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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선조때 영의정 이산해와 작은 아버지 이토정&이덕형






*토정비결과 이지함의 묘 http://blog.daum.net/obk2030/6752269
http://segye.com/Service5/ShellView.asp?*[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⑤ 토정비결과 이지함의 묘SiteID=&OrgTreeID=1293&TreeID=1275&PCode=0007&DataID=200609271456000002
*土亭秘訣”은http://kimzzz.com.ne.kr/htry/leeg3.htm
*사주학 박사 1호 윤태현이 풀이하는 ‘사주와 인생’ 안영배<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ojong@donga.com http://blog.daum.net/les5026/9348899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012/nd2000120510.html
*한토마-허송세월님-사주공부하지마라 http://blog.naver.com/kordle/130008560809


선조때 영의정 이산해와 작은 아버지 이토정&이덕형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說話)가 있다.
이산해(李山海) 설화(說話) 즉 이산해 탄생담(誕生談)인 것이다. 이산해의 아버지인 이지번(李之蕃)이 명(明)나라에 사신이 되어서 갈 때, 산해관(山海館)에서 유숙하면서 집에 있는 부인과 동침(同寢)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지번의 부인도 같은 날 남편과 동침(同寢)하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이산해(李山海)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안에서는 이지번(李之蕃)의 부인을 의심하여 내치려 하였으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叔父)인 이지함(李之○)의 만류로 참았는데, 이지번(李之蕃)이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말해 부인의 결백(潔白)함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이 꿈꾼 곳의 이름을 따서 '산해(山海)'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화(說話)는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었고, 몽중(夢中) 행위가 현실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위대(偉大)한 인물(人物)에 결부된 신이(神異)한 출생담(出生談)의 성격을 가진다.
그 밖에도 이산해(李山海)와 본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후손이 창성하게 된 유래(由來)를 말한 풍수설화(風水說話) 등이 있다.

또한 한국대표(韓國代表) 야담사화(野談史話: 洪曉民 篇)를 보면,
『선조조(宣祖朝) 시대에 이산해(李山海)라는 분이 있었다. 그의 자(字)는 여수(汝受)요 호는 아계(鵝溪)다. 그의 아버지는 지번(之蕃)이요, 그의 작은 아버지는 이지함(李之○)으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하는 분이다. 말하자면 이산해라는 분은 이토정의 조카였던 것이다. 이산해는 마침 당년(當年)한 딸이 있어 그의 작은 아버지 되는 토정에게 사위감을 부탁하였다. 이토정은 이 때에 풍수설 이라던지 관상과 사주등 막힐 것이 없어 사위감을 부탁한 것이다.
이토정은 그의 조카에게 부탁받고 사위감을 고르러 다니는 판이었다. 하루는 종로의 큰 길거리로 시골서 서울로 올라오는 이사바리가 있었다.
그 이사바리 위에는 한 젊은 소동(小童)이 앉아 있는데 이 아이가 얼굴이 잘생기어 일견(一見)에 재상(宰相)감이었다.
이토정은 이사바리를 좇아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 이 집은 그 때에 행세하는 양반의 집이요 그 집의 사랑채에 시골서 먼촌 일가되는 사람이 와서 드는 판이었다. 이토정은 우선 시골서 올라온 사람과 인사를 청하니 그는 이민성(李民聖)이라는 분으로, 일찍이 지사를 지내다 낙향하였다가 다시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을 물으니 이덕형(李德馨)이라는 소년이었다. 이에 그 때에는 높은 재상으로 있는 이산해의 딸이 당년하여 사위를 고르는 판이니 그 집과 혼인(婚姻)함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민성(李民聖)이라는 분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요 워낙 궁한 판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살 수가 없어서 시골로 내려갔다가 시골서도 살 수가 없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그리 넉넉지도 못한 어느 일가집의 사랑채를 하나 얻어 드는, 바로 그날에 난데없이 청혼이 들어온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이지사는 이와 같이 적빈여세(赤貧如洗)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역시 이토정도 약간 대답이 나가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일이 아니오 자기의 조카의 일이니만큼 문지(門地)나 재산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다. 이토정(李土亭)은 우선 혼담(婚談)만은 어름어름 걸쳐놓고 한다름으로 자기의 조카에게로 왔다. 이공은 자기 작은아버지의 말을 듣고 문지나 재산이 없는 것을 알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토정(李土亭)은 그 소년을 한 번 보아나 달라고 하였다.
이산해는 이 말을 듣고 이덕형(李德馨)이란 소년을 가 보았다. 가서 보니 소년의 얼굴이 과연 동탕하고 잘 생기었다. 이에 이토정의 지인지감에 감탄하여 문지나 재산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모든 비용을 들여서 혼인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렇게 남녀간엔 인물도 잘 나고 볼 것이다. 이덕형 소년이 이 때에 누구나 보고 잘 생긴 소년이라고 하게끔 되어 드디어 이산해는 이 소년을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고도 의아하여 이토정에게 묻기를, 이소년이 나중에 어찌되겠느냐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소년이 나중에 벼슬이 어느 정도 가며 국가의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되겠느냐고 하는 물음이다.
이토정은 서슴지 않고 네 나이보다 먼저 정승을 할 것이다. 하고 한마디의 언질을 주었다. 과연 이소년은 속히 진사와 문과장원을 거치어 삼십일세에 대제학(大提學, 1591, 선조 24년)이 되고 삼십팔세에 영의정(領議政, 1602, 선조 35년)이라는 놀라운 영달을 하였다.
이분이 곧 누구냐 하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막역지우(莫逆之友)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 (명종 16)∼1613(광해군 5))이었던 것이다. 이 두 분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가장 그 난국을 잘 담당한 사람으로 이름난 공신(功臣)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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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선생

