 했다. 예를 들어 이렇다. 어느 날, 교주 차경석이 많은 제자(방주)들을 성전에 모아놓고 잡담을 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점이나 교(敎)의 불비(不備)한 내용 등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해라’ 하고, 또 ‘직접 이야기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으면 서면으로 제출하라.’고 했다.




당시 이 말을 믿고 정직하게 많은 비행결점을 적어 낸 자들은 모두 교주의 반감을 샀다는 것이다. 특히 이상호는 교주로부터 절교(絶交) 선언과 탈퇴 처분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런 예를 제시하면서, ‘교주는 만사(萬事)에 속이 좁고 담력이 없어 충성·솔직한 자를 싫어하고 교언영색(巧言令色)의 간신배를 가까이 했다’고 평하였다. 위의 사례는 요즘 소위 군대에서 소원수리하고 난 뒤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을 비아냥거릴 때와 같은 모습이다.
 
교주 차경석의 인격에 대한 비난은 계속된다. ‘교주는 교도들이 성금을 납입할 때는 기뻐해도 성금 납입이 저조할 때에는 비관하고, 의식(衣食)이 궁핍한 교도(敎徒)들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금은옥보(金銀玉寶)를 산적하는데 사력을 다한다. 계전(戒典)에 들어 있는 남사·기의(濫奢·棄義)는 무시하여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식민권력의 의도를 충실히 대변했던 언론 및 모든 출간물들이 쏟아놓은 이미지였다.




당시 대중적인 언론이나 출판물 어느 하나 차경석과 보천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한 문구를 찾아보기 힘들다. ‘차천자(車天子)’나 ‘무식계급 사이에서 세력을 지닌 종교단체’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백귀가 난무하는 별천지의 미신소굴’ ‘차경석의 부하는 직업적인 주구배(走狗輩)’ ‘어리석은 민중의 고름으로 이룬 차천자(車賤子)의 요마전(妖魔殿)’ 등과 같은 비난들이 쏟아졌다.




심지어 당시의 제도화된 종교단체들과 지식인들이 기대하던 이미지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글쓰기에서도 이런 이미지는 계속되었다. 식민권력이 성공적으로 만들어놓은 이미지는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차경석 동숙기 기사 (중앙일보 1936년 6월)


과연 그럴까? 그러면 차경석 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 함께 울고 웃었던 자칭·타칭 600만 명의 조선의 민중들은 분별력이 없었던 ‘무식계급’이었던 것일까? 당시 전체 인구가 1,800만 정도였으니, 그렇다면 그 중 1/3이 무지몽매한 민중들인 셈이다. 식민권력의 주장대로 그들은 계몽해야 할 대상이었고 따라서 그들을 교육한 식민지배는 나쁘지 않았던 것일까?


속이 좁고 담력이 없다?



그러나 당시 다른 기록들은 식민권력의 기록과는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 “내가 정읍에 가기는 1923년 4월 중순경이다. <중략> 비록 현시대의 지식은 결여했다 하더라도 구시대의 지식은 상당한 소양이 있다. 그 외 엄격한 태도와 정중한 언론은 능히 사람을 감복케 할 만하다. 그는 한갓 미신가가 아니오, 상당한 식견이 있다. <중략> 그의 여러 가지 용사(用事)하는 것을 보면 제왕 될 야심이 만만한 것을 추측하겠다.”(비봉선인 1923) 자칭·타칭 600만 민중을 호령했던 인물에 적절한 표현이다. 또 선도회(禪道會) 초대 지도법사 이희익(李喜益. 1905-1990)의 면담 회고도 보인다. “차천자는 <중략> 몸은 뚱뚱하고 큰 상투에 대갓을 쓰고 얼굴은 구리빛으로 까만 수염이 보기 좋게 나 있었다. 그 풍채가 과연 만인의 장 같았다.”(박영재 2001) 전혀 다른 시선이다.




이러한 차경석의 성품을 드러낸 사례들도 다수 보인다. 1915년 어느 날 김송환(金松煥)의 아들이 차경석에게 돈을 요구하면서 만약 주지 않으면 교단에 손해를 보게 하겠다고 협박하는 일이 생겼다. 차경석은 이에 대해 “공갈위협을 하는 자에게는 내 비록 돈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았다 해도 한 푼도 줄 수 없다. 내 명(命)이 하늘에 있거늘 어느 놈이 감히 망언을 발설하느냐”고 일갈한다. 차경석의 기개와 배포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언술이다. 더군다나 어떠한 국가 제도적 보호 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식민지 상황에서 하늘에 근거를 두고 한 조직을 통솔했던 종교가다운 면모이다.




또 다른 일화도 찾을 수 있다. 1919년 10월 경 보천교의 60방주 조직을 만들 때의 일이다. 이때 60방주가 협의하여 차경석을 ‘선생’으로 추대해 숭배하려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차경석은 허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덕이 부족하여 스승의 자리에 오르기는 부당하니 내가 여러분들과 더불어 전과 같이 지내다가 이후에 우리들 중에 도덕이 숭고하여 스승의 자리에 모실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때 그 사람을 선생으로 숭배함이 좋을 듯하다.” 이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교주를 만날 경우에 ‘주인장(主人長)’이라 존칭하고, 서로 경대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상하의 구분이 없이 지내왔다. 이에 차경석은 아직 자신이 부족한 점이 많아 때가 아니라는 겸양지덕을 보여주며 이전과 같이 지내자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속이 좁고 담력이 없다’는 식민권력과 그를 중심으로 한 카르텔이 생성한 이미지와 부합하고 있는가? 나는 이 한 사례에서도 차경석의 당시 인품과 겸양의 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차경석의 도술’(축지법, 차력법, 호풍환우술, 둔갑장신술 등)을 운운하며 차경석과 그를 따랐던 사람들을 미신화시켜 버리는 식민권력의 언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교단을 이제 막 형성하기 시작한 어떤 종교가 치고 그런 신비스런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한데도 말이다. 총독부에서 만든 이미지를 정설로 삼아 검증도 않고 보천교 죽이기에 나선 식민권력 카르텔의 삐딱한 시선일 뿐이다.




역사 혹은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느냐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호사가적 관심으로 처리해버릴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 대한 이해가 현재를 구성하고 그것이 미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대로 평가도 받지 못한다면, 아니 평가받을 기회조차 놓쳐버린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종통 인사문제 6,7,8 월생 부연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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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 진주도수 *1954 갑오생 안경전이 매듭짓는 말복지도자 인물이 아니고 과도기 중복지도자인 천지공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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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1.천지공사의 최종 결론- 문왕추수 세살림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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