토정 이지함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얘기함에 있어 첫째로 언급해야 할 게 무얼까. 일단 그의 출생과 성장배경에서 출발하도록 하자. 선생은 중종 12년(1517) 충남 보령에서 출생했다. 고려말 삼은(三隱) 중 한 분인, 한산(韓山) 이씨의 시조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출생부터 범상치 않아 신비스러운 정기를 타고 났으며 신체조건이 보통사람에 비해 월등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어려서 조실부모했기 때문에 큰 형 지번(之蕃) 밑에서 글을 배웠다.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불행한 선비로 분류 된다. 큰 형의 과거급제가 우선 순위였고 막상 기회가 왔을 때는 사관(史官)이었던 친우 안명세의 죽음 으로 인한 실의때문이었다. 처가와 관련된 역모사건을 피해가기 위해 마포 강변의 집 뒤에 토굴을 파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서 거처했기 때문에 토정(土亭)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재조명이라는 낱말이 있다. 막연히 토정비결을 지은 도사 정도로 인식이 되어오던 그를 오늘날 '재조명'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한가지 단초는 야인으로 머물던 불행한 지식인이었음에도 세상을 향한 근심어린 애정을 끊임없이 발산했던 숨은 영웅이라는 것이다.
토정선생과 관련된 일화는 상당히 다양하다. 몇가지 예화를 통해 그의 따스했던 인품의 한 측면을 조망해보자. 어느 해 선생과 형제들이 모여 조부의 묘자리를 구하러갔다. 지관(地官)의 말은 당대에 당상관이 2명 정도 나올 명당이긴 하나 막내인 토정 선생의 자손에겐 불길한 터라는 것이다. 선생은 근심하는 형님 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희생양이 되기로 작정한다. "불길한 일은 제가 다 떠맡겠습니다. 이 자리로 결정하지요." 묘자리의 효과가 있었는지 과연 당대에 2명의 정승이 출현했다. 두 조카 산해(山海)와 산보(山甫)는 각각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제수받아 1품 정승의 반열에 당당히 올랐다. 반면, 선생의 네 아들은 불행히도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후일, 영의정이었던 이산해가 자신의 글 선생이기도 했던 토정 선생의 사후에 이렇게 회상한다. "재주는 충분히 한 시대의 질서를 바로잡을 만했으나 세상이 쓰지를 않았고, 지혜는 어둠을 낱낱이 밝힐 만했으나 세상사람이 알아주질 않았다."


선생의 딸이었던 산옥(山玉)이 어떤 연유로 문둥병으로 불리는 불치의 나병에 걸리게 되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딸과 함께 나환자촌으로 들어간다. 기(氣)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었던 도사였기 때문에 딸의 병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약재와 독극물을 통한 실험 끝에 생지네 즙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산옥은 부친의 지시대로 일광욕과 생지네즙을 복용하며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은 천형(天刑)에 걸린 딸의 장래를 염려하여 장차 신복(神卜)으로 만들 것을 결심한다. 각종 역학 비법과 단법 수련을 통해 실력을 길러 주었고 불멸의 저서인 월영도(月影圖)를 전수한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월영도는 탄생과 관련된 시간적 자료만으로 부모와 처의 성씨, 형제의 수, 고향, 수명 등을 알 수 있는 토정의 비전이다. 현재 전국에서 몇 안되는 사람만이 그 오의(奧義)를 깨달아 활용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오의의 내용은 신명(神明)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네 영(靈)은 기한(飢寒: 굶주림과 추위)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힘든 고행과 산상수행을 통해 피폐한 육체라야만 고도로 정제된 신명이 깃들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밝혀진 지혜라야 월영도의 한 자락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토정 선생은 백성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걱정한 실천궁행의 선비였다. 실학사상과 관련된 사상적 일면은 그가 시도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상업'의 장려와 물산의 흐름에 기반한 상업적 이익의 재분배과정에서 알 수 있다. 역학실력으로 천하를 주유했던 선생이 실학적 사유체계와 관계를 맺는 이유는 역학 자체가 가진 순기능 즉 현실적 개운(開運)을 담당할 수 있는 방법론적 측면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두 개 정도 살펴보자. 선생은 처가와 관련된 역모사건의 피해자로 한동안 벼슬과 인연이 없이 지내다가 선조의 등극 후 다시금 입지를 얻게 된다. 벼슬길로 나가게 된 것은 선조 6년(1573 년) 에 인재천거와 관련된 어명에 의해서이다. 탁행(卓行: 본받을 만한 뛰어난 행동)으로 인한 특채형식의 발탁이었던 셈이다. 종 6품에 해당하는 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발령받은 후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예견하여 제방공사를 벌려 많은 인명을 구한다. 그리고 고을 재정이 극도로 빈약한 것을 염려하여 임금께 상소를 올린다.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주(洋草洲)와 황해도 풍천부 초도정(椒島井)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재정을 충당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는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 이 건의를 묵살해버린다. 토정 역시 미련없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버린다.

3년 후, 다시 아산(牙山)현감에 제수되었다. 부임 후 초도 순시한 결과 유난히 걸식하는 거지들이 많았다. 현청 앞에 걸인청(乞人廳)을 꾸며 이들 거지들로 하여금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짜고 새끼를 꼬게 하였으며 대장장이 일도 배우게 하였다. 만들어진 생산물은 다음 장날에 팔아 쌀과 베로 거두어들이게 했다. 걸인청의 질서는 날로 자리를 잡아갔다. 늘어가는 걸인청의 수입은 춘궁기에 힘든 사람들에게 싼이자로 대부하여 주었다. 현실극복의 적극적인 개운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도 아산에 가면 당시 현청 앞의 걸인청 건물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스승없는 제자는 없는 법이다. 토정선생에게도 그를 이끌어준 당대의 쟁쟁한 스승들이 있었다. 도맥(道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인연줄을 훑어보기로 하자.

먼저 전우치(田禹治). 그는 선가(仙家)의 인물로 신출귀몰하는 신선술과 환술(幻術)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빈민구휼의 적극적 방법인 도적질을 통해 적선을 행했는데 왕명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이미 불사(不死)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지라 기름에 튀겨도 죽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직접 그린 나귀 그림을 타고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이런 인물에게 호흡법의 정수와 상대방의 마음과 이성을 꿰뚫을 수 있는 통신법(通神法)을 얻는다.

둘째,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도학자로 유명한 그의 밑에서, 후일 각 분야의 일가를 형성하는 허엽(許曄), 박순(朴淳: 좌의정을 지냈으며 서인의 종주), 차식(車軾) 등과 동문수학한다. 화담을 통해서 유학의 각종 경서와 주역, 천문, 지리, 수리, 역학 제분야 등을 공부하였다.


이외에도 토정선생의 시대에는 유가(儒家), 그리고 선가(仙家)를 통틀어 천재들이 명멸했던 시기였다. 고금을 통해 가장 무서운 적중율의 예언서로 인정받는 격암유록의 저자 남사고(南師古), 당대의 신복(神卜)이었던 홍계관(洪繼寬: 그는 어미 쥐의 뱃속에 든 새끼의 숫자까지 맞춘 사람이다), 유가(儒家)의 종주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그리고 당대의 문장가 송강 정철. 토정 선생은 이들과 한 시대를 호흡하며 진정으로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한 역학자요 실학적 기풍을 진작시킨 사회사상가로서 자리매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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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명  토정유고 (土亭遺稿)(15-16c)
  
간략서지  奎 570土亭 李之菡의 문집. 상하 2권‚ 부록‚ 합 2권 1책.
  
간략해제  원래 저자는 저술을 남기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가 후손이 어려워 글들이 흩어져 있었다. 李選(1632-1692)이 홍문관에서 선현들의 문집을 정리하면서 남은 원고들을 모아 한질을 완성하였다. 그후 현손인 李禎翊·李禎億과 외손인 趙世煥(1615-1683) 등 후손들이 이선이 정리한 초고를 바탕으로 집에 남아있던 원고를 참고하여 증보하고 교정하여 책을 완성하고‚ 宋時烈(1607-1689)의 발문을 받았으나 기사환국 등 정치적인 사건을 당하여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20년(숙종 46) 현손인 경주부윤 李禎翊이 다시 鄭澔(1648-1736)의 서문과 權尙夏(1641-1721)의 발문을 받고‚ 문집을 간행하게 된 경위를 담은 識를 붙여 임지인 경주에서 2권 1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규장각에는 목판본 <奎 570> 외에도 필사본인 <奎 11942>‚ <가람 古 819.52-Y419t> 등이 있으나 서문과 발문의 편집 순서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다. 본 해설에서는 <奎 570>을 대본으로 사용하였다.
  


    

편저자  이지함 (李之菡)
  
저자개요  1517-1578 (중종12-선조11)字: 馨伯·馨仲‚ 號: 土亭·水山‚ 本貫: 漢山‚ 父: 穉‚ 母: 光州 金氏
  
저자내용  1517년(중종 12) 보령 청라에서 태어났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가 풀려나 의금부도사를 지낸 아버지 李穉가 1530년에 죽은 뒤‚ 형 李之蕃(?-1575)과 徐敬德(1489-1546)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뒤에 宗室인 毛山守 李呈琅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충주 주변에 살며 다양한 책을 읽으며 학문에 힘쓰고 과거 시험 준비도 하였으나 科場에 나가서 과거를 포기하였다. 1549년(명종 4) 李洪胤 역모사건에 연루된 처가의 화를 1년 전에 예상하여 가족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가서 자신은 화를 면하였다. 이후 서울 주변의 마포와 보령을 근거지로 전국을 유람하며 민생의 어려움을 경험하였다. 1573년(선조 6) 崔永慶(1529-1590)‚ 鄭仁弘(1535-1623) 등과 함께 조정에 유일로 천거되어 종6품직을 제수받았다. 1574년 포천현감으로 있을 때 봉사를 올려 은광의 채굴과 염전의 개발을 강조하는 등 末業을 중시하는 사회경제 정책이 담긴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였다. 1578년 다시 추천을 받아 아산현감에 임명되어 재직 중에 乞人廳을 만들어 유리하는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또한 백성들이 군역 부담에 시달리는 것을 지적하고 軍額을 줄이고 일족을 침탈하는 피해를 금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책을 상소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土亭이란 호에서 알 수 있듯이 평소 마포 강변에 허름한 집을 짓고 학자들과 교유하며 학문연구‚ 제자 양성에 힘썼다. 성리학 외에 천문지리와 醫藥‚ 卜筮‚ 算數에 이르기까지 관심이 다양하였으며 風水 등에도 능해 뒤에 方外之士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李珥(1536-1584)·成渾(1535-1598)·鄭澈(1536-1593)·李恒福(1556-1618)·崔永慶·李潑(1544-1589) 등 서인과 북인계 인사들과 당색을 넘어서 교유하였으며 趙憲(1544-1592)과 徐起(1523-1591) 등의 제자를 길러내었다. 조카인 李山甫(1539-1609)와 함께 향리인 보령 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土亭秘訣≫의 저자라는 설도 있으나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내용제목  土亭遺稿 내용개요  청구기호  奎 570
  

권수 권제목:


제목 없음. 鄭澔가 찬한 서문. 李之菡은 墨에 매이지 않고 方外에 의지한 사람으로 卓絶高遠하여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며 자품이 심히 높고 氣度가 범상하지 않다. 학문은 사승이 없으나 宏博하여 天文地理‚ 醫藥卜筮‚ 律呂算數에서 神方秘訣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데가 없다.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였다. 趙憲은 마음이 맑고 욕심이 적다하여 李珥와 成渾과 함께 병칭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이가 그를 奇花異草라고 한 비유를 들어 세상에 쓰기 어려운 재주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취가 성긴 것을 논한 것일 뿐‚ 誄文의 찬사나 朴淳(1523-1589)·高敬命(1533-1592)·李珥·成渾·尹根壽 (1537-1616)·鄭澈 등과의 교유관계나 그가 길러낸 李山甫·趙憲·徐起 등의 제자를 통해 볼 때 세상을 잊고 마음이 物外에서 노닌 자로만 볼 수 없다. 邵雍과 같이 不純한 점은 있지만 經濟一世는 탁월하다. 저술이 남아있지 않으나 陶潛의 歸去來辭에 차운한 것이나 寡欲說‚ 牙山‚ 抱川 현감 시절의 封事에서 베풀어 조치하려는 단서를 볼 수 있다. 후손 李禎翊 등의 요청에 따라 선배들의 논의를 들어 이같이 문집 서문을 찬술한다는 내용이다.  




권제 권제목:卷上


詩 次宋雲長-翼弼-韻  


次陶靖節歸去來辭 (1)  陶潛의 歸去來辭에 次韻하여 形氣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좋아하는 바를 좇아 천하를 주유하며 살아가겠다는 내용이다.  


大人說 (2)  사람은 안으로는 신령스럽고 강하기를 원하며 밖으로는 부귀를 원한다. 그런데 알지 않고서도 신령스럽고‚ 다투지 않고도 강할 수 있고‚ 하고자 하지 않아도 부유할 수 있고‚ 벼슬하지 않고서도 귀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大人만이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避知音說 (2)  선비들의 멍에는 知音(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친구)으로 말미암았다며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불러올 재앙을 경계한 글. 知音이 되어 알려진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모두 재앙의 근원이 되었음을 역사적인 인물들의 예를 열거하여 밝히고‚ 보통 사람들은 知音이 되기를 원하지만 賢者는 지음이 되기를 피한다며‚ 서로 만나서 재앙이 되지 않는 것은 山水나 田野의 知音일 뿐이라고 경계하는 내용이다.  


寡慾說 (3)  마음을 기르는데는 욕심을 적게 가져 無欲의 단계에 이르고 마음을 비워 과욕에서 中和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을 논한 다음 물욕에 가려 해치는 자는 많고 욕심을 줄이는 것도 어려운데 어찌 욕심이 없어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며 반어적인 표현으로 욕심을 줄이는 것을 논하는 내용이다.  


涖抱川時上疏 (3)  포천현감으로 재임시 올린 상소문. 포천에 부임한 뒤 어떤 자가 어미 없이 구걸하다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을 말하고 이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당시 포천에 남아있는 官租 5천석 중 종자와 貢賦로 낼 나머지는 1천여석 뿐이며 그나마 길을 지나는 변장과 야인들의 왕래에 드는 비용 등을 계산하면 관에서 가지고 있는 元穀이 몇 년 안에 바닥이 날 상황이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 조정에 쌀을 청하는 것은 항구적인 계책이 되지 못한다. 제왕에게는 인심이라는 도덕의 창고‚ 銓曺(인사권)라는 인재의 창고‚ 百用의 창고인 바다와 육지 등 3가지의 府庫가 있다. 好生之德(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을 가져 도덕을 가로막을 形氣의 사사로움도 없애고‚ 솔선하여 창고를 열고 인심이 서로 도와 창고를 열도록 함이 상책이요‚ 망녕된 신하를 막아 적재적소에 각자의 재주에 따라 人材를 수령에 등용함이 중책이다. 산림천택을 백성과 공유하고 바다와 육지에서 은을 주조하고 옥을 캐며 고기를 그물질하고 소금을 구워 민생을 구제하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은 아니지만 성인의 권도라고 할 수 있다. 도덕의 창고를 열고 닫는 것은 堯舜과 桀紂에서 볼 수 있으며‚ 인재의 등용은 좋은 매는 사냥을 잘하는 것이지 닭처럼 새벽을 알리게 하면 그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각기 그 재주에 맞게 부려야 한다. 길거리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부녀와 어린아이를 보고서도 어찌 곳곳에 있는 것들을 아깝게 여겨 금하겠는가. 公私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全羅道 萬頃의 洋草 어장과 황해도 豐川의 椒島 鹽井을 임시로 포천에 소속시켜 고기잡고 소금 구워 민생을 돕도록 해주고 고을이 자급하게 되면 이것을 다른 고을에 넘겨 그곳의 민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義로 말하지 않고 利로써 말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德은 本이요 財貨는 末이지만 본말 어디에 치우쳐서는 안되며 本으로 末을 제어하고 末로 本을 돕도록 해야 하니‚ 포천의 경우 本이 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니 염철로 보충하여 민생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며 건의하는 내용이다.  


涖牙山時陳弊上疏 (12)  아산 현감 시절에 올린 상소문. 아산에 부임해보니 簿牒의 번거로움이 다른 지역의 배가 되어 백성들 사오백명이 呈訴하였다. 이는 사람이 많거나 풍속이 악해서가 아니라 지난 계축년의 군적시에 良丁을 수괄하면서 늙고 병든 이들로 양정을 억지로 늘린 것이 다른 곳의 배가 되며 늘어난 餘丁들은 다른 관청으로 옮겨졌다. 갑술년에 군적을 고치면서도 이것을 고치지 못해 毒疾이 있는 이나 칠십이 넘은 이도 군적을 면제받지 못하는 이가 있으며‚ 그 몸은 없는데 그 일가에 역가를 징수하고 일족이 이미 番을 서고 있는데도 番을 서며‚ 여자들은 일족의 布를 내어 남녀가 안팎에서 울고 농사가 때를 잃어 백성들이 유리하는 지경으로‚ 항의하는 백성이 이미 한 고을에서만 천여명에 이른다. 이것이 전국적으로는 또 얼마이겠는가. 사족들마저도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상황이니 서민들은 어떻겠는가. 팔도에 명해 그 戶數를 덜어 내고 軍額을 감하여 병사의 적음을 걱정하지 말고 병사들이 虛疎하게 되는 것을 충실히 해야 한다. 魏와 秦의 전쟁에서 위나라가 가족이 함께 군인인 자 중에서 병사 2만을 고향으로 보내어 적은 병사들로 진의 많은 군대를 물리친 고사도 있다. 이제 각종 역이 너무 번다하고 일족을 침탈하니 군액을 감하고 일족의 부담을 면제해주어야 한다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土亭先生遺事 (1)  李珥의 ≪石潭日記≫‚ 李廷馨(1549-1607)의 ≪東閣雜記≫‚ ≪南冥師友錄≫‚ ≪朴玄石師友錄≫‚ ≪政院日記≫ 등의 저술과 李恒福‚ 安邦俊(1573-1654)‚ 趙憲의 아들인 趙完堵 등의 기록에서 뽑아 모은 李之菡의 언행과 그에 대한 일화를 모은 글. 특히 이이의 ≪石潭日記≫에서 뽑은 글들이 많다. ≪석담일기≫에서는 李之菡이 젊어서 아버지를 海曲에 장사지낸 후 천백년 후 潮水가 묘를 삼킬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방축을 쌓은 일‚ 포천현감 시절 魚梁을 折受하여 고기를 잡아 곡식을 바꾸어 민생을 돌보기를 청했던 일‚ 이이와 만나 학문과 출처에 관해 해학을 섞어 이야기한 것‚ 主敬窮理를 위주로 하는 학문 태도로 여색을 멀리하고 형 李之蕃 사후 3년간 스승의 예로 心喪을 치른 일‚ 성리학에 전력하라는 권유를 끝내 거절하여 이이에게 奇花異草라는 평을 들었던 일들을 뽑았다. 제자인 조헌과의 일화들도 있는데‚ 조헌이 이지함을 평가하면서 이이와 성혼과 학문은 달랐지만 욕심없는 마음과 행동은 같았다고한 것이나‚ 이지함의 청렴결백한 생활‚ 교유관계와 많은 제자 양성을 들어 추장해주기를 청한 상소‚ 李之菡이 천문에 밝아 별을 보고 전란을 예견했다는 기록 등이 눈에 띈다. 조헌의 아들 趙完堵와 安邦俊 등이 기록한 조헌과의 일화들도 실려 있다. 그 외에 충청도 해상에서 만난 異人 徐致武와 徐起에 대한 李之菡의 칭찬(李恒福의 기록)‚ 서경덕 문하에 드나들 때 아녀자의 집요한 유혹을 물리친 일(朴世采 師友錄의 기록)‚ 遺逸로 뽑혀 관직에 추천될 때의 상황‚ 그의 검소한 생활과 굶주린 백성들에게 스스로 짚으로 짚신을 삼아 팔아 어려움을 이기는 모범을 보인 일‚ 해남에서 만나 서로를 허여한 李潑과의 관계를 보여준 일화들이 실려있다.  




권말 권제목:附錄


詩 次宋雲長-翼弼-韻  


次陶靖節歸去來辭 (1)  陶潛의 歸去來辭에 次韻하여 形氣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좋아하는 바를 좇아 천하를 주유하며 살아가겠다는 내용이다.  


大人說 (2)  사람은 안으로는 신령스럽고 강하기를 원하며 밖으로는 부귀를 원한다. 그런데 알지 않고서도 신령스럽고‚ 다투지 않고도 강할 수 있고‚ 하고자 하지 않아도 부유할 수 있고‚ 벼슬하지 않고서도 귀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大人만이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避知音說 (2)  선비들의 멍에는 知音(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친구)으로 말미암았다며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불러올 재앙을 경계한 글. 知音이 되어 알려진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모두 재앙의 근원이 되었음을 역사적인 인물들의 예를 열거하여 밝히고‚ 보통 사람들은 知音이 되기를 원하지만 賢者는 지음이 되기를 피한다며‚ 서로 만나서 재앙이 되지 않는 것은 山水나 田野의 知音일 뿐이라고 경계하는 내용이다.  


寡慾說 (3)  마음을 기르는데는 욕심을 적게 가져 無欲의 단계에 이르고 마음을 비워 과욕에서 中和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을 논한 다음 물욕에 가려 해치는 자는 많고 욕심을 줄이는 것도 어려운데 어찌 욕심이 없어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며 반어적인 표현으로 욕심을 줄이는 것을 논하는 내용이다.  


涖抱川時上疏 (3)  포천현감으로 재임시 올린 상소문. 포천에 부임한 뒤 어떤 자가 어미 없이 구걸하다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을 말하고 이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당시 포천에 남아있는 官租 5천석 중 종자와 貢賦로 낼 나머지는 1천여석 뿐이며 그나마 길을 지나는 변장과 야인들의 왕래에 드는 비용 등을 계산하면 관에서 가지고 있는 元穀이 몇 년 안에 바닥이 날 상황이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 조정에 쌀을 청하는 것은 항구적인 계책이 되지 못한다. 제왕에게는 인심이라는 도덕의 창고‚ 銓曺(인사권)라는 인재의 창고‚ 百用의 창고인 바다와 육지 등 3가지의 府庫가 있다. 好生之德(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을 가져 도덕을 가로막을 形氣의 사사로움도 없애고‚ 솔선하여 창고를 열고 인심이 서로 도와 창고를 열도록 함이 상책이요‚ 망녕된 신하를 막아 적재적소에 각자의 재주에 따라 人材를 수령에 등용함이 중책이다. 산림천택을 백성과 공유하고 바다와 육지에서 은을 주조하고 옥을 캐며 고기를 그물질하고 소금을 구워 민생을 구제하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은 아니지만 성인의 권도라고 할 수 있다. 도덕의 창고를 열고 닫는 것은 堯舜과 桀紂에서 볼 수 있으며‚ 인재의 등용은 좋은 매는 사냥을 잘하는 것이지 닭처럼 새벽을 알리게 하면 그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각기 그 재주에 맞게 부려야 한다. 길거리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부녀와 어린아이를 보고서도 어찌 곳곳에 있는 것들을 아깝게 여겨 금하겠는가. 公私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全羅道 萬頃의 洋草 어장과 황해도 豐川의 椒島 鹽井을 임시로 포천에 소속시켜 고기잡고 소금 구워 민생을 돕도록 해주고 고을이 자급하게 되면 이것을 다른 고을에 넘겨 그곳의 민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義로 말하지 않고 利로써 말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德은 本이요 財貨는 末이지만 본말 어디에 치우쳐서는 안되며 本으로 末을 제어하고 末로 本을 돕도록 해야 하니‚ 포천의 경우 本이 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니 염철로 보충하여 민생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며 건의하는 내용이다.  


涖牙山時陳弊上疏 (12)  아산 현감 시절에 올린 상소문. 아산에 부임해보니 簿牒의 번거로움이 다른 지역의 배가 되어 백성들 사오백명이 呈訴하였다. 이는 사람이 많거나 풍속이 악해서가 아니라 지난 계축년의 군적시에 良丁을 수괄하면서 늙고 병든 이들로 양정을 억지로 늘린 것이 다른 곳의 배가 되며 늘어난 餘丁들은 다른 관청으로 옮겨졌다. 갑술년에 군적을 고치면서도 이것을 고치지 못해 毒疾이 있는 이나 칠십이 넘은 이도 군적을 면제받지 못하는 이가 있으며‚ 그 몸은 없는데 그 일가에 역가를 징수하고 일족이 이미 番을 서고 있는데도 番을 서며‚ 여자들은 일족의 布를 내어 남녀가 안팎에서 울고 농사가 때를 잃어 백성들이 유리하는 지경으로‚ 항의하는 백성이 이미 한 고을에서만 천여명에 이른다. 이것이 전국적으로는 또 얼마이겠는가. 사족들마저도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상황이니 서민들은 어떻겠는가. 팔도에 명해 그 戶數를 덜어 내고 軍額을 감하여 병사의 적음을 걱정하지 말고 병사들이 虛疎하게 되는 것을 충실히 해야 한다. 魏와 秦의 전쟁에서 위나라가 가족이 함께 군인인 자 중에서 병사 2만을 고향으로 보내어 적은 병사들로 진의 많은 군대를 물리친 고사도 있다. 이제 각종 역이 너무 번다하고 일족을 침탈하니 군액을 감하고 일족의 부담을 면제해주어야 한다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土亭先生遺事 (1)  李珥의 ≪石潭日記≫‚ 李廷馨(1549-1607)의 ≪東閣雜記≫‚ ≪南冥師友錄≫‚ ≪朴玄石師友錄≫‚ ≪政院日記≫ 등의 저술과 李恒福‚ 安邦俊(1573-1654)‚ 趙憲의 아들인 趙完堵 등의 기록에서 뽑아 모은 李之菡의 언행과 그에 대한 일화를 모은 글. 특히 이이의 ≪石潭日記≫에서 뽑은 글들이 많다. ≪석담일기≫에서는 李之菡이 젊어서 아버지를 海曲에 장사지낸 후 천백년 후 潮水가 묘를 삼킬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방축을 쌓은 일‚ 포천현감 시절 魚梁을 折受하여 고기를 잡아 곡식을 바꾸어 민생을 돌보기를 청했던 일‚ 이이와 만나 학문과 출처에 관해 해학을 섞어 이야기한 것‚ 主敬窮理를 위주로 하는 학문 태도로 여색을 멀리하고 형 李之蕃 사후 3년간 스승의 예로 心喪을 치른 일‚ 성리학에 전력하라는 권유를 끝내 거절하여 이이에게 奇花異草라는 평을 들었던 일들을 뽑았다. 제자인 조헌과의 일화들도 있는데‚ 조헌이 이지함을 평가하면서 이이와 성혼과 학문은 달랐지만 욕심없는 마음과 행동은 같았다고한 것이나‚ 이지함의 청렴결백한 생활‚ 교유관계와 많은 제자 양성을 들어 추장해주기를 청한 상소‚ 李之菡이 천문에 밝아 별을 보고 전란을 예견했다는 기록 등이 눈에 띈다. 조헌의 아들 趙完堵와 安邦俊 등이 기록한 조헌과의 일화들도 실려 있다. 그 외에 충청도 해상에서 만난 異人 徐致武와 徐起에 대한 李之菡의 칭찬(李恒福의 기록)‚ 서경덕 문하에 드나들 때 아녀자의 집요한 유혹을 물리친 일(朴世采 師友錄의 기록)‚ 遺逸로 뽑혀 관직에 추천될 때의 상황‚ 그의 검소한 생활과 굶주린 백성들에게 스스로 짚으로 짚신을 삼아 팔아 어려움을 이기는 모범을 보인 일‚ 해남에서 만나 서로를 허여한 李潑과의 관계를 보여준 일화들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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